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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와급 방호순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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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니와급 방호순양함은 1880년대 일본 해군이 도입한 최초의 방호순양함으로, 2척(나니와, 다카치호)이 영국 암스트롱 휘트워스 사에서 건조되었다. 이 함선들은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 주요 해전에 참전했으며, 1번함 나니와는 1912년 좌초되었고, 2번함 다카치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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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와급 방호순양함 - [배(Ship)]에 관한 문서
개요
1893–1894년 호놀룰루 항구에 있는 나니와급 순양함 (오른쪽)
함급 명칭나니와급
함종방호순양함
건조 국가영국
운용 국가일본 제국
이전 함급이즈미급
이후 함급우네비급
건조 기간1884년–1885년
취역 기간1886년–1914년
총 건조 척수2척
총 손실 척수2척
건조 회사암스트롱 휘트워스
제원 (건조 당시)
배수량3,727 톤
전장97.5 m (전체 길이)
전폭14 m
흘수6.2 m (만재 시)
동력6 × 원통형 보일러
7,500 마력
추진2축, 2 × 복합팽창 증기 엔진
속력18 노트
항속 거리13 노트로 9,000 해리
승조원338–342명
무장
주포2 × 단장 26cm 포
부포6 × 단장 15cm 포
기타 무장2 × 단장 6파운드 (57mm) 포
10 × 4연장 1인치 포
4 × 10연장 11mm 포
어뢰 발사관4 × 14인치 어뢰 발사관
장갑
갑판51-76 mm
포방패51 mm
조타실76 mm
동형 함선
함선 목록나니와
다카치호

2. 역사적 배경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방된 후, 청나라는 조공 체제를 벗어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종은 외세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근대화를 추진했지만, 이는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이어졌다. 청나라는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조선을 다시 속국으로 만들었다.[2]

러시아 제국과 일본의 부상에 우려한 이홍장은 북양함대를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1880년 독일 제국으로부터 철갑함 2척을 주문했다.[4] 이에 일본 해군성은 1881년 제4차 해군 확장 계획 예산을 제출했지만, 과도한 비용으로 인해 거부되었다. 이후 유럽 조선소에서 기존 군함을 구매하려 했지만, 칠레볼리비아, 페루 간의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무방호 순양함 쓰쿠시를 칠레에서 구매하는 데 그쳤다.[5]

일본은 1883년 초에 승인된 제5차 해군 확장 계획을 통해 철갑함 1척과 방호순양함 1척 건조 비용을 포함시켰지만, 윌리엄 화이트의 권고에 따라 칠레의 방호순양함 에스메랄다(후에 이즈미로 개명)의 개선된 두 버전을 건조하기로 결정했다.[5] '에스메랄다'는 조지 렌델이 설계한 최초의 "엘스윅"형 방호순양함으로, 고속, 강력한 무장, 장갑 보호, 비교적 저렴한 비용이 특징이었다.[6]

일본의 사소 사추는 암스트롱 휘트워스에 일본의 요구 사항에 맞춰 '에스메랄다' 설계를 수정해 줄 것을 요청했고, 1883년도 예산에 따라 '나니와'와 '다카치호' 두 척의 함선이 주문되었다.

2. 1. 조선 개방과 임오군란 (1876년 ~ 1882년)

1876년 강화도 조약미국이 가나가와 조약 체결을 강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조선을 강제로 개방시켰고,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조공 체제 지위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났다.[1] 당시 청나라는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않았고, 고종은 외세의 압력에 더 잘 견딜 수 있도록 국가를 근대화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군대와 민간에서 보수적인 요소들이 동요했고,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이어져 폭도들이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여 외교관들이 영국 배와 왕궁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조선을 다시 속국으로 만들어 이전의 형식적인 조공국 지위로 복귀시키지 않았다.[2]

