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요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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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요는 동래군 무평현 출신으로, 한나라 황족의 후손이자 명문가 출신이다. 18세에 숙부를 구출하여 명성을 얻고,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섰다. 양주 자사로 임명되었으나 원술과 대립하며 강남에서 손책과 싸웠다. 손책의 침공으로 예장으로 도피했으나, 예장 태수 분쟁에 휘말려 자융과 싸우다 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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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 혼란기에 여러 세력을 거쳐 조조에게 귀순하여 위나라 건국에 공헌, 삼공의 지위에 오른 화흠은 청빈한 삶을 살았다는 평가와 폭거를 저질렀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 157년 출생 - 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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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은 후한 시대의 인물로, 양주 자사 유요를 섬기며 194년 원술에 대항하여 방어전을 펼쳤으나 손책에게 패배하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손책과의 전투에서 사망한다. - 유요와 주변 인물 - 태사자
태사자는 후한 말기의 무장으로, 자는 자의이며,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뛰어난 무예와 용맹을 떨쳤으며, 공융을 구원하고 손책에게 귀순하여 그의 휘하에서 활약하다 손책 사후에는 손권 밑에서 오나라의 장수로 공을 세웠다.
| 유요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인물 정보 | |
| 이름 | 유요 |
| 본관 | 청주 동래군 모평현 |
| 자(字) | 정례(正禮) |
| 출생 | 157년 |
| 사망 | 198년 (향년 41세) |
| 사망 장소 | 양주 예장군 난창 |
| 직업 | 정치가, 군벌 |
| 가족 관계 | |
| 형 | 유대 |
| 숙부 | 유총 |
| 아버지 | 유우 |
| 자녀 | 유기 유삭 유상 |
| 관직 및 직위 | |
| 양주자사 | 194년 ~ 195년 |
| 양주목 | 195년 ~ 198년 |
| 진무장군 | 195년 ~ 198년 |
| 주군 | 영제 → 소제 변 → 헌제 |
| 생애 및 활동 | |
| 주요 활동 | 손책의 강동 평정에 저항 |
| 기타 정보 | |
| 적대 세력 | 원술 손책 |
2. 생애
유요는 동래군 무평현 사람으로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의 조상은 한 고조 유방의 장남인 유비의 아들 유강려였다.[2] 할아버지 유본은 뛰어난 유교 학자였고, 아버지 유여는 산양군 태수를 지냈다.[3] 숙부 유총은 169년에 태위를 지냈다.[4][5][6] 형 유대는 시중을 지내고 연주자사를 역임했다.[7]
19세 때 도적에게 잡힌 숙부를 구출하여 명성을 얻었고, 효렴에 추천되어 낭중이 되었다. 하읍현령이 되었지만, 왕실 혈통을 이용하려는 태수의 청탁을 받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주에서 초빙되어 제남군 위가 되었고, 제남군 상이 중상시의 아들로 뇌물로 사욕을 채우자 상소를 올려 파면시켰다. 평원 도구홍은 주의 자사에게 유요를 무재로 추천했다. 사공의 속관으로 초빙되어 시어사에 임명될 뻔했으나, 사퇴하고 강남으로 피난했다.
조칙에 따라 양주자사로 임명되었으나, 당시 양주는 수춘의 원술이 점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곡아를 본거지로 삼았다. 처음에는 오경과 손분을 지지했지만, 원술이 양주 지배를 위해 육강을 공격하자, 번능과 장영을 시켜 오경과 손분을 추방했다. 원술은 새로운 양주 자사를 임명하여 유요를 공격했지만, 1년이 지나도 격파하지 못했다. 조정은 유요에게 양주목·진무장군의 관직을 더했고, 유요는 수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게 되었다. 유요 밑에는 태사자, 손소, 시의, 허소, 설례, 착융 등이 모여 있었다.
195년, 손책이 원술의 후원을 받아 쳐들어와 장영과 번능을 격파하고 우저의 군영을 빼앗아 유요를 크게 패배시켰다. 말릉의 설례와 착융도 패배했고, 우저도 함락되었다. 유요 측 거점은 잇따라 함락되었고, 유요는 곡아를 지킬 수 없게 되어 왕랑에게 의지하여 회계로 도망치려 했지만, 허소의 권유로 예장으로 도망쳐 조조나 유표의 원조를 기대하며 팽택에 주둔했다.
예장태수 자리를 놓고 제갈현과 주호(주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자, 유요는 주호를 지지했다. 197년 정월, 착융에게 명령하여 제갈현을 살해하고 주호를 태수 자리에 앉혔으나, 착융이 주호를 살해하고 예장에서 난폭하게 굴자, 싸워서 쫓아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했다. 42세였다.
손책은 허공과 왕랑을 격파하고 강동을 제패했으며, 원술로부터 자립한 후 강하의 황조를 치기 위해 원정을 갔는데, 그 귀로에 예장에 들러 유요의 관을 찾아 유족에게 돌려주고 후하게 대접했다. 왕랑은 손책에게 편지를 보내 유요가 손씨 일족과 적대하게 된 것은 원술을 둘러싼 오해 때문이었으니 유족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고 권했다.
