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주
1. 개요
홍시주는 조선 숙종 시대의 무관으로, 1636년 경기도 남양군에서 태어났다. 이조참의 홍한의 후손으로, 수안군판관을 시작으로 오위도총부 부사정, 평안도 병마절도사, 함경남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서인과의 갈등 속에서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으며, 1707년 통진부사로 재직 중 사망했다.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홍이연은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고, 외손자 유득공과 이옥은 실학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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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홍시주(洪時疇) |
|---|---|
| 출생일 | 1636년 9월 3일 |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남양군 마도면 백곡리 |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사제 |
| 사망일 | 1707년 11월 24일 |
| 사망 원인 | 병사 (질병으로 죽음) |
| 거주지 | 조선 경기도 남양군->조선 한성부 |
| 국적 | 조선 |
| 별명 | 자(字) 서중(余+又仲) |
| 본관 | 남양 (토홍) |
| 직업 | 무관 |
| 종교 | 유교(성리학) |
| 배우자 | 전주이씨, 해주최씨 |
| 자녀 | 아들 홍이곤, 홍이하, 홍이징, 홍이부, 딸 홍씨, 딸 홍씨, 아들 홍이석, 홍이연, 홍이재(또는 이도), 홍이준 |
| 부모 | 홍우익 |
| 친척 | 사위 이정장, 사위 최도흥, 외증손 유득공, 외증손 이옥, 9촌 삼종숙 홍우원, 재종증조 홍가신, 홍경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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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홍씨 (토홍) -
홍사용
홍사용은 노작, 소아, 백우라는 호를 사용한 한국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민족주의적 낭만파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일제강점기 친일 활동을 하지 않았고, 휘문의숙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 문예지 창간, 극단 활동, 희곡 창작 등의 활동을 했다. -
남양 홍씨 (토홍) -
홍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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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출생 -
상지신
상지신은 청나라 초 평남왕 상가희의 아들로, 삼번의 난에서 오삼계에게 투항 후 청에 귀순했으나 강희제의 의심으로 자결했으며, 그의 삶에 대해 기회주의적이라는 평가와 가문 보존을 위한 선택이라는 옹호론이 있다. -
1636년 출생 -
니콜라 부알로
니콜라 부알로는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 확립에 기여하고, 시의 규칙을 정립하며 다양한 작품 활동을 펼친 시인이자 비평가이다. -
조선의 정치인 -
방우정
방우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서정군의 좌초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일기》를 저술하여 홍경래의 난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조선의 정치인 -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해방 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독재적 통치와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도 받으며 4·19 혁명 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서거하였다.
2. 가계 배경 및 초기 생애
1636년 9월 3일 경기도 남양군(현 화성시 남양읍) 마도면 백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홍우익(洪宇翼) 역시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다. 홍시주는 수안군판관(遂安郡判官)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2.1. 가계
1636년 9월 3일 경기도 남양군(현 화성시 남양면) 마도면 백곡리에서 태어났다. 이조참의를 지낸 홍한의 후손이며, 별좌를 지낸 홍윤조의 5대손이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무과에 급제한 인물들을 배출한 무반 가문이었다. 증조부 홍석신(洪碩臣)과 할아버지 홍유(洪柔) 모두 무과에 급제했으나 각각 무겸 선전관과 선전관에 그쳤다.
아버지는 무과 출신으로 군수, 길주목사, 방어사(防禦使) 등을 역임한 홍우익(洪宇翼)이다. 어머니는 서하임씨(西河任氏)로, 현감 임진(任鎭)의 딸이다. 아버지 홍우익은 선전관을 거쳐 벽동군수가 되었으나, 남양의 감나무밭을 이조판서 이경증에게 뇌물로 바친 사실이 사간원대사간 홍무적(洪茂績)에게 발각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후 길주목사, 삭주부사 등을 거쳐 경원부사 재직 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암행어사의 보고로 숙마(熟馬)를 하사받고 품계가 오르기도 했다.
