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스테파노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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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스테파노 조약은 1878년 3월 3일,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은 불가리아의 자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에 영토를 할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조약에 간섭했고, 결국 베를린 회의를 통해 산스테파노 조약은 베를린 조약으로 수정되었다. 1990년대 이후 불가리아에서는 산스테파노 조약과 러시아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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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테파노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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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정보 | |
이름 | 산스테파노 조약 |
원어 이름 (러시아어) | Сан-Стефанский мир (San-Stefan'skiy mir) |
원어 이름 (러시아어, 전체) | Сан-Стефан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 (San-Stefan'skiy mirnyy dogovor) |
원어 이름 (튀르키예어) | Ayastefanos Muahedesi 또는 Ayastefanos Antlaşması |
종류 | 양자 조약 |
서명일 | 1878년 3월 3일 |
서명 장소 | 산스테파노, 오스만 제국 |
원 서명자 | 오스만 제국 러시아 |
배경 | |
주요 내용 | 러시아-튀르크 전쟁 종결 |
관련 조약 | 베를린 조약 (1878년) |
결과 | |
조약의 결과 | 이 조약으로 인해 불가리아의 영토가 확장됨. 이후 베를린 조약 (1878년)으로 수정됨.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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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877년부터 1878년까지 이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에 승리하면서 체결된 강화 조약이다.[1][2] 전쟁은 불가리아에서의 봉기 유혈 진압과 보스니아에서의 세르비아인 탄압 등에 반발하여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러시아가 슬라브 민족 보호를 명분으로 개입하면서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서방 열강의 견제로 콘스탄티노플 점령에는 실패했다.
전쟁의 결과로 1878년 3월 3일 콘스탄티노플 서쪽 근교의 산스테파노(예실쾨이)에서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같은 해 3월 16일 비준서 교환을 통해 공식 발효되었다.[3] 조약 서명에는 러시아 측에서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 백작과 알렉산드르 넬리도프가, 오스만 제국 측에서는 외무장관 사브페트 파샤가 참여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오스만 제국의 상당한 영토 할양(아르메니아, 도브루자, 베사라비아, 아나톨리아 동부 등),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완전한 독립 승인, 마케도니아를 포함한 광범위한 자치권을 가지는 불가리아 공국 창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자치권 부여 등이었다.[4][5]
그러나 이 조약은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강화시킨다는 이유로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다른 유럽 열강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특히 불가리아 영토가 에게 해까지 확장되어 러시아 해군의 지중해 진출 교두보가 마련될 것을 우려했다. 결국 열강들의 압력으로 1878년 6월 베를린 회의가 개최되었고, 산스테파노 조약의 내용은 대폭 수정되어 새로운 베를린 조약으로 대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불가리아의 영토는 크게 축소되었고, 러시아가 확보했던 일부 영토도 반환되었다. 이는 이후 불가리아 민족주의 운동인 대불가리아주의가 발흥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6][7]
2. 1. 배경
1876년 불가리아에서 오스만 제국 군대가 반란을 유혈 진압하고,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폭력이 자행되자 이에 반발하여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 민족들을 지지했지만,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립 확보가 필요했다. 결국 러시아는 부다페스트 협약을 통해 발칸 반도에 단일 슬라브 국가를 세우지 않고, 보스니아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권으로 인정하기로 약속하며 중립을 확보했다.이후 발발한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으나, 서방 열강의 개입으로 콘스탄티노플 점령에는 실패했다.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급격히 커지는 것을 우려한 대영제국과 프랑스는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지중해 함대를 파견하며 군사적 압력을 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러시아는 서방 열강과의 충돌을 피하면서도 전쟁의 성과를 확보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의 조속한 강화 조약 체결을 추진하게 되었고,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것이 산스테파노 조약 체결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2. 2.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조약 체결
1876년 불가리아에서 오스만 제국이 일으킨 유혈 진압과 보스니아에서의 세르비아인 탄압을 계기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러시아는 슬라브 민족을 지원하고자 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립을 확보해야 했다. 부다페스트 협약을 통해 러시아는 발칸 반도에 단일 슬라브 국가를 세우지 않고 보스니아를 오스트리아의 영향권으로 인정하기로 약속했다.이후 발발한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으나, 콘스탄티노플만은 서방 열강의 개입으로 점령하지 못했다. 러시아 세력이 크게 확장되자 대영제국과 프랑스는 자국의 이익 침해를 우려하여 지중해 함대를 해협으로 파견하며 견제에 나섰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러시아는 전쟁의 성과를 확정짓기 위해 서둘러 오스만 제국과의 조약 체결을 추진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요구 조건을 대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1878년 3월 3일, 콘스탄티노플 서쪽 근교의 산스테파노(예실쾨이)에서 조약이 체결되었다. 러시아 측에서는 콘스탄티노플 주재 대사였던 백작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와 발칸 주둔 러시아 육군 총사령관 외교서기 책임자였던 알렉산드르 넬리도프가 서명했고, 오스만 제국 측에서는 외교부 장관 사브페트 파샤가 서명했다. 1878년 3월 16일 비준서 교환을 통해 조약은 공식적으로 효력을 발생했다.
