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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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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 연극은 에트루리아 연극의 영향과 그리스 연극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다. 로마는 그리스의 비극과 희극을 수용하여 라틴어로 번역하고, 로마 고유의 소재를 다룬 연극을 창작했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연극이 국가 축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으며, 극장 건축이 발전하여 영구적인 공연 공간이 건설되었다. 플라우투스와 테렌티우스는 로마 희극을 대표하는 극작가이며, 배우, 가면, 의상, 무대 등 다양한 요소들이 로마 연극의 특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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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연극
고대 로마 연극
극장 가면 벽화
폼페이 베티우스의 집 벽화에 그려진 연극 가면
시기기원전 3세기 ~ 서기 6세기
국가고대 로마
장르비극
희극
아트라 파불라
미무스
판토미무스
특징
주요 특징대규모 야외 공연
가면 사용
합창단의 중요한 역할
신화, 역사, 사회 풍자 주제
건축로마 극장 건축 양식 발달
무대 배경 (Scaenae frons)의 화려함
오케스트라 (Orchestra) 공간 활용
영향현대 연극에 미친 영향
유럽 연극 전통의 기초 형성
로마 문화 전파 기여
주요 인물
극작가루키우스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
나이비우스
플라우투스
테렌티우스
세네카
관련 용어
아트라 파불라로마의 토착 희극
미무스대중적인 즉흥 희극
판토미무스무언극
스카이네 프론스극장 배경 막
오케스트라합창단 또는 귀족 좌석 공간

2. 그리스 연극의 영향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통치 아래 건국되어 250년 동안 군주국 형태를 유지했다. 기원전 509년경, 로마의 마지막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축출된 후 로마는 공화국이 되었고, 로마인들이 선출한 집정관들이 통치했다. 로마 연극은 기원전 364년경 로마 공화국 초기, 로마의 지배가 이탈리아 반도의 넓은 지역으로 확대된 후에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364년, 역병으로 황폐해진 로마 시민들은 신들을 달래기 위해 렉티스테르니움 의식에 연극을 포함시켰다. 이후 배우들은 음악에 맞춰 텍스트를 연기하고 움직이는 방식으로 춤과 게임을 공연으로 각색했다.

로마 공화국 시대에 시민들은 매년 열리는 루디(공휴일 축제)에 전문적인 드라마 공연을 포함시켰다. 가장 큰 축제는 로마 신 유피테르를 기리는 루디 로마니로, 매년 9월에 열렸다.[3] 기원전 240년, 작가이자 극작가인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는 로마 무대에서 공연될 그리스 연극을 처음으로 번역하여 제작했다.[4][5][6]

기원전 240년 이전, 북부 및 남부 이탈리아 문화와 로마의 접촉은 로마의 오락 개념에 영향을 미쳤다.[7] 초기 로마 무대는 플리아케스, 아텔란 파르스, 페스케닌 시 등이 주를 이루었다.[7] 플리아케스 학자들은 고희극 제작을 묘사하는 꽃병을 발견하여, 이러한 희극이 이탈리아인 또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청중에게 상연되었음을 알게 되었다.[7] 기원전 240년부터 기원전 100년까지 로마 연극은 문학 드라마 시대로 도입되었고, 고전 및 후기 고전 그리스 연극이 로마 연극에 적용되었다.[7] 기원전 100년부터 서기 476년까지 로마의 오락은 서커스, 구경거리, 마임에 사로잡혔지만, 연극 공연의 매력은 여전했다.[7]

Roman Theatre in Orange, South of France


초기 드라마는 그리스 드라마와 매우 유사했다. 로마는 여러 전쟁에 참여했는데, 일부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 지역에서 일어났다.[8] 제1차 포에니 전쟁이 그 예이다.[8] 이를 통해 그리스와 로마의 관계가 시작되었고, 헬레니즘 세계가 출현하면서 헬레니즘 문화가 널리 퍼지고 로마의 지중해 식민지 정복으로 이어졌다.[8] 문화 변용은 그레코로만 관계에 적용되었으며, 로마는 그리스 문화와 업적을 채택하여 로마 문학, 예술, 과학으로 발전시켰다.[8] 로마는 다른 문화를 따라 자체 문화를 형성한 최초의 유럽 문화 중 하나였다.[8]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로마는 그리스 예술과 문학에 쉽게 접근했고, 스토아 철학 등 그리스 이주민 유입으로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8] 이러한 발전은 로마에 사는 그리스인 또는 혼혈인 극작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8] 그리스 문학 전통이 영향을 미쳤지만, 로마인들은 이를 완전히 채택하지 않고 라틴어를 사용했다.[8] 로마 연극은 에트루리아 전통, 특히 음악과 공연의 중요성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8]

2. 1. 초기 그리스 연극의 유행

플라우투스가 로마 국문학을 독자적인 높이로 승화시키기 수백 년 전부터 이탈리아 반도 남북에서는 갖가지 소박한 초기 연극적인 조류가 흐르고 있었다.

아테네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시칠리아의 각 도시에서 비극을 상연하고 자기 자신도 시칠리아의 겔라에서 사망했다. 그 후 에우리피데스의 각 작품은 특히 환영을 받았던 모양이다. 시라쿠사의 독재자 디오니소스는 스스로 비극 창작에 열중했다고 하며, 이러한 것으로 보아 그리스 비극이 널리 유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남이탈리아 곳곳에서의 독자적인 연극활동은 주로 희극 창작과 상연에 집중되었다. '즐거운 비극(Hilarotragodia)'이라 불렸던 이 희극은 오래전부터 남이탈리아에 식민(植民)한 펠로폰네소스의 주민들이 이 땅에 가져왔던 것으로 보이며, 주로 서사시나 전설의 영웅·미녀를 황당무계한 상황에 두고, 여러 모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연기를 하게 한다는 특징이 있다.

기원전 300년경 시라쿠사의 시인 린턴이 이를 문학적으로 정리하였다고 하나 작품은 완전히 없어져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시칠리아나 남이탈리아의 각지에서 사 온 항아리 등에는 장식으로서 이런 종류의 연극에 나오는 각 장면을 그린 것이 많다. 그래서 그 당시의 왕성한 유행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시인들이 즐겨 사용한 대식가(大食家) 헤라클레스, 간계(奸計)의 오디세우스, 인간 이하로 그 품성이 저열한 제신들의 각 테마와 어느 극에서나 등장하는 기본적인 3-4개의 타입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윽고 '아테라나 극'의 이름으로 로마에 전해지는 연극의 원형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또 플라우투스가 <암피트루오>에서 사용했던 정경설정 등도 예로부터 이 '즐거운 비극'의 테마로서 즐겨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한편 시정(市井)의 갈등을 다룬 극도 있고, 플라우투스의 <카시나>, <메르카토르>, <아시나리아> 등에서 볼 수 있는 한 여자를 둘러싼 부자간의 싸움이나, <아우룰라리아>의 도둑 소동 등의 원형으로 생각되는 정경도 묘사되고 있다.

