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와무라 히로카즈는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여 주오 대학을 거쳐 2010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순위로 지명되었다. 2011년 신인왕을 수상했으며, 2013년 올스타전 MVP, 2016년에는 최다 세이브 투수 타이틀을 얻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9시즌 동안 활약하며 3번의 일본 시리즈에 출전했고, 2012년에는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2020년에는 지바 롯데 마린스로 이적 후, 2021년에는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하여 메이저 리그에서 뛰었다. 2023년 지바 롯데 마린스로 복귀하여 현재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도치기현 출신 야구 선수 - 마나카 미쓰루 마나카 미쓰루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출신으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외야수로 활동하며 준수한 외모로 인기를 얻었고, 은퇴 후 야쿠르트 감독으로서 센트럴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현재는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선풍기 사진을 게시하는 취미를 가진 인물이다.
도치기현 출신 야구 선수 - 와타나베 슌스케 와타나베 슌스케는 언더핸드 투구 폼을 가진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활약하며 2005년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이후 코치와 감독을 역임했다.
도치기현 출신 - 후루시마 키요타카 후루시마 키요타카는 하이 바리톤 음색을 가진 일본의 남자 성우로, 다양한 애니메이션, 게임, 드라마 CD, BLCD, 특촬물 등에서 폭넓게 활동하며 뛰어난 연기력으로 특히 OLM 제작 애니메이션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도치기현 출신 - 모테기 도시미쓰 모테기 도시미쓰는 자유민주당 소속의 일본 정치인으로, 중의원 의원으로서 여러 내각직을 역임하며 무역협상과 경제협정 체결 등을 주도했고 자민당 간사장을 지냈으나 총재 선거에서 낙선했으며, 정책 추진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다.
2015년 WBSC 프리미어 12 참가 선수 - 민병헌 민병헌은 2006년 두산 베어스에 입단하여 롯데 자이언츠를 거쳐 KBO 리그 통산 1438경기에 출전, 0.295의 타율을 기록하고 2014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획득한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로, 은퇴 후 지도자 및 해설가로 활동한다.
2015년 WBSC 프리미어 12 참가 선수 - 오타니 쇼헤이 오타니 쇼헤이는 일본 프로야구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투수와 타자 모두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며 MVP를 수상하고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이도류 야구 선수이다.
2010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아베 신노스케, 가메이 요시유키 등 주오 대학 출신 선수들의 활약을 보고 사와무라를 단독 1순위로 지명했다. 사와무라는 기자회견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151] 당초 등번호 '''18'''번을 희망했으나, 구단 대표 기요타케 히데토시는 사와무라 에이지를 뛰어넘으라는 의미로 '''15'''번을 제안했다.[152] 그러나 2011년 FA로 요미우리에 이적한 스기우치 도시야에게 18번이 주어지면서, 사와무라는 15번을 달게 되었다.
