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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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는 1860년 필리핀에서 태어나 로마 가톨릭 사제로 서품받았으나, 필리핀 혁명에 참여하며 파문되었다. 이후 필리핀 독립 교회를 창립하여 초대 최고 주교가 되었으며, 1935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그는 1940년 사망할 때까지 필리핀 독립 교회를 이끌었으며, 그의 유해는 바탁에 있는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 국립 묘지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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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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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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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 크루스 이 라바얀 |
출생 | 1860년 5월 5일, 바탁, 일로코스노르테 주, 필리핀 총독부, 스페인 제국 |
사망 | 1940년 9월 1일 (향년 80세), 마닐라, 필리핀 연방 |
안장지 |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 국립 성지, 바탁, 일로코스노르테, 필리핀 |
국적 | 필리핀인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1899년 파문) 독립 가톨릭교회 / 개신교 (초기 IFI/PIC) |
배우자 | 필라르 하미아스 이 베르(1939년 결혼) |
자녀 | 1명 |
모교 | 콜레히오 데 산 후안 데 레트란 (문학사, 편입) 산토 토마스 대학교 (문학사 졸업, 법학사 및 신학 중퇴) 임마쿨라타 콘셉시온 신학대학 (비간 신학교) |
좌우명 | 국민을 섬기십시오! |
직책 | |
직업 | 종교 지도자, 게릴라 지도자, 사회 및 정치 운동가, 정치인 |
직함 | 사제, 몬시뇰, 주교 (아글리파이파 교회) |
교회 경력 | |
교단 | 필리핀 독립 교회 |
교구 | 톤도 |
임명일 | 1902년 9월 6일 (수락 및 착좌) |
임기 종료 | 1940년 9월 1일 |
이전 | 직책 신설 |
이후 | 산티아고 안토니오 포나시에르 이 수기탄 |
서품 | 1887년 (로마 가톨릭 차부제) 1888년 (로마 가톨릭 부제) 1889년 12월 21일 (로마 가톨릭 사제) |
주교 서임 | 1903년 1월 18일 (필리핀 독립 교회의 초대 최고 지도자) |
계급 | 사제 (로마 가톨릭 교회) 최고 지도자 (필리핀 독립 교회) |
정치 및 군사 경력 | |
소속 정당 | 공화당 (1905–1935) |
이전 소속 정당 | 무소속 (1905년까지) |
충성 | 필리핀 제1공화국 |
군대 | 필리핀 공화국군 |
복무 기간 | 1899–1901 |
계급 | 중장 |
참전 | 필리핀-미국 전쟁 |
기타 직책 | 필리핀 혁명 정부의 군사 총대리 말롤로스 의회 일로코스노르테 주 대표 |
칭호 및 기념 | |
기념일 | 9월 5일 |
칭송 | 성공회 (성인 시도) 필리핀 독립 교회 (비공식) |
성인 칭호 | 주교, 증인, 하느님의 종, 몽상가, 애국자, 십자군 |
수호 | 필리핀 독립 교회 |
성지 |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 국립 성지, 바탁, 일로코스노르테 쿨라벵의 그레고리오 L. 아글리파이 성지, 피닐리, 일로코스노르테 |
2. 초기 생애와 교육
아글리파이는 스페인 수도사의 조력 사제로 누에바 세고비아 대교구 등 루손 섬 북부 여러 교구에서 경력을 시작했다.[7] 빅토리아에서 봉사하면서 카티푸난과 연락을 취하며 혁명가들을 은밀하게 도왔고, 30명의 목수들을 고용했다. 이후 혁명가들을 조직하여 "Liwanag"( "빛"을 의미)라는 그룹을 만들었는데, 이는 타를락 주 빅토리아에 기반을 둔 카티푸난의 지역 보조 조직이었다.