이 소란스러운 연극은 이윽고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사람들로부터 캄파니아 지방의 오스크인 사이에 번지며 변형한다. 브코, 막스, 도세누스, 팝스의 네 가지 기본적 희극인물의 타입으로 설정되고 '아테라나 극(劇)'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보급된다. 한두 개의 병화(甁畵)에 의하면, 이에 이르러 구(舊)희극과 다분히 공통되고 있던 노골적인 희극의상은 개정되고 파로스는 없어졌으며, 노예 등 하층인물의 의상도 그때까지의 것보다 약간 긴 것을 착용하게 되었다. 이것 역시 순회 배우의 일단(一團)이 보급시키는 종류의 연극으로서, 극장의 양식도 간단하게 조립할 수 있는 목조무대(木造舞臺)가 사용되고, 거리의 광장이나 혹은 기성 경기장의 오케스트라에 즉석무대가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2. 2. 힐라로트라고디아 (즐거운 비극)

플라우투스가 로마 국문학을 독자적인 높이로 끌어올리기 수백 년 전부터 이탈리아 반도 남북에서는 여러 가지 소박한 초기 연극적인 흐름이 있었다. 남이탈리아 곳곳에서의 독자적인 연극활동은 주로 희극 창작과 상연에 집중되었다. '즐거운 비극(Hilarotragodia)'이라 불린 이 희극은 오래전부터 남이탈리아에 식민(植民)한 펠로폰네소스 주민들이 이 땅에 가져온 것으로 보이며, 주로 서사시나 전설의 영웅·미녀를 황당무계한 상황에 두고 여러 모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연기를 하게 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300년경 시라쿠사의 시인 린턴이 이를 문학적으로 정리하였다고 하나 작품은 완전히 사라져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시칠리아나 남이탈리아 각지에서 사 온 항아리 등에는 장식으로서 이런 종류의 연극에 나오는 각 장면을 그린 것이 많다. 그래서 그 당시의 왕성한 유행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시인들이 즐겨 사용한 대식가(大食漢) 헤라클레스, 간계(奸計)의 오디세우스, 인간 이하로 그 품성이 저열한 제신들의 각 테마와 어느 극에서나 등장하는 기본적인 3-4개의 타입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윽고 '아테라나 극'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전해지는 연극의 원형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플라우투스가 <암피트루오>에서 사용했던 정경 설정 등도 예로부터 이 '즐거운 비극'의 테마로서 즐겨 사용되었다. 한편 시정(市井)의 갈등을 다룬 극도 있었는데, 플라우투스의 <카시나>, <메르카토르>, <아시나리아> 등에서 볼 수 있는 한 여자를 둘러싼 부자간의 싸움이나, <아우룰라리아>의 도둑 소동 등의 원형으로 생각되는 정경도 묘사되고 있다.

2. 3. 플라우투스의 희극에 미친 영향

플라우투스가 로마 국문학을 독자적인 경지로 끌어올리기 수백 년 전부터, 이탈리아 반도 남북에서는 여러 소박한 초기 연극 형태의 흐름이 나타나고 있었다.

아테네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시칠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비극을 상연했으며, 자신도 시칠리아의 겔라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후 에우리피데스의 작품들이 특히 인기를 얻었다. 시라쿠사의 독재자 디오니소스는 직접 비극 창작에 몰두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그리스 비극이 널리 유행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남이탈리아 각지에서 독자적인 연극 활동은 주로 희극 창작과 상연에 집중되었다. '즐거운 비극(Hilarotragodia)'이라고 불린 이 희극은 오래전부터 남이탈리아에 정착한 펠로폰네소스 주민들이 가져온 것으로 보이며, 주로 서사시나 전설 속 영웅, 미녀를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놓고 벌이는 연기를 특징으로 했다.

기원전 300년경 시라쿠사의 시인 린턴이 이를 문학적으로 정리했다고 하나, 작품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시칠리아나 남이탈리아 각지에서 구입한 항아리 등에 이 연극의 장면을 그린 그림이 많이 남아있다. 이를 통해 당시 연극의 유행을 짐작할 수 있으며, 시인들이 즐겨 사용한 대식가 헤라클레스, 교활한 오디세우스, 인간 이하로 묘사된 신들의 모습, 그리고 모든 극에 등장하는 3~4가지 기본 유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아테라나 극'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전해지는 연극의 원형이 된다. 플라우투스가 <암피트루오>에서 사용한 설정 역시 '즐거운 비극'에서 즐겨 사용되던 소재였다. 한편, 평범한 사람들의 갈등을 다룬 극도 있었는데, 플라우투스의 <카시나>, <메르카토르>, <아시나리아> 등에서 보이는 한 여자를 둘러싼 부자간의 다툼이나, <아우룰라리아>의 도둑 소동 등이 그 예이다.

이 활기 넘치는 연극은 남이탈리아의 그리스인들로부터 캄파니아 지방의 오스크인들에게 퍼져나가며 변화를 겪는다. 브코, 막스, 도세누스, 팝스라는 네 가지 희극 인물 유형이 정해지고, '아테라나 극'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전해진다. 몇몇 병화(甁畵)에 따르면, 이때 기존 희극의 노골적인 의상은 수정되고, 남근(파로스)은 사라졌으며, 노예 등 하층민의 의상도 이전보다 약간 길어졌다. 이는 순회극단이 주로 공연하던 연극으로, 간이 목조 무대가 사용되었고, 거리 광장이나 경기장의 오케스트라에 임시 무대가 설치되기도 했다.

3. 에트루리아 연극의 영향

에트루리아 문화는 초기 로마의 종교를 비롯한 정신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기원전 364년, 로마에 역병이 퍼지자 로마 시민들은 신을 달래기 위해 렉티스테르니움 의식에 연극을 추가했는데, 이때 에트루리아 예능인들이 로마를 처음 방문했다.[3] 이들은 음악, 춤, 노래를 선보였는데, 이는 로마 공화국 초기 농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파스켄니시 등과 섞여 사투라(혼합시)의 모태가 되었다. 라틴어 '히스트리오(배우)'는 에트루리아어의 '히스테르(댄서)'에서, '페르소나(연기자/가면)'는 가면을 쓴 에트루리아 댄서 '페르스'에서 유래되었다.

3. 1. 에트루리아 예능인들의 로마 방문

기원전 364년, 로마에 역병이 퍼지자 로마 시민들은 신들을 달래기 위해 렉티스테르니움 의식에 연극을 추가했다. 이때 에트루리아의 예능인들이 로마를 처음 방문했다. 라틴어의 '히스트리오(배우)'는 에트루리아어의 '히스테르(댄서)'에서, '페르소나(연기자 또는 가면)'는 가면을 쓴 에트루리아 댄서 '페르스'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음악, 춤, 노래는 로마 공화국 초기 농민들 사이에서 불리던 파스켄니시(詩)와 섞여 사투라(혼합시)의 바탕이 되었다.

