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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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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군이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유엔군 측 인원들을 공격하여 미군 장교 2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사건 발생 전 미루나무가 유엔군 초소의 시야를 가리자 가지치기 작업을 하려 했으나, 북한 측의 반대로 갈등이 있었고, 작업 중 북한군이 도끼 등으로 무력 공격을 가했다. 이에 미국은 대규모 군사 작전인 폴 버니언 작전을 통해 무력 시위를 벌였고, 북한은 김일성 명의의 유감 표명을 했다. 이 사건으로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군사 분계선이 설정되고 양측의 경계가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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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사건 개요
사건의 발단이 된 문제의 미루나무
사건의 발단이 된 문제의 미루나무
날짜1976년 8월 18일
시간UTC+09:00 기준 오전 10시
위치판문점 근처
원인미루나무 벌목 시도
참여자조선인민군 성명불상
결과폴 버니언 작전 발동으로 사건에 대한 미국 측의 보복
인명 피해
보고된 사망자주한미군 2명
기타 정보
명칭
한국어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한자板門店 도끼 蠻行事件
영어Axe Murder Incident
다른 한국어 명칭포플러 사건

2. 사건의 발생

사건 당시의 모습. 이 사진에는 마크 배럿 중위가 찍혀 있지 않다. 배럿 중위로 잘못 알려진 인물은 진 비클리(Gene Bickley) 하사이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경,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처에서 유엔군사령부(UNC) 소속 인원들이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시작했다. 이 미루나무는 높이 자라 유엔군 제5관측소의 시야를 가려 북측 초소와 비무장지대 감시에 어려움을 주고 있었다.[22]

작업에는 주한 미군 경비중대장 아서 조지 보니파스( Arthur George Bonifaseng ) 대위와 소대장 마크 토머스 배럿( Mark Thomas Barretteng ) 중위를 포함한 미군 장병 6명, 대한민국 국군 장교 1명과 병사 4명 등 총 11명의 경비 병력과 한국 지원단(KSC) 소속 노무자 5명이 참여했다.[26][3] 당시 공동경비구역 규정상 무장 인원이 제한되어 있었기에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는 개인 화기를 소지하지 않았다.[3]

작업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인민군 박철 중위를 포함한 북한군 17명이 현장에 나타나 작업 중지를 요구했다. 박철 중위는 미군들 사이에서 과거 대립 상황으로 인해 "불독 중위"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인물이었다.[4] 보니파스 대위는 미루나무가 유엔군 관할 지역에 있으므로 작업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고, 북한군의 요구를 거부하며 작업을 계속 지시했다.[5]

보니파스 대위가 요구를 무시하자 박철 중위는 추가 병력을 요청했고, 곧 트럭을 타고 약 20명의 북한군 병력이 쇠지렛대, 몽둥이 등을 들고 도착했다. 박철 중위가 다시 작업 중지를 요구했으나 보니파스 대위가 재차 거부하자, 박철은 공격을 명령했다.[6][7] 북한군 병사들은 노무자들이 작업용으로 가져온 도끼와 자신들이 가져온 곡괭이, 몽둥이 등을 휘두르며 유엔군 측 인원들에게 기습적으로 공격을 가했다.[8]

이 공격으로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배럿 중위가 현장에서 또는 후송 중 사망했으며, 주한 미군 병사 4명과 대한민국 국군 장병 4명 등 총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한 현장에 있던 유엔군 트럭 3대도 파손되었다.[27] 이 사건은 대한민국에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또는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으로 불리며, 북한에서는 '''판문점 사건'''으로 칭한다.

2. 1. 사건의 배경

1976년 공동경비구역 배치도. 사건 이전 군사분계선 미준수 상황을 보여준다.


