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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호 (18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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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태호는 1834년에 태어나 갑신정변 때 암살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1870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으며, 민씨 척족의 일원으로 세도 정치를 펼쳤다. 고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딸이 순명효황후로 간택되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다. 개화 정책을 추진하고 통리기무아문 당상 등을 역임했으나,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일파에게 암살되었다. 사후 충문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순종 즉위 후 여은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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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호 (1834년)
기본 정보
민태호
민태호의 초상
한글민태호
한자閔台鎬
로마자 표기Min Tae-ho
생애
출생1834년
사망1884년 (향년 50세)
본관여흥 민씨
경오(景五)
관력
주요 관직형조판서
공조판서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도승지
규장각 직제학

2. 생애

민치오(閔致五)의 장남으로, 동도서기파 유학자 유신환(兪莘煥)의 제자였다. 1870년 과거 문과에 급제하여, 같은 해 정3품에 올랐다. 병조 참지, 승정원 승지를 거쳐 춘천부사, 황해도관찰사,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874년 종2품에 올랐다.

1874년 민승호가 갑자기 사망하자 고종은 민태호의 장자 민영익을 그의 양자로 삼도록 명했고, 동생 민규호의 설득으로 이를 승낙했다. 1879년 호조 참판, 이조 참판에 취임하여 정2품에 오른 후 형조, 예조, 병조의 각 판서, 의정부 좌찬성, 총융사, 어영대장, 무위도통사 등의 중책을 역임했고, 1882년에는 정1품에 올랐다.

개화 정책을 추진하여 통리기무아문 당상, 통리기무아문사를 맡았으며, 1881년 신사척사 상소 운동을 진압했다. 또한 딸이 왕세자빈(후의 순명효황후)이 되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다. 사대당(事大黨)의 대표적 인물로서 청나라와의 접근을 시도했지만, 1884년 갑신정변으로 조영하 등과 함께 김옥균 등에 의해 살해되었다.

2. 1. 관직 진출과 척족 세력 형성

1870년 문과 별시(別試)에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1] 1874년 민씨 척족의 수장인 민승호가 갑자기 죽자 고종은 민승호에게 충정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런데 민승호에겐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민왕후는 가까운 친척을 배척하고 촌수가 좀 먼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을 양자로 삼겠다고 했다.[1] 그러자 민태호는 반대하였고 그의 동생 민규호가 형을 협박했다. "천의(왕후의 뜻)를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양자를 보내어 함께 부귀를 누리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민승호의 양자로 들어갔고, 뒤이어 민규호는 이조판서 겸 도통사가 되었다.[1]

민씨 척족의 수장으로 세도를 부리던 민승호가 갑자기 폭사하자, 사람들은 흥선대원군을 의심하였다. 민승호와 그의 아들이 동시에 폭사했으므로 민씨 일족들은 자신의 아들을 민승호의 사후 양자로 세우기 위해 각자 암투와 경쟁을 벌였다. 하지만 민왕후는 만약을 대비하여 오빠의 사후 양자로 민영익을 일찌감치 점지해둔 상태였다.[2] 민태호는 아무리 일가라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양자로 줄 수 없다고 버텼지만, 민규호 등과 민왕후의 거듭된 설득으로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2] 민태호는 품에서 아들을 잃은 대신 권세를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민왕후는 친정아버지의 제사를 받드는 유일한 혈육인 민영익을 끔찍이 아꼈다. 촌수로는 조카였지만, 나이 차이가 9세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친동생처럼 친하게 대했다.[2]

1875년 경기도 감사를 지냈고, 1878년 딸이 순종의 비인 순명효황후로 간택되었다. 이후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다.

1883년 통리군국사무아무독판, 그 뒤 총융사, 어영대장, 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 대제학 등을 지냈다. 민씨 척족의 중심인물로서 1882년 임오군란 때,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있었는데 민태호의 집도 습격을 받았다.

