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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일본 중립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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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일본 중립 조약은 1941년 4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체결된 소련과 일본 간의 조약이다. 이 조약은 양국 간의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제3국과의 전쟁 시 중립을 지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남진과 소련의 독일 방어에 영향을 미쳤으며, 소련은 1945년 얄타 회담에서의 약속에 따라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참전했다. 조약은 5년간 유효했으며, 이후 소련은 조약 위반을 주장하며 일본을 침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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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일본 중립 조약
조약 정보
조약 명칭소련-일본 중립 조약
다른 명칭일본-소련 불가침 조약
일본어: 日ソ中立条約
일본어: 日ソ不可侵条約
러시아어: Пакт о нейтралитете между СССР и Японией
조약 종류양자 조약
체결 정보
서명일1941년 4월 13일
서명 장소모스크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연방
발효일1941년 4월 25일
만료일1946년 4월 13일
종료일1945년 4월 5일 (소련에 의해 파기)
당사국
서명국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마쓰오카 요스케
다테카와 요시쓰구
참가국
내용
주요 내용상호 불가침 및 한쪽이 제3국으로부터 군사 공격을 받을 경우 다른 쪽의 중립 유지
기타
원문 언어일본어
러시아어
관련 자료국립공문서관 디지털 아카이브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РИА Новости
위키소스대일본제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사이의 중립 조약

2. 배경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소련일본 양국은 각자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복잡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소련은 독일과의 불가침 조약 체결에도 불구하고, 서방 연합국과의 관계 및 독일과의 전쟁 가능성을 고려하여 동부 국경의 안전을 확보해야 했다.

일본은 노몬한 사건에서의 패배 이후 소련과의 충돌을 피하고, 중국 침략을 지속하며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고자 했다.

1940년 8월부터 일본과 소련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소련은 서방 열강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불가침 조약 대신 중립 조약을 제안했다. 반면 일본은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을 모델로 한 더 강력한 조약을 원했다. 일본은 내몽골과 만주국을 포함한 중국의 동북 3성에서의 이권을 인정받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세력권으로 확보하고자 했다. 그 대가로 일본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페르시아 진출을 지지하겠다고 제안했다.[22]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41년 4월 13일, 일소중립조약이 체결되었다.

2. 1.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국제 정세

1939년 8월 23일,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다.[22] 같은 해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국제 정세는 급변하였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면서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로 진출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1939년부터 일본은 중일전쟁의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소련과의 타협을 추진해 왔다.[22] 일본은 1940년 5월과 6월에 불가침 조약을 제안했고, 당시 프랑스의 항복으로 동남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로 진출을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중립이 중요했다.[22]

1940년 9월 27일,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일독이 삼국 동맹을 체결하여 추축국 진영에 가담하였다.[15]

2. 2. 소련의 입장

소련은 독일과의 불가침 조약에도 불구하고, 독일과의 전쟁 가능성에 대비하여 동부 국경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였다.[22] 이를 위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했다.

당시 소련은 서방 연합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일본이 제안한 불가침 조약 대신 중립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선호했다.[22] 이는 서방 세계에 소련이 일본과 지나치게 가까워진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1941년 4월, 마쓰오카 요스케 일본 외무대신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일소중립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은 양국이 서로의 영토를 침략하지 않고, 제3국과 적대 관계에 놓일 경우 중립을 지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22]

이 조약으로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극동 지역의 병력을 서부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22] 또한, 미국의 무기대여법을 통해 막대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22]

요세프 스탈린은 이 조약 체결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는 외국 외교관 앞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이례적으로 마쓰오카를 기차역에서 배웅하며 조약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했다.[1]

2. 3. 일본의 입장

1939년 노몬한 사건에서 소련에 패배한 일본은 소련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22] 일본은 중국 침략을 원활하게 수행하고, 동남아시아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으며, 이를 통해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고자 했다.[22]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본은 코민테른 대처에 어려움을 겪었다. 1930년대 일본 내에서는 소련과의 협력이 공산주의를 수입하는 것과 같다는 반대론도 존재했다.[13]

1940년대, 일본은 중일전쟁을 수행 중이었고, 일미 관계와 일영 관계를 비롯하여 미국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일미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 도조 내각의 외무대신을 지낸 토고 시게노리는 일독이 삼국 동맹에 반대하고, 일소 양국이 연합하여 나치 독일, 미국, 중화민국을 견제하고 전쟁을 회피하고자 불가침 조약 체결을 모색했다.

