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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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윤숙은 일제강점기 친일 활동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한 시인, 수필가, 국회의원이다. 1910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와 서울에서 교사, 기자로 활동하며 시를 발표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친일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광복 후에는 이승만 정부 수립에 기여하고 UN 한국 대표로 활동했다. 한국 전쟁 중에는 낙랑클럽을 이끌며 로비를 했으며, 이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정치 활동과 문단 활동을 병행했다.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으며, 사후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원상, 3·1 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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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모씨 - 모기윤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아동극 작가인 모기윤은 1931년 등단 후 아동극 작가로도 활동했으며, 해방 후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고 대학교수로 재직했고, 대표작으로 군가 《우리는 대한국군》이 있다. - 이화여자전문학교 동문 - 이희호
여성 운동가이자 사회 운동가였던 이희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배우자로서 여성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했으며, 영부인으로서 여성부 설치에 기여하고 남북 관계 개선에도 힘썼다. - 이화여자전문학교 동문 - 박마리아
박마리아는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과 광복 후 정치 권력 행사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4.19 혁명 이후 아들에게 살해당한 인물이다. - 호수돈여자고등학교 동문 - 박마리아
박마리아는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과 광복 후 정치 권력 행사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4.19 혁명 이후 아들에게 살해당한 인물이다. - 호수돈여자고등학교 동문 - 김경아 (탁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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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윤숙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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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모윤숙 |
한자 이름 | 毛允淑 |
로마자 표기 | Mo Yunsuk |
별칭 | 영운(嶺雲) |
영어 이름 | 메리 앤 모(Mary Ann Moh) |
출생일 | 1910년 3월 5일 |
출생지 | 함경남도 원산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사망일 | 1990년 6월 7일 (향년 80세)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
묘지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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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
모교 | 이화여자전문학교 |
직업 | |
주요 직업 | 시인, 소설가, 수필가, 언론인 |
종교 | |
종교 | 개신교(감리회) |
가족 | |
배우자 | 안호상(이혼) |
부모 | 모학수(부) |
형제 | 모기윤(남동생) |
친척 | 모혜정(친정 조카딸), 장회익(친정 조카사위) |
경력 | |
주요 경력 | 한국여성문인협회 고문 |
작품 활동 | |
데뷔 | 1935년, 『시원』 동인 활동 |
대표 작품 | 한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
2. 생애
모윤숙은 1910년 3월 5일 함경남도 원산시에서 태어났으며, 필명은 영운이다.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개성 호수돈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3] 어린 시절 첩보원 혐의를 받은 김수임 등과 교류했다.[2] 간도 명신학교와 배화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삼천리사와 중앙방송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1940년 시 "조선의 딸"과 "이 생명"을 썼다는 이유로 일제 경기도 경찰서에 구금되었다.[3] 해방 후에는 이화여대·서울대 강사 등으로 일했다. UN 한국 임시 위원단 의장인 인도 외교관 K. P. S. Menon영어과 교류하며, 남북 통일 정부를 지지했던 메논을 설득해 초대 총선거가 UN 감시하에 치러지도록 하고, 이승만의 의향대로 한반도 남반부 단독 건국이 순조롭게 진행되는데 기여하였다. 1948년에는 UN 한국 대표로 참여했다.
1954년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창립에 참여하여, 이후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국회의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90년 6월 7일에 사망했다.[3] 사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
2. 1. 일제 강점기 (1910-1945)
모윤숙은 함경남도 원산시에서 태어났으며, 필명은 영운이다.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개성 호수돈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3] 간도 명신학교와 배화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삼천리사와 중앙방송에서 기자로 활동했다.1940년 시 "조선의 딸"과 "이 생명"을 썼다는 이유로 일제 경기도 경찰서에 구금되었다.[3] 이후 태평양 전쟁 시기 조선문인협회 간사, 조선임전보국단 경성지부 발기인·부인대 간사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 행적을 보였고,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다.
