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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트알아랍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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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트알아랍강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합류하여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드는 강으로, 이라크와 이란의 국경을 형성하며, 두 국가 간의 영유권 분쟁의 주요 대상이 되어왔다. 이 강은 카룬강,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등을 포함하는 수계를 가지며, 이라크에서는 디즐라 알 아와라, 이란에서는 아르반드 루드로 불린다. 역사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왕조 간의 분쟁, 1937년 조약, 1975년 알제 협정 등을 거치며 국경선이 결정되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 2003년 이라크 침공 등에서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 현재는 수자원 고갈과 염해, 영유권 분쟁 등 다양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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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라크-이란 국경 - 페르시아만
    페르시아만은 아라비아 반도와 이란 사이의 내해로, 풍부한 석유 매장량과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국제적인 관심을 받으며, '걸프'라고도 불리지만 명칭 분쟁이 있는 지역이다.
샤트알아랍강
지도
일반 정보
이름 (아랍어)شط العرب
이름 (로마자 표기)Šaṭṭ al-ʿArab
아랍의 강
페르시아어 이름اروندرود
페르시아어 이름 (로마자 표기)Arvand Rud
빠른 강
국가이라크
이란
쿠웨이트
수계 등급티그리스강 - 유프라테스강 수계
지리
발원지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의 합류점 (알쿠르나, 이라크)
발원지 고도4m
하구페르시아만
하구 좌표30°24′15.59″N 48°09′3.60″E
하구 고도0m
길이204km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합류점으로부터의 길이200km
총 길이 (유프라테스 강 포함)3,596km
최소 폭250m
최대 폭1,500m
유역 면적884,000km2 ~ 938,173km2
수문학
평균 유량 (알쿠르나, 1971-2000)2,531.8 m3/s
평균 유량 (하구, 1971-2000)3,535 m3/s
평균 유량 (아바단, 1971-2000)3,531.6 m3/s
평균 유량 (바스라, 1971-2000)2,782.8 m3/s
평균 유량 (1977-2018)105.7 km3/년
지류
왼쪽 지류티그리스강
알스와이브 운하
카룬강
오른쪽 지류유프라테스강

2. 지리

지도


샤트알아랍강은 알쿠르나에서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이 합류하여 형성되며,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 지대를 따라 흐르다가 카룬강과 합류한 후 페르시아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샤트알아랍강 유역은 비옥한 습지대로, 농업이 활발하며 한때 세계 최대 규모의 대추야자 숲이 있었다. 그러나 2002년까지 전쟁, 염해, 병충해로 인해 대추야자 숲의 80%가 사라졌고, 2010년대에는 상류 지역의 댐 건설로 인해 유량이 급감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다.[34] [35]

2. 1. 지형 형성



샤트알아랍강은 알쿠르나에서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이 합류하여 형성되며, 알파우 시 남쪽의 페르시아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호람샤흐르에서 카룬강이 합류한다.

티그리스강(길이 1900km)과 유프라테스강(길이 2800km)은 이라크 남부 바스라 주의 알 쿠르나(al-Qurnah) 마을에서 합류하여 바스라 주를 관통하여 흐른다. 하류는 이란(후제스탄주)과 이라크의 국경 지대를 흐르며, 동쪽에서 이란 최장의 강인 카룬강(Karun/Karoun, 길이 720km)과도 합류한다. 카룬강은 다량의 황토를 포함하고 있어 샤트알아랍강의 항로 유지를 위한 준설이 필요하다.[33] 강은 삼각주를 형성하며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든다. 바스라 주변에서 200m가 넘는 강폭이 하구에서는 800m를 넘는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은 한때 현재의 샤트알아랍강보다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흘러들었으며, 샤트알아랍강의 유로 형성은 지질학적으로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2. 2. 생태 환경

샤트알아랍강 유역은 풍요로운 습지대로 농경이 이루어졌다. 세계 최대의 대추야자 숲도 있었으며, 1970년대 중반에는 1,700만 그루에서 1,800만 그루에 달해, 세계 대추야자 9,000만 그루의 5분의 1이 이 지역에 있었다. 2002년까지 전쟁, 염해, 병해로 그 8할에 해당하는 1,400만 그루(이라크에서 900만 그루, 이란에서 500만 그루)가 고사했으며, 남은 300만 그루 정도도 상태가 좋지 않다.[34]