2. 1. 출생과 성장 배경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는 1860년 5월 5일 바탁에서 태어나 5월 9일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생일을 5월 8일로 기념하는 것을 선호했다.[1] 페드로 아글리파이 이 크루스와 빅토리아나 라바얀 이 일라리오의 셋째 아이였던 그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친척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담배 밭에서 성장했다. 필리핀의 스페인 점령기의 마지막 혼란스러운 수십 년 동안 식민주의 스페인 제국 정부에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이는 농업 시스템 내의 남용에서 비롯되었다. 열네 살에 스페인 담배 재배업자의 담배 따기 노동자로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체포되었고, 이후 1876년 변호사이자 사립학교 소유주인 훌리안 카르피오의 지도를 받기 위해 마닐라로 이주하여 삼촌 프란시스코 델 아모르 로마스의 재정적 도움을 받았다. 그의 삼촌은 도미니코 수녀회 산타 카탈리나 학교의 잡역부였다.[4]
카르피오 아래에서 2년간 공부한 후, 아글리파이는 1878년 산 후안 데 레트란 칼리지오에서 3학년을 야간 학생으로 계속 공부했고, 1880년 산토 토마스 대학교에서 4학년을 공부하여 수석을 차지했다. 산토 토마스에 다니는 동안 그는 펜싱 파트너였던 의학 전공생 호세 리잘, 레트란 출신인 이사벨로 데 로스 레예스를 만났다. 1881년 산토 토마스에서 예비 법학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1882년에도 여전히 산토 토마스에서 법학과 신학을 전공했다. 그 후 법학과 신학 공부를 중단하고 1883년 23세의 나이에 리잘의 영향을 받아 일로코스 수르, 비간에 있는 로마 가톨릭 신학교에 입학했다.[10][5][6] 6년 후인 1889년 12월 21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에, 마닐라 인트라무로스에 있는 도미니코회 산토 도밍고 교회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1890년 1월 1일 마닐라 산타 크루스 교회에서 로마 가톨릭 사제로 첫 미사를 드렸다.
2. 2. 학업과 사제 서품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는 1860년 5월 5일 일로코스 노르테 주 바탁에서 태어나 5월 9일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페드로 아글리파이 이 크루스와 빅토리아나 라바얀 이 일라리오의 셋째 아이로,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친척들의 보살핌 아래 담배 밭에서 성장했다.[1] 그는 필리핀의 스페인 점령기 동안 농업 시스템 내의 남용으로 인해 식민주의 스페인 제국 정부에 깊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14세에 스페인 담배 재배업자의 담배 따기 노동자로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체포되기도 했다.[1]
1876년, 아글리파이는 변호사이자 사립학교 소유주인 훌리안 카르피오의 지도를 받기 위해 마닐라로 이주하여 삼촌 프란시스코 델 아모르 로마스의 재정적 도움을 받았다. 그의 삼촌은 도미니코 수녀회 산타 카탈리나 학교의 잡역부였다.[4] 카르피오 아래에서 2년간 공부한 후, 1878년 산 후안 데 레트란 칼리지오에서 3학년을 야간 학생으로 다녔고, 1880년 산토 토마스 대학교에서 4학년을 수석으로 마쳤다. 산토 토마스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아글리파이는 펜싱 파트너였던 의학 전공생 호세 리잘과 이사벨로 데 로스 레예스를 만났다.[5][6]
아글리파이는 1881년 산토 토마스 대학교에서 예비 법학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 1882년에도 여전히 산토 토마스에서 법학과 신학을 전공했다. 1883년, 23세의 나이에 리잘의 영향을 받아 일로코스 수르 주 비간에 있는 로마 가톨릭 신학교에 입학했다.[10] 6년 후인 1889년 12월 21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에, 마닐라 인트라무로스에 있는 도미니코회 산토 도밍고 교회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1890년 1월 1일, 마닐라 산타 크루스 교회에서 로마 가톨릭 사제로서 첫 미사를 드렸다.[10]
이후 아글리파이는 스페인 수도사의 조력 사제로서 누에바 세고비아 대교구를 포함한 루손 섬 북부 지역의 다양한 교구에서 경력을 시작했다.[7] 타를락, 빅토리아에서 봉사하면서 혁명가들을 은밀하게 도왔고, 카티푸난 단체와 연락을 취하고 있던 30명의 목수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아글리파이는 그 후 해당 혁명가들을 조직하여 그들의 그룹을 "Liwanag"( "빛"을 의미)라고 불렀으며, 이는 타를락 주 빅토리아에 기반을 둔 카티푸난의 지역 보조 조직이었다.
