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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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속 전쟁은 1667년 프랑스 루이 14세가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시작된 전쟁이다. 루이 14세는 스페인 펠리페 4세의 딸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했으나, 지참금 미지급을 이유로 마리아 테레사에게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대한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침공했고, 이에 네덜란드는 영국, 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했다. 1668년 아헨 조약으로 프랑스는 일부 영토를 얻고, 프랑슈콩테를 스페인에 반환했다. 이 전쟁은 루이 14세의 팽창주의 정책의 시작을 알렸으며, 이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와 유럽의 세력 균형에 영향을 미쳤으며,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단절과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 왕위 계승의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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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다 조약(1667년)은 제2차 영-네덜란드 전쟁을 종결시키고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간의 상업적 긴장과 식민지 경쟁을 해소하기 위해 체결되었으며, 뉴네덜란드와 수리남 교환 등의 내용을 포함한다.
상속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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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개요 | |
분쟁 명칭 | 네덜란드 계승 전쟁 |
부분 전쟁 | 루이 14세의 전쟁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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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667년 5월 24일 – 1668년 5월 2일 |
장소 | 스페인령 네덜란드 프랑슈콩테 북부 카탈루냐 |
영토 변경 | 아르망티에르, 베르그, 샤를루아, 코르트레이크, 두에, 뵈르네, 릴, 아우데나르데, 투르네가 프랑스로 넘어감 |
결과 | 엑스라샤펠 조약 (1668년)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왕국 |
교전국 2 | 스페인 제국 |
지휘관 | |
프랑스 측 지휘관 | 루이 14세 튀렌 오몽 공작 드 크레키 콩데 공 룩셈부르 |
스페인 측 지휘관 | 카스텔루 로드리고 드 마르신 필리프 스피놀라 (뒤 브루아이) 드 이엔 생 마르탱 |
병력 규모 | |
프랑스 | 약 50,000명 |
스페인 | 30,000명 |
사상자 규모 | |
프랑스 | 2,000-4,500명 |
스페인 | 2,000–3,000명 |
2. 배경
1659년 피레네 조약으로 프랑스-스페인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양국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이 조약의 일환으로 프랑스 왕국의 루이 14세는 스페인 제국 펠리페 4세의 장녀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제국은 이탈리아, 스페인령 네덜란드, 필리핀과 아메리카 대륙의 영토를 포함하여 여전히 광대한 제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이전처럼 지배적인 강대국은 아니었지만, 스페인 제국은 대체로 온전한 상태를 유지했다. 프랑스에 의한 제국 인수를 막기 위해 마리아 테레사는 상속권을 포기했고, 그 대가로 루이 14세에게 50만 금 에쿠의 지참금이 약속되었으나, 결국 지불되지 않았다.
1661년 마자랭 추기경이 사망하자 루이 14세는 직접 국가를 통치하며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재무 장관 장-밥티스트 콜베르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가 프랑스 경제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합스부르크 스페인, 레오폴트 1세 황제, 그리고 프랑스의 오랜 동맹국인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충돌을 의미했다. 1648년 뮌스터 조약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확인하고 암스테르담에게 셸데 강 하구를 영구적으로 폐쇄하여 북서유럽 무역을 통제하도록 했다. 이 독점권을 유지하는 것이 네덜란드의 우선순위였다.
1663년 루이 14세는 네덜란드 연방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요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으나, 의혹을 피하기 위해 협상은 계속 진행했다. 1662년 프랑스-네덜란드 조약과 1665년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참전은 군사력 증강의 명분을 제공했다. 1665년 펠리페 4세가 사망하고 카를로스 2세가 즉위하면서, 그의 미망인 마리아나가 섭정을 맡았다.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하면 레오폴트 1세가 스페인 제국을 상속받게 될 상황이었다.
프랑스 변호사들은 지참금 미지급을 근거로 마리아 테레사의 상속권 포기가 무효이며, 권리 양도법에 따라 루이 14세에게 권리가 "양도"되었다고 주장했다. 루이 14세는 이를 근거로 스페인령 네덜란드 대부분의 영토를 요구했다. 레오폴트 1세와 마리아나는 이 주장을 일축했지만, 루이 14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법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마리아나 정부는 프랑스의 의도를 알고 포르투갈 복원 전쟁 종결, 영국과의 동맹 체결, 프랑스-네덜란드 관계 단절을 시도했다. 루이 14세는 1667년 리스본 조약으로 포르투갈과 동맹을 맺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 등에 중립 유지를 위한 자금을 제공하며 반격했다. 레오폴트 1세는 대투르크 전쟁에 몰두했고, 위그 드 리옹은 반 오스트리아 라인 동맹을 1668년까지 연장했다.