2. 3. 베를린 회의와 조약의 수정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자 다른 열강들, 특히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를 경계했다. 영국 수상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러시아의 이러한 세력 확장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특히 불가리아의 영토가 에게 해까지 확장되어 러시아 해군이 지중해로 진출할 거점을 마련하는 것을 우려했다. 세르비아 역시 대불가리아의 건국이 자국의 이익을 해칠 것을 우려했다.
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에 기여했던 루마니아는 조약 내용에 매우 실망했다. 루마니아인들은 조약의 일부 조항이 전쟁 전에 러시아가 루마니아 영토의 보전을 보장했던 약속을 위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또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실패하여 조약에 불만을 가졌다.
한편, 오스만 제국 통치 하에 있던 알바니아인들은 세르비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에 영토를 빼앗기는 것에 크게 반발했다. 이들은 러시아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외국의 지원을 얻고 민족적으로 조직화될 필요성을 느껴 프리즈렌 동맹을 결성했다.[11]
1878년 4월 1일, 영국의 외무 장관 로버트 가스코인 세실은 이른바 "솔즈베리 서한"을 통해 산스테파노 조약이 러시아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다며 영국 정부의 공식적인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결국 이러한 열강들의 압력으로 1878년 6월 베를린 회의가 소집되었고, 산스테파노 조약은 새로운 베를린 조약으로 대체되었다. 베를린 조약에서는 산스테파노 조약의 내용이 대폭 수정되었다. 특히 불가리아의 영토가 크게 축소되어 마케도니아 지역은 다시 오스만 제국으로 반환되었고, 에게 해로의 출구도 막혔다. 러시아는 할양받기로 했던 영토 중 바야지트 지방 등을 포기해야 했다.
이러한 조약 수정은 이후 불가리아에서 대불가리아주의가 강하게 나타나는 배경이 되었다.
영국의 역사가 A. J. P. 테일러는 1954년에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만약 산스테파노 조약이 유지되었다면,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모두 오늘날까지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디즈레일리를 제외한 영국인들은 덜 기대했고, 따라서 실망도 덜했다. 솔즈베리는 1878년 말에 '우리는 발칸 남부에 비틀거리는 종류의 터키 지배를 다시 세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휴식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생명력이 남아있지 않다.'"[12]
3. 결과
산스테파노 조약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의 완전한 독립을 오스만 제국이 인정하고 이들 국가의 영토를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자치주를 구성하게 되었으며, 모이시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의 상당 부분을 포함하는 광대한 영토의 불가리아 공국이 새롭게 탄생했다. 이 불가리아 자치 공국은 명목상 오스만 제국에 조세를 바치지만, 사실상 독립적인 운영이 예정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총 14.1억러시아 루블)을 부과받았으며, 그중 상당액(11억러시아 루블)은 영토 할양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코카서스의 아르다한, 카르스, 바투미, 도우베야지트 등과 유럽의 도브루자 등을 러시아에 할양했다. 러시아는 이 중 북도브루자 등을 루마니아에 넘기는 대신, 1856년 파리 조약으로 상실했던 남베사라비아를 루마니아로부터 돌려받았다. 이외에도 오스만 제국은 크레타, 테살리아, 알바니아 등에서 제한적인 자치 또는 개혁을 시행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발칸 반도와 지중해 동부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한 다른 유럽 열강들의 즉각적인 반발에 부딪혔다. 특히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가 새로 탄생한 불가리아를 통해 지중해로 가는 통로를 확보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이러한 열강들의 압력과 이해관계 충돌은 새로운 전쟁의 위기감을 고조시켰고, 결국 1878년 베를린 회의가 소집되는 배경이 되었다. 베를린 회의에서는 산스테파노 조약의 내용이 대폭 수정되어 러시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변경되었다. 예를 들어, 불가리아의 영토는 크게 축소되었고 마케도니아는 다시 오스만 제국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러시아는 확보했던 영토 중 일부(도우베야지트 등)를 포기해야 했다.
