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순유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순유는 후한 말, 위나라의 조조를 섬긴 인물이다. 동탁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여 투옥되었으나, 동탁 암살로 풀려났다. 이후 조조에게 등용되어 군사로 활약하며, 관도 대전, 여포 토벌 등 주요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조조가 위공에 오르는 것을 도왔으며, 상서령을 역임했으나, 손권 토벌 중 병으로 사망했다. 순유는 뛰어난 통찰력과 전략으로 조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삼국지연의》에서도 조조의 책사로 등장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7년 출생 - 화흠
    후한 말 혼란기에 여러 세력을 거쳐 조조에게 귀순하여 위나라 건국에 공헌, 삼공의 지위에 오른 화흠은 청빈한 삶을 살았다는 평가와 폭거를 저질렀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 157년 출생 - 유요 (삼국지)
    후한 말 혼란을 피해 강남으로 피신하여 양주자사를 지낸 유요는 원술과의 대립, 손책의 침공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태사자 활용 실패와 손권 세력 확장의 빌미 제공 등의 평가를 받는다.
  • 영천 순씨 - 순자
    순자는 전국 시대 조나라 출신의 유학자로, 성악설을 주장하며 예(禮)를 강조했고, 제나라 직하 학궁 학장과 초나라 난릉현감을 지냈으며, 그의 사상은 법치주의와 덕치주의를 아우르는 정치 사상으로 한나라 유교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 영천 순씨 - 순욱
    후한 말 조조를 보좌하여 세력 확장에 기여한 정치가이자 전략가 순욱은 통찰력과 전략적 사고로 조조에게 조언을 제공하고 수많은 인재를 천거했으나, 위공이 되려는 조조에 반대하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 214년 사망 - 괴월
    괴월은 후한 말 유표를 섬기며 형주 통일에 기여하고 조조에게 항복하여 광록훈이 된 인물이다.
  • 214년 사망 - 방통
    방통은 촉한의 군사로 유비의 익주 평정에 기여했으며, 낙성 전투에서 전사하여 정후의 시호를 받았다.
순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荀攸
荀攸
이름荀攸 순유
자(字)公達 공달
시호敬侯 경후
작위陵樹亭侯 능수정후
관직
벼슬中軍師 중군사
尚書令 상서령
임기 시작213년
임기 종료214년
군주헌제
재상조조
직책尚書 상서
임기 시작 시점196년
임기 종료 시점불명
생애
출생157년
사망기원후 214년 9월 (57세)
가족 관계
아버지荀彝 순이
자녀荀緝 순집
荀適 순적
최소 1명 이상의 아들
기타 정보
소속何進 하진
曹操 조조
직업정치가, 조언가
출신지예주영천군 영음현

2. 생애

순유는 처음에 동탁을 섬겼으나, 동탁의 폭정에 분노하여 그를 암살하려다 발각되어 투옥되었다. 하지만 왕윤이 동탁을 암살하면서 풀려났다.[13] 이후 촉군 태수가 되려 했으나, 길이 막혀 형주에 머물렀다.[15] 196년,[16] 헌제를 맞이한 조조에게 초빙되어 그의 군사(軍師)로서 주요 전투에 참여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레이프 드 크레스피니는 이 군사라는 직책을 참모장 역할로 규정했다.[20]

여포 토벌, 관도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백마 전투에서는 원소군의 문추를 죽이는 공을 세웠다.[31] 곽가 사후에는 조조의 최측근으로 신임을 받았다.[23] 적벽 전투에서는 화공을 경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조조군은 대패했다.

214년,[44] 조조의 나라 공격에 종군하던 중 병으로 쓰러져 진중에서 사망했다.[45] 조조는 순유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다.[45] 순유는 겸손하고 친절한 성품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종요와는 절친한 사이였다.[22]

2. 1. 초기 생애와 경력

영천 순씨 가문에서 태어난 순유는 광릉군 태수를 지낸 할아버지 순담과 아버지 순이(荀彝) 사이에서 태어났다. 순유는 순욱의 재종질(再從姪)이 된다.[5][6][7][8]

어려서 부모를 잃은 순유는 숙부 순구(荀衢) 슬하에서 자랐다. 순유가 13살 때, 전 하급 관리였던 장권이 순담의 묘지기를 자청했다. 순유는 이를 의심하여 순구에게 알렸고, 조사 결과 장권은 살인 후 도망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순유의 비범함이 드러났다.[9] 순유가 6~7살 때 순구가 술에 취해 실수로 순유를 다치게 한 적이 있었는데, 이후 순유는 숙부와 마주치지 않도록 행동하여 순구를 놀라게 했다.[10]

