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씨 (오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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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 씨(毛利氏)는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명신 오에노 히로모토의 넷째 아들 모리 스에미쓰를 시조로 하는 씨족이다. 모리 씨는 가마쿠라 시대에 아키 모리 씨로 분화되어 아키 국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센고쿠 시대에는 모리 모토나리가 등장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모리 데루모토 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종속되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여 패배, 조슈 번으로 감봉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조슈 번을 다스리며 메이지 유신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고, 메이지 시대 이후 화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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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데루모토는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이자 모리 가문의 당주로, 고바야카와 타카카게와 기카와 모토하루의 지원을 받으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에서 공을 세웠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총대장으로서 실질적으로 참전하지 않아 영지를 잃고 조슈 번을 다스리게 된 인물이다. - 모리씨 (오에씨) - 모리 모토나리
모리 모토나리는 센고쿠 시대 아키 국을 기반으로 뛰어난 지략과 외교를 통해 주고쿠 지방을 통일한 다이묘로, 아리타-나카이데 전투와 이쓰쿠시마 전투에서의 승리, 세 아들과의 화합을 강조한 일화, 그리고 "천하를 탐하지 않는다"는 유언으로 유명하며 대중문화에서도 영웅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 도자마 다이묘 씨족 - 시마즈씨
시마즈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사쓰마, 오스미, 휴가 지역을 다스린 다이묘 가문으로, 미나모토 씨의 후손이며, 규슈 지역을 장악하고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 도자마 다이묘 씨족 - 사타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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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 번은 모리 모토나리의 후손이 다스린 번으로, 에도 시대 후기 개혁을 통해 재정을 안정시키고 근대적인 군사 제도를 도입하며 존왕양이 사상을 바탕으로 메이지 유신에 기여, 야마구치현이 되었다. - 하기시의 역사 - 쇼카손주쿠
쇼카손주쿠는 요시다 쇼인이 운영하며 막부 말기 유신지사를 배출하여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미친 야마구치현 하기시의 사설 교육 기관으로, 건물은 쇼인 신사 경내에 남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모리씨 (오에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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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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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명 (한자) | 毛利氏 |
가문명 (일본어) | もうりし |
로마자 표기 | Mōri-shi |
가조 | 모리 스에미쓰 |
본성 | 오에씨 스에미쓰 류 |
종별 | 무가, 화족 (공작) |
출신지 | 사가미국 아이코군 모리 장 |
근거지 | 에치고국 사와시 장 난조 |
창건 연도 | 13세기 (전반) |
마지막 통치자 | 모리 다카치카 |
현재 당주 | 모리 모토요시 |
소멸 | 존속 |
통치 종료 | 1868년, 보신 전쟁 이후 메이지 유신 시기, 모리 다카치카는 최초로 자신의 영지를 메이지 천황에게 반환함. |
가계 | |
선조 | [[File:Imperial Seal of Japan.svg|15px]] 일본 황실 |
주요 인물 | 모리 모토나리 |
지류 | 도쿠야마 모리 가문 (무가, 자작) |
영지 | |
주요 영지 | 사가미국, 아키국 |
문장 | |
가몬 명칭 | 일문자삼성 (나가토별) |
2. 가마쿠라 시대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모리 씨는 오에노 히로모토의 명성으로 고케닌 가문이었다. 오에노 히로모토의 넷째 아들인 모리 스에미쓰는 아버지로부터 모리 쇼엔을 상속받아 모리라는 성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모리 씨의 시조가 되었다. 모리 씨의 가문 전통에 따르면 그는 일본의 고대 신인 아메노호히노미코토(天穂日命)의 39대 직계 후손이다.[6] 3대 당주인 모리 도키치카 이후 그의 아들 모리 사다치카가 뒤를 이을 예정이었으나, 호조 씨에게 살해당했고, 쓰네미쓰의 증손자가 다음 당주가 되었다.[7]
가마쿠라 막부 말기에 모리 씨는 막부와 거리를 두었고,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8]
2. 1. 가문의 기원

모리 씨(오에 씨) 가문의 기원은 가마쿠라 막부의 명신이자 막부 만도코로의 벳토였던 오에노 히로모토의 넷째 아들 모리 스에미쓰를 시조로 한다. '모리'라는 묘지(名字)는 스에미쓰가 아버지 히로모토로부터 물려받은 사가미국 아이코군 모리 장(현재의 가나가와현 아쓰기시 모리다이 주변)을 본관으로 한 데서 유래했다. 중세에는 '모리'를 '모리'라고 읽었으나, 이후에는 '모우리'라고 읽게 되었다.
스에미쓰는 1247년 호지 전투에서 미우라 야스무라 편에 가담하여 세 아들과 함께 패하고 죽었다. 그러나 에치고국 사하시 장(현재의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과 아키국 요시다 장원(현재의 히로시마현 아키타카타시)을 영지로 가지고 있던 스에미쓰의 넷째 아들 모리 쓰네미쓰는 이 난에 관여하지 않아 살아남았다. 쓰네미쓰의 자손은 에치고 모리 씨(쓰네미쓰의 적자 모토치카 계통)와 아키 모리 씨(쓰네미쓰의 넷째 아들 도키치카 계통)로 나뉘어 존속했다.
아키 모리 씨는 쓰네미쓰로부터 요시다 장원을 물려받은 넷째 아들 도키치카가 남북조 시대 초기에 요시다 고리야마로 옮겨가 거성을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아키 모리 씨는 무로마치 시대에 아키의 유력한 국인 영주로 성장하여 야마나 씨 및 오우치 씨의 가신으로 번영했다.
2. 2. 에치고 모리 씨와 아키 모리 씨
모리 스에미쓰는 호조 도키요리의 장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우라 야스무라와 결탁하여 호조 씨에게 반기를 들어 패배했고, 일족 대다수가 죽음을 맞이했다(호지의 난). 에치고에 있던 스에미쓰의 넷째 아들 쓰네미쓰는 이 싸움에 관여하지 않아 그 가계가 남았다. 동족인 나가이 씨의 노력으로 에치고·아키의 슈고 직을 안도받은 쓰네미쓰는 적남 모리 모토치카에게 에치고 국 가리와 군 사하시 장 남조를 물려주고, 넷째 아들 도키치카에게 아키 국 요시다 장을 물려주었다.모리 도키치카는 가마쿠라 시대 후기, 교토 로쿠하라 탐제의 효조슈를 역임했지만, 인척 관계(처남)에 있던 우치칸레이 나가사키 엔키가 싯켄 호조 다카토키를 대신하여 막부에서 정권을 잡는 것을 싫어하여 은거하고, 영지인 가와치 국으로 은거했다.
겐코 3년(1333년) 고다이고 천황의 토막 운동으로 겐코의 난이 일어나 아시카가 다카우지 등이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켰지만, 모리 도키치카는 이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다. 고다이고 천황에 의해 시작된 겐무 신정으로부터도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의 여당으로 잠시 영토를 몰수당했다.[14]
남북조 시대에는 아시카가 측에 종속되었으며, 도키치카의 증손에 해당하는 모리 모토하루가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규슈의 남조 세력이었던 가네요시 친왕의 정서부(征西府)를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이마가와 사다요(료슌)의 지휘하에 들어가 활약했다.[15] 모토하루는 아키로 하향하여, 요시다코리야마 성에서 요시다 장의 통치를 시작했고, 은거하고 있던 증조부 도키치카가 모토하루를 후견했다.
안키 모리 씨는 쓰네미쓰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동족이다. 쓰네미쓰에게서 에치고국 사하시 장원을 계승한 적장자 모토치카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손자 모리 쓰네타카의 자손(사하시 모리 씨)은 대대로 우에스기 씨를 섬기며 에치고(성주로는 코즈케국 누마타 등)·아이즈(성주로는 시라카와 코미네)·요네자와(성주로는 아라토)로 이주했다(호조 모리 씨·야스다 모리 씨).
3. 무로마치 시대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 초기에 도키치카(時親)가 요시다 고리야마 산으로 옮겨 그곳에 거성(居城)을 짓기 시작했다. 요시다 장(吉田荘)으로 옮긴 아키 모리 씨는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아키의 유력 고쿠진 영주(国人領主)로 성장했고, 야마나 씨(山名氏) 및 오우치 씨(大内氏)의 가신으로 번영을 누렸다.[43]
4. 센고쿠 시대
아키국의 유력 국인 영주였던 모리 가문은 야마나 씨 및 오우치 씨의 가신으로 번영을 누렸다. 센고쿠 시대에 모리 모토나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아키 국내에서 유력한 세력이었지만, 전국적인 다이묘는 아니었다.