3. 필리핀 혁명과 독립 운동
스페인-미국 전쟁이 끝나고 필리핀-미국 전쟁이 시작되면서, 아글리파이는 일로코스 지방으로 이동했다. 그는 자신의 군종총대리 임명을 모든 필리핀 토착 사제들의 교회 상급자로 해석했고, 그에 따라 이들을 모두 전쟁 기간 동안 군종 신부로 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0] 이후 마닐라로 돌아온 아글리파이는 미군의 공격 사실을 알고 혁명에 참여, 1899년 2월 4일 미국과 필리핀군 사이에 발생한 전투로 인해 일로코스 노르테로 물러나 무장 저항을 조직했고, 중장 계급을 받았다. 그는 게릴라 단체 "산다탄"을 결성했다.[11][12]
마닐라 대주교 베르나르디노 노살레다 이 비야는 아글리파이를 마닐라로 소환했지만, 아글리파이는 이에 불응했다. 결국 노살레다는 1899년 4월 29일, 교황 레오 13세의 명시적인 허가를 받아 "찬탈"과 "교회 관할권"을 이유로 아글리파이를 파문했으며, 파문 선고는 5월 4일부터 6월 5일까지 마닐라의 대주교 재판소에서 공포되었다.[13][14]
아글리파이는 미국에 항복한 마지막 장군 중 한 명이었다. 1901년 4월 28일, 아기날도 체포 한 달 후, 그는 싸워온 대의가 무익함을 깨닫고, 미군과의 승산이 적다고 보고 부하들의 추가 사상자를 막기 위해 라오아그에서 제20 미 육군 정규 보병대 대장 에드워드 만 루이스에게 항복했다. 항복 후, 그는 이미 미국이 점령한 마닐라로 다시 이주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화해를 모색했다. 미국은 1902년 7월 2일 공식적으로 전쟁을 종결하고, 분쟁에 참여한 필리핀인 모두에게 완전한 사면을 부여했다.[15]
3. 1. 혁명 참여와 군종 신부 임명
1896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이끄는 비밀 결사 카티푸난이 스페인 당국에 발각되었다. 당시 국교가 로마 가톨릭교였던 상황에서, 마닐라 대주교 베르나르디노 노살레다는 아글리파이에게 혁명 지도자들을 만나 반란을 중단하면 필리핀에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보장하겠다는 제안을 하도록 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 장군은 루시아노 산 미겔 대령을 아글리파이에게 보내 반란에 참여하도록 설득했고, 아글리파이는 1898년 5월 또는 6월경 필리핀 혁명 정부의 군종 신부로 임명되었다. 이는 필리핀 혁명에서 최초로 임명된 군종 신부였다.[8]이후 아글리파이는 말롤로스 의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종교계에서 유일한 대표이자 고향인 일로코스노르테주를 대표했다.[9] 1898년 10월 20일, 아기날도는 아글리파이를 혁명군의 군종 총대리로 승진시켜 혁명군의 모든 군종 신부들의 수장으로 만들었다. 아글리파이는 자신의 총대리 임명을 모든 필리핀 토착 사제들의 교회 상급자로 해석하고, 이들을 모두 전쟁 기간 동안 군종 신부로 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0]

아글리파이는 마닐라로 돌아와 미군의 공격을 받고 혁명에 참여했다. 1899년 2월 4일 전투로 인해 일로코스 노르테로 물러나 무장 저항을 조직했고, 중장 계급을 받았다. 그는 게릴라 단체 "산다탄"을 결성했다.[11][12] 마닐라 대주교 베르나르디노 노살레다는 아글리파이를 마닐라로 소환했지만 나타나지 않았고, 1899년 4월 29일, 교황 레오 13세의 명시적인 허가를 받아 "찬탈"과 "교회 관할권"을 이유로 파문했다. 파문 선고는 5월 4일부터 6월 5일까지 마닐라의 대주교 재판소에서 공포되었다.[13][14]
아글리파이는 미국에 항복한 마지막 장군 중 한 명이었다. 1901년 4월 28일, 아기날도 체포 한 달 후, 아글리파이는 라오아그에서 미 육군 정규 보병대 대장 에드워드 만 루이스에게 항복했다. 항복 후, 그는 미국이 점령한 마닐라로 이주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화해를 모색했다. 미국은 1902년 7월 2일 공식적으로 전쟁을 종결하고, 분쟁에 참여한 필리핀인들에게 완전한 사면을 부여했다.[15]
