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간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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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간사는 아폰수 1세로부터 시작된 포르투갈 왕가이다. 브라간사 왕가는 아비스 왕가의 주앙 1세와 이네스 피레스의 사생아인 아폰수 1세가 브라간사 공작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 브라간사 가문은 1640년 주앙 4세가 포르투갈 왕위에 오르면서 포르투갈을 통치했고, 이후 나폴레옹 전쟁으로 브라질로 천도한 후 브라질 제국을 건설하여 페드루 1세, 페드루 2세 황제를 배출했다. 1910년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된 후에는, 현재 두아르테 피우가 브라간사 가문의 수장으로 포르투갈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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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간사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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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정보 | |
가문 이름 | 브라간사 가문 |
로마자 표기 | Casa de Bragança |
가문 유형 | 왕조 |
모가문 | 포르투갈 부르고뉴 왕조 (아비스 가문을 거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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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포르투갈 왕국 브라질 제국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 |
칭호 | 브라질 황제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 국왕 포르투갈 국왕 브라질 국왕 알가르브 국왕 브라질 황태자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 왕세자 포르투갈과 알가르브 왕세자 브라질 왕자 베이라 공자 그랑파라 공자 브라질 왕자 포르투갈 왕자 포르투갈 왕족 브라간사 공작 기마랑이스 공작 바르셀루스 공작 포르투 공작 베자 공작 비제우 공작 코임브라 공작 빌라비소사 후작 발렌사 후작 몽테모르-우-노부 후작 프레칠라와 비야라미엘 후작 기마랑이스 백작 바르셀루스 백작 아라이올루스 백작 오우렝 백작 네이바 백작 파루 백작 파리아 백작 |
현재 수장 | 두아르테 피우 드 브라간사 |
창시자 | 아폰수 1세 드 브라간사 |
설립 년도 | 1442년 |
폐지 | 포르투갈 왕국: 1910년 공화국 수립 브라질 제국: 1889년 공화국 선포 |
마지막 통치자 |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 주앙 6세 (1822년) 포르투갈 왕국: 마누엘 2세 (1910년) 브라질 제국: 페드루 2세 (1889년) |
분가 | 부계: 라포이스 가문 발렌사 가문 카다발 가문 멜루 드 포르투갈 가문 카르발류 이 살다냐 가문 모계: 오를레앙-브라간사 가문 브라간사-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부르봉-브라간사 가문 |
2. 브라간사 왕가의 기원
브라간사 가문은 아비스 왕조의 초대 국왕 주앙 1세의 서자인 아폰수 1세(1377년–1461년)로부터 시작된 포르투갈의 유력 귀족 가문이다. 이는 아비스 왕조 성립 초기부터 이어진 왕가의 서류 분가에 해당한다.
아폰수는 비록 사생아였으나 아버지 주앙 1세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당시 포르투갈의 가장 중요한 장군 중 한 명이었던 누노 알바레스 페레이라의 딸 베아트리스 페레이라 데 알빔과 결혼하였고, 이를 통해 바르셀루스 백작 칭호를 받으며 가문의 사회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정치적으로 성공하여 조카인 아폰수 5세 치세 때인 1442년, 초대 브라간사 공작으로 서임되면서 브라간사 공작가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브라간사 가문은 아비스 왕가의 여러 분가들과 지속적인 통혼을 통해 왕실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대표적으로 아폰수 1세의 딸 이자벨은 주앙 왕자와 결혼했고, 이들의 후손 중에는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도 포함된다. 또한 마누엘 1세의 누나 이자벨 드 비제우는 3대 브라간사 공작 페르난두 2세와 결혼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문의 성장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주앙 2세는 1483년, 당시 공작이던 페르난두 2세를 반역죄로 처형하고 가문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큰 시련을 겪었다. 가문은 이후 마누엘 1세 시대에 이르러서야 복권되고 재산을 되찾을 수 있었다.
1580년 포르투갈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했을 때, 6대 공작 주앙 1세의 부인이자 마누엘 1세의 손녀였던 카타리나는 정통성을 내세워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비록 당시에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차지하여 이베리아 연합이 성립되었지만, 이는 훗날 브라간사 가문이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하는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2. 1. 브라간사 공작


브라간사 왕가는 아비스 왕가의 창시자인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와 이네스 피레스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아폰수 1세 (1377년 - 1461년)로부터 시작되었다. 아폰수는 사생아였지만 아버지 주앙 1세의 총애를 받아, 당시 포르투갈의 중요한 장군이자 주앙 1세의 친구였던 누노 알바레스 페레이라의 딸 베아트리스 페레이라 데 알빔과 결혼하며 사회적 지위를 높였다. 이 결혼으로 아폰수는 바르셀루스 백작 칭호도 받았다.