4. 1. 모리 모토나리의 등장
센고쿠 시대에 모리 모토나리가 등장하여, 그의 대에 오우치 씨와 아마고 씨를 멸망시키고 그들의 영지를 차지하였다. 최전성기에는 산요도 ・ 산인도 10개 국(国)과 규슈 북부의 일부를 영토로 삼아 최대 규모의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했다. 모토나리의 아들들이 양자로 들어간 깃카와 씨와 고바야카와 씨는 센고쿠 시대에 모리 본가의 중신으로 활약하며 「모리 양천」(毛利の両川)으로 불렸다.
모리 모토나리는 세력을 아키국 전체로 확장한 뒤, 인접한 다른 여러 구니로 넓혔다. 그의 대에 모리 가문은 지역 지자무라이에서 다이묘로 성장했다.
오다 노부나가와 잇코잇키와의 전쟁에서 모리 가문은 잇코잇키와 각자의 지방 항구 사이에 해상 무역로를 구축하여 지원했다. 오다는 결국 이 무역로를 봉쇄하고, 모리 함대를 파괴하려 시도하여 무역을 방해하려 했지만, 1571년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두 번째 전투는 1579년에 벌어졌는데, 오다는 모리의 해상 위협을 최종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여덟 척의 아타케부네(철갑으로 덮인 중무장 군함)를 보냈다.
오다 노부나가의 장군으로 군대를 이끈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격전 끝에 양측은 화해했고, 모리 가문은 주고쿠 지방의 6개 구니를 유지하는 다이묘로 남았다.
4. 2.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관계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쟁에서 모리 가문은 잇코잇키와 각자의 지방 항구 사이에 해상 무역로를 구축하여 지원했다. 노부나가는 이 무역로를 봉쇄하고 모리 함대를 파괴하려 했지만, 1571년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1579년의 두 번째 전투에서 노부나가는 아타케부네 여덟 척을 보내 모리의 해상 위협을 제거하려 했다.히데요시와의 격전 끝에 양측은 화해했고, 모리 가문은 주고쿠 지방의 6개 구니를 유지하는 다이묘로 남았다. 데루모토는 히데요시에게 종속하여 아키를 비롯한 8개국 112만 석[43]을 주인장으로 안도받았다. 데루모토는 고다이로에 취임하였다.
5. 에도 시대
1247년 호지 전투에서 모리 스에미쓰가 미우라 야스무라 편에 가담하여 세 아들과 함께 패사하였으나, 에치고국과 아키국에 영지를 가지고 있던 스에미쓰의 넷째 아들 모리 쓰네미쓰는 이 난에 관여하지 않아 살아남았다. 그 자손은 에치고 모리씨와 아키 모리씨로 나뉘어 존속했다.
아키 모리 씨는 쓰네미쓰로부터 요시다 장원을 물려받은 넷째 아들 모리 도키치카가 남북조 시대 초기에 요시다 고리야마 성으로 옮겨 거성을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아키 모리 씨는 무로마치 시대에 아키의 유력 고쿠진 영주로 성장했고, 야마나 씨 및 오우치 씨의 가신으로 번영했다.
센고쿠 시대에 모리 모토나리가 등장하여 오우치 씨와 아마고 씨를 멸하고 그 영지를 차지했다. 최전성기에는 산요도·산인도 10개 구니와 규슈 북부 일부를 영지로 삼는 최대 규모의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했다. 모토나리의 아들들이 양자로 들어간 깃카와 씨와 고바야카와 씨는 센고쿠 시대에 모리 본가의 중신으로 활약하며 '모리의 양천(両川)'으로 불렸다.
모토나리 사후, 손자 모리 데루모토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비호하며 오다 노부나가와 격렬하게 싸웠으나,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종속되어 아키 외 8개 구니 112만 석[13]을 주인장으로 안도받았다. 또한 본거지를 요시다 고리야마 성에서 히로시마 성으로 옮겼다. 데루모토는 이후 고다이로에 취임했다.
5. 1. 세키가하라 전투와 감봉
1600년, 모리 데루모토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총대장이 되었으나 패배했고, 모리 가문은 스오국(周防)과 나가토국(長門) 2개 구니 36만 9000석으로 감봉(減封)되었다.5. 2. 조슈 번의 번정 개혁과 메이지 유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총대장이었던 모리 데루모토는 패전 후 스오와 나가토 2개 구니 36만 9000석으로 감봉되었다. 1604년 데루모토는 나가토 국 아부 군(阿武郡)의 하기 성에 들어갔으며, 이후 에도 시대 내내 이곳을 거성으로 삼았다. 다만 막부 말기에 모리 다카치카가 번청을 스오 국 야마구치로 옮겼다. 조슈 번은 국주(国主) 도자마 다이묘로서 웅번(雄藩) 중 하나로 꼽혔으며, 조후번, 도쿠야마번, 기요스에번이 지번으로 존재했다. 깃카와 가문의 이와쿠니 번은 실질적으로 다른 지번과 마찬가지로 영지 자치가 인정되었으나, 공적으로는 조슈 번 번주 모리 가문의 가신으로 취급되어 그 영지는 '이와쿠니 령'이라고 불렸다.에도 시대 말기, 번주 모리 다카치카의 개혁으로 조슈번에서 수많은 지사(志士)가 나왔고, 이들은 메이지 유신을 성취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6. 메이지 시대 이후
가마쿠라 막부의 명신이자 만도코로의 벳토였던 오에노 히로모토의 넷째 아들 모리 스에미쓰를 시조로 하는 모리 씨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사가미국 아이코군 모리 장(현재의 가나가와현 아쓰기시 모리다이 부근)을 본관으로 삼았다. 중세에는 '모리'라고 읽었으나, 이후 '모우리'로 읽게 되었다.
스에미쓰는 1274년 호지 합전에서 미우라 야스무라 측에 가담하여 세 아들과 함께 패사했다. 그러나 에치고국 사쿄 장과 아키국 요시다 장을 영지로 가지고 있던 스에미쓰의 넷째 아들 쓰네미쓰는 난에 관여하지 않아, 그 자손이 에치고 모리 씨와 아키 모리 씨로 나뉘어 존속했다.
아키 모리 씨는 쓰네미쓰의 넷째 아들 도키치카가 난보쿠초 시대 초기에 요시다 고리 산으로 옮겨 거성을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아키의 유력 고쿠진 영주로 성장했고, 야마나 씨 및 오우치 씨의 가신으로 번영했다. 센고쿠 시대에 모리 모토나리가 나타나 오우치, 아마고 씨를 멸하고 그 영지를 차지, 산요도·산인도 10개 국과 규슈 북부 일부를 다스리는 최대급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했다. 모토나리의 자식들이 양자로 들어간 깃카와 씨와 고바야카와 씨는 '모리 양천'으로 불리며 모리 본가의 중신으로 활약했다.
모토나리 사후 손자 모리 데루모토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비호하며 오다 노부나가와 격렬히 싸웠으나,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종속, 아키국 외 8개 국 112만 석을 주인장으로 안도받았다. 본거지를 요시다 고리 산성에서 히로시마성으로 옮긴 데루모토는 오대로에 취임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총대장이었던 데루모토가 패전하면서 모리 씨는 스오국·나가토국 2개 국 36만 9000석으로 감봉되었다. 1604년 데루모토는 하기성에 들어갔고, 이후 에도 시대 내내 이곳을 거성으로 삼았다(막부 말기 모리 다카치카가 번청을 야마구치로 옮김). 도자마 다이묘이자 웅번 중 하나였으며, 조후번, 도쿠야마번, 기요스에번 등의 지번이 있었다. 이와쿠니번은 실질적으로는 지번과 같은 자치가 인정되었으나, 공식적으로는 조슈 번주 모리 가문의 가신으로 취급되어 '이와쿠니 령'으로 불렸다.