2010년대에는 상류의 터키, 이란 국내에서 댐 건설과 새로운 물 이용이 시작되어, 최하류의 샤트알아랍강의 유량이 격감하였다. 해수(염수쐐기)의 역상승 등으로 물 이용이 어려워지고 있다.[35]

3. 명칭

이 강은 이라크에서는 디즐라 알 아와라(دجلة العوراءar)로, 이란에서는 아르반드 루드(اروندرودfa, '빠른 강')로도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 서사시 ''샤나메''와 다른 많은 중기 페르시아 문학 작품들은 샤트 알 아랍의 합류 지점인 티그리스에 '아르반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28] 이란인들은 또한 나중의 팔라비 시대 동안 샤트 알 아랍을 지정하기 위해 이 이름을 사용했으며, 1979년 이란 혁명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28]

샤트알아랍 강(Shatt al-Arab, شط العربar)은 이라크 측 및 아랍 측의 명칭이다. 샤트는 아랍어 문어에서 "강둑·해안", 현지 이라크 방언에서 "하천(특히 작은 개울이 아닌 규모의 큰 강)"을 의미하며, 알-아랍은 "아랍인들"을 의미한다. 복합어인 샤트 알-아랍은 "아랍인들의 강"이라는 의미가 되며, 문어 아랍어의 나흐르 알-아랍(نهر العربar, 아랍인들의 강)이라는 표현에 해당한다. 영어로는 종종 River of the Arabs로 번역된다.

이란 측의 명칭인 알반드(Arvand, اروندرودfa)는 중세 이란의 다양한 문학 작품 및 민족 서사시 샤 나메에서는 티그리스 강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등장했지만, 20세기에 들어 팔레비 왕조 후기에는 샤트알아랍 강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이란 혁명 후에도 알반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4. 역사

이란이라크 간 갈등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페르시아 만 입구의 샤트알아랍 강(이란명 아르반드 루드) 수로 지배권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이 수로는 양국 간의 국경을 이루며, 양국의 석유 수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사적으로 수로 경계 결정 권한은 힘이 강한 쪽에 있었으며, 1937년 영국의 영향력 아래 수로 경계는 이란 쪽으로 정해졌다. 영국군 철수 후 이란은 1969년 수로 안쪽으로 선박을 출입시켰고, 1975년 알제 협정으로 이란의 우세가 확인되었다.

이라크 왕국 문장 1932–1959, 샤트와 숲 묘사


이라크 위임 통치령 (1920–1932) 동안, 영국 고문들은 탈베크 원칙에 따라 수로를 양국 공동 관리 구역으로 유지하려 했다. 1937년, 이란과 이라크는 샤트알아랍 강 통제권 분쟁을 해결하는 조약을 체결했다.[16] 이 조약은 샤트알아랍 강 동쪽의 저수위선을 따라 국경을 인정했지만, 아바단호람샤르에서는 국경이 ''탈베크'' (깊은 수로)를 따라 이라크가 거의 전체 수로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 또한 샤트알아랍 강을 사용하는 모든 선박은 이라크 국기를 게양하고 이라크 조종사를 배치해야 하며, 이란 선박은 통행료를 지불해야 했다.[17] 이란의 샤 레자 샤는 사다바드 조약을 추진했고, 샤트알아랍 강 조약의 대가로 이라크는 사다바드 조약에 가입하여, 이후 수십 년 동안 이란-이라크 관계는 우호적이었다.[17]

샤트알아랍 강의 아랍 뱃사공 1958


샤트알아랍 강의 저녁 분위기


1960년대 후반,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치하의 이란은 강력한 군대를 발전시키고 더욱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16] 1969년 4월, 이란은 1937년 조약을 폐지하고, 이란 선박은 통행료 지불을 중단했다.[19] 샤는 1937년 조약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20] 이라크는 전쟁을 위협했지만, 이란 군함이 호위하는 이란 유조선이 샤트알아랍 강을 따라 항해했고, 이라크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17] 1937년 조약에 대한 이란의 폐지는 1975년 알제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이라크-이란 긴장을 고조시켰다.[17]