아폰수는 포르투갈 귀족으로서 성공적인 정치 및 사회 경력을 쌓았다. 1415년 세우타 정복에 참여했으며, 1433년 아버지 사후에는 형이자 국왕인 두아르테 1세의 신임을 얻었다. 1438년 두아르테 1세가 요절하자 어린 조카 아폰수 5세를 위한 섭정이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국왕의 어머니 아라곤의 레오노르, 이후에는 아폰수의 형제인 코임브라 공작 페드루가 섭정을 맡았다. 페드루의 섭정이 인기를 잃자 아폰수는 국왕의 주요 고문이 되었다. 1442년 12월 30일, 섭정 페드루는 아폰수를 초대 브라간사 공작으로 임명하며 두 형제 간의 화해를 시도했다. 이로써 포르투갈 역사에서 중요한 가문이 될 브라간사 왕가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아폰수 1세의 자녀들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장남 아폰수는 오렘 백작 칭호를 물려받고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발렌사 후작이 되었다. 장녀 이사벨은 레겐고스 드 몬사라즈 영주 주앙과 결혼하여 브라간사 가문을 포르투갈 왕가와 다시 연결시켰다. 아폰수 1세의 뒤를 이은 아들 페르난두 1세는 군인으로서 명성을 쌓았다.
페르난두 1세 (1403년 출생)는 할아버지 누노 알바레스 페레이라로부터 아라욜루스 백작 칭호를 물려받았고, 여러 포르투갈 제국 원정에 참여했다. 그는 때때로 국왕 두아르테 1세와 의견 충돌을 빚기도 했으나, 아폰수 5세의 총애를 받아 세우타 총독, 빌라 비초사 후작, 네이바 백작 등의 지위를 얻었다.

페르난두 1세는 아내 조아나 드 카스트로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을 통해 가문의 영향력을 더욱 넓혔다. 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페르난두 2세는 처음에는 유망한 귀족이었으나, 왕권 강화를 추구하던 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와의 갈등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페르난두 1세의 다른 아들들인 주앙(포르투갈 원수), 아폰수(파루 백작), 브라간사의 알바루(카다발 영주 등) 역시 귀족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3대 공작 페르난두 2세 시기에 브라간사 가문은 포르투갈 최고의 귀족 가문 중 하나로 성장했다. 그는 기마랑이스 공작 칭호도 얻었다. 그러나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던 주앙 2세 국왕은 1483년 페르난두 2세를 반역죄로 처형하고 가문의 재산을 몰수했다. 가문 구성원들은 카스티야로 추방되었다.


주앙 2세의 후계자인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는 브라간사 가문을 용서하고 추방된 페르난두 2세의 장남 자이메 1세를 포르투갈로 불러들여 몰수된 재산을 돌려주었다. 자이메 1세는 가문의 옛 거주지인 빌라 비초사에 정착하여 이베리아에서 가장 큰 궁전 중 하나인 빌라 비시오자 공작 궁전 건설을 시작하며 가문의 위상을 회복했다. 그는 마누엘 1세의 총애를 받았으나, 첫 부인을 살해하도록 명령한 죄로 아자모르 정복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자이메 1세의 아들 테오도시오 1세는 5대 공작으로, 포르투갈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후원자이자 학식 있는 귀족으로 알려졌다. 그는 가문의 명성을 유지했지만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의 동생 콘스탄티누 데 브라간사는 포르투갈령 인도 부왕을 지내는 등 제국 내에서 활약했다.
6대 공작 주앙 1세 (1543년 - 1583년)는 마누엘 1세의 손녀이자 기마랑이스 공작 에두아르두의 딸인 인판타 카타리나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인해 1580년 포르투갈 국왕 세바스티앙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벌어진 1580년 포르투갈 왕위 계승 위기에서 부부는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카타리나는 유력한 후보였으나, 결국 그녀의 사촌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국왕 펠리페 1세로 즉위하며 이베리아 연합이 시작되었다. 펠리페 1세는 브라간사 가문을 회유하기 위해 주앙 1세의 장남 테오도시오 2세에게 포르투갈 대장군 직위를 주고 다른 특권도 부여했다.
7대 공작 테오도시오 2세는 어린 시절 알카세르 키비르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하며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아 포르투갈 대장군이 되었다. 그는 왕가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더 많은 토지와 작위를 받아 가문의 세력을 크게 확장시켰다. 1640년경 브라간사 가문은 8만 명의 봉신을 거느리고 있었다.



