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에렉투스 솔로엔시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호모 에렉투스 솔로엔시스는 자바 섬 솔로 강 유역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 화석으로, 1931년 처음 발견되었다. 초기에는 호모 사피엔스 솔로엔시스로 분류되었으나, 1980년대 분석을 통해 호모 에렉투스로 재분류되었다. 솔로인의 두개골은 호모 에렉투스의 특징을 보이며, 뇌 용량이 크고 두개골이 두꺼운 특징을 가진다. 최근 연구에서는 솔로인의 생존 시기를 11만 7천 년 전에서 10만 8천 년 전으로 추정하며, 현생 인류와 상호 작용 없이 마지막으로 생존한 호모 에렉투스 집단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솔로인의 도구 사용과 식인 풍습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현생 인류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32년 기재된 화석 분류군 - 용각아목
용각아목은 트라이아스기 중기에 출현하여 긴 목과 꼬리, 잎을 먹는 이빨을 가진 초식 공룡의 아목으로, 초기에는 이족 보행을 하다가 대형화되면서 사족 보행으로 진화했으며, 쥐라기와 백악기에 번성하다가 백악기-제3기 대멸종으로 멸종했다. - 1932년 기재된 화석 분류군 - 이크티오스테가
이크티오스테가는 데본기 후기에 살았던 사지동물로, 어류와 육상 동물의 특징을 모두 가지며, 튼튼한 사지와 척추를 가지고 물가에서 육상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던 초기 사지동물의 생활 방식을 보여준다. - 호모 에렉투스 - 자바 원인
자바 원인은 1891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발견된 화석으로, 인류 진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호모 에렉투스로 분류된다. - 호모 에렉투스 - 베이징 원인
베이징 원인은 중국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 화석으로, 석기 사용, 불 사용, 직립 보행 등의 특징을 보이며, 현생 인류의 아시아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아프리카 기원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 동자와주 - 모조케르토
모조케르토는 인도네시아 동자바 주에 위치한 도시로, 마자파히트 왕국의 중요한 중심지였으며, 세 개의 구로 나뉘고 풍부한 역사와 문화 유적을 바탕으로 관광 산업이 발달한 "Kota Budi Parinda"라는 모토를 가진 도시이다. - 동자와주 - 수라바야
수라바야는 인도네시아 동자와 주의 주도이자 두 번째로 큰 도시로서, 역사적인 항구 도시이자 독립 전쟁의 격전지였으며, 현재는 동남아시아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금융, 상업, 산업의 중심지이다.
호모 에렉투스 솔로엔시스 - [생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학명 | Homo erectus soloensis |
명명자 | Oppenoorth, 1932 |
속 | 호모 |
종 | 호모 에렉투스 |
아종 | 솔로엔시스 |
멸종 여부 | 멸종 |
멸종 시기 | 후기 홍적세 |
동종 이명 | Homo (Javanthropus) soloensis Oppenoorth, 1932 H. sapiens soloensis Dubois, 1940 H. neanderthalensis soloensis Weidenreich, 1940 Palaeoanthropus soloensis Evans, 1945 H. erectus ngandongensis Sartono, 1975 |
특징 | |
뇌 용량 | 1013 ~ 1251 cm³ |
키 | 158 cm |
몸무게 | 51 kg |
2. 발견 및 연구사
19세기 후반, 찰스 다윈의 『인간의 유래』 발표 이후 많은 진화론자는 인류의 기원이 아프리카가 아닌 아시아라고 주장했다(아시아 기원설). 독일의 에른스트 헤켈은 최초의 인류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진화했다고 주장하며 가상의 속명인 '피테칸트로푸스'(''Pithecanthropus'', 유인원 인간)를 제안했다. 이는 네덜란드 의사 외젠 뒤부아에게 영감을 주어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에서 '잃어버린 고리'를 찾게 했고, 그는 1891년 자바섬 트리닐 지역 솔로 강변에서 호모 에렉투스(자바원인) 화석을 발견했다.[1]
이후 솔로 강 유역에서는 추가적인 고인류 화석 탐사가 이어졌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자바섬 솔로강변 응안동(Ngandong) 등지에서 네덜란드 및 독일 연구자들(W. F. F. 오페노오르트, C. 테르 하르, G. H. R. 폰 코니히스발트 등)에 의해 10여 점이 넘는 두개골 조각과 다리뼈 화석들이 발견되었다.[3] 이 화석들은 '솔로인' 또는 '응안동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발견 초기, 솔로인의 두뇌 용량(1000~1250cc)이 기존에 알려진 호모 에렉투스보다 크다는 점 때문에 호모 에렉투스에서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는 중간 단계, 즉 '호모 사피엔스 솔로엔시스'(Homo sapiens soloensisla)로 분류되었다. 혹은 초기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인의 아시아 인종, 또는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의 일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의 분석 결과, 솔로인은 자바원인(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이 후기까지 살아남으면서 지역 환경에 적응해 두뇌 용량과 신체 크기가 커진 호모 에렉투스의 한 유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되어 호모 에렉투스 솔로엔시스(Homo erectus soloensisla)로 재분류되었다.
