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위원회 (프랑스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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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안위원회는 프랑스 혁명 시기, 특히 1793년 4월 6일 설립되어 1795년 11월 4일 해산될 때까지 프랑스를 통치했던 주요 행정 기구이다. 입헌 군주제 폐지 후, 전쟁과 국내 반란 등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당통 위원회'와 '대공안위원회' 시기를 거치며 권한을 강화했다. 공안위원회는 전쟁 관리, 법령 해석 및 시행, 공공 질서 유지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공포 정치'를 주도했으나, 내부 갈등과 로베스피에르 실각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이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권한이 축소되었고, 총재 정부 출범과 함께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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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위원회 (프랑스 혁명) | |
---|---|
개요 | |
공식 명칭 (프랑스어) | Comité de salut public |
유형 | 임시 정부 |
존속 기간 | 1793년 4월 6일 ~ 1795년 10월 25일 |
후계 | 집행 총재 정부 |
약칭 | (정보 없음) |
![]() | |
상세 정보 | |
성격 | 사실상의 정부 수반 |
관할 | (정보 없음) |
임명 | 국민 공회 |
임기 | (정보 없음) |
설립 | 국민 공회 |
해체 | 집행 총재 정부 |
소재지 | (정보 없음) |
전신 | (정보 없음) |
역사적 맥락 | |
배경 | 프랑스 혁명 시기 대외 전쟁 및 국내 반란의 위기 고조 혁명 정부 수립 필요성 증대 |
목적 | "공공의 안전" 확보 대내외적 위협에 대한 신속하고 강력한 대응 혁명 완수 |
권한 | 행정, 입법 주도권 장악 군사, 외교, 사법 등 국가 운영 전반에 대한 통제 반혁명 혐의자에 대한 체포, 재판, 처형 |
주요 활동 | 공포정치 주도 징병제를 통한 군사력 강화 물가 통제, 식량 확보 등 경제 정책 추진 반혁명 세력 탄압 혁명 재판소 운영 |
주요 인물 | |
주요 위원 |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조르주 당통 라자르 카르노 루이 드 생쥐스트 장 니콜라 빌로-바렌 콜로 데르부아 로베르 린데 장 마리 콜로 데르부아 베르트랑 바레르 에로 드 세셸 마르크 기욤 알렉시 |
평가 | |
긍정적 평가 | 혁명 수호 국가 위기 극복 프랑스 혁명 전쟁 승리 기여 |
부정적 평가 | 공포정치로 인한 과도한 폭력과 인권 침해 독재 체제 강화 로베스피에르 실각 후 몰락 |
2. 성립 배경
1793년 4월 4일, 프랑스 군 사령관이자 전국방장관이었던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는 국민공회가 자신의 지도력을 수용하지 않으면 파리에 군대를 동원하겠다고 위협한 뒤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이 소식은 파리에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오스트리아와 연합국에 의한 패배, 방데 반란 등 반혁명 움직임, 외국 대사들의 음모로 인해 프랑스가 즉각적인 위험에 처했다는 불안감을 야기했다.[13]
이런 상황에서 지롱드파 지도자 막시맹 이스나르는 공공의 안전을 위한 9인 위원회 창설을 제안했다. 조르주 당통은 이를 “혁명재판소의 무기를 잡을 수 있는 손”이라며 지지했다.[13] 1793년 4월 6일, 이 위원회는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처음에는 당통의 주도하에 ‘당통 위원회’라고 불렸다.[14]
2. 1. 혁명의 중앙 기관 필요성
1792년 8월 10일 혁명으로 입헌 군주제가 정지되면서, 프랑스에는 집행 권한을 가진 국왕과 내각을 대신할 중앙 기관이 필요했다. 8월 15일, 입법 의회는 임시로 의원 외 6명을 선출하여 대신으로 삼고, 이들로 구성된 '''임시 행정 위원회'''를 설치했다. 새로 소집된 국민공회도 수개월간 임시 행정부 역할을 했다.[56] 국왕이 헌법상 가지던 집행 권한은 혁명 독재를 선언한 국민공회가 가졌지만,[57] 공회는 의회였기 때문에 긴급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1792년 말, 벨기에 정복으로 인접국 영국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어[58] 전쟁이 불가피해지자, 1793년 1월 1일에 '''총 방위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는 군사 관계 위원회에서[59] 각 3명씩 위원을 내어 구성되었으며, 각 대신과 공회와의 연락을 긴밀히 하는 임시 행정 위원회를 확대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위원 대부분이 지롱드파로 채워져 산악파와의 당파 싸움이나 토론에 시간을 낭비해 구체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고, 3월, 동맹군의 공세에 전쟁 지도 실패 비난이 집중되었다. 이에 바레르의 제안으로[60] 더 강력한 위원회로 개편되었고, 3월 23일, 25명으로 증원되어 방위에 필요한 모든 법률과 수단 준비를 임무로 하는, 공안위원회의 원형이 탄생했다. 새로워진 위원회는 국방위원회라는 명칭이었지만, 대립하는 각 파벌이 함께 모이는 대연립 정권이 되었다.[61] 그러나 이 대규모 조직은 오히려 독이 되어, 공개 토론이었기 때문에 논의만 분분하고 논쟁의 장이 될 뿐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아 다시 기능 부전에 빠졌다.
4월 2일, 뒤무리에 장군의 배신이[62] 드러나 전쟁 대신, 국방 위원 2명과 파견 의원도 포로로 잡혀 전선이 대혼란에 빠졌다. 동시에 국내에서도 방데 반란이 격화되었기 때문에, 무력한 국방위원회에 대한 비판은 절정에 달했다. 4월 3일, 위원이던 로베스피에르가 탈퇴를 시사했고, 같은 위원 이스나르에 의해[64] 해체와 신 위원회 설립 동의가[65] 제출되어 가결되었다. 그 후, 협의를 거쳐 바레르와 콩도르세에 의해 수정된 법안이 1793년 4월 6일에 재제출되어, '''공안위원회'''가 성립되었다.
2. 2. 국방 위원회 설치와 한계
1792년 8월 10일 혁명으로 입헌 왕정이 중단되면서, 프랑스에서는 국왕과 내각을 대신할 중앙 기관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입법 의회는 의원 외 6명을 임시 대신으로 선임하여 임시 행정 회의를 구성했다. 새로 소집된 국민공회도 수개월간 임시 행정부 역할을 수행했다. 헌법상 국왕의 집행권은 혁명 독재를 선언한 국민공회가 가지게 되었으나, 의회 특성상 긴급 대응이 느리다는 단점이 있었다.[13]1792년 말, 벨기에 정복으로 영국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면서 전쟁이 불가피해졌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1793년 1월 1일, 국방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는 군사 관련 각 위원회에서 3명씩 위원을 선출하여 구성되었으며, 각 부처 장관과 국민공회 간의 연락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위원 대부분을 지롱드 당이 차지하면서, 몽테뉴 당과의 당쟁으로 인해 실질적인 활동은 어려웠다. 그 결과, 3월 동맹군의 공세 때마다 전쟁 지휘 실패의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이에 베르트랑 바레르는 더욱 강력한 위원회로의 개편을 제안했고, 3월 23일 위원 수를 25명으로 증원하여 방위에 필요한 모든 법률과 수단을 준비하는 위원회가 되었다. 이는 공안위원회의 모태가 되었다. 개편된 위원회는 '국방위원회'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지만, 대립하는 파벌들이 모두 모인 대연정 형태였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격렬한 토론의 장으로 변질되어 제 기능을 상실하는 역효과를 낳았다.[13]
1793년 4월 2일,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장군이 배신하여 전쟁 대신과 국방위원 2명, 파견 의원이 포로가 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전선은 혼란에 빠졌다. 동시에 프랑스 내 방데 반란이 격화되면서, 무력했던 국방위원회에 대한 비판은 극에 달했다. 4월 3일, 위원이었던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탈퇴를 시사했고, 다른 위원들에 의해 위원회 해체 및 새 위원회 설립 동의안이 제출되어 가결되었다. 이후 수정 법안이 1793년 4월 6일에 제출되어 공안위원회로 이어지게 되었다.[13]
2. 3. 공안위원회 설립
1792년 8월 10일 혁명으로 입헌 군주제가 정지되면서, 프랑스에는 국왕과 내각 제도를 대신할 중앙 기관이 필요했다. 8월 15일, 입법 의회는 임시 행정 회의를 구성하여 의원 외 6명을 대신(大臣)으로 선임했다. 새로 소집된 국민공회도 수개월간 임시 행정부 역할을 했다. 헌법상 국왕의 집행권은 혁명 독재를 선언한 국민공회가 가졌으나, 긴급 대응에는 느렸다.1792년 말, 벨기에 정복으로 영국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어 전쟁이 불가피해지자, 1793년 1월 1일 국방위원회 설치가 제기되었다. 이는 군사 관계 위원회에서 각 3명씩 위원을 선출하여 구성되었고, 각 대신과 공회 간 연락을 긴밀히 하는 임시 행정 회의의 확대된 형태였다. 그러나 지롱드 당이 위원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몽테뉴 당과의 당쟁으로 구체적인 활동은 없었다. 3월, 동맹군 공세 때마다 전쟁 지휘 실패 비난을 받았다. 베르트랑 바레르의 제안으로 3월 23일 위원을 25명으로 늘려 방위에 필요한 법률과 수단 준비를 목표로 하는 위원회로 개편되었는데, 이는 공안위원회의 원형이었다. 명칭은 그대로 국방위원회였으나, 대립 파벌이 모인 대연정 형태는 도리어 격렬한 토론만 야기하여 기능을 상실했다.
1793년 4월 2일,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장군이 배신하여 전쟁 대신과 국방위원 2명, 파견 의원이 포로가 되면서 전선이 혼란해졌다. 방데 반란도 격화되어 국방위원회에 대한 비판이 극에 달했다. 4월 4일, 뒤무리에는 국민공회가 자신의 지도력을 수용하지 않으면 파리에 군대를 동원하겠다고 위협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이는 파리에 경계심을 일으켰고, 오스트리아와 연합국에 의한 패배, 반혁명 반란, 외국 대사의 음모 등으로 프랑스가 즉각적인 위험에 처했다는 불안을 야기했다.[13]
지롱드파 지도자 막시맹 이스나르는 9인 위원회 창설을 제안했고, 조르주 당통은 "혁명재판소의 무기를 잡을 수 있는 손"이라며 지지했다.[13] 1793년 4월 6일, 위원회는 공식 설립되었고, 당통의 지도로 처음에는 당통위원회로 알려졌다.[14]
3. 발전
1793년 4월 4일, 프랑스 군사령관이자 전국방장관이었던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가 국민공회를 위협하는 편지를 발표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면서 파리에 위기감이 고조되었다.[129] 이러한 상황에서 지롱드파 지도자 막시맹 이스나르는 공공의 안전을 위한 9인위원회의 창설을 제안했고, 조르주 당통은 이를 지지했다.[129]
1793년 4월 6일 공식적으로 설립된 위원회는 조르주 당통의 주도로 처음에는 당통위원회라고 불렸다.[129] 당통은 5월 31일 반란과 6월 2일 반란을 통해 위원회를 이끌었고, 방데 전쟁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7월 10일 재구성에서 당통은 배제되었지만, 그는 계속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후원하였다.[130]
1793년 7월 27일,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위원회에 선발되었다. 이때부터 위원회는 일반 보안 위원회와 협력하여 더욱 강력하고 활발한 국면에 접어들었다. 공안위원회는 장군 임명, 혁명재판소 판사와 배심원 임명,[131] 군대 개편, 공공질서 유지, 국가 부서 감찰[132]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국민개병제(1793년 8월 16일 통과), 피의자법(1793년 9월 17일 통과), 최대법(1793년 9월 26일 통과) 등 공포정치 관련 법률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책임을 맡았다. 위원회의 권력은 프뤼메르 14일 법률을 통해 1793년 12월 4일 성문화되었다.