2. 1. 1. 출생과 초기 활동 (1910-1931)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후, 개성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경성부 이화여자전문학교 예과에 입학하였다.1928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여 1931년 졸업하였다. 그해 친지의 주선으로 만주 북간도 용정에 있는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 교사로 취직하였다. 이후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피로 색인 당신의 얼골을〉(1931)을 《동광》에 발표하면서 등단, 교사, 기자, 시인으로 활동했다. 1932년 서울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2]
2. 1. 2. 작품 활동과 친일 행적 (1931-1945)
1933년 철학자 안호상과 결혼했으나 이혼했고, 이후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친일 단체에 가입하여 강연 및 저술 활동으로 전쟁에 협력했다. 조선문인협회 간사로 친일 강연을 했고,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교화단체연합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2), 국민의용대(1945)에 가담했으며,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에 친일 논설을 기고했다.[2]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 논리를 형상화한 〈동방의 여인들〉(1942)을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고, 《매일신보》에는 〈호산나 소남도〉(1942)라는 전쟁 찬양 시를 발표했다. 지원병 참전을 독려하는 시 〈어린 날개 - 히로오카(廣岡) 소년 학도병에게〉(1943), 〈아가야 너는 - 해군 기념일을 맞아〉(1943), 〈내 어머니 한 말씀에〉(1943) 등을 연달아 발표하는 등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2] 이 시기 비슷한 주제의 시를 창작한 노천명과 함께 문인 중 가장 노골적인 친일파로 분류되고 있다.[2]
2. 2. 해방 이후 (1945-1990)
모윤숙은 일제강점기 말, 많은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작품을 일본의 정치 정책에 맞춰야 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다시 한번 애국적인 충동에 자유를 부여하여, 당시 지배적인 민족주의적 의식을 기념하는 매우 고무적인 애국적 작품을 썼다.[4]해방 후, 모윤숙은 이화여대·서울대 강사 등의 일을 했다. UN 한국 임시 위원단 의장인 인도 외교관 K. P. S. Menon영어과의 교유 관계를 통해 남북 통일 정부를 지지했던 메논을 설득, 초대 총선거가 UN 감시하에 치러졌고, 이승만의 의향대로 한반도 남반부의 단독 건국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48년에는 UN 한국 대표로 참여해 1949년 2월에 메논의 초대를 받아 인도에 1개월간 체류했으며, 네루의 환영 만찬회에도 참석했다. 1949년에는 문예지 『문예』를 창간했다.
1954년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의 창립에 참여하여, 이후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부위원장이 되었다. 국회의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2. 2. 1.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여 (1945-1950)
1948년 UN 한국위원회에 참여하여 크리슈나 메논 등을 설득해 단독 정부 수립 지지 입장에 서도록 했다.[11]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UN총회에도 파견되었다.[11] 광복 후 미군정 하에서부터 이승만과 밀착하여 단독 정부 수립에 협력하였다. 1948년 3월 12일 크리슈나 메논 유엔한국위원장이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하던 것을 찬성표를 던지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1]
귀국 후 이화여자대학교에 강사로 출강하여 국문학을 강의하였고, 1949년 월간 순수문예지 ≪문예 藝術≫를 창간하였으며, 김구의 국민장에 참석하여 추도시를 낭독하였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모윤숙을 즉결 처형하고 시신은 탱크에 매달고 다녔다는 소문이 나돌았을만큼 극우 문단에서도 대표적인 이승만 계열 인물이었다.[12] 모윤숙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점령 하의 석 달 동안의 체험을 극도로 부정적인 입장에서 기억하고 묘사했는데, 이와 같은 관점은 오랫동안 남한에서 한국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주류를 이루고 남한의 공식 입장을 대변했다.[12]
한국 전쟁 중에 낙랑클럽을 이끌고 고위 미국인들을 상대로 로비를 하였는데, 모윤숙은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논개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 때 접대한 사람은 덜레스 미 국무장관, 리지웨이, 콜터, 밴프리트 장군과 무쵸 대사 등이었다. 그는 후일에 "김활란 박사가 외국인과 대화하는 매너와 에티켓을 지도했고, 서툴지만 사교 댄스도 추었으며 때론 미인계도 썼지 뭐"라고 말하기도 하였다.[13]
1951년 부산 피난지에서 열린 이화여자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휴전 후에는 계속 이화여대 교수로 출강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선무 방송에 참여해 종군하였고, 이후로는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1955년 국제펜클럽 한국측 대표로 참가하였고, 이후 1960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을 지냈다.
UN 한국 임시 위원단 의장인 인도 외교관 K. P. S. Menon영어과의 교유 관계를 통해 남북 통일 정부를 지지했던 메논을 설득했다. 그 결과, 한국의 초대 총선거가 UN 감시하에 치러졌고, 이승만의 의향대로 한반도 남반부의 단독 건국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48년에는 UN 한국 대표로 참여해 귀국 직전인 1949년 2월에 메논의 초대를 받아 인도에 1개월간 체류했으며, 네루의 환영 만찬회에도 참석했다.