불가리아에서는 산스테파노 조약 체결일(3월 3일)을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고 국가가 부흥한 날로 기념하여 국가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3. 1. 발칸 반도의 변화
산스테파노 조약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의 완전한 독립을 오스만 제국이 인정하도록 했으며, 이들 국가의 영토는 확장되었다. 몬테네그로는 니크시치, 포드고리차, 바르 등을 얻어 영토가 두 배 이상 늘어났고(제1조, 제2조), 세르비아는 모라바 세르비아의 니시와 레스코바츠를 획득했다(제3조). 루마니아는 북 도브루자를 얻는 대가로 남 베사라비아를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다(제5조).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자치주를 구성하게 되었으며(제14조),[9] 크레타 섬, 에페이로스, 테살리아 역시 제한적인 지방 자치권을 부여받았다(제15조).[9]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에서 개혁을 실행하고 아르메니아인을 보호할 의무를 재확인했으며(제16조),[9]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은 전시와 평시 모든 중립 선박에 개방되었다(제24조).


가장 큰 변화는 불가리아 공국의 탄생이었다. 이 조약은 모이시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의 상당 부분을 포함하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자치 공국 창설을 규정했다(제6조). 새 공국의 영토는 다뉴브강에서 에게해, 흑해에서 오흐리드호까지 이르러 지중해로 직접 접근할 수 있었다. 이는 러시아가 불가리아 항구를 해군 기지로 활용할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에, 다른 열강, 특히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심각한 우려를 낳았다.
불가리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에 명목상(de jure) 조세를 바치는 속국 지위를 유지했지만, 기독교 정부와 군대를 보유할 권리를 인정받아 사실상(de facto) 독립 국가처럼 운영될 예정이었다.[6] 국민이 선출하고 오스만 제국과 열강이 승인하는 군주가 통치하며(제7조), 불가리아 귀족 회의가 터르노보 헌법을 제정하기로 했다(제7조). 오스만 군대는 철수하고, 러시아 군대가 2년간 주둔하기로 했다(제8조). 이 조약은 분열되어 있던 불가리아 민족주의 운동을 하나로 통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7]
또한, 조약은 1864년 체르케스인 학살 이후 발칸 지역에 정착한 체르케스인의 추방을 명시했다. 이는 전쟁 중 이들이 기독교인에 대한 잔학 행위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도브루자 지역의 체르케스인 소수 민족은 사라지게 되었다.[10]
그러나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한 영국(벤자민 디즈레일리 수상)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조약 내용에 강력히 반발했다. 세르비아 역시 대불가리아의 출현이 자국의 팽창 계획에 장애가 될 것을 우려했다. 결국 열강의 압력으로 1878년 베를린 회의가 열렸고, 산스테파노 조약의 내용은 대폭 수정되어 베를린 조약으로 대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불가리아의 영토는 크게 축소되었으며, 특히 마케도니아는 다시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로 돌아갔다.
전쟁에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남 베사라비아를 러시아에 할양하게 된 루마니아는 조약 결과에 큰 불만을 표시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또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영향력 확보에 실패하여 실망감을 나타냈다. 한편, 조약으로 인해 영토를 상실하게 된 알바니아인들은 민족적 위기감을 느끼고 프리즈렌 동맹을 결성하여 조직적인 저항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11]
3. 2.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관계
산스테파노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총 배상금은 14.1억러시아 루블에 달했으나, 이 중 상당 부분인 11억러시아 루블은 영토 할양으로 대신하기로 했다.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에 할양한 주요 영토는 다음과 같다.