당대의 재상 만전당 홍가신과 부제학 홍경신은 그의 재종증조부뻘이며, 남인 당원으로 청남 중진 문신이었던 홍우원은 9촌 아저씨뻘 되는 친척이었다. 첨사를 지낸 홍담(洪湛) 역시 그의 친족이다.
|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 할아버지 | 홍유(洪柔) | 1583년 ~ 1646년 | 선전관 |
| 아버지 | 홍우익(洪宇翼) | 1609년 ~ 1670년 | 군수, 길주목사, 방어사 |
| 어머니 (생모) | 서하임씨(西河任氏) | 1601년 ~ ? | 현감 임진(任鎭)의 딸 |
| 백부 | 홍우규(洪宇奎) | ||
| 형 | 홍시형(洪時亨) | 홍우벽(洪宇壁)에게 양자로 감 | |
| 형 | 홍시범(洪時範) | ||
| 계모 | 양천허씨 | ||
| 이복 동생 | 홍시구(洪時龜) | 1657년 ~ 1705년 5월 14일 | |
| 부인 (초취) | 전주이씨(全州李氏) | ||
| 아들 (초취 소생) | 홍이곤(洪夏昆) | 요절 | |
| 아들 (초취 소생) | 홍이하(洪以夏) | 무과 급제, 선전관 역임 후 요절 | |
| 양 손자 (홍이하의) | 홍중함(洪重涵) | 사촌형의 아들, 홍이하 사후 입양 | |
| 아들 (초취 소생) | 홍이징(洪以徵) | 1667년 ~ ? | |
| 아들 (초취 소생) | 홍이부(洪以溥) | 1669년 ~ ? | |
| 딸 (초취 소생) | 남양홍씨 | ||
| 사위 (초취 소생) | 이정양(李廷揚) | ||
| 부인 (재취) | 해주최씨(海州崔氏) | 1656년 ~ 1717년 10월 7일 | |
| 딸 (재취 소생) | 남양홍씨 | ||
| 사위 (재취 소생) | 최도흥(崔道興) | 업유(業儒) | |
| 아들 (재취 소생) | 홍이석(洪以錫) | ||
| 아들 (재취 소생) | 홍이연(洪以淵) | ||
| 며느리 (홍이연의 처) | 의령남씨 | ||
| 아들 (재취 소생) | 홍이재(洪以載) / 홍이덕(洪以德) | 이름 이견 있음 | |
| 부인 (삼취) | 이름 미상 | ||
| 아들 (삼취 소생) | 홍이준(洪以濬) |
2.2. 초기 생애
1636년 9월 3일 경기도 남양군(현 화성시 남양읍) 마도면 백곡리에서 태어났다. 이조참의를 지낸 홍한의 후손이며, 별좌를 역임한 홍윤조의 5대손이다. 증조부 홍석신(洪碩臣)과 할아버지 홍유(洪柔)는 모두 무과에 급제했으나 각각 무겸 선전관과 선전관에 그쳤다. 아버지 홍우익(洪宇翼) 역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벽동군수, 길주목사, 삭주부사, 경원부사, 방어사 등을 지냈다. 어머니는 서하임씨(西河任氏)로, 현감 임진(任鎭)의 딸이다.
아버지 홍우익은 벽동군수 재직 시절, 남양의 감나무밭을 이조판서 이경증에게 뇌물로 바쳤다가 사간원대사간 홍무적(洪茂績)에게 발각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경원부사로 재직할 때는 선정을 베풀어 암행어사의 장계(狀啓)를 통해 숙마(熟馬)를 하사받고 품계가 오르기도 했다.
당대의 재상이었던 만전당 홍가신과 부제학 홍경신은 그의 재종증조부뻘이며, 남인 당원으로 청남(淸南)의 중진 문신이었던 홍우원은 9촌 아저씨뻘 되는 친척이었다. 친족 중 홍담(洪湛)은 첨사를 지냈다.
홍시주는 수안군판관(遂安郡判官)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672년(현종 13) 9월 21일에는 부사과(副司果)에 임명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산릉도감의 부장(部將)으로 참여하였고, 그 공로로 같은 해 6월 29일 현종에게서 비장(邊將)으로 승진하는 상을 받았다. 그 해 현종이 갑자기 서거하자, 현종의 국상 때에는 각 소(所)를 지키는 영설부장(領役部將)으로 국장에 참여하였다. 이 공로로 1675년(숙종 1) 1월 1일부로 다시 변장(邊將)으로 승진하였다.