국제 연합의 중재 시도는 거부되었다. 바트주의 이라크는 1937년 국경을 주장했고, 이란은 1970년대 초 이라크 쿠르드족 독립 운동 단체의 주요 후원자가 되었다. 1974년, 이란의 지원으로 이라크 쿠르드족 ''페쉬메르가''가 반란을 일으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21] 1974–75년 겨울, 이란과 이라크는 거의 전쟁을 벌일 뻔했다 (1974–75년 샤트알아랍 분쟁 참조).[17] 이란의 더 강력한 군사력을 고려하여 이라크는 전쟁을 피하고, 쿠르드족 반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테헤란에 양보하기로 결정했다.[17]

1975년, 알제 협정을 체결한 이란의 팔라비 국왕(왼쪽)과 이라크의 후세인 부통령(오른쪽)


1975년 3월, 알제 협정이 체결되어 이라크는 수로의 ''탈베크'' (가장 깊은 수로)를 공식 국경으로 인정하고, 이란은 이라크 쿠르드족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22] 그러나 이 협정은 이라크에서 국가적 굴욕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란에 대한 불만을 야기했다.[17] 1980년 사담 후세인은 알제 협정 폐기를 선언하고 이란-이라크 전쟁을 개시했다.

4. 1. 고대-근세

바스라 근처의 샤트알아랍 강


기원전 3000년경 페르시아 만은 더 넓었고, 샤트알아랍 강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20세기 독립적인 이라크가 수립되기 전, 오스만-사파비 시대 동안 강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16세기 초, 이란의 사파비 왕조는 샤트알아랍 강을 포함한 현재 이라크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 이후 아마시아 조약 (1555) 이후 팽창하는 오스만 제국에 이 지역을 빼앗겼다.

17세기 초, 아바스 1세 (1588–1629 재위) 치하의 사파비 왕조는 다시 샤트알아랍 강을 되찾았다. 1639년 주하브 조약을 통해 강의 지배권을 오스만 제국에 영구적으로 넘겨주었다. 이 조약에서 사파비 왕조는 일시적으로 수로에 대한 통제권도 오스만 제국에 잃었다. 주하브 조약은 1555년 당시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의 국경선을 대략적으로 재확립했지만, 남부 국경과 관련하여 정확하고 고정된 경계를 명시하지는 않았다.

이후 나데르 샤 (1736–1747 재위)는 한동안 샤트알아랍 강에 대한 이란의 통제권을 회복했다. 그러나 케르덴 조약 (1746)을 통해 주하브 경계가 다시 복원되어 강은 터키에 양도되었다.[15] 제1차 에르주룸 조약 (1823)은 오스만 터키와 카자르 이란 사이에 체결되어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제2차 에르주룸 조약은 오스만 터키와 카자르 이란 간의 장기간 협상 끝에 1847년에 체결되었으며, 영국러시아 제국 대표가 참여했다. 이후에도 후퇴와 의견 불일치가 계속되었고, 1851년 영국 외무 장관 팜스턴 경은 "터키와 페르시아 사이의 국경선은 영국과 러시아의 임의적인 결정 없이는 최종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라고 언급했다. 1913년 이스탄불에서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간에 의정서가 체결되어 오스만-페르시아 국경선이 ''탈베크''를 따라 가기로 선언되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모든 계획이 취소되었다.

이란과 이라크는 오랫동안 샤트알아랍 강 유역의 영토 문제와 항행권 문제로 대립했으며, 이는 이란-이라크 전쟁(1980년 - 1988년)의 발발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88년 양국은 전쟁 이전 상태로 회복하며 휴전했지만, 유역에 중요한 항만 도시가 있는 샤트알아랍 강은 여전히 양국 간의 문제로 남아있다.