러시아 제국과 일본의 부상하는 힘에 대해 우려한 이홍장은 직례성 총독으로서 러시아, 한국, 일본과의 관계를 담당했다.[3] 일본 해군성은 임오군란 이후 유럽 조선소에서 기존 군함을 구매하려 했지만, 칠레와 볼리비아, 페루 간의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건조업체가 인도를 금지하여 무방호 순양함을 칠레에서 구매하는 데 그쳤다. 그 후 비용 절감 협상을 거쳐 1883년 초에 승인된 제5차 해군 확장 계획을 제안했다. 이 계획에는 1척의 철갑함과 1척의 방호 순양함 건조 비용이 포함되었지만, 전자의 설계는 지나치게 고가인 것으로 드러났고, 일본 제국 해군은 암스트롱 미첼의 수석 해군 건축가인 윌리엄 화이트의 권고에 따라 칠레의 선구적인 방호 순양함(후에 일본 제국 해군이 구매하여 ''이즈미''로 개명)의 개선된 두 버전을 건조하기로 결정했다.[5]

2. 2. 일본의 해군력 증강 (1880년대)

나니와급 방호순양함은 1883년도 함정 확장 계획에 따라 영국에 발주되었다. 윌리엄 화이트가 설계를 하고, 암스트롱 휘트워스 사의 로우 워커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이른바 ‘엘스윅’ 크루저이며, 세계 최초의 방호순양함 ‘에스메랄다’ (이후 ‘이즈미’)의 우수성에 주목하여 일본 해군이 발주한 최초의 방호순양함이다. 설계는 ‘에스메랄다’의 개량형이며, 예를 들어 방호갑판은 ‘에스메랄다’가 수평부 1인치를 갖춘데 반해 나니와급은 2인치로 강화되었다. 주포도 준전함급의 구경 크루프 사의 35구경 26cm포 단장포 2기 갖추고 있었으며, 강력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1]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개방시켰고,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조공 체제에서 벗어났다.[1] 고종은 외세에 맞서 국가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이어져 폭도들이 일본 공사관을 공격했다.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해 반란을 진압하고 조선을 다시 속국으로 만들었다.[2]

러시아 제국과 일본의 부상에 우려한 이홍장은 북양함대를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880년 독일 제국으로부터 철갑함 2척을 주문한 것은 이 프로그램의 정점이었다.[4]

이에 일본 해군성은 1881년 제4차 해군 확장 계획 예산을 제출했지만, 과도한 비용으로 인해 거부되었다. 이후 임오군란 이후 유럽 조선소에서 기존 군함을 구매하려 했지만, 칠레볼리비아, 페루 간의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무방호 순양함 '쓰쿠시'를 칠레에서 구매하는 데 그쳤다. 그 후 1883년 초에 승인된 제5차 해군 확장 계획을 제안했다. 이 계획에는 철갑함 1척과 방호순양함 1척 건조 비용이 포함되었지만, 일본 제국 해군은 윌리엄 화이트의 권고에 따라 칠레의 '에스메랄다'(후에 '이즈미'로 개명)의 개선된 두 버전을 건조하기로 결정했다.[5]

'에스메랄다'는 조지 렌델이 설계한 최초의 "엘스윅"형 방호순양함이다. 이는 고속, 강력한 무장, 장갑 보호,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인해 일본에게 매우 중요했다.[6]

일본의 사소 사추는 암스트롱 휘트워스에 일본의 요구 사항에 맞춰 '에스메랄다' 설계를 수정해 줄 것을 요청했고, 1883년도 예산에 따라 '나니와'와 '다카치호' 두 척의 함선이 주문되었다. '나니와'는 세계에서 가장 진보되고 강력한 순양함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분야의 조선 기술, 무기 및 장갑의 극도로 빠른 발전으로 인해 이 설계의 우위는 매우 짧았다.

두 척의 순양함 건조 비용은 총 546980GBP였다. 야마시나 기쿠마로 친왕이 진수에 참석했고, 윌리엄 암스트롱 남작과 만찬을 함께 하며, "이 배는 우리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와 충돌할 가능성이 없는 국가를 위해 봉사할 운명"이라고 건배했다.