164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에 대한 포르투갈 귀족과 상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과도한 세금과 식민지 방치 등으로 필리페 3세(필리페 4세)는 포르투갈 내 지지 기반을 잃었다.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테오도시오 2세의 아들이자 8대 브라간사 공작인 주앙 2세에게 접근하여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운동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했다. 주앙 2세는 할머니 카타리나를 통해 왕위 계승권도 가지고 있었다.
주앙 2세는 처음에는 왕위에 큰 야심이 없었으나, 아내 루이사 데 구스만의 설득과 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640년 12월 1일, 성공적인 반란을 통해 포르투갈의 주앙 4세로 즉위했다. 이로써 브라간사 가문은 포르투갈의 새로운 왕조가 되었고, 포르투갈 복원 전쟁이 시작되었다.
주앙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브라간사 공작 칭호는 왕위 계승자의 전통적인 칭호가 되었다.
이름 | 공작 즉위 | 비고 |
---|---|---|
아폰수 1세 | 1442년 | 초대 브라간사 공작; 바르셀루스 백작 |
페르난두 1세 | 1461년 | 브라간사 공작; 빌라 비소자 후작 |
페르난두 2세 | 1478년 | 브라간사 공작; 기마랑이스 공작; 주앙 2세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됨 |
자이메 1세 | 1498년 | 브라간사 공작; 가문 복원 |
테오도시오 1세 | 1532년 | 브라간사 공작; 기마랑이스 공작령 양도 |
주앙 1세 | 1563년 | 브라간사 공작; 바르셀루스 공작; 1580년 왕위 계승 위기 당시 왕위 주장 |
테오도시오 2세 | 1583년 | 브라간사 공작; 포르투갈 대장군 |
주앙 2세 | 1630년 | 브라간사 공작; 기마랑이스 공작; 1640년 포르투갈 복고 전쟁을 통해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 (주앙 4세) |
1640년 포르투갈 왕정복고 전쟁을 통해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독립을 회복하면서 제8대 브라간사 공작 주앙 4세가 포르투갈 국왕으로 추대되어 브라간사 왕조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왕조 초기에는 브라질 식민지에서 유입된 막대한 금을 바탕으로 화려한 바로크 문화가 번성했으며, 18세기 중반에는 주제 1세와 퐁발 후작 주도의 계몽 전제 정치 개혁이 추진되었으나 1755년 리스본 지진과 같은 시련도 겪었다.
3. 포르투갈 왕국 통치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프랑스군의 침공을 피해 왕가가 브라질로 피신하는 등 큰 위기를 맞았고, 이는 이후 브라질 독립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포르투갈 내부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전을 겪기도 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산업 혁명과 함께 공화주의 사상이 확산되었고, 결국 1908년 국왕 암살 사건과 1910년 10월 5일 혁명을 거치며 마지막 군주 마누엘 2세가 퇴위하였다. 이로써 포르투갈의 왕정은 막을 내리고 공화국으로 전환되었으며, 브라간사 왕조의 포르투갈 통치도 종식되었다.
3. 1. 포르투갈 왕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펠리페 2세부터 펠리페 4세까지 3대에 걸쳐 포르투갈 왕위를 겸했으나, 포르투갈인들은 외세의 지배에 반발하여 1640년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회복했다. 이때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된 인물이 제8대 브라간사 공작 주앙 2세였으며, 그는 주앙 4세로 즉위하여 브라간사 왕조를 열었다.
17세기 말부터 브라질에서 막대한 양의 금이 유입되면서 브라간사 왕조 초기에는 화려한 바로크 문화가 번성했다. 1750년 즉위한 주제 1세는 퐁발 후작을 등용하여 계몽 전제 정치를 펼쳤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예수회를 추방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영국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되었고(메슈엔 조약),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은 국가에 큰 타격을 입혔다. 퐁발 후작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영국에서 기계를 도입하는 등 포르투갈의 초기 산업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 마리아 1세는 퐁발 후작을 추방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했으며, 경제적으로는 대영 무역 적자를 해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여파는 마리아 1세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의 시대였다. 1801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는 포르투갈에 대규모 영토 할양과 영국 상선 배제(해상 봉쇄)를 요구했다. 포르투갈이 이를 거부하자, 같은 해 4월, 프랑스군과의 전쟁이 벌어졌다(오렌지 전쟁). 같은 해 6월, 포르투갈은 바다호스 조약에 조인하여 나폴레옹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다.[9] 더욱이, 1806년에 발표된 대륙 봉쇄령을 포르투갈이 1807년에 거부하면서, 다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침공을 받게 되어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반도 전쟁). 주노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리스본 입성이 눈앞에 다가오자, 포르투갈 궁정은 식민지 브라질로의 피난을 결정했다. 당시 왕위에 있던 마리아 1세는 고령에 정신 이상까지 겪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로는 왕세자이자 섭정이었던 돈 조앙(주앙 6세, 후에는 브라질에서 즉위)이 모든 일을 처리했다. 1807년 11월, 궁정은 중요한 재물과 15,000명의 귀족, 관리, 병사를 이끌고 배에 탑승하여, 영국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브라질로 향했다. 이는 유럽 역사상 전례 없는 신대륙천도였다. 고된 두 달간의 항해 끝에 함대는 이듬해 1월 브라질의 바이아에 도착했으며, 3월에는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겨 이 곳을 수도로 삼았다. 브라간사 왕조의 리우 체류는 1821년까지 13년에 걸쳐 이어졌다. 1815년에는 포르투갈과 브라질을 동격의 왕국으로 하는 포르투갈·브라질 및 알가르브 연합 왕국이 성립되었다. 마리아 1세는 이 연합 왕국의 초대 군주가 되었다.