사건의 발단이 된 미루나무공동경비구역(JSA) 내 '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처에 있었으며, 높이가 30m에 달해[1] 유엔군사령부(UNC) 초소와 관측소 사이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1] 특히 주한 미군이 제5관측소에서 북측의 제3초소와 비무장지대를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데 큰 지장을 주었다. 제3초소 부근은 북한군 초소 3개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무성하게 자란 미루나무 가지 때문에 제대로 된 관측이 어려웠던 것이다.[22]

이에 유엔군 측은 시야 확보를 위해 해당 미루나무의 가지치기 작업을 계획하고 이를 북측에 통보하였다. 그러나 북한 측은 이 나무가 김일성 주석이 직접 심고 가꾼 것이며 그의 지도하에 자라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5][23] 유엔군에 의한 가지치기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건 발생 이전에도 공동경비구역 내에서는 긴장 상태가 존재했다. 북한 군인들이 미군 병력을 총으로 위협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당시 중대장이었던 아서 보니파스 대위가 나서서 상황을 해결하기도 했다.[2] 이러한 배경 속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문제는 남북 간의 또 다른 갈등 요인이 되었다.

2. 2. 북한군의 공격

북한군에게 살해된 마크 배럿 중위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인민군 박철 중위(미군들 사이에서는 과거 대립 상황 때문에 "불독 중위"라는 별명으로 불렸다[4])와 다른 장교 1명, 그리고 15명의 병사가 현장에 나타났다. 이들은 처음 약 15분간 별다른 행동 없이 작업을 지켜보는 듯했으나, 이내 박철 중위는 유엔군 측에 작업 중지를 요구하며 나무를 자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5] 일부 증언에 따르면, 북한 군인들은 해당 미루나무가 김일성이 직접 심고 가꾼 것이라고 주장하며 작업을 막으려 했다고 한다.[5]

그러나 미루나무의 위치가 명백히 유엔군 관할 지역에 속했으므로, 경비 임무를 지휘하던 주한 미군 Arthur George Bonifas|아서 조지 보니파스영어 대위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고 작업 강행을 지시하며 북한군의 요구를 무시했다. 보니파스 대위가 등을 돌리자, 박철 중위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 너머로 연락병을 보냈다. 몇 분 후, 북한군 트럭 한 대가 다리를 건너와 약 20명의 북한군 병력을 추가로 내려놓았다. 이들은 쇠지렛대몽둥이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증원된 병력과 함께 박철 중위는 다시 한번 작업 중지를 강력히 요구했다. 보니파스 대위가 이번에도 요구를 거부하고 등을 돌리자, 박철 중위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풀어 손수건에 조심스럽게 감싼 뒤 주머니에 넣고는 "저놈들을 죽여라!"라고 외치며 공격을 명령했다.[6][7]

박철의 명령에 따라 북한군 병사들은 즉시 트럭에 실어왔던 곡괭이, 몽둥이와 함께, 한국 지원단(KSC) 노무자들이 작업용으로 가져왔던 도끼들을 빼앗아 휘두르며 유엔군 측 장병들에게 기습적으로 달려들었다.[8] 공격은 유엔군 지휘관들에게 집중되었다. 아서 보니파스 대위는 박철 중위를 포함한 최소 5명의 북한군에게 둘러싸여 땅바닥에 쓰러진 채 몽둥이 등으로 심하게 구타당해 현장에서 사망했다. 소대장 Mark Thomas Barrett|마크 토머스 배럿영어 중위는 공격을 피해 근처의 나무가 우거진 낮은 지형(깊이 약 4.5m)으로 뛰어내렸으나, 이후 북한군에게 발견되어 도끼로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2] 후송 중 사망했다.

이 기습 공격으로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 중위가 사망했으며, 이외에도 주한 미군 병사 4명과 대한민국 국군 장교 및 병사 4명 등 총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한 현장에 있던 유엔군 트럭 3대도 파손되었다.[27] 전체 충돌은 유엔군 병력이 북한군을 흩어지게 하고 보니파스 대위의 시신을 수습하기까지 불과 20~30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7]

이 사건은 인근의 유엔군 제5관측소(OP No. 5)와 제3초소(CP No. 3)에서 각각 35mm 카메라와 영화 카메라로 촬영되어 기록으로 남았다.