에도 시대 말기, 번주 모리 다카치카의 개혁으로 조슈번에서 많은 지사가 나왔고,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모리 씨는 화족이 되었고, 조슈 번 모리 종가는 공작, 지번 모리 3가는 자작, 모리 종가 분가인 모리 고로 가문 및 일문 가신이었던 미기타 모리 가와 요시키 모리 가는 남작이 되었다. 개역되었던 고바야카와 가문은 모리 모토노리의 서자를 당주로 하여 재흥, 남작 작위를 받았다. 메이지 시대 모리 공작가는 시마즈 공작가, 마에다 공작가에 이어 부호 화족이었다.
7. 한국과의 관계
모리 씨(오에 씨) 가문은 일본의 여러 분파를 통해 한국과 관련된 사건들에 연관되어 왔다.
모리 모토나리의 여덟 번째 아들 모토마사를 양자로 한 우다 모리 가와, 모리 모토나리의 11남 히데카네를 시조로 하는 요시키 모리 가는 각각 1만 7000석과 1만 1000석을 영지로 하는 가신 가문으로 이어졌다.[1][4] 이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하였다.
막부 말기에는 모리 모토노리의 양자인 지카노부가 도바 후시미 전투 등에서 공을 세우고, 제110국립은행을 창설하기도 했다.[1][2] 그의 양자인 요시히사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3]
오무라 마스지로의 양손자 오무라 히로토 자작의 양자로 모토노리의 여섯째 아들 노리토시가 들어갔으며, 사이온지 긴모치 공작의 양자로는 모토노리의 여덟째 아들 하치로가 들어갔다. 옛 다테바야시 번주 아키모토 자작 가문과 옛 이와쓰키 번주 오카 자작 가문은 실질적으로 도쿠야마 모리 가문의 분가로 이어지고 있다.
조후 모리 가문의 모리 모토오 자작의 동생 모토토모는 노기 마레스케 백작 사후 노기 백작 가문을 이었으나, 여러 논란 끝에 작위를 반납했다.[6]
7. 1.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모리 씨(오에 씨) 가문은 아마노 엔케이의 후예라고 전해지며, 센고쿠 시대에 모리 모토나리의 여덟 번째 아들 모토마사가 양자로 들어가면서 모리 가문을 허락받았다. 에도 시대에는 스오국우다 1만 7000석을 영지로 하는 조슈번 일문 가신으로 이어졌다.[1]모리 모토나리의 11남 히데카네를 시조로 하는 요시키 모리 가는 13만 석을 영유하는 구루메성의 성주였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영지를 몰수당하고 종가인 조슈 번주 모리 가에 섬기며, 에도 시대에는 스오국 요시키 1만 1000석 여를 영유하는 일문 가신 가문으로 이어졌다.[4]
7. 2. 메이지 유신과 대한제국
막말 유신기의 당주 모리 모토노리의 양자인 모리 지카노부(후지우치)는 막말에 국사에 힘썼고, 도바 후시미 전투와 동정에서도 공을 세웠다.[1] 메이지 4년(1871년)에 가독을 잇고, 제110국립은행을 창설하여 은행장을 맡았다.[1][2]지카노부가 메이지 18년(1885년)에 사망하자, 양자 (모토노리의 차남)인 요시히사가 가독을 상속했다.[1] 메이지 30년(1897년) 10월, 요시히사는 선대 지카노부의 유신 공적, 구 만석 이상 배신 가문이라는 점, 화족의 체면을 유지할 만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남작에 서임되었다.[3]
쇼와 10년(1935년)에 요시히사가 은거한 후, 장남 시게오가 작위를 계승했다. 그는 노다 신사의 궁사를 맡았다.[1] 쇼와 전기 시게오 대의 남작가의 주거는 야마구치현 사바군 우다 촌에 있었다.[2]
모리 씨(毛利氏)의 서류에 해당하는 옛 이와쿠니 번주 가문 깃카와 가문은 처음에는 배신 계열 제후로 간주되어 남작이었지만, 메이지 유신의 공으로 자작으로 승작되었다.[4] 전국 시대에 깃카와 가문과 함께 "모리의 양천"으로 칭해졌던 고바야카와 가문은 에도 시대 초기에 무사로 개역되었으나, 모리 모토노리의 서자를 당주로 하여 부흥되었으며, 화족 남작에 서임되었다.[4]
우다 모리 가문과 기시키 모리 가문 이외의 일문 가신이었던 오노 모리 가문, 아사 모리 가문, 아가와 모리 가문의 3 가문은 만 석 이하였기 때문에 수작되지 못하고 사족에 머물렀다.[5]
8. 가문
가마쿠라 막부의 만도코로 벳토이자, 오에노 히로모토의 넷째 아들인 모리 스에미쓰를 시조로 하는 일족이다. '모리'라는 묘지(名字)는 스에미쓰가 아버지 히로모토로부터 물려받은 사가미국 아이코군 모리 장(현재의 가나가와현 아쓰기시 모리다이 주변)을 본관으로 한 데서 유래한다. 중세에는 '모리'라고 읽었으나, 이후에는 '모우리'라고 읽게 되었다.
스에미쓰는 호지 원년(1247년) 호지 전투에서 미우라 야스무라 측에 가담하여 세 아들과 함께 패사했다. 그러나 에치고국 사하시 장(현재의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과 아키국 요시다 장(현재의 히로시마현 아키타카타시)을 영지로 가지고 있던 스에미쓰의 넷째 아들 모리 쓰네미쓰는 이 난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손이 에치고 모리씨(쓰네미쓰의 적자 모리 모토치카 계통)와 아키 모리씨(쓰네미쓰의 넷째 아들 모리 도키치카 계통)로 나뉘어 존속했다.
아키 모리씨는 쓰네미쓰로부터 요시다 장을 물려받은 넷째 아들 도키치카가 남북조 시대 초기에 요시다 고리야마 성으로 옮겨 거성을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요시다 장으로 옮긴 아키 모리씨는 무로마치 시대에 아키의 유력한 고쿠진 영주로 성장했고, 야마나 씨 및 오우치 씨의 가신으로 번영했다.
센고쿠 시대에 모리 모토나리가 나타나 오우치 씨와 아마고 씨를 멸망시키고 그 영지를 차지하여, 최전성기에는 산요도·산인도 10개 국과 규슈 북부 일부를 영지로 하는 최대 규모의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했다. 모토나리의 아들들이 양자로 들어간 깃카와 씨와 고바야카와 씨는 센고쿠 시대에 모리 본가의 중신으로 활약하며 '모리의 양천(両川)'이라고 불렸다.[43]
모토나리 사후, 손자 모리 데루모토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비호하며 오다 노부나가와 격렬하게 싸웠으나,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종속하여 아키 외 8개 국 112만 석을 주인장으로 안도받았다. 또한 본거지를 요시다 고리야마 성에서 히로시마 성으로 옮겼다. 데루모토는 그 후 오대로에 취임했다.
그러나 게이초 5년(1600년), 데루모토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총대장이 되어 패전한 후, 모리 씨는 스오국·나가토국 2개 국 36만 9천 석으로 감봉되었다. 게이초 9년(1604년) 데루모토는 나가토 국 아부군 하기 성에 들어갔다. 이후 에도 시대 내내 이곳을 거성으로 삼았다(다만 막말에 모리 다카치카가 번청을 스오 국 야마구치로 옮겼다). 국주 도자마 다이묘로서 웅번 중 하나로 꼽혔다. 지번으로는 조후번, 도쿠야마번, 기요스에번이 있었다. 깃카와 가의 이와쿠니 번은 실질적으로는 다른 지번과 마찬가지로 영지의 자치가 인정되었으나, 공적으로는 조슈 번주 모리 가문의 가신으로 취급되었고, 그 영지는 '이와쿠니 령'이라고 불렸다.
에도 시대 말기, 번주 모리 다카치카의 개혁으로 조슈번에서 수많은 지사가 나왔고, 메이지 유신을 성취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메이지 유신 이후 모리 씨는 화족이 되었고, 조슈 번의 모리 종가는 공작, 지번의 모리 3가는 자작이 되었다. 모리 종가의 분가인 모리 고로 가문 및 일문 가신이었던 미기타 모리 가와 요시키 모리 가는 남작이 되었다. 또한 에도 시대 초기에 후손이 없어 개역되었던 고바야카와 가문은 모리 모토노리의 서자를 당주로 하여 재흥되었고, 이들 집안도 남작 작위를 받았다. 메이지 시대에 모리 공작가는 시마즈 공작가, 마에다 후작가에 이어 부호 화족이었다.