1793년 12월 5일, 언론인 카미유 데뮬랭은 《구 코르들리에》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에베르파와 당통파의 제거는 공안위원회가 반대 세력을 통제하고 침묵시킬 수 있는 힘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1794년 3월 일반 경찰국이 창설되어 공안위원회의 권력을 강화했다.[20]
그러나 '공포 정치'가 절정에 달하고 위원회의 정치적 권력이 강화되었음에도 혁명 정부 내 불화가 커졌다. 일반 보안 위원회 위원들은 공안위원회의 공격적인 행동, 특히 일반 경찰국의 업무 침해에 불만을 가졌다.[20] 공안위원회 내부 논쟁도 격렬해져 회의 장소를 옮겨야 했다.[21] 1794년 5월 21일, 혁명 정부는 사법 시스템을 중앙 집중화하여 지방의 거의 모든 혁명 재판소를 폐쇄하고 모든 사형 재판을 파리에서 열도록 했다.[22]
프레리알 22일 법은 혁명 재판소, 국민 공회, 공안위원회와 일반 보안 위원회의 통제를 확립했다. 이 법은 다양한 형태의 공적 적들을 열거하고, 고발을 요구했으며, 피고인의 법적 구제를 제한했다. 이 법에 포함된 모든 범죄에 대한 처벌은 사형이었다. 이 법 시행 후 폐지될 때까지 파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 수가 혁명 재판소 이전 역사 전체에서보다 많았다.[23]
최고 존재 숭배의 지지자인 로베스피에르는 반종교적인 위원들인 콜로 다르부아와 빌로 바렌과 자주 갈등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질병으로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일부 위원들 사이에서 그가 고립되었다는 인상을 주었다.[25]
"공공 안전"은 개별 안전보다 항상 우선시되었으며, 국민 주권의 이름 아래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었다. 역사학자 알베르 마티에에 따르면, 공안위원회는 대외 전쟁과 내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독재 기구로서 국민 공회 내 기관이었으며, 정기적인 보고 의무가 있었다.[37] 사실상의 정부였기에 테르미도르 반동까지의 기간을 '''공안위원회 정부'''라고 부른다. 심의는 항상 비공개였다.[38]
집행권은 "모든 것"에 미쳤으나, 경찰권[39]이나 사법권, 재정에는 관여할 수 없었고, 보고 의무 외에도 여러 제한이 있었다.[40][41] 공안위원회는 '''위원회 독재'''였지만, 로베스피에르의 개인 독재는 잘못된 것이고, 독재의 실체는 소수의 합의제였다.[42] 각 분야는 세분화되었고, 공안위원에게는 각자 관할이 정해져 있어 권력은 분할되었다. 공안위원회는 내각의 성격을 띠었다.[43]
공안위원회는 무력도 갖지 못했다.[44] 국민 방위대는 파리 코뮌의 지휘하에 있었고, 상퀼로트 무장 민병의 혁명군도 극좌 세력에 의해 지배[45]되었으며, 공안위원회 직속의 폭력 기구는 거의 없었다.[46] 생쥐스트가 지적했듯이, 로베스피에르는 군대, 재정, 행정 당국을 장악하고 있지 않았으며, 제도상 독재자가 군림할 여지는 없었다.[47]
공안위원회의 주요 임무는 파견 의원 감찰, 국정 담당 장관 및 전쟁 지휘 장군 통괄, 각지 진정 및 청원 대응과 기타 행정 처분, 긴급 시 방위 수단 강구, 외교 활동이었다.[48] 반혁명 혐의자 체포는 기본적으로 관할 외[49]였으며, 일반 시민 재판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생살여탈권을 휘두르지 않았다.[50] 공포 정치는 공안위원회나 로베스피에르가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51]
처음에는 파견 의원 감시 통제가 최대 목적이었지만, 점차 중앙 집권화된 행정부 역할이 강조되면서 헌법과 선거가 정지되고, 의원 다수가 공포 정치로 사망하여 결원이 생기는 상황에서 합법성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기관으로서 위원회 독재는 강화되었다. 그러나 소수가 강대한 권력을 갖게 되자 감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조직 내부 부패가 진행되었다.[52]
3. 1. 제1기 공안위원회 (당통 위원회)
1793년 4월 7일부터 7월 10일까지 존속한 제1기 공안위원회는 '''당통 위원회'''라고도 불린다. 위원은 9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득표수 | 이름 |
---|---|
360표 | 베르트랑 바레르 드 뷰자크 |
347표 | 자크-프랑수아-베르트랑 데르마 |
325표 | 장자크 브레아르(Jean-Jacques Bréard-Duplessis) |
276표 | 피에르 조제프 캉봉 |
233표 | 조르주 당통 |
227표 | |
202표 | 루이-베르나르 귀통-모르보(또는 귀통 드 모르보) |
167표 | 장바티스트 트레야르(Jean-Baptiste Treilhard) |
151표 | 장-프랑수아 드라크루아(Jean-François Delacroix)[68] |
이들은 모두 국왕 재판에서 사형에 투표한 의원들로, 7명은 평원파 등으로 구성된 중도우파적 인선이었다. 실제적으로 당통이 지도하는 책임 내각에 가까웠다.
공안위원회는 비공개로 운영되었으며, 긴급 시에는 입법권의 일부를 가졌지만, 체포권 등은 아직 갖지 못했다. 첫 회의에서 회의는 아침과 저녁 두 번(오전 9시와 오후 7시) 열기로 결정되었고, 사무국은 3부로 구성되었다. 1개월마다 위원을 개선하기로 결정했지만, 문제가 없으면 재선 또는 연기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임기가 없었다.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해 '''위원회에는 의장이 없었다'''. 대신 위원별 직무 영역이 할당되었다. 캉봉은 재정, 랭데는 식량과 통신 연락, 귀통은 내무, 데르마와 드라크루아는 육군, 트레야르와 브레아르는 해군, 바라르와 당통은 파견 의원 인선과 감찰을 담당했다. 장관의 역할은 축소되어 행정 관료에 가까워졌다. 공안위원은 담당 분야 장관을 종속시키고 임시 행정 회의를 지배하여 정무를 처리했다. 그러나 공안위원회는 여러 위원회를 통제하는 우월한 조직이 아니라 대등한 위치였다.
그러나 당통 위원회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통은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와의 친분 때문에 혐의를 받았고, 평화 협상도 난항을 겪었으며, 식량·재정 문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지롱드파와의 화해도 결렬되었다. 5월 18일, 12인 위원회(Commission extraordinaire des Douze)가 결성되어 공안위원회와 보안위원회의 상위에 위치하는 치안 최고 기관이 되면서, 당통은 좌파와 협력해야 했다. 1793년 5월 31일~6월 2일 지롱드파 추방에 협력했지만, 이후 지롱드파에게 타협적인 태도를 보여 의원들의 도망을 허용했고, 좌파로부터 비난받았다.
국민공회에서 산악파의 지배가 시작되자, 공안위원회의 개편이 추진되었다. 5월 30일, 자코뱅 헌법 초안 작성을 명분으로 5명이 추가되어 일시적으로 '''14인 체제'''가 되었다. 6월 5일과 6월 12일에 위원 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2차 당통 위원회도 난국을 타개하지 못하고, 당통의 신용이 저하되면서 정권은 사망(死に体)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결국 당통은 실각했다. 그는 스스로 공안위원회를 떠나고 싶다고 전했다.
3. 2. 제2기 공안위원회 (대공안위원회)
1793년 7월 10일에 개편된 제2기 공안위원회는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으며, 득표순으로 다음과 같다.득표수 | 위원 |
---|---|
192표 | 앙드레 장봉 생 앙드레[77] |
192표 | 베르트랑 바레르 |
178표 | |
176표 | 조르주 쿠통 |
175표 | 마리 장 에로 드 세셸 |
155표 | 자크 알렉시스 튀리오 드 라 로지에르[78] |
142표 | 피에르 루이 프뤼르 |
126표 | 루이 앙투안 드 생 쥐스트 |
100표 | 로베르 랭데 |
발레르를 제외하면 모두 산악파였다.
초기에는 의견 불일치가 있었으나, 마라 암살 사건(7월 13일) 등으로 좌파가 득세하고 대중 영합주의가 만연하면서 혼란스러웠다. 7월 24일 가스파랑이 사임하고,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가 합류하면서, 국민 공회와 코뮌, 자코뱅 클럽 사이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며 위원회가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1793년 9월부터 1794년 7월 27일까지 존속한 이 위원회는 로베스피에르, 쿠통, 생 쥐스트의 삼두를 포함하여 '''대 공안 위원회'''로 불린다. 바레르만이 두 기 모두 유임되었고, 캉봉은 재정위원회 전임이 되었다.
7월 말~8월 초, 파리 등 도시 지역의 식량 위기가 재연되자, 앙라제가 극단적인 사회 정책[83]을 주장하며 상퀼로트의 지지를 얻었다. 공안위원회는 징발과 물자 조달 명령으로 대응하여 민중의 불안을 진정시키고 앙라제를 숙청했다.[85]
8월 14일, 라자르 카르노와 프뤼르 드 라 코트도르[86]가 군사 전문가로 합류했다. 혁명 전쟁은 카르노가 주도했지만, 생 쥐스트는 군무국[87]을 빼앗긴 것에 불만을 품었다.
8월 하순, 에베르파는 무제한 전쟁을 주장하며 군주국과의 화의를 시도하는 당통파를 비난했다. 8월 26일 툴롱 함락 소식이 알려지자, 9월 5일 국민 공회는 공포 정치 관련 법안을 채택했다. 9월 6일, 비요 바렌과 콜로 데르부아가 추가되었다.
9월 20일 튀리오가 사임[90]하여 12인 체제가 되었고, 9월 25일 브리즈가 지명되었으나 로베스피에르의 반발로 사퇴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만약 정부가 무제한적인 신임을 얻지 못하고, 신임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로 구성된다면 조국은 멸망할 것이다"라며 독재권을 요구했고, 공안위원회는 신임 의결을 얻어 로베스피에르가 공식적인 리더로 인정되었다.[91][92]
12월 29일 에로 드 세셸이 체포[93]되어 11명이 되었으나, 결원은 충원되지 않았고 이 멤버로 테르미도르 반동까지 존속했다.
공안위원회는 중앙 독재화를 추진했지만, 1793년 헌법 정지로 인해 구헌법(1791년 헌법) 조항과 충돌하며 혼란이 발생했다. 10월 4일 비요-바렌은 혁명 행정 정비에 착수했고, 10월 10일 생-쥐스트는 혁명 정부론을 발표하며 "법이 혁명적인데 그 법을 수행하는 사람이 혁명적이지 않기" 때문에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프랑스 인민이 자신의 의지를 밝힌 후에는 그 의지에 반하는 자는 모두 주권에서 벗어나 있으며, 주권에서 벗어난 자는 곧 적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1월 18일 비요-바렌은 "혁명 정부 조직의 방법" 초안을 제출했고, 1793년 12월 4일 프리메르 14일 법으로 완성되었다. 이는 혁명 정치의 가헌법으로, 중앙 집권 조직을 구축하고 권한과 관할을 정리했다. 혁명군과 혁명 위원회는 공안위원회 통제하에 놓였고, 에베르파는 숙청되었다. 공안위원회는 전국 감시, 관리 임명 권한을 가졌고, 인민 주권을 위해 민주주의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1794년 3월 27일 혁명군 폐지, 4월 1일 카르노의 제안으로 임시 행정 회의와 대신 제도가 폐지되어, 공안위원회를 정점으로 하는 정부 조직이 완성되었다. 12집행 위원회[113]가 설치되었고, 입법권과 행정권은 일체화되었다.