3. 2. 어원적 영향

에트루리아인의 문화는 초기 로마인들의 종교를 비롯한 정신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기원전 364년에 에트루리아의 예능인들이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했다.[3] 라틴어 단어인 '히스트리오(histrio, 배우)'는 에트루리아어(語)의 '히스테르(hister, 댄서)'에서 유래했고, '페르소나(persona, 연기자 또는 가면)'는 가면을 쓴 에트루리아의 댄서 '페르스(phersu)'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음악, 춤, 노래는 로마 공화국 초기 농민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파스켄니시(Fescennine Verses) 등과 섞여 사투라(satura, 혼합시)의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이 무렵 남부 이탈리아의 희극이 오스크인을 통해 로마에 전해졌고, 로마인들의 흥미를 끌어 로마 연극이 발전하는 직접적, 간접적 계기가 되었다.

3. 3. 파스켄니시와 사투라

에트루리아 문화는 초기 로마인의 종교를 비롯한 정신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기원전 364년, 에트루리아 예능인들이 로마를 처음 방문했다. 라틴어 '히스트리오(배우)'는 에트루리아어의 '히스테르(댄서)'에서, '페르소나(연기자/가면)'는 가면을 쓴 에트루리아 댄서 '페르스'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음악, 춤, 노래는 로마 공화국 초기 농민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파스켄니시(詩) 등과 섞여 사투라(혼합시)의 기반이 되었다.[7] 파스켄니시는 남부 에트루리아에서 유래되었다.

4. 로마 공화정 시대의 연극

로마 연극 창작은 기원전 3세기 후반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그리스극을 번역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기원전 240년부터 207년까지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메난드로스의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상연했고, 남이탈리아 희극 테마를 개량한 작품도 몇 개 상연했다.

초기 로마 연극은 대부분 등장인물과 의상이 그리스풍이었기 때문에 '그리스 옷차림의 연극(Fabula palliata)'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나에비우스는 <로몰로스> 등 로마 고유의 영웅을 소재로 하고 로마 귀족 의상을 사용한 파불라 프라에텍스타타(Fabula Praetextata)를 창작했다. 로마 시민생활을 모방하고 로마인 토가를 착용한 희극은 파불라 토가타(Fabula Togata)로 불렸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현재 소실되어 극 제목, 인용 단편, 도제 인형 배우 등을 통해서만 일부 내용을 추측할 수 있다.

로마 공화국 초기에는 그리스 드라마와 유사한 연극이 주를 이루었다.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241년) 등 여러 전쟁을 통해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문화 변용을 통해 그리스 문화 요소를 로마 문학, 예술, 과학으로 발전시켰다.[8]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68년) 이후 그리스 예술과 문학에 더 쉽게 접근하게 되었고, 스토아 철학 등의 영향으로 철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8]

기원전 364년, 역병 이후 로마 시민들은 신들을 달래기 위해 렉티스테르니움 의식에 연극을 포함시켰다. 이후 배우들은 음악에 맞춰 텍스트를 연기하고 움직이는 방식으로 공연을 만들었다.

로마 공화국 시대가 진행되면서, 시민들은 매년 열리는 루디(공휴일 축제)에 전문 드라마 공연을 포함시켰다. 가장 큰 축제는 로마 신 유피테르를 기리는 루디 로마니였다.[3]

4. 1.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기원전 3세기 후반 로마에서 연극 창작을 시작한 인물로, 그리스극을 번역하였다.[3] 그는 기원전 240년부터 207년까지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메난드로스의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상연하였고, 남이탈리아 희극의 테마를 개량한 작품도 몇 개 상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5][6]

4. 2. 나에비우스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의 그리스극 번역에서 시작된 로마 연극 창작 움직임과 병존하여, 나에비우스는 <로몰로스> 등 로마 고유의 영웅 소설을 테마로 한 극작을 저술하였다. 로마 귀족의 의상을 사용했기 때문에 파불라 프라에텍스타타(Fabula Praetextata)라 불렸다.

4. 3. 파불라 팔리아타, 파불라 토가타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가 기원전 3세기 후반에 그리스극을 번역하면서 로마에서 연극 창작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240년부터 207년까지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메난드로스의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상연했으며, 남이탈리아의 희극 테마를 개량한 작품도 몇몇 상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등장인물이 그리스인이고 의상도 그리스풍이었기 때문에 '그리스 옷차림의 연극(Fabula palliata)'이라고 불렸다.

이와 병존하여 나에비우스는 <로몰로스> 등 로마 고유의 영웅 소설을 테마로 한 극을 썼는데, 로마 귀족의 의상을 사용했기 때문에 파불라 프라에텍스타타(Fabula Praetextata)라 불렸다. 또한 로마 시민생활을 모방한 희극도 등장했는데, 등장인물이 로마인의 토가를 착용했기 때문에 파불라 토가타(Fabula Togata)라는 이름으로 구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은 모두 소실되었고, 전해지는 극작품의 제목이나 인용 단편, 당시의 도제 인형 배우 등을 통해서 그 편린(片鱗)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4. 4. 연극제의 증가

기원전 240년부터 기원전 207년까지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에 의해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메난드로스의 작품이 잇따라 라틴어로 번역 및 상연되면서 로마에서 연극 창작이 활발해졌다.[4][5][6] 공화정 시기 로마에서 연극은 1년 중 정해진 국가 축제일에 안찰관의 감독 하에 개최되었으나, 점차 그 횟수가 증가했다.

가장 오래되고 성대한 '로마인의 축제'(루디 로마니)[3], 기원전 220년부터의 '민중의 축제', 기원전 212년부터의 '아폴로 축제', 기원전 194년의 '큐베레 축제' 등 해를 거듭하면서 연극제의 수는 늘어갔다. 기원전 200년경에는 1년에 10여 일밖에 연극이 상연되지 않았지만, 아우구스투스 치세하에서는 국가가 지정한 상연일이 40여 일이나 되었다. 또한 그 밖의 정례·개선 등이 있을 때마다 특별 상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로마의 비극

신희극이 로마 관객을 꾸준히 매혹시키고 있을 때, 엔니우스, 파쿠비우스, 아키우스와 같은 작가들이 아테네 3대 비극 작가들의 여러 작품을 라틴어로 번안하거나 개작하고 있었다. 이들의 작품은 거의 대부분 사라지고 작품 제목과 인용을 통한 단편만이 전해지고 있지만,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그리스 원작과 비교하면, 이들의 작품은 과장되고 수사적인 표현이 두드러졌으며, 피비린내 나는 자극적인 소재를 즐겨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비극과 희극의 연극 가면, 로마 모자이크, 서기 2세기. 카피톨리노 박물관


로마의 극장 구조는 그리스의 고전기나 헬레니즘 시대와는 상당히 달랐다. 로마에는 상설 극장이 없었고, 경기장이나 거리 광장에 임시 무대를 설치하여 공연했다. 공화정 말기에 이르러 그리스풍 극장의 기본 구조 위에 로마 고유의 특징을 더한 극장이 만들어졌다. 오케스트라는 완전한 원형에서 반원형으로 바뀌었고, 무대와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건물로 통합되었다. 무대는 면적이 넓어졌고, 합창단이 사용하던 오케스트라는 귀빈석으로 바뀌었다. 무대 배경은 실내 벽면처럼 장식되었고, 호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리스에서는 극장이 언덕 경사면에 설치되고 성역화되었지만, 로마에서는 평지에 콜로세움 형태로 지어졌으며, 외부는 주열이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내부 좌석은 신분과 계급에 따라 엄격하게 구별되었다. 그리스에서 극장이 고도의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곳이었다면, 로마에서는 모든 종류의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장소였고, 문학 작품 상연은 그 일부에 불과했다.

