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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르 키르치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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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아르헨티나의 정치인으로, 1950년 리오가예고스에서 태어나 라플라타 국립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는 변호사, 리오가예고스 시장, 산타크루스 주지사를 거쳐 2003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제43대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경제 회복과 인권 개선을 추진했으며, 2007년 퇴임 후에는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의 대통령 당선을 지원했다. 그는 '키르치네르주의'라는 정치 이념을 남겼으며, 2010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러나 재임 중 재산 증가, 부패 혐의 등 여러 비판과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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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르 키르치네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직함아르헨티나의 제55대 대통령
재임 시작2003년 5월 25일
재임 종료2007년 12월 10일
배우자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1975년 결혼)
출생일1950년 2월 25일
사망일2010년 10월 27일 (향년 60세)
출생지산타크루스 주 리오 가예고스
사망지산타크루스 주 엘 칼라파테
안장 장소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영묘, 리오 가예고스
2005년의 키르치네르 대통령
키르치네르 대통령 (2005년)
추가 직책
제1 배우자 (영부인/영구)2007년 12월 10일 ~ 2010년 10월 27일
대통령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후임훌리아나 아와다 (2015년, 영부인으로서)
남미 국가 연합 사무총장2010년 5월 4일 ~ 2010년 10월 27일
선임(사무총장직 신설)
후임마리아 엠마 메히아 벨레스
국가 하원 의원2009년 12월 10일 ~ 2010년 10월 27일
선거구부에노스 아이레스
정의당 대표2009년 11월 11일 ~ 2010년 10월 27일
선임다니엘 시올리
후임다니엘 시올리
정의당 대표2008년 4월 25일 ~ 2009년 6월 29일
선임라몬 루이스
후임다니엘 시올리
헌법 개정 회의 의원1994년 5월 1일 ~ 1994년 8월 22일
선거구산타크루스 주
산타크루스 주지사1991년 12월 10일 ~ 2003년 5월 25일
부지사에두아르도 아르놀드 (1991–1999)
엑토르 이카수리아가 (1999–2003)
선임리카르도 델 발
후임엑토르 이카수리아가
리오 가예고스 시장1987년 12월 10일 ~ 1991년 12월 10일
선임호르헤 마르셀로 세페르니크
후임알프레도 안셀모 마르티네스
정치 경력
소속 정당정의당
기타 소속승리를 위한 전선 (2003–2010)
학력라 플라타 국립 대학교
직업변호사
가족 관계
자녀2명 (장남: 막시모)

2.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생애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1950년 2월 25일 아르헨티나 남부 파타고니아 지역의 산타크루스 주 리오가예고스에서 태어났다. 라플라타 국립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페론주의 학생 운동에 참여했고, 대학 시절 만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와 1975년 결혼했다.

1976년 대학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군사독재정부(1976~1983년) 시기에는 정치 활동을 이유로 당국에 체포되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리오가예고스 시장을 거쳐, 1991년부터 2003년 대통령 당선 직전까지 세 차례 연속 산타크루스 주지사를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역시 2001년 연방 상원의원에 선출되며 아르헨티나의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2. 1. 초기 생애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1950년 2월 25일, 당시 연방 영토였던 아르헨티나 남부 파타고니아 지역의 산타크루스 주 리오가예고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는 독일-스위스계였고, 어머니 마리아 후아나 오스토이치는 칠레 출신의 크로아티아계였다. 부모는 전신을 통해 만나 결혼했으며, 네스토르, 알리시아, 마리아 크리스티나 세 자녀를 두었다. 네스토르는 리오가예고스에 정착한 키르치네르 가문의 3세대였다. 어린 시절 백일해를 앓은 후 사시가 생겼으나, 이를 자신의 자아상의 일부로 여겨 치료를 거부했다.[5] 고등학교 시절 잠시 교사를 꿈꿨지만 발음 문제로 포기했으며, 농구 선수로도 성공하지 못했다.[5]

1969년 라플라타로 이주하여 라플라타 국립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은 아르헨티나 혁명의 쇠퇴, 망명에서 돌아온 전 대통령 후안 페론, 엑토르 캄포라의 짧은 대통령직, 페론의 재선, 그리고 더러운 전쟁의 시작 등 정치적 혼란기였다. 키르치네르는 페론주의 계열 학생 조직인 국립 혁명 대학교 연맹(FURN)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나, 지도자는 아니었다.[6] 그는 우익 페론주의자들이 후안 페론의 귀환을 축하하는 군중에게 발포한 에세이사 학살 현장과, 페론이 몬토네로스를 플라사 데 마요에서 추방한 사건 현장에도 있었다. 키르치네르는 몬토네로스 조직원들과 교류했지만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고[7], 몬토네로스가 페론에 의해 불법화될 무렵 FURN을 떠났다.

1974년, 키르치네르는 3살 연하였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만나 빠르게 가까워졌고, 당시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만난 지 6개월 만인 1975년에 결혼했다. 시민 결혼식에서는 친구들이 페론주의 노래인 "Los Muchachos Peronistas"를 불렀다. 1976년 대학을 졸업한 후, 크리스티나와 함께 고향 파타고니아로 돌아가[6] 동료 변호사 도밍고 오르티스 데 사라테와 로펌을 설립했다. 크리스티나는 1979년에 로펌에 합류했다.[8]

키르치네르와 다른 지역 정치인들의 흑백 사진
키르치네르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국가 재조직 과정으로 정치 활동이 허용된 후 열린 정치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키르치네르가 파타고니아로 이주할 무렵, 후안 페론이 사망하고 부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나, 1976년 군사 쿠데타로 실각하고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이 군사독재정부(1976~1983년) 시절, 키르치네르는 정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당국에 체포되기도 했다. 키르치네르 부부의 로펌은 아르헨티나 중앙 은행의 1050호 규정으로 인해 주택 담보 대출 이자율이 급등하자 압류를 신청한 은행 및 금융 그룹을 위해 일했으며[8], 경매 직전의 부동산 21개를 저렴한 가격에 매입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의 로펌은 '더러운 전쟁' 중 범죄 혐의를 받는 군인들을 변호하기도 했다. '더러운 전쟁' 당시 강제 실종이 빈번했음에도, 키르치네르 부부는 당시 다른 변호사들과 달리 ''인신 보호 영장'' 청구서에 서명한 적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9] 1985년 군사 정권 재판의 검사였던 훌리오 세사르 스트라세라는 키르치네르 부부가 군부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을 비판하며, 이후 그들이 보인 관심은 위선적이라고 평가했다.[9]