솔로인의 정확한 생존 연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있었으나, 2020년 발표된 종합적인 연대 측정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응안동의 화석 지층은 약 11만 7천 년 전에서 10만 8천 년 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밝혀졌다.[11] 이는 솔로인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호모 에렉투스 집단 중 하나이며, 약 5만 5천 년 전 이후 동남아시아에 도착한 현생 인류와는 직접적으로 만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솔로인은 오랫동안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조상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발견 초기부터 솔로인 두개골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두개골의 형태적 유사성이 지적되었고,[2]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견된 일부 고대 현생 인류 화석(예: WLH-50)에서도 솔로인과 유사한 특징이 나타나기도 했다.[14] 이는 과거 현생 인류의 다지역 기원설이나, 현생 인류가 각 지역의 고인류와 혼혈하며 진화했다는 동화 모델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특히 앨런 손과 같은 학자는 오스트레일리아에 두 차례의 이주가 있었으며, 첫 번째 이주민은 솔로인과 같은 강건한 형태의 고인류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이중 기원 모델'을 주장하기도 했다.[14] 그러나 현재로서는 솔로인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거나 현생 인류와 혼혈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며, 솔로인은 현생 인류 도착 이전에 절멸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11]
2. 1. 초기 발견 (1931년 ~ 1940년대)
19세기 후반 에른스트 헤켈 등이 주장한 아시아 인류 기원설과 외젠 뒤부아가 1893년 자바섬 트리닐에서 발견한 호모 에렉투스(자바원인) 유골은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1] 이후 솔로 강 유역에서는 추가적인 고인류 화석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1931년 네덜란드 지질학자 카렐 테르 하르(Carel ter Haar)는 자바섬 솔로 강변 응안동(Ngandong) 마을 근처에서 플라이스토세 시대의 지층을 발견했다.[2] 이 발견을 계기로 1931년부터 1933년까지 네덜란드 지질학자 빌렘 프레데릭 플로러스 오페노오르트(Willem Frederik Florus Oppenoorth), 테르 하르, 그리고 독일-네덜란드 고인류학자 구스타프 하인리히 랄프 폰 코니히스발트(Gustav Heinrich Ralph von Koenigswald)의 지휘 아래 응안동 유적 발굴이 진행되었다.[3] 이 발굴을 통해 12개의 두개골 조각(잘 보존된 두개골 포함)과 2개의 오른쪽 정강이뼈(tibia)가 발견되었다.[3] 폰 코니히스발트는 이전에 피테칸트로푸스가 유인원과 인류의 중간 단계라고 확신하고 솔로강 주변을 탐사하던 중이었다.
발견된 두개골의 뇌 용량은 1000~1250cc 사이로, 당시 알려진 호모 에렉투스의 평균 뇌 용량(800~1000cc)보다 컸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호모 에렉투스에서 현생인류로 진화하는 중간 단계로 간주되어 '호모 사피엔스 솔로엔시스'(''Homo sapiens soloensis'')로 분류되기도 했다. 또한 초기 호모 사피엔스나 네안데르탈인의 한 갈래, 혹은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1933년경 대공황의 여파로 자바 지질 조사국의 예산이 삭감되고 관심이 석유 탐사로 옮겨가면서 응안동 발굴은 중단되었다.[3] 발굴을 주도했던 오페노오르트는 네덜란드로 돌아갔고, 테르 하르는 결핵을 앓다가 네덜란드에서 사망했다. 폰 코니히스발트 역시 잠시 해고되었다가 카네기 과학 연구소의 지원으로 복직했지만, 이후 상기란 유적 연구에 집중하게 되었다.[3]
1935년, 발견된 솔로인 유골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수도 바타비아(현 자카르타)로 옮겨져 빌렘 알폰스 미스베르그(Willem Alphonse Mijsberg) 교수가 관리하게 되었다.[3]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2년 일본군이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령하면서 유골은 서자바의 반둥으로 다시 옮겨졌고, 폰 코니히스발트는 일본군에 의해 약 32개월간 억류되었다.[3] 전쟁이 끝난 후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이 발발하는 혼란 속에서, 중국을 탈출했던 독일 출신 유대인 인류학자 프란츠 바이덴라이히(Franz Weidenreich)의 도움으로 폰 코니히스발트 부부와 솔로인 유골은 미국 뉴욕으로 옮겨졌다.[4] 폰 코니히스발트와 바이덴라이히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에서 솔로인 유골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이는 1948년 바이덴라이히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4][5]
=== 1931년 ~ 1933년 발견된 주요 화석 ===
표본 | 설명 |
---|---|
두개골 I | 거의 완전한 두개골 조각, 고령 여성 추정 |
두개골 II | 3~7세 어린이의 전두골(frontal bone) 추정 |
두개골 III | 뒤틀린 두개골 조각, 고령 개인 추정 |
두개골 IV | 중년 여성의 두개골 조각 추정 |
두개골 V | 남성의 두개골 조각 추정, 길이 221mm |
두개골 VI | 거의 완전한 두개골 조각, 성인 여성 추정 |
두개골 VII | 어린 여성의 오른쪽 두정골(parietal bone) 조각 추정 |
두개골 VIII | 어린 남성의 분리된 두 개의 두정골 추정 |
두개골 IX | 기저부가 없는 두개골 조각, 고령 개인 추정 (크기는 여성, 무게는 남성과 유사) |
두개골 X | 산산이 부서진 두개골 조각, 건장한 고령 여성 추정 |
두개골 XI | 거의 완전한 두개골 조각 |
정강이뼈 A | 성인 남성의 골간(diaphysis) 조각 추정, 중간 부분 지름 101mm |
정강이뼈 B | 거의 완전한 오른쪽 정강이뼈, 성인 여성 추정, 길이 365mm, 중간 부분 지름 86mm |
2. 2. 재분류 및 추가 연구 (1950년대 ~ 1990년대)
1948년 프란츠 바이덴라이히가 사망한 후, 폰 코니히스발트와의 솔로인 유골 공동 연구 결과는 1951년 바이덴라이히의 사후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5] 폰 코니히스발트는 1956년 자신의 저서 『선사 시대 사람들과의 만남(Meeting Prehistoric Men영어)』에서 응안동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여 연구 결과를 일부 공개했다. 이 시기 솔로인 유골은 네덜란드의 우트레흐트 대학교에 보관되어 있었다.1967년, 폰 코니히스발트는 인도네시아의 고인류학자 테우쿠 자콥에게 박사 과정 연구를 위해 솔로인 유골 자료를 제공했다. 자콥은 이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했으며,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직접 응안동 지역의 발굴을 다시 감독하여 두개골 조각 2점(응안동 15, 응안동 16)과 왼쪽 관골구(골반의 일부) 조각 1점(응안동 17)을 추가로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3] 1978년, 폰 코니히스발트는 솔로인 유골 관련 자료를 인도네시아 정부에 반환하였고, 유골들은 족자카르타 특별주에 위치한 가자 마다 대학교로 옮겨져 현재까지 보관 및 연구되고 있다.[3]
솔로인은 발견 초기, 비교적 큰 두뇌 용량(1000~1250cc) 때문에 호모 에렉투스에서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는 중간 단계로 여겨져 '호모 사피엔스 솔로엔시스(Homo sapiens soloensisla)'로 분류되기도 했다. 또한 초기 호모 사피엔스나 네안데르탈인의 아종, 혹은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의 일종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루어진 추가 분석 결과, 솔로인은 기존에 알려진 자바 원인(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이 후기까지 생존하면서 환경에 적응하여 두뇌 용량과 신체 크기가 커진 형태로 판단되었다. 이에 따라 최종적으로 호모 에렉투스의 한 유형인 호모 에렉투스 솔로엔시스로 재분류되었다.
