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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단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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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링단 칸은 "존귀한 칸"이라는 뜻의 쿠툭투 카안으로 불리며, 1603년 14세의 나이로 몽골 제위에 오른 차하르부의 칸이다. 그는 티베트 불교를 장려하고 몽골 통일을 시도했으나, 만주족의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세력 확장, 몽골 부족들의 반발로 인해 실패했다. 명나라와 동맹을 맺고 후금에 대항했으나, 1632년 후금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코케누르로 도망쳤고, 1634년 천연두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아들 에제이가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내몽골은 청나라의 지배하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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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단 칸
기본 정보
이름리그덴 쿠투그투 칸
칭호카간 (몽골의 대칸)
칸 즉위1603년
전체 이름리그단
출생 연도1588년
출생 장소시라 묌렌 계곡
사망 연도1634년
사망 장소시라 탈라 (현재의 간쑤성)
종교텡그리 신앙과 티베트 불교 (닝마파)
통치
재위 기간1603년–1634년
이전 통치자부얀 세첸 칸
후계자에제이 칸
가문
왕가보르지긴 가문
왕조북원
아버지망구스
배우자
배우자예헤나라 수타이, 아바가 보르지기트 남중
자녀
자녀에제이 칸, 아부나이, 슈차이

2. 칭호

릭단 카안의 정식 칭호는 '''릭단 쿠툭투 수투 칭기스 다이밍 서천 주구드 이 터인 부거드 일라욱치 발라 차크라바르티 다이 타이숭 텅그리인 텅그리 덜럭커이 다키니 쿠르무스타 알탄 쿠르둔 이 오르치울룩치 노문 카안'''(Ligdan Qutuγtu Sutu Činggis Dayiming Sečen Jügüd-i Teyin Büged Ilaγuγči Bala Cakravarti Dai Tayisung Tengri-yin Tengri Delekei Dakin-i Qurmusta Altan Kürdün-i Orčiγuluγči Nomun Qa'anmn)으로, 그 의미는 “릭단, 신성하고 훌륭한 칭기스, 다이밍, 현명하고 깨달음을 얻으신 강력한 차크라바르틴, 위대한 타이숭, 신중의 신, 전 우주의 인드라, 카안”이다.[16] 몽골어식 존호는 쿠툭투 카안(Хутагт Хаан)으로, 몽골어로 존귀한 카안이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은 몽골어 "리그덴 후툭트 칸"(몽골 문자: ; 몽골 키릴 문자: Лигдэн Хутугт хаан)에서 유래되었으며, '리그덴 후툭트'라는 칭호는 རྦད་དེ་ཐོག་ཐུ།bo에서 유래되었다.

그의 이름은 또한 '린단 한'(林丹汗중국어; 1588–1634)이라고도 표기된다. 이 이름은 고전 티베트어 용어인 ''legs-ldan''에서 유래했다. 몽골 자료에서 이 이름을 쓰는 가장 흔한 방식은 ''Ligda/en''와 ''Linda/en''이지만, 중간 형태인 ''Lingda/en''도 나타난다. 서구 학자들은 티베트어 단어의 표기 형태에 따라 ''Ligdan''으로 표기하는 경향이 있으며, 몽골 학자들은 대개 ''Ligden''으로 표기한다. 중국어에서는 이 이름을 林丹(린단)으로 표기하며, 표준 병음 표기는 Líndān|린다중국어이다.

3. 생애

링단 칸(1588년[1] 또는 1590년 출생)은 부얀 세첸 칸의 손자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1603년 14세의 어린 나이에 의 자리에 올랐다.[1][17] 그의 이름은 몽골어 "리그덴 후툭트 칸"(몽골 문자: ; 몽골 키릴 문자: Лигдэн Хутугт хаан)에서 유래했으며,[1] 중국어로는 林丹汗|린단한중국어으로 표기된다. 그가 즉위할 당시 몽골은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링단 칸은 차하르 투멘을 기반으로 몽골 부족의 재통일을 목표로 삼았다.[17]

초기에는 일부 몽골 부족의 지지를 얻고 남부 할하 부족과 동맹하여 명나라를 공격하기도 했으나,[1] 점차 강압적인 통치 방식을 보이면서 다른 부족들의 반발을 샀다. 그는 티베트 불교 사캬파를 후원하며 종교적 권위를 통해 통합을 이루려 했고,[4] 1617년에는 샤르바 판디타를 스승으로 삼기도 했다.[4] 또한 명나라와 조약을 맺고 후금을 견제하는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1]