189년, 대장군 하진이 소제의 섭정이 되어 명사들을 초빙할 때, 순유는 황문시랑으로 등용되었다.[11][12] 그러나 하진이 환관 세력에 암살당하고 동탁이 권력을 잡자, 순유는 정태, 하옹, 종집, 오경 등과 동탁 암살을 계획했다. 발각 후 투옥되었으나, 동탁이 왕윤에게 암살되면서 풀려났다.[13]위서》에는 순유가 동탁을 설득하여 석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4]

이후 순유는 임성국 재상 자리를 거절하고 촉군 태수를 희망했으나, 교통로가 끊겨 형주에 머물렀다.[15]

2. 2.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196년,[16] 조조가 헌제를 장악하여 허도(현재의 쉬창, 허난성)로 데려와 그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면서 순유를 초빙했다. 조조는 순유를 여남군의 태수로 임명했고, 198년에는[17] 수도로 소환하여 상서로 근무하게 했다. 조조는 순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군사()[18]로 삼고, 항상 곁에 두며 자문을 구했다.[19] 레이프 드 크레스피니는 이 직책을 참모장 역할로 규정했다.[20] 순유는 조조의 주요 고문 중 한 명이 되었으며,[21] 종요와 가까워졌고,[22] 또 다른 주요 고문인 젊은 곽가와 긴밀하게 협력했다.[23]

198년, 조조가 장수를 공격하려 하자 순유는 유표와의 관계를 언급하며 반대했다. 순유는 장수와 유표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유표에게 보급을 의존하는 장수를 돕지 않으면 둘의 사이가 틀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조조는 순유의 조언을 무시하고 장수를 공격했고, 유표가 장수를 지원하여 조조는 패배했다.[25]

같은 해, 조조는 서주여포를 공격하려 했다. 순유는 장수와 유표가 최근 승리에서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며, 여포는 강력하지만 원술의 지원을 받고 있어 지금 공격하면 패배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26][27]

하비 전투에서 조조는 여포를 하비군(현재의 피저우, 장쑤성 남부)으로 후퇴시켰다. 조조가 철수를 고려하자 순유와 곽가는 여포 군대의 사기가 낮고, 참모 진궁은 지능적이지만 느리다는 점을 들어 공격을 계속할 것을 조언했다. 조조는 이수의 물길을 돌려 하비를 침수시켰고,[28] 여포는 항복하여 처형되었다.[29]

200년,[30] 조조와 원소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백마 전투에서 순유는 조조에게 안량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제안했다. 황하를 건너 원소의 후방을 공격하는 척하며 백마로 병력을 이끄는 것이었다. 원소는 이 계략에 빠졌고 안량은 관우에게 죽었다. 연진 전투에서는 조조가 매복을 준비했고, 순유는 적을 사로잡을 기회라며 후퇴를 반대했다. 원소의 군사들이 짐을 챙기는 동안 조조는 공격하여 문추를 죽였다.[31]

관도에서 양측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조조 군이 물자 부족에 시달리자, 순유는 원소의 보급품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순유는 서황에게 한순(韓𦳣)을 공격하도록 권했고, 조조는 서황과 사환을 보내 보급품을 불태웠다.[34] 원소의 고문 서유가 투항하여 순유를 공격하도록 촉구했을 때, 순유와 가후만이 조조에게 서유의 제안을 따르라고 조언했다. 조조는 순유와 조홍에게 본진을 지키게 하고 오소를 공격하여 원소의 보급품을 파괴했다. 원소의 장군 장합과 고람(高覽|고람중국어)이 항복을 요청했을 때, 조홍은 의심했지만 순유는 조홍에게 그들을 받아들이라고 말했다.[35]

202년 원소가 사망한 후, 조조는 원소의 아들들 원담원상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다. 203년, 조조가 유표를 공격하려 할 때, 원담이 항복하고 조조의 지원을 구했다. 순유는 유표보다 원 형제의 내부 분쟁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조조는 원담의 항복을 받아들였고, 205년 남피 전투에서 원담이 패하고 사망했다.[36]

기주를 평정한 후, 조조는 헌제에게 순유의 공적을 기리는 상주문을 올렸고,[37] 순유는 능수정후로 봉해졌다. 207년, 조조는 순유를 칭찬하며 후작령에서 400호의 조세를 추가로 받게 했고, 중군사로 재임명했다.[38] 《위서》에 따르면 조조는 유성(현재 랴오닝성조양시 남서쪽)에서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후 순유의 저택을 방문하여 한 고조가 장량에게 한 것처럼 포상하겠다고 약속했다.[39]