2. 3. 최근 연구 동향 (2000년대 ~ 현재)
솔로인 유해의 연대에 대한 논쟁은 21세기에도 계속되었다. 2000년대 이후 주요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2008년: 세 개의 두개골에 대한 감마선 분광법 분석 결과 우라늄 용탈이 일어났음이 밝혀졌다. 이를 바탕으로 솔로인 유해의 연대는 약 7만 년에서 4만 년 전으로 재측정되었다. 이 결과는 솔로인이 현생 인류와 동시대에 살았을 가능성을 여전히 남겨두었다.[9]
- 2011년: 부석 각섬석에 대한 아르곤-아르곤 연대 측정 결과 최대 연령이 54만 6000 ± 1200년 전으로 나타났다. 또한, 지가르 I(Jigar I) 유적지 바로 하류의 포유류 뼈에 대한 전자스핀공명 연대 측정(ESR)과 우라늄-토륨 연대 측정 결과 최소 연령이 14만 3000년에서 7만 7000년 전으로 측정되었다. 이 넓은 연대 범위는 솔로인이 현생 인류가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퍼져나가기 훨씬 이전에, 다른 지역의 호모 에렉투스와 동시대에 살았을 가능성을 시사했다.[10]
- 2020년: 응동 유적지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인 연대 측정이 이루어졌다. 연구 결과, 솔로강이 약 50만 년 전에 현재의 유적지를 통과하도록 경로가 변경되었고, 솔로 계단은 31만 6000년 전에서 3만 1000년 전 사이에, 응동 계단은 14만 1000년 전에서 9만 2000년 전 사이에 퇴적되었음이 밝혀졌다. 결정적으로, 호모 에렉투스 솔로엔시스의 뼈가 발견된 지층은 11만 7000년 전에서 10만 8000년 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 결과는 솔로인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호모 에렉투스 집단이며, 약 5만 5천 년 전 이후 동남아시아에 도착한 현생 인류와는 직접적으로 만나거나 상호 작용하지 않았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11]
3. 해부학적 특징
호모 에렉투스 솔로엔시스는 일반적으로 자와섬에 약 백만 년 전 정착했던 초기 호모 에렉투스(피테칸트로푸스)의 직계 후손으로 간주된다.[16] 해부학적으로는 초기 자바 ''호모 에렉투스''보다 더 진화된 특징을 보이는데, 특히 더 큰 뇌 용량, 높아진 두개골 천장, 줄어든 안와 후 수축, 덜 발달된 눈썹궁 등이 관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기 ''호모 에렉투스''와 많은 유사점을 공유하며, 전반적으로 매우 두껍고 견고한 골격을 가진다.[16][5]
초기에 발견된 화석들은 비교적 큰 뇌 용량(평균 1000cc 이상[19][20]) 때문에 호모 에렉투스에서 현생 인류로 진화하는 중간 단계로 여겨져 ''호모 사피엔스 솔로엔시스''(Homo sapiens soloensislat)로 분류되기도 했다. 초기 호모 사피엔스나 네안데르탈인의 한 유형, 또는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의 일종으로 보기도 했으나,[2] 1980년대 이후의 분석을 통해 후기까지 생존하며 일부 특징이 변화한 호모 에렉투스의 아종으로 재분류되었다.[12][13]
솔로인의 강건한 해부학적 특징, 특히 오스트레일리아 고오 스완프(Kow Swamp) 등지에서 발견된 고대 현생 인류 화석과의 유사성 때문에, 과거에는 솔로인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조상이거나 현생 인류와 혼혈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4] 그러나 최근의 연대 측정 결과(솔로인이 약 11만 7천 년에서 10만 8천 년 전에 살았다는 것)와 유전자 연구는 솔로인이 현생 인류 집단에 직접적인 유전적 기여를 했을 가능성은 낮다는 것을 시사한다.[11][15]
3. 1. 두개골

솔로인(Solo Man)의 두개골은 호모 에렉투스의 특징으로 매우 두껍다. 이는 현생 인류 두께의 두 배에서 세 배에 달한다. 화석의 성인 여부는 두개골 봉합의 융합 정도로 판단하는데, 이는 현생 인류와 비슷한 속도로 융합된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진다. 하지만 ''호모 에렉투스''는 더 어린 나이에 봉합이 융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5] 남성과 여성 표본은 남성이 여성보다 더 견고하다는 가정하에 구분되었지만, 남성과 여성 모두 다른 아시아 ''호모 에렉투스''에 비해 매우 견고하다. 성인 두개골의 평균 길이와 너비는 202mm x 152mm이며, 이는 북경원인(Peking Man)과 비례적으로 유사하지만 둘레는 훨씬 크다. 발견된 두개골 중 두개골 V는 길이가 221mm로 가장 길다.[5] 비교하자면, 현생 인류 두개골의 평균 치수는 남성의 경우 176mm x 145mm, 여성의 경우 171mm x 140mm이다.[18]
솔로인 유골은 더욱 원시적인 자바 ''호모 에렉투스''보다 더 진화된 특징(유도된 특징)을 보인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더 큰 뇌 용량, 높아진 두개골 천장, 감소된 안와 후 수축, 그리고 덜 발달된 눈썹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초기 ''호모 에렉투스''와 매우 유사한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다.[16]
북경원인과 마찬가지로 두개골 중앙선을 따라 약간의 시상능선이 나타난다. 다른 아시아 ''호모 에렉투스''에 비해 이마는 비례적으로 낮고 경사각도 또한 낮다. 눈썹궁은 북경원인처럼 연속적인 막대 모양을 이루지 않고 중간 지점에서 아래로 휘어져 코뼈를 형성한다. 눈썹은 특히 바깥쪽 끝(얼굴 가장자리에 가까운 부분)에서 매우 두껍다. 북경원인과 마찬가지로 전두동은 눈 사이에 국한되어 있으며 눈썹 부위로 확장되지 않는다.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에 비해 측두근이 덮었을 부위는 다소 평평하다. 눈썹궁은 현저하게 두꺼워진 광대뼈와 합쳐진다. 두개골은 표현형적으로, 두개골이 광대뼈에 비해 비례적으로 좁아 위에서 두개골을 내려다볼 때 광대뼈가 여전히 보이는 것을 말한다. 측두골의 인상부분은 북경원인과 마찬가지로 삼각형이며, 측두하릉은 매우 날카롭다.[5] 초기 자바 ''호모 에렉투스''와 마찬가지로, 아래쪽과 위쪽 측두선(두정골에 위치)은 두개골 뒤쪽으로 갈수록 발산한다.[19]