1821년, 주앙 6세(1816년 즉위)는 포르투갈로 귀환했지만, 브라질에 섭정으로 남아있던 아들 페드루 왕세자는 1822년 브라질 독립을 선언하고 브라질 제국의 초대 황제 페드루 1세로 즉위했다.
주앙 6세 사후, 포르투갈 왕위는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에게 페드루 4세로서 계승되었다(1826). 그러나 그는 곧 포르투갈 왕위를 어린 딸 마리아 다 글로리아에게 양위하고, 자신의 동생 미겔을 섭정으로 임명하며 마리아가 성년이 되면 결혼하도록 했다. 하지만 미겔은 1828년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스스로 미겔 1세로 즉위하며, 주앙 6세가 인정한 자유주의 헌법을 폐기하고 절대군주제를 복원하려 시도했다.
이에 페드루 4세는 브라질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포르투갈로 돌아와 딸 마리아 2세를 지지하는 자유주의 세력을 이끌고 미겔 1세에 맞서 내전(자유주의 전쟁, 1828-1834)을 벌였다. 1834년 페드루 4세는 미겔 1세를 격파하고 마리아 2세를 복위시켰으며, 패배한 미겔은 국외로 추방되었다. 추방된 미겔과 그 후손들은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브라간사 왕가의 미겔주의자 분파를 형성했다.
마리아 2세의 통치 이후 왕실의 권위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나, 19세기 후반 산업 혁명과 함께 공화주의 사상이 확산되었다. 결국 1908년 카를루스 1세와 루이스 필리페 왕세자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뒤를 이은 마누엘 2세는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퇴위하여 영국으로 망명했다. 이로써 포르투갈의 왕정은 막을 내리고 공화국으로 전환되었으며, 브라간사 왕조의 통치도 종식되었다.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주앙 4세 | 1640년–1656년 |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 첫 군주, 포르투갈 왕정복고 전쟁을 통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
아폰수 6세 | 1656년–1683년 | 후계자 없이 사망. |
페드루 2세 | 1683년–1706년 | 아폰수 6세의 동생, 1668년부터 1683년까지 섭정. |
주앙 5세 | 1706년–1750년 | 브라질 금 유입으로 인한 번영기. |
주제 1세 | 1750년–1777년 | 퐁발 후작 등용, 계몽 전제 정치 실시, 1755년 리스본 지진 발생. |
마리아 1세 | 1777년–1816년 | 페드루 3세(1777년–1786년)와 공동 통치. 퐁발 후작 추방. 브라질로 피신하여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사망. |
주앙 6세 | 1816년–1826년 | 브라질에서 즉위, 포르투갈·브라질 및 알가르브 연합 왕국 통치, 1821년 리스본 귀환. |
페드루 4세 | 1826년 |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 잠시 왕위를 계승했으나 딸 마리아 2세에게 양위. |
마리아 2세 | 1826년–1853년 | 미겔 1세(1828년–1834년)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가 내전 승리로 복위. 페르난두 2세(1837년–1853년)와 공동 통치. |
미겔 1세 | 1828년–1834년 | 페드루 4세의 동생, 왕위 찬탈 후 내전에서 패배하여 추방됨. |
페드루 5세 | 1853년–1861년 | 마리아 2세와 페르난두 2세의 아들. 이 왕부터 브라간사-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로도 불림. |
루이스 1세 | 1861년–1889년 | 페드루 5세의 동생. |
카를루스 1세 | 1889년–1908년 | 1908년 리스본 국왕 암살 사건으로 아들 루이스 필리페 왕세자와 함께 암살됨. |
마누엘 2세 | 1908년–1910년 | 카를루스 1세의 차남.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퇴위, 포르투갈의 마지막 군주. |
3. 2.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다가
마리아 2세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자 출신 페르난두 2세와 결혼하면서, 페드루 5세 이후의 군주들은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타 가문(포르투갈어: Bragança-Saxe-Coburgo-Gotapt)으로도 불린다. 마리아 2세 치하에서 왕실은 권위를 회복했지만, 19세기 후반 산업 혁명과 함께 성장한 부르주아지 사이에서 공화주의 사상이 확산되었다.- 페드루 5세 (1853년–1861년)
- 루이스 1세 (1861년–1889년)
- 카를루스 1세 (1889년–1908년): 리스본에서 공화주의자에게 암살되었다.