213년,[40] 순유는 헌제에게 조조를 위공으로 봉할 것을 요청하는 상주문의 대표자였다.[41] 순유는 사망한 순욱을 대신하여 상서령으로 임명되었다.[42][43] 214년,[44] 순유는 조조와 함께 손권을 상대로 한 원정에 동행했지만, 도중에 병으로 사망했다. 조조는 순유의 사망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45]

2. 3. 성품과 평가

순유는 속을 잘 감추는 매우 심오하고 통찰력 있는 사상가로 알려져 있었다.[49] 그는 조조와 군사 작전을 함께 하면서 조조가 전략 계획을 세우고 발전시키는 데 종종 도움을 주었다. 그의 가족과 친척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생각이나 그가 한 말을 거의 알지 못했다.[49] 『위서(魏書)』에는 순유의 외사촌 신도(辛韜)가 순유에게 조조에게 기주를 공격하도록 권유한 이유를 묻자, 순유는 "원담을 대신하여 신비가 항복하러 왔으니, 조정 군대가 그곳에 가서 평정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제가 어찌 그 이유를 알겠습니까?"라고 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신도와 다른 사람들은 국가 및 군사 문제에 대해 순유에게 다시 묻는 것을 두려워했다.[50]

조조는 순유를 칭찬하며 "공달(순유)은 총명하지만 어리석어 보이고, 용감하지만 비겁해 보이며, 굳건하지만 약해 보인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거나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만큼 총명할 수는 있지만, 그처럼 어리석은 척할 수는 없다. 심지어 안회와 녕무자도 그와 비교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조비가 조조의 후계자였을 때, 조조는 조비에게 "순공달(순유)은 사람들의 모범이다. 그를 정중하고 존경스럽게 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순유가 병에 걸렸을 때 조비는 그를 방문하여 그의 침대 곁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순유를 존경했다.[51] 종요 또한 "내가 어떤 일을 계획할 때마다, 나는 더 이상 변경할 수 없다고 확신할 때까지 그것을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러나 공달과 상의한 후에는 항상 새로운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51]

『위서(魏書)』에는 조조가 "나는 순공다(순유)와 20년 이상 함께했다. 그에게서 아무런 잘못도 찾을 수 없다"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그는 또한 "순공달은 진실로 덕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온화하고, 정직하고, 예의 바르고, 절제하며, 상냥하고,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다'라는 말에 부합한다. 그는 공자가 이 구절에서 묘사한 바로 그 사람이다. '안영은 친교를 유지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아는 사이가 오래될지라도 처음과 같은 존경을 보였다'"라고 칭찬했다.[53]

『순유별전(荀彧別傳)』에는 조조가 순욱과 순유의 인재에 대한 훌륭한 판단력을 칭찬하며 "두 순씨는 사람에 대한 판단에 더욱 신뢰를 얻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54][55]

『부자(傅子)』에는 순유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누군가가 그 시대에 덕이 있는 군자가 있는지 질문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그는 "군수 순욱의 자비와 군사 참모 순유의 지혜는 그들이 우리 시대의 덕이 있는 군자로 불릴 자격이 있게 한다. 군수 순욱은 자비롭고 덕이 있으며, 인재를 추천하는 데 지혜를 보여주고, 그의 개인적인 행동은 흠잡을 데 없으며, 변화에 맞춰 그의 전략을 적용할 수 있다. 맹자는 '진정한 왕은 500년 만에 나타나야 하며, 그 기간 동안 그 시대에 빛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군수 순욱은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이다. 조조가 말했듯이 '군수 순욱은 조언을 제공하고 조언을 멈추지 않으며, 군사 참모 순유는 악을 제거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라는 답변을 받았다.[56]

순욱의 아들 순찬은 순유를 아버지보다 "외부에 관심이 없고, 완전히 신중하고 은둔적인 사람"으로 여겼다.[59]

삼국지』에서 순유의 전기를 쓴 진수는 "순유와 가후는 전략에 매우 세심했으며 이전에 잘못 계산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적응력과 유연성 측면에서 그들은 장량진평에 미치지 못했다."라고 평가했다.[61] 배송지는 순유의 도덕성이 가후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느꼈고, 따라서 진수가 그들을 함께 배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63]

3. 《삼국지연의》에서의 순유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순유는 조조의 책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여포 토벌, 관도 대전 등 주요 전투에서 다양한 계책을 제시하여 조조의 승리에 기여한다.[66][67]

조조가 여포를 공격하려 할 때, 유표와 장수에게 배후를 공격당할 것을 걱정하자, 순유는 "둘은 패배한 지 얼마 안 되어 움직일 수 없고, 여포가 원술과 손을 잡으면 급하게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라고 진언하였다. 곽가도 "여포가 인심을 얻기 전에 급히 공격해야 합니다."라고 의견을 제시하여 조조는 즉시 군사를 움직였다. 전투가 길어지자 조조는 다시 군웅들의 동향이 신경 쓰여 허도로 돌아가려 했다. 순유는 "여포의 날카로움은 이미 꺾였고, 진궁의 계략이 결정되기 전에 공격하면 생포할 수 있습니다."라고 조조를 제지했고, 곽가의 계략도 있어서 여포를 사로잡을 수 있었다.