초기 로마 문학에서 중요한 작품들은 기원전 240년부터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가 쓴 비극과 희극이었다. 5년 후, 그나이우스 네비우스도 극작을 시작하여 두 장르 모두에서 작품을 썼다. 기원전 2세기 초, 드라마는 로마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작가 길드(collegium poetarum)가 결성되었다.[9]

제정 시대에는 두 명의 비극 작가의 작품이 남아 있는데, 한 명은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고, 다른 한 명은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이다. 세네카의 비극 9편은 모두 ''fabulae crepidatae''(그리스 소재를 다룬 라틴 비극)이다. 세네카는 비극 ''옥타비아''의 등장인물로 나오는데, 이 작품은 현존하는 ''fabula praetexta''(로마 소재를 다룬 비극, 최초는 네비우스가 창작)의 유일한 예이다. 이 때문에 이 극은 세네카가 쓴 것으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이 극이 세네카의 작품이 아니며, 진정한 작가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고 확인했다.[9]

5. 1. 엔니우스, 파쿠비우스, 아키우스

신희극이 로마 관객을 사로잡을 무렵, 엔니우스(B.C. 239-B.C.169), 파쿠비우스(B.C. 220-B.C. 130경), 아키우스(B.C.170-B.C.86경) 등이 아테네 3대 비극작가의 작품을 라틴어로 개작했다.

이들의 작품은 대부분 소실되어 작품명과 단편만이 전해지지만,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 많았다. 그리스 원작과 비교하면 과장되고 수사적인 대사가 두드러지며, 피비린내 나는 자극적인 제재가 많았다. 호라티우스는 비극작가 지망생들에게 절도와 균형 잡힌 작품을 쓰도록 충고했지만 헛된 일이었다.

초기 로마 비극은 현존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높이 평가받았다. 역사학자들은 엔니우스, 파쿠비우스, 루키우스 아키우스 세 명의 초기 비극 작가를 알고 있다. 비극은 다른 장르와 달리 합창단이 무대 위 행동에 포함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10]

5. 2. 호라티우스의 비판

호라티우스는 비극 작가 지망생들에게 그리스 대시인들의 작품을 잘 배우고 절도와 균형을 갖춘 작품을 쓰라고 충고했지만, 그 충고는 헛된 것으로 보인다.[10] 번역된 시구에서 보이는 과장된 표현은 당시 조각이나 벽화에 그려진 비극 가면과 배우 의상에서도 나타난다. 거대한 눈과 입, 높이 솟은 머리, 큼직한 패드를 넣은 의상, 굽 높은 신발 등은 이 시대에 최고조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의상을 입은 배우가 수사적인 대사를 읊을 때 장중한 분위기를 전달했는지, 아니면 생기를 잃은 채 둔중한 느낌으로 일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로마 관객들은 가면을 쓰지 않는 촌극, 무용, 곡예 등을 더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5. 3. 과장된 연극 양식

신희극이 로마 관객을 사로잡을 무렵, 엔니우스, 파쿠비우스, 아키우스 등의 작가들이 아테네 3대 비극 작가들의 작품을 라틴어로 개작하고 있었다.[10] 이들의 작품은 대부분 소실되어 작품명과 인용된 단편만이 전해지지만,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 많았다. 그리스 원작과 비교하면 과장되고 수사적인 대사가 두드러지며, 피비린내 나는 자극적인 소재가 많았다. 호라티우스는 비극 작가 지망생들에게 그리스 대시인들의 절도와 균형을 배울 것을 충고했지만, 그 충고는 헛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각이나 벽화에 그려진 비극 가면과 배우 의상에서도 그로테스크한 과장을 볼 수 있다. 거대한 눈과 입, 높다란 머리, 큼직한 패드를 넣은 의상, 굽 높은 신발 등은 이 시대에 최고조로 발전했다. 이러한 의상을 입은 배우가 수사적인 대사를 읊을 때 장중한 분위기를 전달했는지, 아니면 둔중한 중압감으로 일관했는지는 자료 부족으로 불분명하다. 그러나 로마 관객은 가면 없는 촌극, 무용, 곡예 등을 더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1세기 로마 비극 배우의 상아 조각상.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원본을 본뜬 서기 100년경 로마 배우의 대리석 조각상. ''Papposilenus'' 역을 연기하고 있다.


초기 로마 비극은 현존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높이 평가받았다. 역사학자들은 엔니우스, 파쿠비우스, 루키우스 아키우스 세 명의 초기 비극 작가를 언급하며, 이들은 많은 비극 공연에서 합창단을 무대 행동에 포함시켰다.[10]

제정 시대에는 두 명의 비극 작가 작품이 남아 있는데, 한 명은 미상이고 다른 한 명은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이다. 세네카의 비극 9편은 모두 그리스 소재를 다룬 라틴 비극을 뜻하는 ''fabulae crepidatae''이다.

세네카는 비극 ''옥타비아''의 등장인물로, 이 작품은 현존하는 로마 소재 비극 (최초는 네비우스 창작)의 유일한 예이다. 이 극은 세네카의 작품으로 오해되기도 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진정한 작가가 미상임을 확인했다.[9]

세네카 비극은 수사학적 구조를 강조하는 선언적인 스타일을 제시했다.[11] 이 스타일은 역설, 단절, 대구법이 특징이며, 압축, 정교화, 경구, 과장법 등을 포함하는 선언적 구조와 기법을 채택했다. 세네카의 희곡은 주장을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과장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11] 세네카는 수사학을 통해 영혼을 반영하는 비극을 썼으며, 비극적 인물을 창조하고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수사학을 사용했다.[11] 세네카는 아테네 비극에서는 생소했던 헬레니즘 드라마의 연극 기법인 옆대사를 사용했다.[11] 그는 '자기 표현 독백 또는 모놀로그'를 통해 마음의 심리적 내부를 탐구했는데, 이는 개인의 내면의 생각, 정서적 갈등의 원인, 자기 기만 등 로마 비극의 중심이 되어 감정을 극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전의 그리스 비극 형태와 구별되었다.[11] 세네카의 수사학을 접한 제자, 독자, 청중은 그의 언어 전략, 정신적 이동성, 공적 역할극 사용법을 배웠다고 전해지며, 이는 많은 개인의 정신 상태를 변화시켰다고 한다.[11]

6. 로마의 극장 건축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통치 하에 군주국으로 건국되었으며, 건국 후 250년 동안 그 형태를 유지했다. 기원전 509년경, 로마의 마지막 왕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축출된 후, 로마는 공화국이 되었고 이후 로마인들이 선출한 집정관 그룹에 의해 통치되었다. 로마 연극은 로마의 지배가 이탈리아 반도의 넓은 지역으로 확대된 후, 기원전 364년경, 로마 공화국의 처음 두 세기 동안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364년, 역병으로 인한 황폐함 이후, 로마 시민들은 신들을 달래기 위해 렉티스테르니움 의식에 연극 게임을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이후 배우들은 음악에 맞춰 텍스트를 연기하고 동시에 움직이는 방식으로 이러한 춤과 게임을 공연으로 각색했다.

