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민영목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민영목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인현왕후의 친족이자 명성황후의 11촌 조카이다. 1871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며,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며 서양 기술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고종의 친정 이후 개화 정책을 지지하며 외교 활동에 참여, 영국, 독일과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발간에 기여했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수구당 인물로 지목되어 개화당에 의해 살해되었고, 정변 진압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북사담초》가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수구파 - 명성황후
    명성황후는 1851년 민치록의 딸로 태어나 고종의 왕비가 되었으며, 개화 정책을 추진하고 외세의 개입을 겪었으며, 을미사변으로 시해된 후 명성태황후로 추존되었다.
  • 수구파 - 송병준
    송병준은 성리학자 송시열의 8대손이었으나 서출 출신으로, 무과 급제 후 관료 생활을 하다가 갑신정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김옥균의 동지가 되었지만, 러일전쟁 이후 친일파로 전향하여 일진회 조직 및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기여하고 고종 황제 퇴위에도 관여한 인물이다.
  • 갑신정변 - 김홍집
    김홍집은 조선 말기 온건 개화파 정치가로서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후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주도했으나, 친일 정책과 단발령으로 민심을 잃고 아관파천 때 살해당하며 조선 근대화에 기여했으나 일본 간섭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 갑신정변 - 유길준
    유길준은 조선 후기 개화 사상가이자 정치가, 언론인으로, 서구 문물을 접한 후 갑신정변 연루, 갑오개혁 참여, 아관파천 이후 망명, 애국계몽운동 전개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나, 근대화에 기여했음에도 친일 행적에 대한 비판도 있는 인물이다.
  • 1826년 출생 - 스티븐 포스터
    스티븐 포스터는 19세기 미국의 작곡가로, 189곡 이상의 가곡을 통해 미국 대중음악 발전에 기여했으며, 대표곡으로는 "오! 수잔나", "캠프타운 경주" 등이 있고, 블랙페이스 민스트럴 쇼 연관성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미국 남부 문화를 다룬 그의 음악은 현재까지도 미국 대중문화에 영향을 주고 있다.
  • 1826년 출생 - 오시마 타카토
    오시마 타카토는 일본 모리오카 출신의 근대 제철 기술자로, 란학 및 채광 기술을 습득하여 일본 최초의 상용 고로를 완성하고 일본 광업계 발전에 기여하여 "일본 근대 제철의 아버지"로 불린다.
민영목
기본 정보
민영목의 초상
민영목의 초상
본관여흥(驪興)
성오(聖五)
둔옹(遯翁)
시호충문(忠文)
생몰년1858년 ~ 1927년
가족 관계아버지: 민치상
어머니: 이씨 (완산)
배우자: 정경부인 한산 이씨
아들: 민병억
손자: 민건식
주요 경력형조판서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궁내부대신
의정부찬정
중추원의장
관력
품계정1품
관직형조판서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궁내부대신
의정부찬정
중추원의장
봉작자작
서훈
훈장대훈위 금척대훈장

2. 생애

1871년 성균관 유생으로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그해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1872년 부수찬이 된 후, 그해 7월 김수현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남정익(南廷益)을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파견할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이후 박규수, 오경석, 윤웅렬 등과 함께 서양 기술 도입과 개국통상의 유용성을 강조하였다. 귀국 후 교리가 되고, 1873년 홍문관 응교로 재직 중 흥선대원군을 탄핵한 최익현의 상소가 올라오자, 다른 홍문관 관원들과 함께 자신의 과실을 탄핵하였다. 이어 최익현을 국문하고 죄줄 것을 여러 번 건의하였다.

1873년 겨울 청나라동지사가 파견될 때 동지하절정사(冬至賀節正使)로 임명되어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이때 만청려 등 청나라 외교관들과의 면담, 시문을 주고 받은 내용을 북사담초라는 책으로 펴냈다.

1874년 고종의 친정 후 원손 우유선(右諭善)에 임명되었고, 1875년 이조참의를 거쳐 겸보덕(兼輔德)으로 재직 중 순종의 왕세자 책례식에 예모관(禮貌官)으로 참석하였다. 세자책봉식 후 당상관으로 승진, 여러 벼슬을 거쳐 1878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1879년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 1880년 공조판서를 거쳐 1881년 이조판서로 승진했으며, 곧이어 군무변정기연사당상(軍務邊情譏沿司堂上)과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82년 여름 임오군란 때 변장하여 도주한 명성황후를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장례를 치를 때 대호군(大護軍)으로 종척 집사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곧 이회정(李會正), 정범조(鄭範朝) 등과 함께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어 장례를 주관하고, 흥선대원군, 이회정, 정범조 등과 함께 빈전에 상주하기도 하였다. 그 뒤 8월에 되돌아온 명성황후를 맞이하였고, 명성황후를 영접한 관리들을 포상할 때 가자되어 종1품으로 승진하였다.