항로 사용과 강을 따라 이어진 국경선을 둘러싼 분쟁은 수 세기 전부터 있었다. 오스만 제국사파비 왕조로부터 이라크를 빼앗은 직후인 1639년에 체결된 평화 조약인 زهاوfaKasr-ı Şirintr에서는 현지 부족의 관습과 양 제국에 대한 그들의 충성에 따라 국경이 정해졌으며, 엄격한 측량 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샤트알아랍 강 양안의 습지대에는 예전부터 معدانar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은 스스로가 마슈 아랍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페르시아와 튀르키예 사이에는 종교, 정치, 문화를 둘러싼 전면적인 긴장이 고조되었고, 19세기에는 잦은 분쟁이 일어났다. 양국 간의 협상은 길어졌고, 영국러시아의 중재를 거쳐, 1847년카자르 왕조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제2차 에르주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에도 양국에서는 조약 철회 및 견해 불일치가 나타났고, 1851년 영국의 외무 대신 퍼머스턴 경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남겼다.

: "튀르키예와 페르시아 사이의 국경은 대영 제국과 러시아 제국 측에서 일방적인 결정을 하지 않는 한 최종적인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는 191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의정서에 조인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모두 파기되었다.

4. 2. 20세기 분쟁

20세기 초, 이라크가 독립하기 전, 오스만 제국사파비 왕조 시대부터 강을 둘러싼 분쟁이 있었다. 16세기 초, 사파비 왕조는 샤트알아랍 강을 포함한 현재 이라크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지만, 이후 오스만 제국에 빼앗겼다. 17세기 초, 아바스 1세 치하의 사파비 왕조가 다시 강을 되찾았으나, 1639년 주하브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 영구적으로 넘겨주었다.[15] 이후 나데르 샤가 잠시 통제권을 회복했지만, 케르덴 조약 (1746)으로 주하브 경계가 복원되어 강은 다시 터키에 양도되었다. 제1차 에르주룸 조약 (1823)과 제2차 에르주룸 조약 (1847)도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1913년 이스탄불에서 의정서가 체결되어 오스만-페르시아 국경선이 ''탈베크''를 따르기로 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이라크 위임 통치령 (1920–1932) 동안, 영국은 탈베크 원칙에 따라 수로를 양국 공동 관리 구역으로 유지했다. 1937년, 이란과 이라크는 샤트알아랍 강 통제권 분쟁을 해결하는 조약을 체결했다.[16] 이 조약은 샤트알아랍 강 동쪽의 저수위선을 따라 국경을 인정했지만, 아바단호람샤르에서는 국경이 ''탈베크'' (깊은 수로)를 따라 이라크가 거의 전체 수로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 또한 샤트알아랍 강을 사용하는 모든 선박은 이라크 국기를 게양하고 이라크 조종사를 배치해야 하며, 이란 선박은 통행료를 지불해야 했다.[17] 이란의 샤 레자 샤는 사다바드 조약을 추진했고, 샤트알아랍 강 조약의 대가로 이라크는 사다바드 조약에 가입하여, 이후 수십 년 동안 이란-이라크 관계는 우호적이었다.[17]

1960년대 후반,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치하의 이란은 강력한 군대를 발전시키고 더욱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16] 1969년 4월, 이란은 1937년 조약을 폐지하고, 이란 선박은 통행료 지불을 중단했다.[19] 샤는 1937년 조약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20] 이라크는 전쟁을 위협했지만, 이란 군함이 호위하는 이란 유조선이 샤트알아랍 강을 따라 항해했고, 이라크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17]

국제 연합의 중재 시도는 거부되었다. 바트주의 이라크는 1937년 국경을 주장했고, 이란은 1970년대 초 이라크 쿠르드족 독립 운동 단체의 주요 후원자가 되었다. 1974년, 이란의 지원으로 이라크 쿠르드족 ''페쉬메르가''가 반란을 일으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21] 1974–75년 겨울, 이란과 이라크는 거의 전쟁을 벌일 뻔했다 (1974–75년 샤트알아랍 분쟁 참조).[17] 이란의 더 강력한 군사력을 고려하여 이라크는 전쟁을 피하고, 쿠르드족 반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테헤란에 양보하기로 결정했다.[17] 1975년 3월, 알제 협정이 체결되어 이라크는 수로의 ''탈베크'' (가장 깊은 수로)를 공식 국경으로 인정하고, 이란은 이라크 쿠르드족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22] 알제 협정은 이라크에서 국가적 굴욕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란의 횡포에 대한 불만을 야기했다.[17]