두개골 뒤쪽에는 날카롭고 두꺼운 후두릉(뼈의 돌출된 막대)이 있으며, 이는 후두골과 항인대 평면 사이의 명확한 경계를 나타낸다. 후두릉은 현생 인류의 외후두융기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가장 돌출되어 있다. 측두골 기저부는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보다는 자바원인과 북경원인과 일치한다.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와 달리, 익상골 뿌리 근처에 뚜렷한 뼈 피라미드 구조가 있다. 두개골 기저부의 측두골 유돌부는 현저하게 돌출되어 있다. 후두과절(두개골을 척추에 연결)은 대후두공(척수가 두개골로 들어가는 곳)에 비해 비례적으로 작다. 크고 불규칙한 뼈 돌기가 후두과절 바로 뒤에 있다.[5]
측정 가능한 여섯 개의 응동(Ngandong) 표본의 뇌 용량은 1013cc에서 1251cc 범위이며, 응아위(Ngawi) I 두개골은 1000cc, 세 개의 삼붕마칸(Sambungmacan) 두개골은 각각 1035cc, 917cc, 1006cc이다.[19] 전반적으로 아시아 ''호모 에렉투스''는 평균 약 1000cc의 큰 뇌를 가졌다.[20] 비교하자면, 1955년 63명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 대한 조사에서 뇌 용량은 943cc에서 1399cc 범위였는데, 이는 아시아 ''호모 에렉투스''의 뇌 용량이 현생 인류의 변이 범위 내에 포함됨을 의미한다.[21] 두개골 기저부, 따라서 뇌는 곡선형이 아니라 평평한 것으로 보인다. 두개골 기저부, 뇌하수체 근처의 터어키 안장은 현생 인류보다 훨씬 크며, 바이덴라이히는 1951년 이를 확장된 뇌하수체가 뼈의 비정상적인 두꺼워짐을 유발했을 수 있다고 신중하게 설명했다.[5]
3. 2. 골격
성인인지 미성년자인지는 두개골 봉합의 융합 정도를 기준으로 판단했는데, 이는 현생 인류와 유사한 속도로 봉합이 융합된다는 가정하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호모 에렉투스''에서는 더 어린 나이에 봉합이 융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호모 에렉투스''의 특징으로, 솔로인의 두개골은 매우 두꺼운데, 현생 인류 두께의 두 배에서 세 배에 달한다. 남성과 여성 표본은 남성이 여성보다 더 견고하다는 가정하에 구분되었지만, 남성과 여성 모두 다른 아시아 ''호모 에렉투스''에 비해 매우 견고하다. 성인 두개골의 평균 길이와 너비는 202mm이며, 북경원인과 비례적으로 유사하지만 둘레는 훨씬 크다. 두개골 V는 221mm로 가장 길다.[5] 비교하자면, 현생 인류 두개골의 평균 치수는 남성의 경우 176mm, 여성의 경우 171mm이다.[18]
솔로인 유골은 더욱 원시적인 자바 ''호모 에렉투스''보다 더 진화된 특징(유도된 특징)을 보이는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더 큰 뇌 용량, 높아진 두개골 천장, 감소된 안와 후 수축, 그리고 덜 발달된 눈썹궁이다. 하지만 여전히 초기 ''호모 에렉투스''와 매우 유사하다.[16] 북경원인과 마찬가지로 두개골 중앙선을 따라 약간의 시상능선이 나타난다. 다른 아시아 ''호모 에렉투스''에 비해 이마는 비례적으로 낮고 경사각도 또한 낮다. 눈썹궁은 북경원인처럼 연속적인 막대 모양을 이루지 않고 중간 지점에서 아래로 휘어져 코뼈를 형성한다. 눈썹은 특히 바깥쪽 끝(얼굴 가장자리에 가까운 부분)에서 매우 두껍다. 북경원인과 마찬가지로 전두동은 눈 사이에 국한되어 있으며 눈썹 부위로 확장되지 않는다.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에 비해 측두근이 덮었을 부위는 다소 평평하다. 눈썹궁은 현저하게 두꺼워진 광대뼈와 합쳐진다. 두개골은 표현형적으로, 두개골이 광대뼈에 비해 비례적으로 좁아 위에서 두개골을 내려다볼 때 광대뼈가 여전히 보이는 것을 말한다. 측두골의 인상부분은 북경원인과 마찬가지로 삼각형이며, 측두하릉은 매우 날카롭다.[5] 초기 자바 ''호모 에렉투스''와 마찬가지로, 아래쪽과 위쪽 측두선(두정골에 위치)은 두개골 뒤쪽으로 갈수록 발산한다.[19]
두개골 뒤쪽에는 날카롭고 두꺼운 후두릉(뼈의 돌출된 막대)이 있으며, 이는 후두골의 인상부분과 항인대 평면 사이의 명확한 경계를 나타낸다. 후두릉은 현생 인류의 외후두융기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가장 돌출되어 있다. 측두골 기저부는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보다는 자바원인과 북경원인과 일치한다.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와 달리, 익상골 뿌리 근처에 뚜렷한 뼈 피라미드 구조가 있다. 두개골 기저부의 유돌부는 현저하게 돌출되어 있다. 후두과절(두개골을 척주에 연결)은 대후두공(척수가 두개골로 들어가는 곳)에 비해 비례적으로 작다. 크고 불규칙한 뼈 돌기가 후두과절 바로 뒤에 있다.[5]
측정 가능한 여섯 개의 응동(Ngandong) 표본의 뇌 용량은 에서 범위이다. Ngawi I 두개골은 1000cc이고, 세 개의 삼붕마칸(Sambungmacan) 두개골은 각각 1035cc, 917cc, 1006cc이다. 이는 평균 1000cc가 넘는다.[19] 전반적으로 아시아 ''호모 에렉투스''는 뇌가 크며, 평균 약 1000cc이다.[20] 비교하자면, 1955년 63명의 호주 원주민에 대한 조사에서 뇌 용량은 에서 범위였는데, 이는 아시아 ''호모 에렉투스''의 뇌 용량이 현생 인류의 변이 범위 내에 포함됨을 의미한다.[21] 두개골 기저부, 따라서 뇌는 곡선형이 아니라 평평한 것으로 보인다. 두개골 기저부, 뇌하수체 근처의 터어키 안장은 현생 인류보다 훨씬 크며, 바이덴라이히는 1951년 신중하게 이를 확장된 뇌하수체가 뼈의 비정상적인 두꺼워짐을 유발했다고 설명했다.[5]
알려진 두 개의 경골 중 경골 A는 경골 B보다 훨씬 더 견고하며 전반적으로 네안데르탈인의 경골과 일치한다.[5] 다른 ''호모 에렉투스''와 마찬가지로 경골은 두껍고 무겁다. 380mm로 재구성된 길이를 기준으로, 경골 B는 키 158cm, 체중 51kg인 개인의 것이었을 수 있다. 경골 A는 더 큰 개인의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키 추정치가 있는 아시아 ''호모 에렉투스''(표본 크기가 매우 작음)는 일반적으로 150cm 에서 160cm 범위이며, 열대 환경의 인도네시아 ''호모 에렉투스''는 일반적으로 더 키가 크고, 고위도의 대륙 표본은 더 작다. 응동 출토의 단일 골반 조각은 아직 공식적으로 설명되지 않았다.[19]
4. 고생물학