그러나 동쪽에서 만주족후금이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지도 아래 강력하게 부상하면서 링단 칸의 입지는 점차 좁아졌다. 1620년 누르하치와 관계를 단절한 이후,[1] 많은 동부 몽골 부족들이 후금에 투항했다. 링단 칸의 중앙 집권 강화 시도는 내부 반란(1627년)을 초래했고,[25] 비록 반란을 진압했으나 큰 손실을 입었다. 1631년 코르친과 튀메드를 공격하여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는 오히려 다른 몽골 부족들이 후금과 연합하여 반(反)링단 동맹을 결성하는 결과를 낳았다.[1]

1632년, 홍타이지가 이끄는 후금과 몽골 동맹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자 링단 칸은 약 10만 명의 백성을 이끌고 서쪽의 칭하이(코케누르) 지역으로 피신했다.[23][25] 그는 그곳에서 티베트 세력과 연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1634년 티베트겔룩파를 공격하러 가던 중 간쑤성 시라 탈라 초원에서 천연두로 병사했다.[25] 그의 사후 아들 에제이 칸1635년 후금에 항복하고 원나라의 옥새를 바쳤으며, 이로써 차하르 칸국은 멸망하고 내몽골 지역은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5]

3. 1. 어린 시절

보얀 체첸 칸의 손자이며, 망구스 메르겐 타이지의 아들이다.[1] 링단 칸은 1588년[1] 또는 1590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망구스 메르겐 타이지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17][1] 링단 칸은 1603년 할아버지인 보얀 체첸 칸의 뒤를 이어 14세의 나이로 카안의 자리에 올랐다.[17][1] 그의 통치 연호는 쿠투그투였다.[1]

그가 즉위할 무렵 몽골의 여러 부족 영주들은 각자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며 스스로 을 칭하는 등 분열된 상태였고, 링단 칸은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품었다.[17] 당시 카안의 직접적인 통치 영역인 차하르 투멘은 시라무룬허 상류(시라 뫼렌 계곡)에 자리 잡고 있었다.[17][2] 링단 칸은 즉위 과정에서 숙부들의 반발로 인해 내부적인 갈등을 겪기도 했다.[17]

링단 칸은 뛰어난 싸움꾼으로 알려져 주변의 경계를 샀다.[17] 그러나 몽골의 여러 부족장(노얀, 타이지)들은 각자의 영지에서 자립하여 링단 칸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17] 링단 칸은 이들 부족을 통합하기 위해 공격과 회유를 시도했으나, 일부 부족은 이를 거부하고 새롭게 부상하던 후금에 귀부하기도 했다.[17] 링단 칸은 차하르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남부 할하의 군주들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공격하여, 1620년에는 명나라로부터 40,000냥의 은을 받아내기도 했다.[15][1]

3. 2. 즉위 초

링단 칸(1588년 출생)은 망구스 메르겐 타이지의 아들이자 부얀 세첸 칸(1593–1603년 재위)의 손자였다.[1] 그의 아버지가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링단은 1603년 할아버지 부얀 칸이 붕어하자 14세의 나이로 의 자리에 올랐다.[1] 그의 통치 연호는 쿠투그투였다. 당시 몽골 기록인 몽골원류에는 그의 즉위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그가 대칸위를 물려받을 당시 차하르부에는 흉년과 기근이 계속되었다고 전해진다.[18] 이로 인해 그의 권력은 차하르 투멘(부족 연맹 단위) 내에서만 영향력을 가졌고, 할하부오이라트족은 더 이상 그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다.

1630년대 후금과의 전투 이후 링단 칸 휘하 차하르 세력의 붕괴.


즉위 초, 링단 칸은 차하르의 시라 뫼렌 계곡[2] 지역에 '차간 바이싱'(하얀 도시)이라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그는 수도를 중심으로 불교 수도원을 건립하고, 티베트 문학 번역을 지원했으며, 명나라와의 무역을 촉진하는 등 통치 기반을 강화하고자 했다. 또한 차하르를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 통치 체제를 정비했다.[2] 우익의 세 투멘은 초로스부 출신 타부난에게, 좌익 세 투멘은 시루구눅 두구렝에게 맡겨 관리하게 했으며, 노문 아르슬랑 등의 노얀(귀족)들이 정무를 주관하고 이데르 아르살란, 툴룬 치닥치 등의 관료들이 보좌하도록 했다. 두 소남을 비롯한 300명의 용사(바아투르)로 하여금 수도를 지키게 했다.

