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주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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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주는 중국 역사에서 여러 왕조에 걸쳐 존재했던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베트남 북부와 중국 남부 지역을 포함했다. 기원전 111년 한나라가 남월을 정복한 후 교지자사부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으며, 후한 시대에 교주로 개칭되었다. 삼국 시대에는 오나라의 지배를 받았으며, 사섭의 통치 하에 비교적 안정적인 시기를 겪었다. 서진 시대에는 중국 통일 이후 남조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행정 구역의 변화를 겪으며 리본의 반란과 만춘국의 건국으로 잠시 독립하기도 했다. 당나라 시기에는 안남도호부로 개칭되어 안남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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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 (중국) | |
---|---|
개요 | |
유형 | 옛 중국의 주 (州) |
위치 | 중국 남부 및 베트남 북부 |
역사 | |
설치 시기 | 기원전 203년 (남해군 설치) |
주요 시기 | 전한 후한 삼국 시대 (오) 진 (서진) 남조 수나라 당나라 오대십국 시대 |
폐지 시기 | 10세기 (오대십국 시대) |
행정 구역 | |
중심지 | 처음: 번우 (현재의 광저우시) 이후: 용편현 (현재의 베트남 박닌성 티엔주현) |
군 | 남해군 (南海郡) 창오군 (蒼梧郡) 울림군 (鬱林郡) 합포군 (合浦郡) 교지군 (交趾郡) 구진군 (九真郡) 일남군 (日南郡) |
주요 현 | 번우현 (番禺縣) 보로현 (博羅縣) 고요현 (高要縣) 부중현 (富中縣) 임우현 (臨汚縣) 용편현 (龍編縣) |
문화 | |
민족 구성 | 한족 월족 |
언어 | 한어 월어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조타 (趙佗) 사섭 (士燮) 이분 (李賁) |
2. 역사
기원전 111년(원정 6년) 전한이 남월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교지자사부'''를 설치하여 13자사부 중 하나로 삼았다. 당시 교주는 한나라 최남단의 영토였다.[1] 후한 초기에는 징 자매에 의한 독립 정권이 3년간 존재했으나, 마원에 의해 평정되어 다시 중원의 통치 하에 편입되었다. 192년 (초평 3년), 참족의 구련이 일남군 상림 현령을 살해하고 자립하여 참파 왕국을 세웠으며, 한나라와는 순화현을 경계로 삼았다.
203년 (건안 8년), 후한은 교지자사부를 '''교주'''로 개칭하고, 광시 좡족 자치구 우저우시 광신현을 주치로 삼았다가 후에 판위현으로 옮겼다. 이때 교주는 현재의 광둥성·광시 좡족 자치구 대부분과 베트남의 트어티엔 - 후에 성 이북 지역을 통괄했다. 후한 말기의 혼란 속에서 교주는 사섭의 통치를 받았는데, 비교적 안정되어 중원의 많은 인사가 이주하여 교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삼국 시대에는 오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211년(건안 16년), 유비의 익주 공략에 즈음하여 오는 보즐을 교주 자사로 임명하여 교주를 오의 세력 하에 두었다. 226년 사섭이 사망한 후, 동오는 교주를 광주와 새로운 교주로 분할했다가 사휘 (사휘)를 진압한 후 다시 광주를 교주에 재병합했다.
248년(적오 11년)에는 조국달·조씨정 남매 등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교주 자사 육윤에 의해 진압되었다. 263년(촉한의 염흥 원년, 위의 경원 4년, 오의 영안 6년)에는 촉한이 멸망한 직후, 교주에서 려흥이 반란을 일으켜 위의 지원을 획득하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통에게 살해되었다.
서진이 성립된 후, 양직이 파견되어 오의 설珝, 도황을 물리치고 교주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러나 271년(태시 7년, 오의 건형 3년), 도황이 양직을 항복시키고 다시 교주는 오의 지배 하에 놓였다. 279년(함녕 5년, 오의 천기 3년), 광주의 곽마가 반란을 일으키자 교주에도 반란군이 침공했고, 결국 280년(함녕 6년, 오의 천기 4년)에 오가 서진에 항복하면서 중국은 재통일되었다(오의 멸망).