'더러운 전쟁'이 끝나고 국가 재조직 과정 하에서 민주주의 복귀를 위한 정치 활동이 허용되자, 키르치네르는 지역 정의당 (PJ) 내 세 개의 파벌 중 하나를 이끌었으나, 예비 선거에서 페론주의자 아르투로 푸리첼리에게 패배했다. 그는 폐위된 이사벨 페론을 지지하고 군부와의 정치적 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아테네오 후안 도밍고 페론' 기구를 설립했다. 급진 시민 연합 (UCR)의 라울 알폰신 후보가 군부와 페론주의 노조 간의 사면 협정을 비난했을 때, 키르치네르는 알폰신이 언급한 노조 지도자 로돌포 폰세를 위해 집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1983년 선거에서 알폰신이 대통령으로, 푸리첼리가 산타크루스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푸리첼리는 지역 페론주의 운동 통합을 위해 키르치네르를 지방 사회 복지 기금 회장으로 임명했다.

키르치네르는 사회 복지 기금 회장으로서 자신의 활동 범위를 빠르게 확장하며 영향력을 키웠고, 이는 곧 푸리첼리 주지사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해고되기 전에 스스로 사임하며 주지사가 사회 복지 기금을 삭감했다고 비난했다. 1987년, 키르치네르는 산타 크루스 주 리오 갈레고스 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단 110표 차이로 승리했다. 이 과정에서 친구인 루디 울로아 이고르가 일부 칠레 이민자들(시장 선거 투표권 보유)을 등록시키고 키르치네르에게 투표하도록 설득하는 등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 훌리오 데 비도와 카를로스 자니니가 키르치네르와 함께 일하기 시작했으며, 키르치네르는 국영 미디어를 활용해 자신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1987년 주지사로 선출된 페론주의자 리카르도 델 발이 1990년 인플레이션 위기로 인해 탄핵될 때, 키르치네르는 그의 주요 정치적 반대자였다.[10]

2. 2. 대학 시절과 페론주의

키르치네르는 1970년대 초 라플라타 국립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 그는 페론주의 이념을 따르는 페론당 청년 조직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특히 1966년부터 1973년까지 이어진 군사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1974년에는 같은 대학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2. 3. 결혼과 변호사 활동

라플라타 국립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시절 페론주의 계열의 학생조직에서 활동했으며, 1974년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1976년 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인 리오가예고스로 돌아와 변호사로 활동했다. 군사독재정부(1976~1983년) 시절에는 정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당국에 체포되기도 했다.

2. 4. 정치 입문

라플라타 국립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시절 페론주의 학생 운동에 참여하며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군사독재정부(1976~1983년) 시기에는 정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83년 군사독재정부가 물러나고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고향인 산타크루스 주 정부의 사회 보장 부서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84년, 주 정부의 재정 정책에 반대하며 갈등을 빚었고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는 그의 소신 있는 정치 성향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후 1987년에는 고향 리오가예고스의 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1991년에는 산타크루스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하며 본격적인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주지사 시절, 당시 대통령이던 같은 페론당 소속 카를로스 메넴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차별화된 정치 노선을 걸었다.

3. 산타크루스 주지사

1983년 민주주의 회복 후 주 정부 사회 보장 부서 책임자를 맡았으나, 1984년 주 정부와의 재정 정책 이견으로 해임되었다. 그러나 1987년 리오가예고스 시장으로 당선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1991년 산타크루스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30%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UCR 후보의 36%보다 낮았지만, 같은 페론주의 진영 후보였던 푸리첼리의 표를 합산하는 '레마법' 덕분에 당선될 수 있었다.[11]

키르치네르가 주지사로 취임했을 당시, 산타크루스 주는 높은 실업률과 12억아르헨티나 페소에 달하는 재정 적자로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는 당시 시행되던 환율 고정 계획으로 인해 같은 액수의 미국 달러와 맞먹는 규모였다. 그는 주의 재정 재건보다는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자극책을 중시했으며, 인플레이션과 재정 적자, 높은 실업률을 개선하는 데 성공하여 주목받았다. 또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급진적인 입장을 보였다.

주지사로서 그는 주 대법원 판사 수를 3명에서 5명으로 늘리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 3명을 판사로 임명하여 사법부를 장악했다는 비판을 받았다.[12] 또한, 일부 부패 사건 조사를 방해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12] 1993년 산타크루스 주는 석유 채굴 로열티로 5.35억아르헨티나 페소를 받았고, 키르치네르는 이 자금을 해외 은행에 예치했다.[13]

당시 대통령은 같은 페론당 소속의 카를로스 메넴이었지만, 키르치네르는 메넴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1994년 메넴 대통령이 추진한 아르헨티나 헌법 개정을 위한 제헌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대통령의 재선을 허용하는 조항에는 반대표를 던졌다. 하지만 정작 산타크루스 주에서는 주지사의 무제한 연임을 허용하는 내용의 주 헌법 개정을 추진하기도 했다.[14]

1995년 키르치네르는 산타크루스 주지사로 재선되었고, 메넴 대통령과의 대립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메넴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페론당 내 파벌을 조직했지만, 당시에는 인구가 많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주지사였던 에두아르도 두알데가 당내에서 메넴에 대한 더 강력한 반대 세력을 이끌었다.[14] 1998년, 헌법을 개정하여 3선에 도전하려던 메넴의 시도를 당내 투쟁을 통해 저지하고, 두알데를 페론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데 기여했다.

키르치네르 행정부 동안 산타크루스 주의 공무원 수는 12,000명에서 70,000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대부분의 일자리는 공공 사업을 통해 창출되었으나, 민간 부문에서는 새로운 일자리가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민간 기업들이 주를 떠나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사실상 경제적 자유를 제한하여 키르치네르가 주민 통제를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였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15]

1999년 키르치네르는 산타크루스 주지사 3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같은 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페론당의 두알데 후보는 급진 시민 연합페르난도 데 라 루아에게 패배하여 정권을 내주었다. 키르치네르 자신은 산타크루스 주에서 UCR의 지지율 상승에도 불구하고 주지사직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16]

4. 2003년 대통령 선거

2001년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로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이 퇴진한 후, 페론당 소속의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가 임시 대통령이 되었으나 일주일 만에 사임했고, 이어서 에두아르도 두알데가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었다.