훗날 김정일의 측근이었던 신경완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 직전 "미군이 포플러 나무를 자르고 있다"는 보고가 중앙에 올라갔고, 이에 김정일이 "조선 사람의 기개를 보여주라", "총은 사용하지 말고 미국 놈들을 혼내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22] 이는 당시 북한의 지휘 체계를 고려할 때, 현장 지휘관의 단독 결정보다는 상부의 지시나 승인 하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22]

3. 대한민국과 미국의 대응

폴 버니언 작전 후 잘린 나무조각을 담은 기념품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 백악관에서는 즉시 워싱턴 특별 대책반이 소집되었으며, 미국 국무부는 당일 "이 사건의 결과로 빚어지는 어떠한 사태에 대해서도 그 책임은 북한에 있다"는 강경한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리처드 스틸웰 주한미군 사령관은 문제의 미루나무를 제거하고 공동경비구역(JSA) 내에 조선인민군이 설치한 불법 방벽(바리케이드 등)을 철거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준비했다. 이 작전은 미국의 전설적인 거구 나무꾼 폴 버니언의 이름을 딴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으로 명명되었으며, F-4, F-111, B-52 폭격기, 미드웨이 항공모함 전단 등을 동원하는 대규모 무력 시위를 포함하는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한미 양국 군의 전투준비태세데프콘이 3단계(DEFCON 3)로 격상되었다.[28][29][30] CIA는 이 공격이 북한 정권에 의해 사전에 계획된 것으로 판단했으며, 다양한 군사적 대응 방안이 검토되었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은 군사적 충돌 확대를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10][11]

대한민국 정부 역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즉각적인 대응에 나섰다. 육군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소속 김종헌 소령[31]지휘관으로 하는 64명의 특전대원으로 구성된 결사대가 편성되어 보복 작전을 준비했다. 이들은 폴 버니언 작전에 투입되어 북한의 도발에 대한 응징을 실행할 계획이었다.

한편, 북한은 사건 발생 직후부터 관영 매체를 통해 자신들의 행위가 미군의 도발에 대한 자위적 조치였다고 주장했다.[7] 당시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열린 비동맹 운동 회의에 참석 중이던 김정일은 이 사건을 미군 장교들이 북한 경비병을 공격한 사건으로 왜곡하며, 미국의 도발을 규탄하고 주한미군 철수 및 유엔군사령부 해체를 지지하는 결의안 채택을 시도하기도 했다.[9]

3. 1. 폴 버니언 작전 (Operation Paul Bunyan)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에 대응하여, 유엔사는 시야를 가리던 미루나무를 자르는 것을 넘어 완전히 베어내기로 결정했다. 이 작전 계획은 미국 백악관에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 주재 하에 열린 위기 회담을 통해 결정되었고, 북한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되 추가적인 군사적 충돌 확대를 피하기 위한 무력 시위 성격으로 구상되었다.[12] 작전명은 미국의 전설적인 거구의 나무꾼 폴 버니언의 이름을 따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으로 명명되었다.[6][28][29][30] 작전 목표는 문제의 미루나무를 완전히 제거하고, 공동경비구역 내에 조선인민군이 불법적으로 설치한 방벽(바리케이드 등)을 철거하는 것이었다.[28][29][30] 작전 계획은 리처드 G. 스틸웰 유엔군 사령관과 그의 참모진이 서울의 유엔사령부에서 이틀에 걸쳐 수립했다.[6]

작전을 위해 데프콘 3이 발령되었고, 이후 작전 중에는 데프콘 2(공격준비태세)로 격상되었다.[28][29][30] 대규모 미군 전력이 동원되었다. 미국 본토에서는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 전술폭격기 20대가 한반도로 긴급 파견되었으며, 에서는 B-52 전략폭격기 3대가, 오키나와 카데나 미 공군기지에서는 F-4 팬텀 전투기 24대가 출격하여 한반도 상공을 선회했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국 해군 제7함대 소속 항공모함 미드웨이호(CV-41)순양함 3척과 구축함 7척 등 중무장한 호위함대를 이끌고 동해상으로 이동하여 한국 해역 인근에 배치되었다.[6] 비무장지대(DMZ) 근처에는 MIM-23 호크 미사일 등으로 무장한 미군과 한국군의 보병, 포병, 기갑 부대가 대기했으며, 오키나와 주둔 해병대 1,800명을 포함한 12,000명의 증원 병력이 한국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6]