명성황후의 개화정책을 받들어 민규호 등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폐쇄적이라며 비판하였고, 개항론을 내세워 영국,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주장하였다. 1882년 8월 판의금부사로 특별 승진, 행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11월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부임하기 전에 경상도관찰사로 개정 임명되었다.

1883년(고종 20년)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어 전권대사로 영국, 독일을 대상으로 조영(朝英) 및 조독수호조약(朝獨修好條約)을 조인하였다.[1] 같은 해 1월 일본과 부산구설해저전선조관(釜山口設海底電線條款)을 체결하였고,[1] 6월말 전권대신(全權大臣)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어 일본의 변리 공사(辨理公使)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를 만나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해관세칙(海關細則), 일본인 어채범죄자 처리조규(日本人漁採犯罪者條規) 등의 어업 조약과 일본인들의 통행문제를 담은 조선국간행이정약조(朝鮮國間行里程約條) 등을 조인하였다.[1] 8월 인천일본조계조약(仁川日本租界條約)을 체결하였다.[1] 9월 숭록대부(崇祿大夫) 행 의정부좌참찬 겸 규장각제학 세자시강원좌부빈객(行議政府左參贊兼奎章閣提學世子侍講院左副賓客)으로 조영수호조약 체결에 참여하였다.[1]

1883년 박문국 당상으로 박영효, 유길준, 김윤식 등과 함께 조선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를 발간하였다. 민승호민겸호가 연이어 죽자 민태호, 민영익, 민응식 등과 함께 민씨 척족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 이른바 사민체제(四閔體制)를 구축,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되었다.

1884년 일본 서리공사 시마 부리다나에게 공함(公函)을 보내 일본 선박 천수환(天壽丸) 선장이 울릉도장과 결탁하여 울릉도 목재를 밀반출한 사건에 대해 항의하였다. 같은 해 3월 독판교섭 통상사무(朝鮮督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어 청나라 청국총변조선상무(淸國總辦朝鮮商務) 진수당(陳樹棠)과 인천항 중국 상인 거주 지역 관련 규정인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 체결에 참여하였다.

1884년 5월 좌부빈객과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5월 말 판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 처음에는 개화 정책에 찬성했으나, 이후 민태호, 민영익, 민응식과 사민체제를 구축하여 권력 핵심 인물이 되면서 김옥균, 서재필, 윤치호 등 급진 개화파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1884년 10월 18일 갑신정변 때 병조판서로 재직 중 김옥균, 서재필 등 개화당 인사들에 의해 조영하, 민태호 등과 경우궁으로 입궐하던 중 고영석, 황용택, 윤경순이 이끄는 난군의 총에 맞아 참살당하였다.

2. 1. 출생과 가계

본래 인현왕후의 큰아버지인 민시중의 후손으로, 민시중의 차남 민진주의 5대손 민달용(閔達鏞)의 아들이었으나[2], 민유중의 아들 민진후의 5대손 민태용(閔泰鏞)에게 입양되었다.[3] 실제로는 명성황후에게도 15촌 조카가 되나 민태용의 양자가 되면서 11촌 조카가 되었다.

민진후의 아들 민익수는 명성황후의 고조부였고, 다른 아들 민우수는 양아버지 민태용의 고조부였다.

2. 2.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

1871년 성균관 유생으로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그해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1872년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872년 7월 김수현(金壽鉉)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남정익(南廷益)을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파견할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이후 박규수, 오경석, 윤웅렬 등과 함께 서양 기술 도입과 개국통상의 유용성을 강조하였다. 귀국 후 교리(校理)가 되고, 1873년 홍문관 응교로 재직 중 흥선대원군을 탄핵한 최익현의 상소가 올라오자, 다른 홍문관 관원들과 함께 자신의 과실을 탄핵하였다. 이어 최익현을 국문하고 죄줄 것을 여러 번 건의하였다.

