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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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은 기원전 4세기 카리아의 통치자 마우솔로스와 그의 아내 아르테미시아 2세를 기리기 위해 할리카르나소스에 건설된 기념물이다. 이 건축물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혔으며, 그리스 건축 양식과 조각 기술을 융합하여 웅장한 규모와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마우솔로스가 사망한 후 아르테미시아 2세가 공사를 이어받았으며, 로도스 섬의 공격을 막아내는 등 통치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마우솔레움은 지진과 약탈로 인해 파괴되었지만, 19세기 발굴을 통해 유물이 발견되었고, 현대 건축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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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 - [지명]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다른 이름 | 마우솔레움, 마우솔로스의 영묘(능묘) |
| 상태 | 지진으로 파괴됨 |
| 건축 양식 | 고전 건축 |
| 위치 | 할리카르나소스, 아케메네스 제국 (현재의 터키 보드룸) |
| 좌표 | 37°02′16″N 27°25′27″E |
| 건축 유형 | 마우솔레움 |
| 의뢰인 |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 2세 |
| 소유주 |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
| 완공 | 기원전 351년 |
| 파괴 시기 | 12세기와 1402년 사이 |
| 높이 | 약 45미터 |
| 건축가 | 사티로스와 프리에네의 피티우스 |
| 조각가 | 레오카레스, 브리아크시스, 스코파스, 티모테우스 |
| 명칭 | |
| 역사 | |
| 건설 시기 | 기원전 340년대 무렵 |
| 발견 시기 | 1522년 |
| 발굴 시기 | 1856년 |
| 발굴자 | 찰스 토머스 뉴턴 |
| 기타 | |
| 참고 | '"마우솔레이온"은 "마우솔로스에게 바쳐진 [건물]"을 의미한다. 따라서 "마우솔로스의 마우솔레움"은 동어 반복이다.' |
2. 건설 배경
기원전 377년부터 기원전 353년까지 소아시아 서부의 카리아를 통치한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의 총독(사트라프) 마우솔로스는 사실상 독립적인 군주였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생활 방식을 동경하여 수도 할리카르나소스를 그리스 도시들에 버금가는 웅장하고 방비가 튼튼한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도시 기반 시설을 정비하고 아레스 신전, 그리스식 극장 등을 건설했다.
기원전 353년, 마우솔로스가 사망하자 그의 여동생이자 아내인 아르테미시아는 남편을 기리기 위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일설에는 마우솔로스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 무덤 건설을 계획했거나 이미 시작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이 거대한 영묘가 바로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이름을 후세에 남긴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이다. 아르테미시아마저 남편 사후 2년 뒤에 사망했지만, 영묘 건설은 건축가들에 의해 계속 진행되었다.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건축가들은 이 영묘가 자신들의 명성과 기술을 기리는 기념물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공사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2. 1. 페르시아 제국과 카리아
기원전 4세기, 소아시아 서부 해안에 위치한 카리아는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아 제국)에 속한 작은 왕국이었으며, 할리카르나소스를 수도로 삼고 있었다. 당시 카리아는 밀라스 출신의 헤카톰누스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사트라프였지만 주변 도시와 지역들을 장악하며 사실상 독립적으로 통치했다.기원전 377년, 헤카톰누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마우솔로스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마우솔로스는 그의 여동생이자 아내인 아르테미시아와 함께 카리아를 통치했다. 당시 카리아에서는 가문의 힘과 부를 유지하기 위해 남매간에 결혼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헤카톰누스에게는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 외에도 아다(훗날 알렉산드로스 3세의 양어머니가 됨), 이드리에우스, 픽소다루스 등 여러 자녀가 있었다.

마우솔로스는 공격적인 정책을 통해 영토를 아나톨리아 남서부 해안까지 확장했다. 특히 리키아를 침공했을 때, 그곳의 크산토스 무덤과 같은 거대한 기념 무덤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이는 훗날 자신의 영묘 건설에 영감을 주었다.[3] 마우솔로스는 페르시아의 사트라프로서 할리카르나소스와 주변 지역을 24년 동안 통치했다(기원전 377년 ~ 기원전 353년).
지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마우솔로스는 고대 그리스어를 사용했으며, 고대 그리스의 생활 방식과 정치 제도를 동경했다. 그는 해안을 따라 그리스 양식의 도시들을 건설하고, 이 도시들에 그리스의 민주주의 전통을 장려하고자 했다. 이러한 열망의 일환으로, 마우솔로스는 수도 할리카르나소스를 더욱 웅장하고 난공불락의 도시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막대한 세금을 투입하여 도시를 정비하고 장식했다. 빛나는 대리석으로 조각상, 사원, 건물들을 지었으며, 적의 공격에 대비해 항구를 깊게 파고 성벽과 망루를 강화했다. 또한 시장 근처에 큰 항구와 비밀 항구를 건설하고, 내륙에는 광장, 도로, 주택을 정비했으며, 그리스식 극장과 전쟁의 신 아레스를 모시는 신전 등을 세웠다. 만의 한쪽에는 바다와 언덕을 조망할 수 있는 거대한 요새형 궁전을 건설했다.