2003년 대통령 선거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 치러졌다. 특히 페론당은 내부 분열로 인해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 산타크루스 주지사였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그리고 잠시 임시 대통령을 지냈던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까지 총 3명의 후보를 내는 이례적인 상황을 맞았다. 여기에 급진시민연합에서 탈당한 리카르도 로페스 무르피, 급진 좌파 성향의 엘리사 카리오 등이 주요 후보로 나서면서 5파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키르치네르는 전국적인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에두아르도 두알데 임시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승리를 위한 전선 후보로 출마했다.[90] 그는 이전부터 같은 페론당 소속이었던 메넴 전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4월 27일에 치러진 1차 투표 결과, 과거 집권기의 경제 정책 등으로 인해 국민적 반감이 컸던[90] 카를로스 메넴이 약 24.5%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키르치네르는 4,313,131표를 얻어 22.25%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했다.[92] 아르헨티나 선거법에 따라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1, 2위 후보 간의 결선 투표가 치러져야 했다.

그러나 결선 투표를 앞두고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키르치네르가 메넴을 압도적인 차이로 앞설 것으로 예상되자, 메넴은 지지율을 더 이상 끌어올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결선 투표 출마를 포기했다.[90] 이에 따라 결선 투표는 무산되었고, 키르치네르가 자동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키르치네르가 1차 투표에서 얻은 22.25%의 득표율은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낮은 득표율로 기록되었다.[90][92] 그는 2003년 5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했다.[90]

5. 대통령 재임 (2003-2007)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낮은 지명도에도 불구하고 핵심 페론주의자인 에두아르도 두알데 전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2003년 대선에서 승리했으며, 같은 해 5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의 정부는 2001~2002년 아르헨티나 사상 가장 혹독했던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주력했다. 이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에서 벗어나 국내 경제 회복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 2003년 이후 연평균 9%대의 높은 GDP 성장률을 기록하며 아르헨티나 경제를 회생시켰다. 또한, 군정 시대의 인권 침해 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브라질, 베네수엘라, 쿠바 등 라틴 아메리카 좌파 정권들과의 연대를 강화했다.

초기에는 정치적 후원자였던 두알데와 협력했으나, 점차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하며 두알데와 거리를 두었고, 2005년 중간선거에서는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내세워 두알데 측과 경쟁하여 승리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했다.

이러한 경제 회복 성과와 인권 문제 해결 노력 등에 힘입어, 키르치네르는 야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2007년 12월 퇴임할 때까지 55%가 넘는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다.[90] 그는 2007년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고, 대신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승리를 위한 전선 후보로 출마하여 45%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세계 최초로 부부가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연속으로 대통령에 선출되는 기록을 세웠다.[90]

5. 1. 초기 정책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중앙)는 2003년 대통령 취임식에서


2003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는 페론당(PJ) 내에서 카를로스 메넴,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 세 후보가 경쟁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여기에 UCR에서 탈당한 리카르도 로페스 무르피, 급진 좌파 엘리사 카리오까지 가세해 5명의 유력 후보가 경쟁했다. 1차 투표에서는 메넴이 약 24%로 1위를 차지했으나, 2위 키르치네르와의 표 차이는 근소했다. 메넴은 과거 경제 혼란의 책임자로 지목되어 국민적 반감이 컸고, 결선 투표에서 추가 득표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이로써 키르치네르의 당선이 확정되었다. 그는 낮은 지명도에도 불구하고 핵심 페론주의자인 에두아르도 두알데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대선에서 승리했다.[90]

2003년 5월 25일, 키르치네르는 아르헨티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전통적인 취임 장소인 카사 로사다 대신 아르헨티나 국회 의사당에서 취임식이 열렸으며, 그는 정치,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변화를 이끌겠다고 선언했다. 취임식에는 지방 주지사들, 훌리오 나사레노 대법원장, 군 수뇌부, 그리고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등이 참석했으며, 전직 대통령 중에서는 라울 알폰신만이 유일하게 참석했다. 키르치네르는 5월 대로를 따라 카사 로사다까지 걸어가면서 국민에게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의전을 깨뜨리기도 했다.[20]

취임 당시 낮은 득표율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키르치네르는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단순히 PJ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에서 정치적 동맹을 구했다. 급진 K(Radicales K)는 UCR 내부에서 그를 지지했다. 여러 정당에 손을 내미는 이러한 관행은 "횡단주의"(Transversalidad)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성 체제에 반하는 이미지"를 내세우며, 키르치네르는 아르헨티나에 "정치적 쇄신의 감각"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그는 두알데 내각의 4명의 구성원을 유임시켰다. 경제 회복의 공로를 인정받은 로베르토 라바냐 경제부 장관은 키르치네르가 이전 행정부에서 수립한 경제 정책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유임되었다.[21] 기네스 곤살레스 가르시아는 보건부 장관으로 남았다. 아니발 페르난데스는 내무부로, 호세 팜푸로는 국방부로 옮겨졌다.[22] 키르치네르는 산타 크루스 주지사 시절부터 자신의 내각에서 4명의 구성원을 데려왔다. 그의 정치 캠페인을 조직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는 각료 수석으로 임명되었다. 세르지오 아세베도는 정보 담당으로 임명되었다. 훌리오 데 비도는 연방 기획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그의 주 정부 시절 직위와 유사했다. 친척 임명이 아르헨티나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키르치네르가 그의 여동생 알리시아를 사회 개발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21] 외무부 장관 라파엘 비엘사는 또 다른 정당인 FREPASO 출신이었다.[23]

아르헨티나 사법부는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재임 이후 인기가 없었는데, 그의 사법 임명은 대부분 충성심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법부는 "자동 다수"로 알려졌다.[24] 키르치네르는 가장 논란이 많은 판사들을 해임하려 했고, 사임한 대법원장 훌리오 나사레노의 탄핵을 조직했다.[24] 아돌포 바스케스 판사도 개인적인 이유를 들어 탄핵 전에 사임했다.[25] 에두아르도 몰리네 오코너 판사와 기예르모 로페스 판사도 비슷한 상황에서 사임했다.[24][26] 공석은 대중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고, 키르치네르의 인기를 높였다.[24]