- 루이스 필리페 (1908년): 카를루스 1세의 장남이자 왕태자. 아버지와 함께 암살되었으나, 약 20분 더 생존하여 그 사이에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간주된다.
- 마누엘 2세 (1908년–1910년):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포르투갈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퇴위하였다. 이후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이로써 포르투갈에서의 브라간사 왕조 통치는 종식되었다.
왕조로서의 통치는 단절되었지만, 가문 자체는 남계 후손을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4. 브라질 제국 통치
1822년, 포르투갈 왕가의 일원인 페드루 1세가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브라간사 가문의 브라질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브라질 제국이 건국되었다.
페드루 1세의 뒤를 이은 아들 페드루 2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초기에는 섭정 통치를 거쳤으나, 이후 58년간의 긴 통치 기간 동안 브라질의 안정과 발전을 이끌었다. 그의 통치 하에 브라질은 여러 국제 분쟁에서 승리하고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으며, 이사벨 황태녀에 의해 1888년 노예제가 최종 폐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통치 말기, 군주제 유지에 대한 황제 자신의 소극적인 태도와 후계 문제 등이 겹치면서 공화주의 세력이 성장하였다. 결국 1889년 군부 쿠데타로 제정이 폐지되면서 페드루 2세는 브라질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고, 브라간사 가문의 브라질 통치도 막을 내렸다.
4. 1. 브라질 황제

1822년 9월 7일, 브라간사 가문의 일원이자 포르투갈 왕위 계승자이며 브라질 왕국의 섭정이었던 돔 페드루는 포르투갈, 브라질 및 알가르브 연합 왕국으로부터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고 브라질 황제로 추대되었다. 10월 12일, 그는 새로 건국된 입헌 군주국 브라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인 페드루 1세로 즉위했다. 1825년 리우데자네이루 조약을 통해 그의 아버지인 국왕 주앙 6세는 브라질 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페드루 1세의 통치는 여러 위기에 직면했다. 1825년 플라티나 속주에서 발생한 분리주의 반란과 라플라타 연합주의 플라티나 합병 시도는 제국을 플라티나 전쟁으로 이끌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1826년 3월 주앙 6세가 사망하자 페드루 1세는 포르투갈 왕위를 상속받아 잠시 포르투갈의 국왕 페드루 4세가 되었으나, 곧 딸 마리아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1828년 남부 전쟁에서 브라질은 플라티나를 잃고 해당 지역은 독립 공화국 우루과이가 되었다. 같은 해 리스본에서는 페드루 1세의 동생인 미겔 왕자가 마리아 2세의 왕위를 찬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826년 개원한 제국 의회와의 관계에서도 어려움이 있었다. 페드루 1세는 황제가 강력한 행정 권한을 갖는 정부를 원했지만, 의회 다수는 입법부 중심의 정책 결정과 통치를 주장하며 대립했다. 정부 운영 방식을 둘러싼 황제와 의회 간의 갈등은 1826년부터 1831년까지 지속되었다. 브라질과 포르투갈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어려웠던 페드루 1세는 1831년 4월 7일, 아들 페드루 2세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유럽으로 건너가 딸 마리아 2세의 포르투갈 왕위 복위를 위한 자유주의 전쟁에 참여했다.


페드루 1세의 뒤를 이은 아들 페드루 2세는 즉위 당시 다섯 살에 불과하여 섭정이 통치했다. 강력한 군주 부재로 인한 권력 공백은 각 지역 분파 간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1840년, 14세의 나이로 성년 선포를 받은 페드루 2세는 분열 직전의 제국을 물려받아 점차 평화와 안정을 가져왔고, 브라질을 신흥 국제 강국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브라질은 세 차례의 국제 분쟁(플라틴 전쟁, 우루과이 전쟁, 파라과이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여러 국제 및 국내 갈등에서 우위를 점했다. 경제 발전과 번영으로 유럽 이민자들이 유입되었고, 브라질은 가톨릭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개신교와 유대교 신자들을 받아들였다. 널리 퍼져 있던 노예제는 점진적인 법률 개정을 통해 제한되다가, 1888년 황태녀 이사벨 여제가 섭정으로서 서명한 황금법(Lei Áurea)에 의해 최종적으로 폐지되었다.