제갈량은 훗날 '출사표'에서 손씨에게 강동을 석권하게 한 인물로 왕랑과 함께 유요를 지목하여 비판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한나라 제효왕(齊孝王) 유장려의 아들 모평공후(牟平共侯) 유설(劉渫)의 가계로, 백부 유총(劉寵)은 태위에 오르기도 했다. 19세 때 도적에게 붙잡힌 숙부 유위(劉韙)를 구출하여 명성을 얻었다.[8] 이후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郞中)이 되었으며, 양국 하읍현장(下邑縣長)으로 재직 중 태수의 청탁을 받자 관직을 버렸다.[9] 주의 부름을 받아 제남종사(部濟南從事)로 일했다. 제남국상이 중상시(中常侍)의 아들이었는데 탐욕스러웠으므로 이를 보고해 파면시켰다.[10] 형 유대를 추천했던 도구홍에게 무재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사공연(司空掾)으로 초빙되어 시어사(侍御史)를 제수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11]2. 2. 양주자사 부임과 원술과의 대립
193년(초평 4년) 혹은 194년(흥평 원년), 하비국 회포현(淮浦縣)에서 난을 피해 양주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회남 일대는 원술이 점거하고 있어 부임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장강을 건넜다. 원술이 임명한 단양태수 오경과 단양도위(丹楊都尉) 손분의 안내를 받아 오군 곡아현(曲阿縣)에 치소를 두었다.
194년,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며 손책을 시켜 여강태수 육강을 공격하자, 유요는 오경과 손분을 쫓아냈다. 오경과 손분은 구강군 역양현(歷陽縣)으로 물러났고, 유요는 횡강진(橫江津)에 번능과 우미를, 당리구(當利口)엔 장영을 주둔시켜 원술에 대항하였다. 원술은 낭야국 사람 혜구(惠衢)를 양주자사로, 오경을 독군중랑장(督軍中郞將)으로 삼아 손분과 함께 장영 등을 공격하게 했다.[26] 번능 등은 1년여 동안 원술 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조정은 유요에게 양주목(揚州牧)에 진무장군(振武將軍) 혹은 진위장군(振威將軍)[27]을 더하고 수만의 병졸도 지원했다.
195년,[28] 손책이 오경과 손분에게 합류해 장영과 번능 등을 격파하고 장강을 건너와 우저(牛渚)까지 확보하며 단양군을 침범하였다.
2. 3. 손책의 침공과 예장으로의 도피
195년,[28] 손책이 오경과 손분에게 합류해 장영과 번능 등을 격파하고 장강을 건너와 우저까지 확보하며 단양군을 침범하였다. 유요를 의지하고 있던 팽성상 설례가 말릉성(秣陵城)을, 하비상 착융이 그 남쪽을 방어했지만 고전하였다. 설례, 번능, 우미가 우저를 잠시 탈환했다가 도로 빼앗겼다. 착융은 손책이 죽었다는 잘못된 정보 때문에 우자를 보내 손책을 타격했다가 손실을 입고는 성의 수비에만 치중하였다. 손책은 이를 내버려 둔 채 매릉(梅陵)[29]에서 유요의 별장(別將)을 쳐부수고 호숙현(湖孰縣)과 강승현(江乘縣)을 함락하였다.[30] 유요는 오군 단도현(丹徒縣)으로 퇴각하였다.회계군으로 달아나고자 했다. 허소(허자장)가 진언하기를, “회계는 부유하고 실해 손책이 탐하며 바닷가 구석 끝이라 좋지 않습니다. 예장군은 서쪽으로 형주와 접하고 북쪽으로 예주와 연결됩니다. 그 길목을 원술이 차지하고 있더라도 승냥이나 이리와 같아[豺狼]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족하는 왕명을 받았으니 조조와 유표가 반드시 구제해줄 것입니다.”라 하므로 그렇게 하였다.[31] 당초 허소의 비웃음을 살까 중용하지 않았던 태사자는 단양군 무호현(蕪湖縣)으로 떨어져 나가 그 태수를 자칭하였다.[32]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예장군 팽택현(彭澤縣)에 머물렀다. 당시 예장은 원술[33] 혹은 유표가 임명한 태수 제갈현과 조정이 임명한 태수 주호(주호)가 대립하고 있었다. 유요는 주호를 후원해 착융으로 하여금 제갈현을 치게 했다. 허소가 ‘착융은 명분을 돌아보는 사람이 아닌 반면 주문명(朱文明)은 사람을 잘 믿으니 마땅히 주의하게 해야 한다’고 했는데 과연 착융이 주호를 죽이고 예장을 장악하였다.[34] 유요는 착융과 싸워 한 번은 졌다가 무찔렀다.