그는 판사를 임명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마련했다. 단순히 새로운 판사 후보를 의회에 제안하는 대신, 대통령은 먼저 여러 잠재적 후보의 이름을 공개했고, 이 후보들은 여러 비정부 기구의 평가를 받았다. 이 기구들은 후보가 판사로서 적합한지 평가했다. 아르헨티나 법무인권부는 모든 지지와 비판을 종합했고, 대통령은 이전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최종 결정을 내리는 의회에 어떤 후보를 제안할지 결정했다.[27] 전 FREPASO 정치인이었던 라울 사파로니가 새로운 시스템 하에서 첫 번째 사법 임명이었다.[28] 그 뒤를 이어 대법원에 임명된 최초의 여성인 엘레나 히톤 데 놀라스코가 임명되었다. 카르멘 아르기바이 (또 다른 여성 판사)의 임명은 논란이 되었는데, 아르기바이는 무신론자였고 낙태법 지지자였기 때문이다.[29] 판사들은 악셀 블룸베르그 살해 사건 이후 더욱 가혹하고 피해자 중심적인 정책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반하여 형사 사법에 대한 진보적인 견해를 가졌다. 그러나 새 대법원은 정부가 유리하지 않은 모든 판결을 무시했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

키르치네르는 곧 두알데와 거리를 두며, 전 대통령의 측근들을 정부에서 내쫓아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줄이려 했다. 또한 그는 당 내에서 두알데의 영향력에 대항하기 위해 사회 및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서 지지자들을 모색했다. 두알데는 처음에는 키르치네르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키르치네르는 PJ 내에 다른 지도자들의 등장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2003년 10월 총선거에서 갈등을 봉합했다. 그들의 분쟁은 부에노스아이레스주(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전국 득표율의 거의 40%를 차지한다)의 정치적 비중으로 촉발되었으며, 2005년 중간선거까지 이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주 상원의원 후보에 대한 PJ 내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두 지도자는 각각 아내를 출마시켰다. 힐다 곤살레스 데 두알데는 PJ 소속으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는 다른 정당으로 선거에 참여한 승리를 위한 전선 소속으로 출마했다.[39]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가 선거에서 승리했다.[40] 2003년과 마찬가지로, 선거는 페론주의 진영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야당들은 단일한 전국 전선을 구축할 수 없었다. 이 승리로 키르치네르는 라바냐, 라파엘 비엘사, 호세 팜푸로, 알리시아 키르치네르를 내각에서 해임하고, 덜 유명하지만 자신의 관점과 더 가까운 장관들로 교체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41]

출신 정당인 페론당은 좌익 정당은 아니지만, 당선 후의 정책은 좌파적 색채가 강했고, 메넴 이후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전환했다. 또한, 대외 채무 변제보다 국내 경제 회복을 우선시하는 경제·재정 운영을 했다. 그 때문에 국제 통화 기금이나 신자유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파산 상태에 있던 경제·재정을 단기간에 회복시켜 2002년 경제 성장률 -10.9%에서, 03년 8.7%, 04년 9.0%로 급격한 회복을 이루었고, 물가 상승률도 2002년 25.9%에서 03년 13.5%, 04년 4.4%로 급락, 실업률도 개선되면서 경제 운영은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 사이에서의 인기도 매우 높았다.[90]

또한, 민정 복귀 후 역대 정권이 애매한 태도를 유지해 온 군정 시대의 인권 침해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반정부파 시민의 살해 등에 관여한 군인들의 소추를 진행했다. 외교적으로도 브라질의 룰라 정권, 베네수엘라차베스 정권, 쿠바카스트로 정권과의 연계를 강화했다. 특히 브라질·베네수엘라 간에는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에 합의했다.

5. 2. 경제 정책

Kirchner and a bespectacled Roberto Lavagna poring over a paper
키르치네르와 로베르토 라바냐(임기 대부분 동안 경제부 장관을 역임)


키르치네르 정부는 2001년에서 2002년 사이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극심했던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메넴 정부 이후 추진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경제 정책의 핵심은 로베르토 라바냐 경제부 장관과 함께 추진한 무역 및 재정 흑자 유지, 그리고 미국 달러 대비 높은 환율 유지였다. 이러한 흑자는 이전 정부에서 부과된 세금과 두알데 행정부 시기의 평가절하 덕분에 가능했다.[30]

키르치네르는 아르헨티나 산업 기반, 공공 사업, 공공 서비스 재건을 추진했으며, 메넴 정부 시절 민영화되어 외국 기업이 소유하고 있던 공공 서비스의 운영 조건을 재협상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책은 빈곤층에 대한 연민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적 수사와 함께 진행되었다. 그 결과, 2003년 이후 아르헨티나 경제는 연평균 8~9%대의 높은 GDP 성장률을 기록하며 회생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가 상승률 역시 2002년 25.9%에서 2004년 4.4%로 크게 안정되었고 실업률도 개선되었다. 그러나 재정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빈곤 인구는 크게 감소하지 않았으며, 이는 국가 인구의 거의 25%에 해당하는 800만에서 1,000만 명 수준이었다.