그 뒤 종일품으로 승진하여 의정부좌찬성을 지냈고 1883년 7월 전환국 관리사무(典圜局管理事務), 9월 군국사무독판을 거쳐 다시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

2. 2. 요직 역임과 개화 정책 추진

1870년 문과 별시에 병과로 합격하였다. 1874년 민씨 척족의 수장인 민승호가 갑자기 죽자, 고종은 민승호에게 충정이란 시호를 내렸다. 민승호에겐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민왕후는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을 양자로 삼겠다고 했다.[1] 민태호는 반대하였고, 그의 동생 민규호가 "천의(왕후의 뜻)를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양자를 보내어 함께 부귀를 누리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라며 형을 협박했다.[1] 그래서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은 민승호의 양자로 들어갔다.[1]

1875년 경기도감사를 지냈고, 1878년 딸이 순종의 비인 순명효황후로 간택되었다. 이후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다.

1883년 통리군국사무아무독판, 총융사, 어영대장, 무위도통사(武衛都統使), 대제학 등을 지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강화유수로 있었는데, 민태호의 집도 습격을 받았다.

그 뒤 종일품으로 승진하여 의정부좌찬성을 지냈고 1883년 7월 전환국 관리사무, 9월 군국사무독판을 거쳐 다시 의정부좌찬성이 되었다. 왕가의 외척으로 사대당(事大黨)의 대표적 인물로서 활약하였다.

2. 3. 갑신정변과 피살

1882년 임오군란 때 강화유수로 있었는데, 민태호의 집도 습격을 받았다.[1] 그 뒤 종일품으로 승진하여 의정부좌찬성을 지냈고, 1883년 7월 전환국 관리사무, 9월 군국사무독판을 거쳐 다시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1] 왕가의 외척이자 사대당(事大黨)의 대표적 인물로 활동하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윤태준, 전영사(前營使) 한규직,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조영하, 해방총관(海防總管) 민영목, 내시 유재현 등과 함께 입궐하던 중 경우궁 대청 앞에서 김옥균 일파가 보낸 군사에게 쫓기다가 칼에 맞아 암살되었다.[1]

사후 충문공(忠文公)의 시호가 내려졌고, 10월 24일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1] 고종이 보낸 승지가 직접 제사를 지냈으며, 3년치의 녹봉이 내려졌다.[1] 1907년 순종 즉위 후 이윤용의 상소로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이 추증되었다.[1]

2. 4. 사후

1884년 갑신정변 때 윤태준(尹泰駿), 전영사(前營使) 한규직(韓圭稷),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조영하(趙寧夏), 해방총관(海防總管) 민영목(閔泳穆), 내시 유재현(柳載賢) 등과 함께 입궐하던 중 경우궁 대청 앞에서 김옥균 일파가 보낸 군사에게 쫓기다가 칼에 맞아 암살되었다.[1]

사후 충문공(忠文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10월 24일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고종이 보낸 승지가 직접 제사를 지냈으며 3년치의 녹봉이 내려졌다. 1907년 순종 즉위 후 이윤용의 상소로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이 추증되었다.

3. 평가

글씨에 능하여 전서(篆書), 예서(隸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 다양한 서체를 모두 잘 썼다고 한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고조부민형수(閔亨洙)
증조부민백상(閔百祥)
조부민홍섭(閔弘燮)
아버지민치오(閔致五)
양증조부민백흥(閔百興)
양조부민상섭(閔相燮)
양아버지민치삼(閔致三)
부인정경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 파성 부부인(坡城府夫人)으로 추증
부인정경부인 진천송씨(鎭川宋氏), 진양 부부인(鎭陽府夫人)으로 추증
부인의창부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3]
장남민영익(閔泳翊, 1860년~1914년) - 민승호에게 입적
양자민영린(閔泳璘, 1873년~ 1932년) - 생부 민술호(閔述鎬)
장녀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 1872년~1904년, 순종의 황후)


5. 대중 매체에서

참조

[1] 서적 매천야록 일문서적 2011
[2] 뉴스 민영익 등 보빙사 큰절로 禮 갖춰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9-05-16
[3] 문서 생전에 의창부부인(宜昌府夫人)에 봉작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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