3. 2. 말롤로스 의회 참여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이끄는 비밀 결사 카티푸난이 스페인 당국에 발각된 후, 마닐라 대주교는 아글리파이에게 혁명 지도자들을 만나 반란을 중단하면 자치를 보장하겠다는 제안을 하도록 지시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 장군은 아글리파이를 설득하여 필리핀 혁명 정부의 군종 신부로 임명했다.[8]아글리파이는 나중에 말롤로스 의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종교계에서 유일한 대표이자 고향인 일로코스노르테주를 대표했다.[9] 1898년 10월 20일, 아기날도는 아글리파이를 혁명군의 군종 총대리(Vicario General Castrense)로 승진시켰다. 아글리파이는 자신의 총대리 임명을 모든 필리핀 토착 사제들의 교회 상급자로 해석했고, 그들을 모두 전쟁 기간 동안 군종 신부로 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0]
3. 3. 필리핀-미국 전쟁과 파문
1896년,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이끄는 비밀 결사 카티푸난이 스페인 당국에 발각되었다. 당시 국교는 로마 가톨릭교였고, 마닐라 대주교 베르나르디노 노살레다는 아글리파이에게 혁명 지도자들을 만나 반란을 중단하면 필리핀에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보장하겠다는 제안을 하도록 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루시아노 산 미겔 대령을 보내 아글리파이를 설득했고, 아글리파이는 1898년 5월 또는 6월경 필리핀 혁명 정부의 군종 신부로 임명되었다. 이는 필리핀 혁명에서 최초의 군종 신부 임명이었다.[8]아글리파이는 이후 말롤로스 의회의 일원이 되었으며, 종교계에서 유일한 대표이자 고향인 일로코스노르테주를 대표했다.[9] 1898년 10월 20일, 아기날도는 아글리파이를 혁명군의 군종 총대리로 승진시켰다. 이 직책은 그를 혁명군 모든 군종 신부들의 수장으로 만들었다. 아글리파이가 일로코스 지방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스페인-미국 전쟁이 끝나고 필리핀-미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글리파이는 자신의 총대리 임명을 모든 필리핀 토착 사제들의 교회 상급자로 해석했고, 그에 따라 이들을 모두 전쟁 기간 동안 군종 신부로 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0]
아글리파이는 마닐라로 돌아와 미군이 공격했음을 알고 혁명에 참여했다. 1899년 2월 4일 미국과 필리핀군 사이에 발생한 전투로 인해 아글리파이는 일로코스 노르테로 물러나 무장 저항을 조직했고, 중장 계급을 받았다. 그는 게릴라 단체 "산다탄"을 결성했다.[11][12] 마닐라 대주교 베르나르디노 노살레다는 아글리파이를 마닐라로 소환했지만 나타나지 않았고, 노살레다는 1899년 4월 29일, 교황 레오 13세의 명시적인 허가를 받아 "찬탈"과 "교회 관할권"을 이유로 아글리파이를 파문했다. 파문 선고는 5월 4일부터 6월 5일까지 마닐라의 대주교 재판소에서 공포되었다.[13][14]
아글리파이는 미국에 항복한 마지막 장군 중 한 명이었다. 1901년 4월 28일, 아기날도 체포 한 달 후, 그는 싸워온 대의가 무익함을 깨닫고, 미군과의 승산이 적다고 보고 부하들의 추가 사상자를 막기 위해 라오아그에서 에드워드 만 루이스에게 항복했다. 항복 후, 그는 이미 미국이 점령한 마닐라로 이주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화해를 모색했다. 미국은 1902년 7월 2일 공식적으로 전쟁을 종결하고, 분쟁에 참여한 필리핀인 모두에게 완전한 사면을 부여했다.[15]
4. 필리핀 독립교회 창립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는 필리핀 독립 교회(Iglesia Filipina Independiente, IFI) 창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IFI는 "아글리파이 교회"라고도 불리며, 아글리파이는 이 교회의 초대 최고 주교(Obispo Máximo)였다.