1980년,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1975년 조약을 폐지하고 이란을 침공했다. 수로는 이라크가 페르시아 만으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였고, 이라크의 해상 운송로가 이란의 공격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22] 1986년 이란이 알파우 반도를 점령하면서 이라크의 해상 운송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1988년 4월 17일, 라마단 무바라크 작전이 실행되어 알파우 반도를 탈환했다.[24] 1988년 봄 전투에서 이란군은 사기가 붕괴되는 징후를 보였다.[26]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양측은 알제 협정을 다시 구속력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했다.

4. 3. 이란-이라크 전쟁 (1980-1988)

1980년, 이라크의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1975년 알제 협정을 폐지했고, 이라크는 이란을 침공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지상 군사 이동의 주된 추진력은 두 군대 간의 대부분의 군사적 전투가 벌어진 샤트알아랍 수로를 가로질렀다. 이 수로는 이라크가 페르시아 만으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였고, 따라서 이라크의 해상 운송로가 지속적인 이란의 공격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22]

1986년 이란이 알파우 반도를 점령하면서 이라크의 해상 운송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쿠웨이트나 심지어 요르단아카바와 같은 다른 아랍 항구로 우회해야 했다. 1988년 4월 17일, 라마단 무바라크 작전이 실행되어 3일간의 전투 끝에 알파우 반도를 탈환했다.[24] 알파우를 탈환한 후 이라크는 이란군을 이라크 남부에서 몰아내기 위한 지속적인 작전을 시작했다.[25] 1988년 5월, 이라크는 살람체흐에서 이란군을 몰아내고 마즈눈 섬을 점령했다. 1988년 봄 전투에서 이란군은 사기가 붕괴되는 모든 징후를 보였다.[26] 영국의 저널리스트 패트릭 브로건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988년 전투에서 이란군은 거의 8년에 걸친 전쟁으로 지치고 쇠약해 보였으며 이라크의 공세에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27]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양측은 알제 협정을 다시 구속력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했다.

5. 현대의 문제점

이란이라크는 샤트알아랍강의 영유권과 항행권을 두고 오랫동안 대립해 왔으며, 이는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88년 전쟁 이전 상태로 복귀하며 양국은 휴전했지만, 샤트알아랍 강은 여전히 양국 간의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다.

항로 사용과 강을 따라 이어진 국경선을 둘러싼 분쟁은 수 세기 전부터 있었다. 1639년 عهدنامه زهاب|카스리 시린 조약faKasr-ı Şirin Antlaşması|카스리 시린 조약tr에서는 현지 부족의 관습과 양 제국에 대한 충성에 따라 국경이 정해졌지만, 엄격한 측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세기 페르시아튀르키예 간의 종교, 정치, 문화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잦은 분쟁이 발생했다. 양국 간의 협상은 길어졌고, 영국러시아의 중재를 거쳐 1847년 카자르 왕조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제2차 에르주룸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양국에서는 조약 철회 및 견해 불일치가 나타났고, 1851년 영국의 외무 대신 퍼머스턴 경은 튀르키예와 페르시아 사이의 국경은 영국과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는 한 최종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남겼다.

1913년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는 의정서를 체결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파기되었다. 이라크 왕국의 영국인 고문은 국제 하천에서 정해진 국경선 원칙(탈베크 원칙)에 따라 샤트알아랍 강을 이란과 이라크 양국이 항해할 수 있도록 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의 의지를 받은 이라크는 샤트알아랍 강 국경선을 이란 강변을 따라 그어 수면 전체를 이라크 영토로 했다. 1930년대 양국 간 갈등이 국제 연맹에 제소되었고, 1937년 테헤란 조약에서 이란은 탈베크까지의 주권을 획득했다.