심각한 문제였던 국가 부채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키르치네르와 라바냐는 2005년 아르헨티나 부채 재조정 협상을 통해 기존 부채의 3분의 1 수준으로 삭감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국제 통화 기금(IMF)이 요구하는 구조 조정 프로그램을 거부하고, 대신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를 사용하여 IMF에 대한 부채 전액을 일시불로 상환했다.[33] 이러한 조치는 IMF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경제 정책을 추진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키르치네르 임기 동안의 경제 성장이 전적으로 그의 정책 덕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을 비롯한 주요 수출품의 국제 가격 상승 등 아르헨티나에 유리한 국제적 환경이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는 분석이 있다. 반면, 키르치네르 정부의 적극적인 국내 수요 진작 정책이 성장의 주요 동력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31]

키르치네르의 경제 정책은 몇 가지 문제점과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IMF,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들에 대한 비판적 태도, 프랑스 기업 수에즈가 관리하던 수자원 공급 시스템의 재국유화 추진,[32] 외교적 고립, 국가 개입주의 강화 등은 외국인 투자를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에너지 부문에서는 투자 부족으로 인해 에너지 매장량이 감소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라바냐 경제부 장관은 경제 성장 속도를 조절하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지만, 키르치네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경제적 불평등 완화를 목표로 임금 인상을 장려하고[41] 실업 보험 및 기타 사회 복지 제도를 확대했다. 대중교통, 전기, 가스, 수도 등 공공 서비스 요금과 식품 가격 안정을 위해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했다. 이러한 정책은 경제 활동을 활성화하는 효과가 있었지만, 동시에 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키고 해당 분야에 대한 민간 투자를 위축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결국 인플레이션 통제에 어려움을 겪자, 정부가 아르헨티나 국립 통계 및 인구 조사 연구소(INDEC)에 압력을 넣어 실제보다 낮은 인플레이션율과 빈곤율을 발표하도록 했다는 비판과 의혹이 제기되었다. 또한, 경제 위기 시기에 도입되어 대통령에게 의회 감독 하에 예산을 재조정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한 이른바 '초강대국 법'을 2006년에 영구화하여 행정부의 권한을 강화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경제 정책 방향을 둘러싼 이견과 갈등은 경제팀의 변화로 이어졌다. 라바냐 장관은 2005년 중간 선거 출마를 거부하고 훌리오 데 비도 연방 계획부 장관이 관리하는 공공 사업의 예산 과다 책정 문제를 비판한 후 키르치네르에 의해 사실상 경질되었다. 부채 재조정을 담당했던 재무 비서관 기예르모 닐센도 함께 사임했다. 후임으로는 아르헨티나 국립 은행 총재였던 펠리사 미첼리가 임명되었으나, 2007년 사무실에서 발견된 거액의 현금 가방 스캔들로 인해 사임했다. 이후 산업 비서관이었던 미겔 구스타보 페이라노가 경제부 장관직을 이어받았다.[33][34]

키르치네르는 노동계와의 관계에도 신경을 썼다. 파업과 시위를 줄이기 위해 아르헨티나 노동자 중앙 연합(CTA)과 상대적으로 온건한 성향의 실업자 운동 조직인 ''피케테로'' 지도부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도로 점거 등 과격한 시위 방식으로 비판받던 ''피케테로''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폭력 사태를 우려하여 강경 진압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5. 3. 외교 정책

키르치네르는 아르헨티나 외교 정책에 있어 실용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으며, 1990년대 카를로스 메넴 정부 시절 유지되었던 아르헨티나-미국 관계의 특별 관계를 더는 유지하지 않았다. 당시 라파엘 비엘사 외무장관은 양국 관계를 메넴 시대의 "육체적 관계"와 대조하며 "동거 없는 협력"이라고 표현했다. 키르치네르는 유엔에서 테러 자체에는 반대하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37] 또한 미국 국방부 장관 도널드 럼즈펠드의 면담 요청을 거부하기도 했다.

키르치네르는 미국 주도의 미주 자유 무역 지대(FTAA) 창설 제안에 반대했는데, 이는 FTAA가 미주 국가 간 다수결 원칙에 기반한 반면, 그는 비례 대표제 방식을 선호하여 메르코수르 블록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35] 2005년 아르헨티나 마르델플라타에서 열린 제4차 미주 정상회의는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에 대한 격렬한 반대 시위 속에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고, 결국 FTAA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져 실현되지 못했다.[36]

웃으며 편안한 복장을 하고 손을 잡고 있는 세 남자
키르치네르와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 그리고 브라질 대통령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가 2006년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대신 키르치네르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의 통합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그는 메르코수르 무역 블록을 되살리고 강화하려 했으며, 브라질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했다.[38] 그러나 남미의 지역 강국인 브라질과 무조건적인 동맹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키르치네르는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을 다소 보수적이라고,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지나치게 반미주의적이라고 평가하며 양국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룰라, 차베스를 비롯해 칠레의 리카르도 라고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등 당시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좌파 성향 대통령들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특히 브라질, 베네수엘라와는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에 합의하기도 했다. 국제 평화 유지 활동의 일환으로 아이티 주둔 유엔 안정화 임무에 병력을 파견하기도 했다.

5. 4. 인권 정책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과거 국가 재조직 과정 시기 자행된 인권 침해 문제, 즉 더러운 전쟁을 해결되지 않은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부터 국가 재조직 과정과 관련된 군인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인권 단체들을 지지했으며, 군 최고 수뇌부에게 퇴진을 명령했다.

Kirchner overseeing the removal of pictures
키르치네르가 국가 재조직 과정과 관련된 국립 군사 대학에서 군 초상화를 제거하는 것을 감독하고 있다.