9. 역대 당주
가마쿠라 막부의 만도코로 벳토이자, 오에노 히로모토의 넷째 아들인 모리 스에미쓰를 시조로 하는 일족이다. 성씨인 "모리"는 스에미쓰가 아버지 히로모토로부터 물려받은 영지인 사가미국 아이코 군 모리노 장원(현재의 가나가와현 아쓰기시 모리다이 주변)을 본관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다. 중세 시대에는 "모리"를 "모리"라고 읽었지만, 나중에는 "모우리"라고 읽게 되었다.
1247년 호지 전투에서 미우라 야스무라에 가담한 스에미쓰는 세 아들과 함께 패사했다. 그러나 에치고국 사하시 장원(현재의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과 아키국 요시다 장원(현재의 히로시마현 아키타카다시)을 영지로 삼았던 스에미쓰의 넷째 아들 모리 쓰네미쓰는 이 난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자손이 에치고 모리씨(쓰네미쓰의 적자 모리 모토치카의 계통)와 아키 모리씨(쓰네미쓰의 넷째 아들인 모리 도키치카의 계통)로 나뉘어 존속했다.
아키 모리씨는 쓰네미쓰로부터 요시다 장원을 물려받은 넷째 아들 도키치카가 남북조 시대 초기에 요시다 고리야마로 이주하여 거성을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요시다 장원으로 이주한 아키 모리씨는 무로마치 시대에 아키의 유력한 국인 영주로 성장하여 야마나 씨 및 오우치 씨의 가신으로 번성했다.
센고쿠 시대에 모리 모토나리가 등장하여 일대에서 오우치 씨와 아마고 씨를 멸망시키고 그 영지를 획득하여, 최성기에는 산요도·산인도 10개국과 규슈 북부의 일부를 영토로 삼는 최대 규모의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했다. 모토나리의 아들들이 양자로 들어간 깃카와 씨와 고바야카와 씨는 전국 시대에 모리 본가의 중신으로 활약하여 "모리의 양천(료센)"이라고 불렸다.
모토나리 사후, 손자 모리 데루모토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보호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격렬하게 다투었다. 그러나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종속하여 아키를 비롯한 8개국에서 112만 석[13]을 주인장으로 안도받았다. 또한, 거점을 요시다 고리야마 성에서 히로시마 성으로 옮겼다. 데루모토는 그 후 고다이로에 취임했다.
그러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데루모토가 서군의 총대장이 된 것으로 인해, 패전 후 모리 씨는 스오국·나가토국의 2개국 36만 9천 석으로 감봉되었다. 1604년에 데루모토는 나가토국 아부 군의 하기 성에 입성했다. 이후 에도 시대를 통해 이곳을 거성으로 삼았다(다만 막말에 모리 다카치카가 번청을 스오국의 야마구치로 옮겼다). 국주 (구니모치)의 도자마 다이묘로서 웅번 중 하나로 꼽혔다. 지번으로 조후번과 도쿠야마번, 기요스에번이 있었다. 깃카와가의 이와쿠니번은 실질적으로는 다른 지번과 마찬가지로 영지의 자치가 인정되었지만, 공적으로는 조슈 번주 모리 가문의 가신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그 영지는 "이와쿠니 영"이라고 칭해졌다.
에도 시대 말기에는 번주 모리 다카치카의 개혁으로 조슈번에서 수많은 지사가 나타나, 메이지 유신을 완수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유신 후에 화족이 되었고, 조슈 번의 모리 종가는 공작, 지번의 모리 가문 3가문은 자작, 모리 종가의 분가인 모리 고로 가문 및 일문 가신이었던 미기타 모리 가문과 요시키 모리 가문은 남작이 되었다. 또한 에도 시대 초기에 무사로 개역되었던 고바야카와 가문이 모리 모토노리의 서자를 당주로 하여 부활하였고, 이 가문 또한 남작으로 서훈되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모리 공작 가문은 시마즈 공작 가문, 마에다 후작 가문에 이은 부유한 화족이었다.
대수 | 초상 | 이름 | 계통 | 위계 | 비고 | 배우자 | 주요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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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 | 모리 스에미쓰 | 오에노 히로모토의 넷째 아들 | 종5위하 | 모리 씨 시조 가마쿠라 막부고케닌 사가미 모리 장 영주 호지 전투에서 패사 | 미우라 요시무라의 딸 | 모리 쓰네미쓰(넷째 아들) 하나조노인 모로쓰구의 아내 호조 도키요리의 아내 |
2 | 모리 쓰네미쓰 | 스에미쓰의 넷째 아들 | 종5위하 | 가마쿠라 막부고케닌 에치고 사하시 장 영주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모리 모토치카(장남・에치고 모리 씨 시조) 모리 도키치카(넷째 아들・아키 모리 씨 시조) | ||
3 | 모리 도키치카 | 쓰네미쓰의 넷째 아들 | 종5위하 | 아키 모리 씨 시조 가마쿠라 막부고케닌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나가사키 야스쓰나의 딸 | 모리 사다치카 | |
4 | 모리 모토하루 | 사다치카의 증손 | 종5위하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모리 히로후사(장남) 후쿠하라 히로요(다섯째 아들) | ||
5 | 모리 히로후사 | 모토하루의 장남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모리 미쓰후사 | |||
6 | 모리 미쓰후사 | 히로후사의 아들 | 종5위하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모리 히로모토 야마우치 히로미치의 아내 | ||
7 | 모리 히로모토 | 미쓰후사의 아들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모리 도요모토 야마우치 도키미치의 아내 | |||
8 | 모리 도요모토 | 히로모토의 아들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모리 히로모토(장남) 가네시게 모토치카(셋째 아들) 구니시 아리즈미의 아내 | |||
9 | 모리 히로모토 | 도요모토의 아들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후쿠하라 히로토시의 딸 스기 오카타 | 모리 오키모토(장남) 모리 모토나리(차남) 아이오 모토쓰나(셋째 아들) 기타 스케카쓰(넷째 아들) 시부카와 요시마사의 아내 이노우에 모토미쓰의 아내 깃카와 모토쓰네의 아내 | ||
10 | ![]() | 모리 오키모토 | 히로모토의 장남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다카하시 히사미쓰의 딸 | 모리 고마쓰마루(장남) 야마우치 도요미치의 아내 고바야카와 오키카게의 아내 교마쓰 마사모리의 아내 스기하라 모리시게의 아내 | |
11 | ![]() | 모리 고마쓰마루 | 오키모토의 아들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
12 | ![]() | 모리 모토나리 | 히로모토의 차남 | 종4위상 증정1위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센고쿠 다이묘 | 묘큐(깃카와 구니쓰네의 딸) 노미 오카타 나카노마루 | 모리 다카모토(장남) 깃카와 모토하루(차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셋째 아들) 호이다 모토키요(넷째 아들) 모리 모토아키(다섯째 아들) 데와 모토토모(여섯째 아들) 아마노 모토마사(일곱째 아들) 스에쓰기 모토야스(여덟째 아들) 모리 히데카게(아홉째 아들) 고류큐 (시시도 다카이에의 아내) 우에하라 모토마사의 아내 |