링단 칸은 칭기즈 칸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고 흩어진 몽골 부족을 재통일하고자 했다. 그는 불교를 통해 몽골을 통합하고 자신의 종교적, 정치적 권위를 강화하려 했다.[3] 이를 위해 쿠빌라이 칸 시대(1260–1294년 재위)에 융성했던 티베트 불교의 사키아파를 부활시키고자 1617년, 이 종파의 고승인 샤르바 판디타를 초빙하여 스승으로 삼았다.[4] 샤르바 판디타는 링단 칸의 수도 차간에 마하칼라 상을 세웠으며, 링단 칸은 큐리에(사찰)도 건립했다.

초기 통치 기간 동안 링단 칸은 다른 몽골 투멘들의 존경과 충성을 일부 받았다. 우익 3투멘의 보시도 지농은 링단 칸에게 충성을 표했다. 그는 남부 할하의 군주들(바아린, 자루드 부족)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의 변경 지역을 공격하여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숙부이자 부얀 세첸 칸의 동생인 다이칭은 대칸의 자리를 노리다가 실패하고 아들들과 함께 하르친부로 피신했다. 링단 칸은 다이칭 휘하의 4개 밍간(천호) 소속 백성들을 모두 빼앗았으며, 이후 하르친부를 공격하자 다이칭의 아들들은 다시 가솔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했다. 이는 링단 칸의 초기 통치 기반의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한편, 동쪽에서는 만주족이 세운 후금(1616–1636)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1612년부터 코르친과 자루드 부족의 지도자들은 후금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링단 칸은 1618년, 후금으로부터 북쪽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명나라와 조약을 맺고 매년 수천 의 은을 지원받기로 했다. 1620년에는 연간 보조금이 4만 냥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1619년 8월, 명나라를 돕기 위해 남부 할하의 소그 자이사이, 코르친의 산사라이 왕자, 자루드의 파그와 등이 1만에서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후금을 공격했지만 크게 패배했다. 후금은 명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링단 칸을 포함한 몽골 지도자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1619년의 충돌 이후 링단 칸과 후금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결국 1620년, 링단 칸과 후금의 통치자 누르하치(1616–1626년 재위)는 서로 모욕적인 편지를 주고받은 뒤 관계를 완전히 단절했고, 이후 1622년부터 1624년 사이에 대부분의 동부 몽골 투멘들이 누르하치에게 귀순했다.

링단 칸은 몽골 부족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려 했으나, 그의 강압적인 방식은 오히려 여러 몽골 부족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이는 그의 통치 초기부터 나타난 문제점으로, 이후 후금과의 대립 과정에서 몽골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3. 3. 누르하치, 홍타이지와의 대립

링단 칸의 통치 시기는 만주족의 누르하치가 세력을 확장하던 때와 거의 일치한다. 이미 1593년눈강 유역의 하르친 몽골 부락이 예허, 하다, 울라, 호이파와 연합하여 누르하치를 공격했지만 크게 패배했다. 1606년에는 내몽골 할하의 수령 5명이 누르하치에게 투항하며 그에게 '퀸두렌 카안'이라는 칭호를 바치기도 했다. 누르하치는 점차 여진 부족들을 통합해 나갔고, 1619년 마지막 남은 예허를 정복함으로써 모든 여진족을 자신의 세력 아래 두었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링단 칸이 누르하치와의 관계를 재정립하게 만들었다.[19] 1618년 링단 칸은 명나라와 동맹 조약을 맺고, 명나라로부터 매년 은화를 지원받는 대가로 여진족의 공격으로부터 명나라 북부 국경을 방어하기로 약속했다.[19] 처음에는 수천 의 은을 받았고, 1620년에는 연간 보조금이 4만 냥으로 늘어났다.[3]

1619년 8월, 남부 할하 귀족 소그 자이사이, 코르친의 산사라이 왕자, 자루드의 파그와 등이 명나라를 돕기 위해 1만~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후금을 공격했지만 격파당했다. 후금은 명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몽골 부족들을 이용하려 했고, 링단 칸을 포함한 몽골 지도자들에게 후금과 동맹을 맺도록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1619년의 충돌 이후 링단 칸과 누르하치 사이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1620년 서로 모욕적인 편지를 주고받은 뒤, 링단 칸과 누르하치는 관계를 단절했고, 1622년부터 1624년 사이에 대부분의 동부 몽골 투멘들이 누르하치에게 투항했다.