요나이 내각이 총사퇴하고 제2차 고노에 내각이 발족하면서 마쓰오카 요스케가 외무대신에 취임하자, 일소 중립 조약을 통해 소련을 추축국 측으로 끌어들여 일독이소 사국 동맹을 맺어 미국에 대항하려는 구상으로 변질되었다.

1941년 4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조약이 체결될 당시, 타테가와 요시지 주소련 대사의 노력으로 회담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마쓰오카에 따르면, 요시프 스탈린은 회담 15분 만에 "알겠다(Харашо)"라고 말하며 조약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소련 측 전권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일본 측 전권은 타테가와 주소련 대사와 마쓰오카 외무대신이 서명했다.[14]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은 독소전쟁 발발 직전 마쓰오카에게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3. 조약 체결 과정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8월 21일에는 소중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다. 1939년 8월 23일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고,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1940년 9월 27일에는 일독이 삼국 동맹이 체결되었다.

소련-일본 중립 조약의 기원은 1931년 만주 사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타케오 이치(竹尾弌)에 따르면, 1932년 1월 호사와 켄키치(芳澤謙吉) 주프랑스 대사가 외무대신 취임을 위해 귀국하던 중 모스크바에 들렀을 때 소련 측으로부터 제안이 있었다고 한다. 소련은 일본의 공세에 양보하고 제휴를 제안했다. 일본 측도 코민테른 대처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1년 남짓 검토한 결과 소련과 협력하는 것은 공산주의를 수입하는 것과 같다고 판단하여 조약 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1930년대에는 일본 국내에서도 반대론이 존재했다.[13]

1941년 4월 13일 '''소일 중립 조약'''이 체결되었다.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 불가침 조약은 실효되었고, 7월 7일 '''관동군 특별 연습'''이 있었다. 12월 8일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진주만 공격, 말레이 작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1942년 1월 1일, 소련은 추축국에 대항하는 연합국 공동 선언에 서명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극동밀약이 이루어졌다. 4월 5일, 소련은 일본에 조약 파기를 통고했고, 일본 측은 이를 "불연장"으로 해석했다. 5월 8일 독일이 항복했다. 7월 26일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에 항복을 요구하는 최종 선언이 제시되었다. 8월 8일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가 있었고, 8월 9일 '''소련의 대일 참전'''이 이루어졌다. 8월 15일 일본은 포츠담 선언 수락을 고지했고, 9월 2일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었다.

1952년 4월 28일 일본과의 평화 조약(통칭: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로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었지만, 소련은 포함되지 않았다. 1956년 12월 12일 일소 공동 선언으로 일소 관계가 정상화되었으나, 국경 확정 문제는 보류되었다.

3. 1. 일본의 제안

일본은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과 유사한 비밀 의정서를 포함하여, 보다 구속력 있는 조약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에서 일본은 소련이 만주국과 내몽골 지역에서 일본의 이권을 인정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일본의 세력권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일본은 아프가니스탄이란에 대한 소련의 진출을 지지하겠다고 제안하였다.

3. 2. 소련의 입장 변화

프랑스 함락 이후 추축국 세력이 확장되자, 소련은 동부 국경을 보호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극동 지역의 외교 관계 개선을 원했다.

독일의 소련 침공 계획을 예견한 소련은 일본의 제안을 수락했다. 1941년(쇼와 16년) 4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조인하였다. 소련 측 전권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ヴャチェスラフ・モロトフ)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이었고, 일본 측 전권은 타테가와 요시지(建川美次) 주소련 대사와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외무대신이 서명했다.[14]

요시프 스탈린(ヨシフ・スターリン)은 "소련과 일본이 협력하면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1]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후, 스탈린은 이례적으로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일본 외무대신을 기차역에서 배웅했다.[1] 이는 스탈린이 이 조약에 얼마나 중요성을 부여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소련-일본 중립 조약에 서명하는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외무대신. 뒤에는 요시프 스탈린(ヨシフ・スターリン)과 소련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ヴャチェスラフ・モロトフ).