페드루 2세 통치 후반 40년은 지속적인 국내 평화와 경제적 번영의 시기였으나, 정작 황제 자신은 군주제가 자신의 대 이후까지 지속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제도를 유지하려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왕위 계승자는 그의 딸 이사벨이었지만, 페드루 2세와 지배 계급은 여성 군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실행 가능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군주제를 옹호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대부분의 브라질인들은 국가의 정부 형태를 변경하려는 욕구가 없었지만, 공화주의자들은 육군 장교들에게 군주제를 전복하라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58년간의 통치 후, 1889년 11월 15일 황제는 독재자가 이끄는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군 지도자들의 파벌이 주도한 갑작스러운 쿠데타로 전복되었고, 브라질 제1 공화국을 형성했다. 쿠데타 전반에 걸쳐 페드루 2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정치인과 군 지도자들이 제시한 모든 제안을 거부했다. 황제와 그의 가족은 포르투갈 왕국과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제국이 몰락한 후 상당한 군주주의적 반발이 있었지만, 이는 철저히 진압되었고 페드루 2세도 그의 딸이자 상속녀도 강제 복원을 지지하지 않았다.
5. 포르투갈 왕정 복고 전쟁
1807년, 임박한 나폴레옹의 침공에 직면하여 브라간사 왕가는 왕실을 브라질 국가로 이전했는데,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가장 큰 식민지였다. 대서양을 건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왕령에 따라 브라질의 지위가 포르투갈의 식민지에서 포르투갈과 동등한 왕국으로 바뀌었고,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 왕국이 형성되었다. 1821년, 1816년에 즉위한 주앙 6세는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페드루,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의 왕세자는 주앙 6세의 장남이자 브라질의 섭정이었으며, 1822년 1월 브라질 반군 편에 섰다. 그는 1822년 독립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1세로 선포되었고, 브라질 제국을 건국했다. 페드루 1세는 1831년까지 브라질을 통치하다가 어린 아들 페드루 2세에게 양위하고, 딸 마리아 2세를 돕기 위해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페드루 2세는 즉위 당시 불과 6세였기에 섭정 통치가 수립되었다. 섭정은 황제가 14세가 되는 1840년까지 통치했다. 그의 통치는 브라질 군주제가 폐지된 1889년까지 이어졌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브라질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으며, 제국은 매우 오랜 기간 동안 평화와 발전을 누렸다.
6. 나폴레옹 전쟁과 브라질 천도
19세기 초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801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는 포르투갈에게 영국 상선의 입항을 금지하고 프랑스에 영토 일부를 넘길 것을 요구했다. 포르투갈이 이를 거부하자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이 포르투갈을 침공하였고(오렌지 전쟁), 결국 포르투갈은 같은 해 6월 바다호스 조약을 맺어 나폴레옹의 요구를 수용해야 했다.[9]
이후 1806년 나폴레옹이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선포했으나, 오랜 동맹국이었던 영국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었던 포르투갈은 1807년 이를 거부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다시 포르투갈 침공을 명령했고(반도 전쟁), 주노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리스본으로 진격해오자 포르투갈 왕실은 큰 위기에 직면했다.
프랑스군의 리스본 함락이 임박하자, 포르투갈 왕실은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천도를 결정했다. 당시 여왕 마리아 1세는 고령과 정신 질환으로 통치 능력을 상실했기에, 아들이자 섭정이었던 주앙 왕자(훗날 주앙 6세로 즉위)가 모든 결정을 내렸다. 1807년 11월, 주앙 왕자를 비롯한 왕족과 귀족, 관리, 병사 등 약 15,000명이 막대한 재물을 싣고 영국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리스본 항구를 떠났다. 이는 유럽 역사상 전례 없는 신대륙으로의 궁정 이전이었다.
약 두 달간의 힘든 항해 끝에 왕실 함대는 1808년 1월 브라질의 바이아에 도착했고, 같은 해 3월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겨 이곳을 임시 수도로 삼았다. 브라간사 왕가의 브라질 체류는 1821년까지 13년간 이어졌다. 브라질로 천도한 직후, 주앙 왕자는 브라질의 지위를 단순한 식민지에서 포르투갈과 동등한 왕국으로 격상시켰고, 1815년에는 포르투갈, 브라질, 알가르브 연합 왕국의 성립을 공식 선포했다. 이로써 마리아 1세는 최초의 브라질 군주가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1821년, 1816년에 정식으로 즉위한 주앙 6세는 포르투갈로 귀환했다.