러시아는 이렇게 얻은 영토 중 북도브루자와 다뉴브 강 삼각주 섬(뱀 섬 제외)을 루마니아에 넘겨주었다. 그 대가로 러시아는 1856년 파리 조약으로 상실했던 베사라비아 남부 지역을 루마니아로부터 돌려받았다(제19조).
또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압력 하에 아르메니아에서의 개혁 실시와 아르메니아인 보호를 약속했으며(제16조[9]),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은 평시와 전시 모두 모든 중립국 선박에 개방하도록 합의했다(제24조). 이는 러시아 흑해 함대의 지중해 진출 가능성을 열어두는 조항이었다. 조약은 러시아에 정복된 지역 주민들이 재산을 처분하고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할 수 있는 권리도 명시했다(제21조).
그러나 이 조약은 러시아의 지나친 세력 확장을 경계한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특히 러시아가 새로 형성될 불가리아 공국을 통해 지중해로 나아가는 길을 확보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열강들의 개입으로 베를린 회의가 소집되었고, 산스테파노 조약의 내용은 러시아에게 불리하게 대폭 수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확보했던 영토 중 비야지드 지방 등을 다시 오스만 제국에 반환해야만 했다.
3. 3. 기타 지역
오스만 제국은 크레타 섬, 에페이로스, 테살리아에 제한적인 형태의 지방 자치를 부여해야 했으며(제15조[9]), 알바니아에서도 유사한 통치 방식을 적용해야 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인을 학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아르메니아에서 개혁을 시행하겠다는 이전의 약속을 보증해야 했다(제16조[9]).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은 전시와 평시를 막론하고 모든 중립 선박에 개방되었다(제24조[9]).
한편, 1864년 체르케스인 학살 이후 발칸 지역에 정착했던 체르케스인들은 전쟁 중 기독교인에 대한 잔학 행위를 이유로 추방될 예정이었으며, 이 조치로 인해 도브루자 지역의 체르케스인 소수 민족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10]
3. 4. 열강들의 반응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은 산스테파노 조약의 조건들에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가 새로 만들어질 불가리아를 통해 지중해로 진출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영국의 벤자민 디즈레일리 수상 정부는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12] 키프로스를 얻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의 보호를 약속하기도 했다.세르비아 역시 대불가리아의 등장이 기존 오스만 제국 영토와 남은 영토에 대한 자국의 이익을 해칠 것을 우려했다.
전쟁에서 러시아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던 루마니아는 조약 내용에 크게 실망했다. 루마니아인들은 러시아가 전쟁 전에 루마니아 영토의 보전을 보장했던 약속(러시아-루마니아 조약)을 일부 조항이 위반했다고 생각했다. 특히 남 베사라비아를 러시아에 할양하고 북 도브루자를 받는 강제 교환 조항에 불만이 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또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지 못하게 된 것에 실망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알바니아인들은 자신들의 영토가 세르비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에 넘어가는 것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러시아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외국의 지원을 받아 민족적으로 조직화될 필요성을 느꼈고, 이는 프리즈렌 동맹 결성으로 이어졌다.[11]
이러한 열강들의 불만과 이해관계 충돌은 새로운 전쟁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결국, 러시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에게 불리하게 산스테파노 조약의 내용을 거의 완전히 재검토하는 베를린 회의가 소집되면서 긴장은 완화되었다. 이 회의 결과 베를린 조약이 체결되었다.
1878년 4월 1일, 영국의 외무 장관 로버트 가스코인 세실은 "솔즈베리 서한"을 통해 산스테파노 조약과 러시아에 유리한 내용에 대한 영국 정부의 반대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영국의 역사가 A. J. P. 테일러는 1954년에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만약 산스테파노 조약이 유지되었다면,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모두 오늘날까지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비컨스필드(디즈레일리)를 제외한 영국인들은 덜 기대했고, 따라서 실망도 덜했다. 솔즈베리는 1878년 말에 '우리는 발칸 남부에 비틀거리는 종류의 터키 지배를 다시 세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휴식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생명력이 남아있지 않다.'"[12]
4. 1990년대 이후 불가리아의 비판적 재평가
1990년대 이후, 불가리아의 많은 역사학자, 저술가, 언론인들은 산스테파노 조약과 19세기 동방 문제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정책 전반에 대해 비판적인 재평가를 시도했다. 이들은 산스테파노 조약이 불가리아 내 러시아의 이익을 확보하고 불가리아 사회에 지속적인 반서방 정서를 조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당시 오스만 제국 주재 러시아 대사였던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가 조작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13][14][15][16][17][18][19]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이후 여러 하위 연구 주제로 이어지며 구체화되었다.