서진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교주는 남조의 여러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다. 남조 송 이후에는 남쪽과 동쪽으로 영역이 분할되었고, 남조 양 이후에는 홍강 삼각주 일대만 교주의 영역으로 남았다. 542년(대동 8년) 용흥현(龍興県)에서 리본이 반란을 일으켜, 544년(천덕 원년) 만춘국을 건국했으나, 다음 해 진패선에 의해 진압되었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교주는 수나라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571년(태건 3년), 이불자가 교주에서 자립했으나, 수나라에 귀순하는 것을 거부하여 장안으로 호송되었다.
당나라가 성립되자 영남 지방은 5개의 도호부로 분할되었다. 624년(무덕 7년)에는 '''교주도독부'''로, 679년(의봉 4년)에는 '''안남도호부'''로 개칭되었고, 이후 교주는 '''안남'''으로 칭해지게 되었다.
2. 1. 전한 시대
기원전 111년(원정 6년) 한 무제의 군대가 남월을 남월 정복하여 정복하고 해당 지역을 교지부(交趾部)로 조직하여 자사 (刺史)의 통치를 받게 했다.[1] 전한이 남월을 멸망시키자, 그 자리에 '''교지자사부'''를 설치하여 13자사부 중 하나로 삼았다. 당시 교주는 한나라 최남단의 영토였으며, 아래 9개 군을 관할했다.군명 | 위치 |
---|---|
남해군 | 현재의 광둥성 광저우시 |
창오군 | 현재의 후난성 남부에서 광시 좡족 자치구 서북부 |
울림군 |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 중부 |
합포군 |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 베이하이시 |
주애군 | 현재의 하이난성 |
담이군 | 현재의 하이난성 |
교지군 | 현재의 베트남 |
구진군 | 현재의 베트남 |
일남군 | 현재의 베트남 |
2. 2. 후한 시대
후한 시대에도 전한 시대에 설치된 군현제가 유지되었으며, 일부 행정 구역의 변화가 있었다. 다음은 후한 시대 교주의 군현 목록과 속현 목록이다. 굵은 글씨는 각 군국의 치소가 있었던 곳이다.군명 | 속현 |
---|---|
고량(高凉) | 사평(思平), 석문(石門), 안녕(安寧) |
교지(交趾) | 계서(稽徐), 곡양(曲陽), 구루(苟漏), 망해(望海), 미령(麊泠), 봉계(封谿), 북대(北帶), 서우(西于), 연루(羸𨻻), 용편(龍編), 정안(定安), 주연(朱鳶) |
구진(九眞) | 거풍(居風), 무공(無功), 무편(無編), 서포(胥浦), 함환(咸懽) |
남해(南海) | 게양(揭陽), 박라(博羅), 번옹(番禺), 사회(四會), 용천(龍川), 중숙(中宿), 증성(增城) |
울림(鬱林) | 건시(建始), 광울(廣鬱), 계림(桂臨), 담중(潭中), 무안(武安), 신읍(新邑), 아림(阿臨), 안광(安廣), 영방(領方), 음평(陰平), 임진(臨塵), 임포(臨浦), 장평(長平), 정주(定周), 중류(中溜), 증식(增食), 포산(布山), 회안(懷安) |
일남(日南) | 노용(盧容), 비경(比景), 상림(象臨), 서권(西卷), 주오(朱吾) |
창오(蒼梧) | 광신(廣信), 단계(端谿), 고요(高要), 맹릉(猛陵), 봉양(封陽), 부천(富川), 사목(謝沐), 임하(臨賀), 장평(鄣平), 여포(荔浦) |
합포(合浦) | 고량(高凉), 서문(徐聞), 임원(臨元), 주애(朱崖), 합포(合浦) |
건안 말년에 합포군을 나누어 고량군을 신설하였다.[1]
2. 3. 삼국 시대 (동오)
후한 말의 혼란기를 거쳐 삼국 시대에는 오나라(동오)의 지배를 받았다. 사섭의 통치 시기에는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며 중원의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에 기여했다.211년(건안 16년), 유비의 익주 공략에 즈음하여 오는 보즐을 교주 자사로 임명하여 교주를 오의 세력 하에 두었다. 226년 사섭이 사망한 후, 동오는 교주를 광주와 새로운 교주로 분할했다. 그러나 사섭의 아들인 사휘 (사휘)를 진압한 후 동오는 광주를 교주에 재병합했다.[1] 223년(촉한의 장무 3년, 오의 황무 2년)에 유비가 사망하자 사섭은 익주의 호족이었던 옹개를 이반시켜 오에 귀순시키는 데 성공했다. 226년(황무 5년)에 사섭이 사망하자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 베이하이 시허푸 현을 경계로 북부에 광주를 신설했다. 여대, 대량을 각각 광주·교주 자사로 하고 사휘를 구진 태수로 했지만, 그 대우에 불만을 품은 사휘가 반란을 일으키자 여대는 교주 및 구진을 공격하여 반란을 평정함과 동시에 다시 광주와 교주를 통합했다.