2. 3. 엘스윅 순양함과 나니와급

1883년(메이지 시대) 일본이 함정 확장 계획에 따라 영국에 발주하였다. 윌리엄 화이트가 설계를 맡았고, 암스트롱 휘트워스사의 로우 워커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이른바 '엘스윅' 순양함이며, 세계 최초의 방호순양함인 '에스메랄다'(이후 '이즈미')의 우수성에 주목하여 일본 해군이 발주한 최초의 방호순양함이다. '에스메랄다'의 개량형으로 설계되었으며, 방호갑판은 '에스메랄다'가 수평부 1인치(25.4mm)였던 것에 비해 나니와급은 2인치(50.8mm)로 강화되었다. 주포 또한 준전함급 구경인 크루프사의 35구경 26cm포 단장포 2기를 갖추어 강력한 화력을 보유했다.[5]

3. 설계 및 제원

나니와급은 뱃전이 높은 평갑판형 선체에 충각이 있는 함수를 가지고 있었다. 함수 갑판 위에는 35구경 260mm 크루프포를 단장 포탑에 장착하고 장전 기구를 방호판으로 덮은 노포탑 1기를 배치했다. 그 뒤쪽 정상부에는 감시대를 갖춘 밀리터리 마스트가 있었고, 사령탑을 넣은 상자형 함교 뒤쪽에는 1개의 연돌이 있었다. 밀리터리 마스트는 상부 또는 중간에 가벼운 방어 망대를 배치하고, 거기에 37mm ~ 47mm급 기관포(속사포)를 배치했다. 이것은 당시 어뢰정의 기습 공격을 요격하기 위해 멀리서 감시할 수 있는 높은 곳에 대 수뢰 공격용 속사포 또는 기관포를 둔 것이다. 나니와급도 전후의 파수대에 43구경 호치키스 47mm 기포를 단장 포가에 3개씩 총 6개를 배치했다.

1888년 브래시 해군 연감(Brassey's Naval Annual)에 실린 평면도 및 우현 종단면도


연돌 주위는 연통형 통풍구가 늘어선 함재정 배치 장소였으며, 2개 1조의 보트 다비드로 운용되었다. 현측 갑판에는 부포인 15cm (35구경) 포가 방순이 붙은 단장 포가로 현측마다 3개씩 총 6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함재정 차고 뒤쪽에는 바닥에 크레인이 붙는 후방 밀리터리 마스트가 있었고, 그 뒤쪽 선미 갑판에 2번 주포탑이 배치되었다.

나니와급의 구식 크루프식 주포와 부포는 청일 전쟁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암스트롱식 15.2cm 단장 속사포로 교체되었다. 1895년 ~ 1898년 사이에 부포인 크루프식 15cm (149.1mm) 포가 암스트롱식 40구경 15.2cm (152mm) 속사포로 교체되었다. 1900년부터 1902년 사이에 주포인 크루프식 26cm 포도 암스트롱식 (40구경 또는 45구경의 두 가지 설이 있음) 15.2cm 속사포로 교체되었다. 나니와는 구레 해군공창에서, 다카치호는 요코스카 해군공창에서 개조되었다.

선체 주요 갑판의 수평부는 50.8mm, 현측에 접하는 경사부는 76.2mm 장갑이 부착되었으며, 현측 장갑 대신 석탄고를 설치하여 적탄이나 침수를 석탄으로 막는 방어 방식을 채택했다. 선체 중앙부에는 석탄 전용 원통형 보일러가 1실당 3기씩 병렬로 배치되어 전후 2실에 6기를 배치했고, 후방의 2단 팽창식 2기통 레시프로 기관을 2기 2축 추진으로 최대 출력 7,604마력에 18노트의 속력을 발휘했다.

나니와급 군함은 정상 배수량 약 3786807.17kg이었다. 수선간 길이 약 91.44m, 전장 약 97.54m, 선폭 약 14.02m, 흘수 약 6.10m였다.[7] 수선 아래에는 연강으로 된 쟁기 모양의 함수를 장착했고,[8] 전방 및 후방 탄약고 사이에 부분적인 이중 선저를 가지고 있었다.[7]

이 군함들은 수평형, 2기통, 2중 팽창 증기 기관 한 쌍으로 구동되었으며, 각 기관은 4.27m 3엽 프로펠러 1개를 구동했다. 이 프로펠러는 6.3atm 압력에서 작동하는 6개의 원통형 보일러에서 생성된 증기를 사용했다. 이 엔진은 강제 통풍으로 총 7500ihp을 생산하도록 설계되어 최대 18kn를 낼 수 있었다. 속도 시험에서 순양함은 7235ihp에서 7604ihp의 속도에 도달했다. 최대 약 812837.60kg의 석탄을 탑재하여 13kn의 속도로 약 9000nmi의 항속 거리를 가졌다.[9] 이 군함의 승무원은 장교 338~342명과 수병으로 구성되었다.[7]