관도 대전에서 조조가 문추와의 전투에서 물자를 미끼로 삼았을 때, 순유는 유일하게 그 계략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후에 조조에게 칭찬을 받았다. 또한, 원소군의 한맹이 군량을 수송한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순유는 식량을 끊을 장수로 서황을 추천하여 그 군량을 모두 불태우게 했다. 마지막에는 "한 부대의 군세는 산조를 공격하여 업군을 공격하고, 다른 한 부대는 여양을 공략하여 원소군의 귀로를 끊는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원소가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려 움직이기 시작하는 틈을 노린다"라는 순유의 책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일련의 전투를 완승으로 마무리했다.

원소 사후, 원상과의 후계자 다툼에서 패배한 원담이 항복을 신청했을 때, 궁지에 몰려 항복해 온 원담을 믿을 수 없고, 또한 유표를 버려두고서까지 구원할 필요는 없다고 모두가 반대하는 가운데, 순유는 "유표에게 천하를 노리는 뜻이 없고, 한편 원상과 원담이 화목하면 천하의 앞날은 더 이상 알 수 없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원상을 제거하고, 후에 원담마저 멸망시키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라고 반론하여 조조를 기쁘게 했다.

악진 등이 병주에서 고간이 지키는 호관구를 함락시키지 못하자, 순유는 여광, 여상을 이용한 위장 항복을 헌책하여, 성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적벽 대전 이후부터는 책략에 뛰어난 면모를 보이지 못하고, 채중, 채화의 위장 항복은 오히려 주유의 고육계에 이용되었고, 또한 남정의 우려 사항인 마등을 도읍으로 유인하여 죽이지만, 그로 인해 거병한 마초의 진격으로 결국 남정은 중지된다.

214년, 순유는 조조가 위왕(魏王)이 되는 것을 반대하여 조조의 노여움을 사, 근심하고 분노하여 병이 들어, 58세로 사망했다. 정사(正史)에서는 조조가 왕이 되는 것에 반대한 사실은 없다.[68]

4. 저서

《위관의》 1권이 있었다. 양나라 때까지 전해졌으나, 수나라 때 이미 소실되었다.[71]

5. 가족 관계

영천 순씨 가문 출신으로, 할아버지 순담(荀曇중국어)은 광릉군 태수를 지냈다.[6] 아버지 순이(荀彝중국어)는 군급 종사를 지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7][8] 숙부는 순구(荀衢중국어)이다.[9]

순유는 순욱의 재종질(再從姪)로, 순욱보다 6살 많았지만 항렬로는 조카뻘이었다.[7][8] 순유의 증조부는 순숙의 형이다.

순유는 적어도 세 아들을 두었다.[64] 장남 순집(荀緝중국어)은 성격이 아버지와 닮았지만 일찍 죽었다. 차남 순적(荀適중국어)은 아버지의 작위인 "릉수정후"(陵樹亭侯)를 물려받았지만, 아들이 없었다. 순유의 손자 순표(荀彪중국어)는 "릉수정후" 작위를 물려받았고, 이후 "구양정후"(丘陽亭侯)로 작위가 변경되었다.[64]

관계이름비고
할아버지순담(荀曇중국어)광릉군 태수 역임[6]
아버지순이(荀彝중국어)군급 종사[7]
숙부순구(荀衢중국어)[9]
아들순집(荀緝중국어)아버지와 성격이 닮았으나 요절
아들순적(荀適중국어)릉수정후(陵樹亭侯) 작위 계승, 아들이 없어 대가 끊김
손자순표(荀彪중국어)릉수정후(陵樹亭侯) → 구양정후(丘陽亭侯) 작위 변경[64]
재종형제순욱(荀彧중국어)순유보다 6살 어리지만 항렬상 숙부[7][8]