이라크는 샤트알아랍 강에 의존하지 않는 항구 확보를 위해 움 카스르의 대규모 항만화를 구상했다. 1958년 움 카스르에 군항이 설치되었고, 이후 외국 지원으로 항만이 건설되었다.

이라크의 아흐마드 하산 알 바크르 대통령은 샤트알아랍 강이 이란 측 강변까지 모두 이라크 영토라고 주장했지만, 이란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은 이에 불만을 느꼈다. 1970년 양국 국교가 단절되었고, 1972년부터 무력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국제 연합은 중재를 시도했지만 양국에 의해 거절당했다. 이란은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분리주의 세력을 지원했고, 이라크는 북부에 군대를 이동시켜야 했다.

1975년 OPEC 회담에서 이라크 부통령 사담 후세인과 이란 팔라비 국왕은 알제 협정을 체결하고 샤트알아랍 강 및 후제스탄 국경 문제 해결과 적대 관계 중단에 합의했다. 이 합의에서는 탈베크에 가까운 지점에 그어진 선을 국경선으로 확인했다.

1980년 사담 후세인은 알제 협정을 철회하고 이란을 침공,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다. 샤트알아랍 강은 양군의 주요 전투 무대가 되었다. 이라크군은 호람샤르, 아바단 등 도시와 석유 시설을 파괴했지만, 이란은 반격하여 이라크군을 강 반대편으로 밀어냈다. 이라크의 유일한 페르시아 만 출구였던 이 강이 공격받아 1987년 이라크 항만은 거의 기능 정지되었고, 물자 수송은 쿠웨이트와 아카바 만으로 변경되었다. 1990년 걸프 전쟁 당시, 사담 정권은 쿠웨이트 침공에 앞서 이란을 회유하기 위해 알제 협정을 확인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샤트알아랍 강은 연합군의 주요 군사 목표였다. 영국 해병대는 움 카스르의 석유 시설과 부두를 점령하기 위해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전쟁 후 영국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723에 따라 수로와 페르시아 만 지역 순찰 책임을 맡았고, 2011년까지 이라크 해군에게 임무를 인계했다.

샤트알아랍 강에서 작전 중이던 이란군은 영국 해군 군인들을 자국 영해 침범 혐의로 두 차례 나포했다. 2004년에는 이틀 동안 억류 후 석방되었고, 2007년에는 15명의 영국 군인 나포 사건이 외교 위기로 이어졌으나, 이란의 "사면"으로 13일 만에 해결되었다.

5. 1. 수자원 고갈과 염해

티그리스강(길이 1900km)과 유프라테스강(길이 2800km)은 이라크 남부 바스라 주의 알 쿠르나(al-Qurnah) 마을에서 합류하여 바스라 주를 관통하여 흐른다. 하류는 이란(후제스탄주)과 이라크의 국경 지대를 흐르며, 도중에 동쪽에서 이란 최장의 강인 카룬강(Karun/Karoun, 길이 720km)과도 합류한다. 카룬강은 다량의 황토를 포함하여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샤트알아랍강의 항로를 유지하기 위한 준설이 필요하다.[33] 강은 삼각주를 형성하며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든다.

2010년대에는 상류의 터키, 이란 국내에서 댐 건설과 새로운 물 이용이 시작되어, 최하류의 샤트알아랍강의 유량이 격감하였다. 해수(염수쐐기)의 역상승 등으로 물 이용이 어려워지고 있다.[35]

5. 2. 영유권 분쟁과 국제 관계

이란이라크 간 오랜 갈등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페르시아 만 입구에 위치한 샤트알아랍 강(이란명: 아르반드 루드)의 지배권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이 수로는 양국 간의 국경을 형성하며, 양국의 석유 수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사적으로 이 수로의 경계를 결정하는 권한은 힘이 강한 쪽에 있었으며, 1937년 영국의 영향력 아래 이라크에 유리하게 경계가 설정되었다. 그러나 영국군 철수 이후 이란은 1969년 수로 안쪽으로 선박을 진입시키며 영향력을 확대했고, 1975년 알제 협정을 통해 이란의 우세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1980년 사담 후세인은 알제 협정 폐기를 선언하고 이란-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8년간 전쟁을 지속했다.