3. 3. 조약 체결

1941년 4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일본 측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介)와 주소련 일본대사 다테카와 요시쓰구(館川芳毅), 소련 측 외무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Вячеслав Молотов)가 조약에 서명하였다.[9] 같은 날, 세 사람은 몽골과 만주국에 관한 선언문에도 서명했다.[2] 소련은 만주국의 영토 보전과 불가침을 존중할 것을 약속했고, 일본은 몽골에 대해서도 같은 약속을 했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1937년 발발)을 치르고 있었고, 미국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이었다. 일미 교섭이 진행 중이었지만, 도조 내각의 외무대신이었던 도고 시게노리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과의 일독이 삼국 동맹에 반대하고, 불가침 조약 체결을 통해 소련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그러나 요나이 내각이 총사퇴하고 제2차 고노에 내각이 발족하면서 마쓰오카 요스케가 외무대신으로 취임하자, 일본의 외교 정책은 변질되었다. 일독이 삼국 군사 동맹에 이어 소련을 추축국 측으로 끌어들여, 일독이소 사국 동맹을 체결하여 미국에 대항하려는 구상이 추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서부 전선에서 독일 및 이탈리아와 교전 상태였던 영국윈스턴 처칠 수상은 독소전쟁 발발 직전에 마쓰오카에게 "독일은 머지않아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약 체결 당시 東京일일신문은 다음과 같은 기대와 평가를 제시했다.[15]

  • 미소 양면 작전 회피
  • 소련의 추축 진영 준(準) 구성원화
  • 중일 전쟁에서 소련의 중립
  • 일독이 연락 루트 확보

4. 조약의 내용

이 조약[9]은 1941년 4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일본 측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와 주소련 일본대사 다테카와 요시쓰구, 소련 측 외무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에 의해 체결되었다. 같은 날, 세 사람은 몽골과 만주국에 관한 선언문에도 서명했다.[2] 소련은 만주국의 영토 보전과 불가침을 존중할 것을 약속했고, 일본은 몽골에 대해서도 같은 약속을 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항내용
제1조양국의 우호 관계 유지 및 상호 영토 보전과 불가침 존중
제2조제3국과의 분쟁 발생 시 중립 의무
제3조조약 유효 기간 5년, 만료 1년 전 파기 통고 없을 시 5년 자동 연장
제4조조약의 조속한 비준



조약과 함께 발표된 선언문에서는 일본이 몽골 인민 공화국의, 소련이 만주국의 영토 보전과 불가침을 존중할 것을 명시하였다.

4. 1. 조약 전문

Договор о нейтралитете между СССР и Японией|소련과 일본 간 중립 조약ru[9]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의와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는 양국 간의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는 염원에 따라, 중립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그 목적을 위해 다음과 같은 대표자들을 임명하였다.

상기 대표자들은 각자의 신임장을 교환하고 그 진정성을 확인한 후,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 '''제1조''': 양 체약국은 서로 간에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상대방 체약국의 영토 보전과 불가침성을 상호 존중한다.
  • '''제2조''': 일방 체약국이 제3국 1개국 이상으로부터 적대 행위의 대상이 되는 경우, 다른 체약국은 분쟁 기간 동안 중립을 지킨다.
  • '''제3조''': 본 조약은 양 체약국이 비준한 날부터 발효되며 5년간 유효하다. 체약국 어느 쪽도 기한 만료 1년 전에 본 조약을 폐기하지 않는 경우, 자동적으로 향후 5년간 연장된다.
  • '''제4조''': 본 조약은 가능한 한 빨리 비준되어야 한다. 비준서는 가능한 한 빨리 도쿄에서 교환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상기 대표자들은 러시아어와 일본어로 작성된 본 조약 2부에 서명하고, 그에 인장을 찍었다.