4. 1. 독립교회 설립 배경
1902년 전쟁이 끝난 후, 작가이자 활동가인 이사벨로 데 로스 레예스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독립된 민족주의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스페인 수사들은 미국의 점령 당시에도 여전히 전국 모든 교구를 통제하고 있었다.[16] 1902년 8월 3일, 데 로스 레예스와 그의 노동 단체인 ''Unión Obrera Democrática''는 교회의 설립을 선포하고 부재 상태에서 아글리파이를 초대 수장 주교로 추천했다. 아글리파이는 파문당한 후에도 당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처음에는 분열에 반대했기 때문에 주저했지만,[16] 결국 1902년 9월 6일에 독립 교회를 이끌라는 데 로스 레예스의 제안을 수락하여 "필리핀 독립 교회"(공식적으로는 ''Iglesia Filipina Independiente'', IFI로 약칭하며 그를 따라 "아글리파이 교회"라고도 함)의 초대 최고 주교(''Obispo Máximo'')로 임명되었다.[10]유명한 역사가 테오도로 아곤실로에 따르면, 아글리파이는 스페인 예수회 사제이자 작가인 프란시스코 포라다다와의 대화가 실패한 후 새 교회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예수회는 아글리파이가 필리핀 성직자들에게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분열이 성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아글리파이가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설득하려는 시도로 포라다다를 배정했다. 마닐라 산타 아나에 있는 예수회 회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아글리파이에게 그가 돌아온다면 많은 돈과 함께 주교 또는 대주교로 임명하겠다는 제안이 있었다고 한다. 아글리파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고해성사 서류에 서명할 예정이었지만, 그 서류에 서명하는 조건으로 필리핀 원주민 가톨릭 사제들의 문제가 해결되고, 필리핀 성직자가 과거 스페인 정규군이 맡았던 직책을 맡게 될 것이라는 보장이 있었다. 포라다다는 "왜 그는 필리핀 사제들에 대해 신경 쓰겠는가, 세상이 그들이 사악하고 희망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라고 아글리파이에게 질문했다. 아글리파이는 포라다다의 무례한 발언에 모욕감을 느껴 그를 향해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발언을 철회하라고 요구했고, 겁에 질린 포라다다는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 사건의 목격자로는 레온 마리아 게레로와 호아킨 루나가 있다. 그 후, 아글리파이는 회의에서 나와 그 문서를 내던졌다고 한다.[16]
아글리파이는 예수회와의 첫 번째 회의가 실패한 후 이미 새 교회에 합류하기로 결정했지만, 여전히 최고 주교 직을 수락하는 것을 꺼렸다. 그는 심지어 미국 개신교 지도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새로운 필리핀화된 교회에 도움을 주고 함께 할 것을 설득하여 "[로마] 가톨릭의 대열을 분열"시키려고 시도했다. 아글리파이는 또한 필리핀 사제들이 새 교회의 성직자에서 더 높은 직급으로 임명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미국 개신교는 새로운 교회가 "그 의식에서 너무 로마적"이고 "그 신학에서 너무 합리주의적"이라고 판단하여 아글리파이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들은 또한 당시 필리핀 교회 지도자를 기꺼이 두려는 듯 보였는데, 이는 그들이 "우월감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16]
최종 시도에서 예수회는 그가 새 교회에 합류하여 최고 주교 직을 수락한 지 여러 해가 지난 후, 더 외교적인 스페인 사제 호아킨 비야롱가를 통해 아글리파이와 다시 협상하려 했다. 교황 비오 10세는 새로운 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온다면 아글리파이에게 사면을 허가하는 것을 승인했지만, 아글리파이는 이미 이글레시아 필리피나 인디펜디엔테를 계속 유지하려는 의지가 확고했다.[17]
4. 2. 최고 주교 추대와 활동