대한민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육군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소속 김종헌 소령[31]을 지휘관으로 하는 64명의 특전대원으로 구성된 결사대가 보복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곤봉 등으로 무장한 것으로 위장했으나, 실제로는 트럭 바닥에 M16 소총, 수류탄, M79 유탄발사기, 크레모아 등을 숨겨 카투사로 위장한 채 작전에 참여했다.[3][13][14] 일부 대원은 M18 클레이모어 지뢰를 가슴에 부착하고 북한군을 향해 도발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13][14]

1976년 8월 21일 오전 7시, 사건 발생 3일 후 폴 버니언 작전이 개시되었다. 미국 육군 지원단 사령관 빅터 S. 비에라 중령이 지휘하는 23대의 미군 및 한국군 차량으로 구성된 '비에라 작전부대'가 북한에 사전 경고 없이 공동경비구역(JSA)으로 진입했다. 부대에는 체인톱을 갖춘 미 육군 제2공병대대 소속 공병 16명, 권총과 도끼 자루로 무장한 경비 소대 60명, 그리고 한국 육군 제1특전여단 소속 특전대원 64명이 포함된 총 813명의 병력이 투입되었다. 이들은 작전 지역을 신속히 확보하고 공병대의 미루나무 제거 작업을 엄호했다. 상공에는 미군과 한국군의 AH-1 코브라 공격 헬리콥터 7대를 포함한 헬기 27대가 비행했으며, 더 높은 고도에서는 B-52 폭격기와 F-4, F-111, F-5, F-86 등 다수의 전투기들이 초계 비행을 실시하며 압도적인 공중 우세를 과시했다.[6]

작전이 시작되자 북한군은 기관총돌격소총 등으로 무장한 병력 약 150~200명을 버스로 동원하여 현장에 나타났다.[3] 북한군은 버스에서 내려 2인 1조의 기관총 진지를 여러 곳에 구축했으나, 유엔군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결연한 의지에 눌려 적극적인 저지 행동에는 나서지 못했다. 유엔군 공병대는 42분 만에 미루나무를 성공적으로 베어냈으며(스틸웰 사령관의 예상보다 3분 단축),[3] 이 과정에서 북한군은 침묵을 지키며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나무 제거 작업이 완료된 후, 한국 특전대원들은 북한군이 불법으로 설치했던 초소 4개를 파괴하며 사건에 대한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북한군은 이에 대해 별다른 무력 대응을 하지 않고 물러섰으며, 더 이상의 군사적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32] 작전 중 약 6m 높이의 나무 그루터기는 의도적으로 남겨졌다.

4. 사건의 경과 및 영향

폴 버니언 작전 이후 북한은 김일성 주석 명의로 이례적인 '유감 성명'을 발표했고, 미국은 이를 수용했다.[3][6] 이 사건으로 희생된 미군 장교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배럿 중위는 사후 1계급 특진 추서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에는 명확한 군사 분계선(MDL)이 설정되고 양측 경비 병력의 활동 구역이 분리되었다. 경계선 너머 상대측 지역에 있던 초소들은 철거되었다.

사건 이후 군사 분계선이 설정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사건 발생 10주년인 1986년 8월 18일, JSA 인근의 미군 기지 Camp Kitty Hawk|캠프 키티 호크eng는 희생된 보니파스 대위를 기리기 위해 캠프 보니파스로 명칭을 변경했다.[17] 또한 JSA 내에 위치한 Barrett Readiness Facility|배럿 준비 시설eng 역시 배럿 중위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18] 1987년에는 사건 현장의 미루나무 그루터기 자리에 두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유엔군사령부는 매년 이곳에서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19][20]

사건 당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끼 등의 도구는 북한 평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윌리엄 J. 리브시 전 주한 미군 사령관은 사건 현장의 나무 일부로 만든 지휘봉(스웨거 스틱)을 개인적으로 소지하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한편,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 문재인대한민국 육군 특전사 복무 시절 폴 버니언 작전에 후방 지원 임무로 참여한 바 있다.[21]

대한민국에서는 이 사건을 주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또는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으로 부르며, 과거에는 '''8·18 도끼 만행'''이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북한에서는 '''판문점 사건'''으로 칭한다.