3. 2. 1. 권한 강화
에베르파와 당통파의 제거는 공안위원회가 반대 세력을 통제하고 침묵시킬 수 있는 힘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1794년 3월에 일반 경찰국이 창설되어 - 명목상 공안위원회에 보고 - 공안위원회의 권력을 증대시키는 데 기여했다.[20]그러나 '공포 정치'로 알려진 시기가 절정에 달하고 위원회의 정치적 권력이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 정부 내에서는 불화가 커져갔다. 일반 보안 위원회 위원들은 공안위원회의 공격적인 행동과 특히 일반 경찰국의 업무 침해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20] 공안위원회 내부의 논쟁은 너무 격렬해져서 합의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회의 장소를 더 사적인 방으로 옮겼다.[21] 1794년 5월 21일, 혁명 정부는 사법 시스템을 중앙 집중화하기로 결정하여, 지방의 거의 모든 혁명 재판소를 폐쇄하고 모든 사형 재판을 파리에서 열도록 했다.[22]
위원회가 제안하고 1794년 6월 10일에 국민 공회에서 제정된 프레리알 22일 법은 혁명 재판소, 그 위에 국민 공회, 그리고 공안위원회와 일반 보안 위원회의 통제를 확립하는 데 더욱 기여했다. 이 법은 다양한 형태의 공적 적들을 열거하고, 그들을 고발하도록 요구했으며, 피고인에게 제공되는 법적 구제를 심각하게 제한했다. 이 법에 포함된 모든 범죄에 대한 처벌은 사형이었다. 이 법이 시행된 이후 폐지될 때까지 파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의 수가 혁명 재판소의 이전 역사 전체에서보다 더 많았다.[23] 그러나 이 통계는 앞서 언급했듯이 모든 사형 재판과 선고가 지방에 분산되지 않고 파리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의해 강조되었다.[24]
최고 존재 숭배의 열렬한 지지자인 로베스피에르는 반종교적인 위원회 위원인 콜로 다르부아와 빌로 바렌과 자주 갈등을 겪었다. 더욱이 로베스피에르가 질병으로 인해 위원회에 점점 더 오랫동안 불참하게 되면서 (그는 1794년 6월에 회의 참석을 거의 중단했다) 일부 위원들 사이에서 그가 고립되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샤를로트 로베스피에르는 회고록에서 로베스피에르가 폭력을 과도하게 사용한 몇몇 파견 위원들과 갈등을 겪었으며, 이는 위원회의 단결을 약화시키는 데에도 기여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25]

"공공 안전"은 개별 안전보다 항상 우선시되는 인민 전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안정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국민 주권의 이름 아래 행사에 제한이 없어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었다. 이 관념이 인민 독재의 기반이었다. 역사학자 알베르 마티에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에 성립된 혁명 제도의 대부분이 전 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독재였지만,[35][36] 공안위원회는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으로, 대외 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위기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독재 기구'''로서 정비되어 간 상임위원회 중 하나이다.[37] 이것은 국민 공회 내의 기관으로, 공회의 의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정기적인 공회 보고 의무가 있었다. 장관은 따로 있었지만, 사실상의 정부였기 때문에, 그 성립부터 테르미도르 반동까지의 기간을 '''공안위원회 정부'''라고 부른다. 심의는 항상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매우 폐쇄적인 조직이었다.[38]
집행권의 대상은 "'''모든 것'''"에 미쳤으며, 긴급 시에는 임시 입법이나 초법규적인 행정 명령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경찰권[39]이나 사법권을 갖지 못하고, 재정에도 관여할 수 없는 등, 보고 의무 외에도 몇 가지 제한이 있었으며, 명령서가 발효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공안위원의 3분의 2 이상이 참여하는 행정 회의에서 위원의 과반수 서명이 필요했다.[40][41] 이 때문에 공안위원회는 국가를 지배하는 '''위원회 독재'''였지만, 흔히 말하는 로베스피에르의 개인 독재는 잘못된 것이고,[42] 독재의 실체는 '''소수의 합의제'''(또는 과두제)였다. 각 분야는 여러 부문, 부국, 나중에는 내부의 각 집행위원회로 세분화되어 있었으며, 공안위원에게는 각자 관할이 정해져 있었고, 위원회 내의 권력은 분할되어 한 사람에게 권한이 집중되지 않았다. 공안위원회 전체는 실제적으로 통상의 국가에서의 내각의 성격을 띠었다.[43]
또한 공안위원회는 거리의 습격으로부터 몸을 지킬 정도의 '''무력도 갖지 못했다'''.[44] 초기 혁명의 주역이었던 능동적 시민은 잇달아 의용병 등으로 출정하여 수도 파리에는 부재했고, 국민 방위대는 파리 코뮌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있었으며, 그 48개 지구는 지지 정파에 따라 태도가 달랐다. 상퀼로트 무장 민병에게 일당을 지불하여 제도화하려고 했던 혁명군도 주로 극좌 세력에 의해 지배[45]되었으며, 공안위원회 직속의 폭력 기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46] 생쥐스트가 바로 지적[47]했듯이, 현실적으로 로베스피에르는 군대도 재정도 행정 당국도 장악하고 있지 않았으며, 애초에 제도상 독재자가 군림할 여지는 없었다.
공안위원회의 주요 임무는 다섯 가지였는데, 첫째는 지방에서 절대적이고 무제한의 권한을 부여받았던 파견 의원의 감찰, 둘째는 국정을 담당하는 장관이나 전쟁을 지휘하는 장군 등을 통괄하여 공회와 연결하는 연락 조정(내각의 역할), 셋째는 각지에서 보내지는 진정이나 청원에 대한 대응과 기타 행정 처분(장관의 역할), 넷째는 긴급 시에 방위상의 제반 수단[48]을 강구하는 것(전쟁의 운영), 다섯째는 외교 활동(국가의 지휘)이었다. 마찬가지로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반혁명 혐의자 등의 체포는 기본적으로 관할 외[49]였으며, 의원이나 장관, 장군, 사령관의 임명권 등은 갖지만, (수감자를 석방하는 권한을 가진 기관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일반 시민의 재판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며, 생살여탈권을 휘두르지는 않았다.[50] 공안위원회는 공포 정치의 실행 기관 중 하나가 되었지만, 공포 정치 자체는 공안위원회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로베스피에르가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51]
처음에는 전쟁과 내란에 항거한다는 방어적 의미와 '''파견 의원의 감시 통제'''라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었지만, 점차 중앙 집권화된 행정부라는 혁명 정치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헌법도 선거도 정지되었고, 의원의 다수가 공포 정치로 사망하여 결원이 생기는 상황에서, 합법성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기관으로서, 위원회 독재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소수가 강대한 권력을 갖게 되자, 더욱 감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고, 조직 내부의 부패가 진행되었다.[52] 또한 공안위원회의 권한 강화로 인해 하부 조직처럼 격하된 보안위원회는 불만을 더했고, 이러한 것들이 합쳐져 정변으로 이어져, 마침내 내부 붕괴에 이르렀다.
1793년 7월 10일에 개편된 새로운 9명의 공안 위원회 위원 명단은 득표수 순으로 다음과 같다.
득표수 | 위원 |
---|---|
192표 | 앙드레 장봉 생 앙드레[77] |
192표 | 베르트랑 바레르 |
178표 | |
176표 | 조르주 쿠통 |
175표 | 마리 장 에로 드 세셸 |
155표 | 자크 알렉시스 튀리오 드 라 로지에르[78] |
142표 | 피에르 루이 프뤼르 |
126표 | 루이 앙투안 드 생 쥐스트 |
100표 | 로베르 랭데 |
제2기 공안 위원회도 초반에는 의견 불일치가 두드러졌다. 당통은 실각했지만 여전히 보안 위원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국민 공회 의장으로 취임하여 반발[79]했다. 그러나 혁명에서 이탈한 지롱드파나 부르주아지가 왕당파에까지 합류하면서 우파는 더 이상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되었고, 혁명 세력은 계급 투쟁적인 수법을 사용한 좌파가 점점 우세해졌다. 우파 위원들이 다수를 차지했지만, 이유를 대며 지연시키는 등 방해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7월 13일 마라 암살 사건은 쓸데없이 대중의 복수심을 부추겼고, 좌파 중에서도 더욱 과격한 세력을 등장시켰으며, 동시에 대중 영합주의 (또는 상퀼로트주의)의 만연을 촉진했다. 7월 24일에 가스파랑이 사임했다.[80] 7월 27일, "자신의 기질에 반해서"[81] 로베스피에르가 마침내 공안 위원회에 합류하게 되었다. 로베스피에르가 공안 위원회에 들어가면서 공회와 코뮌, 공회와 자코뱅 클럽 사이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가 되어, 비로소 그를 중심으로 위원회가 기능을 할 수 있었다.
제2기가 되는 공안 위원회는 1793년 9월부터 1794년 7월 27일까지의 기간으로, 로베스피에르 등 삼두(로베스피에르, 쿠통, 생 쥐스트 3명)을 포함한 이 위원회를 일반적으로 '''대 공안 위원회'''라고 부른다. 두 기 연속으로 유임되어 전 기간을 맡은 것은 발레르 단 한 명뿐이며, 또 다른 중요 위원이었던 캉봉은 재정 정책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 공안 위원에서 제외되어 재정 위원회 전임이 되었다.
7월 하순부터 8월 상순에 걸쳐 파리 등 도시 지역에서는 식량 위기가 재연되었다. 파리에서는 최좌익의 극좌 세력인 앙라제 (격렬파[82])가 이를 부추겨 극단적인 사회 정책[83]을 제시하여 상퀼로트의 지지를 얻고, 체제 타도를 목표로 하는 언행을 시작했다. 8월 10일 축제[84]를 앞두고 위기감을 느낀 공안 위원회는 파견 의원에게 인근 지역에서 강제로 징발하여 파리로 식량을 보내도록 엄명하는 한편, 기밀비를 이용하여 파리 코뮌에 거액을 지급하고 물자 조달을 명령했다. 이것이 효과를 발휘하여 민중의 기아에 대한 불안이 진정되자 앙라제에 대한 지지는 흔들렸고, 그 틈새를 이용하여 그들을 일제히 체포하여 숙청했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과격한 의견을 제거하고 좌우 균형을 맞추려는 것은 로베스피에르의 지도에 따른 것이었다.[85]
공안 위원회의 권한 강화는 8월 14일 군사 및 병참 전문가인 라자르 카르노와 프뤼르 드 라 코트도르[86]가 조력자로서 공안 위원회에 추가되었다. 전선에서 승리하여 군사 정세를 조속히 개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며, 이후 군사에 문외한인 다른 위원을 배제하고 혁명 전쟁은 카르노가 대략 혼자 지도하게 되었지만, 이에 군무국[87]을 빼앗긴 생 쥐스트는 속으로는 불만이 있었고, 로베스피에르나 생 앙드레, 프뤼르 드 라 마른 등도 카르노의 작전 계획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군사 및 전쟁 정책 또한 마지막까지 로베스피에르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분야였다.
8월 하순에는 이번에는 또 다른 극좌 세력인 공포 정치 강화를 요구하는 에베르파 (격렬파)의 압력이 강해졌다. 상퀼로트의 불만을 헤아리는 극좌파의 요구에는 한계가 없었다. 에베르파는 점점 기세 등등해져서 완전한 승리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는 무제한 전쟁을 주장했다. 그들에 의해 군주국과의 화의를 시도하는 당통파 등은 배신자로 규탄되었기 때문에, 왕당파로 오해받지 않는 평화 정책을 의원이 주장하는 것은 곤란해졌다.
1793년의 궁핍함을 감안하면, 정권을 잡은 측의 불리는 분명했다. 8월 26일 툴롱 항에 영국 해군이 들어와 왕당파에 의해 루이 17세 만세 선언이 있었지만, 이 불리한 소식을 공안 위원회는 숨기고 있었고, 9월 2일에 비요 바렌에게 엄하게 추궁당했다. 시중에도 이 소식이 퍼지자 상퀼로트는 격노하여 데모를 일으켰다. 9월 5일 압력에 굴복한 국민 공회가 공포 정치와 여러 법안을 채택했기 때문에, 동요한 공안 위원회는 다음 9월 6일 3명[88]을 새로 추가하려 했고, 공회는 제안자인 당통 자신에게도 참여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89] 결국, 대두하는 좌파를 배경으로 비요 바렌과 콜로 데르부아 단 두 명만 추가되었다.
9월 20일에 튀리오가 사임[90]하여 '''12인 체제'''가 되었고, 9월 25일 대신 전선에서 돌아온 파견 의원 브리즈가 공안 위원에 지명되었지만, 그들 우파가 전쟁 지도에서의 실책에 대한 책임은 공안 위원회에 있다는 불신임 동의를 제출한 결과, 로베스피에르의 격앙에 가까운 반발에 직면하여 비판을 받았다. 이에 놀란 브리즈는 지명을 거부했고, 이렇게 하여 우파 위원은 사라졌다. 한편, 이 때 불신임 동의를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로베스피에르는 "만약 정부가 무제한적인 신임을 얻지 못하고, 신임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로 구성된다면 조국은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국민 공회로부터 완전한 신임, 바꿔 말하면 '''독재권'''을 얻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공안 위원회는 신임 의결을 얻어 '''로베스피에르가 그 리더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91][92] 이후 위원회는 그의 책임 내각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얼마 후인 12월 29일에 에로 드 세셸이 체포[93]되어 더욱 줄어 '''11명'''이 되었지만, 결원은 충원되지 않았고, 개편 동의 또한 종종 거부되었기 때문에, 이 멤버 그대로 테르미도르 반동까지 존속했다.