1621년 누르하치의 군대가 선양과 요양 지역을 점령하면서, 링단 칸이 이끄는 차하르 투멘은 누르하치의 세력과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1622년에는 차하르 부락의 오로드 부족이 링단 칸을 버리고 누르하치에게 투항했다. 1623년 누르하치는 내몽골 할하 투멘을 공격하여 자루드부의 수령 앙가를 살해했고, 1624년 자루드 부족의 새로운 수령 엥게데르는 누르하치에게 투항하며 누르하치의 동생 슈르가치의 딸과 결혼했다. 또한 코르친의 수령 오바는 여진족과 동맹을 맺고 링단 칸에 대항하는 동맹을 선언했다.[20] 같은 해 1624년, 코르친과 일부 이전 동맹 부족들이 만주족과 결속하자 링단 칸은 이들에 대한 징벌 원정을 벌였다. 그는 코르친 귀족 오바를 3일 동안 포위했지만, 하르친을 돕기 위해 누르하치가 보낸 여진족 구원군이 도착하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625년 링단 칸은 군대를 이끌고 코르친을 다시 침공했다. 오바의 요청을 받은 누르하치는 5천 명의 여진 병사를 파견했고, 링단 칸은 코르친 성채를 공격하던 중 누르하치의 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했다. 1626년 여진족 군대는 다시 할하의 바른 부족을 공격하여 수령 중 한 명인 낭눅을 살해하고 시라무룬허까지 진군했다. 이때 코르친의 오바는 다시 누르하치를 방문하여 슈르가치의 딸과 결혼하고, 누르하치로부터 투시예투 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같은 해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뒤를 이었다.[21]

홍타이지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할하, 특히 자루드와 바린 부족에 대한 공세를 계속했다. 점점 더 많은 몽골 부족들이 링단 칸을 버리고 홍타이지에게 투항했다.[22] 링단 칸은 몽골 부족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 했지만, 그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은 오히려 반발을 사서 여러 몽골 부족이 만주족과 연합하게 만들었다. 1627년에는 수니드, 우젬친, 아바가를 다스리던 군주들이 링단 칸의 중앙집권화 시도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우익 3투멘과 연합하여 링단 칸을 공격했다. 링단 칸은 자오청 전투에서 이들을 격파했지만, 이 과정에서 1만 명의 차하르 병력을 잃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15] 설상가상으로 명나라 조정이 보조금 지급을 거부하자, 링단 칸은 명나라를 약탈하여 조약을 갱신하도록 압박했고, 명나라는 연간 보조금을 8만 1천 냥의 은으로 늘려주었다.

1631년 링단 칸은 흥안령 산맥을 넘어 코르친과 튀메드를 성공적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코르친, 튀메드, 융쉬예부, 오르도스, 아바가 등 강력한 몽골 부족들이 링단 칸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했다. 이 동맹군은 후허하오터에서 4천 명의 차하르 민병대를 격파하고, 명나라로부터 링단 칸의 보조금을 받아오던 3천 명의 병사도 전멸시켰다. 1632년 후금의 칸 홍타이지는 몽골 동맹군과 함께 링단 칸에 대한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링단 칸은 정면 대결을 피하고 약 10만 명의 차하르 백성과 함께 서쪽 칭하이(코케누르)로 도망쳤다. 도주 과정에서 에린친 지농의 아내를 빼앗고 코케누르의 칭기즈 칸의 팔백 백색 유르트(제사 시설)에서 피신하는 등 민심을 더욱 잃었다. 그는 티베트 군주들과 동맹을 맺고 5대 달라이 라마와 4대 판첸 라마 롭상 초키 걀첸에 반대하며 겔룩파(황모파)를 공격하려 했으나, 1634년 티베트로 진군하던 중 간쑤성의 시라 탈라 초원에서 천연두로 병사했다.