3. 관직 생활
1680년(숙종 6년) 1월 호군(護軍)이 되었고, 1681년 12월 17일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1683년(숙종 9년) 9월 3일 평해군수(平海郡守)로 임명되어 부임했다가 1686년(숙종 12년) 2월 18일 부사직으로 전직되어 돌아왔다. 그 해 1월 24일 형조에서 인재 추천 시 관찰사와 절도사의 적임자로 천거되기도 했다. 1686년 2월 18일 부사직(副司直), 3월 13일 부호군을 거쳐, 같은 해 봄부터 6월까지는 별장(別將)으로 경기도 광주의 성곽 보수 공사에 참여하였다. 이후 10월 2일 부호군이 되었다가 10월 15일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임명되어 부임했다. 1689년 1월 10일 부호군으로 전직되어 돌아왔고, 1690년 2월 별장을 역임하던 중, 근무 태만 문제로 희정당(熙政堂)에서 문책을 받기도 했다.
3.1. 초기 관직
수안군판관(遂安郡判官)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1672년(현종 13년) 9월 21일 부사과(副司果)가 되었고, 1674년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산릉도감의 부장(部將)으로 참여했다. 그 공로로 같은 해 6월 29일 현종으로부터 상을 받아 변장(邊將)으로 승진했다. 그 해 현종이 갑자기 서거하자 현종의 국상(國喪) 때는 각 소(所)를 지키는 영설부장(領役部將)으로 국장에 참여하였고, 이 공으로 1675년(숙종 1년) 1월 1일부로 변장(邊將)으로 승진하였다.
1675년(숙종 1년) 1월 오위도총부 부사정(副司正)으로 비변사 낭청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월 28일, 의주부윤과 평안감사의 장계가 해당 관리들이 파직된 후에 조정에 도착하자, 칙사(勅使) 관련 업무에 태만했다는 이유로 당시 비변사 입직낭청이었던 허적(許積)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같은 해 7월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7월 27일에는 오위도총부 경력(都摠經歷)을 거쳤으며, 그해 11월 11일 무과 참시관(武科參試官)으로 차출되었다.
1675년(숙종 1년) 12월 13일 전라도 병영 우후(全羅道兵營虞候)에 임명되었으나, 1676년(숙종 2년) 1월 8일 어머니가 75세 고령임을 이유로 병조에 사직을 청하여 허락받았다. 같은 날 옥강만호(玉江萬戶)에 임명되었으며, 2월 6일에는 숙종으로부터 궁시(弓矢)를 하사받았다. 그해 2월 19일 수안군수(遂安郡守)로 임명되고, 바로 말을 받아 당일 부임하였다.
3.2. 경기도 지역 관직
1686년(숙종 12년) 봄부터 같은 해 6월까지 별장(別將)으로 경기도 광주군의 성곽 보진(堡鎭) 축성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9월 20일 광주의 성곽 축성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숙종으로부터 특별히 가자(加資, 품계 승진)되었다. 당시 병조와 김두명(金斗明) 등이 논상이 지나치다고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홍시주의 공을 높이 평가하였다.
3.3. 평안도 병마절도사 재직과 갈등
1690년(숙종 16년) 10월 28일 비변사로부터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의 적임자로 천거되었고, 같은 해 11월 22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가 되어 부임했다. 이후 1692년(숙종 18년) 1월 8일 비변사의 추천으로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2월 8일 잠시 황해병사(黃海兵使)로 임명되었으나 당일 취소되고 평안도병마사로 유임되었다.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수군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강계군에 표류한 청나라 사람을 발견하여 그의 부상을 치료하고 요양시켰다. 이 청나라 사람은 홍시주가 해임된 뒤에 청나라로 돌아갔다.
1692년 12월, 아들 홍이하(洪以夏)가 언문(한글)으로 노래를 지어 당시 집권 세력이던 서인 관료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평안도 서관(西關) 기생들의 노래 곡조로 퍼지게 되었다. 이 일로 사헌부는 홍이하가 언문 노래로 조정을 풍자했다며 홍시주의 파직과 사판삭제(관직 명부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것)를 숙종에게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헌부는 홍시주를 '본디 무식한 무부로 행실이 비루하고 거칠며, 처사가 광폭하고 미혹하다. 근년에 남쪽 지방(경상우도) 절도사로 부임했을 때도 민심을 얻지 못했는데, 서쪽 변방(평안도)의 중책에 발탁한 것은 의외의 인사이다. 여론이 오랫동안 좋지 않다고 하더라.'라고 비판하며 거듭 탄핵했다.