기원전 353년, 마우솔로스가 사망하자 아르테미시아가 단독으로 통치를 이어받았다. 아르테미시아는 남편을 기리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이 바로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이다. 일설에는 마우솔로스가 살아있을 때부터 영묘 건설 계획이 있었거나 이미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마우솔로스의 죽음은 카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로도스 섬에게 반란의 기회가 되었다. 로도스는 해군을 보내 할리카르나소스를 공격했지만, 아르테미시아는 비밀 항구에 함대를 숨겨두었다가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로도스 해군을 격파했다. 나아가 그녀는 로도스 함선을 이용하여 로도스 섬을 역으로 공격했고, 승리한 아군이 돌아온 것으로 착각한 로도스인들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함락되어 반란은 진압되었다.
아르테미시아는 남편이 죽은 지 2년 만에 사망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남편의 유골을 와인에 타 마시고 슬픔 속에서 죽었다고 하며, 이로 인해 헌신적인 아내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유골이 담긴 단지는 아직 미완성된 영묘에 안치되었다. 희생 의식의 일환으로 수많은 동물의 사체가 영묘로 이어지는 계단에 놓였고, 이후 접근을 막기 위해 계단은 돌과 잔해로 채워졌다. 역사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건축가들은 의뢰주가 사망한 후에도 공사를 계속했는데, 이는 이 영묘가 건축가 자신의 명성과 예술적 기량을 기리는 기념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 2. 할리카르나소스와 마우솔로스
기원전 4세기, 소아시아 서부 카리아 지방은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에 속한 작은 왕국이었다. 기원전 377년, 밀라스의 헤카톰누스 왕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마우솔로스가 사트라프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카리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당시 카리아는 페르시아의 한 주였지만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헤카톰누스가 주변 도시와 지역을 장악하여 사실상 독립국처럼 운영했다. 마우솔로스는 그의 여동생이자 아내인 아르테미시아와 함께 할리카르나소스와 그 주변 지역을 24년간 통치했다. 당시 카리아에서는 가문의 힘과 부를 유지하기 위해 남매간 결혼이 관습이었다. 헤카톰누스에게는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 외에도 아다, 이드리에우스, 픽소다루스 등 여러 자녀가 있었다.마우솔로스는 공격적인 정책으로 영토를 아나톨리아 남서부 해안까지 확장했다. 특히 리키아를 침략했을 때, 크산토스 무덤과 같은 리키아의 거대한 기념 무덤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이는 훗날 자신의 무덤 건설에 영감을 주었다.[3] 마우솔로스는 지역 출신이었지만 고대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고대 그리스의 생활 방식과 정치를 동경했다. 그는 해안을 따라 그리스풍의 도시들을 건설하고 민주주의 전통을 장려하고자 했다.
마우솔로스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고 웅장한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로 결심하고, 할리카르나소스를 선택했다.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는 막대한 세금을 들여 도시를 화려하게 꾸몄다. 빛나는 대리석으로 조각상, 사원, 궁전 등을 지었다. 도시 방어를 위해 앞바다를 깊게 파고 성벽과 망루를 세웠으며, 시장 근처에 큰 항구를 건설하고 그 안쪽에 기습 공격에 용이한 비밀 항구도 만들었다. 도시 내부에는 시민들을 위한 광장, 도로, 주거 시설을 정비하고 4개의 문과 2개의 대로를 건설했다. 또한 그리스식 극장과 전쟁의 신 아레스를 모시는 신전도 지었다. 만의 한 구역에는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거대한 요새형 궁전을 세웠다.

기원전 353년, 마우솔로스가 사망하자 아르테미시아가 단독으로 왕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마우솔로스는 생전에 자신을 위한 장대하고 정교한 무덤을 계획했으며, 그의 사후 아르테미시아와 다른 형제자매들이 이 계획을 이어받아 건설을 시작했다. 이 무덤은 너무나 유명해져서, 오늘날 '마우솔레움'이라는 단어는 모든 웅장한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무덤 건설이 시작된 직후, 지중해의 로도스섬이 마우솔로스의 죽음을 틈타 반란을 일으키고 할리카르나소스를 공격하기 위해 해군을 보냈다. 아르테미시아는 이 사실을 미리 알아채고 자신의 함대를 비밀 항구에 숨겼다. 로도스 군이 상륙을 시작하자, 아르테미시아의 해군은 측면을 기습하여 로도스 해군을 격파했다. 이후 아르테미시아는 기지를 발휘하여 로도스 군의 배에 자신의 군대를 태워 로도스 섬으로 보냈다. 로도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해군이 승리하고 돌아온 것으로 착각하여 방비하지 않았고, 결국 도시는 함락되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아르테미시아는 남편이 죽은 지 2년 후에 사망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남편 마우솔로스의 유골을 와인에 섞어 마시고 슬픔 속에서 죽었다고 하며, 이로 인해 헌신적인 아내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그들의 유골을 담은 단지는 아직 미완성 상태였던 무덤에 안치되었다. 희생 제물로 바쳐진 많은 동물의 사체가 무덤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놓였고, 이후 계단은 돌과 흙으로 메워져 봉인되었다. 역사가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의뢰인이 죽은 후에도 건축가와 조각가들은 작업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이 무덤이 자신들의 명성과 예술적 기량을 기리는 기념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마우솔레움의 건설
카리아의 통치자 마우솔로스는 자신의 수도 할리카르나소스를 웅장하게 건설하면서, 생전에 자신의 무덤인 마우솔레움 건설을 직접 구상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353년 마우솔로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이자 누이인 아르테미시아가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무덤 건설을 총감독했다.