드래프트 직전 주니치 스포츠[153], 스포츠 호치[154], 스포츠 닛폰[155] 등은 주니치 드래건스가 사와무라를 1순위로 지명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주니치는 오노 유다이를 지명했는데, 닛칸 겐다이는 주니치가 입단 거부 위험을 고려하여 사와무라 지명을 보류했다고 보도했다.[156] 사와무라는 드래프트 전 메이저 리그 구단들로부터 계약 제의를 받았으며, 요미우리 외 구단에 지명될 경우 미국 진출을 고려했을 것이라고 밝혔다.[148]
2. 1. 유소년 시절
초등학교 2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여 6학년 때부터 투수를 맡았다. 이때부터 자기 주장이 강했다고 한다.[144] 도치기 시립 도요 중학교에서도 야구부에 소속되면서 소속 도치기현 대회에도 출전했고, 사노 닛다이 고등학교 시절에는 팀의 세 번째 투수로서 여름을 맞이해 등판 기회가 없는 채로 도치기현 대회 결승에서 패했다.[145] 고등학교 선배이자 주오 대학 OB이기도 한 아이다 유시의 권유도 있어[146] 주오 대학 경식 야구부를 지원했다. 도카이 대학에도 지원하여 주오 대학과 도카이 대학에 모두 합격했지만 먼저 합격 통지를 받은 주오 대학(상학부)[147]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144]
대학 진학 후 2학년 가을에는 도토 대학 1부 리그 첫 선발·첫 승리를 완봉으로 장식하여 팀내 에이스로 성장했고, 2009년에 제37회 미일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와 제25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팀 선수로 발탁됐다. 3학년 때 추계 리그전인 아오야마가쿠인 대학과의 경기에서 1회에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의 대학생으로서는 역대 최고 속도가 되는 시속 156km/h를 측정했다. 같은 해 11월 22일에 U-26 NPB 선발 vs 대학 일본 대표팀 선수로 출전, 3회말에 1이닝을 던지면서 사카모토 하야토를 직구로 루킹 삼진으로 잡는 등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4학년 때 춘계 리그전인 도요 대학과의 경기에서 대학생으로서의 역대 최고 성적을 경신하는 시속 157km/h[148]를 측정하는 등의 활약으로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 리그전이 종료된 후에는 세계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팀 선수로 발탁됐지만 부상 때문에 출전을 포기했다. 도토 대학 1부 리그 통산 41경기에 등판하여 19승 14패, 평균 자책점 1.31, 266개의 탈삼진을 기록했고, 2부 리그에서는 7승 2패를 기록했다. 2011년에 대학을 졸업했다.[148]
주오 대학 2학년 가을에는 구속이 150km를 넘게 됐지만, 야구부 감독이던 다카하시 요시마사는 컨트롤과 변화구를 익히도록 반복적으로 지도했다. 3학년 가을 무렵부터 성장의 조짐이 보였고,[149] 그해 완봉한 4학년 가을에 열린 아시아 대학과의 경기에서는 다카하시도 “완벽한 피칭이라고 부를 수 있는 투구”라고 평가했다. 사와무라도 같은 해 봄부터 변화구를 익혀 투구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150]
2. 2. 고교 시절
초등학교 2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여 6학년 때부터 투수를 맡았다. 이때부터 자기 주장이 강했다고 한다.[144] 도치기 시립 도요 중학교에서도 야구부에 소속되어 도치기현 대회에도 출전했다. 사노 니혼 대학 고등학교 시절에는 팀의 세 번째 투수로서 여름을 맞이해 등판 기회가 없는 채로 소속 도치기현 대회 결승에서 패했다.[145] 고등학교 선배이자 주오 대학 OB이기도 한 아이다 유시의 권유로[146] 주오 대학 경식 야구부에 지원했다. 도카이 대학에도 지원하여 주오 대학과 도카이 대학에 모두 합격했지만 먼저 합격 통지를 받은 주오 대학(상학부)[147]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144]
2. 3. 대학 시절
사노 닛다이 고등학교 시절 사와무라는 3학년 여름까지 등판 기회가 없었다.[145] 고등학교 선배이자 주오 대학 OB인 아이다 유시의 권유로[146] 주오 대학에 진학했다.[144]
대학 2학년 가을, 도토 대학 1부 리그에서 첫 선발과 승리를 완봉으로 장식하며 팀의 에이스로 성장했다.[144]2009년에는 제37회 미일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와 제25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었다. 3학년 가을 리그전에서는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대학생 최고 속도인 156km/h를 기록했고, U-26 NPB 선발 vs 대학 일본 대표팀 경기에 출전하여 1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4학년 봄 리그전에서는 157km/h를 기록하며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148]세계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로도 발탁되었으나 부상으로 출전을 포기했다.[148] 도토 대학 1부 리그 통산 41경기에 등판하여 19승 14패, 평균 자책점 1.31, 266탈삼진을 기록했다.[148]