13 | -- | 모리 다카모토 | 모토나리의 장남 | 종4위하 증정3위 | 센고쿠 다이묘 무로마치 막부슈고 다이묘 | 오자키(나이토 오키모리의 딸) | 모리 데루모토(장남) 요시미 히로요리의 아내 |
14 | ![]() | 모리 데루모토 | 다카모토의 장남 | 종3위 증종2위 | 센고쿠 다이묘 아키히로시마 성주 도요토미 정권고다이로 | 세이코인(정실, 시시도 다카이에의 딸) 세이타인(측실, 고다마 모토요시의 딸) | 모리 히데나리(장남, 초대조슈 번주) 모리 나리타카(차남, 초대도쿠야마 번주) 깃카와 히로마사의 아내 |
15 | -- | 모리 히데나리 | 데루모토의 장남 | 종4위하 | 초대조슈 번주 | 기사히메(유키 히데야스의 딸) | 모리 쓰나히로(넷째 아들, 2대 조슈 번주) 마쓰다이라 다다마사의 아내 다카쓰카사 후사스케의 아내 |
16 | 모리 쓰나히로 | 히데나리의 넷째 아들 | 종4위하 증종3위 | 2대 조슈 번주 | 마쓰다이라 다다마사의 딸(정실) 나시노키 나가히데의 딸(계실) | 모리 요시나리(장남, 3대 조슈 번주) 모리 요시히로(차남, 4대 조슈 번주) 모리 모토시게(다섯째 아들, 마쓰다이라 마사치카 양자) 마쓰다이라 요시유키의 아내 나이토 이치노부의 아내 모리 나리토요의 아내 모리 다다히로의 아내 마쓰다이라 타다마사의 아내 | |
17 | 모리 요시나리 | 쓰나히로의 장남 | 종4위하 | 3대조슈 번주 | 사카이 타다타카의 딸 | ||
18 | 모리 요시히로 | 쓰나히로의 차남 | 종4위하 | 4대조슈 번주 | 다카쓰카사 스케노부의 딸 | ||
19 | -- | 모리 요시모토 | 모리 쓰나모토의 아들 | 종4위하 | 5대조슈 번주 | 이케다 쓰나마사의 딸 | 모리 모토토모(장남, 4대 조후 번주) 모리 무네히로(다섯째 아들, 6대 조슈 번주) 시마즈 쓰구토요의 아내 모리 모로유키의 아내 |
20 | 모리 무네히로 | 요시모토의 다섯째 아들 | 종4위하 | 6대조슈 번주 | 마쓰다이라 무네마사의 딸 | 모리 시게히로의 아내, 후에 마쓰다이라 요리나가의 아내 | |
21 | -- | 모리 시게나리 | 모리 다다히로의 아들 | 종4위하 | 7대조슈 번주 | 다치바나 사다요시의 딸(정실) 이이다 마사나오의 딸(측실) 무토 씨의 딸(측실) 다나카 씨의 딸(측실) 고노 미치사다의 딸(측실) | 모리 다다미쓰(장남, 9대 조후 번주) 모리 하루치카(넷째 아들, 8대 조슈 번주) 모리 다다요시(다섯째 아들, 10대 조후 번주) 모리 지카아키(여섯째 아들) 야마우치 도요야스의 정실 아리마 요리타카의 아내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의 아내 다카쓰카사 스케히라의 아내 마쓰다이라 타다히로의 아내 마에다 도시노리의 아내 나이토 노부아키라의 아내 |
22 | -- | 모리 하루치카 | 시게나리의 넷째 아들 | 종4위하 | 8대조슈 번주 | 타야스 무네타케의 딸(정실) 고이즈미 씨의 딸(측실) 오카다 씨의 딸(측실) | 모리 나리후사(장남, 9대 조슈 번주) 모리 나리히로(차남, 10대 조슈 번주) 호소카와 오키나리(셋째 아들) 미즈노 타다아쓰(다섯째 아들) |
23 | 모리 나리후사 | 하루치카의 장남 | 종4위하 | 9대조슈 번주 | 아리스가와노미야 오리히토 친왕의 왕녀(정실) 야마다 씨의 딸(측실) | ||
24 | 모리 나리히로 | 하루치카의 차남 | 종4위하 | 10대조슈 번주 | 이케다 하루미치의 딸(정실) 이케가미 후지타유의 딸(측실) 가네코 시게헤이의 딸(측실) 노나카 시게하치의 딸(측실) | 모리 나리히로(차남, 12대 조슈 번주) 모리 나리모토의 아내 소 요시아키라의 아내 모리 모토반의 아내 미즈노 타다타케의 아내, 후에 모리 모토쥰의 아내 | |
25 | 모리 나리모토 | 모리 지카아키의 장남 | 종4위상 | 11대조슈 번주 | 모리 나리히로의 딸(정실) 하라다 씨의 딸(측실) 다시로 씨의 딸(측실) 야마자키 씨의 딸(측실) 야마토 교잔의 딸(측실) | 모리 다카치카(장남) 마스다 치카오키의 아내 다테 무네토쿠의 아내 | |
26 | -- | 모리 나리히로 | 나리히로의 차남 | 종4위하 | 12대조슈 번주 |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딸(정실) 혼다 씨의 딸(측실) | 모리 도미코(모리 다카치카의 아내) |
27 | -- | 모리 다카치카 | 나리모토의 장남 | 종2위 증정1위 | 13대조슈 번주 | 모리 도미코(나리히로의 딸) | |
28 | ![]() | 모리 모토노리 | 모리 히로시게의 아들 | 종1위 | 14대조슈 번주(지번사) 초대공작 귀족원 의원 | 모리 야스코(모리 모토운의 딸) | 모리 모토아키(장남, 공작) 고바야카와 사부로(셋째 아들) 고바야카와 시로(넷째 아들, 남작) 모리 고로(다섯째 아들, 남작) 오무라 토쿠토시(여섯째 아들, 자작) 사이온지 하치로(여덟째 아들, 공작) |
29 | -- | 모리 모토아키 | 모토노리의 장남 | 정2위 | 2대공작 귀족원 의원 | 모리 후미코(도쿠가와 요시카쓰의 딸) 모리 미사코(산조 사네토미 공작의 딸) | 모리 모토미치(장남, 공작) 고바야카와 모토하루(차남) 다이고 아키코(다이고 타다시게 후작 부인) 아타고 시게코(아타고 미치쓰네 자작 부인) 도다 하마코(도다 타다쓰구 자작 부인) |
30 | -- | 모리 모토미치 | 모토아키의 장남 | 종4위 | 3대공작 귀족원 의원 육군 소좌 | 모리 세이코(마쓰다이라 사다하루 자작의 딸) | 모리 모토히로(장남) 후쿠하라 모토히로(차남) 모리 모토호(셋째 아들) 모리 모토아쓰(넷째 아들) 히로사와 묘코(장녀, 히로사와 시신의 아내) |
31 | 모리 모토아키 | 모토미치의 장남 | 일본장기신용은행 근무 경제기획청 관료 제1호텔 이사 호후 모리보코회 회장 | 모리 나오코(오기하라 세이이치의 딸) | 모리 모토에이(장남) 무쓰시마 아키코(무쓰시마 타이의 아내) | ||
32 | 모리 모토에이 | 모토아키의 장남 | 히타치 금속 금속 재료 사업부 특수강 총괄부장 | ||||
도쿠야마 모리 가문, 조후 모리 가문, 기요스에 모리 가문, 그 외 분가에 대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이미 다루고 있으므로, 본 섹션에서는 생략한다.
9. 1. 모리 종가
모리 스에미쓰는 가마쿠라 막부의 명신 오에노 히로모토의 넷째 아들로, 사가미국 모리 장원을 상속받아 모리 씨를 칭했다. 스에미쓰는 1247년 호지 전투에서 미우라 야스무라 편에 서서 세 아들과 함께 패사했다. 그러나 에치고국과 아키국에 영지를 가진 넷째 아들 모리 쓰네미쓰는 이 난에 관여하지 않아, 그 자손이 에치고 모리씨와 아키 모리씨로 나뉘어 존속했다.
아키 모리씨는 쓰네미쓰의 넷째 아들 모리 도키치카가 남북조 시대 초기에 요시다 고리야마로 이주하며 시작되었다. 이들은 무로마치 시대에 아키의 유력 국인 영주로 성장, 야마나 씨 및 오우치 씨의 가신으로 번성했다.
전국 시대에 모리 모토나리가 등장, 오우치 씨와 아마고 씨를 멸하고 그 영지를 차지하여 산요도·산인도 10개국과 규슈 북부 일부를 다스리는 최대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했다. 모토나리의 아들들이 양자로 들어간 깃카와 씨와 고바야카와 씨는 "모리의 양천(료센)"으로 불리며 모리 본가를 도왔다.
모토나리 사후, 손자 모리 데루모토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비호하며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했으나,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종속, 아키 등 8개국 112만 석[13]을 주인장으로 안도받았다. 요시다 고리야마 성에서 히로시마 성으로 거점을 옮기고, 고다이로에 취임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데루모토가 서군 총대장이 되면서, 패전 후 스오국·나가토국 2개국 36만 9천 석으로 감봉되었다. 1604년 하기 성에 입성, 에도 시대 동안 이곳을 거성으로 삼았다(막말 모리 다카치카가 번청을 야마구치로 옮김). 국주 도자마 다이묘로서 웅번 중 하나였으며, 조후 번, 도쿠야마 번, 기요스에 번 등의 지번이 있었다. 이와쿠니 번은 실질적 자치는 인정되었으나, 공식적으로는 조슈 번주 모리 가문의 가신으로 "이와쿠니 영"이라 불렸다.