아르테미시아는 마우솔레움 건설에 막대한 비용을 아끼지 않았으며, 당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건축가와 조각가들을 초빙하기 위해 그리스에 사자를 파견했다.[33][34] 이를 통해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모여 기념비적인 건축물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는데,[35] 이들 중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 재건축에 참여했던 유명 조각가 스코파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덤은 할리카르나소스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건설되었다. 완성된 마우솔레움은 그 웅장함과 뛰어난 예술성으로 인해 고대 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으며, 당대 건축 및 조각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3. 1. 건축가와 조각가
마우솔레움 건설은 마우솔로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내이자 누이인 아르테미시아 2세가 총감독을 맡아 진행했다. 아르테미시아는 건설 비용을 아끼지 않았으며,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을 모으기 위해 그리스에 사자를 보냈다.[33][34]이를 통해 두 명의 뛰어난 건축가, 프리에네의 프티오스와 사티로스가 건축 설계 및 감독을 맡게 되었다.[33][34] 또한, 네 명의 저명한 조각가 스코파스, 브리악시스, 레오카레스, 티모테오스가 각 면의 조각 장식을 담당했다.[35] 이들 외에도 수백 명의 다른 장인들이 건설에 참여했다. 특히 스코파스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 재건축에도 참여했을 정도로 명성이 높은 조각가였다.
각 조각가는 마우솔레움의 한 면씩을 맡아 장식했는데, 스코파스는 동쪽, 브리악시스는 북쪽, 티모테오스는 남쪽, 레오카레스는 서쪽을 담당했다. 이들은 주로 그리스 신화나 역사적 전투 장면을 부조로 새겼다. 스코파스는 그리스인과 아마조네스(여전사 부족)의 전투(아마조노마키)를 묘사했으며, 다른 조각가들은 라피타이족과 켄타우로스의 전투 등을 표현했다.
3. 2. 구조와 디자인

마우솔레움은 할리카르나소스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졌다. 건설 작업은 벽돌 벽으로 둘러싸인 안뜰(작업장) 안에서 이루어졌다. 안뜰 중앙에는 묘의 본체가 놓일 돌로 된 플랫폼(석단)이 마련되었다. 이 플랫폼으로 이어지는 계단 양쪽에는 사자 석조상이 배치되었고, 플랫폼의 바깥쪽 벽을 따라서는 여러 신들과 여신들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각 모퉁이에는 말을 탄 전사의 조각상이 묘를 지키듯 배치되었다.[20]
플랫폼 중앙에는 마우솔레움 본체가 세워졌는데, 전체 높이 약 45m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사각형 모양의 대리석 구조물이었다. 이 구조물의 표면은 부조로 장식되었는데, 여기에는 그리스 신화나 역사 속 장면들이 묘사되었다. 대표적으로 켄타우로스와 라피타이족 사이의 전투, 아마조네스(호전적인 여성 부족)와 그리스인들의 전투(아마조노마키) 장면 등이 포함되었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 네 명이 각 면의 조각을 맡았다. 스코파스가 동쪽, 브리악시스가 북쪽, 티모테오스가 남쪽, 레오카레스가 서쪽을 담당했다.[35][20] 스코파스는 그리스인과 아마조네스의 투쟁을, 다른 세 조각가는 라피타이와 켄타우로스의 투쟁 등을 묘사했다.
묘의 본체 위, 즉 중간 부분에는 36개의 가느다란 석조 기둥들이 세워져 높이의 또 다른 3분의 1을 형성했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이 기둥으로 둘러싸인 부분을 '프테론'(pteron)이라 불렀다.[21] 기둥은 한 면에 10개씩 배치되었고, 각 모퉁이의 기둥은 두 면이 공유하는 형태였다. (짧은 변에 9개, 긴 변에 11개씩 배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각 기둥 사이에는 조각상이 하나씩 세워졌다. 기둥들 안쪽에는 묘의 거대한 지붕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견고한 첼라(cella)와 같은 구조물이 있었다.
