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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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를린 항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베를린의 고립을 막기 위해 연합국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간의 협정을 통해 설정된 세 개의 항공로를 의미한다. 1945년 합의에 따라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항공기들은 폭 32km의 항로를 이용해야 했으며, 베를린 항공 관제소의 통제를 받았다. 소련은 전투기 진입을 금지하고 고도 제한을 두는 등 운항에 제약을 가했지만, 서방 연합국은 이 항로를 통해 물자를 수송하고 정찰 활동을 지속했다. 이 항로는 베를린 공수 작전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냉전 시기 서베를린의 생명선 역할을 수행하며, 독일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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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공수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의 봉쇄로 서베를린에 대한 육로 보급이 끊기자 서방 연합국이 항공 수송을 통해 필수 물자를 공급한 작전으로, 냉전 시대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 베를린의 항공 - 에어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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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항로 | |
|---|---|
| 개요 | |
| 유형 | 공중 통로 |
| 위치 | 독일 |
| 운영 | |
| 운영 주체 | 연합군 |
| 기간 | 1945년~1990년 |
| 상세 정보 | |
| 목적 | 서베를린과 서독 간의 연결 유지 |
| 제한 | 지정된 항로 및 고도 제한 |
| 통행 허가 | 연합군 항공기만 허용 |
| 역사적 배경 | |
| 배경 | 베를린 봉쇄 이후 필요성 증대 |
| 중요성 | 냉전 시대 서베를린의 생명선 역할 |
| 관련 정보 | |
| 관련 사건 | 베를린 봉쇄 냉전 |
| 관련 위치 | 서베를린 서독 |
2. 성립 배경 및 협상 과정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과 베를린은 연합국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서베를린은 동독 영토 내에 위치한 섬과 같은 형태로, 육로 접근이 차단될 경우 고립될 위험에 놓여 있었다.
1945년 여름 미국과 영국 대표단이 포츠담 회담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독일의 소련군 점령지에 임시 항공로 두 개를 설치했다. 포츠담 회담 이후 소련 측에서는 항공로 외부로 비행하는 서방 국적 항공기에 문제를 제기했고, 주동독 소련군 총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는 주동독 소련군의 항공 정찰을 막으려고 했다. 이에 따라 영구적인 해결책에 대한 협상이 시작되었다.[11]
1945년 11월 30일 독일 점령 4개국은 독일 서방 점령지와 서베를린 사이에 32km 폭의 항로 3개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12] 1946년 10월 20일에는 연합국 항공기만 항로를 이용할 수 있다는 규칙이 발표되었고,[12] 항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연합국 4개국이 통제하는 베를린 항공 관제소(Berlin Air Safety Center)가 쇠네베르크 법원 청사에 설치되어 반경 32km를 베를린 통제 구역(Berlin Control Zone)으로 설정했다.[12]