로마 공화국 시대가 진행되면서, 시민들은 매년 열리는 루디(공휴일 축제)의 다양한 행사에 전문적으로 공연되는 드라마를 포함시키기 시작했는데, 이 중 가장 큰 축제는 로마 신 유피테르를 기리기 위해 매년 9월에 열리는 루디 로마니였다.[3] 저자이자 극작가인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는 기원전 240년에 로마 무대에서 공연될 그리스 연극을 처음으로 번역하여 제작했다.[4][5][6]

기원전 240년 이전, 북부 및 남부 이탈리아 문화와의 로마의 접촉은 로마의 오락 개념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7] 초기 로마 무대는 플리아케스, 아텔란 파르스, 페스케닌 시 등이 주를 이루었다.[7] 기원전 240년부터 기원전 100년까지, 로마 연극은 문학 드라마 시대로 도입되었고, 그 안에서 고전 및 후기 고전 그리스 연극이 로마 연극에 적용되었다.[7] 기원전 100년부터 서기 476년까지, 로마의 오락은 서커스와 같은 공연, 구경거리, 마임에 사로잡히게 되었지만 연극 공연에 대한 매력은 여전했다.[7]

잘 보존된 로마 극장 보스라(시리아)


초기에 등장한 드라마는 그리스의 드라마와 매우 유사했다. 로마는 여러 전쟁에 참여했는데, 그중 일부는 그리스 문화가 큰 영향을 미친 이탈리아 지역에서 일어났다.[8] 제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241년)의 시칠리아가 그 예시이다.[8] 이를 통해 그레코로만 관계가 시작되었으며, 로마는 그리스 문화의 측면, 그들의 업적을 채택하고 이러한 측면을 로마 문학, 예술, 과학으로 발전시켰다.[8]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68년)이 끝나면서, 로마는 방대한 그리스 예술과 문학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8] 일어난 발전은 로마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 또는 혼혈인 극작가들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8] 드라마의 그리스 문학 전통이 로마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로마인들은 이러한 전통을 완전히 채택하지 않고 대신 지배적인 지역 언어인 라틴어를 사용했다.[8] 공연되기 시작한 이러한 로마 연극은 에트루리아 전통, 특히 음악과 공연의 중요성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8]

기원전 240년 로마에서 연극이 처음 상연된 이후, 연극은 종종 공공 축제 기간에 상연되었다. 이러한 연극은 검투사 시합, 서커스 행사 등 다른 행사보다 인기가 적었기 때문에, 임시 목조 구조물을 사용하여 공연되었으며, 다른 볼거리 행사가 열릴 때마다 며칠씩 옮겨지고 해체되어야 했다. 영구적인 공연 공간을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고위 관리들의 완강한 반대 때문이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시민들이 연극 행사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으며, 이러한 행동을 묵인하면 로마 대중의 타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기원전 55년까지 연극 공연을 목적으로 영구적인 석조 구조물이 건설되지 않았다.

극장은 특정 후원자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시민 질서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과 시민들의 연극 공연에 대한 열망의 결과로 후원의 대상이 되었다.[15] 극장은 거의 항상 로마 공화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와 직책을 가진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건설되었다.[15] 권력 분리를 유지하기 위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앞쪽이나 대중의 눈에 띄는 곳(트라이뷰날리아)에 앉았다.[15]

6. 1. 가설 극장

신희극이 로마 관객을 사로잡을 무렵, 엔니우스, 파쿠비우스, 아키우스 등이 아테네 3대 비극 작가의 작품을 라틴어로 개작했다. 이들의 작품은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 많았고, 과장되고 수사적인 대사와 피비린내 나는 자극적인 제재가 특징이었다. 호라티우스는 비극 작가 지망생들에게 절제와 균형을 갖춘 작품을 쓰도록 충고했지만, 이는 헛된 일이었다.

당시 조각이나 벽화에 그려진 비극 가면과 배우의 의상은 그로테스크한 과장을 보여준다. 거대한 눈과 입, 높다란 머리, 큼직한 패드를 넣은 의상, 굽 높은 신발 등은 이 시대의 특징이었다. 이러한 의상을 입은 배우가 수사적인 대사를 읊을 때의 분위기는 자료 부족으로 불분명하지만, 로마 관객은 가면 없는 촌극, 무용, 곡예 등을 더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극장 구조도 그리스 고전기나 헬레니즘 양식과 달라졌다. 남이탈리아의 옛 그리스 식민 도시에서는 옛 극장이 희극을 상연했지만, 로마에는 상설 극장이 없었고, 경기장이나 거리 광장에 가설 무대를 설치했다. 공화제 말기에 이르러 그리스풍 극장을 바탕으로 로마 고유의 조건에 맞는 극장이 만들어졌다.

오케스트라는 완전한 원에서 반원으로 바뀌었고, 무대와 오케스트라가 한 건물에 포함되었다. 무대 면적은 넓어졌고, 오케스트라는 귀빈석으로 변했다. 무대 배경은 실내 벽면처럼 장식되었고, 호화로운 분위기를 띠기도 했다. 그리스에서는 극장이 구릉지 경사면에 설치되고 성역화되었으나, 로마에서는 평지에 콜로세움 모양으로 지어졌고, 외면은 주열이나 조각으로 장식되었으며, 내부 좌석은 신분과 계급에 따라 구별되었다. 그리스에서 극장이 고도의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곳이었다면, 로마에서는 모든 것을 구경시켜 주는 관람장이었고, 문예 작품 상연은 그 일부에 불과했다.

6. 2. 로마식 극장의 특징

그리스의 고전기(古典期) 내지 헬레니즘 양식과는 현저하게 다른 극장 구조가 로마에 나타났다. 남이탈리아의 구(舊) 그리스 식민 도시에서는 옛 시대의 극장이 희극을 상연했으나, 로마에서는 상설적인 극장이 없었고 경기장이나 거리의 광장에 가설 무대를 설치하여 관객을 모았다. 공화제 말기가 되면서 그리스풍 극장의 바탕 위에 로마 고유의 조건에 적합한 극장이 만들어졌다.

몇 가지 중요한 변경 사항은 다음과 같다.