마지막 3분의 1은 24단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형태의 지붕이었다. 지붕 꼭대기에는 네 마리의 거대한 말이 끄는 전차인 콰드리가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이 콰드리가에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조각상이 타고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비어 있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고대 그리스에서 주인 없는 마차는 주인의 죽음을 상징했으며,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조각상이 마차 근처에서 발견되기는 했으나 마차를 타는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조각상은 아마도 다른 조각상들처럼 제1층이나 제2층에 놓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우솔레움의 구조와 크기에 대한 정보는 주로 로마의 학자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의존한다.[19]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마우솔레움은 북쪽과 남쪽 면의 길이가 약 19.20m였고, 다른 면은 더 짧았으며, 전체 둘레는 약 125.27m였다. 높이는 25큐빗(약 11.4m)이었고, 36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피라미드형 지붕은 24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높이는 하부 구조와 같았다. 건물 전체 높이는 약 42.67m에 달했다.[21]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문법학자 히기누스는 높이를 약 24.38m, 둘레를 약 408.43m로 기록했지만, 이는 부정확한 것으로 여겨진다.[20]
발굴 과정에서 실물보다 약간 큰 약 1.52m 또는 약 1.60m 크기의 조각상들이 다수 발견되었으며, 사자 조각상은 20개가 확인되었다. 또한 건물이 세워진 기반암은 약 32.61m x 약 38.71m 면적에 걸쳐 약 2.44m 또는 약 2.74m 깊이로 파내려 간 것이 확인되었다.[21] 마우솔레움을 장식했던 아름다운 조각상 중 다수는 소실되거나 파편으로만 남아있지만, 발굴과 연구는 계속 진행 중이다.
4. 역사
마우솔레움은 기원전 353년경 카리아의 통치자 마우솔로스를 위해 할리카르나소스(현재의 튀르키예 보드룸)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마우솔로스가 사망한 후 부인 아르테미시아가 건설을 주도했지만, 완공까지 2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라 보고 마우솔로스 생전에 이미 건설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9][32]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건축가 사티로스와 피테우스가 마우솔레움을 설계했다고 기록했다.[9]
대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마우솔레움은 높이 약 43m에 달했으며, 36개의 기둥과 수많은 조각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이 기념물은 웅장한 규모와 아름다운 예술성 덕분에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혔다.[14]
마우솔레움은 오랜 세월 동안 할리카르나소스의 상징으로 자리를 지켰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공이나 기원전 62년과 기원전 58년의 해적 습격에도 파괴되지 않고 16세기 가까이 건재했다. 그러나 12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발생한 여러 차례의 지진으로 인해 점차 붕괴하기 시작하여, 1404년경에는 기단부만 남을 정도로 심하게 파손되었다.[36][37][38]
15세기 초, 이 지역을 점령한 로도스의 성 요한 기사단은 보드룸성을 건설하고 요새화하는 과정에서 마우솔레움의 남은 석재들을 건축 자재로 사용했다. 특히 1494년과 1522년에는 성을 강화하기 위해 남아있던 잔해 대부분을 가져다 썼다. 이 과정에서 기사단은 마우솔레움 지하의 무덤 방을 발견했지만, 이미 오래전에 도굴꾼들에 의해 내부의 보물과 유해(화장된 재로 추정)는 사라진 상태였다.
기사단은 파괴되기 전에 일부 뛰어난 조각상들을 보드룸성으로 옮겨 보존했으며, 이 유물들은 훗날 대영박물관 등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19세기 중반, 대영박물관의 고고학자 찰스 토마스 뉴턴이 마우솔레움 유적지를 발굴하여 남은 기초와 조각들을 찾아냈다.[13] 현재 마우솔레움이 있던 자리에는 유적의 일부와 박물관이 남아 있다.
4. 1. 고대
기원전 4세기, 할리카르나소스는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에 위치한 아케메네스 제국 내 소규모 지역 왕국인 카리아의 수도였다. 기원전 377년, 이 지역의 명목상 통치자였던 헤카톰누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마우솔로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페르시아의 지역 왕조였던 헤카톰누스 왕조는 주변 도시와 지역을 장악하며 세력을 키웠다. 마우솔로스는 그의 누이이자 아내인 아르테미시아 2세와 함께 할리카르나소스에서 24년 동안 주변 영토를 통치했다. 그는 영토를 아나톨리아 남서부 해안까지 확장했으며, 특히 리키아를 침략했는데, 크산토스 무덤과 같은 기념 무덤으로 유명한 리키아의 건축 양식은 그의 영묘 건설에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마우솔로스는 비록 지역 출신이었지만 고대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그리스의 문화와 정치 체제를 존경했다. 그는 해안을 따라 그리스 양식의 도시들을 건설하고 그리스식 민주주의 전통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는 할리카르나소스를 포획으로부터 안전하고 웅장하게 보일 새로운 수도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도시를 장식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사용했다. 빛나는 대리석으로 조각상, 사원, 건물을 짓도록 의뢰했다.