248년(적오 11년), 조국달·조씨정 남매 등이 오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교주 자사 육윤에 의해 진압되었다.
263년(촉한의 염흥 원년, 위의 경원 4년, 오의 영안 6년), 촉한이 멸망했다. 이보다 앞서 교주에서 려흥이 반란을 일으켜 위의 지원을 획득하려 했다. 위는 전 촉한의 장군인 곽익으로 하여금 대처하게 했다. 여흥은 곧 내분으로 공조인 이통에게 살해되었지만, 곽익은 찬곡, 마융을 잇따라 파견했다. 오는 즉시 공략할 수 없다고 보고 광주를 재설치하여 위에 대비했다. 서진이 성립하자, 병사한 마융의 후임으로 양직을 파견하여 오의 대도독이었던 설珝, 창오 태수인 도황을 물리치고 서진이 교주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263년, 여흥 휘하의 교지와 구진의 "낙월 야만인"들이 오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반란군은 이 지역을 오의 경쟁국인 북중국 왕국 진에 넘겼다.[1] 271년(태시 7년, 오의 건형 3년), 도황이 수장인 양직을 항복시키고 다시 교주는 오의 지배 하에 놓였다.
279년(함녕 5년, 오의 천기 3년), 광주의 곽마가 오에 반란을 일으키자 교주에도 반란군이 침공했다. 오는 진압하지 못한 채 서진의 침공을 초래했고, 280년(함녕 6년, 오의 천기 4년)에 오가 항복하여 중국은 서진에 의해 재통일되었다(오의 멸망).
2. 4. 서진 시대
서진은 부남과 림읍의 번성한 왕국과의 남부 무역 네트워크를 선호했다. 이러한 남부 무역의 짧은 평화 시대의 "호황"과 더불어 320년대까지 교주와 구진은 중국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치권을 누렸다.[1] 312년, 반군과 황실 군대가 교주와 구진을 놓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무역의 어려움에 좌절한 림읍은 323년부터 교주 북부 항구에 대한 해상 습격을 감행했다.[1] 399년에 패배했음에도 림읍은 20년 동안 교주와 구진에 대한 습격을 계속했다.[2] 저장성에서 온 중국 반군이 411년에 잠시 교주의 수도를 점령했다.[2]2. 5. 양진남북조 시대
서진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교주는 남조의 여러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다. 남조 송 이후에는 남쪽으로는 애주(愛州)·덕주(德州)로 분할되어 현재의 게안 성과 트어티엔후에 성 경계까지, 동쪽으로는 월주(越州)·안주(安州)로 분할되어 합포수(合浦水, 현재의 난류강)의 하구까지 경계가 옮겨졌다. 남조 양 이후에는 홍강 삼각주 일대만 교주의 영역으로 남았다. 542년(대동 8년) 용흥현(龍興県)에서 리본이 반란을 일으켜, 544년(천덕 원년) 만춘국을 건국했으나, 다음 해 남조 양의 진패선에 의해 진압되었다.2. 6. 수/당 시대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교주는 수나라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571년(태건 3년), 이불자가 교주에서 자립했으나, 수나라에 귀순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수나라 군대에 의해 붙잡혀 장안으로 호송되었다.당나라가 성립되자 영남 지방은 '''교주''', 광주, 계주, 용주, 옹주의 5개의 도호부로 분할되어 "영남오관"으로 칭해졌다. 624년(무덕 7년)에는 '''교주도독부'''로, 679년(의봉 4년)에는 '''안남도호부'''로 개칭되었고, 이후 교주는 '''안남'''으로 칭해지게 되었다.
