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남북 열차 시험운행
1. 개요
2007년 남북 열차 시험운행은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이후 추진된 남북 교류의 일환으로,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의 시험 운행을 목적으로 2007년 5월 17일에 진행되었다. 2006년 시험운행이 북측의 취소 통보로 무산된 후, 2007년 남북 경제 협력 추진 위원회 합의와 군사 보장 합의를 통해 재추진되었다. 시험 운행은 문산-개성, 금강산-제진 구간에서 이루어졌으며, 남북 고위급 인사와 일반 초청객 등 300명이 탑승했다. 시험 운행 이후 서울-평양 간 정기 열차 운행 등의 활용 방안이 논의되었으나, 북측 선로 상태 등의 문제로 실현되지 못했다. 시험 운행에 대해 대한민국과 해외 언론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열차가 운행된 것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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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철도 -
레일팀
레일팀은 정회원과 준회원으로 구성되며, 정회원은 의사 결정 참여, 자료 접근, 회비 납부 의무를 지니고 준회원은 활동 조건 충족 시 정회원으로 승격될 수 있다. -
200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2007년 남북정상회담
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간에 개최되어, 북한 핵무기 개발 문제와 남북 관계 발전,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을 논의하고 2007 남북정상선언문을 채택했다. -
2007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2007년 북한 홍수
2007년 북한 홍수는 8월 폭우로 북한 전역에 발생한 대규모 홍수 사태로 농경지 침수와 식량 안보 위협을 야기했으며, 국제 사회의 구호 지원을 받았다. -
2007년 남북 관계 -
2007년 남북정상회담
2007년 남북정상회담은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간에 개최되어, 북한 핵무기 개발 문제와 남북 관계 발전,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을 논의하고 2007 남북정상선언문을 채택했다. -
2007년 남북 관계 -
10.4 남북정상선언
10.4 남북정상선언은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6.15 남북 공동선언의 정신을 계승하여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 남북 관계의 상호 존중 및 신뢰 구축, 군사적 적대 관계 종식과 한반도 평화 보장, 그리고 민족 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 번영을 목표로 합의한 선언이며, 정전 협정 체제를 종식하고 항구적인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을 담고 있다.
2. 배경
대한민국에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대북 포용 정책인 햇볕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2000년 남북 정상 회담이 성공적으로 개최되었고, 역사적인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을 계기로 남북 간의 교류와 협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발해졌다. 대표적으로 금강산관광 사업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으며, 개성공단 건설에 대한 논의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이 증진되었다. 이러한 남북 관계 개선의 흐름 속에서 단절되었던 남북 철도 연결 및 운행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2.1. 경의선 철도 연결
남북은 2000년 7월 31일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먼저 경의선 철도 연결에 합의하였다. 이후 같은 해 9월 18일에 경의선 철도 연결 기공식이 있었으며, 2001년 12월 31일에는 비무장지대 이남 남측 구간 공사가 완료되었다. 2002년 9월 18일에는 남북 구간 연결 공사가 시작되었고, 같은 해 12월 31일에는 도라산역 인근 남측 구간이 모두 복원되었다. 비로소 2003년 6월 14일에 경의선 철도가 완전히 연결되어 당일 연결 행사를 가졌다.
2.2. 동해북부선 철도 연결
동해북부선 연결은 당초 2019년으로 예정되었으나, 남북 간 협의를 통해 예상보다 상당히 이른 시점에 착공되었다. 2004년 4월 17일에는 군사분계선을 건너는 선로가 복원되었고, 남북출입사무소인 제진역까지는 2005년 12월에 완료하였다. 이에 따라 실질적인 열차운행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비무장 지대를 넘는 도로 교통의 경우는 남북한 정부 사이의 임시적 합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철도교통의 경우는 합의가 없었던 상태였다.
2.3. 2006년 열차 시험운행 무산
2006년 4월 21일부터 4월 23일까지 열린 제18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는 열차 시험운행 및 도로, 철도 개통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5월에 제12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를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5월 11일과 5월 12일에는 경의선 및 동해선에서 동시에 열차 시험운행을 실시하기 위한 실무접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예정된 시험운행 바로 전날, 북측은 실무접촉 북측 단장인 박정성 명의로 일방적으로 시험운행 취소를 통보하여 결국 무산되었다. 북측은 전화 통보에서 군사적 보장 조치가 미흡하고 남측의 정세가 불안하다는 점을 취소 사유로 들었으나, 실제로는 북한 군부의 반발이 주된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군부가 협상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 했다는 추측도 있었지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취소 통보 직전까지 개성역 정비 작업과 북측 구간 철도 점검을 위해 남북 열차가 오가는 등 시험운행 준비는 진행되고 있었으며, 북측 당국자들의 언행에서도 운행이 중단될 만한 특별한 징후는 보이지 않았었다.