4. 1. 남북 관계에 미친 영향

사건 발생 다음 날인 8월 19일부터 조선인민군한국군, 유엔군 사이에 회의가 열렸다. 특히 자국 병사가 사망한 미국군은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조선인민군에 강력하게 항의했으며, 문제가 된 미루나무를 잘라내는 것을 넘어 완전히 벌목할 것을 주장했다.

폴 버니언 작전 실행으로 대규모 무력 충돌이 우려되었으나, 작전 자체는 큰 충돌 없이 종료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38선을 따라 비무장 지대는 극도의 긴장 상태에 놓였다. 미국의 강력한 군사적 압박과 임전 태세에 당황한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22] 작전 종결 후 긴급 수석대표회의를 요청하여 '유감 성명'을 전달했다. 처음 미국은 북한의 유감 성명이 책임을 명확히 인정하지 않았다며 수용을 거부했으나, 24시간 만에 입장을 바꿔 이를 수락했다. 김일성의 유감 표명으로 전면전의 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22] .

하지만 북한은 이후 1년 반 동안 준전시상태를 유지했고, 대한민국 역시 북한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남북 간 군사적 긴장 상태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사건 이후 9월 6일까지 열린 회의에서 북한 측의 제안에 따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에도 군사 분계선(MDL)이 설정되었다. 이전까지 자유롭게 양측 인원이 오갈 수 있었던 공동경비구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분리되었으며, 경계선 표시를 위해 콘크리트 단이 설치되고 경계 밖 상대 지역의 초소는 철거되었다.

희생된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배럿 중위는 사후 1계급 특진 추서되었다. 사건 10주년인 1986년 8월 18일, 공동경비구역 유엔군 경비 부대의 기지였던 Camp Kitty Hawk|캠프 키티 호크eng는 보니파스 대위를 기리기 위해 캠프 보니파스로 명칭을 변경했다. 현재 공동경비구역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은 이 사건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북한 내부적으로는 김일성김정일을 질책했으나[22], 김정일은 이 사건을 오히려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는 기회로 활용했다는 평가가 있다. 그는 사건의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전가하며 반대파 숙청과 평양 시민 강제 퇴거 등 내부 통제를 강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22] . 숙청 대상에는 김동규와 류장식, 인민무력부 부부장 지병학, 장정환, 당 검열위원장 지경수 등이 포함되었다[22] .

4. 2. 국제 사회의 반응

사건 직후, 북한은 관영 매체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발표했다. 북한은 미국 측이 먼저 도끼를 들고 공동경비구역에 들어와 나무를 베려 했으며, 북한 경비병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가해왔기 때문에 자위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7]

사건 발생 4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당시 북한 지도자 김일성의 아들인 김정일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열리고 있던 비동맹 운동 회의에서 이 사건을 미군 장교들이 주도한 북한 경비병에 대한 이유 없는 공격으로 묘사하는 문서를 발표했다. 김정일은 이 회의에서 미국의 도발을 규탄하고 주한 미군 철수와 유엔군 사령부 해체를 지지하는 결의안을 제출했으며, 이는 쿠바 등의 지지를 받아 통과되었다.[9]

미국은 이 공격을 북한 정권에 의해 계획된 도발로 간주했다. CIA는 사건의 배후를 분석했으며, 미국은 즉각 주한 미군의 경계 태세를 DEFCON 3으로 격상시켰다. 미국은 판문점 인근 지역에 대한 포병 공격 등 군사적 대응도 검토했으나, 당시 대한민국박정희 대통령이 군사 행동 확대를 원치 않았고, 북한과의 포병 전력 비율이 불리하다는 판단 하에 실행하지는 않았다.[10][11]

사건 이후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여러 차례 회의가 열렸으며, 특히 자국 장교가 사망한 미국은 북한에 강력히 항의했다.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유엔군 사령관에게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전면전의 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22] 이 사건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다시 한번 높였지만, 북한 최고 지도자의 이례적인 유감 표명으로 인해 더 큰 충돌로 번지지는 않았다.