1693년(숙종 19년) 1월 2일부터 5일까지 사헌부는 계속해서 그를 처벌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숙종은 거절하였다. 그러나 결국 1월 5일, 왕명으로 평안도병마사에서 파직되었다. 사헌부는 파직 후에도 처벌을 요구했으나 숙종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3.4. 중앙 관직 복귀와 서인과의 갈등
1693년(숙종 19년) 1월 5일 평안병사에서 파직되었으나, 곧 내직으로 복귀하여 비변사 당상과 경연 특진관 등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7월 25일에는 알성무과(謁聖武科) 초시(初試) 시관(試官)을, 8월 11일에는 무과 전시 참시관(武科殿試參試官)을 맡았다. 이어 8월 25일 부총관, 9월 13일 호군을 거쳐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였고, 그해 10월 다시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다.
1694년(숙종 20년)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재직하던 중, 서인 세력의 핵심 인물인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의 성균관 문묘 배향을 반대하고 출향(黜享)을 주장하였다. 또한 남인 계열인 백호 윤휴(尹鑴)의 사당 건립을 건의하였다. 이는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사간원 헌납 윤성교(尹誠敎)와 정언 이정겸(李廷謙) 등은 상소를 통해 홍시주를 다음과 같이 비난하며 그의 파직과 서용 금지를 청하였다. "부총관 홍시주는 외람되고 간활하며 욕심이 많고 비루하여 권문(權門)에 이(虱)처럼 붙어서 군간(群奸)들이 국정을 잡았을 적에 그 두 자식을 시켜 맨먼저 양현(兩賢)의 출향(黜享)을 주장하였고, 또 역적 윤휴(尹鑴)의 사당을 세울 것을 주장하고 나섰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결국 1694년 음력 윤5월 21일, 서인들의 거듭된 상소로 인해 면직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1일 직첩을 돌려받고 호군으로 복직하였다.
3.5. 후기 관직
1699년(숙종 25년) 7월 중군(中軍)으로 승진한 이행익(李行益)을 대신하여 마병좌별장(馬兵左別將)이 되었다. 1700년(숙종 26년) 9월 2일 부총관에 임명되었고 같은 날 부호군에도 임명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1701년(숙종 27년) 2월, 함경도에서 주민들이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로 월경하거나 돌아오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월경자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조 참판 이인엽(李寅燁)의 탄핵을 받아 추고(推考)되었다. 같은 해 3월 20일에는 숙종이 지방관들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공무(公務)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다시 추고받았다.
1704년(숙종 30년) 5월 20일 금군별장(禁軍別將)에 임명되어 내직으로 돌아왔다. 그 해 8월 18일 무과 시험감독관으로 선정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패초(牌招)에 응하지 않았다. 8월 28일, 패초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참찬관 황일하(黃一夏)에게 탄핵받아 파직되었으나, 그 해 12월 1일 호군으로 복직하였다.
1705년(숙종 31년) 1월 6일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였다. 부임 시 금정산성 축성 가능 여부를 확인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금정산성을 둘러본 후 "남북 두 성은 넓어 지키기 어려우니 중성(中城)을 쌓아야 하며, 고모봉(姑母峰)에서 포를 쏘면 중성 1백여 보를 지나간다"고 보고하였다. 같은 해 6월 16일, 지방관 근무 실적 보고인 전최(殿最)를 엄격하게 처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정원의 계(啓)로 추고받았다.
1705년 7월 28일 황해우후(黃海虞候)에 임명되었고, 이어 11월 26일 황해도 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해 12월 19일, 사헌부는 홍시주가 관직 이동 시 교자를 타고 다니며 위세를 부린다는 점 등을 문제 삼아 탄핵하였고, 숙종이 이를 받아들여 파직되고 다시는 서용되지 못하게 되었다.
4. 사망과 평가
1707년 통진부사로 재직하던 중, 나이가 많고 쇠약하여 직무 수행이 어렵다는 사헌부의 지적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후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한성부 사저로 돌아온 직후인 1707년 11월 24일 사망하였다.