기원전 353년, 마우솔로스가 사망하자 아르테미시아가 단독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페르시아의 사트라프이자 헤카톰니드 왕조의 일원이었던 마우솔로스는 자신을 위한 정교한 무덤을 생전에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죽자 아르테미시아를 포함한 그의 형제자매들이 이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했다. 이 무덤은 매우 유명해져서, 이후 모든 웅장한 무덤을 가리키는 '영묘(mausoleum)'라는 단어는 마우솔로스의 이름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아르테미시아는 남편이 죽은 지 2년 만에 사망했고, 그들의 유골을 담은 단지는 아직 미완성된 무덤에 안치되었다. 희생 제의의 형태로 많은 수의 죽은 동물 시체가 무덤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놓였고, 이후 계단은 돌과 잔해로 채워져 봉쇄되었다. 역사가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장인들은 후원자가 죽은 후에도 작업을 계속하여 완공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자신의 명성과 조각가의 예술을 기리는 기념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많은 현대 역사가들은 2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이토록 복잡하고 거대한 건물을 짓고 장식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마우솔로스가 죽기 전에 이미 건설이 시작되었거나 그의 후계자들이 계속해서 건설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9][32]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에 따르면, 이 건물은 건축가 사티로스와 피테우스가 지었으며, 그들이 이 건물에 대한 논문을 썼다고 기록했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9] 파우사니아스는 로마인들이 마우솔레움을 세계의 가장 위대한 불가사의 중 하나로 여겼으며, 그 때문에 모든 웅장한 무덤을 그 이름을 따서 마우솔레움이라고 불렀다고 덧붙였다.[10]
마우솔레움의 건축 양식은 그리스식 신전과 매우 유사했으며, 외벽이 약간 더 높다는 점이 주된 차이점이었다. 대 플리니우스는 무덤 자체의 크기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북쪽과 남쪽 면은 약 19m였고, 동쪽과 서쪽은 그보다 약간 짧았으며, 둘레는 약 125m였다고 한다. 높이는 약 11.4m였고, 36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지붕은 24개의 단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형태였고, 마우솔레움 본관의 총 높이는 약 43m에 달했다고 한다. 다만, 이 기록은 당시의 측정 단위를 정확히 반영하지 않았을 수 있어 실제 크기는 더 컸을 것이라는 반박도 존재한다. 발굴된 기반암의 두께는 약 33m에서 39m에 달했다.[9]
마우솔레움은 수많은 아름다운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소수의 파편만 남아있다. 발굴된 조각상들은 실물보다 약간 더 큰 크기였으며,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조각상, 네 모퉁이에 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사 입상, 20개의 사자 조각상 등이 발견되었다. 이 기념물은 그 크기나 웅장함뿐만 아니라 디자인의 아름다움과 화려한 조각 장식 때문에 고대인들에 의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혔다.[14] 마우솔레움은 할리카르나소스의 주요 건축물로서 항구 위 언덕의 눈에 띄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9]
마우솔레움은 수 세기 동안 할리카르나소스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도시를 침공했을 때도, 기원전 62년과 기원전 58년에 해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도 파괴되지 않고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마우솔레움은 약 16세기 동안 도시의 폐허 위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우솔레움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2세기에 테살로니카의 유스타티우스는 마우솔레움에 대해 "경이로웠고, 지금도 경이롭다"고 기록했다. 이를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이 건물이 12세기와 예루살렘 성 요한 기사단이 도착하여 폐허가 되었다고 기록한 1402년 사이에 발생한 지진으로 파괴되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10] 그러나 럿렐은 당시 지역 그리스인과 터키인들이 이 거대한 폐허에 대한 이름이나 전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훨씬 이전에 파괴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11]
4. 2. 중세의 파괴
마우솔레움은 오랜 세월 동안 할리카르나소스 시가를 내려다보며 건재했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나, 기원전 62년과 기원전 58년에 해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에도 파괴되지 않고 16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도시의 폐허 위에 서 있었다.그러나 12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발생한 여러 차례의 지진으로 인해 구조물이 점차 약화되고 기둥들이 무너져 내렸다. 결국 지붕 위에 있던 거대한 청동 전차 조각상도 땅으로 떨어져 파괴되었다.[36][37][38] 1404년 무렵에는 마우솔레움의 거대한 기단 부분만이 간신히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게 파손된 상태였다.