소련 측은 해당 항공로로 비무장 상태로 서방 연합국의 베를린 주둔지에 물자를 수송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전투기 진입은 거부했다. 또한 최소 고도 762 미터 및 최대 고도 3,048 미터 내에서만 비행할 수 있었다. 서방 연합국은 합의에 통제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조건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제한 사항 준수에는 비공식적으로 합의했다. 1959년에는 미국 측에서 시위 목적으로 록히드 C-130을 고도 7,620미터로 베를린을 향해 비행시켰으나, 소련에서 항의한 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았다.[13]
세 개의 서베를린 공항인 템펠호프, 테겔, 가토는 다른 비행장/공항과 항공로로 연결되었다. 각 항공로는 폭이 32km였으며, 원형 관제 구역의 반경은 32km로 지름은 64km였다. 항공기는 최대 3,048m의 고도로 비행해야 했다.[2][3] 비록 소련은 런던 6자회담과 브뤼셀 조약 시행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1948년 3월 20일부터 연합국 관리 위원회 결정을 반대하고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지만, 베를린 항공 관제소에는 독일 재통일 이전까지 참여했다.[12]
2. 1. 포츠담 회담과 임시 항공로
1945년 여름, 포츠담 회담에 참석하는 미국과 영국 대표단의 안전한 이동을 위해 독일의 소련군 점령지에 두 개의 임시 항공로가 설치되었다.[11] 당시 서방 연합군은 회의 기간 중의 임시적인 조치라고 가정했다. 그러나 포츠담 회담 이후 소련 측에서는 항공로 외부로 비행하는 서방 국적 항공기에 문제를 제기했고, 주동독 소련군 총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는 주동독 소련군의 항공 정찰을 막으려고 했다. 이에 따라 영구적인 해결책에 대한 협상이 시작되었다.[11]1945년 11월 30일 독일 점령 4개국은 독일 서방 점령지와 서베를린 사이에 20마일(32km) 폭의 항로 3개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12] 1946년 10월 20일에는 연합국 항공기만 항로를 이용할 수 있다는 규칙을 발표했고, 항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도록 연합국 4개국이 통제하는 베를린 항공 관제소(Berlin Air Safety Center) 반경 20마일(약 32 km)을 베를린 통제 구역(Berlin Control Zone)으로 선포했다.[12] 베를린 항공 관제소는 쇠네베르크 법원 청사에 있었다.[12] 비록 소련은 런던 6자회담과 브뤼셀 조약 시행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1948년 3월 20일부터 연합국 관리 위원회 결정을 반대하고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지만, 베를린 항공 관제소에는 독일 재통일 이전까지 참여했다.[12]
베를린 통제 구역과 베를린 항로를 사용할 모든 항공편은 최소 2시간 전까지 등록해야 하며 연합국 4개국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13] 연합국 중 하나라도 승인하지 않았다면 (주로 소련이 승인하지 않았음)항공 안전 카드에 "보안이 보장되지 않음"으로 날인했다. 이러한 경우에도 항로 사용 자체는 항공사 책임으로 가능했으며, 승인 여부와 관계 없이 템펠호프 공항의 미군 관리 하에 있었던 베를린 항로 관제소(Berlin Air Route Traffic Control Center, BARTCC)의 관제를 받았다.[13]
소련 측은 해당 항공로로 비무장 상태로 서방 연합국의 베를린 주둔지에 물자를 수송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전투기 진입은 거부했다. 또한 최소 고도 762 미터 및 최대 고도 3,048 미터 내에서만 비행할 수 없었다. 서방 연합국은 합의에 통제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조건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제한 사항 준수에는 비공식적으로 합의했다. 1959년에는 미국 측에서 시위 목적으로 록히드 C-130을 고도 7,620미터로 베를린을 향해 비행시켰으나, 소련에서 항의한 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았다.[13]