1931년 자와섬의 솔로강변에서 독일의 해부학자 구스타프 하인리히 랄프 본 케니히스발트(de)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케니히스발트는 피테칸트로푸스 화석이 유인원과 인류의 중간 단계라고 확신하고 솔로강 주변을 탐사하던 중, 남성으로 추정되는 두개골을 발견했다. 이 두개골의 뇌 용량은 당시 알려진 호모 에렉투스의 평균(800~1000cc)보다 컸으며, 연대는 약 10만 년 전후로 추정되었다. 이후 1933년까지 자바 섬 솔로강변의 벙가완(Bengawan), 낭동(Ngandong) 등지에서 추가적인 화석들이 발견되었다.
초기에 발견된 화석들은 뇌 용량이 1000~1250cc에 달하여, 호모 에렉투스에서 현생인류로 진화하는 중간 단계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한때 '호모 사피엔스 솔로엔시스'(Homo sapiens soloensisla)로 분류되었으며, 초기 호모 사피엔스나 네안데르탈인의 인도네시아 아종, 혹은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의 일종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의 분석 결과, 이들은 기존의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가 후기까지 생존하면서 뇌 용량과 신체가 커진 형태로 밝혀져 호모 에렉투스의 아종인 호모 에렉투스 솔로엔시스로 재분류되었다. 초기의 연구에서는 기원전 10만 년 경에서 기원전 2만 년 경까지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후속 연구를 통해 생존 연대가 재조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연대 측정 및 멸종 참고)
호모 에렉투스 솔로엔시스는 약 백만 년 전 자바 섬에 정착했던 호모 에렉투스의 직계 후손으로 여겨진다. 해부학적 특징과 함께 발견된 도구들을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솔로엔시스가 현생인류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 및 동남아시아 일부 원주민의 조상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오스트레일리아의 고오 스완프(Kow Swamp) 등지에서 발견된 고대 인류 화석 중 일부는 솔로엔시스와 유사한 특징을 보이기도 했다. 과거 학계 일각에서는 솔로엔시스가 현생인류의 확산을 피해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동했으며, 이후 호주에서 현생인류와 경쟁하거나 혼혈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최신 연대 측정 결과는 솔로엔시스가 현생인류의 동남아시아 도달 이전에 멸종했음을 시사하여 이러한 가설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연대 측정 및 멸종 참고)
4. 1. 고환경
종 수준에서 응안동 동물군은 약 80만 년에서 70만 년 전의 더 오래된 케둥 브루부스 동물군과 전반적으로 유사하다. 이 시기는 아시아코끼리와 ''스테고돈''을 포함한 대형 포유류 종들이 자와섬으로 대규모 이주한 시기였다.[22]응안동에서 발견된 주요 동물군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동물군은 당시 환경이 개방된 숲이었음을 시사한다.[22] 인근의 동시대 와투알랑 유적에서 두루미가 발견된 것은 당시 기후가 오늘날보다 훨씬 서늘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24]
플라이스토세 후기 기후 변화는 자바 섬의 환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약 13만 5천 년 전 빙하기 최대기에는 해수면이 낮아져 순다랜드가 드러났고, 자바 섬을 포함한 주요 인도네시아 섬들이 아시아 대륙과 연결되었다. 그러나 약 12만 5천 년 전에는 기후가 훨씬 습해지면서 해수면이 상승하여 자바 섬은 다시 섬이 되었고 열대우림이 확장되었다. 이러한 환경 변화로 인해 응안동 동물군은 점차 푸눙 동물군으로 대체되었다. 푸눙 동물군은 오늘날 자바의 동물군과 유사하지만, 오랑우탄이나 긴팔원숭이와 같은 전형적인 열대우림 동물들은 약 8만 년 전에 자바 섬이 다시 대륙과 연결된 후에야 유입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22]
숲과 사바나 환경에 적응했던 호모 에렉투스는 열대우림이 확장되면서 자신들이 선호하던 개방된 서식지가 사라지자 점차 멸종의 길을 걸었을 가능성이 있다.[23]
4. 2. 연대 측정 및 멸종
솔로강 유역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 솔로엔시스 화석들의 발견 당시 위치는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다. 발굴팀은 현장에 머무른 시간이 짧았고, 발굴 작업을 감독한 조수들의 기록은 분실되었다. 현장 지도는 75년 이상 지난 2010년에야 발표되었으나 활용 가치가 제한적이어서, 솔로엔시스의 타포노미(화석화 과정 연구)와 지질학적 연대는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3] 14개의 표본은 모두 6개 지층 중 위쪽 2개 층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이 층들은 자갈 섞인 모래와 화산쇄설성 사장석 휘석 안산암으로 이루어진 두께 46cm의 지층이다. 이 지층들은 거의 동시에 퇴적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건조한 솔로강 지류 부근, 현대 강 수면으로부터 약 20m 높이에 위치한다. 유적지의 해발 고도는 약 40m이다.[3]
화산쇄설암의 존재는 화산 폭발 직후 퇴적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많은 양의 화석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화산 폭발이나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인간과 동물들이 유적지 상류 계곡에 대량으로 모였을 가능성이 있다. 화산재는 식물 성장을 방해하거나 독성을 일으켜 초식 동물과 인간의 기아와 죽음을 초래했고, 수개월에 걸쳐 많은 사체가 쌓였을 것이다. 육식 동물의 포식 흔적이 거의 없는 것은 뼈를 부술 필요 없이 먹이가 풍부했음을 나타낼 수 있다. 이후 몬순 계절이 오자 화산에서 흘러나온 라하르(화산 이류)가 강을 따라 흘러내리며 사체들을 응동(Ngandong) 유적지로 쓸어왔고, 다른 퇴적물과 함께 수로가 좁아지는 지점에 쌓인 것으로 추정된다.[6][11] 솔로강을 따라 위치한 삼붕마깐(Sambungmacan)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 화석들도 같은 사건으로 퇴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3]