1941년 4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작성되었으며, 이는 쇼와 16년 4월 13일에 해당한다.[9]

V. 몰로토프;

마쓰오카 요스케;

다테카와 요시쓰구

4. 2. 선언문

Декларацияru[2]

1941년 4월 13일 소련과 일본 간에 체결된 중립 조약의 정신에 따라, 소련 정부와 일본 정부는 양국 간의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를 보장하기 위해, 소련은 만주국의 영토 보전과 불가침을 존중할 것을, 그리고 일본은 몽골 인민 공화국의 영토 보전과 불가침을 존중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모스크바, 1941년 4월 13일

소련 정부를 대표하여


В. Молотов|뱌체슬라프 몰로토프ru

일본 정부를 대표하여


松岡 洋介|마쓰오카 요스케일본어


館川 芳毅|다테카와 요시쓰구일본어[2]

5. 조약의 영향

1941년 후반, 삼국동맹 조인국이었던 일본은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파기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조약을 유지하고 남쪽으로 진출하여 동남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를 침략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모스크바 전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일본의 위협이 없었기에 소련은 시베리아에서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켜 독일군에 맞설 수 있었다.[1]

만약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략했을 가능성이 있다. 싱가포르 전투에서 알려진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은 1942년 7월 만주로 파견되어 침공을 위한 병력을 조직하는 임무를 맡았다.[3]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특정 영토 요구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승인과 맞바꾸어 일본에 대한 전쟁에 참전하는 데 비밀리에 동의했다. 소련의 공세는 유럽 전쟁 종식 후 3개월 이내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당시 소중 불가침 조약을 맺고 중화민국을 지원하던 소련일본과 중립 조약을 체결하자, 중화민국은 이 조약이 소중 불가침 조약과 상반될 수 있다며 반발하기도 했다.[13]

5. 1. 소련에 미친 영향

이 조약으로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일본의 중립을 확보하여 극동 지역의 병력을 서부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특히 모스크바 전투에서 일본의 위협이 사라지자 소련은 시베리아 주둔 병력을 대거 이동시켜 독일군에 맞설 수 있었다.[1]

또한, 미국이 무기대여법에 따라 소련을 지원하는 데 있어서도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1941년 후반, 일본은 삼국동맹의 일원으로서 소련과의 중립 조약을 파기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특히 독일의 소련 침공(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이러한 논의가 있었으나, 일본은 조약을 유지하고 남쪽으로 진출하여 동남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를 침략하는 결정을 내렸다.[3]

만약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략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싱가포르 전투에서 공을 세운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은 1942년 7월 만주로 파견되어 침공을 위한 병력을 조직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3]

5. 2. 일본에 미친 영향

1941년 후반, 삼국동맹 체결국이었던 일본은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파기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조약을 유지하고 대신 남쪽으로 진출하여 동남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를 침략하기로 결정했다.[3] 이 결정은 모스크바 전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일본의 위협이 사라졌기 때문에 소련은 시베리아 주둔 병력을 독일군에 맞서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만약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략했을 가능성이 있다. 싱가포르 전투에서 공을 세운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은 1942년 7월 만주로 파견되어 침공을 위한 병력을 조직하는 임무를 맡았다.[3]

5. 3. 중국의 반발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당시 소중 불가침 조약을 맺고 중화민국을 지원하던 소련일본과 중립 조약을 체결하자, 중화민국은 이 조약이 소중 불가침 조약과 상반될 수 있다며 반발했다.[13] 중화민국은 소련에 일소 중립 조약 제2조를 중일전쟁에 적용하지 않도록 요청했다.[13]

그러나 소련은 중립 조약 체결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과 장제스중경 국민정부 모두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다.

6. 조약 파기

1945년 4월 5일, 소련은 일본 정부에 중립 조약 파기 의사를 통보했다.[4] 소련은 조약 제3조에 따라 조약 만료 1년 전에 파기 통보를 할 권리가 있음을 언급하며, 1941년 4월 13일 조약을 파기하고자 함을 밝혔다. 당시 소련의 표현 방식은 조약의 즉각적인 효력 상실을 원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타임''지는 소련이 곧 일본과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5]

조약문에는 조약이 1946년 4월 13일까지 유효하며, 양측 중 어느 한쪽도 기간 만료 1년 전에 파기 통고를 하지 않으면 자동 연장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사토 나오타케(佐藤尚武) 일본 대사가 이 점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에게 추궁하자, 몰로토프는 조약이 1946년 4월까지 유효함을 확인했다.[6] 그러나 1945년 4월 5일의 파기 통보는 조약이 1946년 4월 13일에 갱신되지 않음을 의미했다.