에도 시대 말기, 번주 모리 다카치카의 개혁으로 조슈 번에서 많은 지사가 배출되어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되었다. 유신 후 화족이 된 조슈 번 모리 종가는 공작, 지번 3가문은 자작, 분가 모리 고로 가 및 일문 가신 미기타 모리 가문, 요시키 모리 가문은 남작이 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 개역된 고바야카와 씨는 모리 모토노리 서자를 당주로 하여 남작 작위를 받았다. 메이지 시대 모리 공작가는 시마즈 공작가, 마에다 후작가에 이은 부호 화족이었다.
대수 | 초상 | 이름 | 계통 | 위계 | 비고 | 배우자 | 주요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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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모리 스에미쓰 | 오에노 히로모토의 넷째 아들 | 종5위하 | 모리 씨 시조 가마쿠라 막부고케닌 사가미 모리 장 영주 호지 전투에서 패사 | 미우라 요시무라의 딸 | 모리 쓰네미쓰(넷째 아들) 여성(하나조노인 모로쓰구의 아내) 여성(호조 도키요리의 아내) | |
2 | 모리 쓰네미쓰 | 선대의 넷째 아들 | 종5위하 | 가마쿠라 막부고케닌 에치고 사하시 장 영주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모리 모토치카(장남・에치고 모리 씨 시조) 모리 도키치카(넷째 아들・아키 모리 씨 시조) | ||
3 | 모리 도키치카 | 선대의 넷째 아들 | 종5위하 | 아키 모리 씨 시조 가마쿠라 막부고케닌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나가사키 야스쓰나의 딸 | 모리 사다치카 | |
4 | 모리 모토하루 | 선대의 증손 | 종5위하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모리 히로후사(장남) 후쿠하라 히로요(다섯째 아들) | ||
5 | 모리 히로후사 | 선대의 장남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모리 미쓰후사 | |||
6 | 모리 미쓰후사 | 선대의 아들 | 종5위하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모리 히로모토 여성(야마우치 히로미치의 아내) | ||
7 | 모리 히로모토 | 선대의 아들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모리 도요모토 여성(야마우치 도키미치의 아내) | |||
8 | 모리 도요모토 | 선대의 아들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모리 히로모토(장남) 가네시게 모토치카(셋째 아들) 여성(구니시 아리즈미의 아내) | |||
9 | 모리 히로모토 | 선대의 아들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후쿠하라 히로토시의 딸 스기 오카타 | 모리 오키모토(장남) 모리 모토나리(차남) 아이오 모토쓰나(셋째 아들) 기타 스케카쓰(넷째 아들) 여성(시부카와 요시마사의 아내) 여성(이노우에 모토미쓰의 아내) 여성(깃카와 모토쓰네의 아내) | ||
10 | 모리 오키모토 | 선대의 장남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다카하시 히사미쓰의 딸 | 모리 고마쓰마루(장남) 여성(야마우치 도요미치의 아내) 여성(고바야카와 오키카게의 아내) 여성(교마쓰 마사모리의 아내) 여성(스기하라 모리시게의 아내) | ||
11 | 모리 고마쓰마루 | 선대의 아들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 ||||
12 | 모리 모토나리 | 선대의 숙부 | 종4위상 증정1위 | 아키 요시다 장 영주 전국 다이묘 | 묘큐(깃카와 구니쓰네의 딸) 노미 오카타 나카노마루 | 모리 다카모토(장남) 깃카와 모토하루(차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셋째 아들) 호이다 모토키요(넷째 아들) 모리 모토아키(다섯째 아들) 데와 모토토모(여섯째 아들) 아마노 모토마사(일곱째 아들) 스에쓰기 모토야스(여덟째 아들) 모리 히데카게(아홉째 아들) 고류큐(시시도 다카이에의 아내) 여성(우에하라 모토마사의 아내) | |
13 | -- | 모리 다카모토 | 선대의 장남 | 종4위하 증정3위 | 전국 다이묘 무로마치 막부슈고 다이묘 | 오자키(나이토 오키모리의 딸) | 모리 데루모토(장남) 여성(요시미 히로요리의 아내) |
14 | 모리 데루모토 | 선대의 장남 | 종3위 증종2위 | 전국 다이묘 아키히로시마 성주 도요토미 정권고다이로 | 세이코인(정실. 시시도 다카이에의 딸) 세이타인(측실. 고다마 모토요시의 딸) | 모리 히데나리(장남, 초대조슈 번주) 모리 나리타카(차남, 초대도쿠야마 번주) 여성(깃카와 히로마사의 아내) | |
15 | -- | 모리 히데나리 | 선대의 장남 | 종4위하 | 초대조슈 번주 | 기사히메(유키 히데야스의 딸) | 모리 쓰나히로(넷째 아들, 2대 조슈 번주) 여성(마쓰다이라 다다마사의 아내) 여성(다카쓰카사 후사스케의 아내) |
16 | 모리 쓰나히로 | 선대의 넷째 아들 | 종4위하 증종3위 | 2대 조슈 번주 | 마쓰다이라 다다마사의 딸(정실) 나시노키 나가히데의 딸(계실) | 모리 요시나리(장남, 3대 조슈 번주) 모리 요시히로(차남, 4대 조슈 번주) 모리 모토시게(다섯째 아들, 마쓰다이라 마사치카 양자) 여성(마쓰다이라 요시유키의 아내) 여성(나이토 이치노부의 아내) 여성(모리 나리토요의 아내) 여성(모리 다다히로의 아내) 여성(마쓰다이라 타다마사의 아내) | |
17 | 모리 요시나리 | 선대의 장남 | 종4위하 | 3대조슈 번주 | 사카이 타다타카의 딸 | ||
18 | 모리 요시히로 | 선대의 동생 | 종4위하 | 4대조슈 번주 | 다카쓰카사 스케노부의 딸 | ||
19 | -- | 모리 요시모토 | 선대의 양자 | 종4위하 | 5대조슈 번주 | 이케다 쓰나마사의 딸 | 모리 모토토모(장남, 4대 조후 번주) 모리 무네히로(다섯째 아들, 6대 조슈 번주) 여성(시마즈 쓰구토요의 아내) 여성(모리 모로유키의 아내) |
20 | 모리 무네히로 | 선대의 다섯째 아들 | 종4위하 | 6대조슈 번주 | 마쓰다이라 무네마사의 딸 | 여성(모리 시게히로 후 마쓰다이라 요리나가의 아내) | |
21 | -- | 모리 시게나리 | 선대의 양자 | 종4위하 | 7대조슈 번주 | 다치바나 사다요시의 딸(정실) 이이다 마사나오의 딸(측실) 무토 씨의 딸(측실) 다나카 씨의 딸(측실) 고노 미치사다의 딸(측실) | 모리 다다미쓰(장남, 9대 조후 번주) 모리 하루치카(넷째 아들, 8대 조슈 번주) 모리 다다요시(다섯째 아들, 10대 조후 번주) 모리 지카아키(여섯째 아들) 여성(야마우치 도요야스의 정실) 여성(아리마 요리타카의 아내) 여성(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의 아내) 여성(다카쓰카사 스케히라의 아내) 여성(마쓰다이라 타다히로의 아내) 여성(마에다 도시노리의 아내) 여성(나이토 노부아키라의 아내) |
22 | -- | 모리 하루치카 | 선대의 넷째 아들 | 종4위하 | 8대조슈 번주 | 타야스 무네타케의 딸(정실) 고이즈미 씨의 딸(측실) 오카다 씨의 딸(측실) | 모리 나리후사(장남, 9대 조슈 번주) 모리 나리히로(차남, 10대 조슈 번주) 호소카와 오키나리(셋째 아들) 미즈노 타다아쓰(다섯째 아들) |
23 | 모리 나리후사 | 선대의 장남 | 종4위하 | 9대조슈 번주 | 아리스가와노미야 오리히토 친왕의 왕녀(정실) 야마다 씨의 딸(측실) | ||
24 | 모리 나리히로 | 선대의 동생 | 종4위하 | 10대조슈 번주 | 이케다 하루미치의 딸(정실) 이케가미 후지타유의 딸(측실) 가네코 시게헤이의 딸(측실) 노나카 시게하치의 딸(측실) | 모리 나리히로(차남, 12대 조슈 번주) 여성(모리 나리모토의 아내) 여성(소 요시아키라의 아내) 여성(모리 모토반의 아내) 여성(미즈노 타다타케 후 모리 모토쥰의 아내) | |