공안 위원회의 중앙 독재화는 대략 9월 말까지 완료되었지만, 신헌법(1793년 헌법)이 정지 중이었기 때문에 구헌법(1791년 헌법)의 조항 중 일부는 살아 있었고, 이를 수정하는 많은 법령과 불완전하게 공존하는 상태였다. 몇몇 혁명적 입법이 중앙에서 잇따라 공포된 것은 지방을 혼란시켰다. 또한 파견 의원 중 일부[108]가 계급 투쟁적인 수법으로 평등주의를 관철하거나, 과격한 반기독교 정책을 지방에서 무리하게 추진했기 때문에, 지방의 공포 정치는 곧 '''대량 학살'''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공안 위원회는 그들을 소환하여 권한을 정지시켜야 했지만, 그들이 떠나 원래의 당국자에게 권한이 넘어가자, 이번에는 정책이 역행하는 사태도 발생하여 혼란에 박차를 가했다. 중앙 집권적인 상태가 국가 전체에서 유지될 수 있도록, 행정 기구 전체가 재정비될 필요가 있었다. 10월 4일, 비요-바렌은 "정부에 활동과 생명을 부여하는 데 필요한 법령" 초안을 공안 위원회 명의로 공회에 제출했고, 이 초안은 되돌려졌지만, 혁명 행정의 정비에 착수했다.
10월 10일, 생-쥐스트에 의해 새로운 초안이 발표되었고, 거기에는 독자적인 혁명 정부론(독재 이론)이 전개되었다. 그는 먼저 연설[110]하여, 법률과 대책이 시행된 후에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것은 "법이 혁명적인데 그 법을 수행하는 사람이 혁명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국가의 역경의 원인을 고찰해 보면, 그것은 "명령 실행 시의 (대신들의) 의지의 약함, 행정에서의 (관리의) 절약 부족, (공회의) 국가 계획의 불안정,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인민의) 열정의 변덕"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따라서 공안 위원회는 인민에게 제안하지만, "자유에 대한 마지막 적이 살아 있는 한" 번영을 바랄 수는 없으므로 "배반자뿐만 아니라 무관심한 자도" 벌해야 하며, 왜냐하면 "프랑스 인민이 자신의 의지를 밝힌 후에는 그 의지에 반하는 자는 모두 주권에서 벗어나 있으며, 주권에서 벗어난 자는 곧 적이기" 때문이다라고 정의했다. 공화국의 현 상황에서는 "헌법은 확립될 수 없다"고 했지만, 그것은 "헌법은 자유에 반대하는 음모를 억압하는 데 필요한 폭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며, "법의 칼은 도처에 신속하게 미쳐야" 하며, "정부 자체가 혁명적으로 구성되지 않으면, 혁명적인 법률을 집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고, 정부가 혁명적이어야 하는 대상은 귀족(반혁명의 상징)뿐만 아니라 상인과 관리, 정치가에게도 해당하며, "많은 악의 근원은 어떤 자의 부패와 다른 자의 경솔함에 있다"고 했다.[111] 그 위에, 생-쥐스트는 14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법령을 제출했고, 공회는 이를 토론하지 않고 박수 갈채로 승인했으므로, 그대로 '''혁명 독재의 대강'''이 되었다. 제1조에서 "프랑스 임시 정부는 평화가 도래할 때까지 혁명적이다"라고 규정되었고, 대신, 장군, 행정, 사법 모두 공안 위원회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대강은 아직 세부 사항을 다듬을 필요가 있었으므로, 11월 18일에 비요-바렌이 "혁명 정부 조직의 방법"이라는 초안을 제출했다. 공회에서 논의된 것은 지방 행정과 감찰관, 파견 의원 및 기타 위원과의 관계 정리였다. 이것들은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쳐, 1793년12월 4일, 프리메르 14일 법으로 완성되었다. 프리메르 14일 법은 혁명 정치의 '''가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시행되지 않은 1793년 헌법을 대신하여, 7월 27일까지 프랑스의 정치를 규정한 기본법이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112] 지금까지 제각기 제정되어 온 여러 기관들이, 중앙 집권 조직 안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도록 의도되었으며, 권한과 관할이 정리되었다. 혁명군이나 혁명 위원회와 같은 조직도 공안 위원회의 통제하에 다시 놓여졌고, 점차 사람을 교체하여 정부에 반역하는 극좌파(에베르파 등)의 손에서 탈환되었다. 공안 위원회는 전국을 감시하고, (후보자를 리스트로 선택한다는 방식으로) 인민 전체의 관리를 임명할 권한을 가지며, 여러 위원회의 인선과 시읍면의 선거는 중단되었고, 인민 주권을 위해 민주주의는 사실상 중단되었다.
공안 위원회는 이제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1794년3월 27일, 혁명군은 폐지되었다. 4월 1일의 카르노의 제안(제르미날 12일의 법령)으로 '''임시 행정 회의와 대신 제도도 폐지'''되었다. 이로 인해, 명실상부하게 정부는 공안 위원회를 정점으로 하는 조직이 되었다. 그 아래에 대신을 대신하여 놓인 12집행 위원회[113]가 정비되게 되었고, 이 각 집행 위원회는 정위원 2명, 부위원 1명으로 구성되었다. 입법권과 행정권은 완전히 일체화되었고, 혁명 정치 체제는 완성되었다.
3. 2. 2. 분파 숙청과 독재 강화
카미유 데물랭은 로베스피에르와 공안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구 코르들리에''를 출판했지만, 곧 공안위원회와 일반보안위원회를 비판하며 당통파의 관대한 견해를 설파했다.[18] 1794년 3월 에베르파가 체포 및 처형된 후, 데물랭과 당통도 체포되었다. 에로 드 세셸은 공안위원회에서 추방되어 당통파와 함께 재판을 받고 1794년 4월 5일 처형되었다.[19]에베르파와 당통파의 제거는 공안위원회가 반대 세력을 통제하고 침묵시킬 힘을 보여주었다. 1794년 3월 일반 경찰국이 창설되어 공안위원회의 권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공포정치'가 절정에 달하고 위원회의 정치적 권력이 강화되었음에도 혁명 정부 내 불화가 커졌다. 일반 보안 위원회 위원들은 공안위원회의 공격적인 행동, 특히 일반 경찰국의 업무 침해에 불만을 가졌다.[20] 공안위원회 내부 논쟁도 격렬해져 회의 장소를 옮겨야 했다.[21] 1794년 5월 21일, 혁명 정부는 사법 시스템을 중앙 집중화하여 지방의 거의 모든 혁명 재판소를 폐쇄하고 모든 사형 재판을 파리에서 열도록 했다.[22]
프레리알 22일 법은 혁명 재판소, 국민 공회, 공안위원회와 일반 보안 위원회의 통제를 확립했다. 이 법은 다양한 형태의 공적 적들을 열거하고, 고발을 요구했으며, 피고인의 법적 구제를 제한했다. 이 법에 포함된 모든 범죄에 대한 처벌은 사형이었다. 이 법 시행 후 폐지될 때까지 파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 수가 혁명 재판소 이전 역사 전체에서보다 많았다.[23]
최고 존재 숭배의 지지자인 로베스피에르는 반종교적인 위원들인 콜로 다르부아와 빌로 바렌과 자주 갈등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질병으로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일부 위원들 사이에서 그가 고립되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샤를로트 로베스피에르는 로베스피에르가 폭력을 과도하게 사용한 몇몇 파견 위원들과 갈등을 겪었으며, 이는 위원회의 단결을 약화시켰다고 회고했다.[25]
4. 종말
1794년 7월,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가 조제프 푸셰 등 정적을 공격하려 한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정부 내 불안이 커졌다. 결국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 형제와 생쥐스트 등이 체포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28]
이후 테르미도르 반동이라 불리는 혼란기에는 가장 인기 없던 법률이 폐지되고, 일반보안위원회와 공안위원회의 권한이 제한되었다. 1795년 헌법에 따라 총재정부가 시작되면서 공안위원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4. 1. 내부 갈등과 테르미도르 반동
1794년 7월 중순,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가 조제프 푸셰, 장 랑베르 탈리앵 등 정적을 공격하려 한다는 의혹으로 정부 내 불안이 커졌다. 생쥐스트와 베르트랑 바레르는 공안위원회와 일반보안위원회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려 했으나,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7월 26일 국민공회 연설에서 위원회를 "정화"하고 "모든 파벌을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6] 그날 밤 자코뱅 클럽에서 그는 콜로 다르부아와 빌로바렌을 공격했다.다음 날인 1794년 7월 27일(테르미도르 9일), 생쥐스트는 국민공회에서 연설을 시작했으나 탈리앵과 빌로바렌에게 방해받았고, 그들은 생쥐스트가 "공회를 살해"하려 한다고 비난했다.[27] 바라르, 바디에, 스타니슬라스 프레롱 등이 비난에 가담했고,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필리프 프랑수아 조제프 르 바, 조르주 쿠통 등의 체포를 명령했다.
이후 격렬한 시민 불안 속에서, 공안위원회와 일반보안위원회 위원들은 국민공회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로베스피에르 형제, 생쥐스트, 르 바, 쿠통은 오텔 드 빌에 갇혀 봉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르 바는 자살했고, 생쥐스트, 쿠통, 막시밀리앙과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7월 28일 체포되어 처형되었다.[28]
테르미도르 반동이라 불리는 혼란기에는 가장 인기 없던 법률이 폐지되고, 일반보안위원회와 공안위원회의 권한이 제한되었다. 위원회는 1795년 헌법에 따라 총재정부가 시작되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4. 2. 테르미도르 이후의 공안위원회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공안위원회는 로베스피에르파 처형과 좌파 위원 축출로 생긴 공석을 탈리앵을 비롯한 반(反)로베스피에르 세력이 채우면서 변화를 맞았다. 1794년 8월 24일, 공안위원회는 매달 구성원의 4분의 1이 교체되고, 한번 위원이 된 자는 1개월이 지나야 재선될 수 있다는 규정이 신설되었다.공안위원회의 권한은 대폭 축소되어 외교와 군사(작전 및 인사)로 제한되었으며, 군대에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은 사라졌다. 라자르 카르노는 잠시 유임되었고 이후 재선되기도 했지만, 위원회 역할이 축소되면서 테르미도르 이후 공안위원 중에는 주목할 만한 정치가는 거의 없었다.
테르미도르 쿠데타 다음 날부터 중단되었던 프레리알 22일 법은 1794년 8월 10일에 폐지되었고, 혁명 재판소는 개편되어 변호가 허용되었다. 자치 시회는 해산되었고, 파리의 시정은 공안위원회와 보안위원회가 직접 운영하게 되었다. 국민 방위대에서는 빈민이 배제되었고, 부르주아 자제들로 구성된 "금빛 청년대"로 개편되었다. 이들은 프레롱[122]의 주도하에 백색 테러를 자행했고, 1795년 5월 31일 혁명 재판소가 폐지될 때까지 맹위를 떨쳤다.
1795년 10월 26일에 시작된 총재정부는 정식 발족 2일 후인 11월 4일에 공안위원회를 해산시켰다.