  • 완전한 원(圓)이었던 오케스트라는 반원(半圓)이 되었다.
  • 무대와 오케스트라가 한 건조물에 포함되었다.
  • 무대 면적이 넓어졌고, 오케스트라는 근세의 오페라 극장처럼 귀빈석으로 변했다.
  • 무대 배경은 실내의 벽면처럼 반주(半柱)나 그림·조각으로 장식되었고, 호화로운 장식적 분위기를 지니는 경우도 있었다.
  • 그리스에서는 구릉지 경사면을 이용하여 극장을 설치하고 성역화(聖域化)했으나, 로마에서는 평지에 지은 콜로세움상(狀)의 것이 많았다.
  • 로마 극장 외면은 주열(柱列)이나 조각 등으로 호화롭게 장식되었고, 내부 좌석은 신분이나 계급에 따라 엄격히 구별되었다.


그리스에서는 극장이 고도의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곳이었지만, 로마에서는 모든 것을 구경시켜 주는 관람장이었으며 문예작품의 상연은 그 일부에 불과했다.

로마 극장은 주로 그리스 극장을 모델로 했다.[15]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배치되었지만, 무대와 무대 건물은 관람석과 함께 연결되어 같은 높이로 솟아 있어 현대 극장과 구조와 외관이 매우 유사한 울타리를 만들었다.[15] 오데움(odea) 또는 작은 극장에 지붕을 설치하거나, 큰 극장에 벨라(vela)를 설치하여 관객이 그늘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15]

임시 구조물이 있는 동안, 연극 공연은 매우 미니멀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여기에는 관객이 서거나 앉아서 연극을 볼 수 있는 공간인 ''카베아''와 무대, 즉 ''스카에나''가 포함되었다. 각 연극의 배경은 정교한 배경(''스카에나 프론스'')을 사용하여 묘사되었으며, 배우들은 ''스카에나 프론스'' 앞의 연기 공간인 ''프로스케니움''에서 공연했다. 이러한 구조물은 사원, 경기장 등 여러 다른 장소에 세워졌으며, 때로는 로마의 중앙 광장(''포럼'')에서 연극이 열리기도 했다.[12][4]

극장 내의 사회적 분열은 관람석이 넓은 통로 또는 프라에친치오네스(praecinctiones)에 의해 이마(ima), 미디어(media), 수마 카베아(summa cavea)의 세 구역 중 하나로 나뉜것에서 확인 할 수 있다.[15] 이 구역은 인구 내의 특정 집단을 구분하는 역할을 했다.[15] 이 세 구역 중 수마 카베아 또는 '갤러리'는 토가를 입지 않은 남성 또는 풀라티(pullati, 빈곤층), 여성, 그리고 때로는 노예(입장 허가)가 앉는 곳이었다.[15] 극장의 좌석 배치는 로마 사회의 성별 불평등을 강조하는데, 여성은 노예와 함께 앉았다.[15] 아우구스투스 시대가 되어서야 극장 내의 분리가 시행되었으며, 여성은 뒤쪽이나 근처에 앉아야 했다.[15]

기원전 55년에 최초의 영구적인 극장인 폼페이우스 극장이 건설되었다. 폼페이우스 대왕이 건설한 이 구조물의 주요 목적은 드라마 공연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통치자들이 대중을 소집하고 대중에게 자신의 위엄과 권위를 과시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20,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이 웅장한 구조물은 폭 약 91.44m의 무대를 갖추고 있었으며, 정교한 조각상으로 장식된 3층 높이의 ''스카에나 프론스''를 자랑했다. 폼페이우스 극장은 6세기 초까지 사용되었지만, 중세 시대에 석재를 위해 해체되었다. 오늘날에는 광대한 구조물의 거의 아무것도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다.[12][3]

7. 로마의 희극

현재까지 남아있는 모든 로마 희극은 팔리아타(그리스 주제에 기반한 희극)로 분류할 수 있으며, 티투스 마키우스 플라우투스와 푸블리우스 테렌티우스 아페르 두 극작가가 썼다. 토가타(로마를 배경으로 한 로마 코미디)는 현존하지 않는다.

로마 희극 작가들은 그리스 희곡을 로마 관객을 위해 각색하면서 몇 가지 변화를 주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합창단을 제거하고, 음악 반주를 추가하여 연극의 대화를 보완했다는 점이다. 또한 모든 장면은 주요 등장인물의 집 밖 거리에서 진행되었으며, 줄거리의 복잡성은 종종 조연 캐릭터의 엿듣기에서 비롯되었다.[12][9]

코미디 가면으로 장식된 기름 램프

7. 1. 플라우투스 (Titus Maccius Plautus)

티투스 마키우스 플라우투스(플라우투스)는 기원전 205년에서 184년 사이에 활동한 로마의 극작가이다. 그의 희극 20편이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그중 광대극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대화의 재치와 다양한 운율 사용으로 칭찬받았다.[9] 플라우투스의 희극이 인기를 얻으면서 무대 연극은 로마 축제에서 더욱 중요한 요소가 되었고, 이전에는 경주, 운동 경기, 검투사 시합만 열렸던 행사에서 연극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 관객을 위해 그리스 희곡을 각색할 때, 로마 희극 작가들은 작품 구조에 몇 가지 변화를 주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전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합창단을 없애고 사건을 별개의 에피소드로 나누는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음악 반주가 연극의 대화를 보완하기 위해 추가되었다. 모든 장면의 액션은 일반적으로 주요 등장인물의 집 밖 거리에서 진행되었으며, 플롯의 복잡성은 종종 조연 캐릭터의 엿듣기에서 비롯되었다.

7. 2. 테렌티우스 (Publius Terentius Afer)

테렌티우스는 기원전 166년에서 160년 사이에 희극 6편을 작곡했으며, 이 작품들은 모두 현재까지 남아있다. 그는 여러 그리스 원작을 하나의 작품으로 결합하는 복잡한 플롯을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원작 그리스 희곡을 망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고, 고위층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썼다는 소문까지 불러일으켰다.[12][9] 테렌티우스는 이러한 소문을 기회로 삼아 여러 희극의 서문에서 관객에게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보고 들어주며, 소문에 흔들리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이는 당시 다른 유명 극작가들이 자신의 서문을 공연될 연극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데 사용했던 것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12][9]

7. 3. 로마 희극의 특징

현재까지 남아있는 모든 로마 희극은 팔리아타(그리스 주제에 기반한 희극)로 분류할 수 있으며, 티투스 마키우스 플라우투스와 푸블리우스 테렌티우스 아페르 두 극작가가 썼다. 토가타(로마를 배경으로 한 로마 코미디)는 현존하지 않는다.

로마 관객을 위해 그리스 희곡을 각색하면서 로마 코미디 극작가들은 제작 구조에 몇 가지 변화를 주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이전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합창단을 제거하여 사건을 별개의 에피소드로 나누는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음악 반주가 연극의 대화를 보완하기 위해 추가되었다. 모든 장면의 액션은 일반적으로 주요 등장인물의 거주지 밖 거리에서 진행되었으며, 플롯의 복잡성은 종종 조연 캐릭터의 엿듣기에서 비롯되었다.