2. 2. 4개국 협상과 베를린 항공 관제소
1945년 여름 미국과 영국 대표단이 포츠담 회담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독일의 소련군 점령지에 임시 항공로 두 개를 설치했다. 포츠담 회담 이후 소련 측에서는 항공로 외부로 비행하는 서방 국적 항공기에 문제를 제기했고, 주동독 소련군 총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는 주동독 소련군의 항공 정찰을 막으려고 했다. 이에 따라 영구적인 해결책에 대한 협상이 시작되었다.[11]1945년 11월 30일 독일 점령 4개국은 독일 서방 점령지와 서베를린 사이에 20마일 폭 항로 3개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12] 1946년 10월 20일에는 연합국 항공기만 항로를 이용할 수 있다는 규칙이 발표되었고,[12] 항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연합국 4개국이 통제하는 베를린 항공 관제소(Berlin Air Safety Center)가 쇠네베르크 법원 청사에 설치되어 반경 20마일(약 32 km)을 베를린 통제 구역(Berlin Control Zone)으로 설정했다.[12]
소련 측은 해당 항공로로 비무장 상태로 서방 연합국의 베를린 주둔지에 물자를 수송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전투기 진입은 거부했다. 또한 최소 고도 2,500피트 및 최대 고도 10,000피트(762 및 3,048 미터) 내에서만 비행할 수 없었다. 1959년에는 미국 측에서 시위 목적으로 록히드 C-130을 고도 25,000피트(7,620미터)로 베를린을 향해 비행시켰으나, 소련에서 항의한 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았다.[13]
세 개의 서베를린 공항인 템펠호프, 테겔, 가토는 다른 비행장/공항과 항공로로 연결되었다. 각 항공로는 폭이 32km였으며, 원형 관제 구역의 반경은 32km로 지름은 64km였다. 항공기는 최대 3,048m의 고도로 비행해야 했다.[2][3]
2. 3. 소련의 반발과 베를린 봉쇄
소련은 런던 6자회담과 브뤼셀 조약 시행에 항의하며 1948년 3월 20일부터 연합국 관리 위원회 결정을 반대하고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지만, 독일 재통일 이전까지 베를린 항공 관제소에는 계속 참여했다.[12] 소련은 서방 연합국의 베를린 주둔지에 물자를 수송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전투기 진입은 거부했다. 또한 최소 고도 762 미터 및 최대 고도 3,048 미터 내에서만 비행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13]1945년 11월 30일 독일 점령 4개국은 독일 서방 점령지와 서베를린 사이에 20마일 폭 항로 3개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고,1946년 10월 20일에는 연합국 항공기만 항로를 이용할 수 있다는 규칙을 발표했다.[12]
3. 항공로 운항
베를린 항로에는 세 가지 항로가 있었다. 북서쪽 함부르크 항로는 함부르크, 브레멘, 북유럽 방면으로 연결되었다.[4] 서쪽 뷔케베르크 항로는 하노버, 쾰른/본, 서유럽 방면으로 이어졌다.[4] 남서쪽 프랑크푸르트 항로는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 슈투트가르트, 뮌헨, 남유럽 방면이었다.[4]
이 항로는 1948년 6월부터 1949년 5월까지 진행된 베를린 공수작전 기간 동안 특히 중요했다.
1952년부터 서독에 DECCA 항법 시스템 송신기가 4대 설치되면서 전파항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90년 독일의 재통일 이전까지 서독과 서베를린 간의 민간 항공기 운영은 미국, 영국, 프랑스 항공사만 가능했다. 이 시기의 서베를린 취항 주요 항공사는 팬암, 영국 항공, 에어 프랑스였다. 1960년대 초까지는 미국 점령지역에 위치한 템펠호프 공항 만 민간 여객기에 개방되었다. 프랑스 점령지에 베를린 테겔 공항이 개항한 후에는 에어 프랑스에서 파리-베를린(뒤셀도르프 경유) 노선을 테겔 공항으로만 운항했다. 팬암과 영국항공은 베를린발 함부르크, 하노버, 뒤셀도르프, 쾰른/본, 프랑크푸르트, 뮌헨행 독일 국내선 노선을 템펠호프 공항에서 계속 운행했다.