4. 1. 러시아 제국의 목표
1990년대 이후, 불가리아의 많은 역사학자, 저술가, 언론인들은 산스테파노 조약과 19세기 동방 문제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전체 정책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다.[13][14][15][16][17][18][19] 이들은 이 조약이 불가리아 내 러시아의 이익을 확보하고 불가리아 사회에 반서방 정서를 조장하기 위해 당시 오스만 제국 주재 러시아 대사였던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가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13][14][15][16][17][18][19]1876년 라이히슈타트 협정, 1877년 부다페스트 협약, 당시의 서신들, 특히 이그나티예프 백작의 일기 등을 근거로, 연구자들은 러시아 제국의 유일한 야망이 예카테리나 2세의 그리스 계획을 이어받아 튀르키예 해협을 정복하는 것이었다고 결론 내린다.[20][21][13] 이 관점에 따르면, ''"불가리아 문제"''와 불가리아인의 해방은 단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한 정치적 책략이자 발판으로 이용되었을 뿐이다.[20][21][13] 이그나티예프의 일기에는 만약 러시아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불가리아인들은 러시아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거나, 세르비아를 통한 간접적인 통치를 받거나, 혹은 괴뢰 국가로서 결국 러시아의 지배하에 놓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러나 있다.
4. 2.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 백작의 역할
1990년대 이후 불가리아의 많은 역사학자, 저술가, 언론인들은 산스테파노 조약과 19세기 동방 문제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정책 전반에 대해 비판적인 재평가를 내놓았다. 이들은 조약이 오스만 제국 주재 러시아 대사였던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 백작이 불가리아 내 러시아의 이익을 확보하고 반서방 정서를 조장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13][14][15][16][17][18][19]전통적인 불가리아 및 국제 역사 서술에서는 이그나티예프를 불가리아의 해방을 지지한 인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일기 분석 결과, 그는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 제국주의 확장을 위해 활동한 마키아벨리적 정치인이었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이그나티예프는 불가리아 민족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독립적인 불가리아 교회 설립 투쟁을 1860년대와 1870년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방해한 것으로 지적된다. 또한, 그는 오스만 당국이 불가리아 내부 혁명 기구(IRO)를 러시아의 의도에 맞게 바꾸려 하기 전에, 이 조직의 창립자인 바실 레프스키를 서둘러 교수형에 처하도록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는다. 레프스키와 IRO는 외세 개입 없이 불가리아인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에 방해가 될 수 있었다.[22][18][13][16][23]
역사가 Инжeв|인제프bg는 이그나티예프가 IRO의 지도자를 제거하고, 오스만 당국과의 협력을 통해 자치권을 얻으려 했던 19세기 불가리아 부르주아지(예: 스토얀 초마코프)의 노력을 좌절시킴으로써, 불가리아의 자율적인 "혁명적" 발전과 "진화적" 발전 경로를 모두 차단했다고 분석한다. 결과적으로 불가리아에게 남은 선택지는 러시아의 직접적인 통제 하에 놓이는 "러시아에 의한 해방" 시나리오뿐이었다는 것이다.
4. 3. 4월 봉기와 그 결과
1855년에서 1865년 사이, 오스만 제국 당국은 약 30만 명에 달하는 크림 타타르인, 체르케스인 및 기타 무슬림 무하지르(이주민)를 다뉴브 빌라예트 지역에 정착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24][25] 크림 타타르인의 정착은 비교적 큰 문제 없이 이루어졌지만, 체르케스인의 경우는 달랐다. 경작할 땅이 부족했고, 너무 많은 체르케스인이 한꺼번에 이주했으며, 오스만 당국이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체르케스인 정착 과정은 큰 혼란을 겪었다. 결국 가난에 시달리던 일부 체르케스인들은 바시-바주크와 같은 비정규 군사 조직에 들어가거나 도적질 등 범죄에 연루되기도 했다.[26][27][28]이처럼 오스만 제국이 사회 질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서 쌓인 불만은 결국 1876년 4월 봉기로 폭발했다. 오스만 군대가 이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하자, 그 소식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큰 분노와 비난 여론을 일으켰다.[15][29][30]
유럽의 주요 열강들은 사태 해결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1876년 12월 말 콘스탄티노플에서 회의를 열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미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그보다 6개월여 전인 1876년 7월 8일, 라이히슈타트 협정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를 양국이 나누어 가질 계획을 비밀리에 세워둔 상태였다. 이 비밀 협정은 1877년 1월 15일 부다페스트 협약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고 더 구체화되었다.