링단 칸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에제이 칸(에르케 콩고르 에제)은 1635년 후금에 항복했고, 원나라 황제에게 대대로 전해지던 옥새 '제고지보'를 홍타이지에게 바쳤다. 이로써 차하르부는 사실상 멸망했으며, 후금(이후 청나라)은 내몽골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다.[5]

3. 4. 몽골 통합 시도와 실패



링단 칸은 분열된 몽골 부족을 재통합하고자 했으나, 그의 시도는 여러 요인으로 인해 실패했다. 그는 몽골 통치를 중앙 집권화하기 위해 좌익과 우익 튀멘을 통치할 관리를 임명하고, 특별 궁정 귀족과 300명의 바아투르(전사)로 구성된 군단을 조직했다. 또한 티베트 불교 사캬파를 후원하며 스스로를 쿠빌라이의 환생이라 칭하고 종교적 권위를 통해 통합을 이루려 했다.[4][24] 1617년에는 사캬파의 샤르바 판디타를 스승으로 삼고 수도 차간에 마하칼라 상을 세우는 등 종교적 활동을 펼쳤다.[4]

1627년, 링단 칸은 군대를 이끌고 다싱안링산맥을 넘어 투메드 부를 복속시키고 오르도스 지역을 장악했다.[22] 이를 기반으로 강력한 몽골 통합 정책과 과의 교역 확대를 시도했으나, 오히려 교역은 감소하고 통합은 내부 반발에 부딪혔다.[23] 그는 투메드부의 칸 직위를 폐지하고 영지를 몰수했으며, 오르도스부를 공격하여 지농 직위를 폐지하는 등 강압적인 정책을 펼쳤다.[23] 이러한 강권 통치는 다른 몽골 부족들의 반감을 샀고, 특히 오르도스와 투메트 부족은 링단 칸의 지배 대신 후금의 홍타이지에게 귀순하는 길을 선택했다.[24]

같은 해, 남부 몽골 왕공족들이 링단 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링단 칸은 자오헨 전투에서 반란군을 격파했지만, 이 과정에서 차하르부 병력 1만 명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명나라후금 방어의 대가로 약속했던 보조금 지급을 거부하자, 링단 칸은 중국 북부 지역을 공격하여 명나라가 조약을 갱신하고 보조금을 연간 81,000냥의 은으로 인상하도록 압박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남부 몽골 왕공족들은 후허하오터에서 차하르 군대 7천 명을 다시 궤멸시키는 등 저항을 계속했고, 결국 투메드부와 오르도스부의 지도자들은 후금에 투항했다.

설상가상으로 링단 칸이 이끌고 온 부락민들로 인해 초원의 지력이 쇠퇴하고 기아가 발생하는 등 내부적인 어려움도 겹쳤다.[15] 이런 상황 속에서 1632년, 홍타이지가 이끄는 후금과 몽골 동맹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하자, 링단 칸은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고 약 10만 명의 차하르 부족민과 함께 칭하이(코케누르) 지역으로 피신했다.[23] 그는 칭하이에서 티베트 세력과 연대하고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통합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다. 링단 칸은 1634년 티베트겔룩파(황모파)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던 중 간쑤성의 시라 탈라 초원에서 천연두로 병사했다.

링단 칸의 사후, 그의 아들 에제이 칸1635년 후금에 항복했고, 원나라 황제에게 전해지던 옥새를 헌상했다. 이로써 차하르 칸국은 멸망하고 내몽골 지역은 청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5]

3. 5. 생애 후반

링단 칸은 샤카파 라마 불교를 신봉하고 이를 포교하여 몽골의 사상적 재통일을 시도했으나, 여러 부족의 반발과 이탈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다만 그는 불교 경전의 몽골어 번역을 지원하고 장려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의 통치 방식은 점차 공격적으로 변모했으며, 몽골 통치를 중앙 집권화하려는 시도는 여러 몽골 부족의 반감을 샀다. 결국 이는 부족들이 만주족이 세운 후금과 연합하는 결과를 낳았다. 1627년, 수니드, 우젬친, 아바가 등을 포함한 여러 튀멘이 반란을 일으켰다. 링단 칸은 자오청 전투에서 반란군을 격파했지만, 이 과정에서 1만 명에 달하는 차하르 병력을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25] 같은 해, 명나라 조정이 보조금 지급을 거부하자 그는 명나라 변경을 약탈하여 조약을 갱신하도록 압박했고, 연간 보조금을 8만 1천 의 은으로 증액시키는 데 성공했다. 1628년에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할라친과 투메트를 멸망시키고 후허호트를 점령했으며, 하타오 지역의 오르도스부를 복속시켰다. 당시 북몽골 할하부의 실력자였던 투멘켄 초크토 홍타이지가 링단 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한때 전 몽골을 그의 영향력 아래 두는 듯 보였다.