주오 대학 야구부 감독 다카하시 요시마사는 사와무라에게 컨트롤과 변화구를 익히도록 지도했고,[149] 3학년 가을부터 성장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149] 4학년 가을, 다카하시는 사와무라의 투구를 "완벽한 피칭"이라고 평가했다.[150] 사와무라 자신도 변화구를 익히며 투구의 폭이 넓어졌다고 실감했다.[150]
2010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단독 1순위 지명을 받고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렸다.[151] 등번호 '''18'''번을 희망했지만, 구단 대표 기요타케 히데토시는 '''15'''번을 제안했다.[152]
3. 프로 선수 경력
2013년 2월 20일, 제3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에 합류하여[166][167][168] 본선에서 중간 계투로 4경기에 등판, 3과 1/3이닝 1실점을 기록했다. 같은 해 3월 말에는 모리 마키와 이혼했다.[169]
그 해에는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그 해 득점지원률은 규정 투구 이닝을 채운 선수 중 리그 최악이었다) 시즌 전반기에는 4승 6패, 평균 자책점 2.46으로 어느 정도 성적을 냈다. 올스타전에서는 감독 추천으로 출전,[170] 1차전에서 3이닝을 던져 MVP를 수상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투수로서는 1984년에가와 스구루 이후 29년 만의 수상이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승리하지 못하는 경기가 이어지며 투구 내용도 나빠졌다. 9월 12일 DeNA전(도쿄 돔)부터는 중간 계투로 기용됐다. 중간 계투로 12경기에 등판해 1승 1패 6홀드, 평균 자책점 0.63으로 호투했지만, 시즌 전체로는 5승에 그치며 3년 연속 두 자릿수 패전을 기록하는 등 부진했다. 히로시마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1차전에 중간 계투로 등판해 무실점으로 호투했고,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4경기에 중간 계투로 등판했다.
사와무라는 2011년부터 2020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9시즌을 뛰었다.[4] 2011년에는 센트럴 리그 신인왕에 선정되었고,[6] 2013년에는 NPB 올스타전 1차전 MVP로 선정되었다.[7] 2017년에는 어깨 부상으로 인해 출전하지 못했다.[5] 처음 4시즌 동안은 주로 선발 투수로 활약했으며, 2014년 이후에는 구원 투수로만 출전했다.[1] 2015년과 2016년에는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각각 36세이브와 37세이브를 기록했다.[4]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9시즌 동안 48승 50패, 74세이브를 기록했다.[4]
4월 15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마쓰다 스타디움)에서 프로 첫 등판 및 첫 선발 등판하여 7회 도중까지 2실점(무자책점)을 기록했다. 이 경기에서는 첫 승을 거두지 못했지만, 같은 달 21일 한신 타이거스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7이닝 1실점으로 호투하며 데뷔 첫 승리 투수가 되었다.[157] 5월 31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세이부 돔)에서 프로 첫 완투승을 거두었고, 6월 19일 세이부전(도쿄 돔)에서 7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여 홈구장에서의 첫 승리를 달성했다. 그러나 첫 승리 기념 공은 이날 팀의 마지막 투수로 등판한 조나단 알발라데호가 관중석에 던져넣었기 때문에 사와무라의 손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시즌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안정된 투구를 보였으나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해 패전 수가 앞섰지만, 9월 이후에는 5승 1패, 평균 자책점 1.10, WHIP 0.64를 기록하며 호투했다. 시즌 최종전에서 평균 자책점이 1점대를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에나쓰 유타카 이후 센트럴 리그 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200이닝을 달성했다.[158] 최종적으로 5차례의 완투를 포함한 11승 11패, 평균 자책점 2.03, 174탈삼진, WHIP 0.97 등의 좋은 성적을 남겨 센트럴 리그 신인왕을 차지했다. 사와무라의 수상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2008년 야마구치 데쓰야 이후 4년 연속 신인왕을 배출하게 됐고, 같은 구단에서 4년 연속 신인왕 수상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이다. 10월 11일에는 정찰 멤버로서 2번 타자 겸 1루수로 선발 출전했다.
10월 17일에는 닛폰 TV 아나운서 모리 마키와 시즌 종료 후 결혼하는 것을 공식 발표했다.