1950년 서울 사수를 호소하는 즉흥시를 생방송으로 방송했던 모윤숙도 조선인민군의 침략을 피하지 못했다. 한때 한강에서 익사했다는 뉴욕 타임스의 오보도 나왔지만, 후에 생존해 있었음이 밝혀지자, 당시 인도 외무 서기 메논은 주일본 인도 대사에게 모윤숙을 찾아 일본으로 피신시키라고 제안했다. 9월 30일 유엔군 덕분에 한국으로 돌아온 경무대에서 거짓 녹음 방송을 한 이승만을 만나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승만의 넥타이를 잡고 "할아버지, 저를 부려먹고 마지막에는 방송도 시키고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피난 가셨습니까?"라고 규탄했다.
2. 2. 2. 한국 전쟁과 종군 활동 (1950-1953)
한국 전쟁 발발 후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모윤숙을 즉결 처형하고 시신은 탱크에 매달고 다녔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만큼 극우 문단에서도 대표적인 이승만 계열 인물이었다. 모윤숙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점령 하의 석 달 동안의 체험을 극도로 부정적인 입장에서 기억하고 묘사했는데, 이와 같은 관점은 오랫동안 남한에서 한국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주류를 이루고 남한의 공식 입장을 대변했다.[12]1950년 서울 사수를 호소하는 즉흥시를 생방송으로 방송했던 모윤숙도 조선인민군의 침략을 피하지 못했다. 한때 한강에서 익사했다는 뉴욕 타임스의 오보도 나왔지만, 후에 생존해 있었음이 밝혀졌다.
한국 전쟁 중에 그는 낙랑클럽을 이끌고 고위 미국인들을 상대로 로비를 하였는데, 모윤숙은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논개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때 접대한 사람은 덜레스 미 국무장관, 리지웨이, 콜터, 밴프리트 장군과 무쵸 대사 등이었다. 그는 후일에 "김활란 박사가 외국인과 대화하는 매너와 에티켓을 지도했고, 서툴지만 사교 댄스도 추었으며 때론 미인계도 썼지 뭐"라고 말하기도 하였다.[13]
1951년 부산의 피난지에서 열린 이화여자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휴전 후에는 계속 이화여대 교수로 출강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선무 방송에 참여해 종군하였다. 9월 30일 유엔군 덕분에 한국으로 돌아온 경무대에서 거짓 녹음 방송을 한 이승만을 만나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승만의 넥타이를 잡고 "할아버지, 저를 부려먹고 마지막에는 방송도 시키고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피난 가셨습니까?"라고 규탄했다.
이후 1955년 국제펜클럽 한국 측 대표로 참가하였고, 1960년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장을 지냈다.
2. 2. 3. 정치 활동과 문단 활동 (1953-1990)
1954년,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창립에 참여하여 이후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부위원장을 역임했다.[3] 1971년에는 민주공화당 공천으로 제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국민훈장 모란장, 3·1문화상 등을 수여받았다.[2] 제5공화국에서는 문학진흥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1981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2] 1989년 작가 분야에서 은퇴하고 같은 해 예술원 원로회원에 추대되었다.[2] 그 외에도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3]3. 주요 작품
모윤숙의 초기 시는 억눌린 열정을 직설적이고 생생한 이미지로 날카롭게 묘사하는 특징을 보이지만, 피상적인 감상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4] 그녀의 작품은 대담하고 활기차며 때로는 넘쳐흐르는 듯하지만, 한 명의 대상에게만 향하지 않고, 한국이라는 국가를 향한 강렬한 애국심을 드러내며 역사, 국토, 자연, 지방 문제 등으로 뻗어 나갔다.[4]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정치 정책에 맞춰 작품 활동을 해야 했고,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언급이 없는 순수시를 쓰는 방향으로 전환했다.[4] 그러나 해방 후에는 다시 애국적인 작품을 쓰며 민족주의적 의식을 기념했다.[4]
3. 1. 시집
- 《렌의 애가》 (1937) - 산문시집[4]
- 《빛나는 지역(地域)》(1933)[10]
- 《옥비녀》(1947)
- 《풍랑》(1951)
- 《정경(情景)》(1959)
- 《풍토(風土)》(1970)
- 《논개(論介)》(1974)
- 《모윤숙 시전집》(1974)
-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1980)
- 《모윤숙 전집》(1982)
모윤숙의 초기 시는 피상적인 감상주의와 감상에 젖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억눌린 열정을 직설적이고 생생한 이미지로 날카롭게 묘사하는 특징을 보인다.[4]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대담하고 활기차며 때로는 넘쳐흐르지만, 항상 한 명의 사랑하는 대상에게만 향하지는 않는다.[4] 그녀의 자유로운 감정 발산의 대상은 종종 한국이라는 국가였다.[4] 그녀의 강렬하고 종종 좌절된 애국심은 역사, 국토, 자연, 지방 문제로 뻗어 나갔다.[4]