연합국 소속이 아닌 항공사 중에서는 유일하게 폴란드 항공사인 LOT만 이 항로를 사용할 수 있었다.[14] LOT 항공편은 이 항로를 통과할 때 템펠호프의 미국 관제를 받았다.[14] 폴란드 항공은 냉전 기간 동안 동독의 중앙 공항이었던 베를린 쇠네펠트 공항에서 브뤼셀과 암스테르담까지 직항 노선을 운항했다.[14]
3. 1. 항로 명칭 및 연결 지역
베를린 항로에는 세 가지 항로가 있었다. 북서쪽 함부르크 항로는 함부르크, 브레멘, 북유럽 방면으로 연결되었다.[4] 서쪽 뷔케베르크 항로는 하노버, 쾰른/본, 서유럽 방면으로 이어졌다.[4] 남서쪽 프랑크푸르트 항로는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 슈투트가르트, 뮌헨, 남유럽 방면이었다.[4]이 항로는 1948년 6월부터 1949년 5월까지 진행된 베를린 공수작전 기간 동안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1952년부터 서독에 DECCA 항법 시스템 송신기가 4대 설치되어 전파항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독일의 재통일 이전까지 서독과 서베를린 간 민간 항공기 운영은 미국, 영국, 프랑스 항공사만 가능했다. 이 시기 서베를린에 취항한 주요 항공사는 팬암, 영국 항공, 에어 프랑스였다. 1960년대 초까지는 템펠호프 공항만 민간 여객기에 개방되었다. 베를린 테겔 공항 개항 후 에어 프랑스는 파리-베를린(뒤셀도르프 경유) 노선을 테겔 공항으로만 운항했다. 팬암과 영국항공은 템펠호프 공항에서 함부르크, 하노버, 뒤셀도르프, 쾰른/본, 프랑크푸르트, 뮌헨행 독일 국내선 노선을 계속 운행했다.
연합국 소속이 아닌 항공사 중 유일하게 LOT만이 이 항로를 사용할 수 있었다.[14] LOT 항공편은 템펠호프의 미국 관제를 받았다.[14]
3. 2. 베를린 공수작전 (1948년 6월 ~ 1949년 5월)
1948년 6월부터 1949년 5월까지 진행된 베를린 공수작전에서 베를린 항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4] 서방 연합군은 세 개의 항로를 통해 서베를린에 필수 물자를 공급했다. 함부르크 항로는 북서쪽에서 함부르크 공항과 브레멘, 북유럽을 연결했고, 뷔케베르크 항로는 서쪽에서 하노버, 쾰른/본, 서유럽을 연결했으며, 프랑크푸르트 항로는 남서쪽에서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 슈투트가르트, 뮌헨, 남유럽을 연결했다.1952년부터 서독에 DECCA 항법 시스템 송신기가 설치되어 전파항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14] 독일의 재통일 이전까지 서독과 서베를린 간 민간 항공기 운영은 미국, 영국, 프랑스 항공사만 가능했다.[14] 이 시기 서베를린에는 ''팬암'', ''영국 항공'', ''에어 프랑스''가 주로 취항했다.[14] 1960년대 초까지는 템펠호프 공항만 민간 여객기에 개방되었으나, 베를린 테겔 공항이 개항한 후 에어 프랑스는 파리-베를린 노선을 테겔 공항으로 운항했다.[14] 팬암과 영국항공은 템펠호프 공항에서 독일 국내선 노선을 운행했다.[14] 연합국 소속이 아닌 항공사 중에서는 LOT만이 유일하게 이 항로를 사용했으며, 템펠호프의 미국 관제를 받았다.[14]
3. 3. 민간 항공 운항
1990년 독일의 재통일 이전까지 서독과 서베를린 간의 민간 항공기 운영은 미국, 영국, 프랑스 항공사만 가능했다.[14] 이 시기 서베를린 취항 주요 항공사는 ''팬암'', ''영국 항공'', ''에어 프랑스''였다.[14] 1960년대 초까지는 미국 점령지역에 위치한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만 민간 여객기에 개방되었다.[14] 프랑스 점령지에 베를린 테겔 공항이 개항한 후에는 에어 프랑스에서 파리-베를린(뒤셀도르프 경유) 노선을 테겔 공항으로만 운항했다.[14] 팬암과 영국항공은 베를린발 함부르크, 하노버, 뒤셀도르프, 쾰른/본, 프랑크푸르트, 뮌헨행 독일 국내선 노선을 템펠호프 공항에서 계속 운행했다.[14]항로에는 각각 이름이 있었다. 함부르크 항로는 함부르크, 브레멘, 북유럽 방면(북서쪽), 뷔케베르크 항로는 하노버, 쾰른/본, 서유럽 방면(서쪽), 프랑크푸르트 항로는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 슈투트가르트, 뮌헨, 남유럽(남서쪽) 방면이었다. 이 항로는 1948년 6월부터 1949년 5월까지 진행된 베를린 공수작전 기간 동안 특히 중요했다. 1952년부터 서독에 DECCA 항법 시스템 송신기가 4대 설치되면서 전파항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연합국 소속이 아닌 항공사 중에서는 유일하게 폴란드 항공사인 LOT만 이 항로를 사용할 수 있었다.[14] LOT 항공편은 이 항로를 통과할 때 템펠호프의 미국 관제를 받았다.[14] 폴란드 항공은 냉전 기간 동안 동독의 중앙 공항이었던 베를린 쇠네펠트 공항에서 브뤼셀과 암스테르담까지 직항 노선을 운항했다.[14]