테르미도르파 이후 공안 위원 명단
제5 위원회 (9월~10월) | 제6 위원회 (10월~11월) | ||||||||
---|---|---|---|---|---|---|---|---|---|
위원 | 담당 부서 | 소속 | 위원 | 담당 부서 | 소속 | ||||
-- | 장자크 브레아르 | 샤랑트마리팀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라자르 카르노 | 파드칼레 | 테르미도르파 | -- | 피에르 루이 프리외르 | 마른 | 테르미도르파 | ||
장프랑수아 베르트랑 들마 | 오트가론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조제프 에샤세리오 | 샤랑트마리팀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앙투안 프랑수아 드 푸르크루아 | 센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피에르 앙투안 라루아 | 오트마른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샤를 코숑 드 라파랑 | 되세브르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장바티스트 샤를 마티외 | 우아즈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필리프 앙투안 메를랭 드 두에 | 노르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클로드 앙투안 프리외르 뒤베르누아 | 코트도르 | 테르미도르파 | -- | 루이베르나르 기통 드 모르보 | 코트도르 | 테르미도르파 | ||
-- | 장바티스트 트레야르 | 센에우아즈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자크 알렉시 투리오 드 라 로지에르 | 마른 | 산악파 | colspan=5 | |
제7 위원회 (11월~12월) | 제8 위원회 (12월~1월) | ||||||||
---|---|---|---|---|---|---|---|---|---|
위원 | 담당 부서 | 소속 | 위원 | 담당 부서 | 소속 | ||||
-- | 장 자크 브레아르 | 샤랑트앵페리에르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장 프랑수아 베르트랑 들마 | 오트가론주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장 자크 레지 드 캉바세레스 | 에로주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라자르 카르노 | 파드칼레주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앙투안 프랑수아 드 푸르크루아 | 센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샤를 코숑 드 라파랑 | 드뇌브르주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장바티스트 샤를 마티외 | 우아즈주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필리프 앙투안 메를랭 드 두에 | 노르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루이 베르나르 기통 드 모르보 | 코트도르주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장 펠레 | 로제르주 | 보수주의자 | colspan=5 | | |||||
-- | 피에르 루이 프리외르 | 마른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자크 알렉시 투리오 드 라 로시에르 | 마른 | 산악파 | ![]() | 앙드레 뒤몽 | 솜주 | 테르미도르파 |
제9 위원회 (1월~2월) | 제10 위원회 (2월~3월) | ||||||||
---|---|---|---|---|---|---|---|---|---|
위원 | 담당 부서 | 소속 | 위원 | 담당 부서 | 소속 | ||||
-- | 장자크 브레아르 | 샤랑트마리팀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앙드레 뒤몽 | 솜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장자크 레지 드 캉바세레스 | 에로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라자르 카르노 | 파드칼레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colspan=5 | | -- | 앙투안 프랑수아 드 푸르크루아 | 센 | 테르미도르파 | |||||
-- | 루이 베르나르 기통 드 모르보 | 코트도르 | 테르미도르파 | 장밥티스트 샤를 마티외 | 와즈 | 테르미도르파 | |||
장 펠레 | 로제르 | 보수파 | colspan=5 | | ||||||
-- | 피에르 루이 프리외르 | 마른 | 테르미도르파 | -- | 필리프 앙투안 메를랭 드 두에 | 노르 | 테르미도르파 |
제11차 위원회 (3월~4월) | 제12차 위원회 (4월~5월) | ||||||||
---|---|---|---|---|---|---|---|---|---|
위원 | 담당 부서 | 소속 | 위원 | 담당 부서 | 소속 | ||||
-- | 장자크 브레아르 | 샤랑트 앵페리어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앙드레 뒤몽 | 솜 | 테르미도르파 | 데니 뚜생 르사주 | 에르에루아르 | 테르미도르파 | |||
-- | 장자크 레지 드 캉바세레스 | 에로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앙투안 프랑수아 드 푸르크루아 | 센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장바티스트 마티외 | 우아즈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 | 필리프 앙투안 메를랭 | 노르 | 테르미도르파 | colspan=5 | | |||||
colspan=5 | | ![]() | 자크 앙투안 크뢰즈 라투슈 | 비엔 | 보수파 |
4. 3. 총재정부와 공안위원회 해산
1794년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 형제와 생쥐스트, 조르주 쿠통, 필리프-프랑수아-조제프 르 바 등이 체포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28]테르미도르 반동이라 불리는 이 혼란기에는, 지난 해의 가장 인기 없던 법률들이 폐지되고 일반보안위원회와 공안위원회의 권한이 제한되었다. 1795년 헌법에 따라 공안위원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이는 총재정부의 시작을 알렸다.
5. 구성원
공안위원회는 테르미도르파 3명, 보수파 2명으로 구성되었다.
위원 | 담당 부서 | 소속 | ||
---|---|---|---|---|
-- | 장 자크 레지 드 캉바세레스 | 에로 | 테르미도르파 | |
피에르 앙리-라리비에르 | 칼바도스 | 보수파 | ||
루이 마리 드 라 레벨리에르-레포 | 멘-에-루아르 | 보수파 | ||
드니 투생 르사주 | 에르-에-루아르 | 테르미도르파 | ||
-- | 필리프-앙투안 메를랭 드 두에 | 노르 | 테르미도르파 |
5. 1. 방위위원회 (1793년 3월 25일 - 4월 6일)
1793년 3월 25일부터 4월 6일까지 존속한 방위위원회는 산악파, 지롱드파, 평원파 의원들로 구성되었다. 초기 위원회는 산악파 13명, 지롱드파 9명, 평원파 3명으로 구성되었으나, 이후 두 차례의 위원 구성을 통해 변화를 겪었다.하위 섹션의 내용과 중복을 피하기 위해, 정당별 구성은 아래 표와 같이 간략하게 제시한다. 위원 명단과 변동 사항은 하위 섹션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5. 1. 1. 정당 구성
공안위원회는 산악파, 지롱드파, 평원파의 세 정당으로 구성되었다.
다음은 초기의 공안위원회 위원 명단이다.
위원 | 담당 부서 | 소속 | ||
---|---|---|---|---|
![]() | 샤를 장 마리 바르바루 | 부슈뒤론 | 지롱드파 | |
베르트랑 바레르 | 오트피레네 | 평원파 | ||
![]() | 장자크 브레아르 | 샤랑트마리팀 | 산악파 | |
프랑수아 뷔조 | 외르 | 지롱드파 | ||
장자크 레지 드 캉바세레스 | 에로 | 평원파 | ||
아르망 가스통 뮈 | 오트루아르 | 산악파 | ||
콩도르세 후작 | 엔 | 지롱드파 | ||
![]() | 조르주 당통 | 센 | 산악파 | |
![]() | 장 드 브리 | 엔 | 산악파 | |
장프랑수아 베르트랑 들마 | 오트가론 | 산악파 | ||
![]() | 카미유 데물랭 | 센 | 산악파 | |
![]() | 에드몽 루이 알렉시 뒤부아-크랑세 | 아르덴 | 산악파 | |
![]() | 파브르 데글랑틴 | 센 | 산악파 | |
아르망 쟁소네 | 지롱드 | 지롱드파 | ||
마르그리트-엘리 가데 | 지롱드 | 지롱드파 | ||
루이-베르나르 기통 드 모르보 | 코트도르 | 산악파 | ||
막시맹 이스나르 | 바르 | 지롱드파 | ||
![]() | 마르크 다비드 알바 라수르 | 타른 | 지롱드파 | |
제롬 페티옹 드 빌뇌브 | 외르에루아르 | 지롱드파 | ||
피에르 루이 프리에르 | 마른 | 산악파 | ||
![]() | 니콜라 마리 키네트 | 엔 | 산악파 | |
![]() |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 센 | 산악파 | |
필리프 륄 | 바랭 | 산악파 | ||
![]() |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 사르트 | 평원파 | |
피에르 빅튀르니앵 베르니오 | 지롱드 | 지롱드파 |
이후 1기 위원 구성은 다음과 같이 변동되었다.
위원 | 담당 부서 | 소속 | ||
---|---|---|---|---|
-- | 베르트랑 바레르 | 오트피레네주 | 평원파 | |
-- | 장자크 브레아르 | 샤랑트마리팀주 | 산악파 | |
피에르조제프 콩본 | 에로주 | 평원파 | ||
-- | 조르주 당통 | 센 | 산악파 | |
-- | 장 드 브리 | 엔주 | 산악파 | |
장 프랑수아 들라크루아 | 외르에루아르주 | 산악파 | ||
장 프랑수아 베르트랑 들마 | 오트가론주 | 산악파 | ||
-- | 루이 베르나르 귀통 드 모르보 | 코트도르주 | 산악파 | |
![]() | 장바티스트 트레이야르 | 센에우아즈주 | 평원파 |
2기 위원 구성은 다음과 같다.
위원 | 담당 부서 | 소속 | ||
---|---|---|---|---|
-- | 베르트랑 바레르 | 오트피레네주 | 평원파 | |
![]() | 자크 니콜라 빌로 바렌 | 센 | 산악파 | |
![]() | 라자르 카르노 | 파드칼레주 | 평원파 | |
장마리 콜로 | 센 | 산악파 | ||
![]() | 조르주 쿠통 | 퓌드돔주 | 산악파 | |
-- | 앙드레 장봉 | 로 | 산악파 | |
-- | 로베르 랭데 | 외르주 | 평원파 | |
-- | 피에르 루이 프뢰르 | 마른 | 산악파 | |
![]() | 클로드-앙투안 프뢰르-뒤브르누아 | 코트도르주 | 산악파 | |
![]() |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 센 | 산악파 | |
![]() | 루이 드 생 쥐스트 | 엔주 | 산악파 | |
![]() | 장 에로 드 세셸 | 센 | 산악파 |
1794년 3월 17일, 산악파 소속의 에로 드 세셸이 반역죄로 체포되어 공석이 되었다.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산악파 소속의 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 쿠통이 체포되어 다음 날 처형되었다. 이 세 명은 장-랑베르 탈리앵 (산악파)으로 대체되었다.
5. 1. 2. 위원 명단
위원 | 담당 부서 | 소속 | ||
---|---|---|---|---|
샤를 장 마리 바르바루 | 부슈뒤론 | | | 지롱드파 | |
베르트랑 바레르 | 오트피레네 | | | 평원파 | |
장자크 브레아르 | 샤랑트마리팀 | | | 산악파 | |
프랑수아 뷔조 | 외르 | | | 지롱드파 | |
장자크 레지 드 캉바세레스 | 에로 | | | 평원파 | |
아르망 가스통 뮈 | 오트루아르 | | | 산악파 | |
콩도르세 후작 | 엔 | | | 지롱드파 | |
조르주 당통 | 센 | | | 산악파 | |
장 드 브리 | 엔 | | | 산악파 | |
장프랑수아 베르트랑 들마 | 오트가론 | | | 산악파 | |
카미유 데물랭 | 센 | | | 산악파 | |
에드몽 루이 알렉시 뒤부아-크랑세 | 아르덴 | | | 산악파 | |
파브르 데글랑틴 | 센 | | | 산악파 | |
아르망 쟁소네 | 지롱드 | | | 지롱드파 | |
마르그리트-엘리 가데 | 지롱드 | | | 지롱드파 | |
루이-베르나르 기통 드 모르보 | 코트도르 | | | 산악파 | |
막시맹 이스나르 | 바르 | | | 지롱드파 | |
마르크 다비드 알바 라수르 | 타른 | | | 지롱드파 | |
제롬 페티옹 드 빌뇌브 | 외르에루아르 | | | 지롱드파 | |
피에르 루이 프리에르 | 마른 | | | 산악파 | |
니콜라 마리 키네트 | 엔 | | | 산악파 | |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 센 | | | 산악파 | |
필리프 륄 | 바랭 | | | 산악파 | |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 사르트 | | | 평원파 | |
피에르 빅튀르니앵 베르니오 | 지롱드 | | | 지롱드파 |
위원 | 담당 부서 | 소속 | ||
---|---|---|---|---|
-- | 베르트랑 바레르 | 오트피레네주 | | | 평원파 |
-- | 장자크 브레아르 | 샤랑트마리팀주 | | | 산악파 |
피에르조제프 콩본 | 에로주 | | | 평원파 | |
-- | 조르주 당통 | 센 | | | 산악파 |
-- | 장 드 브리 | 엔주 | | | 산악파 |
장 프랑수아 들라크루아 | 외르에루아르주 | | | 산악파 | |
장 프랑수아 베르트랑 들마 | 오트가론주 | | | 산악파 | |
-- | 루이 베르나르 귀통 드 모르보 | 코트도르주 | | | 산악파 |
장바티스트 트레이야르 | 센에우아즈주 | | | 평원파 |
위원 | 담당 부서 | 소속 | ||
---|---|---|---|---|
-- | 베르트랑 바레르 | 오트피레네주 | | | 평원파 |
자크 니콜라 빌로 바렌 | 센 | | | 산악파 | |
라자르 카르노 | 파드칼레주 | | | 평원파 | |
장마리 콜로 | 센 | | | 산악파 | |
조르주 쿠통 | 퓌드돔주 | | | 산악파 | |
-- | 앙드레 장봉 | 로 | | | 산악파 |
-- | 로베르 랭데 | 외르주 | | | 평원파 |
-- | 피에르 루이 프뢰르 | 마른 | | | 산악파 |
클로드-앙투안 프뢰르-뒤브르누아 | 코트도르주 | | | 산악파 | |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 센 | | | 산악파 | |
루이 드 생 쥐스트 | 엔주 | | | 산악파 | |
장 에로 드 세셸 | 센 | | | 산악파 |
위원회의 변동 사항은 다음과 같다.