1667년 5월 8일, 유럽의 모든 프랑스 대사는 루이 14세의 영토 요구 선언문을 읽었다. 5월 중순, 브레다에서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종결 회담이 열렸다. 요한 데 비트는 루이 14세와 찰스 2세의 비밀 합의를 알게 되었고, 네덜란드에 대한 압박이 증가했다.
임박한 전쟁은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1667년 5월 23일 앵글로-스페인 마드리드 조약은 영국에 상업적 특권을 부여하며 포르투갈과의 전쟁 종식에 기여했다.
2. 1.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 조약
1517년 종교 개혁 이후 독일 지역의 종교 갈등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다.[1][2] 17세기 들어 독일 내 신구교 영주 간에 무력 충돌이 다시 발생했다.[3] 만일 독일 지역이 가톨릭 세력으로 통일될 경우, 스페인과 독일 사이에 낀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4][5] 1631년 이후 신교 제후들을 물밑에서 돕던[6] 프랑스는 신교 세력의 전세가 계속 불리해지자, 1635년에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가문에 선전포고를 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7]기나긴 전쟁은 1648년에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막을 내렸다.[8] 독일 지역은 약 300여 개의 제후국으로 분리되었고, 30년간 지속되었던 전쟁으로 독일 인구 약 8백만 명이 사망하였다. 종교는 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네덜란드는 독립국의 지위를 인정받았으나, 네덜란드 남부의 일부 지역, 현재의 벨기에, 룩셈부르크에 위치한 남네덜란드는 스페인령으로 남아있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도 불구하고 스페인과 프랑스는 접경 지역에서 갈등을 지속하며 전쟁을 이어갔다. 1640년 스페인에서는 포르투갈의 독립 투쟁이 시작되었고,[9][10] 카탈루냐 지방에서 반란이 발생했는데, 프랑스가 포르투갈과 카탈루냐를 지원하였다.[11] 그러자 스페인은 1650년에 프랑스에서 발생한 2차 프롱드의 난을 지원하며 응수했다. 양국 간의 전쟁은 1658년 6월 프랑스군이 됭케르크 전투에서 승리하며 막을 내렸고, 이후 종전 협상에 들어가게 되었다.[12]
2. 2. 피레네 조약과 루이 14세의 결혼
1659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피레네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끝내고, 루이 14세와 펠리페 4세의 딸 마리 테레즈의 결혼에 합의했다.[14] 이 결혼은 프랑스 재상 쥘 마자랭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13]결혼 조건 중 하나는 마리 테레즈가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대신 50만 에쿠의 지참금을 프랑스에 지불하는 것이었다.[15] 그러나 스페인은 오랜 전쟁으로 재정난을 겪어 지참금을 완불할 능력이 없었고, 이는 후계 단절 시 마리 테레즈나 그 후손에게 왕위가 돌아갈 가능성을 높였다.

루이 14세는 이 지참금 미지급을 이유로 마리 테레즈의 왕위 계승권 포기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브라반트 공국 등 스페인령 네덜란드 대부분의 영토를 요구했다.
3. 전개
1660년 6월 9일 프랑스 루이 14세는 스페인 공주와 결혼했으나, 스페인이 지참금을 완납하지 않아 갈등의 불씨를 남겼다.[16][17][18] 1665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가 사망하자, 루이 14세는 이를 빌미로 왕비 마리테레즈의 남네덜란드 계승권을 주장했다.
1667년 5월, 프랑스 군대는 남네덜란드를 침공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네덜란드 공화국은 잉글랜드 왕국과의 전쟁(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종결하고, 1668년 1월 잉글랜드, 스웨덴과 삼국 동맹을 맺어 프랑스에 맞섰다. 프랑스는 1668년 2월 프랑슈콩테를 점령하며 공세를 이어갔다.