3. 행정 구역
기원전 111년 전한이 남월을 멸망시킨 후, 교지자사부를 설치하여 13자사부 중 하나로 삼았다. 후한 초기에는 징 자매의 독립 정권이 3년간 존속했으나, 마원에 의해 평정되었다. 192년에는 참족의 구련이 참파 왕국을 세워 일남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203년 (건안 8년), 후한은 교지자사부를 '''교주'''로 개칭하고, 광신현(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 우저우시 창우현)을 주치로 삼았다가 후에 판위현으로 옮겼다.
226년 사섭 사후, 동오는 교주를 광주와 새로운 교주로 분할했으나, 사휘의 반란 진압 후 재병합했다. 264년 교주가 다시 분할되었을 때, 광주는 남해, 창오, 율림 3개 군, 새로운 교주는 합포, 교지, 구진, 일남 4개 군으로 구성되었다.
263년 여흥의 반란으로 진의 지원을 받았으나, 271년 도황이 양직을 항복시켜 다시 오의 지배를 받았다. 279년 곽마의 반란이 일어났고, 280년 오가 멸망하면서 서진에 의해 통일되었다.
서진 시대 교주는 합포군, 교지군, 신창군, 무평군, 구진군, 구덕군, 일남군의 7개 군으로 구성되었다.
3. 1. 한나라
기원전 111년, 한 무제는 남월을 정복하고 해당 지역을 교지부(交趾部)로 조직하여 자사의 통치를 받게 했다. 한나라는 해남섬과 응안관 남쪽 지역을 정복하고 주애군, 담이군, 일남군을 설치했다.[1] 203년, 교지부는 주로 승격되어 '''교주'''(交州)로 불리게 되었다.[2]기원전 111년(원정 6년) 전한이 남월을 멸망시키자, 그 지역에 교지자사부를 설치하여 13자사부 중 하나로 삼았다. 당시 교주는 한나라 최남단의 영토였으며, 아래 9개 군을 관할했다.
군명 | 현재 위치 |
---|---|
남해군 | 광둥성 광저우시 |
창오군 | 후난성 남부에서 광시 좡족 자치구 서북부 |
울림군 | 광시 좡족 자치구 중부 |
합포군 | 광시 좡족 자치구 베이하이시 |
주애군 | 하이난성 |
담이군 | 하이난성 |
교지군 | 베트남 |
구진군 | 베트남 |
일남군 | 베트남 |
후한 초 징 자매에 의한 독립 정권이 3년간 존재했으나, 곧 마원에 의해 평정되어 중원의 통치 하에 편입되었다. 192년(초평 3년), 참족의 구련이 일남군 상림 현령을 살해하고 자립하여, 일남군 대부분을 세력 하에 두고 참파 왕국을 세웠으며, 한나라와는 순화현을 경계로 삼았다.
203년(건안 8년), 후한은 교지자사부를 '''교주'''로 개칭, 광신현(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 우저우시 창우현)을 주치로 삼았으며, 후에 판위현으로 옮겨 현재의 광둥성·광시 좡족 자치구 대부분과 베트남 트어티엔 - 후에 성 이북 지역을 통괄했다.