사망 소식을 들은 숙종은 부의를 내리고 승지를 보내 사제하였으며, 사후 증직으로 병조참판을 거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에 있으며, 묘비문은 남인 계열의 문신 이서우가 작성하였다.
4.1. 사망
1707년 3월 22일 통진부사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6일 나이가 많고 쇠약하여 지방관으로서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는 사헌부의 지적을 받았다. 결국 다음 날인 11월 7일 통진부사에서 파직되었다. 파직 후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으며, 임지에서 한성부의 사저로 돌아온 직후인 1707년 11월 24일 사망하였다.
4.2. 사후
1707년(숙종 33년) 11월 7일 통진부사에서 파직되고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어 임지에서 한성부 사저로 돌아온 직후인 1707년 11월 24일 사망하였다.
사망 소식을 들은 숙종은 부의를 내리고 승지를 보내 사제하였다. 시신은 1708년(숙종 39년) 1월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백곡리토성 근처로 운구되어 매장되었다. 이 근처에는 그의 아들 홍이연의 묘소도 있다.
묘비문은 남인 당원인 송곡 이서우(李瑞雨한국어)가 작성하였다. 이서우는 홍시주가 죽자 만장을 지어 보냈으며, 이후 그의 아들 홍이부와 사위 이정양이 찾아가 묘갈명을 청하자 흔쾌히 지어주었다고 한다.
사후 증직으로 증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이후 다시 증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5. 가족 관계
이조참의를 지낸 홍한의 후손이며, 별좌를 역임한 홍윤조의 5대손이다. 증조부는 홍석신(洪碩臣)이고, 할아버지는 홍유(洪柔)이다. 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 길주목사, 방어사(防禦使) 등을 지낸 홍우익(洪宇翼)이며, 어머니는 현감 임진(任鎭)의 딸인 서하 임씨(西河任氏)이다.
아버지 홍우익은 무과 급제 후 선전관, 벽동군수 등을 지냈으나, 남양의 감나무밭을 이조판서 이경증에게 뇌물로 바친 사실이 사간원대사간 홍무적(洪茂績)에게 발각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후 길주목사, 삭주부사, 경원부사를 지냈으며, 경원부사 재직 시 선정을 베풀어 암행어사의 보고로 숙종으로부터 말을 하사받고 품계가 오르기도 했다. 할아버지 홍유와 증조할아버지 홍석신 역시 무과에 급제했으나 각각 선전관, 무겸 선전관에 그쳤다. 당대의 재상이었던 만전당 홍가신과 부제학 홍경신은 그의 재종증조부이며, 남인 청남파의 중진 문신이었던 홍우원은 9촌 아저씨뻘 되는 친척이다. 친족인 홍담(洪湛)은 첨사를 지냈다.
|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 할아버지 | | 1583년 ~ 1646년 || 선전관 | ||
| 할머니 | | || | ||
| 아버지 | | 1609년 ~ 1670년 || 길주목사, 방어사 | ||
| 어머니 (생모) | | 1601년 ~ ? || 현감 임진(任鎭)의 딸 | ||
| 어머니 (계모) | | || | ||
| 백부 | | || | ||
| 형 | | || 홍우벽(洪宇壁)의 양자로 출계 | ||
| 형 | | || | ||
| 이복 동생 | | 1657년 ~ 1705년 5월 14일 || | ||
| 부인 (초배) | | || | ||
| 아들 | | || 요절 | ||
| 아들 | | || 무과 급제, 선전관 역임 후 요절 | ||
| 양손자 | | || 홍이하의 사후 양자 (사촌형의 아들) | ||
| 아들 | | 1667년 ~ ? || | ||
| 아들 | | 1669년 ~ ? || | ||
| 딸 | | || | ||
| 사위 | | || | ||
| 부인 (재배) | | 1656년 ~ 1717년 10월 7일 || | ||
| 딸 | | || | ||
| 사위 | | || 업유(業儒) | ||
| 아들 | | || | ||
| 아들 | | || | ||
| 며느리 | | || 홍이연의 부인 | ||
| 아들 | | || | ||
| 부인 (삼배) | | || | ||
| 아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