1668년 5월 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는 아르망티에르, 베르그, 샤를루아, 코르트레이크, 두에, 푀르너, 릴, 아우데나르더, 투르네 등을 획득했지만, 전쟁 중 점령했던 프랑슈콩테는 스페인에 반환해야 했다.
3. 1. 남네덜란드 침공과 프랑스의 공세
1665년 스페인의 펠리페 4세 국왕이 사망하자,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왕비 마리테레즈의 남네덜란드 계승권을 주장했다. 이는 1660년 6월 9일 루이 14세와 마리테레즈의 결혼 당시 스페인이 지참금을 완납하지 못한 것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16][17][18]1667년 5월, 프랑스 군대는 남네덜란드를 침공했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이에 위협을 느껴 1667년 7월에 잉글랜드 왕국과의 전쟁(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종식시키고, 1668년 1월에는 잉글랜드, 스웨덴과 삼국 동맹을 맺어 프랑스와 대치했다. 1668년 2월, 프랑스 군대는 스페인 영토였던 프랑슈콩테를 점령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운하와 강이 많은 좁은 지역이었다. 19세기 철도가 등장하기 전에는 물을 통해 상품과 물품이 주로 운송되었으며, 이 지역에서의 군사 작전은 리(Lys), 삼브르 강, 뫼즈 강과 같은 강을 따라 요새를 장악하는 데 집중되었다.
1659년 이후, 미셸 르 텔리에가 시작한 군사 개혁으로 프랑스군은 더욱 전문적으로 변모했고, 물류 지원도 개선되었다. 이를 통해 더 많은 병력을 더 오랫동안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1667년까지 프랑스군은 8만 명의 정규군을 보유했고, 이 중 5만 1천 명이 전역에 투입되었다.
튀렌이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그의 주력 부대인 3만 5천 명과 포병 부대는 메지에르의 뫼즈 강 부근에 집결했다. 앙투안 다르몽 휘하의 다른 9천 명은 코르트레이크와 오데나르데를 거쳐 리 강을 따라 진격할 준비를 했다. 드 크레키와 6천 명의 기병대는 시에르크-레-뱅에 주둔하여 독일의 공격으로부터 측면을 방어했다. 루이 14세와 그의 측근들을 동반한 프랑스군은 5월 24일에 국경을 넘었다.
이러한 준비를 인지한 스페인 총독 카스텔로 로드리고는 마드리드에 긴급히 추가 자금을 요청했다. 마리아나는 딸의 결혼식에 라는 거액을 지출했음에도 불구하고, 1666년 중반 1만 1천 명이었던 병력을 1667년 4월까지 2만 7천 명으로 늘렸다.
모든 거점을 방어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했지만, 스페인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시간이 주어지면 가장 강력한 요새도 함락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의 주요 목적은 방어군이 예비 병력을 동원하거나 외교적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도시를 점령하는 것은 비교적 쉬웠지만, 지키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웠다. 왜냐하면 모든 수비대는 야전군의 전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다음 세기 동안 프랑스는 이 지역에서 이러한 전략적 딜레마에 여러 번 직면했다.
튀렌의 첫 번째 목표는 스페인의 주요 보급 기지였던 샤를루아였다. 카스텔로 로드리고는 이곳을 지킬 수 없어 요새를 파괴한 뒤 브뤼셀로 철수했다. 6월 2일, 드 몽탈이 프랑스 총독으로 임명되어 3천 명의 수비대를 받았으며, 보방은 요새 재건을 시작했다. 7월 말까지 로슈바론은 투르네, 코르트레이크, 오데나르데를 점령했다. 튀렌은 덴데르몬데로 진격하여 안트베르펜을 점령하려 했다.
1667년 7월 31일, 브레다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잉글랜드와 제2차 영란 전쟁의 각 교전국 간), 네덜란드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외교 동맹을 맺기 위해 잉글랜드 및 스페인과 논의를 시작했다. 동시에 카스텔로 로드리고는 수문 방어를 열어 토지를 침수시키고 프랑스군의 진격을 멈추게 했다. 튀렌은 철수하여 8월 10일 릴을 포위했는데, 이곳은 왈롱 지역의 수도이자 중요한 상업 중심지였다.