3. 2. 후한
후한 시대 교주는 8개의 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량, 교지, 구진, 남해, 울림, 일남, 창오, 합포가 이에 해당한다. 각 군 밑에는 속현 목록이 나열되어 있으며, 굵은 글씨는 군국의 치소가 있던 곳을 의미한다.[1]군명 | 속현 |
---|---|
고량(高凉) | |
교지(交趾) | |
구진(九眞) | |
남해(南海) | |
울림(鬱林) | |
일남(日南) | |
창오(蒼梧) | |
합포(合浦) |
3. 3. 동오
226년 사섭이 사망한 후, 동오는 교주를 광주와 새로운 교주로 분할했다. 그러나 사섭의 아들인 사휘(사휘)를 진압한 후 동오는 광주를 교주에 재병합했다. 264년에 이르러서야 교주가 다시 분할되었는데, 광주는 남해, 창오, 율림의 3개 군으로 구성되었고, 새로운 교주는 합포, 교지, 구진 및 일남의 4개 군으로 구성되었다. 같은 해, 로마의 사절이 교주의 교지에 도착하여 오 조정으로 급히 향했다. 229년, 동오는 부남에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그곳에는 인도 등지에서 온 상인들이 모여 있었다.오나라는 가혹했다. 3세기 중반에 이르러 남부 군현에는 혼란이 휩쓸었다. 231년, 구진의 락월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오의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248년, 림읍 군대가 남쪽에서 침략하여 일남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구진으로 진격하여 그곳과 교지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한 교지 반란군은 수천 명을 지휘하며 여러 성을 함락시켰으나, 오 관료들이 그를 항복시켰다.[1]
구진에서는 락월족 여성인 조읍(부인 조)이 248년에 오에 대항하는 반란을 이끌었지만, 육윤에 의해 진압되었다.[2]
263년, 여흥 휘하의 교지와 구진의 "낙월 야만인"들이 오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반란군은 이 지역을 오의 경쟁국인 북중국 왕국 진에 넘겼다.[2] 268년과 269년에는 대규모 오나라 군대와 함대를 격퇴했으며, 결국 271년에는 교지의 항구와 주요 도시를 다시 탈환했다. 280년 진이 오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시골에서 전투가 계속되었다.[2]
혼란스러웠던 후한 말기, 교주는 사섭의 통치를 받았다. 중원에 비해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원보다 많은 인사가 이주하여 중원 문화를 전파하여 교주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이어진 삼국 시대에서는 각 정권에 등용되어 중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211년(건안 16년), 유비의 익주 공략에 즈음하여 오는 보즐을 교주 자사로 임명하여 교주를 오의 세력 하에 두었다. 223년(촉한의 장무 3년, 오의 황무 2년)에 유비가 사망하자 사섭은 익주의 호족이었던 옹개를 이반시켜 오에 귀순시키는 데 성공했다. 226년(황무 5년)에 사섭이 사망하자 현재의 광시 좡족 자치구 베이하이 시허푸 현을 경계로 북부에 광주를 신설했다. 여대, 대량을 각각 광주·교주 자사로 하고 사섭의 아들인 사휘를 구진 태수로 했지만, 그 대우에 불만을 품은 사휘가 반란을 일으키자 여대는 교주 및 구진을 공격하여 반란을 평정함과 동시에 다시 광주와 교주를 통합했다.
248년(적오 11년), 조국달·조씨정 남매 등이 오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교주 자사 육윤에 의해 진압되었다.
263년(촉한의 염흥 원년, 위의 경원 4년, 오의 영안 6년), 촉한이 멸망했다. 이보다 앞서 교주에서 려흥이 반란을 일으켜 위의 지원을 획득하려 했다. 위는 전 촉한의 장군인 곽익으로 하여금 대처하게 했다. 여흥은 곧 내분으로 공조인 이통에게 살해되었지만, 곽익은 찬곡, 마융을 잇따라 파견했다. 오는 즉시 공략할 수 없다고 보고 광주를 재설치하여 위에 대비했다. 서진이 성립하자, 병사한 마융의 후임으로 양직을 파견하여 오의 대도독이었던 설珝, 창오 태수인 도황을 물리치고 서진이 교주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271년(태시 7년, 오의 건형 3년), 도황이 수장인 양직을 항복시키고 다시 교주는 오의 지배 하에 놓였다.
279년(함녕 5년, 오의 천기 3년), 광주의 곽마가 오에 반란을 일으키자 교주에도 반란군이 침공했다. 오는 진압하지 못한 채 서진의 침공을 초래했고, 280년(함녕 6년, 오의 천기 4년)에 오가 항복하여 중국은 서진에 의해 재통일되었다(오의 멸망).
3. 4. 서진
서진 시대에는 합포군, 교지군, 신창군, 무평군, 구진군, 구덕군, 일남군의 7개 군이 있었다.4. 같이 보기
- 교지
- 안남 (당 보호령)
(변경 사항 없음)
참조
[1]
서적
Book of Han
http://zh.wikisource[...]
2011-02-28
[2]
문서
Book of Jin, vol.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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