1631년, 링단 칸은 흥안령 산맥을 넘어 코르친과 튀메드를 성공적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이는 코르친, 튀메드, 융쉬예부, 오르도스, 아바가 등 여러 부족이 연합하여 강력한 반(反)링단 동맹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동맹군은 후허호트에서 4천 명의 차하르 민병대를 격파하고, 명나라로부터 보조금을 받아오던 링단 칸의 병력 3천 명을 섬멸하는 등 큰 타격을 입혔다.

1632년, 후금의 칸 홍타이지는 몽골 동맹군과 함께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수세에 몰린 링단 칸은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고 약 10만 명의 차하르 백성들을 이끌고 오르도스를 거쳐 쾨게노르(푸른 호수라는 뜻, 현 칭하이호) 방면으로 피신했다.[25] 피신 과정에서 그는 에린친 지농의 아내를 빼앗고 칭기즈 칸의 팔백 백색 유르트에 피신하는 등의 행동으로 민심을 더욱 잃었다. 그는 티베트 군주들과 동맹을 맺으려 했으며, 촉투 타이지 등과도 연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5대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4세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오르도스를 떠난 이후 그의 구체적인 행적은 명확하지 않으나, 간헐적으로 명나라 변경을 약탈했던 것으로 보인다.[25]

1634년, 링단 칸은 티베트겔룩파(황모파)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던 중, 칭하이로 들어가려다 지금의 간쑤성 시라 탈라(다른 기록에는 샤라 타라 초원)에서 갑작스럽게 천연두와 뇌질환(머리 병)으로 사망했다.[25]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청실록에 따르면 그는 음력 윤달 8월 7일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설에는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링단 칸이 사망할 무렵, 차하르부의 영토 대부분은 이미 후금과 후금에 투항한 몽골 연합군에게 점령된 상태였다. 그의 사후, 아들 에제이 칸1635년 후금에 항복했고, 원나라 황제에게 대대로 전해지던 옥새를 홍타이지에게 헌납했다. 이를 계기로 청나라는 내몽골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다.[5]

4. 사후

링단 칸이 사망한 후, 그를 따르던 몽골 왕공족들은 후금의 홍타이지에게 투항하기 시작했다. 1634년 11월 9일, 후금으로 귀순한 몽골 왕공족 3명이 홍타이지에게 링단 칸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한편, 북할하 코토고이드칸부의 옴부 에르데니는 러시아 차르에게 서신을 보내 링단 칸의 사망을 알리고, 자신의 부족 보호를 대가로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다. 1635년 6월에는 링단 칸의 가족들이 만주 군대에 항복했다.[15]

링단 칸의 죽음으로 북원은 사실상 분열 상태에 놓였다. 서쪽의 알탄 칸계 할하부, 라이코르 칸의 자삭투부, 아바타이가 세운 투시예드 칸부, 다얀 칸의 증손자 솔로이가 세운 세첸칸부 등 4개의 주요 부락이 자립했다. 이들은 각자 칸을 칭했지만, 오래지 않아 청나라 홍타이지에게 조공을 바치고 결국 항복했다. 1636년, 링단 칸의 어머니와 처, 그리고 아들 에제이 칸(에르케 콩고르 에제)은 후금의 홍타이지에게 투항하며 원나라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옥새인 대원전국새(제고지보)를 바쳤다. 이는 북원의 실질적인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같은 해 3월에는 남부 몽골의 16개 아이막과 49명의 부족장들이 홍타이지에게 귀순했다. 이로써 청나라는 내몽골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다.[5]

링단 칸에게는 사후 혹은 사망 직전에 태어난 유복자 아들 아부나이가 있었다. 아부나이의 아들인 부르니(布爾尼)와 롭상(羅卜藏)은 훗날 청나라의 통치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순치제가 보낸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1675년 부르니와 그의 아버지 아부나이는 처형당했다. 에제이 칸의 직계 후손은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처형된 부르니에게 사라다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의 후손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설도 있다.