25 | 모리 나리모토 | 선대의 양자 | 종4위상 | 11대조슈 번주 | 모리 나리히로의 딸(정실) 하라다 씨의 딸(측실) 다시로 씨의 딸(측실) 야마자키 씨의 딸(측실) 야마토 교잔의 딸(측실) | 모리 다카치카(장남) 여성(마스다 치카오키의 아내) 여성(다테 무네토쿠의 아내) | |
26 | -- | 모리 나리히로 | 선대의 양자 | 종4위하 | 12대조슈 번주 |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딸(정실) 혼다 씨의 딸(측실) | 모리 도미코(모리 다카치카의 아내) |
27 | -- | 모리 다카치카 | 선대의 양자 | 종2위 증정1위 | 13대조슈 번주 | 모리 도미코(모리 나리히로의 딸) | |
28 | 모리 모토노리 | 선대의 양자 | 종1위 | 14대조슈 번주(지번사) 초대공작 귀족원 의원 | 모리 야스코(모리 모토운의 딸) | 모리 모토아키(장남, 공작) 고바야카와 사부로(셋째 아들) 고바야카와 시로(넷째 아들, 남작) 모리 고로(다섯째 아들, 남작) 오무라 토쿠토시(여섯째 아들, 자작) 사이온지 하치로(여덟째 아들, 공작) | |
29 | -- | 모리 모토아키 | 선대의 장남 | 정2위 | 2대공작 귀족원 의원 | 모리 후미코(도쿠가와 요시카쓰의 딸) 모리 미사코(산조 사네토미 공작의 딸) | 모리 모토미치(장남, 공작) 고바야카와 모토하루(차남) 다이고 아키코(다이고 타다시게 후작 부인) 아타고 시게코(아타고 미치쓰네 자작 부인) 도다 하마코(도다 타다쓰구 자작 부인) |
30 | -- | 모리 모토미치 | 선대의 장남 | 종4위 | 3대공작 귀족원 의원 육군 소좌 | 모리 세이코(마쓰다이라 사다하루 자작의 딸) | 모리 모토히로(장남) 후쿠하라 모토히로(차남) 모리 모토호(셋째 아들) 모리 모토아쓰(넷째 아들) 히로사와 묘코(장녀, 히로사와 시신의 아내) |
31 | 모리 모토히로 | 선대의 장남 | 일본장기신용은행 근무 경제기획청 관료 제1호텔 이사 호후 모리보코회 회장 | 모리 나오코(오기하라 세이이치의 딸) | 모리 모토에이(장남) 무쓰시마 아키코(무쓰시마 타이의 아내) | ||
32 | 모리 모토에이 | 선대의 장남 | 히타치 금속 금속 재료 사업부 특수강 총괄부장 | ||||
9. 2. 도쿠야마 모리 가문
모리 스에미쓰(毛利季光)를 시조로 하는 일족으로 묘지(名字)인 '모리'(毛利)는 스에미쓰가 아버지 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로부터 물려받은 사가미국(相模国) 아이코군(愛甲郡) 모리 장(毛利荘, 현재 일본 가나가와현 도치기시 모리다이毛利台 주변)을 본관으로 한 데서 유래하였다.스에미쓰는 1274년 호지 합전(宝治合戦)에서 미우라 야스무라(三浦泰村)에게 세 아들과 함께 패사했다. 그러나 에치고국(越後国) 사쿄 장(佐橋荘,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과 아키국(安芸国) 요시다 장(吉田荘, 히로시마현 아키타카타시)을 영지로 가지고 있던 스에미쓰의 넷째 아들 쓰네미쓰(経光)는 난에 관여하지 않아 그 자손이 에치고 모리 씨(越後毛利氏)와 아키 모리 씨(安芸毛利氏)로 나뉘어 존속했다.
아키 모리 씨는 쓰네미쓰에게서 요시다 장(吉田荘)을 받은 넷째 아들 도키치카(時親)가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 초기에 요시다고오리 산(吉田郡山)으로 옮겨 거성(居城)을 지었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아키의 유력 고쿠진 영주(国人領主)로 성장했고, 야마나 씨(山名氏) 및 오우치 씨(大内氏)의 가신으로 번영했다.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오우치, 아마고 씨(尼子氏)를 멸하고 영지를 차지, 산요도(山陽道) ・ 산인도(山陰道) 10개 구니(国)와 규슈(九州) 북부 일부를 령국(領国)으로 둔 최대급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로 성장했다. 모토나리의 자식들이 양자로 들어간 깃카와 씨(吉川氏)와 고바야카와 씨(小早川氏)는 모리 본가의 중신으로 활약하며 '모리 양천'(毛利の両川)으로 불렸다.[43]
모토나리 사후 손자 데루모토(輝元)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항쟁했으나,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종속, 아키(安芸) 외 8개 구니 112만 석을 주인장(朱印状)으로 안도받았다. 본거지를 요시다고오리 산성에서 히로시마성(広島城)으로 옮기고, 오대로(五大老)에 취임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서군(西軍) 총대장으로 패전, 스오(周防) ・ 나가토(長門) 2개 구니 36만 9000석으로 감봉되었다. 1604년 나가토 국 아부 군(阿武郡) 하기성(萩城)에 입성, 에도 시대(江戸時代) 내내 거성(居城)으로 삼았다. 국주(国主)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이자 웅번(雄藩)으로, 지번(支藩)으로 조후번(長府藩), 도쿠야마번(徳山藩), 기요스에번(清末藩)이 있었다. 깃카와 가(吉川家) 이와쿠니번(岩国藩)은 실질적 지번과 같았으나, 공적으로는 조슈 번 번주 모리 가문 가신이었다.
에도 시대 말기 번주(藩主) 모리 다카치카(毛利敬親)의 개혁으로 조슈번(長州藩)에서 수많은 지사(志士)가 나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원동력이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모리 씨는 화족(華族)이 되었고, 조슈 번 모리 종가는 공작(公爵), 지번 모리 3가는 자작(子爵)이 되었다. 모리 종가 분가 모리 고로(毛利五郎) 가문, 일문 가신 미기타 모리 가(右田毛利家), 요시키 모리 가(吉敷毛利家)는 남작(男爵)이 되었다. 에도 시대 초기 후손이 없어 개역된 고바야카와 가문은 모리 모토노리(毛利元徳) 서자(余子)를 당주로 재흥, 남작 작위를 받았다.
9. 3. 조후 모리 가문
가마쿠라 막부의 만도코로 벳토이자, 오에노 히로모토의 넷째 아들인 모리 스에미쓰를 시조로 하는 일족이다. '모리'라는 묘지(名字)는 스에미쓰가 아버지 히로모토로부터 물려받은 사가미국 아이코군 모리 장(현재의 가나가와현 아쓰기시 모리다이 부근)을 본관으로 한 데서 유래했다. 중세에는 '모리'를 'もり'라고 읽었으나, 이후에는 '모우리(もうり)'라고 읽게 되었다.스에미쓰는 1247년 호지 전투에서 미우라 야스무라 측에 가담하여 세 아들과 함께 패사했다. 그러나 에치고국 사하시 장(현재의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과 아키국 요시다 장(현재의 히로시마현 아키타카타시)을 영지로 가지고 있던 스에미쓰의 넷째 아들 모리 쓰네미쓰는 이 난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자손은 에치고 모리 씨(쓰네미쓰의 적자 모리 모토치카 계통)와 아키 모리 씨(쓰네미쓰의 넷째 아들 모리 도키치카 계통)로 나뉘어 존속했다.
아키 모리 씨는 쓰네미쓰로부터 요시다 장을 물려받은 넷째 아들 도키치카가 남북조 시대 초기에 요시다 고리야마로 옮겨 거성을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아키 모리 씨는 무로마치 시대에 아키의 유력한 국인 영주로 성장하여 야마나 씨 및 오우치 씨의 가신으로 번영했다.
센고쿠 시대에 모리 모토나리가 등장하여 오우치 씨와 아마고 씨를 멸망시키고 그 영지를 차지했다. 최전성기에는 산요도·산인도 10개 국과 규슈 북부 일부를 영지로 삼는 최대 규모의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했다. 모토나리의 아들들이 양자로 들어간 깃카와 씨와 고바야카와 씨는 모리 본가의 중신으로 활약하며 '모리의 양천(료센)'으로 불렸다.