6. 평가
salut public프랑스어(공공 안전)은 개별 안전보다 항상 우선시되는 인민 전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안정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국민 주권의 이름 아래 행사에 제한이 없어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었다. 이 관념은 인민 독재의 기반이었다. 역사학자 알베르 마티에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에 성립된 혁명 제도의 대부분은 전 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독재였지만[35][36], 공안위원회는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으로, 대외 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위기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독재 기구'''로서 정비되어 간 상임위원회 중 하나였다.[37] 국민 공회의 기관이었던 공안위원회는 공회 의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정기적인 공회 보고 의무가 있었다. 장관은 따로 있었지만, 사실상의 정부였기 때문에, 그 성립부터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까지의 기간을 '''공안위원회 정부'''라고 부른다. 공안위원회의 심의는 항상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매우 폐쇄적인 조직이었다.[38]
공안위원회의 집행권은 "'''모든 것'''"에 미쳤으며, 긴급 시에는 임시 입법이나 초법규적인 행정 명령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찰권[39]이나 사법권을 갖지 못하고, 재정에도 관여할 수 없는 등, 보고 의무 외에도 몇 가지 제한이 있었다.[40][41] 이 때문에 공안위원회는 국가를 지배하는 '''위원회 독재'''였지만, 흔히 말하는 로베스피에르의 개인 독재는 잘못된 것[42]이고, 독재의 실체는 '''소수의 합의제'''(또는 과두제)였다. 공안위원회 전체는 실제적으로 통상의 국가에서의 내각의 성격을 띠었다.[43]
또한 공안위원회는 거리의 습격으로부터 몸을 지킬 정도의 '''무력도 갖지 못했다'''.[44] 생쥐스트가 지적했듯이[47], 현실적으로 로베스피에르는 군대, 재정, 행정 당국을 장악하고 있지 않았으며, 애초에 제도상 독재자가 군림할 여지는 없었다.
반혁명 혐의자 등의 체포는 기본적으로 공안위원회의 관할 외였으며[49], 일반 시민의 재판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생살여탈권을 휘두르지도 않았다.[50] 공안위원회는 공포 정치의 실행 기관 중 하나가 되었지만, 공포 정치 자체는 공안위원회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로베스피에르가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51]
처음에는 전쟁과 내란에 항거한다는 방어적 의미와 '''파견 의원의 감시 통제'''가 최대의 목적이었지만, 점차 중앙 집권화된 행정부라는 혁명 정치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위원회 독재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소수가 강대한 권력을 갖게 되자 조직 내부의 부패가 진행되었다.[52] 또한 공안위원회의 권한 강화로 인해 하부 조직처럼 격하된 보안위원회는 불만을 더했고, 이러한 것들이 합쳐져 정변으로 이어져 내부 붕괴에 이르렀다.
정변에서의 승자는 부패한 측을 포함한 것이었으며, 그 후에 성립하는 총재 정부는 독재에 대한 반동으로 극단적인 분권 제도를 채택했지만, 더욱 심하게 비민주적인 체제가 되었다. 공공의 안전을 위한 독재는 인민의 이익을 위한 독재와 동일하므로[53], 아이러니하게도 공안위원회 정부는 실로 호민적인 정부였던 셈이며, 독재가 민중에 의해 타도되었다는 해석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통제의 포기, 자유주의 경제로의 복귀는 시민의 생활을 빈궁하게 만들었고, 총재 정부의 아시냐 회수를 둘러싼 정책에서는 일부 부르주아지에게만 부정하게 부를 독점하게 했다. "바뵈프의 음모" 등은 이에 대한 분노에서 혁명 독재로의 회귀를 요구한 것이었다.
6. 1. 긍정적 평가
어떤 시대에서든 공안위원회와 같은 혁명 정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기 마련이며, 열렬한 칭찬 아니면 전면적인 혐오로 갈린다. 혁명 독재와 공포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다. 루이 블랑은 로베스피에르의 혁명 독재와 에베르의 공포 정치를 구분하려 시도했지만, 프랑수아 기조는 혁명 정부를 무법의 정부, 즉 아나키(Anarchy)로 단정했고, 공포 정치가 혁명을 파멸로 이끌었다고 한탄하는 서정적인 인물 쥘 미슐레 역시 독재를 혐오했다. 알퐁스 오라르(Alphonse Aulard)[125]는, 전제적인 독재(공포 정치)가 긴급사태에 따른 불가피한 임시 조치였다고 옹호하면서도, 그에게는 공포 정치의 지도자들이 1789년의 원리[126]에 대한 배교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에게 개인의 자유 파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불법적인 체제에 대한 비판은 그들 이전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졌다. 혁명 정부를 열성적으로 지지한 역사가들 중 상당수는, 그 안에서 사회주의의 싹을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공안위원회 정부가 그 필요를 넘어 평등한 사회 정책을 추진하여 계급 투쟁을 시작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장 조레스는 프랑스 혁명이 프롤레타리아의 대두를 간접적으로 준비한 사회 혁명이었다는 그림을 그리려 했다. 알베르 마티에는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재평가하여 레닌과 대비시킨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공안위원회의 독재 확립이 두 가지 이유로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우선 내란을 진압하고 철저하게 억압하기 위해 국민 총동원령을 성립시키고, 다음으로 일반 최고 가격법을 실행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역시 이 독재(정치와 경제의 중앙 집권화)를 계급 독재로 간주했는데, 20세기 전반의 역사가들에게서 이러한 경향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 또한 한편으로는, 공안위원회의 피 묻은 일 처리가 실로 효율적이었다는 독재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적지 않았으며, 전체주의의 선구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왕당파가 꿈꿨던 공공의 안전을 꿈꿨던 샤를 모라스에게 공안위원회 정부는 통합주의의 안티테제였다. "위협에 처한 국토, 위기에 처한 조국, 그것을 강력한 권력 행사로 기적적으로 구한다"는 모습이 프랑스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모나 오즈프[127]는 말했는데, 거기에는 낭만주의조차 발견할 수 있으며, 조국 방위라는 정경은 일반적으로 좌익 프랑스인들에게도 민족주의의 격정을 불러일으켰다.1794년2월 5일, 로베스피에르는, 인민 정부의 원동력은 평시에는 "덕"이지만, 혁명 시기에는 "덕과 공포"의 양쪽이라고 말했다. 모든 선량한 시민들에게 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덕을 지키지 않는 국내의 적을 공포(테러)로 제압해야 한다고. "덕이 없으면 공포는 해로우며, 공포가 없으면 덕은 무력하다."[128] 공안위원회는 마티에가 말하는 제3혁명과 제4혁명 기간에 존재했다. 공안위원회 정부가 부르주아지와 상퀼로트의 격렬한 상극(계급 투쟁)의 산물인지, 아니면 포퓰리즘이 낳은 탈선이었는지, 혹은 전체 블록의 일부였는지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그것이 갑작스러운 중단을 강요받고, 당돌하게 역행을 시작했다는 것은 사실이며, 인민 정부는, 그렇게 많은 유혈 희생을 치른 후에도,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못했다.
6. 2. 부정적 평가
salut public프랑스어(공공 안전)은 개별 안전보다 항상 우선시되는[34] 인민 전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안정시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국민 주권의 이름 아래 행사에 제한이 없어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었다. 이 관념이 인민 독재의 기반이었다. 역사학자 알베르 마티에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에 성립된 혁명 제도의 대부분은 전 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독재였지만[35][36], 공안위원회는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으로, 대외 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위기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독재 기구'''로서 정비되어 간 상임위원회 중 하나이다.[37] 이것은 국민 공회 내의 기관으로, 공회 의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정기적인 공회 보고 의무가 있었다. 장관은 따로 있었지만, 사실상의 정부였기 때문에, 그 성립부터 테르미도르 9일의 쿠데타까지의 기간을 '''공안위원회 정부'''라고 부른다. 심의는 항상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매우 폐쇄적인 조직이었다.[38]집행권의 대상은 "'''모든 것'''"에 미쳤으며, 긴급 시에는 임시 입법이나 초법규적인 행정 명령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경찰권[39]이나 사법권을 갖지 못하고, 재정에도 관여할 수 없는 등, 보고 의무 외에도 몇 가지 제한이 있었다. 명령서가 발효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공안위원의 3분의 2 이상이 참여하는 행정 회의에서 위원의 과반수 서명이 필요했다.[40][41] 이 때문에 공안위원회는 국가를 지배하는 '''위원회 독재'''였지만, 흔히 말하는 로베스피에르의 개인 독재는 잘못된 것[42]이고, 독재의 실체는 '''소수의 합의제'''(또는 과두제)였다. 각 분야는 여러 부문, 부국, 나중에는 내부의 각 집행위원회로 세분화되어 있었으며, 공안위원에게는 각자 관할이 정해져 있었고, 위원회 내의 권력은 분할되어 한 사람에게 권한이 집중되지 않았다. 공안위원회 전체는 실제적으로 통상의 국가에서의 내각의 성격을 띠었다.[43]
또한 공안위원회는 거리의 습격으로부터 몸을 지킬 정도의 '''무력도 갖지 못했다'''.[44] 초기 혁명의 주역이었던 능동적 시민은 잇달아 의용병 등으로 출정하여 수도 파리에는 부재했고, 국민 방위대는 파리 코뮌의 직접적인 지휘하에 있었으며, 그 48개 지구는 지지 정파에 따라 태도가 달랐다. 상퀼로트 무장 민병에게 일당을 지불하여 제도화하려고 했던 프랑스 혁명군도 주로 극좌 세력에 의해 지배[45]되었으며, 공안위원회 직속의 폭력 기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46] 생쥐스트가 바로 지적[47]했듯이, 현실적으로 로베스피에르는 군대도 재정도 행정 당국도 장악하고 있지 않았으며, 애초에 제도상 독재자가 군림할 여지는 없었다.
반혁명 혐의자 등의 체포는 기본적으로 공안위원회의 관할 외[49]였으며, 의원이나 장관, 장군, 사령관의 임명권 등은 갖지만, (수감자를 석방하는 권한을 가진 기관 중 하나이기는 하지만) 일반 시민의 재판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며, 생살여탈권을 휘두르지는 않았다.[50] 공안위원회는 공포 정치의 실행 기관 중 하나가 되었지만, 공포 정치 자체는 공안위원회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로베스피에르가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51]
처음에는 전쟁과 내란에 항거한다는 방어적 의미와 '''파견 의원의 감시 통제'''가 최대의 목적이었지만, 점차 중앙 집권화된 행정부라는 혁명 정치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헌법도 선거도 정지되었고, 의원의 다수가 공포 정치로 사망하여 결원이 생기는 상황에서, 합법성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기관으로서, 위원회 독재는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소수가 강대한 권력을 갖게 되자, 더욱 감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고, 조직 내부의 부패가 진행되었다.[52] 또한 공안위원회의 권한 강화로 인해 하부 조직처럼 격하된 보안위원회는 불만을 더했고, 이러한 것들이 합쳐져 정변으로 이어져, 마침내 내부 붕괴에 이르렀다.
다만 정변에서의 승자는 부패한 측을 포함한 것이었으며, 그 후에 성립하는 총재 정부는 독재에 대한 반동으로 극단적인 분권 제도를 채택했지만, 더욱 심하게 비민주적인 체제가 되었다. 공공의 안전을 위한 독재는 인민의 이익을 위한 독재와 동일[53]하므로, 아이러니하게도 공안위원회 정부는 실로 호민적인 정부였던 셈이며, 독재가 민중에 의해 타도되었다는 해석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통제의 포기, 자유주의 경제로의 복귀는 시민의 생활을 빈궁하게 만들었고, 총재 정부의 아시냐 회수를 둘러싼 정책에서는 일부 부르주아지에게만 부정하게 부를 독점하게 했다. "바뵈프의 음모" 등은 이에 대한 분노에서 혁명 독재로의 회귀를 요구한 것이었다.