3. 4. 운항 제한 및 안전 문제
베를린 항로를 운항하는 항공기는 최대 10,000피트(3,048m) 고도 내에서 비행해야 했다.[5] 소련은 자국 군사 훈련을 이유로 고도 제한을 13,000피트(3,962m)까지 높이기도 했다. 현대의 항공 교통 관제 절차는 항공기가 동독 영공으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공중 항로에서 추월을 금지했다.[5] 이는 제트 여객기가 더 느린 왕복 엔진 또는 터보프롭 항공기 뒤에서 속도를 줄여야 함을 의미했고, 비행 시간과 연료 소비를 증가시켜 운영 비용을 증가시켰다.[5] 특히 300km 이하의 단거리 독일 국내선에서 이러한 문제가 두드러졌다.[5]상업적, 운용적 이유로 항공사들은 가능한 한 세 개의 항로 중 가장 짧은 중앙 항로를 이용했다. 중앙 항로는 항공기가 10,000피트(3,048m) 고도에서 순항하는 시간을 최소화하여, 비행 시간 연장 및 연료 소비 증가를 줄일 수 있었다.
4. 공중 정찰
소련은 항공로 설치 목적으로 소련군 공중 정찰 방해를 의도했지만, 서방 연합군은 정찰기를 계속 비행시키며 정찰 활동을 계속했다.[15] 정찰기는 민간 항공기로 위장하여 운용되었으며, 특수 장비를 탑재하고 항로 가장자리를 따라 비행하며 사진 촬영 및 전자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15] 주요 정찰 대상은 페를레베르크, 라테노, 데사우, 고타에 주둔하고 있었던 국가인민군 주둔지와 레츨링어 하이데(Letzlinger Heide) 및 레닌(Lehnin)의 소련군 주둔지였다.[15]
소련은 전투기를 출격시켜 정찰기를 확인하고 위협 기동을 통해 정찰을 방해하거나 강제 착륙을 유도했으며, 협정 위반에 대해 항의했다.[15] 서방은 정찰 자료를 통해 항로 이용 조건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15] 이러한 비행은 정찰위성 출현 전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경로 중 하나였다.[16] 정찰위성 가동 후에도 정찰기 비행을 통해 더 자세한 항공사진과 전자정찰이 가능했으며, 양독 국경 지대 인근, 발트해, 베를린 통제 구역 내부의 서방 연합군 군사 연락 임무로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16]
4. 1. 정찰 목적 및 방법
소련은 항공로 설치 목적으로 소련군 공중 정찰 방해를 의도했지만, 서방 연합군은 정찰 활동을 계속했다.[15] 정찰기는 민간 항공기로 위장하여 운용되었으며, 특수 장비를 탑재하고 항로 가장자리를 따라 비행하며 사진 촬영 및 전자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15] 주요 정찰 대상은 페를레베르크, 라테노, 데사우, 고타에 주둔하고 있었던 국가인민군 주둔지와 레츨링어 하이데(Letzlinger Heide) 및 레닌(Lehnin)의 소련군 주둔지였다.[15]소련은 전투기를 출격시켜 정찰기를 확인하고 위협 기동을 통해 정찰을 방해하거나 강제 착륙을 유도했으며, 협정 위반에 대해 항의했다.[15] 서방은 정찰 자료를 통해 항로 이용 조건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15] 이러한 비행은 정찰위성 출현 전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경로 중 하나였다.[16] 정찰위성 가동 후에도 정찰기 비행을 통해 더 자세한 항공사진과 전자정찰이 가능했으며, 양독 국경 지대 인근, 발트해, 베를린 통제 구역 내부의 서방 연합군 군사 연락 임무로 추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16]
4. 2. 정찰 활동의 위험성
정찰 활동은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수 있었다.[15] 동독에 비상 착륙한 경우에는 정찰 장비와 기록을 파괴하도록 지시받았다.[15]정찰기는 항로 가장자리로 곡선 비행을 했기 때문에 발각이 어렵지 않았으며, 정찰 대상에는 페를레베르크, 라테노, 데사우, 고타의 국가인민군 주둔지와 레츨링어 하이데 및 레닌의 소련군 주둔지가 포함되었다.[15]
소련은 전투기를 출격시켜 정찰기를 감시하고 위협 기동을 통해 방해했으며, 협정 위반에 대해 항의했다. 서방 연합군은 정찰로 수집한 자료를 통해 항로 이용 조건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15]
이러한 비행은 정찰위성 출현 이전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 경로 중 하나였다. 정찰위성 가동 후에도 정찰기 비행을 통해 더 자세한 항공사진과 전자정찰이 가능했으며, 양독 국경 지대 인근, 발트해, 베를린 통제 구역 내부의 서방 연합군 군사 연락 임무로 정찰 자료를 추가로 얻을 수 있었다.[16]
4. 3. 각국의 정찰 활동