모토나리 사후, 손자 모리 데루모토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비호하며 오다 노부나가와 격렬하게 항쟁했다. 그러나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종속하여 아키 외 8개 국 112만 석[13]을 주인장으로 안도받았다. 또한 본거지를 요시다 고리야마 성에서 히로시마 성으로 옮겼다. 데루모토는 이후 고다이로에 취임했다.
그러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데루모토가 서군의 총대장이 되어 패전한 후, 모리 씨는 스오국·나가토국 2개 국 36만 9천 석으로 감봉되었다. 1604년 데루모토는 나가토 국 아부군 하기 성에 들어갔다. 이후 에도 시대 내내 이곳을 거성으로 삼았다(다만 막말에 모리 다카치카가 번청을 스오 국 야마구치로 옮겼다). 국주인 도자마 다이묘로서 웅번 중 하나로 꼽혔다. 조후번, 도쿠야마번, 기요스에번 등의 지번이 있었다. 깃카와 가문의 이와쿠니 번은 실질적으로는 다른 지번과 마찬가지로 영지의 자치가 인정되었으나, 공적으로는 조슈 번주 모리 가문의 가신으로 취급되어 '이와쿠니 령'이라고 불렸다.
에도 시대 말기에는 번주 모리 다카치카의 개혁으로 조슈번에서 수많은 지사가 나왔고, 메이지 유신을 성취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메이지 유신 이후 모리 씨는 화족이 되었고, 조슈 번의 모리 종가는 공작, 지번의 모리 3가는 자작이 되었다. 모리 종가의 분가인 모리 고로 가문 및 일문 가신이었던 미기타 모리 가문과 요시키 모리 가문은 남작이 되었다. 또한 에도 시대 초기에 후손이 없어 개역되었던 고바야카와 가문은 모리 모토노리의 서자를 당주로 하여 재흥되었고, 이들 집안도 남작 작위를 받았다. 메이지 시대에 모리 공작가는 시마즈 공작가, 마에다 후작가에 이어 부호 화족이었다.
9. 4. 기요스에 모리 가문
오에노 히로모토의 넷째 아들 모리 스에미쓰를 시조로 하는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御家人) 가문이다. 스에미쓰가 아버지 히로모토에게서 사가미국 아이코군 모리 장(毛利荘)을 물려받아 모리(毛利)를 묘지(名字)로 삼았다.1274년 호지(宝治) 원년에 일어난 호지 합전(宝治合戦)에서 미우라 야스무라에 의해 스에미쓰와 세 아들이 패하고 죽었다.[43] 그러나 에치고국 사쿄 장(佐橋荘)과 아키국 요시다 장(吉田荘)을 영지로 가지고 있던 스에미쓰의 넷째 아들 쓰네미쓰는 이 난에 관여하지 않아 살아남았다. 그 자손은 에치고 모리 씨(越後毛利氏)와 아키 모리 씨(安芸毛利氏)로 나뉘어 존속하였다.
아키 모리 씨는 쓰네미쓰에게서 요시다 장(吉田荘)을 받은 넷째 아들 도키치카가 난보쿠초 시대 초기에 요시다고오리 산(吉田郡山)으로 옮겨 그곳에 거성(居城)을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9. 5. 그 외 분가
가마쿠라 막부고케닌사가미 모리 장(庄) 영주
호지 전투에서 패사
하나조노인 모로쓰구의 아내
호조 도키요리의 아내
에치고 사하시 장 영주
아키 요시다 장 영주
모리 도키치카(넷째 아들・아키 모리 씨의 시조)
가마쿠라 막부고케닌
아키 요시다 장 영주
후쿠하라 히로요(다섯째 아들)
야마우치 히로미치의 아내
야마우치 도키미치의 아내
가네시게 모토치카(셋째 아들)
구니시 아리즈미의 아내
스기 오카타
모리 모토나리(차남)
아이오 모토쓰나(셋째 아들)
기타 스케카쓰(넷째 아들)
시부카와 요시마사의 아내
이노우에 모토미쓰의 아내
깃카와 모토쓰네의 아내
야마우치 도요미치의 아내
고바야카와 오키카게의 아내
교마쓰 마사모리의 아내
스기하라 모리시게의 아내
증정1위
센고쿠 다이묘
노미 오카타
나카노마루
깃카와 모토하루(차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셋째 아들)
호이다 모토키요(넷째 아들)
모리 모토아키(다섯째 아들)
데와 모토토모(여섯째 아들)
아마노 모토마사(일곱째 아들)
스에쓰기 모토야스(여덟째 아들)
모리 히데카게(아홉째 아들)
고류큐 (시시도 다카이에의 아내)
우에하라 모토마사의 아내
증정3위
무로마치 막부슈고 다이묘
요시미 히로요리의 아내
증종2위
아키히로시마 성주
도요토미 정권고다이로
세이타인(측실, 고다마 모토요시의 딸)
모리 나리타카(차남, 초대도쿠야마 번주)
깃카와 히로마사의 아내
마쓰다이라 다다마사의 아내
다카쓰카사 후사스케의 아내
증종3위
나시노키 나가히데의 딸(계실)
모리 요시히로(차남, 4대 조슈 번주)
모리 모토시게(다섯째 아들, 마쓰다이라 마사치카 양자)
마쓰다이라 요시유키의 아내
나이토 이치노부의 아내
모리 나리토요의 아내
모리 다다히로의 아내
마쓰다이라 타다마사의 아내
4대조슈 번주
5대조슈 번주
모리 무네히로(다섯째 아들, 6대 조슈 번주)
시마즈 쓰구토요의 아내
모리 모로유키의 아내
6대조슈 번주
8대조후 번주
7대조슈 번주
이이다 마사나오의 딸(측실)
무토 씨의 딸(측실)
다나카 씨의 딸(측실)
고노 미치사다의 딸(측실)
모리 하루치카(넷째 아들, 8대 조슈 번주)
모리 다다요시(다섯째 아들, 10대 조후 번주)
모리 지카아키(여섯째 아들)
야마우치 도요야스의 정실
아리마 요리타카의 아내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의 아내
다카쓰카사 스케히라의 아내
마쓰다이라 타다히로의 아내
마에다 도시노리의 아내
나이토 노부아키라의 아내
8대조슈 번주
고이즈미 씨의 딸(측실)
오카다 씨의 딸(측실)
모리 나리히로(차남, 10대 조슈 번주)
호소카와 오키나리(셋째 아들)
미즈노 타다아쓰(다섯째 아들)
9대조슈 번주
야마다 씨의 딸(측실)
10대조슈 번주
이케가미 후지타유의 딸(측실)
가네코 시게헤이의 딸(측실)
노나카 시게하치의 딸(측실)
모리 나리모토의 아내
소 요시아키라의 아내
모리 모토반의 아내
미즈노 타다타케의 아내, 후에 모리 모토쥰의 아내
11대조슈 번주
하라다 씨의 딸(측실)
다시로 씨의 딸(측실)
야마자키 씨의 딸(측실)
야마토 교잔의 딸(측실)
마스다 치카오키의 아내
다테 무네토쿠의 아내
12대조슈 번주
혼다 씨의 딸(측실)
증정1위
13대조슈 번주
14대조슈 번주(지번사)
초대공작
귀족원 의원
고바야카와 사부로(셋째 아들)
고바야카와 시로(넷째 아들, 남작)
모리 고로(다섯째 아들, 남작)
오무라 토쿠토시(여섯째 아들, 자작)
사이온지 하치로(여덟째 아들, 공작)
귀족원 의원
모리 미사코(산조 사네토미 공작의 딸)
고바야카와 모토하루(차남)
다이고 아키코(다이고 타다시게 후작 부인)
아타고 시게코(아타고 미치쓰네 자작 부인)
도다 하마코(도다 타다쓰구 자작 부인)
귀족원 의원
육군 소좌
후쿠하라 모토히로(차남)
모리 모토호(셋째 아들)
모리 모토아쓰(넷째 아들)
히로사와 묘코(장녀, 히로사와 시신의 아내)
경제기획청 관료
제1호텔 이사
호후 모리보코회 회장
무쓰시마 아키코(무쓰시마 타이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