7. 브라질 독립과 포르투갈 내전
1821년 포르투갈 왕실이 리스본으로 귀환한 후, 브라질에 섭정으로 남아 있던 브라간사 가문의 동 페드루 왕자는 1822년 9월 7일 포르투갈, 브라질 및 알가르브 연합 왕국으로부터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같은 해 10월 12일, 그는 새롭게 건국된 브라질 제국의 초대 황제 페드루 1세로 즉위하였고, 브라질은 입헌군주제 국가가 되었다. 1825년 리우데자네이루 조약 체결을 통해 그의 아버지인 주앙 6세 국왕은 브라질 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페드루 1세는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위기에 직면했다. 1825년 플라티나 속주의 분리주의 반란과 라플라타 연합주의 합병 시도는 제국을 플라티나 전쟁으로 이끌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1826년 3월, 주앙 6세가 사망하자 페드루 1세는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하여 잠시 페드루 4세가 되었으나,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재결합을 원치 않았기에 곧 7살 된 딸 마리아 다 글로리아에게 왕위를 양위했다. 이 과정에서 페드루 1세의 동생인 미겔 왕자가 섭정을 맡고, 마리아가 성년이 되면 결혼하기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1828년, 미겔은 스스로 포르투갈 국왕 미겔 1세를 자처하며 주앙 6세가 승인한 자유주의 헌법을 부정하고 절대군주제를 복원하려 시도했다. 이로 인해 마리아 2세는 삼촌 미겔 1세에 의해 강제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같은 해, 브라질은 남부 전쟁에서 패배하여 플라티나 속주를 잃고 해당 지역은 우루과이로 독립하게 되었다. 또한 브라질 내에서는 황제의 권한 범위를 둘러싸고 페드루 1세와 의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브라질과 포르투갈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페드루 1세는 1831년 4월 7일, 아들 페드루 2세에게 브라질 제위를 물려주고 유럽으로 건너가 딸 마리아 2세의 왕위를 되찾기 위한 자유주의 전쟁(포르투갈 내전)에 나섰다. 그는 아소르스 제도를 거점으로 미겔 1세에 대항하는 군사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마침내 1834년에 미겔 1세를 격파하고 그를 망명시켰다. 비록 망명했지만 미겔은 왕위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는 브라간사 왕가의 '''미겔주의자 분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포르투갈에서는 마리아 2세 치하에서 왕실의 권위가 회복되었으나, 19세기 후반 산업 혁명과 함께 성장한 부르주아지 사이에서 공화주의 사상이 확산되었다. 결국 1910년 10월 5일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었고, 마지막 국왕 마누엘 2세는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브라간사 가문의 포르투갈 통치는 막을 내렸다. 브라질 제국 역시 페드루 2세 시대까지 이어졌으나 1889년 쿠데타로 제정이 폐지되었다.
8. 1910년 포르투갈 혁명
주앙 6세 사후 포르투갈 내전 (1828년 - 1834년)을 거쳐 마리아 2세 시대에 왕실의 권위가 잠시 회복되기도 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성장한 부르주아지 계층 사이에서 공화주의 사상이 확산되었다. 결국 1910년 10월 5일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무너졌고, 포르투갈의 마지막 국왕 마누엘 2세는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9. 현대의 브라간사 가문
브라간사 가문은 과거 포르투갈 왕국과 브라질 제국을 다스렸던 왕가였으나, 현재 두 국가는 모두 공화국 체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간사 가문의 후손들은 각국의 왕위 및 황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포르투갈에서는 1910년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된 이후, 미겔 1세의 후손들이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가문의 수장은 두아르테 피우, 브라გან사 공작으로, 그는 포르투갈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군주제 지지자들에게 왕위 계승자로 여겨지고 있다.[2] 그는 동티모르의 독립을 지지하는 등 사회적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1889년 군사 쿠데타로 제정이 폐지된 이후, 마지막 황제 페드루 2세의 후손인 오를레앙-브라간사 가문이 황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있다. 현재 가문의 수장은 오를레앙-브라간사 공작 베르트랑이다. 브라질 황실 가문은 과거 그랑파라 공작 페드루 드 알칸타라의 계승권 포기 선언을 둘러싼 논란으로 인해 페트로폴리스 분파와 바소라스 분파로 나뉘어 있다.[4] 1993년 브라질에서 군주제 복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나 부결되었지만,[5] 양 분파는 여전히 군주제 복원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4]
9. 1. 포르투갈