솔로엔시스의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측정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연도 | 연구자/방법 | 측정 결과 | 주요 내용 |
---|---|---|---|
1932년 | 옵페노르트 (생층서학) | 약 15만 ~ 10만 년 전 | 후기 플라이스토세 연대 제안[2][7] |
1988~1989년 | 우라늄-토륨 연대 측정 | 20만 ~ 3만 년 전 | 넓은 오차 범위[9] |
1996년 | 전자스핀공명 연대 측정(ESR) 및 우라늄-토륨 동위원소비 질량분석법 | 5만 3300년 ~ 2만 7000년 전 | 현생인류와 공존 가능성 제기 (현생인류 동남아시아 이주 시기: 약 5만 5000년 ~ 5만 년 전)[7][8] |
2008년 | 감마선 분광법 분석 | 약 7만 ~ 4만 년 전 | 우라늄 용탈 확인 후 재측정, 현생인류와 공존 가능성 유지[9] |
2011년 | 아르곤-아르곤 연대 측정, ESR/우라늄-토륨 연대 측정 | 최대 54만 6000 ± 1200년 전, 최소 14만 3000년 ~ 7만 7000년 전 | 현생인류 도래 이전 생존 가능성 제기[10] |
2020년 | 종합적 연대 측정 (응동 유적지) | 11만 7000년 ~ 10만 8000년 전 | 솔로엔시스는 마지막 H. erectus 집단이며, 현생인류와 상호작용하지 않았음을 시사[11] |
2020년의 종합적인 연대 측정 결과는 솔로엔시스가 약 11만 7000년에서 10만 8000년 전에 살았으며, 이는 이들이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호모 에렉투스 집단임을 시사한다. 이 연대는 현생 인류가 동남아시아에 도착하기 이전이므로, 두 종이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했을 가능성은 낮다.[11]
솔로엔시스의 멸종은 환경 변화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솔로엔시스가 살았던 시기의 응안동 동물군은 호랑이(''P. 티그리스 솔로엔시스''), 말레이반디쿠트, 하마(''헥사프로토돈''), 사슴류, 물소, 소(''B. 팔레오손다이쿠스'') 등으로 구성되어 개방된 숲 환경을 나타낸다.[22] 인근 와투알랑 유적에서 두루미 화석이 발견된 것은 당시 기후가 현재보다 서늘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24] 약 13만 5000년 전 빙하기 최대기에는 해수면 하강으로 순다랜드가 육지로 드러나 주요 인도네시아 섬들이 아시아 대륙과 연결되었다. 그러나 12만 5000년 전 이후 기후가 습해지면서 자바는 다시 섬이 되었고 열대 우림이 확장되었다. 이로 인해 개방된 환경에 적응했던 응안동 동물군은 점차 사라지고, 오랑우탄, 긴팔원숭이 등 열대 우림 동물군(푸눙 동물군)이 등장하게 되었다.[22] 숲과 사바나 환경에 적응했던 ''호모 에렉투스''는 이러한 환경 변화, 특히 마지막 개방 서식지의 상실과 함께 멸종했을 가능성이 높다.[23]
자바 섬에서 ''호모 에렉투스''는 오랜 기간 서식했다. 상기란 유적(151만~93만 년 전)에서 시작하여 트리닐 유적(54만~43만 년 전)을 거쳐 응안동(11만 7000~10만 8000년 전)의 솔로엔시스에 이르기까지 이어졌다. 솔로엔시스는 열대 우림이 확장되기 전 동아시아의 마지막 개방 서식지에 살았던 최종 ''호모 에렉투스'' 집단으로 볼 수 있다. 현생 인류가 이주하기 전, 후기 플라이스토세 동남아시아에는 솔로엔시스 외에도 인도네시아 플로레스 섬의 ''H. 플로레시엔시스''와 필리핀 루손 섬의 ''H. 루조넨시스''와 같은 다른 고인류 종들이 살고 있었다. 또한, 유전자 분석 결과 데니소바인이 동남아시아 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며, 이들은 약 4만 5700년 전과 2만 9800년 전에 이주해 온 현생 인류와 교배했다는 증거가 있다.[11] 그러나 2021년 유전체 연구에 따르면, 데니소바인을 제외하고 현생 인류가 솔로엔시스를 포함한 이 지역의 다른 고유 인류 종들과 교배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교배가 이루어졌더라도 그 후손이 잡종 불친화성으로 인해 생존하지 못했거나, 교배된 계통이 이후 멸종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15]
응안동에서 많은 수의 화석이 동시에 발견된 점을 고려할 때, 화산 폭발로 매장되기 전에 상당한 규모의 ''H. e. 솔로엔시스'' 개체군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정확한 개체 수를 추정하기는 어렵다.[3]
5. 문화
호모 에렉투스 솔로엔시스의 문화는 주로 자와섬의 솔로강 유역, 특히 응안동(Ngandong) 유적지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추정된다. 발견된 유물에는 동물 뼈를 가공한 도구나 석기 등이 포함되지만, 그 해석과 솔로엔시스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24] 예를 들어, 사슴뿔이나 뼈를 이용한 도구 제작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5], 자연적인 훼손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또한, 석구(石球)나 단순한 형태의 석편 도구들이 발견되었지만, 그 수가 적어 특정 석기 문화로 분류하기는 어렵다.[24][26] 전반적으로 동남아시아의 다른 호모 에렉투스 유적과 유사하게, 서유라시아나 아프리카에서 발견되는 정교한 손도끼 같은 도구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사용 가능한 석재의 종류, 대나무와 같은 다른 재료의 활용 가능성, 혹은 당시 인구 밀도 등 다양한 요인과 관련하여 논의되고 있다.[28][29]
한편, 응안동에서 발견된 두개골 화석 중 일부에서 나타나는 손상 흔적과 두개골 아랫부분이 없이 윗부분만 발견된 점 등을 근거로, 식인 풍습이나 의례적인 두개골 사냥의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5] 과거 일부 학자들은 이를 솔로엔시스 집단 내의 폭력이나 다른 인류 집단과의 충돌 증거로 해석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손상이 강물의 침식 작용이나 동물의 포식 활동 등 자연적인 과정에 의해 발생했을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되어,[30] 솔로엔시스의 사회적 행위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다.