4. 4. 라이히슈타트 협정과 부다페스트 협약
1876년 불가리아에서 오스만 제국 군대가 일으킨 반란 진압 과정에서의 학살과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호소 이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러시아 제국은 같은 슬라브 민족인 이들을 지원하고자 했으나,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립을 확보해야 했다.이를 위해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두 차례의 비밀 협약을 맺었다. 첫째는 1876년 7월 8일의 라이히슈타트 협정이며, 둘째는 1877년 1월 15일의 부다페스트 협약이다. 이 두 조약은 완전히 비밀에 부쳐졌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중립을 지키는 대가로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는 상황을 예상하고 맺어졌다.
협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러시아 제국은 발칸반도에 거대한 단일 슬라브 국가를 세우지 않기로 약속했다. 대신 발칸 산맥을 경계로 북쪽과 남쪽에 각각 독립된 공국이나 자치권을 가진 오스만 제국의 빌라예트를 두 개 만드는 데 동의했다. (협약 문서의 언어 버전에 따라 '독립 공국' 또는 '자치 빌라예트'로 다르게 표현됨)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자국의 영향권 아래 두고 병합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다.
- 루마니아는 남부 베사라비아 지역을 러시아 제국에 할양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 그리스 또한 영토를 얻게 될 것으로 전망되었다.
이후 발발한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는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러나 러시아 세력이 급격히 커지는 것을 우려한 대영제국과 프랑스가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지중해 함대를 해협으로 보내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러시아는 서둘러 오스만 제국과 산스테파노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의 성과를 확정 지으려 했다.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연구자들은 라이히슈타트 협정과 부다페스트 협약의 내용이 이후 1878년에 체결된 베를린 조약의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반면, 이 두 비밀 협약 및 베를린 조약의 내용은 러시아가 전쟁 직후 오스만 제국과 맺은 산스테파노 조약의 영토 관련 조항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를 근거로 일부 연구자들은 러시아 제국이 처음부터 비밀 협약의 내용을 충실히 이행할 의도가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4. 5. 콘스탄티노플 회의 방해 공작

일부 불가리아 역사학자들, 특히 인제프, 도이체프, 고체프, 그리고 요르다노프 등은 러시아 제국이 의도적으로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방해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부다페스트 협약 조인일(1877년 1월 15일)과 오스만 제국 대재상 미드하트 파샤가 회의에서 제안된 두 개의 자치 불가리아 빌라예트 창설안을 거부한 날짜(1877년 1월 18일)를 비교하고,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 백작의 일기 기록 등을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펼친다. 이그나티예프의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13][17][15][16][23][20]
"''오스만 술탄은 러시아 대사를 전적으로 신뢰한다''" (72–73쪽),
"''불가리아인들은... 러시아 정책의 '''순종적인 도구'''가 되어야 하고, 적대 진영으로 넘어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없앰으로써 우리의 영원한 동맹이 되어야 한다''" (51–53쪽)고 주장하며,
"''오스트리아와 터키 슬라브족은 우리의 동맹이자 독일을 향한 우리의 정책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51–53쪽)고 경고하며,
"''만약 터키에 반란을 일으킨 국가들이 서방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된다면 '''우리'''의 영향력이 아닌, 발칸 반도의 상황은 현재보다 훨씬 더 견디기 어려워질 것이다''" (58쪽) 등.