키르치네르 정부는 더러운 전쟁 관련 군인들의 재판을 막았던 '전면 중단법'(Ley de Punto Final)과 '복종 의무법'(Ley de Obediencia Debida)을 무효화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 법들은 이미 1998년에 폐지되었으나, 법적으로 사건을 다시 열기 위해서는 무효화 선언이 필요했다. 비록 일부 반대가 있었지만, 2003년 8월 의회는 두 법을 무효화했고, 이는 과거 인권 침해 사건들에 대한 재수사를 가능하게 했다. 이후 대법원은 2005년에 이 법들과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시절 이루어졌던 관련자 사면 조치가 위헌이라고 최종 판결했다. 이로 인해 많은 관련 군 인사들에 대한 재판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2006년, 미겔 에체콜라츠 전 경찰 간부 재판의 핵심 증인이었던 호르헤 훌리오 로페스가 실종되는 사건(호르헤 훌리오 로페스 실종 사건)이 발생하면서 전국적인 논란이 일었다. 이는 증인들에 대한 협박 시도라는 의혹과 함께 정부의 보호 능력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키르치네르는 또한 범죄인 인도 정책을 변경하여, 아르헨티나에서는 기소되지 않았지만 해외에서 인권 침해 혐의로 기소된 인물들의 신병 인도를 허용했다. 더불어 인권 단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과거 악명 높았던 비밀 구금 시설들을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관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지원했다. 아르헨티나는 2003년 유엔(UN)의 전쟁 범죄 및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법적 시효의 불적용에 관한 협약에 서명했다. 법원은 이 협약을 창의적으로 해석하여 수십 년 전에 발생한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적용을 피하고, 범죄 발생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법의 ''사후 적용'' 논란을 피해갈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키르치네르 정부는 5월 광장 어머니회와 같은 인권 단체들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 5월 광장 어머니회는 키르치네르를 이전 대통령들과 달리 '적이 아닌 인물'로 평가하며 2006년 마지막 정기 시위를 열었고, 이후 정부의 중요한 정치적 파트너이자 강력한 비정부 기구로 자리매김했다. 키르치네르는 공식 석상에서 이들을 예우했으며, 더러운 전쟁 당시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던 닐다 가레를 아르헨티나 최초의 여성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상징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키르치네르의 인권 정책은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비판론자들은 그가 군사 정권의 인권 탄압만을 부각하고, 당시 활동했던 좌익 게릴라 조직(예: ERP)의 폭력 행위는 의도적으로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정부는 아술의 군부대 습격 사건 30주년이나 라 타블라다 막사 공격 15주년과 같은 게릴라 관련 사건 기념일을 외면했다. 로젠도 프라가와 같은 분석가들은 키르치네르가 더러운 전쟁 시기 테러 조직의 존재 자체를 축소하려 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2006년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조직 내부에서 처형된 게릴라 대원들까지 '국가 테러'의 희생자로 재분류되어 유족들이 국가 보상을 받게 되었지만, 게릴라 활동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보상 대상에서 제외되어 형평성 논란이 일었다. 언론인 세페리노 레아토는 키르치네르가 군부와 게릴라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기존의 '두 악마의 이론'을 폐기하고, 오직 군부만을 악마화하는 '천사와 악마의 이론'을 내세우려 했다고 비판했다.

5. 5. 2005년 중간 선거와 두알데와의 결별

키르치네르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정치적 후원자였던 에두아르도 두알데 전 대통령과 점차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두알데 측근들을 정부 요직에서 배제하며 두알데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고, 페론주의 정당 내에서 두알데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다양한 정치 세력으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노력했다. 처음에는 키르치네르에게 직접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던 두알데였지만, 키르치네르가 당내 다른 경쟁 지도자들의 부상을 견제하면서 둘 사이의 긴장감은 높아졌다.

2003년 총선거에서는 일시적으로 갈등을 봉합했지만,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전국 득표율의 약 40%를 차지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주의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되었다. 이 갈등은 2005년 중간선거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주 상원의원 후보를 놓고 정의당(PJ) 내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하자, 두 지도자는 결국 각자의 아내를 후보로 내세우며 정면으로 맞붙었다. 두알데는 부인 힐다 곤살레스 데 두알데를 정의당 후보로, 키르치네르는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자신이 이끄는 별도의 정당인 승리를 위한 전선 후보로 출마시켰다.[39]

선거 결과,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가 승리하며[40]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강화되었다. 2003년 선거와 마찬가지로 이번 선거 역시 페론주의 진영 내부의 경쟁으로 귀결되었고, 야당은 통합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이 승리를 바탕으로 키르치네르는 자신의 정책 방향에 비판적이거나 거리를 두었던 로베르토 라바냐 경제부 장관, 라파엘 비엘사 외교부 장관, 호세 팜푸로 국방부 장관, 그리고 자신의 누나인 알리시아 키르치네르 사회개발부 장관 등을 내각에서 경질했다. 대신 그는 덜 알려졌지만 자신과 정치적 노선을 같이하는 인물들로 내각을 채우며 국정 장악력을 높였다.[41]

6. 퇴임 이후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재선에 도전하지 않고, 대신 부인인 상원의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를 후보로 내세웠다. 일부 언론은 키르치네르가 임기 제한 규정을 피해 부인과 역할을 바꿔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고 분석했다.[50][73][76]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는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고,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영부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50]

퇴임 후에도 키르치네르는 집권당 대표를 맡아 국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막후 실권자로 여겨졌다.[73] 그는 부인 크리스티나의 임기 동안 경제 정책을 감독하고 정의당을 이끄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73] 이들 부부의 정치적 관계는 후안과 에바 페론, 또는 힐러리 클린턴 부부에 비견되기도 했다.[50]

키르치네르가 실패한 엠마누엘 작전 이후 아르헨티나로 귀국하고 있다.


2007년 12월, 키르치네르는 콜롬비아에서 진행된 엠마누엘 작전에 참여하여 FARC에 억류된 인질 석방을 시도했으나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52][53] 인질들은 약 1년 뒤 콜롬비아 군의 자케 작전을 통해 구출되었다.[54]

2008년 정부와 농업 부문의 갈등 당시,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정부는 농산물 수출세를 인상하는 새로운 누진세 시스템을 도입하려 했다. 당시 정의당 의장이었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이 정책을 적극 지지하며, 농업 부문이 사실상 ''쿠데타''를 시도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55][56] 그는 세금 인상 법안 통과를 위해 아르헨티나 국회 의사당 앞에서 열린 시위에서 연설하기도 했다.[57] 그러나 상원 표결에서 찬반 동수가 나왔고, 부통령이자 상원 의장인 훌리오 코보스가 반대 표를 던져 법안은 부결되었다.[58]

2009년 6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키르치네르가 이끄는 승리를 위한 전선은 주요 지역에서 패배하며 하원 과반수를 잃었다. 키르치네르 본인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 PRO 연합의 프란시스코 데 나르바에스에게 패배했으나, 비례대표 의원으로 하원에 입성했다.[59] 선거 패배 후 그는 당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선거 패배의 원인으로는 높은 인플레이션, 범죄율 증가, 그리고 농업 부문과의 갈등으로 인한 지지층 이탈 등이 꼽혔다.[59] 키르치네르 부부는 선거 후 레임덕 세션 기간 동안 논란이 많았던 언론법 개정을 추진하여 통과시켰다.[60] 정부는 이 법이 언론사의 독과점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이 법이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61]

국장을 위해 대통령 관저의 "라틴 아메리카 200년 역사 속 영웅들의 방"에 안치된 키르치네르의 관.