3. 1. 2. 2012년
요미우리에서 신인 투수가 2년 연속으로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한 것은 1966~1967년의 호리우치 쓰네오(각각 16승, 12승) 이래 45년 만이다.[159] 그해 시즌에는 ‘상대를 제압하는 피칭’을 목표로 하여 작년 시즌 종료 이후부터 육체 개조에 전념했다. 시즌 초에는 평균 자책점이 1점 대에 머물 정도로 안정돼 있었지만 교류전을 계기로 구위가 떨어지면서 컨디션이 무너져 이후에는 불안정한 투구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시즌 최종 등판인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와의 경기에서 5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어 가까스로 10승을 달성했지만, 요미우리에서는 1979~1980년의 에가와 스구루(각각 10패, 12패) 이후 32년 만이자 신인으로서 2년 연속 두 자릿수 패전을 기록, 투구 내용도 작년보다 좋지 못했다.
포스트시즌인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팀이 3연패를 당하여 패하면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끝나는 상황에서 4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무자책점(1실점)으로 호투, 승리 투수가 됐다. 이후 요미우리는 이 4차전을 포함한 3연승을 기록하여 일본 시리즈에 진출했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 맞붙은 일본 시리즈에서는 2차전에 선발 등판해 8이닝 무실점의 호투로 일본 시리즈에서의 첫 등판·첫 선발과 동시에 첫 승리를 올렸다. 이 경기에서는 1회에 위기를 맞아 견제 사인을 놓쳐 포수 아베 신노스케로부터 마운드에서 머리를 얻어맞는 장면도 있었는데, 이후 정신을 차렸다는 점도 화제가 됐다.[160] 그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6차전에도 등판했지만 6회초에 나카타 쇼에게 3점 홈런을 맞고 동점이 된 뒤 대타로 교체되면서 강판됐다. 팀은 4승 2패의 성적으로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2012년 5월 13일, 고마치 스타디움에서
그 후 11월 6일에 사무라이 재팬 매치 2012 ‘일본 대표 대 쿠바 대표’의 일본 대표팀 선수로 발탁됐다는 사실이 발표돼[161] 대표팀에 합류했다.[162] 또한 12월 4일에는 제3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후보 선수 34인의 명단이 발표되면서[163] 후보에 올랐다.[164]
그 해에는 타선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와중에(그 해 득점지원률은 규정 투구 이닝을 도달한 선수 중에서는 리그 최악이었다) 시즌 전반기는 4승 6패, 평균 자책점 2.46으로 어느 정도의 성적을 남겼다. 올스타전에서는 감독 추천으로 출전 선수로 발탁[170]돼 1차전에서는 3이닝을 던져 MVP를 수상했다. 요미우리의 투수로서는 1984년에가와 스구루 이후 29년 만의 수상이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전반기에 이어 승리하지 못하는 경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투구 내용도 서서히 나빠졌다. 9월 12일 DeNA와의 경기(도쿄 돔)부터는 중간 계투로 기용됐다. 중간 계투로서는 12경기에 등판해 1승 1패 6홀드, 평균 자책점 0.63의 성적을 남기며 호투했지만 시즌을 통해선 5승 밖에 거두지 못했고 3년 연속 두 자릿수 패전을 기록하는 등 전년도 이상의 부진에 시달렸다. 히로시마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1차전에 중간 계투로 등판해 무실점의 호투를 보였고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4경기에 중간 계투로 등판했다.