샤트알아랍 강을 둘러싼 분쟁은 20세기 이라크 독립 이전, 오스만 제국사파비 왕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16세기 초 사파비 왕조는 샤트알아랍 강을 포함한 이라크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으나, 아마시아 조약(1555) 이후 오스만 제국에 빼앗겼다. 17세기 초 아바스 1세 치하에서 사파비 왕조는 일시적으로 강을 되찾았지만, 1639년 주하브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 영구적으로 넘겨주었다. 이후 나데르 샤가 잠시 이란의 통제권을 회복했으나, 케르덴 조약(1746)으로 주하브 경계가 복원되어 강은 다시 터키에 양도되었다. 에르주룸 조약(1823, 1847) 역시 비슷한 결과를 가져왔다.

1913년 이스탄불에서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간에 의정서가 체결되어 국경선이 ''탈베크''를 따르기로 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라크 위임 통치령 (1920–1932) 동안 영국은 탈베크 원칙에 따라 수로를 양국 공동 관리 구역으로 유지하려 했다. 1937년, 이란과 이라크는 샤트알아랍 강 통제권 분쟁을 해결하는 조약을 체결, 이라크에 유리한 국경선이 설정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이란은 군사력을 강화하고 1969년 조약을 폐지, 이란 선박의 통행료 지불을 중단했다. 이라크는 전쟁을 위협했지만, 군사적 열세로 인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1970년대 이란은 이라크 쿠르드족 독립 운동을 지원하며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975년 알제 협정을 통해 이라크는 ''탈베크''를 국경으로 인정하고 이란은 쿠르드족 지원을 중단했으나, 이라크는 이를 국가적 굴욕으로 여겼다. 1980년 사담 후세인은 조약을 폐지하고 이란을 침공,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다. 수로는 이라크의 유일한 페르시아 만 출구였기에 이란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1988년 전쟁 종결 이후 양측은 알제 협정을 다시 유효한 것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당시, 샤트알아랍 강은 연합군의 주요 군사 목표였다. 영국 해병대는 움 카스르의 석유 시설과 부두를 점령하기 위해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전쟁 후 영국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1723에 따라 수로와 페르시아 만 지역 순찰 책임을 맡았고, 2011년까지 이라크 해군에게 임무를 인계했다.

샤트알아랍 강에서 작전 중이던 이란군은 영국 해군 군인들을 자국 영해 침범 혐의로 두 차례 나포했다. 2004년에는 이틀 동안 억류 후 석방되었고, 2007년에는 15명의 영국 군인 나포 사건이 외교 위기로 이어졌으나, 이란의 "사면"으로 13일 만에 해결되었다.

이란과 이라크는 오랫동안 샤트알아랍 강 유역의 영토 문제와 항행권 문제로 대립했으며, 이는 이란-이라크 전쟁(1980년 - 1988년)의 발발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88년에는 전쟁 이전 상태로 회복함으로써 양국은 휴전했지만, 유역에 중요한 항만 도시가 있는 샤트알아랍 강은 여전히 양국 간의 문제로 남아있다.

항로 사용과 강을 따라 이어진 국경선을 둘러싸고는 수 세기 전부터 분쟁이 있었다. 1639년에 체결된 عهدنامه زهابfaKasr-ı Şirin Antlaşmasıtr에서는 현지 부족의 관습과 양 제국에 대한 그들의 충성에 따라 국경이 정해졌으며, 엄격한 측량 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페르시아와 튀르키예 사이에는 종교, 정치, 문화를 둘러싼 전면적인 긴장이 고조되었고, 19세기에는 잦은 분쟁이 일어났다. 양국 간의 협상은 길어졌고, 영국러시아의 중재를 거쳐, 1847년카자르 왕조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제2차 에르주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에도 양국에서는 조약 철회 및 견해 불일치가 나타났고, 1851년에는 영국의 외무 대신 퍼머스턴 경이 튀르키예와 페르시아 사이의 국경은 대영 제국과 러시아 제국 측에서 일방적인 결정을 하지 않는 한 최종적인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남겼다.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는 의정서를 1913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조인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모두 파기되었다. 이라크 왕국의 영국인 고문은 유럽의 국제 하천에서 정해진 국경선의 원칙(thalweg principle)의 적용에 따라 샤트알아랍 강을 이란과 이라크 양국이 항해할 수 있는 강으로 확보하려 했다. 게다가 영국의 의지를 받은 이라크 측은 샤트알아랍 강 국경선을 이란의 강변을 따라 그어 수면 전체를 이라크 영토로 했다. 1930년대에는 양국 간의 갈등이 격화되어 국제 연맹에 제소된 결과, 1937년의 테헤란 조약에서 이란은 탈베크까지의 주권을 획득했다.