미국은 1948년부터 퓌르스텐펠트브루크 비행장에 주둔한 제7499 지원 소대에서 정찰 비행을 담당했고, 1950년에 비스바덴 공군기지로 이전했다.[17] 1955년에는 제7499 지원 대대로 승격되었고, 1972년 대대 해체 후 1975년에 라인마인 공군기지의 제7405 작전 소대로 편입, 1977년에는 제7575 작전 대대, 1991년에는 대대가 해체되었다.[17] 이 비행편대는 발트해부터 카스피해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포괄했다.[17] 1945년부터 1990년까지 베를린 항로와 통제 구역에서 약 10,000회 비행했다.[17]처음에는 개조된 더글러스 A-26, 더글러스 C-47, 보잉 B-17을 정찰기로 개수한 RB-17을 사용했다.[17] 1950년에 RB-17을 더글러스 C-54로, 1959년부터 1968년까지 구형 C-47을 컨베어 CV-240의 군사용 파생형인 CT-29A로 대체했다.[17] 1962년부터 보잉 C-97을 주로 사용했고 1975년 C-130E로 대체했다.[17]
영국 측에서는 뷔케부르크에 주둔하고 있었던 제2전술통신소대가 정찰 임무에 참여했고, 1954년 빌덴라트 비행장으로 이전했다.[18] 이 소대는 1959년 영국 공군 독일통신소대, 1969년에는 제60소대로 개명되었다.[18] 프란시스 게리 파워스가 조종 중이었던 U-2 정찰기가 소련에서 격추된 후 1960년 5월 1일 모든 비행을 중단했고 1961년 2월에 업무의 일부를 재개했다.[18] 1962년부터 주독일 영국 공군 사령관은 본국과의 추가 협의 없이 독일에서 주당 임무 3회를 승인할 수 있었다.[18]
1947년 항공 정찰에 아브로 앤슨 항공기를 사용했고, 1956년에는 Percival Pembroke로 대체되었다.[18]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1989년에는 아브로 748의 군사용 파생형인 Andover가 투입되었다.[18] 영국은 미국이나 프랑스와는 다르게 정규 전자정찰을 수행하지는 않았다.[18] 1962년 미국에서는 약 500회, 영국에서는 약 50회 비행했다.[18] 그러나 영국과 미국은 항공 사진을 공유하고 공동으로 판독했다.[18]
프랑스에서는 1957년부터 전자 정찰 임무를 시작했고 항공기에 가브리엘 이후 로마 숫자를 붙인 코드명을 사용했다.[19] 처음에는 라어 공항에서 C-47 가브리엘 I부터 IV까지를 투입했다.[19] 1963년 이후에는 가브리엘 V(Nord Noratlas) 항공기 3기가 임무를 시작했고 Escadrille Électronique 54에서 정찰 비행을 담당했다.[19] 1966년 프랑스가 NATO를 탈퇴한 이후 비행소대가 메스로 이동하여 Groupement Électronique 35.351로 재편되었고, 1971년에는 Groupement Électronique Tactique 30.341, 1988년에는 Escadre Électronique Tactique 54로 재편되었다.[19] 1989년에는 가브리엘 VI(C-160) 항공기를 투입하여 더 나은 항공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19]
1964년까지 정찰 비행 1,000회, 1968년까지 정찰 비행 2,000회를 수행했다.[19] 프랑스가 NATO에서 탈퇴한 후에는 영국이나 미국과 임무 조정 및 결과 공유를 하지 않았다.[19] 프랑스 정찰기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19]
5. 주요 사건
1948년 4월 5일, 영국 유럽 항공의 비커스 610 바이킹 1B 여객기가 가토 공군 기지에 접근하던 중 소련 공군의 야코블레프 Yak-3 전투기와 충돌하여 탑승자 14명과 소련 전투기 조종사가 사망했다. 소련 전투기 조종사의 비행 규칙 위반이 사고 원인으로 밝혀졌다.[6]
1952년 4월 29일, 에어 프랑스의 더글러스 C-54A 여객기가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서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으로 가는 도중, 동독 상공에서 두 대의 소련 MiG-15 전투기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으로 항공기가 심하게 손상되었으나, 비상 착륙에 성공했다. 탑승자 중 사망자는 없었으며, 소련 군 당국은 공격 당시 여객기가 비행 회랑 밖에 있었다고 주장했다.[7]
1966년 11월 15일, 팬 아메리칸 월드 항공의 팬암 708편 보잉 727-21 화물기가 달고-되베리츠 근처에 추락하여 승무원 3명 전원이 사망했다. 미국 연방 교통 안전 위원회는 고도 제한 이하 강하를 사고 원인으로 추정했으나, 정확한 원인은 밝혀내지 못했다.[8][9][10]
6. 의의와 영향
6. 1. 냉전 시기 서베를린의 생명선
6. 2. 국제 협력과 연대의 중요성
6. 3. 독일 통일의 기반 마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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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Lufthansa through Berlin?
http://www.flightglo[...]
Flight International
1969-02-2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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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flightg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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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06-24
[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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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le Press
1966-04-0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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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N Aircraft accident description Vickers 610 Viking 1B G-AIVP — RAF Gatow, Berlin,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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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웹사이트
ASN Aircraft accident description Douglas C-54A-DO F-BELI – near Berlin, Germany
http://aviation-safe[...]
[8]
웹사이트
ASN Aircraft accident description Boeing 727-21 N317PA – near Dallgow,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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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Aeroplane, Safety — Berlin crash mystery
Temple Press
1968-09-04
[10]
간행물
727 crash cause uncertain
http://www.flightglo[...]
Flight International
1968-07-18
[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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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웹인용
Airbridge to Berlin - The Berlin Crisis of 1948, its Origins and Aftermath
http://www.trumanlib[...]
2019-05-08
[13]
문서
Wright/Jefferies, S. 47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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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Vor 50 Jahren eröffnete Air France wieder den Liniendienst nach Berlin
http://www.tagesspie[...]
Der Tagesspiegel
2000-01-03
[15]
문서
Wright/Jefferies, S. 186–19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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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ght/Jefferies, S. 145–18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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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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