어떤 시대에서든 공안위원회와 같은 혁명 정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기 마련이며, 열렬한 칭찬 아니면 전면적인 혐오로 갈린다. 혁명 독재와 공포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다. 루이 블랑은 로베스피에르의 혁명 독재와 에베르의 공포 정치를 구분하려 시도했지만, 프랑수아 기조는 혁명 정부를 무법의 정부, 즉 아나키로 단정했고, 공포 정치가 혁명을 파멸로 이끌었다고 한탄하는 서정적인 인물 쥘 미슐레 역시 독재를 혐오했다. 알퐁스 오라르[125]는, 전제적인 독재(공포 정치)가 긴급사태에 따른 불가피한 임시 조치였다고 옹호하면서도, 그에게는 공포 정치의 지도자들이 1789년의 원리[126]에 대한 배교자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에게 개인의 자유 파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불법적인 체제에 대한 비판은 그들 이전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졌다. 혁명 정부를 열성적으로 지지한 역사가들 중 상당수는, 그 안에서 사회주의의 싹을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공안위원회 정부가 그 필요를 넘어 평등한 사회 정책을 추진하여 계급 투쟁을 시작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장 조레스는 프랑스 혁명이 프롤레타리아의 대두를 간접적으로 준비한 사회 혁명이었다는 그림을 그리려 했다. 알베르 마티에는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재평가하여 레닌과 대비시킨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는 공안위원회의 독재 확립이 두 가지 이유로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우선 내란을 진압하고 철저하게 억압하기 위해 국민 총동원령을 성립시키고, 다음으로 일반 최고 가격법을 실행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역시 이 독재(정치와 경제의 중앙 집권화)를 계급 독재로 간주했는데, 20세기 전반의 역사가들에게서 이러한 경향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 또한 한편으로는, 공안위원회의 피 묻은 일 처리가 실로 효율적이었다는 독재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적지 않았으며, 전체주의의 선구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왕당파가 꿈꿨던 공공의 안전을 꿈꿨던 샤를 모라스에게 공안위원회 정부는 통합주의의 안티테제였다. "위협에 처한 국토, 위기에 처한 조국, 그것을 강력한 권력 행사로 기적적으로 구한다"는 모습이 프랑스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모나 오즈프[127]는 말했는데, 거기에는 낭만주의조차 발견할 수 있으며, 조국 방위라는 정경은 일반적으로 좌익 프랑스인들에게도 민족주의의 격정을 불러일으켰다.
1794년2월 5일, 로베스피에르는, 인민 정부의 원동력은 평시에는 "덕"이지만, 혁명 시기에는 "덕과 공포"의 양쪽이라고 말했다. 모든 선량한 시민들에게 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덕을 지키지 않는 국내의 적을 terreur프랑스어(공포)로 제압해야 한다고. "덕이 없으면 공포는 해로우며, 공포가 없으면 덕은 무력하다."[128] 공안위원회는 마티에가 말하는 제3혁명과 제4혁명 기간에 존재했다. 공안위원회 정부가 부르주아지와 상퀼로트의 격렬한 상극(계급 투쟁)의 산물인지, 아니면 포퓰리즘이 낳은 탈선이었는지, 혹은 전체 블록의 일부였는지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그것이 갑작스러운 중단을 강요받고, 당돌하게 역행을 시작했다는 것은 사실이며, 인민 정부는, 그렇게 많은 유혈 희생을 치른 후에도,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못했다.
6. 3. 후세의 평가
공안위원회와 같은 혁명 정부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크게 엇갈려, 열렬한 칭찬과 전면적인 혐오로 양분되는 경향이 있다. 혁명 독재와 공포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이다.루이 블랑은 로베스피에르의 혁명 독재와 에베르의 공포 정치를 구분하려 했지만, 프랑수아 기조는 혁명 정부를 무법 상태로 규정했다. 쥘 미슐레는 공포 정치가 혁명을 파멸로 이끌었다고 비판하며 독재를 혐오했다. 알퐁스 오라르[125]는 전제적인 독재(공포 정치)가 긴급사태에 따른 불가피한 임시 조치였다고 옹호하면서도, 공포 정치 지도자들을 1789년의 원리[126]에 대한 배교자로 보았다. 이들에게 개인의 자유 파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은 불법적인 체제에 대해 더욱 비판적이었다.
혁명 정부를 지지한 역사가들 중 상당수는 사회주의의 싹을 그 안에서 발견했다. 공안위원회 정부가 평등한 사회 정책을 추진하여 계급 투쟁을 시작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장 조레스는 프랑스 혁명이 프롤레타리아의 대두를 간접적으로 준비한 사회 혁명이었다고 주장했다. 알베르 마티에는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재평가하여 레닌과 비교했다. 그는 공안위원회의 독재 확립이 내란 진압, 국민 총동원령 성립, 일반 최고 가격법 실행이라는 두 가지 이유로 발생했다고 설명하며, 이 독재(정치와 경제의 중앙 집권화)를 계급 독재로 간주했다. 20세기 전반의 역사가들에게서 이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한편, 공안위원회의 효율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전체주의의 선구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샤를 모라스는 공안위원회 정부가 통합주의의 안티테제라고 보았다. 모나 오즈프[127]는 "위협에 처한 국토, 위기에 처한 조국, 그것을 강력한 권력 행사로 기적적으로 구한다"는 모습이 프랑스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언급하며, 낭만주의적 요소와 조국 방위라는 상황이 좌익 프랑스인들에게도 민족주의적 감정을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했다.

6. 3. 1. 덕과 공포
Vertu프랑스어와 Terreur프랑스어 (덕과 공포)1794년 2월 5일, 로베스피에르는 인민 정부의 원동력은 평시에는 "덕"이지만, 혁명 시기에는 "덕과 공포" 둘 다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선량한 시민에게는 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덕을 지키지 않는 국내의 적은 공포로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덕이 없으면 공포는 해로우며, 공포가 없으면 덕은 무력하다."[128]
알베르 마티에에 따르면, 공안위원회는 제3혁명과 제4혁명 기간에 존재했다. 공안위원회 정부가 부르주아지와 상퀼로트의 격렬한 계급 투쟁의 산물인지, 포퓰리즘이 낳은 탈선인지, 혹은 전체 블록의 일부인지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공안위원회 정부가 갑작스러운 중단을 강요받고 역행을 시작했다는 것은 사실이며, 인민 정부는 많은 유혈 희생을 치렀음에도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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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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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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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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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La Révolution française et la théorie de la dictature
[36]
문서
マチエが独裁ではなかったと例外とするのを認めたのは、三権分立の憲法が機能していた立法議会初期のごく短い期間のみ
[37]
문서
国民公会の常任委員会は1793年当初は21もあった。内訳は、憲法委員会、外交委員会、戦争(陸軍)委員会、保安委員会、立法委員会、公教育委員会、財政委員会、法令委員会、陳情書・通信委員会、議場委員会、議事録委員会、公的救護委員会、地方行政委員会、農業委員会、商業委員会、土地財産委員会、清算委員会、決算監査委員会、海軍委員会、植民委員会、古文書委員会。これらは廃止されたり統合されたりするが、さらに新しく創設された公安委員会などが加わる。公安委員会が他の常設委員会よりも優越的な地位であることが決まったのは1793年9月13日の公会の議決による。すべての委員会の委員は公会が指名し、(上部組織への出向を除き)兼任は基本的に禁止されていた
1793
[38]
문서
秘密会議とされたのは外野の干渉を避けるためで、公開にして政治アピールの場とかした後述の国防委員会の反省から
[39]
문서
警察権は主に保安委員会Comité de sûreté généralefrが管轄していた。後に1793年7月28日の法令で公安委員会を強化する目的で、嫌疑者の拘引する命令を発する権限だけは同委員会にも与えられることになったが、治安・警察に関する広範囲な権限は依然として保安委員会が持っていた。つまり事実上は両委員会の二元支配となっていたわけで、この権限争いがテルミドールのクーデターの一因となっている。1794年4月16日、ジェルミナル27日の法令で公安委員会にも逮捕権(告発権と予審権)が与えられ、両者の争いは一層激しくなった。なお保安委員会は治安委員会とも訳される
1793-07-28
[40]
서적
Harvnb|河野健二|1989|loc=pp.342-343
[41]
문서
つまり9人制の場合は最低でも6人以上の会議で4人以上、14人制の場合は最低でも9人以上の会議で5人以上、12人制の場合は最低でも8人以上の会議で5人以上、11人制の場合は7人以上の会議で最低でも4人以上の委員の賛意と署名が必要とされた。これは公安委員会のメンバー構成上、どの派閥も単独ではいかなる決定もできなかったことを意味する。強権を持ちながらも常に協議と妥協をしいられた。ロベスピエールが何かにつけて公会やクラブで演説したのは、他の委員を説得するために人民の支持と後押しを必要としたため
[42]
문서
または修辞技法言葉のあや。ロベスピエールは大公安委員会の首班的地位であり、独裁政権の責任者だったのではあるが、説明のように一人で何でも決めることができたわけではないし、特別な権限を持っていたわけでもない。彼の持っていたものは人民への影響力という見えざる力だけだった。ロベスピエール独裁といった場合、委員会独裁を人格化したに過ぎず、誤解を招く
[43]
문서
公安委員会の委員は大臣よりも上位の権限を持っていた。これは従来の大臣制度が貴族的なものと見なされて嫌悪されたことに原因があり、この感覚は革命時独特のもの。大臣を監視する民衆代表の位置づけが公安委員であったが、公安委員自身に強い権限が与えられたので、公安委員が事実上の大臣に、大臣が格下げされて事実上の省庁長官になるというような構造になった
[44]
서적
Harvnb|マチエ|市原|ねづ|1989|loc=(下)p.58
[45]
문서
アンラジェやエベール派が粛清されたことから極左勢力は山岳派主流派を恨んでおり、一部の地区はテルミドールのクーデターのときに支持を見送った。特にグラヴィリエ地区は最左翼であったが、反ロベスピエールに決定的な役割を果たした
[46]
문서
国民公会には、議会を守る公会親衛隊(lang|fr|Garde de la Convention)という組織があったが、公会の一機関である公安委員会には、これに相当するものはなかった。公安委員会には上記の権限を行使するために治安局に若干の警察官吏がいただけ
[47]
서적
Harvnb|マチエ|市原|ねづ|1989|loc=(下)p.315
[48]
문서
公安委員自身が最前線にいるときや、最前線からの報告を受けた時に限られる。戦略方針の決定は公安委員会の主要な役割の一つで、下部組織・地形測量局が戦略分析を行っていた
[49]
문서
反革命容疑者法に指定されているように、これを管轄して執行するのは保安委員会や監察革命委員会(革命委員会と後に改称)であり、仮リンクフランス革命軍label=革命軍frArmée révolutionnaire française(民兵組織のこと)にも同様の権限があった。前述のようにその後には公安委員会にも拘引・逮捕の権限も付与されたが、実務的には公安委員会が命じた場合においても、警察活動は保安委員会か革命軍を介して行われた。監視委員会はまさに革命の秘密警察と言うべき組織で、思想弾圧やスパイのようなことをしていた
[50]
문서
恐怖政治の犠牲者の生き死にを実際に決めていたのは、革命裁判所 (フランス革命)|革命裁判所と検事、およびその陪審員団である。弁護士も証拠も途中から必要なくなったため、判決は主に陪審の心証に依存した
[51]
문서
後述するが、恐怖政治を最初に予言したのはマラーであり、政局として要望したのは(マラーと同じくコルドリエ派の流れを汲む)エベール派で、特に後者はロベスピエールの政敵であった。恐怖政治の到来は内戦勃発と深い関係がある
[52]
문서
「権力は腐敗する。絶対的権力は絶対的に腐敗する」 歴史学者ジョン・アクトン|J・E・アクトンの言葉
[53]
서적
Harvnb|フュレ|オズーフ|1999|loc=p.192
[54]
문서
議会が解散し、再選挙がある予定であったため
[55]
문서
司法、内務、外務、海軍、戦争(陸軍)、財務(公共租税)の6大臣
[56]
문서
もともとブルボン王政時代からフランスには首相や内閣などという制度はなく、各部門別の国務会議とそれを総合する最高国務会議があるだけで、つまり国王の親政を前提にした国体であった。1791年憲法の結果として大臣制度が誕生したが、イギリスなどと違って首相に相当する地位はなく、当時のフランスにおける総理大臣は大臣の欠員がでた際に兼務できる大臣のことで、大臣同士は対等な関係であった。このため国王存在がなくなると、中心がなくなり、強いリーダーシップを発揮できない構造だった
[57]
서적
Harvnb|河野健二|1989|loc=pp.294-298
[58]
문서
当時のイギリスは、現在と違って、ハノーヴァー朝|ウィンザー家のもともとの領地であるハノーヴァーやオスナブリュック大司教領など大陸に領土を持っていた。またオランダも歴史的に関係の深い主要な交易相手として権益が絡む国であり、フランス軍の直接の脅威からこれらを守るために、イギリスは大陸に軍隊を派遣することになった
[59]
문서
戦争(陸軍)委員会、財政委員会、植民委員会、海軍委員会、憲法委員会、外交委員会の6つ。1月31日に陳情書・通信委員会がこれに加わった
[60]
문서
平原派の代表的政治家。カメレオンの渾名を持ち、時期によって政治信条が異なるが、シェイエスなどと共に革命の全期で活躍した
[61]
문서
25名の議員の内訳は、デュボワ=クランセenlink|Edmond Louis Alexis Dubois de Crancé|Dubois-Crancé|fr、ジェローム・ペティヨン・ド・ヴィルヌーヴ|ペティヨンenlink|Jérôme Pétion de Villeneuve|Pétion|fr、ダントン、ジャンソネenlink|Armand Gensonné|Gensonné|fr、エマニュエル=ジョゼフ・シエイエス|シェイエス、ギュイトン=モルヴォーenlink|Louis-Bernard Guyton-Morveau|Guyton-Morveau|fr、M・ロベスピエール、バルバルーenlink|Charles Jean Marie Barbaroux|Barbaroux|fr、リュールenlink|Philippe Rühl|Rühl|fr、ヴェルニョーenlink|Pierre Victurnien Vergniaud|Vergniaud|fr、ファーブル・デグランティーヌenlink|Fabre d'Églantine|Fabre d'Églantine|fr、フランソワ・ビュゾー|ビュゾー、デルマenlink|Jean-François-Bertrand Delmas|Delmas、ガデenlink|Élie Guadet|Guadet|fr、コンドルセenlink|Nicolas de Condorcet|Condorcet|fr、ブレアール、カミュenlink|Armand-Gaston Camus|Camus|fr、プリュール・ド・ラ・マルヌenlink|Pierre-Louis Prieur|Prieur de la Marne|fr、カミーユ・デムーラン、バレール、ジャン・デブリenlink|Jean Antoine Debry|Debry|fr、イスナール、ラズルスenlink|Marc David Lasource|Lasource|fr、キネットenlink|Nicolas-Marie Quinette|Quinette|fr、ジャン=ジャック・レジ・ド・カンバセレス|カンバセレス。山岳派とジロンド派、平原派、つまり左右中道それぞれ、マラーとジャック・ピエール・ブリッソー|ブリッソーを除く主要政治家のほとんどが含まれていた
[62]
문서