건조 당시 나니와급 순양함의 주포는 35-구경 260mm 엘스윅 병기 회사(Elswick Ordnance Company)의 28톤 포 2문으로, 바벳에 설치되었으며 상부 구조물 전후에 위치했다. 각 바벳은 후방에 고정된 장전소를 갖추고 있었으며, 포는 재장전을 위해 이 위치로 돌아와야 했다. 포당 200발의 탄약이 저장되었다.[7]

부포는 처음에는 반원형 돌출부에 장착된 35구경 150mm 크루프 포 6문으로 구성되었으며, 포당 450발의 탄약을 가지고 있었다.[7] 이 모든 포는 포 방패로 보호되었다. 어뢰정에 대한 방어는 6문의 QF 6 파운더 호치키스 포, 10문의 1인치 노르덴펠트 포 및 4문의 11mm, 10연발 노르덴펠트 포로 제공되었다. 또한 주갑판에는 4문의 356mm 화이트헤드 어뢰 발사관이 장착되었다.[9] 청일 전쟁 이후, ''나니와''와 ''다카치호''는 안정성을 높이고 함대에 대한 탄약을 표준화하기 위해 8문의 엘스윅 QF 6 인치 /40 해군포로 재무장되었다.

3. 1. 선체 및 기관

나니와급의 선체 형상은 뱃전이 높은 평갑판형 선체에 충각이 있는 함수 갑판 위에 35구경 260mm 크루프 포를 단장포탑에 장전 기구를 방호판으로 덮은 노포탑에 1기 탑재하고, 그 정상부에 감시대를 설치한 밀리터리 마스트가 있다. 사령탑을 포함한 상자형 함교 후부에 1개의 연돌이 있다. 밀리터리 마스트는 마스트의 상부 또는 중간에 경방어 전망대를 배치하고, 거기에 37mm ~ 47mm급 기관포(속사포)를 배치했다. 이것은 당시 어뢰정의 기습 공격을 요격하기 위해 멀리까지 감시할 수 있는 높은 곳에 대 수뢰 공격용 속사포 또는 기관포를 설치한 데서 시작되었다. 형태는 다르지만 이 시대 열강 각국의 대형 함정에 많이 사용된 양식으로, 나니와급도 전후 전망소에 43구경 호치키스 47mm 기포를 단장 포좌에 3기씩 총 6기를 배치했다. 연돌 주변은 연통형 통풍구가 늘어선 함재정 배치 장소이며, 2개 1조의 보트 다비드로 운용되었다. 현측 갑판에는 등간격으로 부포인 15cm(35구경)포가 방순이 달린 단장 포좌로 현측 3기씩 총 6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함재정 배치 장소 후부에는 기부에 크레인이 달린 후부 밀리터리 마스트가 있고, 그 뒤 후부 갑판 위에 2번 주포탑이 배치되었다.

나니와급의 구식 크루프식 주포와 부포는 청일 전쟁러일 전쟁 기간 동안 암스트롱식 15.2cm 단장 속사포로 교체되었다. 먼저 1895년 ~ 1898년 사이에 부포의 크루프식 15cm(149.1mm)포가 암스트롱식 40구경 15.2cm(152mm) 속사포로 교체되었다. 그 후 1900년부터 1902년 사이에 주포의 크루프식 26cm포도 암스트롱식(40구경 또는 45구경이라는 2가지 설이 있음) 15.2cm 속사포로 교체되었다. 나니와는 구레 해군공창에서, 다카치호는 요코스카 해군공창에서 개장되었다.

선체는 주 갑판은 수평부가 50.8mm 장갑, 현측에 접하는 경사부는 76.2mm 장갑이 부착되었으며, 현측 장갑 대신 석탄고를 설치하여 적탄이나 침수를 석탄으로 막는 방어 양식을 채택했다. 선체 중앙부에는 석탄 전용 원통형 보일러가 1실당 3기씩 병렬로 배치되어 전후 2실에 6기를 배치했고, 후부의 2단 팽창식 2기통 레시프로 기관을 2기 2축 추진으로 최대 출력 7,604마력으로 속도 18노트를 발휘했다.