이사벨로 데 로스 레예스는 1902년 전쟁이 끝난 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독립된 민족주의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다. 당시 스페인 수사들은 미국의 점령 하에서도 여전히 전국의 모든 교구를 통제하고 있었다. 8월 3일, 데 로스 레예스와 그의 노동 단체인 ''Unión Obrera Democrática''는 교회의 설립을 선포하고 부재 상태에서 아글리파이를 초대 수장 주교로 추천했다. 아글리파이는 파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처음에는 분열에 반대하며 주저했다.[16] 그러나 1902년 9월 6일, 데 로스 레예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독립 교회를 이끌기로 결심하고, "필리핀 독립 교회"(공식 명칭 ''Iglesia Filipina Independiente'', IFI, "아글리파이 교회"라고도 불림)의 초대 최고 주교(Obispo Máximo)로 임명되었다. 이 교회는 로마 가톨릭 예배 형태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유지했다.[10]테오도로 아곤실로에 따르면, 아글리파이는 스페인 예수회 사제이자 작가인 프란시스코 포라다다와의 대화가 실패한 후 새 교회에 합류하기로 최종 결심했다. 예수회는 아글리파이가 필리핀 성직자들에게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분열을 막기 위해 포라다다를 보내 아글리파이를 설득하려 했다. 마닐라 산타 아나의 예수회 회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아글리파이에게는 돌아온다면 많은 돈과 함께 주교 또는 대주교로 임명하겠다는 제안이 있었다고 한다. 아글리파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고해성사 서류에 서명할 예정이었지만, 필리핀 원주민 가톨릭 사제들의 문제가 해결되고 필리핀 성직자가 과거 스페인 정규군이 맡았던 직책을 맡게 될 것이라는 보장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포라다다는 "왜 그는 필리핀 사제들에 대해 신경 쓰겠는가, 세상이 그들이 사악하고 희망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라고 무신경하게 질문했다. 이에 모욕감을 느낀 아글리파이는 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발언 철회를 요구했고, 겁에 질린 포라다다는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 사건의 목격자로는 레온 마리아 게레로와 호아킨 루나가 있었다. 그 후, 아글리파이는 회의에서 나와 문서를 내던졌다고 한다.
아글리파이는 예수회와의 첫 회의가 실패한 후 이미 새 교회에 합류하기로 결정했지만, 여전히 최고 주교 직을 수락하는 것을 꺼렸다. 그는 미국 개신교 지도자들을 만나 새로운 필리핀화된 교회에 도움을 주고 함께 할 것을 설득하여 "[로마] 가톨릭의 대열을 분열"시키려고 시도했다. 또한 필리핀 사제들이 새 교회의 성직자에서 더 높은 직급으로 임명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 개신교는 새로운 교회가 "그 의식에서 너무 로마적"이고 "그 신학에서 너무 합리주의적"이라고 판단하여 아글리파이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들은 또한 당시 필리핀 교회 지도자를 기꺼이 두려는 듯 보였는데, 이는 그들이 "우월감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회는 아글리파이가 새 교회에 합류하여 최고 주교 직을 수락한 지 여러 해가 지난 후, 더 외교적인 스페인 사제 호아킨 비야롱가를 통해 다시 협상하려 했다. 교황 비오 10세는 새로운 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온다면 아글리파이에게 사면을 허가하는 것을 승인했지만, 아글리파이는 이미 이글레시아 필리피나 인디펜디엔테를 계속 유지하려는 의지가 확고했다.[17]
1902년 10월 26일, 아글리파이는 ''사실상'' 최고 주교로서 첫 미사를 거행했다. 1903년 1월 18일, 아글리파이는 IFI 교회의 당시 이사벨라, 카가얀, 팡가시난, 아브라, 누에바 에시하, 카비테, 마닐라 주교들에 의해 마닐라에서 최고 주교로 서임되었다. 최고 주교로서 그는 당시 필리핀 민족주의 및 가장 급진적인 정치 단체인 삭달리스타와 동맹을 맺었고, 나중에는 사회주의 및 공산 당과도 동맹을 맺었다.[13][17]
해외 여행 중 다른 교회들을 방문하여 참석한 신학적 토론에서, 아글리파이는 나중에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고 주된 유일신론적 믿음을 신학적으로 수용했지만, 그의 교회에서 상당수는 그의 수정된 신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아글리파이의 유일신론적, 합리주의, 진보적 기독교 신학적 사상은 그의 "노베나", 즉 ''"Pagsisiyam sa Birhen sa Balintawak"''(1925)[18]와 그 영어 번역인 ''"Novenary of the Motherland"''(1926)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11][19]
1931년, 아글리파이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미드빌 신학 대학으로부터 신학 박사 (''명예 학위'') 학위를 받았다.