1873년(고종 10) 겨울 청나라동지사가 파견될 때 동지하절정사(冬至賀節正使)로 임명되어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이때 만청려 등 청나라 외교관들과의 면담, 시문을 주고 받은 내용을 북사담초라는 책으로 펴냈다.

2. 3. 관료 생활과 정치, 외교 활동

1874년 고종의 친정 후 원손 우유선(右諭善)에 임명되었고, 1875년 이조참의를 거쳐 겸보덕(兼輔德)으로 재직 중 순종의 왕세자 책례식에 예모관(禮貌官)으로 참석하였다. 세자책봉식 후 당상관으로 승진, 여러 벼슬을 거쳐 1878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1879년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 1880년 공조판서를 거쳐 1881년 이조판서로 승진했으며, 곧이어 군무변정기연사당상(軍務邊情譏沿司堂上)과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82년 여름 임오군란 때 변장하여 도주한 명성황후를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장례를 치를 때 대호군(大護軍)으로 종척 집사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곧 이회정(李會正), 정범조(鄭範朝) 등과 함께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어 장례를 주관하고, 흥선대원군, 이회정, 정범조 등과 함께 빈전에 상주하기도 하였다. 그 뒤 8월에 되돌아온 명성황후를 맞이하였고, 명성황후를 영접한 관리들을 포상할 때 가자되어 종1품으로 승진하였다.

명성황후의 개화정책을 받들어 민규호 등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폐쇄적이라며 비판하였고, 개항론을 내세워 영국,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주장하였다. 1882년 8월 판의금부사로 특별 승진, 행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11월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부임하기 전에 경상도관찰사로 개정 임명되었다.

2. 3. 1. 정치 활동

1874년 고종의 친정 후 원손 우유선(右諭善)에 임명되었고, 1875년 이조참의를 거쳐 겸보덕(兼輔德)으로 재직 중 순종의 왕세자 책례식에 예모관(禮貌官)으로 참석하였다. 세자책봉식 후 당상관으로 승진, 여러 벼슬을 거쳐 1878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1879년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 1880년 공조판서를 거쳐 1881년 이조판서로 승진했으며, 곧이어 군무변정기연사당상(軍務邊情譏沿司堂上)과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882년 여름 임오군란 때 변장하여 도주한 명성황후를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장례를 치를 때 대호군(大護軍)으로 종척 집사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곧 이회정(李會正), 정범조(鄭範朝) 등과 함께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어 장례를 주관하고, 흥선대원군, 이회정, 정범조 등과 함께 빈전에 상주하기도 하였다. 그 뒤 8월에 되돌아온 명성황후를 맞이하였고, 명성황후를 영접한 관리들을 포상할 때 가자되어 종1품으로 승진하였다.

명성황후의 개화정책을 받들어 민규호 등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폐쇄적이라며 비판하였고, 개항론을 내세워 영국,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주장하였다. 1882년 8월 판의금부사로 특별 승진, 행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11월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부임하기 전에 경상도관찰사로 개정 임명되었다.

2. 3. 2. 외교 조약 체결

1883년(고종 20년)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어 전권대사로 영국, 독일을 대상으로 조영(朝英) 및 조독수호조약(朝獨修好條約)을 조인하였다.[1] 같은 해 1월 일본과 부산구설해저전선조관(釜山口設海底電線條款)을 체결하였고,[1] 6월말 전권대신(全權大臣)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어 일본의 변리 공사(辨理公使)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를 만나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해관세칙(海關細則), 일본인 어채범죄자 처리조규(日本人漁採犯罪者條規) 등의 어업 조약과 일본인들의 통행문제를 담은 조선국간행이정약조(朝鮮國間行里程約條) 등을 조인하였다.[1]

1883년 8월 인천일본조계조약(仁川日本租界條約)을 체결하였다.[1] 9월 숭록대부(崇祿大夫) 행 의정부좌참찬 겸 규장각제학 세자시강원좌부빈객(行議政府左參贊兼奎章閣提學世子侍講院左副賓客)으로 조영수호조약 체결에 참여하였다.[1]

2. 4. 생애 후반

1883년 박문국 당상으로 박영효, 유길준, 김윤식 등과 함께 조선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를 발간하였다. 민승호민겸호가 연이어 죽자 민태호, 민영익, 민응식 등과 함께 민씨 척족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 이른바 사민체제(四閔體制)를 구축,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되었다.