元外相で、北方軍司令官であったデュムーリエ将軍はオルレアニスム|オルレアニストで、国王処刑を革命の行き過ぎと判断し、パリに進撃してジャコバン派を一掃して王権を回復する陰謀を企てていた。彼は敵司令官と勝手に交渉し、公会が派遣した議員と戦争大臣を拘束して引き渡した。軍をパリに向けようとしたが、兵士に拒否され、部下のルイ=ニコラ・ダヴー|ダヴー大佐に逮捕されそうになって、慌ててオーストリア軍に亡命した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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ちなみに戦争大臣(lang|fr|Ministres de la guerre)というのはフランス独特の表現で、陸軍大臣と同義。1930年代までフランスではこの表現だったが、現在は国防大臣(lang|fr|Ministre de la Défense)と名称が変わっている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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ジロンド派の政治家。後に同派の没落を決定づける失言をしたことで知られる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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イスナールは最初これを「執行委員会(行政委員会)」と名付けようとした。新委員会は独裁的強権を持つ行政府のようなものとして想起された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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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姓の議員と区別して通称ブレアール=デュプレシーとも言う。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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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岳派の政治家。非常に似た名前の兄がいるが、一般にこちらの有名な弟をロベール・ランデ、兄をトマ(トマス)・ランデと言う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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ダントン派の政治家。ロマン派の画家で有名なウジェーヌ・ドラクロワ|ドラクロワの父親。「ド」は定冠詞のため、ラクロワとも表記する
[69]
서적
Harvnb|マチエ|市原|ねづ|1989|loc=(中)pp.243-255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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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身は特別委員会。山岳派の独壇場だった保安委員会を抑えるために創られたが、結果的にはエベール派などに扇動されたサン・キュロット民兵の蜂起を誘発した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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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門貴族出身で、フンヤン→ジロンド→山岳派と党派を渡り歩いた政治家。享楽的な人物として知られる。外交で秘密任務に携わっていたことから裏切りの疑惑が持ち上がり、別の亡命貴族を匿った容疑で逮捕された。公安委員を辞任したが、公会では受理されなかった。平等主義者で、厳密にはダントン派ではないもっと左の政治信条であったが、ダントン派と一緒に処刑された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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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だしロベール・ランデは一旦は辞めるが、6月22日にマテューに代わって復帰した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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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月27日、フランソワ=レネ=オーギュスタン・マラルメも公安委員に指名されたが、実際に委員会には加わらなかった。同様に7月4日にトマ・ランデ(ロベール・ランデの兄)、ジャン・ミケル・デュ・ロイ、ジャン=マリー・アドリエン・フランカステルの3名も指名されたが、委員会に参加することはなかった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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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岳派右派で、いくつかの点では対立したがもともとはジロンド派と考え方が近いグループだった。右派として、買い占め人の処刑や一般最高価格法などアンラジェやエベール派が主張した極左政策には反対した。また対外的にも和平交渉を支持し、恐怖政治の終了を志向していた
[75]
Harvnb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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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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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岳派の政治家。海軍担当であったので西部や南部の軍港の視察にでかけてほとんどパリにはいなかった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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ダントン派の政治家だが、公安委員の辞任後は沈黙を守って粛清を逃れた。テルミドールのクーデタでは反ロベスピエール派として再び活動する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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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にジロンド派追放後の処刑に対してダントンは抵抗した。権力をつかんだ山岳派は、ジロンド派の粛清を肯定する必要があったため、不法な蜂起を弁護して法をねじ曲げたが、左派の台頭に苦しむことになる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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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ダム・フィリップ・ド・キュスティーヌ将軍の不当な逮捕に抗議したもの。ガスパランは委員の中では唯一の元軍人であったため、後述のカルノーらの追加が必要になった
[81]
Harvnb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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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ンラジェは「怒れる人々」という意味で、よって激昂派とも言う。彼らは議席を一つも持たず、パリのグラヴィリエ地区など数地区で支持されただけの最小グループであったが、極めて過激な主張をしたことで有名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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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買い占め人」と彼らが呼ぶブルジョワ商人の処刑や、銀行家すべての逮捕、アッシニヤ紙幣の不換紙幣化、一般最高価格法または購入者による商品の価格設定という極端な価格統制、汚職議員の追求、土地均分法ほか。その後、これらの政策の一部はエベール派によって継承されたが、両者はこの頃に暗殺されたマラーの後継者を巡って犬猿の仲。議会外勢力で国民公会そのものを批判し攻撃した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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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年の8月10日事件を記念する大連盟祭のこと。7月14日の革命祭から全国から人が集まってきていたため、食糧難が一層深刻化するのではないかと懸念が高まった。ちなみにこの日の祭典ではルーヴル美術館の開館式も行われ、1793年憲法の成立も宣言された。(実施に関しては後述) ダントン派はこの祝祭を恩赦の好機と考えて、追放されたジロンド派に大赦を与えるように策動したが、拒否された。地方からやってきた連盟兵(穏健派が多いと思われていた)がこの動議に賛成しないか警戒され、監視委員会が厳しく監視した
[85]
문서
ロベスピエールは8月5日、ヴァンサンFrançois-Nicolas Vincentを批判し、7〜8日にジャコバン・クラブで演説してアンラジェを攻撃した。これで大衆の支持と喝采をうけてクラブ議長に就任すると、さらに逮捕に向けてジャック・ルーやテオフィル・ルクレールJean-Théophile Leclercなどを調査をするように保安委員会に依頼した。彼らは22、23日にでっち上げの口実で逮捕された
[86]
문서
元来の姓は、プリュール=デュベルノワだが、プリュールという同姓の議員がかなりいるため、区別する意味で出身県のコートドール県を名前につけた通称で呼ばれる。これは前出のプリュール・ド・ラ・マルヌも同じで彼はマルヌ県出身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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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安委員会の部局の一つで、軍務に関する広範囲の職務に当たる。サン=ジュストが委員になる前に開設して主導していたが、彼は派遣委員となって不在がちとなったので、カルノーが委員になって管轄し、専門家を招いて部署を拡大させて本格的な戦時体制をフランスに実現させた
[88]
문서
もう一人はフランソワ=オメール・グレネーFrançois Omer Granet。彼も辞退した。国民公会は中道や右派の議員の方が数が多く、委員会が極端に左傾化するのを嫌って、左派の多くが派遣議員で前線に送られて不在を良いことに、事あるごとに右派の委員を指名しようとした
[89]
문서
ダントンは委員となる資格を十分に持っていたが、後述の8月1日の臨時政府昇格への動議の際に中傷されたことから、公安委員会の委員の席には二度と着かないとダントン本人が誓いを立てていたためと、ロベスピエールとの確執があったからとも言われる
[90]
문서
老兵ウーシャール将軍Jean Nicolas Houchardの解任と、革命裁判所送りに抗議したもの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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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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狭義では、ロベスピエールが委員となった7月27日ではなく、彼が正式にリーダーとなった9月25日から翌年7月27日までがロベスピエールの大公安委員会ということになる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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エローは不用意にもスパイであったプロリBerthold Prolyを秘書として雇っていたため、公安委員会の内実は外国に筒抜けだった。自身も汚職の嫌疑をかけられていたファーブル・デクランティーヌの告発により明らかになったこのスキャンダルで、彼は一切の信用を失う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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厳密には臨時政府委員会(Comité de gouvernement provisoire)と名付けるべきとした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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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安委員会は、テュイルリー宮殿とルーヴル宮殿を結ぶセーヌ川沿いの南区画であるフロール館Pavillon de Floreに設置されていた。現在はテュイルリー宮殿が焼失したため、庭園に面したルーヴル美術館の翼部のようになっているが、ここはもともとアンリ4世 (フランス王)が増築した別館部分で、奇しくもヴェルサイユ行進で連れてこられた後にはマリー・アントワネットの住居であった。またナポレオン・ボナパルトナポレオン1世も短い期間だが利用した。なお国民公会自身も宮殿の敷地内(反対側の室内馬術練習場)にあったが、他の常設委員会も宮殿内の別区画にあった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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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頃には連邦派として裏切り者呼ばわりされていた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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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述の八月十日祭に参加するために地方から集まっていた志願兵の集団。穏健派が多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当初の心配をよそに、内戦を鎮圧したいという要求が強く、国民総動員令などを可決して兵力増強されることを切に願い、恐怖政治と独裁強化を後押しした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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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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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は強制募兵制度で徴兵制とは異なり、ヴァンデの反乱を引き起こした30万人募兵令とも別。臨時に無制限の召集を可能にする極端な国民皆兵の国民総動員令案で、国内には不満も多かった。毎年、一定年齢の一定数を召集する徴兵制度徴兵制がフランスに導入されるのは1798年のジュールダン法成立以後。詳細は国民皆兵国民総動員令とジュールダン法を参照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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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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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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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ときにブルジョワ出身者を中心にする裁判長、検事、陪審が刷新されるまでは、革命裁判所は審議は遅々たる速度で、逮捕したほとんども釈放していた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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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ァーブル・デグランティーヌやシャボFrançois Chabotらを筆頭に、これらの人々は外国勢力との汚職(東インド会社汚職事件)に関与していた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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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方、つまり県の行政は、これまでは完全な地方分権であったが、県行政機関は穏健派で占められていて、ジロンド派追放に反対して反革命に回るところが少なくなかったことから、これを解体して直接の統制下に置き、行政の末端まで人事を刷新して、統一的指導を回復させる必要があった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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ラザール・カルノーの息子にしてニコラ・レオナール・サディ・カルノーサディ・カルノーの弟。政治家、歴史・社会学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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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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