나니와급 군함은 정상 배수량 약 3786807.17kg이었다. 이들은 수선간 길이 약 91.44m 및 전장 약 97.54m, 선폭 약 14.02m, 흘수 약 6.10m을 가졌다.[7] 이들은 수선 아래에 연강으로 된 쟁기 모양의 함수를 장착했고,[8] 전방 및 후방 탄약고 사이에 부분적인 이중 선저를 가지고 있었다.[7]

이 군함들은 수평형, 2기통, 2중 팽창 증기 기관 한 쌍으로 구동되었으며, 각 기관은 4.27m 3엽 프로펠러 1개를 구동했다. 이 프로펠러는 6.3atm 압력에서 작동하는 6개의 원통형 보일러에서 생성된 증기를 사용했다. 이 엔진은 강제 통풍으로 총 7500ihp을 생산하도록 설계되어 최대 속도 18kn를 낼 수 있었다. 속도 시험에서 순양함은 7235ihp에서 7604ihp의 속도에 도달했다. 최대 약 812837.60kg의 석탄을 탑재하여 13kn의 속도로 약 9000nmi의 항속 거리를 가졌다.[9] 이 군함의 승무원은 장교 338~342명과 수병으로 구성되었다.[7]

건조 당시, 나니와급 순양함의 주포는 35-구경 260mm 엘스윅 병기 회사(Elswick Ordnance Company)의 28톤 포 2문으로 구성되어 바벳에 설치되었으며, 상부 구조물 전후에 위치했다. 각 바벳은 후방에 고정된 장전소를 갖추고 있었으며, 포는 재장전을 위해 이 위치로 돌아와야 했다. 포당 200발의 탄약이 저장되었다.[7]

부포는 처음에는 반원형 돌출부에 장착된 35-구경 150mm 크루프 포 6문으로 구성되었으며, 포당 450발의 탄약을 가지고 있었다.[7] 이 모든 포는 포 방패로 날씨로부터 보호되었다. 어뢰정에 대한 방어는 6문의 QF 6 파운더 호치키스 포, 10문의 1인치 노르덴펠트 포 및 4문의 11-mm, 10-연발 노르덴펠트 포로 제공되었다. 또한, 주갑판에는 4문의 356mm 화이트헤드 어뢰 발사관이 장착되었다.[9] 청일 전쟁 이후, 나니와와 다카치호는 안정성을 높이고 함대에 대한 탄약을 표준화하기 위해 8문의 엘스윅 QF 6 인치 /40 해군포로 재무장되었다.

3. 2. 무장

나니와급 방호순양함의 초기 무장은 뱃전이 높은 평갑판형 선체에 함수 갑판 위에 35구경 260mm 크루프포를 단장포에 장전 기구를 방호판으로 가려 노포탑을 하나 넣은 형태였다.[7] 그 배후 정상부에 감시대를 마련한 밀리터리 마스트가 있었고, 사령탑을 넣은 상자형 함교 뒤쪽에 1개의 연돌이 있었다. 밀리터리 마스트의 상부 또는 중간에는 가볍게 방어 망대를 배치하고 37mm ~ 47mm급 기관포(속사포)를 배치했다. 이는 당시 어뢰정의 기습 공격을 요격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나니와급은 전후의 파수대에 43구경 호치키스 470mm 기계포가 단장포 차체에 3개씩 총 6개가 배치되었다.[9]

현측 갑판에는 부포인 15cm (35구경) 포가 방순 붙은 단장 포가로 한쪽 현측에 3개씩 총 6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함재 보트 차고 뒤쪽에는 바닥에 크레인이 붙는 후방 밀리터리 마스트가 서고 그 뒤에 선미 갑판에 2번 주포탑이 배치되었다.