1940년, 모윤숙은 여전히 출판과 집필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지만, 많은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작품을 일본의 정치 정책에 맞춰야 했다.[4] 압제적인 식민 통치하에서 그녀는 점차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언급이 전혀 없는, 순수하고 비물질적인 서정시인 '순수 시'를 쓰는 방향으로 전환했다.[4] 그러나 해방 후 그녀는 다시 한번 애국적인 충동에 자유를 부여하여, 당시 지배적인 민족주의적 의식을 기념하는 매우 고무적인 애국적 작품을 썼다.[4]
3. 2. 수필집
- 《내가 본 세상》(1953)
- 《포도원》(1960)
- 《구름의 연가(戀歌)》(1964)
- 《느티의 일월》(1976)
3. 3. 전집
- 1974년, 《모윤숙 시 전집》
- 1982년, 《모윤숙 전집》
4. 평가
모윤숙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초기 시는 감상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억눌린 열정을 생생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정책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고, 해방 이후에는 민족주의적 의식을 고취하는 작품을 썼다.[4]
4. 1. 부정적 평가
1991년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의 친일파 708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총 12편의 친일 작품이 밝혀져[14]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그녀의 초기 시는 피상적인 감상주의와 감상에 젖는다는 비판을 종종 받았지만, 억눌린 열정을 직설적이고 생생한 이미지로 날카롭게 묘사하는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대담하고 활기차며 때로는 넘쳐흐르지만, 항상 한 명의 사랑하는 대상에게만 향하지는 않는다. 그녀의 자유로운 감정 발산의 대상은 종종 한국이라는 국가였다. 그녀의 강렬하고 종종 좌절된 애국심은 역사, 국토, 자연, 지방 문제로 뻗어 나갔다. 1940년 모윤숙은 출판과 집필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지만, 많은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정치 정책에 맞춰야 했다. 압제적인 식민 통치하에서 그녀는 점차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언급이 전혀 없는, 순수하고 비물질적인 서정시인 '순수 시'를 쓰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해방 후 그녀는 다시 한번 애국적인 충동에 자유를 부여하여, 당시 지배적인 민족주의적 의식을 기념하는 매우 고무적인 애국적 작품을 썼다.[4]
5. 수상
- 국민훈장 모란장
- 예술원상
- 3·1 문화상
6. 역대 선거 결과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1971년 |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민주공화당 | 6,254,921표 (48.8%) | 전국구 12번 | 당선 | 초선 |
참조
[1]
웹사이트
모윤숙
http://people.search[...]
Naver
2013-11-12
[2]
뉴스
AP IMPACT: Truth emerges too late for Kim Soo-im
https://www.usatoday[...]
2012-09-20
[3]
웹사이트
Mo Yunsuk
http://klti.or.kr/ke[...]
[4]
웹사이트
Mo Yunsuk
http://klti.or.kr/ke[...]
[5]
웹사이트
건국을 도와준 '고마운 인도인' 메논, 그리고 모윤숙
https://www.newdaily[...]
2023-10-23
[6]
웹사이트
과기자문회의 홍일점
http://srchdb1.chosu[...]
2023-10-23
[7]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www.rokps.or[...]
2022-07-25
[8]
웹사이트
모윤숙(毛允淑)
http://encykorea.aks[...]
2022-07-25
[9]
웹사이트
네이버 인물검색 - 모윤숙
https://web.archive.[...]
2023-08-17
[10]
웹사이트
한국현대문학대사전
http://terms.naver.c[...]
[11]
웹사이트
[길을 찾아서] 야합이 낳은 ‘반쪽 건국’ / 정경모
http://www.hani.co.k[...]
[12]
서적
전쟁과 사회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돌베개 (서울)
2000-06-01
[13]
웹사이트
모윤숙 시인-팬클럽의 대모
http://www.dsb.kr/de[...]
[14]
저널
친일문학 작품 목록
https://web.archive.[...]
2007-09-03
[15]
간행물
역사비평:1994년 여름호
역사비평사
1994
[16]
문서
극중 모윤숙 언급
[17]
문서
극중 모윤숙을 모델로 한 문석경 역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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