1910년 혁명 이후, 포르투갈의 마지막 국왕 마누엘 2세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1932년 자녀 없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과거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던 미겔 1세(1826년 왕위를 찬탈했던 인물)의 후손들이 포르투갈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1922년, 브라간사 가문의 서로 다른 계파들은 마누엘 2세가 미겔 1세의 손자인 두아르테 누누 드 브라간사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했다는 내용의 협정을 맺었다고 전해진다. 1942년, 두아르테 누누는 브라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페드루 2세의 증손녀와 결혼함으로써 가문의 양대 계파를 통합했다. 그는 1976년 사망할 때까지 브라간사 가문의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1950년 포르투갈 정부는 브라간사 가문에 대한 추방령을 폐지했고,[2] 두아르테 누누는 1952년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두아르테 누누의 왕위 계승권은 그의 아들 두아르테 피우 드 브라간자(1945년 출생)에게 넘어갔다. 두아르테 피우는 포르투갈 군대에서 복무하며 공화국에 대한 충성 서약을 했지만, 포르투갈의 군주제 지지자들은 여전히 그를 포르투갈 왕위 계승자로 여기고 있다. 1995년 그는 포르투갈 사업가이자 프란시스코 코레아 드 에레디아, 리베이라 브라바 제1자작의 후손인 이사벨 드 에레디아와 결혼했다. (종신 귀족 작위인 ''Vitalício'' 작위[3]). 두아르테 피우는 인도네시아로부터 동티모르의 독립을 얻기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두아르테 피우와 이사벨 사이에는 세 명의 자녀가 있다. 장남인 아폰수 데 산타 마리아는 포르투갈 왕위 계승자의 법정추정상속인에게 주어지는 전통적인 칭호인 베이라 공과 브라간사 공작의 상속자에게 주어지는 바르셀루스 공작 칭호를 가지고 있다. 그 외에 포르투 공작 디니스와 여동생 인판타 마리아 프란시스카가 있다.
한편, 마리아 피아 드 사크세-코부르구 이 브라간사는 자신이 포르투갈 국왕 카를루스 1세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며 1957년부터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그녀는 이탈리아인 로사리오 포이디마니를 입양하여 자신이 주장하는 포르투갈 왕위에 대한 권리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9. 2. 브라질
1889년 군사 쿠데타 이후, 브라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페드루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1891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정착했다. 그의 장녀 이자벨 공주와 가족은 프랑스 노르망디의 외 성에서 거주했다. 이자벨은 1921년 사망할 때까지 브라질 군주주의자들에 의해 망명 황제 이자벨 1세로 인정받았다.이자벨의 뒤를 이어 손자인 페드루 엔리케 공이 브라질 황실 가문의 수장이 되었고, 이후 그의 아들이자 현재 수장인 루이스 공이 계승했다.
1920년 황실 가족에 대한 추방령이 해제되면서 일부 왕족들은 브라질로 돌아와 정착했지만, 다른 이들은 유럽에 남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당시 황실 가문의 수장이었던 페드루 엔리케는 바이에른의 마리아 엘리자베스 공주와 결혼한 후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돌아왔다.
1908년 그랑파라 공작 페드루 드 알칸타라가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으나, 이후 그의 후손들이 이 포기 선언을 거부하면서 브라질 황실 가문은 경쟁하는 두 분파로 나뉘게 되었다.[4] 이 두 분파는 각각 페트로폴리스 분파와 바소라스 분파로 알려져 있다.
두 분파의 일부 구성원들은 그랑파라 궁전에서 살았고, 일부는 유럽 왕족이나 귀족과 결혼하여 유럽에서 생활했으며, 다른 이들은 브라질의 다른 지역에서 거주했다.[4] 1993년 브라질에서는 군주제 복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나, 공화제 지지율 66%에 군주제 지지율 13.2%로 부결되었다.[5] 페트로폴리스 분파(오를레앙-브라간사 공자 페드루 가스탕과 그의 조카 오를레앙-브라간사 공자 조아지뉴)와, 더 널리 인정받는 황실 가문인 바소라스 분파(루이스 가스탕 공이 이끎)의 구성원 모두 군주제 복원 운동에 참여했으며,[4] 바소라스 분파의 수장은 현재도 군주제 복원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Portuguese Constitution of 1826
http://www.fd.unl.pt[...]
2016-12-20
[2]
간행물
Law no. 2040
Diário do Governo
1950-05-27
[3]
서적
[4]
뉴스
Claimants Dream of New Brazilian Monarchy
https://www.washingt[...]
1993-04-20
[5]
웹사이트
Resultado Geral do Plebiscito de 1993
http://www.justicael[...]
Justiça Eleitoral
2017-03-31
[6]
서적
[7]
문서
America, Independent States of
[8]
문서
[9]
서적
世界戦争事典 改訂第2版
河出書房新社
[10]
서적
스페인,포르투칼사
대한교과서
1988-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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