5. 사건의 평가 및 의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은 냉전 시대 남북한 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은 북한의 예측 불가능한 무력 도발 행태를 국제 사회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22]

사건 발생 직후, 북한은 자신들의 경비병들이 먼저 공격받아 자위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등[7] 사건의 책임을 미국대한민국 측에 전가하려 시도했다. 특히 당시 북한 지도자 김일성의 아들인 김정일스리랑카 콜롬보에서 열린 비동맹 운동 회의에서 이 사건을 미국의 도발로 규정하고, 주한 미군 철수와 유엔군 사령부 해체를 지지하는 결의안을 제출하여 통과시키는 등[9] 국제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려 했다. CIA는 이 공격이 북한 정부에 의해 사전에 계획된 것으로 판단했다.[10]

김정일의 부하였던 신경완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은 사건 직전 "조선 사람의 기개를 보여줘라", "총은 사용하지 마라. 미국 놈들을 혼내줘라"라고 지시했으며, 이는 현장 지휘관의 독단적 판단이 아닌 김정일의 직접적인 개입 가능성을 시사한다.[22] 이상철 역시 이 사건과 이후의 납치 사건 등이 모두 김정일의 후계자 내정 이후 발생했다는 점을 들어, 김정일이 후계자로서의 업적을 쌓기 위해 벌인 사건일 가능성을 제기했다.[25]

사건 발생 후 미국주한 미군의 경계 태세를 DEFCON 3으로 격상시키는 등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다.[10][11] 군사적 대응도 고려되었으나,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는 군사 행동을 원치 않았고, 포병 전력의 열세 등으로 인해 실행되지는 않았다.[10][11] 결국 김일성이 유엔군 사령부를 통해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친서를 전달하면서 전면전의 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22]

그러나 김정일은 이 사건을 오히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한반도 북부 내 정적을 제거하는 기회로 활용했다.[22] 그는 한반도 남부 출신자와 지식인 등 약 20만 명을 평양에서 강제 추방하는 '소개 사업'을 벌였으며, 자신의 후계 체제에 반대하던 국가부주석 김동규와 류장식 등을 숙청했다. 또한 인민무력부 부부장 지병학, 장정환, 당 검열위원장 지경수 등도 국가보위부에 연행되는 등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이루어졌다.[22]

이 사건 이후, 9월 6일까지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통해 북한 측의 제안으로 공동경비구역 내에도 군사분계선이 설정되어 남북 인원이 분리되었으며,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사건 당시 사망한 아서 보니파스 대위의 이름을 따 유엔군 경비 부대의 기지 명칭이 캠프 보니파스로 변경되었다.

결론적으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은 북한 정권의 폭력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드러낸 사건이었으며,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고 대한민국의 안보 역량 강화 필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북한 내부적으로는 김정일이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6. 기타

사건 이후 공동경비구역의 전진 기지였던 캠프 키티 호크는 희생된 아서 보니파스 대위를 기리기 위해 캠프 보니파스로 이름이 바뀌었다.[17] 또한 JSA 내부에 위치하며 대대의 북쪽 임무 소대를 수용하는 배럿 준비 시설은 마크 바렛 중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8]

1987년에는 사건의 발단이 된 미루나무가 잘린 자리에 보니파스 대위와 바렛 중위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기념비에는 두 사람을 기리는 금속판이 새겨져 있으며, 유엔군은 매년 이곳에서 추모식을 거행한다.[19][20]

이 사건은 이후 유사한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JSA 내에서 남측과 북측 인원의 활동 구역을 분리하는 계기가 되었다.[12] 또한, 돌아올 수 없는 다리 옆에 있던 유엔군 검문소(CP No. 3)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도로에 콘크리트 볼라드가 설치되어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사건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끼와 자루. 북한 평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건 당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끼는 북한의 북한 평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주한 미군 제8군 사령관을 지낸 윌리엄 J. 리브시 장군은 사건의 중심이 된 나무의 일부로 만든 스웨거 스틱을 공개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제12대 대통령을 지낸 문재인은 젊은 시절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 소속으로 복무하며 폴 버니언 작전에 후방 지원 임무로 참여한 바 있다.[21]