5. 1. 도구와 기술

1936년 네덜란드 고고학자 Pieter Vincent van Stein Callenfels|피터르 빈센트 판 스테인 칼렌펠스nl가 찍은 사진을 연구하던 중, 오페노어스는 여러 동물 뼈 파편, 특히 큰 호랑이 두개골과 일부 사슴 뿔에서 손상을 발견하고 이를 뼈 기술의 증거로 보았다. 그는 일부 사슴 뿔에 새 두개골이 새겨져 도끼처럼 사용되었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1951년 바이덴라이히는 강물이나 악어 등에 의해 뼈가 자연적으로 훼손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어떤 뼈도 인간이 개조한 명확한 흔적을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오페노어스는 양쪽에 물결 모양 무늬가 새겨진 긴 뼈 조각을 유럽 마들렌 문화의 작살과 유사한 작살로 보았지만, 바이덴라이히는 이를 창촉으로 해석했다. 바이덴라이히는 또한 응안동 유적지에서 특이하게 내륙에서 발견된 가오리 독침을 확인했는데, 솔로인이 이를 최근 남태평양 원주민들처럼 단검이나 화살촉으로 사용하기 위해 수집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5] 이러한 뼈 기술이 솔로인과 직접 관련이 있는지, 아니면 후대의 현생 인류 활동의 결과인지는 명확하지 않다.[24] 다만, 트리닐 유적지의 호모 에렉투스 에렉투스 집단은 ''Pseudodon'' 조개껍데기로 긁개를 만들고, 아마도 상어 이빨을 이용해 조개껍데기를 열었던 것으로 보인다.[25]
오페노어스는 응안동에서 완벽한 구형의 안데사이트 석구(石球)를 발견하기도 했다. 이는 솔로 계곡에서 흔히 발견되는 유물로, 지름이 67mm 에서 92mm 범위이다. 비슷한 석구는 동시대 및 후대의 유럽 무스테리안 문화나 아프리카 중석기 시대 유적, 심지어 아프리카 아슐리안 문화 유적(특히 케냐의 올로르게사일리)에서도 발견된다.[5] 자바 섬 내에서는 응안동과 동시대인 와투알랑과 상기란 유적지에서도 발견되었다.[26] 전통적으로 이 석구들은 여러 개를 묶어 던지는 사냥 무기인 볼라로 해석되었지만, 개별 투사체, 곤봉 머리, 식물 가공 도구, 뼈를 부수는 도구 등 다양한 용도로 추정된다. 1993년 미국의 고고학자 캐시 쉬크와 니콜라스 토스는 돌을 오랫동안 망치돌로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구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27]

1938년, 폰 코니히스발트는 고고학자 헬무트 드 테라, 할람 L. 무비우스,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과 함께 응안동 유적지를 다시 방문하여 석핵과 석편(즉, 석기)을 수집했다. 하지만 강물에 의한 마모 때문에 이 돌들 중 일부가 실제 도구인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발견된 석기들은 작고 단순하며, 대부분 5cm보다 작고 주로 강에 떠내려온 칼세도니(차트나 자스퍼도 포함)로 만들어졌다. 몇몇 화산암과 나무 조각은 무거운 도끼 도구로 개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28] 1973년에는 인근 삼붕마칸 유적지에서 안데사이트로 만들어진 단면 도끼와 석편이 발견되었다.[24][26] 발견된 도구의 수가 매우 적기 때문에, 솔로인을 특정 고고학적 산업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24][26]
현생 인류 이전의 다른 많은 동남아시아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응안동 유적지에서는 서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아슐리안 유적지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정교한 손도끼나 복잡한 도끼 도구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1948년 무비우스는 이러한 서부와 동부 호모 에렉투스 간의 큰 기술적 차이, 이른바 "무비우스선"이 서식지의 차이(개방된 지역 대 열대 우림)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손도끼가 주로 대형 동물 사냥의 증거이며, 이는 인류가 개방된 평원으로 퍼져나갔을 때만 가능했다고 보았다.[28]
중기 플라이스토세 동아시아에서도 일부 손도끼 기술이 발견되면서 엄격한 의미의 "무비우스선" 가설은 더 이상 지지받기 어렵게 되었지만, 여전히 동아시아의 손도끼는 서구의 동시대 유물에 비해 눈에 띄게 드물고 조잡하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는 여러 가설이 제시된다. 첫째, 아슐리안 문화가 아프리카에서 동아시아로 인류가 퍼져나간 이후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경우 두 집단이 거의 200만 년 동안 분리되어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둘째, 동아시아에는 석영이나 규암과 같이 상대적으로 품질이 낮은 석기 재료만 있었을 가능성(하지만 일부 중국 지역에서는 이러한 재료로도 손도끼를 만들었고, 동아시아에 고품질 광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셋째, 동아시아의 호모 에렉투스가 돌 대신 대나무와 같이 쉽게 썩어 없어지는 재료를 도끼 도구로 사용했을 가능성(이는 검증하기 어렵다). 넷째, 동아시아의 인구 밀도가 낮아 전반적으로 남겨진 도구 자체가 적었을 가능성(화석 기록만으로 인구 통계를 추정하기는 어렵다).[29]
5. 2. 식인 풍습 가능성
1951년, 바이덴라이히(Weidenreich)와 폰 코니히스발트(von Koenigswald)는 응안동(Ngandong)에서 발견된 두개골 중 IV와 VI번에서 심각한 부상을 확인했다. 이들은 각각 날카로운 도구와 무딘 도구에 의해 생긴 상처로 추정했으며, 염증과 치유 흔적이 남아 있어 해당 개체들이 공격에서 살아남았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바이덴라이히와 폰 코니히스발트는 치아조차 없이 두개골 윗부분만 발견된 점이 매우 특이하다고 지적했다. 이를 근거로 그들은 두개골 IV와 VI는 "성공하지 못한 공격"의 결과이며, 두개골 기저부가 부서진 다른 두개골들은 "희생자를 죽이려는 더 성공적인 시도"의 결과일 수 있다고 해석했다. 그들은 이것이 다른 인류가 뇌를 얻기 위해 저지른 행위, 즉 식인 풍습이나 의례적 두개골 사냥의 증거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가해자가 이웃한 ''호모 에렉투스 솔로엔시스'' 부족인지, 혹은 프랑스 고생물학자 마르셀랭 불이 베이징 원인에 대해 제기했던 것처럼 "더 발달된 인류가 더 원시적인 동족을 죽임으로써 우월함을 과시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고 보았다. 다만, 바이덴라이히와 폰 코니히스발트는 일부 부상이 화산 폭발과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인정했다. 