3. 1. 4. 2014년
2월 3일 스프링 캠프 초반에 오른쪽 어깨 통증으로[171] 시즌 개막은 2군에서 맞이했다. 7월에 1군으로 승격했지만, 같은 달 30일에 등록이 말소되었고 8월에 다시 승격되어[172] 5승 3패로 정규 시즌을 마쳤다. 10월 16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2차전에서 우에모토 히로키의 머리에 사구를 던져 심판으로부터 위협구로 간주되어 퇴장당했다.[173] 이 위협구로 인해 한신 타선에 압도당하며 팀은 패했고, 이후 4연패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탈락했다. 11월 9일,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불안정한 구원진을 강화하기 위해 사와무라를 중간 계투로 배치 전환한다고 발표했다.[174]
3. 1. 5. 2015년
2014년 11월 9일,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불안정했던 구원진을 강화하기 위해 사와무라를 중간 계투로 배치 전환하겠다고 밝혔다.[174] 옆구리 통증으로 한때 전력에서 이탈한 시기는 있었지만 주로 중간 계투로 등판했고, 갑작스러운 선발 등판(2014년 이후의 선발 등판)도 소화하면서 43경기에 등판하여 평균 자책점, WHIP 등의 성적은 전년보다 개선되어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연봉도 개인 최고 액수인 1.54억엔(추정치)이 됐다.[190]
스프링 캠프 초반인 2월 3일에 발병한 오른쪽 어깨 통증으로 시즌 개막은 2군에서 맞이했다.[171] 7월에는 1군에 승격했지만 같은 달 30일에 등록이 말소되면서 8월에 재승격돼[172] 5승 3패의 성적으로 정규 시즌을 끝냈다. 10월 16일에 열린 한신과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2차전에 등판했지만 우에모토 히로키의 머리 부분에 사구를 던져 심판이 위협구로 간주하여 퇴장당했다.[173] 결과적으로 이 위협구로 인해서 한신 타선에 압도당하여 팀은 패했고 그 후 내리 4연패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탈락했다. 11월 9일, 하라 다쓰노리 감독은 불안정했던 구원진을 강화하기 위해 사와무라를 중간 계투로 배치 전환하겠다고 밝혔다.[174]
2020년 9월 8일, 사와무라는 지바 롯데 마린스로 트레이드되었다.[11] 그해 마린스에서 22경기에 출전하여 0승 2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ERA) 1.71을 기록했으며, 21이닝 동안 29개의 삼진을 잡았다.[4] 시즌 후, 사와무라는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12]
3. 2.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 (제1기)
2020년 9월 7일, 가쓰키 가즈야와의 맞트레이드로 지바 롯데 마린스에 이적했다.[195] 추정 연봉 1억 엔 이상의 일본인 선수가 시즌 도중에 트레이드된 사례는 2001년 하루 도시오(요코하마→주니치), 2011년 사부로(지바 롯데→요미우리)에 이어 NPB 역대 3번째이며, 투수로서는 처음이다. 등번호는 요미우리 시절 착용했던 '''15'''번은 전년도 오프에 트레이드로 입단한 대학 선배 미마 마나부가 이미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쓰키가 착용했던 '''57'''번으로 정했다. 9월 8일 입단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즉시 지배하 등록 및 1군 출전 선수로 등록되었으며, 같은 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전(ZOZO 마린 스타디움)에서 벤치에 들어갔다. 그러나 유니폼이 없어 타격 투수 후쿠시마 아키히로의 ‘106’번 유니폼을 빌려 입었다.[196] 이 경기에서 6회초에 등판해 3자 연속 삼진을 포함, 1이닝 무실점으로 막으며 무난하게 데뷔전을 치렀다.[197]
9월 20일 닛폰햄전(삿포로 돔) 연장 10회말에 볼넷 3개를 내줬지만 무실점으로 막아 팀의 2연패를 막고 세이브를 기록했다. 시즌 도중 입단으로 세이브를 기록한 것은 팀 역대 3번째였다.[198] 그해 클라이맥스 시리즈 1차전에 등판했지만 1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됐다. 정규 시즌 중인 10월 17일 해외 자유 계약 선수권(FA) 취득 조건을 충족,[199] 11월 30일에 메이저 리그 이적을 목적으로 FA권을 행사했다.