대한민국에서는 이 사건을 주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板門店 도끼 蠻行事件) 또는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板門店 도끼 殺人事件)으로 부른다. 과거에는 '''8·18 도끼 만행'''(8.18 도끼 蠻行)이라는 명칭도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판문점 사건'''이라고 칭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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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Former commander honors victims of DMZ ax murders http://www.stripes.c[...] 2007-08-20
[3] 서적 The Two Koreas: a contemporary history https://archive.org/[...] Perseus Books Group
[4] 서적 The Long Gray Line: The American Journey of West Point's Class of 1966
[5] 뉴스 Officer recalls Ax murder incident http://www-2id.korea[...] 2006-09-15
[6] 저널 Negotiating With the North Koreans: The U.S. Experience at Panmunjom http://www.nautilus.[...] US Army War College 2009-12-17
[7] 서적 Axe-Wielding Murder at Panmunjom https://oregondigita[...] U.N. Korean War Allies Association
[8] 웹사이트 The "Ax Murder Incident" and Operation Paul Bunyan https://web.archive.[...] 2010-06-05
[9] 웹사이트 Hazardous Duty https://web.archive.[...] 2007-09-29
[10] 웹사이트 Revisiting the Korean Tree-Trimming Incident https://web.archive.[...]
[11] 웹사이트 Minutes of Washington Special Actions Group Meeting, Washington, August 25, 1976, 10:30 a.m. https://history.stat[...] Office of the Historian, US Department of State 1976-08-25
[12] 저널 The Ford Administration and Security Policy in the Asia-Pacific after the Fall of Saigon 2009-09
[13] 웹사이트 Memories of the JSA from SP4 Bill Ferguson http://bill_ferguson[...]
[14] 웹사이트 Excerpt from Diary of SP4 Mike Bilbo https://web.archive.[...] 2010-04-06
[15] 웹사이트 아카이브 상세 강남 서울역사아카이브 https://museum.seoul[...] 2023-08-16
[16] 웹사이트 아카이브 상세 강남 서울역사아카이브 https://museum.seoul[...] 2023-08-16
[17] 웹사이트 Camp Bonifas http://www.globalsec[...]
[18] 웹사이트 Barrett, Mark T., 1LT. Fallen https://army.togethe[...] togetherweserved.com 2017-02-24
[19] 뉴스 Military marks date of DMZ incident in which two Army officers were slain https://web.archive.[...] 2007-11-13
[20] 뉴스 Memorial roll call for soldiers killed in infamous DMZ incident http://www.stripes.c[...]
[21] 뉴스 문 대통령 “미루나무 작전 참여” 발언 중 ‘참여’에 눈길 가는 이유 https://web.archive.[...]
[22] 웹사이트 米国のやつらを懲らしめてやれ」第2次朝鮮戦争危機に乗じ批判者を粛清 秘録金正日(36)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5-08-04
[23] 뉴스 Officer recallls Ax murder incident http://www-2id.korea[...] 2006-09-15
[24] 뉴스 反日政権の衝撃(上)「親日派を清算する」文在寅は断言した! 北へのこだわりは避難民だった両親の影響も https://www.sankei.c[...] 産経新聞社 2017-05-20
[25] 서적
[26] 문서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사병이란 단어 대신 이들을 구별하여 부른다.
[27] 웹인용 다큐멘터리 남북 현대사의 10대 비화 ⑦ 美, 또 소극적 보복… 한국군은 北 초소 박살 - 8·18 도끼만행 사건 https://web.archive.[...] 신동아 2014-10-17
[28] 방송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MBC 특별기획, 제54회 : 8.18 판문점 도끼 사건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29] 서적 北傀挑發三十年 北韓硏究所
[30]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팔일팔도끼만행사건 http://encykorea.aks[...]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01-05
[31] 뉴스 남산의 부장들 (94) 판문점「도끼만행」…朴대통령 격노 동아일보 1992-05-30
[32] 웹인용 북한의 판문점 ‘도끼 살해’ 만행 … 박정희 “미친 개엔 몽둥이” 분노 http://nk.joins.com/[...] 중앙일보 201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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