2010년 5월 4일, 키르치네르는 남미 국가 연합(UNASUR)의 초대 사무총장으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이전에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간의 펄프 공장 분쟁으로 인해 우루과이가 그의 지명을 반대했으나, 분쟁이 해결되고 새로운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카가 지지하면서 선출될 수 있었다.[62] 사무총장으로서 그는 2010년 콜롬비아-베네수엘라 외교 위기를 성공적으로 중재하는 등 국제 무대에서도 활동했다.[63]

키르치네르의 관 앞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대통령과 우고 모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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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지만, 키르치네르는 심장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2010년 한 해에만 두 차례(2월 경동맥 수술, 9월 혈관 성형술) 심장 관련 수술을 받았다.[74][75] 그는 평소 자신의 건강 문제를 심각하지 않게 이야기했기에,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많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2010년 10월 27일, 아르헨티나 국립 인구 조사가 실시되던 공휴일에 고향인 산타 크루스 주 엘 칼라파테의 자택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전 9시 15분에 사망 선고를 받았다.[73][89] 향년 60세였다.

키르치네르의 시신은 카사 로사다(대통령궁)로 옮겨져 국장이 거행되었고, 3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되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민들이 조문 행렬에 동참했으며, 시간당 약 1,000명의 조문객이 대통령궁을 찾았다. 검은 상복 차림의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관 옆을 지켰고, 조문객들이 가져온 촛불, 깃발, 꽃 등을 직접 받기도 했다.[76] 그의 장례식에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 등 다수의 남미 국가 정상들이 참석하여 애도를 표했다.[76] 국제 사회에서도 애도의 메시지가 이어졌으며, 브라질과 베네수엘라는 3일간의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고,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도 조의를 표했다.[75] 장례 절차 후 그의 시신은 고향인 리오 가예고스로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7. 키르치네르주의와 유산

연단에 서서 검지 손가락을 치켜든 키르치네르
연설하는 키르치네르


키르치네르는 종종 좌익이자 진보적인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4] 문화 평론가 알레한드로 카우프만은 그를 "아르헨티나 사회 민주주의자: 중도 좌파 페론주의자"이자 "중도 진보적" 플랫폼으로 선출된 인물로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상대적이다. 그는 라울 알폰신에서 에두아르도 두알데까지의 이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이나 현대 브라질 대통령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보다는 좌측에 있었지만, 우고 차베스피델 카스트로와 같은 다른 라틴 아메리카 지도자들보다는 우측에 위치했다. 키르치네르의 포클랜드 제도 영유권 분쟁에 대한 민족주의적 접근은 우파 성향에 가까웠으며, 그는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시절 사유화된 생산 수단의 사회화나 공공 서비스의 국유화 같은 급진적인 좌파 정책은 추진하지 않았다. 또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바꾸거나 군대 규모를 줄이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의 경제관은 석유, 가스, 어류, 관광 자원이 풍부하고 1차 산업 중심인 산타크루스 주지사 경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장기적인 정책 노선을 고수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좌우를 넘나드는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

페론주의자인 키르치네르는 전통적인 페론주의 지도자들처럼 정치 권력을 다루었다. 그는 종종 다른 정치 세력이나 사회 세력과의 대립 구도를 만들고 여론의 양극화를 활용했는데, 이는 그의 정치 스타일의 특징이 되었다. 이 전략은 금융 부문, 군대와 경찰, 외국, 국제 기구, 언론, 그리고 에두아르도 두알데 자신을 상대로 사용되어 다양한 성공을 거두었다. 키르치네르는 경박하다고 여겨진 전 대통령 카를로스 메넴이나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은 페르난도 데 라 루아와 대조적으로, 자신을 진지하고 단호한 지도자로 보이게 하려 노력했다.

그는 정치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려 했으며, 국가 예산을 변경할 수 있는 대통령의 재량권을 부여하는 비상 초권법을 정기적으로 갱신했다. 정의당(PJ)의 선거 연합 형태로 구상된 승리를 위한 전선은 PJ, 다른 정당의 친키르치네르 파벌, 소수 좌익 정당들의 정치 동맹이 되었다. 진보주의 성향의 유권자들도 급진 시민 연합(UCR)이 위기로 신뢰를 잃고 지도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 새로운 연합을 지지했다. 대부분의 페론주의자들은 자연스럽게 새 정당으로 이동했고, 경제 위기 극복과 국가 재정에 대한 재량적 통제력을 바탕으로 키르치네르는 동맹을 규합하고 경쟁자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의회는 정부에 순응하게 되었고, 야당은 정부에 대한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키르치네르는 권력 집중 외에도 대부분의 정부 업무를 직접 세세하게 관리하거나, 내각 직위와 관계없이 신뢰하는 측근에게 맡겼다. 예를 들어, 미국 및 브라질과의 관계는 직접 관리했지만, 볼리비아 및 베네수엘라와의 관계는 연방 기획부 장관 훌리오 데 비도에게 위임했다. 키르치네르 재임 기간에는 내각 회의가 열리지 않았는데, 이는 인구가 적은 산타크루스 주지사 시절의 경험(내각이 거의 불필요하고 주지사가 대부분의 결정을 내리는 환경)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키르치네르는 국내 정책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면 양자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65] 이로 인해 2004년 칠레에 대한 가스 수출을 줄였고, 칠레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계획된 펄프 공장의 환경 영향 문제로 우루과이와 갈등했으며, 브라질과도 무역 분쟁을 겪었다.[65][64] 그는 재임 중 베트남 국가주석 쩐 득 르엉을 포함한 여러 세계 지도자들과 만났다.[65][66]

키르치네르는 사형제에 확고히 반대했으며, 사담 후세인의 처형 이후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후세인이 저지른 범죄를 인정하면서도 사형 자체를 비난하며 사형제 폐지를 주장했다.[67]



키르치네르의 건강 문제는 알려져 있었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르헨티나 정치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과거 마누엘 킨타나, 로케 사엔스 페냐, 로베르토 마리아 오르티스 대통령도 재임 중 사망했지만, 키르치네르만큼의 정치적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다. 후안 페론 대통령은 비슷한 권력을 가졌고 재임 중 사망했지만, 당시 평균 수명에 가까웠기에 그의 죽음은 예상 밖의 일은 아니었다. 호세 데 산 마르틴,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 카를로스 페예그리니, 이폴리토 이리고옌 등 아르헨티나 역사상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다른 인물들은 대부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거나 해외에서 사망했다.