2.4. 재운행을 위한 노력
2007년 4월 22일 오전 고려호텔에서 열린 제13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협위) 종결회의에서 남북은 10개항의 합의문을 채택했다. 이 합의문에는 1년 전 취소되었던 열차 시험운행을 다시 추진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 실무접촉에서는 북한의 자원 개발권을 전제로 남측이 당시 8000USD 상당의 경공업 원자재를 제공하기로 하였으며, 쌀 40만 톤 또한 5월 말에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다만, 쌀 지원은 북측의 2·13 합의 이행 여부와 연계되었다.
같은 해 5월 8일부터 5월 11일까지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열린 제5차 남북장성급군사회담에서는 남북 열차 시험운행의 군사적 보장을 위한 합의서가 타결되고 발효되었다. 이와 함께 5개항의 공동보도문도 합의되었다. 또한 도로 및 철도 통행에 대한 군사보장합의서 체결 문제도 협의되어, 향후 상시 운행의 가능성을 열었다.
3. 시험운행 준비
정상 운행을 위해 궤도 검측차를 이용한 선로 검측과 기관차 운행 시험 등 열차 운행 전반에 걸친 준비가 이루어졌다. 이 준비 과정은 남북 공동으로 진행되었으며, 분계역인 도라산-판문 구간과 감호-제진 구간 사이의 송수신 시험도 완료되었다.
시험 운행 구간은 문산-개성 구간 26.8km, 금강산-제진 구간 25.5km이었다.
탑승 인원은 남북측 고위급 인사와 일반 초청객을 포함하여 총 300명으로, 남측 200명과 북측 100명으로 구성되었다. 주요 탑승객으로는 리영희, 시인 고은,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탤런트 고은아 등이 있었다.
남측 승객들은 버스를 이용하여 금강산역으로 이동했으며, 출발 전 인근 학교 학생들이 남측 대표단을 맞이하기도 했다.
4. 시험운행 당일 (2007년 5월 17일)
시험 운행은 경의선과 동해선 두 구간에서 동시에 이루어졌으며, 철도 신호는 연동폐색식을 사용하였다.
2007년 5월 17일 오전 11시 30분, 열차는 각각 문산역과 금강산역을 출발하여 목적지로 향했다. 두 열차 모두 비슷한 시간인 오후 12시 15분 경에 군사분계선을 통과하였다. 북측 구간에서는 선로 사정이 좋지 않아 시속 40킬로미터 이하로 운행해야 했다.
한편, 시험운행 당일 오전에는 납북자 단체 회원 5명이 시험운행 취소를 요구하며 코란도 자동차로 경의선 철도 기념식장을 점거하려 시도했다. 이들은 납북자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기습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에 의해 진압되어 인근 지구대로 이송되었다.
4.1. 경의선 (문산-개성)
시험운행일에 사용된 편성은 디젤전기기관차 1량(7435호), 새마을호 객차 4량, 발전차 1량 등 모두 6량 1편성이었다. 남측 100명, 북측 50명으로 구성된 초청객 150명을 태운 열차는 문산역을 출발하여 도라산역을 거쳐 휴전선을 넘었다. 이후 판문역, 손하역을 지나 최종 목적지인 개성역에 도착하였다.
4.2. 동해선 (금강산-제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내연기관차라는 객차형 기관차를 이용해 금강산역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남측 및 북측 승객을 태우고 휴전선을 건너 제진역에 도착했다.
북측 열차는 로근찬 기관사 등 4명, 남측 열차는 신장철 기관사(한국철도공사 서울기관차승무사무소) 등 2명이 운전하였다.
5. 시험운행 이후
2007년 남북 열차 시험운행은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남북관계 및 교류를 활성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시험운행 이후에는 서울-평양 간 정기 열차 운행,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의 연결, 금강산 관광객 수송에 철도를 활용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북측의 선로 상태가 좋지 않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다만, 시험운행 이후 문산과 개성공단 사이를 오가는 화물열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이 화물열차는 2008년 11월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운행이 중단되었다.
6. 평가
2007년 남북 열차 시험운행은 여러 가지 의의가 있지만, 집단이나 국가에 따라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6.1. 대한민국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일부 언론은 분단 후 처음으로 열차 시운행을 한 것의 의의는 인정하면서도, 시험운행에 들어간 비용과 남북 간 사상의 차이를 지적하며 북측에서는 별다른 행사가 없었다는 점을 보도했다. 반면 국민일보, 서울신문 등 다른 언론들은 각사의 사설을 통해 일회성 행사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분단 이후 처음으로 열차가 운행되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정치권에서는 여야 모두 이번 시험운행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하는 데 의견을 모았다. 다만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대변인 논평을 통해 대북정책이 "과속탈선"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경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