15세기 초, 로도스의 성 요한 기사단이 이 지역을 침공하여 보드룸 요새(성 베드로 성채)를 건설하면서 마우솔레움의 파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1494년 기사단은 요새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마우솔레움에 남아있던 석재들을 가져다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1522년 오스만 제국 군대가 침공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기사단은 보드룸 성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마우솔레움에 남아있던 거의 모든 석재와 파편들을 성벽을 쌓는 데 사용했다. 오늘날에도 보드룸성의 성벽 곳곳에서는 과거 마우솔레움에 사용되었던 잘 다듬어진 대리석 조각들을 찾아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요새 강화 작업 중 기사단 일부가 마우솔레움 유적의 기단부로 들어가 거대한 관이 놓인 방을 발견했다고 한다. 하지만 발견 당시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기에 관을 열지 않고 다음 날 다시 오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 날 돌아왔을 때 관은 이미 열려 있었고, 안에 있었을 보물과 마우솔로스, 아르테미시아의 유해는 사라진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일부에서는 기사단이 약탈을 숨기기 위해 이야기를 꾸몄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후대의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기사단이 도착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도굴꾼들이 지하로 터널을 파서 부장품들을 훔쳐 갔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는 화장되었을 가능성이 커, 애초에 시신이 아닌 유골 단지만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사단은 마우솔레움에 남아있던 조각상들 중 일부 뛰어난 작품들을 성벽 자재로 사용되거나 석회로 만들어지기 전에 보드룸성으로 옮겨 보관했다. 이 조각들은 십자군이 물러난 후에도 약 300년 동안 성 안에 보존되었으며, 이후 일부는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5. 발굴
마우솔레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19세기 대영박물관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1856년 대영박물관은 고고학자 찰스 토머스 뉴턴을 파견하여 유적 조사를 진행했다.[13] 뉴턴은 고대 문헌 연구와 현장 조사를 통해 마우솔레움의 위치를 확인하고 발굴을 시작하여, 건물의 기초, 벽, 계단 등 구조 일부와 마우솔로스, 아르테미시아 조각상을 포함한 다수의 유물을 발견했다.[13][25]
뉴턴이 발굴한 유물 중 상당수는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일부 대리석 블록은 1857년 몰타의 영국 해군 부두 건설에 사용되었다.[25]
20세기에도 발굴과 연구는 이어졌다. 1960년대 조사에서는 무덤이 성 요한 기사단 도착 이전에 이미 도굴되었으며, 유해가 화장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스웨덴 및 덴마크 연구팀이 추가 조사를 진행했고, 특히 덴마크 오르후스 대학교의 크리스티안 예페센 교수는 마우솔레움에 대한 심층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현재 마우솔레움 유적은 터키 보드룸 시내에 기초만 남아 있으며, 옆에는 발굴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대영박물관은 뉴턴 발굴 유물과 십자군이 보드룸 성에 사용했던 마우솔레움 조각 일부를 소장하고 있다. 보드룸 성 벽에서도 마우솔레움에서 가져온 석재들을 확인할 수 있다.[29][30][31]
5. 1. 찰스 토머스 뉴턴의 발굴
19세기에 대영박물관은 보드룸 성에 있던 할리카르나소스 마우솔레움 관련 유물들을 확보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이미 1846년, 스트랫포드 드 레드클리프 경이 성에 있던 부조들을 옮길 허가를 얻었으며[12], 19세기 중반에는 한 영국 영사가 성의 조각상 일부를 가져가기도 했다.1852년, 대영박물관은 마우솔레움의 더 많은 유물을 찾기 위해 고고학자 찰스 토머스 뉴턴을 파견했다. 뉴턴은 대 플리니우스와 같은 고대 작가들의 기록을 연구하여 기념물의 대략적인 크기와 위치를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 후보지가 사람이 사는 주거 지역이라는 난관에 부딪혔다. 토지 소유주로부터 부지를 매입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뉴턴은 끈기 있게 노력하여(한 기록에 따르면 2개월 이상 소요) 결국 발굴에 필요한 땅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뉴턴은 땅을 파고 주변 부지 아래로 터널을 뚫어 탐사하는 방식으로 발굴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마우솔레움의 벽 일부, 계단, 그리고 기초의 세 모서리를 발견했다.[13] 또한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 1세의 이름이 새겨진 항아리가 발견되면서, 그가 찾던 위치가 맞다는 확신을 더했다. 발굴을 계속하자 무덤으로 이어지는 입구 복도와 관이 놓였던 방도 발견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이미 오래전에 도굴되어 내부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뉴턴의 발굴은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건물의 벽을 장식했던 부조들과 계단식 지붕의 일부를 찾아냈다. 또한, 지붕 위에 세워져 있던 거대한 마차 조각상의 일부로 추정되는 지름 약 2m 크기의 부서진 돌 바퀴와, 건물 꼭대기에 서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조각상을 발견했다.[13]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뉴턴의 발굴 원정은 3년 동안 이어졌으며, 발굴된 유물들을 영국으로 옮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13] 1857년 10월, 뉴턴은 현장에서 발굴한 대리석 블록들을 영국 해군 함선 서플라이(Supply)에 실어 몰타로 보냈다. 이 대리석들은 영국 해군을 위한 몰타의 새로운 부두 건설에 사용되었다. 오늘날 이 부두는 코스피쿠아의 1번 부두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사용된 블록들은 그랜드 하버의 독야드 크릭 아래에 잠겨 있어 직접 볼 수는 없다.[25] 뉴턴이 발굴한 다른 주요 조각상과 유물들은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소장, 전시되고 있다.