4. 3. 신학적 변화
1902년 전쟁이 끝난 후, 작가이자 활동가인 이사벨로 데 로스 레예스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독립된 민족주의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다. 당시 스페인 수사들은 미국의 점령 하에서도 전국 모든 교구를 통제하고 있었다. 8월 3일, 데 로스 레예스와 그의 노동 단체 ''Unión Obrera Democrática''는 교회 설립을 선포하고 부재 상태에서 아글리파이를 초대 수장 주교로 추천했다. 아글리파이는 파문당한 후에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처음에는 분열에 반대하여 주저했지만,[16] 결국 1902년 9월 6일에 데 로스 레예스의 제안을 수락하여 필리핀 독립 교회(공식 명칭 ''Iglesia Filipina Independiente'', IFI, "아글리파이 교회"라고도 함)의 초대 최고 주교(Obispo Máximo)로 임명되었다. 이 교회는 로마 가톨릭 예배 형태의 많은 부분을 유지했다.[10]테오도로 아곤실로에 따르면, 아글리파이는 스페인 예수회 사제이자 작가인 프란시스코 포라다다와의 대화가 실패한 후 새 교회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예수회는 아글리파이가 필리핀 성직자들에게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분열을 막기 위해 포라다다를 배정했다. 마닐라 산타 아나의 예수회 회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아글리파이에게는 그가 돌아온다면 많은 돈과 함께 주교 또는 대주교로 임명하겠다는 제안이 있었다고 한다. 아글리파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고해성사 서류에 서명할 예정이었지만, 필리핀 원주민 가톨릭 사제들의 문제가 해결되고 필리핀 성직자가 과거 스페인 정규군이 맡았던 직책을 맡게 될 것이라는 보장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포라다다는 "왜 그는 필리핀 사제들에 대해 신경 쓰겠는가, 세상이 그들이 사악하고 희망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라고 질문했다. 아글리파이는 포라다다의 무례한 발언에 모욕감을 느껴 그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발언을 철회하라고 요구했고, 겁에 질린 포라다다는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레온 마리아 게레로와 호아킨 루나가 이 사건의 목격자였다. 그 후, 아글리파이는 회의에서 나와 그 문서를 내던졌다고 한다.
아글리파이는 예수회와의 첫 회의가 실패한 후 이미 새 교회에 합류하기로 결정했지만, 최고 주교 직을 수락하는 것은 여전히 꺼렸다. 그는 미국 개신교 지도자들을 만나 "[로마] 가톨릭의 대열을 분열"시키기 위해 새로운 필리핀화된 교회에 도움을 주고 함께 할 것을 설득하려 했다. 또한 필리핀 사제들이 새 교회의 성직자에서 더 높은 직급으로 임명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 개신교는 새로운 교회가 "그 의식에서 너무 로마적"이고 "그 신학에서 너무 합리주의적"이라고 판단하여 아글리파이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예수회는 더 외교적인 스페인 사제 호아킨 비야롱가를 통해 아글리파이와 다시 협상하려 했다. 교황 비오 10세는 새로운 교회가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온다면 아글리파이에게 사면을 허가하는 것을 승인했지만, 아글리파이는 이미 이글레시아 필리피나 인디펜디엔테를 계속 유지하려는 의지가 확고했다.[17]
아글리파이는 1902년 10월 26일에 ''사실상'' 최고 주교로서 첫 미사를 거행했다. 1903년 1월 18일, 이사벨라, 카가얀, 팡가시난, 아브라, 누에바 에시하, 카비테, 마닐라의 주교들에 의해 마닐라에서 최고 주교로 서임되었다. 그는 필리핀 민족주의 및 삭달리스타와 같은 급진적인 정치 단체, 나중에는 사회주의 및 공산 당과도 동맹을 맺었다.[13][17]
해외 여행 중 다른 교회들을 방문하여 참석한 신학적 토론에서, 아글리파이는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고 유일신론적 믿음을 수용했지만, 그의 교회에서 상당수는 그의 수정된 신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아글리파이의 유일신론적, 합리주의, 진보적 기독교 신학 사상은 그의 "노베나"(''Pagsisiyam sa Birhen sa Balintawak'', 1925[18])와 영어 번역본 ''Novenary of the Motherland''(1926)에 잘 나타나 있다.[11][19]
아글리파이는 1931년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미드빌 신학 대학으로부터 신학 박사 (명예 학위) 학위를 받았다.