이라크 측에서는 샤트알아랍 강에 의존하지 않는 항구 확보가 중요시되었고, 이라크 왕국 후기 이후, 강의 서안 습지대 알 파우 반도에 위치한 어촌 움 카스르(Umm Qasr)의 대규모 항만화가 구상되었다. 1958년에 군항이 움 카스르에 설치되었고, 이후 외국의 지원으로 항만이 건설되었다.

이라크의 아흐마드 하산 알 바크르 대통령도 샤트알아랍 강은 이란 측 강변까지 모두 이라크 영토라고 주장했지만, 이란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은 알반드 강(샤트알아랍 강)을 이라크 영토라고 주장하는 상태에 불만을 느꼈다. 1970년에는 양국의 국교가 단절되었고, 이후 1972년부터 무력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국제 연합은 중재자로서 이란-이라크 양국 간의 분쟁에 개입하려 했지만, 양국에게 거절당했다. 이란 측은 이 기간 동안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 분리주의 세력을 지원했고, 이라크 측은 북부에 군대를 이동시켜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렸다.

1975년 OPEC 회담에서 당시 이라크 부통령 사담 후세인과 이란의 팔라비 국왕은 알제 협정을 체결하고, 샤트알아랍 강 및 후제스탄에서의 국경 문제 해결과 적대 관계 중단을 합의했다. 이 합의에서는 대략 탈베크에 가까운 지점에 그어진 선을 국경선으로 확인했다.

알제 협정 체결 6년도 채 안 된 1980년, 이라크 신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알제 협정을 철회한다는 선언을 발표하고, 이란 영내로 침입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샤트알아랍 강은 양군의 전투 주요 무대가 되었다. 이라크군은 후제스탄으로 진격하여 호람샤르, 아바단 등의 도시와 석유 시설을 파괴했지만, 이란은 대반격을 가해 이라크군을 강 반대편까지 밀어냈다. 이 강은 이라크의 유일한 페르시아 만으로의 출구였고, 이란 측의 공격으로 이라크에 출입하는 선박이 타격을 입어, 1987년에는 이라크 항만이 거의 기능 정지되어 물자 수송은 쿠웨이트와 아카바 만까지 변경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양국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채 휴전했지만, 1990년 걸프 전쟁 당시, 사담 정권은 쿠웨이트 침공에 앞서 이란을 회유하기 위해 알제 협정을 확인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는 인도적 지원 물자의 공급과 밀수의 근절을 위해 이라크의 유일한 해상 출구인 샤트알아랍 강 확보가 중요했다. 전쟁 초기 영국 해군은 움 카스르 항만과 석유 시설에 대해 육해상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전투 종료 후 영국은 샤트알아랍 강과 그 하구의 걸프 해안을 경비했으며, 이후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1723에 의해 정식으로 경비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영국군은 강과 하구를 이용한 무기 밀수를 막고 있으며, 이라크 해군에게 항로 경비를 인계하기 위한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샤트알아랍 강 너머의 페르시아만에서는 샤트알아랍 강 중간선을 연장한 국경선이 그어져 있지만, 강의 토사와 사주 형성으로 인해 해상 국경은 불분명해진다. 이라크 전쟁 이후, 영국 해군 함정이 이란이 주장하는 영해를 통과했다는 이유로 2004년 6월과 2007년 3월 두 차례 이란군에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양국 간의 정치적 위기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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