5. 2. 현대의 발굴 및 연구
19세기에 대영박물관은 보드룸 성에 있던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 관련 유물들을 입수했으며, 1856년 유적지를 조사하기 위해 고고학자 찰스 토머스 뉴턴을 파견했다.[13][25] 뉴턴은 대 플리니우스를 비롯한 고대 학자들이 남긴 기록을 연구하여 마우솔레움의 대략적인 크기와 위치를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후보지가 사람이 사는 주거 지역이었기 때문에 발굴에 어려움을 겪었다. 뉴턴은 토지 소유주로부터 땅을 사야 했지만, 2개월 이상 끈기있게 노력하여 결국 매입했다.뉴턴은 해당 부지를 발굴하여 벽, 계단, 그리고 마우솔레움 기초의 세 모서리를 발견했다.[13] 이를 통해 발굴할 나머지 토지를 특정할 수 있었다. 발굴을 계속하면서 뉴턴은 건물의 벽을 장식했던 부조(프리즈) 일부와 무너진 계단식 지붕의 잔해를 발견했다. 또한 지붕 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지름 약 2m 크기의 부서진 돌 마차 바퀴와, 건물 꼭대기에 서 있었던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조각상도 발견했다.[25] 1857년 10월, 뉴턴은 현장에서 발굴한 대리석 블록들을 HMS Supply 함선을 이용해 몰타로 운반했으며, 이 대리석들은 영국 해군을 위한 몰타의 새로운 부두(현재 코스피쿠아의 1번 부두) 건설에 사용되었다. 이 블록들은 현재 그랜드 하버의 독야드 크릭에 잠겨 있어 볼 수 없다.[25] 뉴턴이 발굴한 다른 유물들은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1960년대에 실시된 고고학 조사에서는, 성 요한 기사단이 도착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도굴꾼들이 무덤 방 아래로 터널을 파서 내부의 유물을 약탈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이 연구는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시신이 화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무덤 방에는 재가 담긴 항아리만 안치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는 기사단이 관을 발견했을 때 시신이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1966년부터 1967년까지 스웨덴의 대학과 교수진들이 조사를 진행했으며,[32] 이후 1966년부터 1977년까지는 덴마크 오르후스 대학교의 크리스티안 예페센 교수가 마우솔레움을 상세히 연구하여 6권짜리 연구서 The Maussolleion at Halikarnassos|영어을 출판했다.
현재 마우솔레움 유적은 보드룸 시내에 기초만 남아 있으며, 유적지 옆에는 작은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이 박물관에서는 최근의 연구 결과와 함께 과거 마우솔레움에 있었던 주춧돌이나 조각 등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이스탄불에는 터키의 역사적인 건축물들을 모아놓은 공원에 마우솔레움의 축소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대영박물관에는 뉴턴이 발굴한 유물 외에도, 십자군이 보드룸 성에 사용했던 마우솔레움 조각 중 일부가 소장되어 있다. 이 조각들은 19세기에 영국 영사에 의해 성에서 옮겨진 것이다. 주요 소장품으로는 지붕 위 마차의 바퀴와 말 동상 일부, 77개의 조각으로 복원된 마우솔로스 동상, 8개의 사자상 조각, 그리고 아마조노마키(그리스인과 아마존 여전사들의 전투)를 묘사한 프리즈 조각 등이 포함된다.
한편, 보드룸 성의 벽에서도 마우솔레움에서 가져온 기둥, 부조, 건축 자재 등의 석재가 스폴리아(전용석)로 사용된 것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29][30][31]
6. 유물
마우솔레움 유적지에서는 건축물의 웅장함과 예술성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이 유물들은 마우솔레움의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발굴된 유물 중 상당수는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마우솔로스와 그의 아내이자 여동생인 아르테미시아의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조각상, 아마조노마키 장면을 정교하게 묘사한 프리즈, 건물을 장식했던 사자 조각상, 그리고 지붕 꼭대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전차의 말 조각상 파편 등이 포함된다.[12][13]
또한, 마우솔레움 유적에서는 아케메네스 제국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인 크세르크세스 1세의 이름이 4개 언어로 새겨진 설화 석고 항아리가 발견되기도 했다.[15][16] 이 항아리는 당시 카리아와 페르시아 제국 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17]
6. 1. 대영박물관 소장 유물
성 요한 기사단은 보드룸 성을 건설하고 요새화하는 과정에서 마우솔레움의 석재와 조각들을 사용했다. 기사단은 일부 뛰어난 조각 작품들을 성 안으로 옮겨 보관했으며, 이 작품들은 3세기 동안 그곳에 남아 있었다.[12]19세기에 들어 대영박물관은 보드룸 성에 있던 마우솔레움 관련 유물들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1846년, 스트랫포드 드 레드클리프 경은 성에 보관되어 있던 부조들을 옮길 허가를 받았다.[12] 이후 1852년, 대영박물관은 고고학자 찰스 토머스 뉴턴을 파견하여 마우솔레움 유적지를 본격적으로 발굴하고 더 많은 유물을 찾도록 했다.[13] 뉴턴은 발굴을 통해 벽의 일부, 계단, 기초의 세 모서리 등을 발견했으며, 마우솔레움을 장식했던 부조, 무너진 지붕의 잔해, 그리고 지붕 위에 있던 거대한 마차의 바퀴(지름 약 2m)와 파편 등을 찾아냈다. 특히, 건물 꼭대기에 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조각상을 발견한 것은 큰 성과였다. 뉴턴이 발굴한 유물들과 기존에 성에 보관되어 있던 유물 중 상당수가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한편, 1857년 뉴턴은 발굴 현장에서 나온 대리석 블록들을 몰타로 보내 영국 해군을 위한 부두 건설에 사용하기도 했다.[25]
현재 대영박물관에는 마우솔레움에서 나온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주요 소장품은 다음과 같다.