1884년 일본 서리공사 시마 부리다나에게 공함(公函)을 보내 일본 선박 천수환(天壽丸) 선장이 울릉도장과 결탁하여 울릉도 목재를 밀반출한 사건에 대해 항의하였다. 같은 해 3월 독판교섭 통상사무(朝鮮督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어 청나라 청국총변조선상무(淸國總辦朝鮮商務) 진수당(陳樹棠)과 인천항 중국 상인 거주 지역 관련 규정인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 체결에 참여하였다.

1884년 5월 좌부빈객과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5월 말 판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 처음에는 개화 정책에 찬성했으나, 이후 민태호, 민영익, 민응식과 사민체제를 구축하여 권력 핵심 인물이 되면서 김옥균, 서재필, 윤치호 등 급진 개화파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1884년 10월 18일 갑신정변 때 병조판서로 재직 중 김옥균, 서재필 등 개화당 인사들에 의해 조영하, 민태호 등과 경우궁으로 입궐하던 중 고영석, 황용택, 윤경순이 이끄는 난군의 총에 맞아 참살당하였다.

2. 4. 1. 한성순보 발간 전후

그 뒤 박문국 당상이 되어 박영효, 유길준, 김윤식, 김만식 등과 같이 1883년 10월 30일 조선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간하였다. 민승호민겸호가 연이어 죽자 민태호, 민영익민응식 등과 함께 민씨 척족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 사민체제(四閔體制)를 구축, 권력의 핵심인물로 부각되었다.

1884년(고종 21)에는 일본 서리공사 시마 부리다나에게 공함(公函)을 보내어 일본 선박 천수환(天壽丸)의 선장이 울릉도장과 결탁하여 울릉도에서 목재를 밀반출한 사건에 대해서 항의하였다.

1884년 3월에는 다시 독판교섭 통상사무(朝鮮督辦交涉通商事務)에 임명되어 청나라의 청국총변조선상무(淸國總辦朝鮮商務) 진수당(陳樹棠) 을 만나 인천항 중국 상인들의 거주지역에 관한 규정인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에 참여하여 체결하였다.

2. 4. 2. 갑신정변과 최후

1884년 5월 좌부빈객과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5월 말 다시 판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개화 정책에 찬성하였지만, 나중에는 민태호, 민영익, 민응식과 함께 이른바 사민체제를 구축하여 권력의 핵심 인물로 부각되었다. 이로 인해 김옥균, 서재필, 윤치호 등 급진 개화파의 눈밖에 나 공격을 받았다.

1884년 10월 18일 갑신정변 때 병조판서로 재직 중 김옥균, 서재필 등 개화당 인사들에 의해 조영하, 민태호 등과 함께 경우궁으로 입궐하던 중 고영석, 황용택, 윤경순이 이끄는 난군의 총에 맞아 참살당하였다.

2. 5. 사후

갑신정변이 진압된 뒤 10월 29일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3. 저서


  • 북사담초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양고조부민백겸
양증조부민종현(閔鍾顯)
양할아버지민치복(閔致福)
양아버지민태용(閔泰鏞)
친고조부민백창(閔百昌)
친증조부민명혁(閔命爀)
친할아버지민치문(閔致文)
친아버지민달용(閔達鏞)
부인이름 미상
아들민우식(閔愚植)



민영목은 본래 인현왕후의 큰아버지인 민시중의 후손으로, 민시중의 차남 민진주의 5대손 민달용(閔達鏞)의 아들이었지만[2], 민유중의 아들 민진후의 5대손 민태용(閔泰鏞)에게 입양되었다.[3] 명성황후에게는 15촌 조카였으나, 민태용의 양자가 되면서 11촌 조카가 되었다.

민진후의 아들 민익수가 명성황후의 고조부였고, 민진후의 다른 아들인 민우수는 양아버지 민태용의 고조부였다. 항렬상 명성황후의 조카뻘이고 순명효황후와는 같은 항렬이다.

5. 민영목을 연기한 배우

참조

[1] 서적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효형출판 2001-10-20
[2] 문서 민광훈-민시중-민진주-민승수(閔承洙), 민응수(閔應洙)-민백행(閔百行), 민백창(閔百昌)-민명혁(閔命赫)-민치문(閔致文)-민달용(閔達鏞)
[3] 문서 민유중-민진후-민우수(閔遇洙)-민백겸(閔百兼)-민종현(閔鍾顯)-민치복(閔致福)-민태용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