지바 롯데는 사와무라가 잔류할 경우를 대비해 등번호 14번(요미우리에서는 사와무라 에이지의 번호이자 영구 결번)과 4년 10억 엔 규모의 계약을 제시했다.[200] 2020년 마린스에서 22경기에 출전, 0승 2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ERA) 1.71을 기록했으며 21 이닝 동안 29개의 삼진을 잡았다.[4] 시즌 후, 사와무라는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12]
3. 3.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사와무라는 2021년 2월 16일 보스턴 레드삭스와 2년 계약을 맺었다.[201][202] 3년째인 2023년에는 상호 옵션이 적용된다. 처음에는 등번호 22번을 사용했지만, 3월 6일(일본 시간)에 우에하라 고지가 사용했던 '''19'''번으로 변경했다. 도치기현 및 도치기현 고교 출신 선수로는 사상 첫 메이저 리거가 됐다.
개막전인 4월 2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전에서 9회에 팀의 5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1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메이저 리그 데뷔를 마쳤다.[203] 4월 11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전에서는 7회말 2사 주자 없는 상황에 팀의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과 1/3이닝 동안 1볼넷 무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메이저 리그 첫 홀드를 기록했다.[204] 시즌 중 코로나19 확진 등으로 두 차례 부상자 명단에 올랐으나, 최종적으로 55경기에 등판해 5승 10홀드, 평균 자책점 3.06을 기록하며[205]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기여했다.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3경기에 등판했다. 이후 재키 브래들리 주니어가 등번호 19번을 원했기 때문에 2022년부터는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착용했던 등번호 '''18'''번으로 변경했다.[206]
2022년 8월 17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전에서 MLB 통산 100경기 등판과 100탈삼진을 기록했다.[207] 8월 29일에 DFA가 되면서[208] 31일에 마이너 계약으로 산하 트리플 A팀에 배속됐고, 9월 12일에 자유 계약이 됐다. 그 해 49경기에 등판하여 1승 3홀드, 평균 자책점 3.73의 성적을 남겼다.[209]
; 첫 기록
첫 등판: 2021년 4월 2일, 볼티모어 오리올스 1차전 (펜웨이 파크), 9회초 5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이닝 1피안타 무실점[203]
첫 탈삼진: 상동, 9회초 오스틴 헤이즈로부터 헛스윙 삼진[203]
첫 홀드: 2021년 4월 11일, 볼티모어 오리올스 6차전 (오리올 파크 앳 캠든 야즈), 7회말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⅓이닝 무실점[204]
첫 승리: 2021년 4월 23일, 시애틀 매리너스 2차전 (펜웨이 파크), 4회초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⅓이닝 무실점[140]
3. 4.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 (제2기)
2023년 1월 28일, 일본 프로 야구(NPB)의 지바 롯데 마린스와 계약했다.[27][28] 8월 10일, 가역성 뇌혈관 수축 증후군 진단을 받아 짧은 기간 동안 입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로 인해 8월 한 달 동안 격렬한 운동을 할 수 없었다.[29]
오버핸드 투구폼에서 나오는 평균 145km의 속구, 종횡으로 휘는 슬라이더, 커브, 포크볼을 섞어 던지며,[220] 퀵모션도 1.0초대로 빠르다.[221] 2020년에는 구원 투수로 개인 최고 속도인 159km를 기록했다.[222] 스플릿은 최고 속도 152km에[223] 슬라이더 회전을 동반하여 세로로 떨어지는 슬라이더와 혼동되기도 했다.[224]2012년 일본 시리즈부터는 투심을 추가했다.[225] 구원 투수로 전향한 후에는 주로 직구와 포크볼을 조합하며, 드물게 슬라이더나 컷 패스트볼을 던진다.