-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 조각상: 실물보다 약간 큰 크기로 제작된 마우솔로스와 그의 아내이자 여동생인 아르테미시아 2세의 조각상. 마우솔로스 조각상은 77개의 파편을 복원한 것이다.
- 마차 관련 유물: 지붕 꼭대기에 있던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콰드리가)의 일부였던 말 조각상 파편과 거대한 마차 바퀴.
- 사자 조각상: 마우솔레움을 장식했던 여러 사자 조각상 중 일부. 대영박물관에는 8점의 사자상 조각이 소장되어 있다.
- 아마조노마키 프리즈: 마우솔레움의 벽을 장식했던 부조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리스인과 아마존 여전사들의 전투 장면(아마조노마키)을 묘사하고 있다. 여러 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으며, 스코파스, 브락시스, 티모테우스, 레오카레스 등 당대 최고의 그리스 조각가들이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0]
이 외에도 다양한 크기의 인물 및 동물 조각상 파편, 건축 부재 등이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마우솔레움의 과거 웅장함과 예술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6. 2. 크세르크세스 1세의 항아리
방해석 또는 설화 석고로 만들어진 항아리, 즉 ''알라바스트론''이 마우솔레움 유적의 서쪽 계단 아래에서 발견되었다.[15] 이 항아리에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통치자 크세르크세스 1세(기원전 486–465년 재위)의 서명이 고대 페르시아어, 이집트어, 바빌론어, 엘람어의 네 가지 언어로 새겨져 있다.[15][16][17] 고대 페르시아어 비문은 다음과 같다:[16]: 𐎧𐏁𐎹𐎠𐎼𐏁𐎠 𐏐 𐏋 𐏐 𐎺𐏀𐎼𐎣
: (''Xšayāršā : XŠ : vazraka'')
: "크세르크세스 : 대왕."
이집트에서 유래한 이러한 종류의 항아리는 아케메네스 제국에게 매우 귀중한 물품이었으며, 크세르크세스가 당시 카리아의 통치자들에게 선물로 주었고, 이후 귀중품으로 보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7] 특히, 이 항아리는 크세르크세스가 제2차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당시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의 유일한 여성 제독으로서 활약한 카리아의 군주 아르테미시아 1세에게 그 공을 치하하며 선물했을 수도 있다.[18][16][15] 이 항아리는 카리아의 통치자와 아케메네스 제국 간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15][16]
7. 현대 건축에 미친 영향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은 후대 건축, 특히 1900년대 초반의 건축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영향은 주로 전쟁 기념비나 정부청사와 같은 공공 건축물 디자인에 나타난다.
7. 1. 영향을 받은 건축물
마우솔레움의 설계에 기초하거나 그 영향을 받아 디자인된 현대 건물로는 신시내티의 포스 앤 바인 타워, 세인트루이스의 민사 법원 건물, 뉴어크의 내셔널 뉴어크 빌딩, 뉴욕 시의 그랜트 묘와 26 브로드웨이, 로스앤젤레스 시청, 멜버른의 추모 기념관, 런던의 세인트 조지 교회 첨탑, 인디애나폴리스의 인디애나 전쟁 기념관 (그리고 그 다음 세일스포스 타워)[26][27], 워싱턴 D.C.의 신전의 집, 도쿄의 국회의사당, 피츠버그의 군인 및 해군 기념관, 피오리아의 커머스 뱅크 빌딩 등이 있다.
밀라스 (마우솔로스의 아버지인 헤카톰누스의 묘가 있는 곳이기도 함)에는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의 소규모 로마 시대(기원전 2세기) 복제품인 귬쉬케센이 있다.
마우솔로스 영묘는 1900년대 초반의 건축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전쟁 위령비나 정부 청사 등에 채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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