5. 정치 활동과 말년
아글리파이는 2009년과 2015년 감독교회 성인의 달력에 등재되었지만, 현재 그의 축일은 제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로코스 노르테 바탁시는 아글리파이의 서거일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9월 1일을 "그레고리오 L. 아글리파이의 날"로 지정하여 특별 비근무 공휴일로 기념하고 있으며, 이는 1989년 2월 10일 공화국 법률 제6701호로 제정되었다.[23]
5. 1. 대통령 선거 출마
아글리파이는 타이딩스-맥더피 법에 따라 필리핀 역사상 최초로 전국에서 치러진 1935년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공화당 소속 연방 후보였으며, 공산당 후보인 노르베르토 나봉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여 공화-공산당 연합 후보로 출마했다.[13] 하지만 국민당의 마누엘 L. 케손과 세르지오 오스메냐에게 패했다. 아글리파이는 필리핀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종교 지도자였다. 그는 선거 결과가 뚜렷해지자 선거 3일 후에 케손에게 축전을 보내고, 패배를 빠르게 인정했다.5. 2. 프리메이슨 활동
아글리파이는 기독교 지도자였지만, 다른 필리핀 혁명가들처럼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20] 스페인 프리메이슨 그랜드 마스터 미겔 모라이타가 아글리파이에게 직접 프리메이슨 가입을 권유했고, 1918년 5월 카비테에 있는 마그달로 로지 31에 입회했다. 1925년에는 프리메이슨 최고 계급에서 한 단계 낮은 32등급까지 올랐다.[21]5. 3. 결혼과 사망
아글리파이는 교회가 기혼 성직자를 허용했기 때문에, 1939년 이로코스 노르테 사라트 출신의 교사 필라르 하미아스 이 베르(당시 64세)와 결혼했으며, 페르난도 부이서 주교의 주례로 IFI 톤도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10] 그러나 그는 이듬해인 1940년 9월 1일 뇌출혈로 자연사하여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0] 당시 대통령 마누엘 L. 케손, 그의 내각, 그리고 대부분의 최고위 관리들이 아글리파이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의를 표했다.아글리파이는 수년 동안 사제 독신주의에 반대했지만, 79세가 되어서야 결혼했다.[10] 아글리파이와 하미아스는 결혼 26년 전인 1913년 2월 24일에 리윌리와라는 딸을 낳았다.[10] 그녀는 런던 합리주의자 협회의 필리핀 비서로 활동했으며, 해외 연락을 위해 아글리파이의 영어 편지를 번역하는 비서 역할을 했다.[10] 그녀는 필리핀 대학교에서 공부했다.[10] 리윌리와는 1938년 2월 17일, 25번째 생일 7일 전 또는 아글리파이와 하미아스의 결혼 13개월 전에 사망했다.[10] 그녀는 파사이 시립 묘지에 묻혔다.[10]
추종자들에게 ''아포 아글리파이''라고도 불리는 아글리파이는 사망할 때까지 최고 주교직을 맡았다.[22] 그의 유해는 이로코스 노르테 바탁에 있는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 국립 묘지인 성 마리아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22]
6. 유산과 평가
필리핀 독립 교회의 창립자이자 초대 최고 주교였던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는 프리메이슨 회원이기도 했다. 스페인 프리메이슨 그랜드 마스터였던 미겔 모라이타의 권유로 1918년 5월 카비테의 마그달로 로지 31에 입회하여 1925년에는 32등급까지 올랐다.[20][21]
아글리파이는 1935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공산당 후보 노르베르토 나봉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 공화-공산당 연합 후보로 나섰으나 국민당의 마누엘 L. 케손과 세르지오 오스메냐에게 패배했다.[13] 그는 선거 결과가 뚜렷해지자 3일 후 케손에게 축전을 보내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1939년 필라르 하미아스 이 베르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딸 리윌리와를 두었으나 1938년 먼저 사망했다. 아글리파이는 1940년 9월 1일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마누엘 L. 케손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인사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의 유해는 이로코스 노르테 바탁에 있는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 국립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22]
이로코스 노르테 바탁시는 그의 서거일인 9월 1일을 "그레고리오 L. 아글리파이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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