폰 코니히스발트는 솔로인이 두개골을 두개골 컵으로 사용하기 위해 개조했을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바이덴라이히는 두개골 I, V, X 등의 가장자리가 톱니 모양이라 컵으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하다며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5]자와섬의 다른 유적인 트리닐(Trinil), 상기란(Sangiran), 모조케르토(Modjokerto)에서도 두개골 윗부분만 발견되는 유사한 사례가 있어 식인 풍습이나 두개골 사냥 가설이 제기되었다. 당시에는 일부 현대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폴리네시아 원주민 집단에서 역사적으로 행해진 두개골 사냥 및 식인 풍습이 이러한 고대 인류의 후손에게서 이어졌다고 여겨져 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2년 인류학자 테우쿠 야곱(Teuku Jacob)은 이러한 해석에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두개골 기저부가 윗부분보다 구조적으로 약하고, 유골이 발견된 강(솔로강)은 큰 돌과 자갈이 많아 운반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파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또한, 두개골 외 다른 뼈들이 거의 발견되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호랑이와 같은 포식자가 먹잇감을 사냥한 후 살점이 적은 머리 부분만 남기는 습성 때문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야곱은 응안동에서 발굴된 두개골 I과 IX 등 일부 화석이 발굴, 세척, 복원 과정에서 손상되었을 가능성도 지적했다.[30]
참조
[1]
논문
Evolutionary Asiacentrism, Peking Man, and the Origins of Sinocentric Ethno-Nationalism
[2]
논문
Solo Man—A New Fossil Skull
[3]
논문
Provenience reassessment of the 1931–1933 Ngandong Homo erectus (Java), confirmation of the bone-bed origin reported by the discoverers
https://www.research[...]
2021-01-13
[4]
논문
The life and times of Ralph von Koenigswald: Palaeontologist extraordinary
[5]
논문
Morphology of Solo man
https://digitallibra[...]
2021-04-04
[6]
논문
Mass death and lahars in the taphonomy of the Ngandong Homo erectus bonebed, and volcanism in the hominin record of eastern Java
https://www.academia[...]
2021-06-29
[7]
논문
Latest Homo erectus of Java: Potential Contemporaneity with Homo sapiens in Southeast Asia
[8]
논문
When did Homo sapiens first reach Southeast Asia and Sahul?
[9]
논문
Gamma-ray spectrometric dating of late Homo erectus skulls from Ngandong and Sambungmacan, Central Java, Indonesia
[10]
논문
The Age of the 20 Meter Solo River Terrace, Java, Indonesia and the Survival of Homo erectus in Asia
[11]
논문
Last appearance of Homo erectus at Ngandong, Java, 117,000–108,000 years ago
[12]
논문
Fossil evidence for the origin of Homo sapiens
[13]
서적
Homo erectus: Papers in Honor of Davidson Black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4]
논문
A 150-Year Conundrum: Cranial Robusticity and Its Bearing on the Origin of Aboriginal Australians
[15]
논문
Widespread Denisovan ancestry in Island Southeast Asia but no evidence of substantial super-archaic hominin admixture
https://www.reposito[...]
[16]
논문
Cranial morphology of Javanese Homo erectus: New evidence for continuous evolution, specialization, and terminal extinction
[17]
논문
Solo man in question: Convergent views to split Indonesian Homo erectus in two categories
https://hal.archives[...]
2021-05-22
[18]
논문
Investigation of the critical geometric characteristics of living human skulls utilising medical image analysis techniques
[19]
논문
Natural history of Homo erectus†
[20]
논문
Morphological variation in Homo erectus and the origins of developmental plasticity
[21]
논문
Interpopulational variation in human brain size: Implications for hominin cognitive phylogeny
[22]
논문
The Late Quaternary palaeogeography of mammal evolution in the Indonesian Archipelago
[23]
논문
Environmental drivers of megafauna and hominin extinction in Southeast Asia
[24]
서적
Prehistory of the Indo-Malaysian Archipelago: Revised Edition
University of Hawaii Press
[25]
논문
Homo erectus at Trinil on Java used shells for tool production and engraving
[26]
서적
Encyclopedia of Global Archaeology
Springer Science+Business Media
[27]
서적
Making silent stones speak: human evolution and the dawn of technology
Simon and Schuster
[28]
논문
Ngandong man: age and artifacts
[29]
논문
The Movius Line controversy: the state of the debate
[30]
논문
The Problem of Head-Hunting and Brain-Eating among Pleistocene Men in Indonesia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