플라우투스는 기원전 205년에서 184년 사이에 활동했으며, 그의 희극 20편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의 광대극이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대화의 재치와 다양한 운율 사용으로 칭찬받았다. 플라우투스 희곡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이 새로운 형태의 희극이 등장하면서, 무대 연극은 당시 로마 축제에서 더욱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었으며, 이전에는 경주, 운동 경기, 검투사 시합만 열렸던 행사에서 그 자리를 차지했다.

테렌티우스가 기원전 166년에서 160년 사이에 작곡한 희극 6편이 모두 남아 있다. 그는 여러 그리스 원작을 하나의 작품으로 결합하는 복잡한 플롯을 사용하여, 원작의 그리스 희곡을 망치고 있다는 비판과 고위층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썼다는 소문까지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이러한 소문은 테렌티우스가 여러 희극의 서문을 사용하여 관객에게 간청하는 기회로 삼아, 그의 작품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들으며, 그가 하는 행동에 대한 소문에 흔들리지 않도록 요청했다. 이는 당시 다른 유명 극작가들이 자신의 서문을 공연될 연극의 플롯을 소개하는 데 사용했던 것과는 극명한 차이를 보였다.[12][9]

7. 4. 전형적인 등장인물 (Stock characters)

로마 희극에는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13]

  • '''청년(adulescens):''' 미혼 남성으로, 보통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다. 주로 창녀나 노예를 사랑하는데, 나중에 이들이 자유 출생 신분으로 밝혀져 결혼이 가능해진다. 청년은 보통 영리한 노예인 '''pseudolus servus'''의 도움을 받는다.
  • '''노인(senex):''' 주로 아들인 청년과의 관계에 관심을 갖는다. 아들의 애정 상대를 반대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돕기도 한다. 가끔 아들과 같은 여자를 사랑하지만, 결국 아내에게 끌려간다.
  • '''매춘업자(leno):''' 포주 또는 '노예 상인'이다. 매우 부도덕하고 비열하게 묘사되지만, 항상 합법적으로 행동하며 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 '''자랑스러운 병사(miles gloriosus):''' 그리스 구 코미디에서 유래한 거만하고 허풍떠는 병사 캐릭터이다. 플라우투스의 희극 제목에서 따왔다. 잘 속고, 겁이 많고, 허풍을 떤다.
  • '''기생충(parasitus):''' 이기적인 거짓말쟁이로 묘사된다. 주로 자랑스러운 병사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의 말에 매달린다. 자신의 식욕과 다음 무료 식사에만 관심이 있다.
  • '''부인(matrona):''' 아내이자 어머니로, 남편에게는 성가신 존재로 묘사된다. 남편의 외도를 발견하면 용서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사랑하지만, 남편에게는 변덕스럽다.
  • '''처녀(virgo):''' 미혼 여성으로 청년의 애정 대상이다. 주로 언급되지만 무대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연극 마지막에 자유 출생 신분임이 밝혀져 결혼이 가능해진다.


8. 로마 연극의 공연 양식



로마 연극은 기원전 240년 로마에서 처음 상연된 이후 주로 공공 축제 기간에 공연되었다.[15] 그러나 검투사 시합이나 서커스 행사와 같은 다른 볼거리에 비해 인기가 적어, 임시 목조 구조물을 사용하여 공연해야 했다.[15] 이 구조물은 다른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옮겨지고 해체되어야 했다.[15]

원로원 의원들은 시민들이 연극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 로마 대중이 타락할 것이라고 우려하여 영구적인 극장 건립을 반대했다.[15] 결국 기원전 55년이 되어서야 폼페이우스에 의해 최초의 영구적인 석조 극장이 건설되었다.[12][3]

극장 건설은 민간 후원, 공공 기부, 집정관의 공직 수수료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완공까지 여러 세대가 걸리기도 했다.[15] 후원자들은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건물 정면에 동상이나 비문을 새겨 넣었다.[15]

로마 극장은 서로마 제국 지역을 중심으로 그리스 극장을 모델로 하여 건설되었다.[15] 무대와 관람석이 연결된 반원형 구조로, 현대 극장과 유사한 형태였다.[15] 오데움과 같은 작은 극장에는 지붕을 설치하거나, 큰 극장에는 벨라(vela)를 설치하여 관객에게 그늘을 제공했다.[15]

임시 구조물에서 공연될 당시 연극은 ''카베아''(관객석), ''스카에나''(무대), ''스카에나 프론스''(배경), ''프로스케니움''(무대 앞 공간) 등으로 구성된 미니멀한 환경에서 진행되었다.[12][4] 연극은 사원, 경기장, 포룸 등 다양한 장소에서 공연되었다.[12][4]

극장 내 좌석은 이마(ima), 미디어(media), 수마 카베아(summa cavea)의 세 구역으로 나뉘어 사회적 신분을 반영했다.[15] 수마 카베아는 토가를 입지 않은 남성, 여성, 노예 등이 앉는 자리였다.[15]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여성의 좌석이 뒤쪽이나 근처로 제한되기도 했다.[15]

극장은 시민 질서 유지와 연극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 때문에 후원의 대상이 되었으며, 주로 로마 공화국의 고위층 인사들이 건설을 주도했다.[15] 권력 분리를 위해 고위층 인사들은 주로 앞쪽이나 눈에 잘 띄는 곳에 앉았다.[15]

8. 1. 배우

기원전 364년, 로마 시민들은 역병의 피해를 극복하고 신들을 달래기 위해 렉티스테르니움 의식에 연극을 도입했다.[3] 이후 배우들은 음악에 맞춰 대본을 연기하고 몸짓을 곁들이는 형태로 공연을 발전시켰다.

로마 공화국 시기에는 매년 열리는 축제인 루디(Ludi)에서 전문적인 드라마 공연이 포함되었으며, 그중 가장 큰 규모는 9월에 유피테르 신을 기리는 루디 로마니였다.[3]

왕으로 분장한 배우와 두 명의 뮤즈. 헤르쿨라네움의 프레스코화, 서기 30-40년


초기 로마 연극 배우는 대부분 에트루리아 출신이었다. 이 전통은 로마 연극에도 이어져, 배우들은 낮은 사회적 지위로 인해 일반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군 복무 또한 면제되어 정치 경력에도 제약이 있었다. 그러나 노예 배우는 성공하면 자유를 얻을 기회도 있었다.[16]

로마 무대 연기는 야외에서 대사 낭송, 몸짓, 노래, 춤을 포함하여 체력과 민첩성이 요구되었다.[17]

가면을 쓴 배우. 폼페이의 프레스코화


로마 연극은 배우 극단이 이탈리아 전역을 순회하며 확산되었다. 극단은 보통 4~6명으로 구성되었으며, 2~3명은 대사를 맡고 나머지는 시종 역할을 했다. 배우들은 특정 장르를 전문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18]

로마 공화국 말기, 퀸투스 로시우스 갈루스(기원전 125년~기원전 62년)는 코미디 연기로 명성을 떨친 유명 배우였다.[19] 그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등과 교류하며 엘리트 계층의 인정을 받았다.[20] 연기 교육에도 힘쓴 그는 존경받지 못하던 배우의 위상을 높이고 재정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에는 보수 없이 공연하며 로마에 봉사했다.[21]

여성 배우는 대사 없는 역할에만 참여했다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었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바실라, 파비아 아레테처럼 대사 역할을 맡은 여성 배우도 드물게 존재했다.[22] 춤과 노래 분야에서는 여성 배우들이 성공을 거두었고, 소시에 미마에라는 여성 배우 길드도 존재했다.