8월 28일 항복 후 수비대는 철수를 허용받았고, 3일 후 드 마르섕과 12,000명의 스페인 구원군이 브뤼게로 가는 길에서 프랑스 기병대에 마주쳤다.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은 벨르퐁과 드 크레키는 2,000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 1668년 초, 루이는 두 사람 모두를 프랑스 원수로 임명했다. 9월 12일, 튀렌은 알스트를 점령했지만 그의 부대는 비교적 적은 전투 사상자를 겪었지만, 질병이 훨씬 더 큰 문제였다. 10월 초, 겨울을 맞아 군사 작전이 종료되었다.

1667년 7월 31일, 브레다 조약으로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이 종결되었고, 프랑스를 상대로 한 공동 전선에 대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는 제란트 주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더 헤이그와 브뤼셀 주재 잉글랜드 대사인 윌리엄 템플 경, 그리고 런던 주재 레오폴트의 대표인 프랑수아-폴 드 리솔라가 이를 지지했다.
데 비트는 네덜란드의 딜레마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스페인을 버리는 것은 프랑스에게 네덜란드를 선물하는 것이고, 스스로 방어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와 잉글랜드의 찰스 2세는 프랑스를 선호했지만, 대다수의 자국민은 그렇지 않았고, 이는 그들이 루이를 물러서게 하면서도 우정을 유지함으로써 국내 여론을 만족시켜야 함을 의미했다. 프랑스 스웨덴 주재 대사에 따르면, 찰스는 이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재빨리 인식하고, 루이가 데 비트를 비난하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
1667년 4월부터 1668년 6월까지 프랑스의 관세 부과로 인해 프랑스-네덜란드 무역은 30% 감소했다. 프랑스가 이웃이 될 가능성과 함께, 이는 오라녜주의자, 네덜란드 연방 의회, 그리고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잉글랜드-네덜란드 동맹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잉글랜드 의회와 런던 시 의회가 평화를 원했고, 알링턴 경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략적, 상업적 이유로 스페인을 선호했다. 스페인을 지원하는 잉글랜드-네덜란드 동맹이 이상적인 해결책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이는 잉글랜드의 찰스 2세가 의회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네덜란드의 신뢰성을 보여주고, 1670년 도버 조약에서 루이가 그에 대한 지원을 위해 지불할 가격을 높일 수 있게 했다.
9월에 데 비트는 스페인이 전쟁 종결을 위한 프랑스 조건을 수용하도록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루이는 필요할 경우 이를 강제하도록 약속할 것을 고집했다. 마리아나가 거부하자, 그는 홀란트 및 서프리슬란트 주에 12월 10일과 1668년 1월 14일에 스페인에 대한 군사 행동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도록 설득했다. 이는 다른 주들과 홀란트의 오라녜주의 반대파에 의해 강력하게 저항받았다.

1665년 필리프 4세가 사망했을 때, 스페인의 유일한 동맹은 레오폴트 1세였다. 1668년까지, 그들의 외교관들은 오라녜주의자, 잉글랜드, 그리고 스웨덴과 브란덴부르크와 같은 전통적인 프랑스 지지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1667년 9월, 포르투갈의 아폰수 6세가 그의 동생인 포르투갈의 페드루 2세에 의해 폐위되었고, 페드루 2세는 복원 전쟁 종결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1667년 프랑스와의 협정은 무효가 되었고, 1668년 2월 13일, 스페인은 리스본 조약으로 포르투갈의 독립을 인정했다.
1668년 캠페인을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 카스텔루 호드리고는 암스테르담 금융 시장으로부터 의 차관에 동의했다. 담보로 네덜란드는 브뤼헤, 오스텐데, 담메를 점령할 수 있게 되었다. 포르투갈과의 평화 전망은 마리아나가 이러한 조건을 거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는 카스텔루 호드리고에게 와 100만 개의 은괴에 대한 신용장을 보냈다. 이를 통해 그는 징병을 시작할 수 있었고, 브란덴부르크는 12,000명의 군대를 제공하기로 동의했다.