5. 중앙집권화 개혁

링단 칸은 분열된 몽골 부족들을 다시 통합하고 대칸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중앙집권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그의 권력 기반은 차하르부에 한정되어 있었고, 할하부오이라트 등 다른 부족들은 그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상황이었다.[18]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링단 칸은 행정, 군사,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 개혁을 시도했다.

우선 행정적으로는 좌익과 우익 투멘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새로운 관리들을 임명했다. 몽골 우익 3개 만호는 초로스부 출신 타부난에게, 좌익 3개 만호는 시루구눅 두구렝에게 맡겨 관리하게 했다. 이들 중 최소 한 명은 보르지긴 씨족이 아니었다. 또한 노문 아르슬랑과 같은 노얀들에게 정무를 총괄하게 하고, 이데르 아르살란, 툴룬 치닥치 등의 관료들이 보좌하도록 했다.

구분담당자소속/직책
우익 3만호타부난초로스부
좌익 3만호시루구눅 두구렝
정무 총괄노문 아르슬랑 등노얀
정무 보좌이데르 아르살란, 툴룬 치닥치 등관료



군사적으로는 300명의 정예 용사(바아투르)로 구성된 부대를 조직하여 수도 방어를 맡겼으며, 두 소남 등이 이들을 이끌었다. 또한 특별 궁정 귀족을 구성하여 칸의 친위 세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칸의 권위를 높이려 노력했다. 그는 북부 할하의 촉토 타이지와 연대하여 쿠빌라이 칸 시대에 융성했던 티베트 불교 사캬파 종단을 부활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1617년 사캬파의 고승 샤리바 호톡토(샤르바 판디타)를 초빙하여 스승으로 삼고, 그를 마하칼라의 화신으로 대우하며 수도 차간에 마하칼라 상을 세웠다.[4] 또한 1628년부터 이듬해까지 몽골어로 번역된 간주얼을 집대성하는 작업을 지원했다. 개인적으로는 스스로를 칭기스 칸의 환생이자 '신 중의 신', '인드라의 화신' 등으로 칭하며 신격화하기도 했다.[15]

그러나 링단 칸의 이러한 중앙집권화 시도는 다른 몽골 부족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그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은 부족들의 이탈을 가속화시켰고, 특히 코르친 등 일부 부족들은 새롭게 부상하던 만주족후금과 연합하는 길을 택했다. 1627년에는 수니드, 우젬친, 아바가 부족들이 3개의 우익 투멘과 연합하여 링단 칸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링단 칸은 자오청 전투에서 이들 연합군을 격파했지만, 이 과정에서 1만 명에 달하는 차하르 병력을 잃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그의 개혁 시도는 몽골 부족의 재통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참조

[1] 서적 Ш.Цэен-Ойдов-Чингис богдоос Лигдэн хутагт хүртэл /хаад/
[2] 서적 Encyclopedia of Mongolia and the Mongol Empire 2004
[3] 서적 Монгол хийгээд Евразийн дипломат шаштир, боть III
[4] 서적 The Mongol empire and its legacy
[5] 간행물 Die mongolischen Völkerschaften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86
[6] 문서 married later Jirgalang
[7] 문서 Granddaughter of Gintaisi
[8] 문서 married Abatai as his secondary consort and had a son
[9] 문서 Married to Hooge, Prince Su
[10] 문서 married to Hong Taiji as Consort Shu and given a title of Consort Kanghuishu
[11] 서적 『山川 世界史小辞典 改訂新版』 山川出版社 2004
[12] 문서 2004
[13] 문서 2010
[14] 문서 2002
[15] 저널 Ligdan Khan Facts On File 2004
[16] 저널 Origin of the Čaqar Mongols http://www.jstor.org[...] 1991
[17] 저널 Origin of the Čaqar Mongols 1991
[18] 문서 萬曆武功錄 卷10, 卜言台周列傳
[19] 저널 Origin of the Čaqar Mongols 1991
[20] 저널 Origin of the Čaqar Mongols 1991
[21] 저널 Origin of the Čaqar Mongols 1991
[22] 저널 Origin of the Čaqar Mongols 1991
[23] 저널 만주의 몽골 차하르부 병합과 그 의미 2001
[24] 뉴스 '[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73] ▲칭기스칸 왕조의 끝은?' https://www.ajunews.[...] 아주경제 2018-02-14
[25] 저널 만주의 몽골 차하르부 병합과 그 의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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