이들은 콘스탄티노플 회의 방해로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열강이 러시아 제국이라고 분석하며, 러시아가 회의 실패의 배후라고 결론짓는다.[13][17][15][16][23][20]
전통적인 불가리아 역사학에서는 회의 실패의 책임을 주로 영국에 돌려왔다. 이는 회의에서 제안된 빌라예트 자치안이 자치 지역을 둘로 나누고 국제적 감독(영국 포함)을 강화하여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한하려는 영국의 의도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러시아의 선전과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러시아가 불가리아인을 자국의 장기적인 목표에 종속시키고 발칸 반도에서 서방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했기 때문에 회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불가리아 영토를 축소시키면서도 불가리아 문제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라이헨슈타트 협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1876년 7월부터 전쟁을 계획했던 러시아의 의도는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불가리아 위기 해결책이 아닌 장애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제시된다.[13][17][16]
인제프와 고체프는 이그나티예프가 오스만 제국에게 전쟁으로 잃게 될 영토가 회의에서 제안된 두 자치 빌라예트(대체로 불가리아 정교회 엑자르키의 경계와 일치)보다 훨씬 작을 것이라고 설득하여 협력을 얻어냈다고 추측한다.[15][13] 실제로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 수립된 불가리아 공국의 영토는 제안되었던 자치 빌라예트 영토의 40% 미만에 불과했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 저자들은 러시아 행정부가 전쟁 전에는 불가리아인을 '슬라브족'이나 '정교회 신자'로 지칭하다가, 베를린 조약으로 불가리아 공국의 조직과 러시아 점령군의 철수 기한이 명확해질 때까지는 '러시아-다뉴브 지방', '발칸 지방', '점령 기금', '점령'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러시아의 숨은 의도를 보여주는 정황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3][15][17][16][23][31][14][32] 인제프, 도이체프, 요르다노프 등은 만약 베를린 조약에서 러시아 군대의 철수가 명시되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코 철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3][17][16]
4. 6. 산 스테파노 신화
1990년대 이후, 불가리아의 많은 역사학자, 저술가, 언론인들은 산스테파노 조약과 19세기 동방 문제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전체 정책을 비판적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산스테파노 조약이 불가리아 내 러시아의 이익을 확보하고 불가리아 사회에 지속적인 반서방 정서를 조장하기 위해, 당시 오스만 제국 주재 러시아 대사였던 니콜라이 이그나티예프가 조작한 일종의 "신화"였다고 주장한다.[13][14][15][16][17][18][19]여러 저자들은 이렇게 세심하게 만들어진 '산스테파노 신화'가 불가리아인들을 러시아의 선전 활동에 취약하게 만들고, 불가리아 역사의 중요한 시점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함으로써 국가에 지속적인 해를 끼쳤다고 결론 내린다.
특히 알렉산다르 타초프, 얀코 고체프, 플라멘 츠베트코프, 알렉산더 요르다노프 등은 발칸 전쟁 시기를 예로 들며, 당시 여러 친러 성향 내각들이 가졌던 "러시아는 산스테파노 때처럼 불가리아를 도울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이러한 믿음이 결국 불가리아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불가리아 통일을 방해했으며, 심지어 오스만 술탄에게 동루멜리아를 다시 점령하도록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한다. 또한, 불과 30년 전에 불가리아 공작에 대한 쿠데타를 조직했던 러시아라는 외국 강대국에 불가리아가 의존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16][14][18][31]
불가리아 언론인 이보 인제프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하여 현대 불가리아가 여전히 러시아 선전에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산스테파노 신화"가 오늘날까지도 불가리아 사회에서 친러시아, 반서방 정서를 조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13] 플라멘 츠베트코프는 불가리아 사회가 이러한 "산스테파노 열등감"과 "자멸적인 러시아 숭배"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국가의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다고 단언했다.[32]
흥미롭게도, 라이히슈타트 협정이나 부다페스트 협정, 또는 이그나티예프 백작의 일기 내용을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의 정치가이자 오랜 기간 총리를 지낸 스테판 스탐볼로프는 이미 1880년대 초부터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877-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을 러시아가 불가리아를 자국의 보호령으로 만들려는 시도로 간주했으며, 러시아와의 관계보다는 루마니아와의 연합이나 심지어 불가리아-튀르크 이중 국가 형태를 선호했다.[33]
5. 대중문화
산스테파노 조약 체결의 배경은 보리스 아쿠닌의 역사 소설 ''터키 갬빗''에 묘사되어 있다. 아쿠닌은 이 소설에서 전반적으로 알려진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반복 등장하는 주인공인 가상의 인물 에라스트 판도린에게 일부 사건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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