1월 20일, 루이와 레오폴트는 스페인 왕이 사망할 경우 스페인 제국 분할에 동의하는 분할 조약을 체결했다. 여기에는 9월에 데 비트에게 주어진 조건이 포함되었다. 삼국 동맹은 1월 23일에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에 의해 체결되었고, 세 번째 회원국인 스웨덴 제국은 5월 5일에 공식적으로 합류했다. 이는 아헨 조약 이후 3일 뒤였다. 이 조약에는 상호 방위 조약, 스페인이 프랑스 조건을 수용하도록 보장하는 합의, 그리고 루이가 이 약속을 어길 경우 프랑스에 대한 군사 행동을 포함한 비밀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인 뤼비니는 며칠 안에 알링턴으로부터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사본을 받았고, 이를 리옹에게 전달했다. 10년 후, 주로 후속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루이는 이를 '은혜를 모르는 네덜란드 민족'의 계산된 모욕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그의 반응은 훨씬 더 온건했다. 프랑스는 군사 조항이 대체로 집행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튀렌 원수는 '네덜란드는 힘보다 악의가 더 많고, 잉글랜드는 군대나 돈이 없다'고 말했다. 리옹은 또한 동맹의 보증이 양측 모두에게 적용되어 스페인이 '우리가 한 푼도 들이지 않고' 프랑스 조건을 준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루이 14세는 경력 전반에 걸쳐 협상 전에 자신의 입지를 개선하려 했다. 9월, 그는 프랑슈-콩테를 점령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스페인이 방어하기는 거의 불가능했고, 주지사인 옌 남작은 전체 지방을 지킬 병력이 2,0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또한 훨씬 우수한 병참 지원을 받아 상대방이 준비되기 전에 작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침공은 2월 초에 계획되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병력 이동에 비실용적인 시기로 간주되었으며, 이는 우세한 병력에 기습이라는 요소를 더했다.
이 작전은 콩데 공이 지휘했습니다. 한때 프랑스 최고의 장군이었던 그는 1648년부터 1653년까지의 프롱드 기간 동안 루이 14세와 대립했고, 그 후 1659년까지 스페인과 함께했습니다. 이는 1660년 망명에서 돌아온 이후 그의 첫 지휘였습니다. 프랑슈-콩테는 그의 가문의 전통적인 권력 기반이자 독립 국가로서 오랜 역사를 가진 지역에 대한 왕실의 통제를 보여주는 그의 선택인 부르고뉴의 일부로 여겨졌다.
상대방을 추측하게 하기 위해 루이 14세는 군대를 134,000명으로 두 배로 늘리고 1668년 작전 계획의 세부 사항을 유출했습니다. 그 자신과 튀렌의 지휘 아래 66,000명의 병력이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정복을 완료할 것이고, 오를레앙 공 필리프 휘하의 지원 부대는 카탈루냐를 공격하고, 콩데는 세 주교령에 주둔하여 독일의 공격을 막을 것이었다.
이는 디종에서 병력과 물자를 집결하는 데 대한 은폐 작전이 되었으며, 2월 초까지 콩데는 오손 근처에 보병 12,000명과 기병 3,000명을 집결시켰습니다. 그는 군대를 두 개의 부대로 나누어 다른 부대는 룩셈부르크가 이끌었고, 2월 4일에 프랑슈-콩테로 진입했습니다. 브장송 자유시와 살랭레뱅은 2월 7일에 항복했고, 그 후 콩데와 룩셈부르크는 돌로 이동했는데, 루이 14세는 2월 9일에 그곳에 합류했습니다. 그의 존재는 불필요한 공격으로 이어져 프랑스군은 캠페인에서 유일하게 상당한 손실인 400명에서 50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돌은 2월 14일에 항복했고, 지방 수도인 그레이는 19일에 항복했습니다. 루이 14세는 24일에 생제르맹으로 돌아갔습니다.
남부 전선에서 스페인이 주도권을 잡았다. 카탈루냐 부왕인 가스파르 텔레스-히론, 오수나 공작은 보병 2,300명과 기병 200명을 이끌고 오트세르다뉴를 침공했다. 프랑스의 허술한 방어는 그가 이 지역의 55개 마을을 점령하게 했지만, 불규칙적인 지역 미케레트는 프랑스 군과 함께 침략에 저항했다. 스페인의 침략은 1669년까지 계속되었고, 프랑스는 국경을 요새화해야 했다.