1945년 5월, 나치 독일의 항복으로 유럽 전선이 종결되자, 얄타 회담의 비밀 합의에 따라 소련의 대일 참전을 위한 3개월의 기간이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9일 자정 직후, 소련은 만주 침공을 개시했고, 약 6시간 후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7] 아시아 본토의 일본군은 준비가 부족하여 빠르게 함락되었고, 소련은 만주국, 몽강(내몽골), 북한 지역을 점령했다.

6. 1. 소련의 입장 변화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ru(소련)은 1941년 6월에 발발한 독소전쟁으로 미국·영국과의 관계를 개선했다.[14] 소련은 중립 조약을 바탕으로 일본에 대한 참전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14]

1942년 1월 1일 소련은 연합국 공동 선언에 서명하였다.[14] 같은 해 8월, 요시프 스탈린은 주소(駐蘇) 대사 W. 애버럴 해리먼에게 처음으로 대일 참전 의사를 표명했다.[14]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도 참전 의사를 표명했다.[14] 그러나, 1944년 9월에는 해리먼에게 "미국·영국에 의한 소련 없는 일본 항복에 동의한다"는 뜻을 전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소련 참전을 강하게 희망했다.[14]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특정 영토 요구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승인과 맞바꾸어 일본에 대한 전쟁에 참전하는 데 비밀리에 동의했다.[4]

소련이 조약을 파기한 배경에는 얄타 회담에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가 비밀리에 약속되었던 것”이 있다. 더 나아가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은 “소련-일본 중립 조약의 유효 기간 중임을 이유로” 미국과 다른 연합국이 소련 정부에 “대일 참전을 요구하는 문서를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16]

이에 대해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소련 수상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에서 연합국이 서명한 모스크바 선언과 “국제연합 헌장 103조·106조” 등을 근거로, “소련의 참전은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제사회를 대신하여 공동 행동을 취하기 위해 다른 강대국과 협력하는 것이며, 국제연합 헌장 103조에 따르면 헌장의 의무가 국제법과 상충하는 경우에는 헌장의 의무가 우선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16][17]

6. 2. 소련의 조약 파기 통고

1945년 4월 5일, 소련은 일본 정부에 1941년 4월 13일에 체결된 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파기한다고 통고했다.[4] 소련은 조약 제3조에 명시된 5년의 조약 기간 만료 1년 전에 파기 통보를 할 권리를 언급하며 파기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소련의 통고는 조약이 즉시 효력을 상실하기를 원한다는 점을 시사했으며, 당시 ''타임''지는 소련 외무인민위원의 어조를 바탕으로 소련이 곧 일본과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5]

조약문에는 조약이 5년간(1946년 4월 13일까지) 유효하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사토 나오타케(佐藤尚武) 일본 대사가 이 점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에게 질문하자, 몰로토프는 조약이 1946년 4월까지 유효할 것이라고 확인했다.[6] 또한 조약에는 "계약 당사자 어느 쪽도 기간 만료 1년 전에 조약을 파기하지 않을 경우, 자동적으로 향후 5년간 연장된 것으로 간주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따라서 1945년 4월 5일에 이루어진 파기 통보는 1946년 4월 13일에 조약이 갱신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련의 조약 파기 통고 배경에는 얄타 회담에서 비밀리에 약속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가 있었다. 또한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은 미국과 다른 연합국에게 소련 정부에 대일 참전을 요구하는 문서를 제시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16]

6. 3.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및 참전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특정 영토 요구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승인을 받는 대가로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했다. 소련의 공세는 유럽 전쟁 종식 후 3개월 이내에 시작될 예정이었다.[3] 1945년 4월 5일, 소련은 일본 정부에 "1941년 4월 13일 조약을 파기하고자 함"을 통보했다.[4]

1945년 5월 8일 또는 9일(시간대에 따라 다름), 나치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전쟁이 종식되었고, 소련이 일본에 대한 적대 행위를 시작하기 위한 3개월간의 비밀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9일, 만주 자정 직후, 소련은 만주를 침공했다(만주 침공).[7]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는 약 6시간 후에 이어졌으며, 모스크바 시간 오후 11시에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에게 전달되었다.[8]

소련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10]

소련의 침공 동안, 아시아 본토에 주둔한 일본군은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비교적 빠르게 함락되었다. 전쟁의 마지막 작전에서 소련은 만주국, 몽강(내몽골)과 북한을 영토로 확보했다.