청일 전쟁러일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나니와급의 구식 크루프 주포와 부포는 암스트롱식 15.2cm 단장 속사포로 바뀌었다. 1895년 ~ 1898년 사이에 부포의 크루프식 15cm (149.1mm) 포가 암스트롱식 40구경 15.2cm (152mm) 속사포로 교체되었다. 1900년부터 1902년 사이에 주포의 크루프 26cm 포도 암스트롱식 (40구경 또는 45구경 2가지 설이 있음) 15.2cm 속사포로 교체되었다. 나니와는 구레 해군공창에서, 타카치호는 요코스카 해군공창에서 개조되었다.

건조 당시, ''나니와''급 순양함의 주포는 35-구경 엘스윅 병기 회사(Elswick Ordnance Company)의 28톤 포 2문으로 구성되어 바벳에 설치되었으며, 상부 구조물 전후에 위치했다. 각 바벳은 후방에 고정된 장전소를 갖추고 있었으며, 포는 재장전을 위해 이 위치로 돌아와야 했다. 포당 200발의 탄약이 저장되었다.[7]

부포는 처음에는 반원형 돌출부에 장착된 35구경 크루프 포 6문으로 구성되었으며, 포당 450발의 탄약을 가지고 있었다.[7] 이 모든 포는 포 방패로 날씨로부터 보호되었다. 어뢰정에 대한 방어는 6문의 QF 6 파운더 호치키스 포, 10문의 1인치 노르덴펠트 포 및 4문의 11-mm, 10연발 노르덴펠트 포로 제공되었다. 또한, 주갑판에는 4문의 화이트헤드 어뢰 발사관이 장착되었다.[9] 청일 전쟁 이후, ''나니와''와 ''다카치호''는 안정성을 높이고 함대에 대한 탄약을 표준화하기 위해 8문의 엘스윅 QF 6 인치 /40 해군포로 재무장되었다.

3. 3. 방호

나니와급 방호순양함의 선체는 뱃전이 높은 평갑판형이었다. 함수에는 충각이 있고, 함수 갑판 위에는 크루프 26cm(35구경)포를 단장 포탑에 장착하고 장갑으로 덮은 노포탑 1기를 배치했다. 그 뒤에는 전망소를 설치한 밀리터리 마스트가 있으며, 사령탑을 포함한 상자형 함교 후부에 연돌 1개가 있다. 밀리터리 마스트는 상부 또는 중간에 경방어 전망대를 두고, 37mm ~ 47mm급 기관포(속사포)를 배치했다. 이는 어뢰정의 기습 공격을 요격하기 위해 원거리 감시가 가능한 높은 곳에 대수뢰 공격용 속사포 또는 기관포를 설치한 것이다. 당대 열강 각국의 대형 함정에 많이 사용된 방식으로, 나니와급도 전후 전망소에 호치키스 4.7cm(43구경) 기관포를 단장 포좌에 3기씩 총 6기를 배치했다. 연돌 주변은 연통형 통풍구가 늘어선 함재정 배치 장소이며, 보트 다비드 2개 1조로 운용되었다. 현측 갑판에는 부포 15cm(35구경)포가 방순이 달린 단장 포좌로 현측에 3기씩 총 6기가 배치되었다. 함재정 배치 장소 뒤쪽에는 크레인이 달린 후방 밀리터리 마스트가 있고, 후방 갑판 위에 2번 주포탑이 배치되었다.

청일 전쟁러일 전쟁 기간 동안 나니와급의 구식 크루프식 주포와 부포는 모두 암스트롱식 15.2cm 단장 속사포로 교체되었다. 1895년~1898년 사이 부포인 크루프식 15cm(149.1mm)포가 암스트롱식 40구경 15.2cm(152mm) 속사포로 교체되었다. 이후 1900년부터 1902년 사이에는 주포인 크루프식 26cm포도 암스트롱식(40구경 또는 45구경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음) 15.2cm 속사포로 교체되었다. 나니와는 구레 해군공창에서, 다카치호는 요코스카 해군공창에서 개장되었다.

선체의 주 갑판은 수평부 50.8mm, 현측에 접하는 경사부는 76.2mm 장갑이 부착되었으며, 현측 장갑 대신 석탄고를 설치하여 적탄이나 침수를 석탄으로 막는 방어 방식을 채택했다. 선체 중앙부에는 석탄 전용 원통형 보일러가 1실당 3기씩 병렬 배치되어 전후 2실에 6기가 배치되었고, 후방의 2단 팽창식 2기통 레시프로 기관 2기, 2축 추진으로 최대 출력 7,604마력, 속도 18노트를 발휘했다.