3. 2. 삼국 동맹의 결성과 국제적 압력
프랑스의 침공에 위협을 느낀 네덜란드는 1667년 7월 영국과의 전쟁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종결했다.[3] 네덜란드의 지도자 요한 데 비트는 영국 공사 윌리엄 템플과 협력하여 1668년 1월 스웨덴과 3국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항했다.[3]3. 3. 아헨 조약과 강화

국제적 압력과 내부적 요인으로 인해 프랑스는 1668년 아헨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결했다.[1] 프랑스는 플랑드르 지역의 일부를 점령했지만, 프랑슈콩테는 스페인에 반환해야 했다.[1]
프랑스는 프랑슈콩테와 남네덜란드에서 철수했지만, 11개의 도시와 그 주변 지역은 유지했다. 릴, 아르망티에르, 베르그, 두에는 프랑스의 취약한 북부 국경을 강화하는 데 필수적인 곳으로 여겨져 오늘날까지 프랑스 영토로 남아 있다. 투르네, 아우데나르데, 코르트레이크, Furnes|퓌르네프랑스어, 뱅슈, 샤를루아, 아스의 유지는 1672년에 증명되었듯이 미래의 공세를 훨씬 더 쉽게 만들었다.[1]
군사적 관점에서 프랑스는 북부 국경을 강화했고, 바반은 "철의 요새"로 알려진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샤를루아와 투르네와 같은 도시 소유는 남네덜란드로 가는 중요한 경로를 통제하여 미래 작전을 용이하게 했지만, 쉽게 고립되었고 값비싼 주둔군이 필요했다.[1]

정치적 결과는 엇갈렸다. 분할 조약에서 레오폴트 1세는 루이 14세의 스페인 제국 일부 상속권을 인정했는데, 이는 스페인을 매우 화나게 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팽창주의적 야망은 반프랑스 동맹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고, 이는 1689년 대동맹 결성으로 이어졌다.[1]
평화 조약에서 삼국 동맹의 역할은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논의되고 있으며, 여기에는 "존 로스럽 모틀리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에 대한 가장 중요한 영어권 역사가"인 허버트 로웬이 포함된다.[1] 그 실제 중요성은 1672년 매우 인기가 없었던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짧은 중단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네덜란드 목표를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네덜란드는 아헨 조약을 외교적 승리로 간주했다.[1]
프랑스 야망에 대한 우려는 오라니스트 정당을 부활시켰고, 데 비트의 공화파와 내부 정치적 갈등을 증가시켰다. 그 결과는 오렌지 공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네덜란드 군대를 의도적으로 소홀히 한 것이었다. 이는 1672년에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했다.[1] 루이 14세는 1667년, 네덜란드가 남네덜란드에서 그가 요구하는 양보에 결코 자발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이제 이를 달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공화국을 물리치는 것이라고 결정하고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을 계획하기 시작했다.[1]
4. 영향
1700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하면서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남성 직계가 단절되었다.[19]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스페인 왕위는 마리 테레즈의 손자인 펠리페 5세에게 이어졌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부르봉 왕가가 계승하고 있다.[19]
4. 1. 유럽의 세력 균형 변화
루이 14세가 일으킨 대외 전쟁의 시작은 좌절되었지만, 이는 "태양왕"으로 불린 루이 14세의 화려한 패권주의의 시작이었다.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세력 확장에 방해가 되는 네덜란드를 고립시키기 위한 외교 정책을 전개했고, 잉글랜드의 찰스 2세 국왕과 비밀 조약(도버 밀약)을 체결했다. 스웨덴은 프랑스와 동맹 관계(프랑스-스웨덴 동맹)를 수립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과는 동맹 및 중립 관계를 수립했다. 이는 1672년에 일어난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19]4. 2. 외교적 고립과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세력 확장에 방해가 되는 네덜란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잉글랜드의 찰스 2세 왕과 비밀 조약(도버 밀약)을 맺었고, 스웨덴과는 프랑스-스웨덴 동맹을 체결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과도 동맹 및 중립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일련의 외교적 노력은 1672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발발의 도화선이 되었다.[19]4. 3.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1700년에 사망하면서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남성 직계가 단절되었다.[19] 왕위 계승 전쟁을 거치기는 했으나, 스페인의 왕위는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 테레즈의 손자인 펠리페 5세에게 이어졌으며 오늘날까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계승하게 되었다.[19]5. 추가 논의: 한국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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