2013년에 구원 투수로 기용됐을 때 평균 구속 148km를 기록했고,[226] 선발 투수로서도 센트럴 리그에서 손꼽히는 구속을 자랑했지만, 본인은 속도에 얽매이지 않고 높은 직구와 낮은 변화구를 중요시하며, 투구에 ‘젊음’을 드러내고자 했다.[227] 또한 오른쪽 타자의 몸쪽을 파고드는 직구에 자신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직구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보다는 타자의 노림수나 타이밍을 흐리는 투구를 익히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228]
탈삼진율은 2015년까지 통산 7.88로 특별히 높지 않지만, ‘삼진 개수’나 ‘삼진을 잡을 수 있는 직구’보다는 타자를 잡아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229]
한편, 요미우리 시절부터 제구력 난조를 겪으며 컨디션에 따라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였다. 볼넷으로 주자를 모은 뒤 밀어내기 볼넷으로 실점하거나 결정적인 홈런을 맞는 등 자멸하는 경우도 있어, 승부처에서의 약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사와무라의 투구폼(2012년)
사와무라는 최고 의 패스트볼을 던지며,[32] 스플리터, 슬라이더를 던진다.[33] 대학 시절에는 커브볼도 구사했다.[2]
6. 에피소드
2012년 요미우리가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을 때 출연한 TV 프로그램 《나카이 마사히로의 블랙 버라이어티》(닛폰 TV)에서 ‘일본 시리즈에 우승하면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에 아베 신노스케, 우쓰미 데쓰야가 ‘가족 서비스’라고 대답하는 와중에 자신은 ‘트레이닝’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연습을 좋아하는 선수로도 알려져 있다.[230] 특히 대학 시절부터 계속해온 웨이트 트레이닝을 열심히 해서 2011년 시점에서는 스쿼트를 240kg의 중량을 10회나 들어 올렸다.[231] 그러나 2014년 자주 트레이닝 단계에서는 “3년은 했지만 뚜렷한 결과를 남길 수 없었다. 올해 진가를 발휘해야 하는 시즌이라고 하는데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다”라는 이유로 고중량의 바벨을 사용하는 연습은 하지 않고 몸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기술을 추구하기로 모색하기 시작했다.[232]
동경하는 선수는 사이토 가즈미이며,[233] 좌우명은 ‘저돌맹진’(猪突猛進)이다. 취미는 가전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몇 시간도 말할 수 있다’라고 호언장담할 정도이다.[234]
야구용품은 입단 초기에 미즈노, 2012년부터 언더아머와 계약을 맺어 이 회사의 글러브와 스파이크, 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235] 2016년부터 아식스, 2020년부터 다시 미즈노를 사용하고 있다.
중학교 때부터 대학 시절까지의 감독들은 모두 ‘열심히 연구하는 선수’라고 평가했고, 본인도 어렸을 때부터 투구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말한다. 고교 시절에 비해 대학에서는 주위의 영향을 받아 연습에 임하는 의식이 변하면서 1부 리그로 올라갔던 것이 전환점이 됐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보게 되므로 자신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주오 대학 야구부 감독인 다카하시 요시마사는 ‘자신을 위해 야구를 한다’라는 의식을 주입시켰다. 이것은 자신이 좋은 플레이를 하면 팀의 승리로 연결돼 양쪽에 있어서 플러스가 된다는 것으로, 자기 팀이 치지 못한다면 내가 막으면 된다라는 생각과 연결된다. 사와무라는 다카하시와의 만남 자체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대학 시절에 구속이 올라간 이유로 하반신을 단련한 것을 들었고, 누군가에게 듣고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면서 연습하는 것이 타인과의 차이를 만들었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바 롯데 이적 후 첫 등판 때 유니폼이 없었기 때문에 후쿠시마 아키히로에게서 빌려 착용한 등번호 ‘106’이 포켓몬스터에 등장하는 격투 타입의 포켓몬 ‘시라소몬’의 도감번호(도감 No.106)와 똑같다고 팬들의 주목을 받아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되어[236] 지바현에 있는 포켓몬센터에서는 시라소몬 인형이 매진됐다.[237] 그 후 뉴스를 알게 된 사와무라 본인이 시라소몬 인형과의 투샷을 찍은 사진이 지바 롯데 구단의 공식 트위터에 올려졌다.[238]
NBC 스포츠에서 알리샤 키스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에두아르도 로드리게스가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게시하여 주목을 받았다.[34]
7. 수상 및 타이틀 경력
사와무라 히로카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 투수로 5번의 센트럴 리그 우승[36]과 1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NPB 통산 2개의 타이틀(최다 세이브 투수 1회)과 주요 표창(신인왕 1회)을 수상했다.[3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