로마에서 배우의 사회적 지위는 낮았고, 범죄자나 매춘부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배우라는 직업은 혐오스럽게 여겨졌으며, 많은 배우가 노예 신분으로 주인에게 폭행당하기도 했다. 이는 배우가 존경받고 시민권을 가졌던 고대 그리스 연극과는 대조적이다.[13][4]

8. 2. 무대



기원전 240년 로마에서 연극이 처음 상연된 이후, 연극은 종종 공공 축제 기간에 공연되었다. 이러한 연극은 검투사 시합, 서커스 행사 등 다른 행사보다 인기가 적었기 때문에, 임시 목조 구조물을 사용하여 공연되었다. 이 구조물은 다른 행사가 열릴 때마다 며칠씩 옮겨지고 해체되어야 했다.[15] 영구적인 공연 공간을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고위 관리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시민들이 연극 행사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으며, 이를 묵인하면 로마 대중의 타락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기원전 55년까지 연극 공연을 위한 영구적인 석조 구조물이 건설되지 않았다.[15]

극장 건설 프로젝트는 완공되기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진행될 수 있었으며, 민간 후원자, 공공 기부, 그리고 수마이 호노라리에(summae honorariae, 집정관이 지불하는 공직 수수료)에서 나오는 수익을 결합하여 이루어졌다.[15] 후원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동상이나 비문(때로는 돈의 액수)이 트라이뷰날리아(tribunalia), 프로스케니움, 스카에나 프론스와 같은 건물 정면에 세워지거나 새겨졌다. 건물은 대중의 시선을 끌도록 설계되었다.[15] 극장을 건설하려면 대규모 작업과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으며, 종종 여러 세대에 걸쳐 진행되었다.[15]

로마 극장, 특히 서로마에서 건설된 극장은 주로 그리스 극장을 모델로 했다.[15] 이들은 종종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배치되었지만, 무대와 무대 건물은 관람석과 함께 연결되어 같은 높이로 솟아 있어 현대 극장과 구조와 외관이 매우 유사한 울타리를 만들었다.[15] 이는 오데움(odea) 또는 작은 극장에 지붕을 설치하거나, 큰 극장에 벨라(vela)를 설치하여 관객이 그늘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15]

임시 구조물이 있는 동안, 연극 공연은 매우 미니멀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여기에는 관객이 서거나 앉아서 연극을 볼 수 있는 공간인 ''카베아''와 무대, 즉 ''스카에나''가 포함되었다. 각 연극의 배경은 정교한 배경(''스카에나 프론스'')을 사용하여 묘사되었으며, 배우들은 ''스카에나 프론스'' 앞의 연기 공간인 ''프로스케니움''에서 공연했다. 이러한 구조물은 사원, 경기장 등 여러 다른 장소에 세워졌으며, 때로는 로마의 중앙 광장(''포럼'')에서 연극이 열리기도 했다.[12][4]

극장 내의 사회적 분열은 관람석이 어떻게 나뉘었는지에 나타났다. 관람석은 일반적으로 넓은 통로 또는 프라에친치오네스(praecinctiones)에 의해 이마(ima), 미디어(media), 수마 카베아(summa cavea)의 세 구역 중 하나로 나뉘었다.[15] 이 구역은 인구 내의 특정 집단을 구분하는 역할을 했다.[15] 이 세 구역 중 수마 카베아 또는 '갤러리'는 토가를 입지 않은 남성 또는 풀라티(pullati, 빈곤층), 여성, 그리고 때로는 노예(입장 허가)가 앉는 곳이었다.[15] 극장의 좌석 배치는 로마 사회의 성별 불평등을 강조하는데, 여성은 노예와 함께 앉았다.[15] 아우구스투스 시대가 되어서야 극장 내의 분리가 시행되었으며, 여성은 뒤쪽이나 근처에 앉아야 했다.[15]

극장은 특정 후원자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시민 질서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과 시민들의 연극 공연에 대한 열망의 결과로 후원의 대상이 되었다.[15] 극장은 거의 항상 로마 공화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와 직책을 가진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건설되었다.[15] 권력 분리를 유지하기 위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앞쪽이나 대중의 눈에 띄는 곳(트라이뷰날리아)에 앉았다.[15] 극장 건설에 후원을 한 개인은 종종 선전을 목적으로 그렇게 했다.[15] 황제 후원자든 부유한 개인의 손이든, 극장 건설의 높은 비용은 일반적으로 한 개인의 기부만으로는 충당하기 어려웠다.[15]

기원전 55년에 최초의 영구적인 극장이 건설되었다. 폼페이우스가 건설한 이 구조물의 주요 목적은 드라마 공연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통치자들이 대중을 소집하고 대중에게 자신의 위엄과 권위를 과시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20,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이 웅장한 구조물은 폭 약 91.44m의 무대를 갖추고 있었으며, 정교한 조각상으로 장식된 3층 높이의 ''스카에나 프론스''를 자랑했다. 폼페이우스 극장은 6세기 초까지 사용되었지만, 중세 시대에 석재를 위해 해체되었다. 오늘날에는 광대한 구조물의 거의 아무것도 지상에서 보이지 않는다.[12][3]

참조

[1] 웹사이트 The architecture of the Roman theater: Origins, canenization, and dissamination https://www.proquest[...] 2020-02-11
[2] 논문 Roman Spectacle Entertainments and the Technology of Reality
[3] 서적 Theatre Histories: An Introduction Routledge
[4] 서적 Roman Theat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서적 The Cambridge Guide to Theatre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6] 서적 The Roman Theatre and Its Audience Harvard University Press
[7] 웹사이트 The architecture of the Roman theater: Origins, canonization, and dissemination https://www.proquest[...] 2020-02-11
[8] 서적 Roman Republican Theatre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9] 서적 History of the Theatre Allyn and Bacon
[10] 서적 Roman Republican Theat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1] 서적 Tragic Seneca : An Essay in the Theatrical Tradition https://books.google[...] 2020-02-20
[12] 서적 The History of Greek & Roman Theater Princeton University Press
[13] 서적 The Facts on File Companion to Classical Drama Infobase Publishing
[14] 서적 McGraw-Hill Encyclopedia of World Drama VNR AG
[15] 논문 Roman Theatres: An Architectural Study https://www.academia[...]
[16] 서적 Roman Republican Theat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7] 서적 Roman Republican Theat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8] 서적 Roman Republican Theat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 서적 Roman Theater and Society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0] 서적 Roman Theater and Society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1] 서적 Roman Theater and Society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2] 서적 Greek and Roman Actors: Aspects of an Ancient Profession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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