7. 조약 위반 논란

소련-일본 중립 조약의 실효 시기와 조약 위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중립 조약의 기원은 1931년 만주 사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타케오 이치에 따르면 호사와 켄키치 주프랑스 대사가 다음 해 1월 외무대신 취임을 위한 귀국 도중 모스크바에 들렀을 때 소련 측으로부터 제안이 있었다. 소련은 일본의 공세 앞에 양보하고 제휴를 제안했다. 일본 측도 코민테른 대처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1년 남짓 검토한 결과 소련과 협력하는 것은 공산주의를 수입하는 것과 같다고 판단하여 조약 체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또한, 1930년대에는 일본 국내에서도 반대론이 존재했다.[13]

1939년 9월,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1940년대에 이르러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1937년 발발) 하에 일미 관계와 일영 관계를 비롯하여 미국영국 등과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국교 조정을 위한 정부 간 일미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주소련 대사인 토고 시게노리(후에 도조 내각의 외무대신)는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과의 일독이 삼국 동맹 체결에 반대하고, 오히려 이념 문제 이외의 면에서 국익이 유사한 일소 양국이 연합함으로써 나치 독일, 미국, 중화민국 세 나라를 견제하여 전쟁을 회피하려고 시도하며, 일소 불가침 조약 체결을 모색했다.

그러나 친영미파로 일독이 삼국 동맹 체결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던 요나이 내각(요나이 미쓰마사 수상)이 총사퇴하고 제2차 고노에 내각(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이 발족하여 마쓰오카 요스케외무대신에 취임하자, 구상은 변질되어 일독이 삼국 군사 동맹에 이어 일소 중립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소련을 추축국 측으로 끌어들여, 궁극적으로 일독이소 네 나라에 의한 동맹을 체결하는 유라시아 중심축("일독이소 사국 동맹 구상")으로 미국에 대항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되었다.

처음에 소련은 이에 응하지 않았지만, 독일의 대소 침공 계획을 예견했기 때문에 제안을 수락하고, 1941년 4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조인했다. 조약 체결 당시, 마쓰오카에 따르면 "스탈린은 회담 약 15분 만에 '알겠다(ハラショー)'라고 말해서 일소 중립 조약이 성립했다"고 한다. 신속한 회담의 배경에는 타테가와 요시지 주소련 대사의 노력이 있었다.

소련 측 전권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일본 측 전권은 타테가와 주소련 대사와 마쓰오카 외무대신이 서명했다.[14]

또한, 이 조약 체결에 앞서 이미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서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와 교전 상태였던 영국윈스턴 처칠 수상은 일영 개전 직전에 마쓰오카에게 "독일은 머지않아 독소전쟁으로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소련과 일본 중 어느 쪽이 먼저 조약을 위반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과 견해가 있다.

7. 1. 소련 측의 주장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소련 측은 일본이 다음과 같은 행위를 통해 조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16]

  • 관동군 특수연습(관특연)을 통한 일본의 배신 행위[15]
  • 조약 체결 이후 소련 선박의 항해를 방해한 행위 (일본 측 주장은 소련 측과 평행선을 달림)[15]
  • 독일에게 소련 정보를 넘긴 행위 (소련 역시 미국에게 정보를 넘김)[15]


또한 소련은 "일본의 독일에 대한 조직적인 지원"과 "일본이 소련의 '''동맹국'''인 영국과 미국"에 전쟁을 시작한 점을 들어 중립 조약의 의미가 없어졌다고 주장했다. 즉, 일본의 여러 배신 행위와, 미국 및 영국과의 전쟁 개시로 인해 조약의 의미가 없어졌다는 두 가지 논리로 조약 파기를 설명했다.[15]

소련과 미국, 영국이 "동맹국"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앞서 언급한 독소전쟁을 거쳐,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전쟁을 시작한 직후인 1942년 1월 1일 연합국 공동 선언을 통해서였다. 또한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 전까지 일본 정부에 '''일본이 중립 조약을 위반하고 있다는 항의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7. 2. 일본 측의 주장

일본 정부는 북방영토 문제와 관련하여 소련이 본 조약을 위반하고 일본을 침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8. 조약과 한국