4. 운용

나니와일본어와 타카치호일본어청일 전쟁러일 전쟁에 참전했다. 청일 전쟁에서는 황해 해전을 시작으로 따롄, 뤼순, 웨이하이웨이 등의 공략 작전에 참가했다.[10] 특히 나니와일본어풍도 해전과 압록강 해전에서 활약했고, 타카치호일본어는 압록강 해전에 참가했다.[10]

러일 전쟁에서 두 순양함은 쓰시마 해전 등 여러 해전에 참가했다. 나니와일본어제물포 해전에 참가했으나 이후 예비 역할로 배정되었고, 1912년에 좌초로 손실되었다.[10] 다카치호일본어제물포 해전에 참가한 후 예비 역할로 배정되었다.[10]

제1차 세계 대전 중, 나니와일본어는 1910년 7월 26일 쿠릴 열도 우루프섬 해안에서 좌초되어 손실되었다.[10] 다카치호일본어칭다오 침공을 지원하던 중, 1914년 10월 14일 독일 어뢰정 S90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10]

4. 1. 청일 전쟁 (1894년 ~ 1895년)

나니와일본어와 타카치호일본어청일 전쟁에서 황해 해전을 시작으로 따롄, 뤼순, 웨이하이웨이 등의 공략 작전에 참가했다.[10] 1883년에 발주, 1885년 3월 18일 진수, 1885년 12월 1일에 완공된 ‘나니와’는 청일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풍도 해전과 압록강 해전에서 활약했다.[10] 1883년에 발주, 1885년 5월 16일 진수, 1885년 12월 1일 완공된 ‘다카치호’는 청일 전쟁의 압록강 해전에 참가했다.[10]

4. 2. 러일 전쟁 (1904년 ~ 1905년)

나니와급 방호순양함 2척은 모두 1904년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쓰시마 해전 등 여러 해전에 참가했다. 나니와러일 전쟁 개전 초기 제물포 해전에 참가했으나 이후 예비 역할로 배정되었고, 1912년에 좌초로 손실되었다.[10] 다카치호해방함 국적에 편입되었으며, 제물포 해전에 참가했으나 이후 예비 역할로 배정되었다.[10]

4. 3. 제1차 세계 대전과 최후

나니와일본어는 1883년에 발주, 1885년 3월 18일에 진수, 1885년 12월 1일에 완공되었다. 청일 전쟁에서 풍도 해전, 압록강 해전 등에서 활약했다. 러일 전쟁에서는 제물포 해전에 참가한 후 예비 역할로 배정되었다. 1910년 7월 26일, 쿠릴 열도 우루프섬 해안에서 좌초되어 손실되었다.[10]

다카치호일본어는 1883년에 발주, 1885년 5월 16일에 진수, 1885년 12월 1일에 완공되었다. 청일 전쟁에서 압록강 해전에 참가했다. 러일 전쟁에서는 제물포 해전에 참가한 후 예비 역할로 배정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칭다오 침공을 지원하던 중, 1914년 10월 14일 독일 어뢰정 S90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 장교와 병사 271명이 사망했다.[10]

5. 동형함

함명진수일취역일운명
나니와1885년 3월 18일1885년 12월 1일1910년 7월 26일 쿠릴 열도 우루프섬 해안에서 좌초 후 손실[10]
다카치호1885년 5월 16일1885년 12월 1일제1차 세계 대전 중 칭다오 침공 지원 중 1914년 10월 14일 독일 어뢰정 S90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10]



두 척 모두 영국 암스트롱 휘트워스에서 구매했다. 나니와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에 손실되었고, 다카치호는 적대 행위가 시작된 직후 손실되었다.[10] 나니와청일 전쟁에서 풍도 해전과 압록강 해전 등에서 활약했고, 러일 전쟁에서는 제물포 해전에 참가했다.[10] 다카치호청일 전쟁의 압록강 해전에 참가했고, 러일 전쟁에서는 제물포 해전에 참가했다.[10]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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