참조

[1] 책 Wei Shu
[2] 서적 Sino-Asiatica: Papers dedicated to Professor Liu Ts'un-yan on the occasion of the eighty-fifth birthday
[3] 책 Sanguozhi vol.10.
[4]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Brill
[5] 책 Sanguozhi
[6] 책 Sanguozhi
[7] 책 Xun Shi Jia Zhuan and Han Ji
[8] 책 Wei Shu
[9] 책 Sanguozhi
[10] 책 Wei Shu
[11] 책 Xie Cheng annotation in Sanguozhi vol.13
[12] 서적 To Establish Peace Being the Chronicle of Later Han for the years 189 to 220 AD as recorded in Chapters 59 to 69 of the Zizhi tongjian of Sima Guang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13] 책 Sanguozhi
[14] 책 Wei Shu
[15] 책 Sanguozhi
[16] 책 Zizhi Tongjian
[17] 책 Sanguozhi
[18] 책 Sanguozhi
[19] 책 Sanguozhi
[20] 서적 Imperial Warlord: 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Brill
[21] 서적 Imperial Warlord: 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Brill
[22] 책 Sanguozhi
[23]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Brill
[24] 서적 Xun Xu and the Politics of Precision in Third-Century AD China Brill
[25] 책 Sanguozhi
[26] 책 Wei Shu
[27]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23–220 AD Brill
[28] 서적 T'sao T'sao and the Rise of Wei: The Early Years
[29] 책 Sanguozhi
[30] 책 Zizhi Tongjian
[31] 책 Sanguozhi
[32] 책 Sanguozhi
[33] 책 Sanguozhi
[34] 서적 T'sao T'sao and the Rise of Wei: The Early Years
[35] 책 Sanguozhi
[36] 서적 Sanguozhi vol. 10
[37] 서적 Sanguozhi vol.10
[38] 서적 Sanguozhi vol. 10
[39]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0
[40] 서적 Zizhi Tongjian vol. 66
[41] 서적 Weishu in Sanguozhi vol.1
[42] 서적 Sanguozhi vol. 10
[43] 간행물 A Question of Loyalty: Xun Yu, Cao Cao and Sima Guang https://openresearch[...] 2002
[44] 서적 Zizhi Tongjian vol. 67
[45] 서적 Sanguozhi vol. 10
[46] 문서 gui'mao day of the 11th month of the 5th year of the Zheng'shi era
[47] 서적 Sanguozhi vol. 10
[48] 서적 Sanguozhi vol.4
[49] 서적 Sanguozhi vol. 10
[50]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0
[51] 서적 Sanguozhi vol. 10
[52] 서적 Pei Songzhi's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0
[53]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0
[54] 서적 A Question of Loyalty: Xun Yu, Cao Cao and Sima Guang
[55] 서적 Xun Yu Bie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0
[56] 서적 Fu Z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0
[57] 서적 Xun Xu and the Politics of Precision in Third-Century AD China Brill
[58] 서적 Jinshu vol.39
[59] 서적 Xun Can Zhuan annotation from Sanguozhi vol. 10
[60] 서적 Xun Xu and the Politics of Precision in Third-Century AD China Brill
[61] 서적 Sanguozhi vol. 10
[62] 서적 Sanguozhi vol.14
[63] 서적 Sanguozhi vol.10
[64] 서적 Sanguozhi vol. 10
[65] 문서 『魏書』では、董卓の説得に成功して助かったとする。
[66] 문서 『[[通典]]』「魏では荀攸を軍師とし、軍事・国政・人事・裁判・法制を決裁させた」
[67] 문서 『三国志』魏志「武帝紀」の叙述では、曹操は士卒が疲弊していたので退却しようとしたが、荀攸と郭嘉の水計を採用し、下邳城を水攻めしたとされる。
[68] 문서 正始4年(243年)秋7月の時点では洩れていたが、正始5年(244年)冬11月の詔勅で追加された。
[69] 문서 名臣20選には、[[荀彧]]、'''荀攸'''、[[袁渙]]、[[崔琰]]、[[徐邈]]、[[陳羣]]、[[夏侯玄]]、[[王経]]、[[陳泰]](以上[[魏 (三国)|魏]])、[[諸葛亮]]、[[龐統]]、[[蔣琬]]、[[黄権]](以上[[蜀漢|蜀]])、[[周瑜]]、[[張昭]]、[[魯粛]]、[[諸葛瑾]]、[[陸遜]]、[[顧雍]]、[[虞翻]](以上[[呉 (三国)|呉]])を選出している
[70] 문서 荀攸は「公達潛朗 思同蓍蔡 運用無方 動攝群會 爰初發跡 遘此顛沛 神情玄定 處之彌泰 愔愔幕裏 筭無不經 亹亹通韻 跡不暫停 雖懷尺璧 顧哂連城 知能拯物 愚足全生」と謳われている
[71] 서적 경적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