소련-일본 중립 조약은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45년 소련의 일방적인 조약 파기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은 한반도 분단과 한국 전쟁의 비극을 초래한 중요한 역사적 배경으로 작용했다.[4][5][6][7][8]

8. 1. 조약이 한국에 미친 영향

1945년 얄타 회담에서 소련은 일본에 대한 전쟁 참전을 비밀리에 동의했고, 유럽 전쟁 종식 후 3개월 이내에 공세를 시작하기로 했다. 1945년 4월 5일, 소련은 일본과의 조약을 파기했다.[4] 이후 8월 9일, 소련은 만주를 침공하며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군은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빠르게 함락되었고, 소련은 만주국, 몽강(내몽골)과 북한을 영토로 확보했다.

소련의 대일 참전은 한반도 분단과 한국 전쟁 발발의 간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8. 2. 한국의 관점

소련-일본 중립 조약은 1945년 소련이 일방적으로 파기하였고, 이는 한국 현대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조약 파기와 소련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과정은 한반도 분단과 한국 전쟁의 비극을 초래한 중요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식된다.[4][5][6][7][8]

소련은 1945년 4월 5일, 조약 만료 1년 전에 파기 통보를 할 수 있다는 조약 제3조를 근거로 일본에 조약 파기를 통보했다. 이는 소련이 조약의 즉각적인 효력 상실을 원한다는 것을 시사했으며, 당시 언론은 소련이 곧 일본과 전쟁을 벌일 수 있다고 보도했다.

1945년 5월 8일 또는 9일(시간대에 따라 다름), 나치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전쟁이 종식되었고, 소련은 일본에 대한 적대 행위를 시작하기 위한 3개월간의 비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만주 침공을 개시했고, 약 6시간 후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소련의 침공 당시, 아시아 본토에 주둔한 일본군은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비교적 빠르게 함락되었다. 소련은 만주국, 몽강(내몽골)과 북한 지역을 점령했다.

참조

[1] 서적 Diplomacy
[2] 웹사이트 Declaration Regarding Mongolia http://avalon.law.ya[...] 1941-04-13
[3] 서적 The Japanese-Soviet Neutrality Pact: A Diplomatic History, 1941-1945 https://books.google[...] Psychology Press
[4] 웹사이트 Denunciation of the neutrality pact http://avalon.law.ya[...] 1945-04-05
[5] 뉴스 So Sorry, Mr. Sato https://web.archive.[...] Time 1945-04-16
[6] 서적 Racing the Enemy: Stalin, Truman, and the Surrender of Japan Harvard University Press
[7] 웹사이트 Large detailed Time Zones map of the USSR - 1982 https://www.mapsland[...] 2018-04-29
[8] 서적 The Soviet Strategic Offensive in Manchuria, 1945: August Storm https://books.google[...] Frank Cass
[9] 웹사이트 Soviet-Japanese Neutrality Pact http://avalon.law.ya[...] 1941-04-13
[10] 웹사이트 Soviet War Declaration On Japan http://avalon.law.ya[...] 1945-08-08
[11] 간행물 昭和16年外務省告示第23號 https://dl.ndl.go.jp[...] 官報 1941-04-30
[12] 웹사이트 Пакт о нейтралитете между СССР и Японией (1941) https://ria.ru/20160[...] РИА Новости 2016-04-13
[13] 서적 日ソ不可侵条約論を排撃す https://dl.ndl.go.jp[...] 鶴鳴荘出版部
[14] Youtube he Paranoia That Cost Hitler The War | Warlords: Hitler vs Stalin https://www.youtube.[...]
[15] 간행물 日ソ中立条約締結 https://dl.ndl.go.jp[...] 北洋漁業
[16] 서적 暗闘(上) 中央公論新社
[17] 서적 大戦の解剖 読売新聞社
[18] 웹사이트 北方領土問題に関する日露共同作成資料集 https://www.ru.emb-j[...] 日本国外務省・ロシア連邦外務省 1992
[19] 서적 暗闘(上)
[20] 서적 考証 日ソ中立条約 岩波書店
[21] 뉴스 対日宣戦布告時、ソ連が公電遮断 英極秘文書 https://www.sankei.c[...] 2015-08-09
[22] 서적 World War II: A Student Encyclopedia (5 volume set) ABC-CLIO 2005-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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