키르치네르의 죽음은 초기에 권력 공백을 야기했다. 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가 대통령직을 수행했지만, 실질적인 정부 운영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맡고 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후, 크리스티나는 정부 스타일을 더욱 권위주의적으로 바꾸고, 미국에 대해 더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남편의 동맹이었던 우고 모야노와 같은 노조 지도자들과 거리를 두는 대신, 청년 조직인 라 캄포라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 또한 남편보다 자신의 대중적 이미지에 더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네스토르의 사망 당시 키르치네르 부부의 인기는 하락세였으나, 남편의 죽음 이후 크리스티나의 인기는 크게 상승했다. 이는 그녀가 2011년 아르헨티나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배경이 되었다.

키르치네르주의 진영, 소위 '렐라토 K'는 키르치네르를 중심으로 한 개인 숭배를 구축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는 재임 기간 동안 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기보다, 종종 대문자로 표기되는 대명사 "그(Él)" 또는 "그분"으로 지칭했는데, 이는 스페인어에서 일반적으로 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키르치네르는 또한 국가 영웅의 반열에 올리기 위해 호세 데 산 마르틴과 비교되기도 했다. 이러한 비교는 예를 들어 사회 복지부의 공식 영상에도 등장했다.[78] 그의 사망 한 달 후, 많은 지역에서 거리, 학교, 지역, 기관 등의 이름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로 변경했다. 대표적인 예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문화 센터(구 "건국 200주년 문화 센터")와 2010–11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시즌의 후반기 리그 명칭이 있다. 이러한 명칭 변경은 일부 도시에서 논란을 낳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칼레타 올리비아에서는 변경된 거리 이름이 이전에 포클랜드 전쟁 참전 용사들의 이름을 딴 것이었기 때문이다.[79] 미시오네스 주 아포스톨레스에서는 키르치네르의 이름을 딴 거리 명칭 변경 법안이 거부되기도 했다.[79]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사망 후 최소 10년이 지난 인물의 이름만 거리명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기존 법률 때문에 명칭 변경 법안이 고려되지 않았다.[79]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은 2016년, 사망 후 최소 20년이 지나지 않은 인물의 이름을 따서 공공장소나 기관의 이름을 짓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키르치네르의 이름을 딴 모든 국유 재산의 명칭이 변경될 수 있다.[80]

8. 비판과 논란

키르치네르 부부의 순자산 증가를 나타내는 그래프
키르치네르 부부의 순자산


스칸스카 사건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 재임 기간에 발생한 부패 스캔들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훌리오 데 비도 기획부 장관을 포함한 여러 관료들이 파이프라인 건설 입찰과 관련하여 뇌물을 수수한 혐의를 받았다. 이는 건설 회사 스칸스카 직원들이 뇌물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이 담긴 녹취록을 근거로 했다. 이 사건은 2011년, 녹음 내용을 증거로 채택할 수 없고 가격 부풀리기도 없었다는 판결로 종결되었으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인 2016년에 다시 수사가 시작되어 녹음 내용이 증거로 채택되었다.[68]

아르헨티나 연방 세입청(AFIP)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키르치네르 부부의 순자산은 1995년부터 2010년까지 15년 동안 4,500%나 증가했다. 특히 2008년에는 오랫동안 보유했던 토지를 매각하고 호텔 임대 수입, 아르헨티나 페소 및 미국 달러 정기 예금 등으로 인해 자산이 2650만아르헨티나 페소에서 6350만아르헨티나 페소로 크게 늘어났다. 키르치네르 부부는 비즈니스 컨설팅 회사인 엘 채플(El Chapel)을 설립하고, 엘 칼라파테에 있는 고급 호텔을 관리하기 위해 호테수르(Hotesur SA)와 로스 사우세스(Los Sauces)라는 회사를 세웠다. 또한, 부부가 90%의 지분을 가진 코마사(Comasa)라는 회사도 확장했다. 이들의 정치인으로서의 급여는 전체 수입의 3.62%에 불과했다.

키르치네르는 2004년에 부당 이득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며, 이 재판은 1995년부터 2003년까지 그의 재산 증가에 초점을 맞췄다. 처음에는 후안 호세 가레아노 판사가 사건을 맡았으나, 이후 훌리안 에르콜리니 판사에게 넘겨졌고 2005년에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키르치네르 부부 모두와 관련된 새로운 부당 이득 사건은 노르베르토 오야르비데 판사가 심리하여 2010년에 다시 무죄 판결을 받았다.[69]

2013년, 아르헨티나의 탐사보도 프로그램 ''모두를 위한 저널리즘''(Periodismo para todos)은 키르치네르 부부와 사업가 라자로 바에스가 연루된 횡령 및 자금 추적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바에스는 키르치네르가 집권한 2003년 이후 산타크루스주에서 발주한 공공 사업의 95%, 금액으로는 40억아르헨티나 페소 이상을 수주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은 'K 자금의 경로'(La ruta del dinero Kes) 스캔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어 2014년에는 호테수르 스캔들이 불거졌는데, 바에스가 소유한 회사가 키르치네르 가문 소유 호텔의 객실이 비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1,100개 이상의 객실을 임대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제공했다는 의혹이었다. 이는 공공 사업 자금이 호텔 임대료 명목으로 키르치네르 가문에게 흘러 들어가는 돈세탁 창구로 이용되었을 수 있다는 의심을 낳았다.[70]

2016년 4월에는 파나마 문서를 통해 키르치네르의 비서이자 측근이었던 다니엘 무뇨스(해당 연도 초 사망)가 조세회피처에 설립된 부동산 투자 회사 '골드 블랙 리미티드'(Gold Black Limited)의 소유주임이 드러났다. 이 회사의 이사인 세르지오 토디스코는 회사가 돈세탁에 이용되었다는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71] 같은 해 말, 훌리안 에르콜리니 판사는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와 그녀의 내각 구성원 여러 명을 기소했다. 기소 혐의는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처음 대통령이 되었을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의심되는 형사적 공모였다.[72]

9.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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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1차 득표수1차 득표율2차 득표수2차 득표율결과당락
2003년 선거아르헨티나의 대통령43대승리를 위한 전선4,313,131표22.25% 2위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
[9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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