2. 4. 예장 태수 분쟁과 죽음
허소는 회계군은 부유하고 실해 손책이 탐을 내고 있으며 바닷가 구석 끝이라 좋지 않다고 말하며, 예장군은 서쪽으로 형주와 접하고 북쪽으로 예주와 연결되므로 조조와 유표가 반드시 구제해줄 것이라 진언했다. 유요는 그의 의견을 따랐다.[31]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예장군 팽택현(彭澤縣)에 머물렀다. 당시 예장은 원술[33] 혹은 유표가 임명한 태수 제갈현과 조정이 임명한 태수 주호(朱晧)가 대립하고 있었다. 유요는 주호를 후원해 착융으로 하여금 제갈현을 치게 했다. 허소는 ‘착융은 명분을 돌아보는 사람이 아닌 반면 주문명(주호)은 사람을 잘 믿으니 마땅히 주의하게 해야 한다’고 했는데 과연 착융이 주호를 죽이고 예장을 장악하였다.[34] 유요는 착융과 싸워 한 번은 졌다가 무찔렀다. 198년(건안 3년),[35] 병이 들어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평가
도구홍은 유대와 유요 형제를 연달아 추천하며 '두 마리 용을 거느리고 먼 길을 가거나 기기(騏驥)를 부려 천 리를 달리는 격'이라고 말하였다.[37] 진수는 '명예와 품행을 갈고 닦았고 선악의 분별을 소중히 했으나 혼란한 시기에 만 리 땅을 지키는 것은 장기가 아니었다.'고 평하였다.[37] 제갈량의 후출사표에는 '유요와 왕랑은 주군에 웅거하며 안위를 논함에 있어 걸핏하면 성인(聖人)을 인용했지만 의심과 근심이 가득해 이 해에도 저 해에도 싸우지 않고 손책이 커지는 것을 좌시해 강동을 병합당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위작이라는 견해가 많다.[37]
199년, 손책이 강하군(강하군중국어)을 공격하러 가는 길에 예장군을 지나면서 유요의 유해를 수습하여 정식으로 장례를 치러주고 유요의 가족을 후하게 대우했다.[20]
왕랑은 손책에게 편지를 보내 유요와 손책의 가문이 원술과의 갈등이 시작되기 전에는 사이가 좋았으며, 당시 손책이 원술의 동맹이었기 때문에 유요와 대립하게 되었음을 설명했다.[21] 그는 유요가 예장군에 정착한 후 손책과 우호적인 관계를 재건하고 싶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고 후회하며 죽었다고 전했다.[21] 또한 유요를 위한 정중한 장례를 치른 손책의 호의를 칭찬하며 유요의 장남을 잘 대우해줄 것을 조언했다.[21]
4. 가계
5. 《삼국지연의》에서의 유요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유요는 손책에 항전하는 양주자사로서 제15회에만 등장한다. 태사자와 장영이 우저 방위를 자원하는데, 유요는 태사자가 어리다며 장영을 택했지만 장영은 패주해온다. 유요는 장영을 참하려다 모사인 착융과 설례의 만류에 그만둔다. 직접 군을 이끌고 신정(神亭)에서 손책과 격돌하지만, 그 사이 주유가 곡아를 탈취하는 바람에 말릉으로 철수하는데 손책의 습격에 큰 피해를 입는다. 손책이 말릉으로 진격하자 유요와 착융은 우저를 수복한다. 되돌아온 손책에게 우미와 번능을 잃는 등 대패하여 유표에게 의탁하고자 예장으로 도주한다. 이후로는 제97회에 제갈량의 후출사표에서 언급되는 것 말고는 출현하지 않는다.[1]
유요는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의 조연으로, 후한 말과 삼국 시대의 사건들을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제15장에 등장하며, 강남 지역의 무능한 군벌로 묘사된다. 그는 다른 두 강동 군벌인 왕랑과 엄백호와 동맹을 맺어 군벌 손책의 침략에 맞선다. 유요 휘하의 무장 태사자는 손책에게 사로잡혔는데, 손책은 그를 존경심으로 대했고 결국 그를 설득하여 투항하게 만들었다. 손책은 결국 전투에서 유요를 격파하고 그의 영토를 차지했으며, 유요는 예장군으로 도망쳤다.[2]
6. 섬긴 사람들
| 섬긴 사람들 |
|---|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Sanguozhi
[3]
서적
Xu Han Shu
[4]
문서
not the same person as [[Liu Chong (Prince Min of Chen)|Prince Min of Chen]]
[5]
서적
Sanguozhi
[6]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7]
서적
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Zizhi Tongjian
[13]
서적
Sanguozhi
[14]
서적
Sanguozhi
[15]
서적
Sanguozhi
[16]
서적
Han Ji
[17]
서적
Sanguozhi
[18]
서적
Xiandi Chunqiu
[19]
서적
Sanguozhi
[20]
서적
Sanguozhi
[21]
서적
Sanguozhi
[22]
서적
Sanguozhi
[23]
서적
Sanguozhi
[24]
서적
《삼국지》
[25]
서적
《삼국지》
[26]
서적
《삼국지》
[27]
서적
《[[후한서]]》
[28]
서적
《후한기》
[29]
문서
해릉(海陵)은 오기이다.
[30]
서적
《강표전》
[31]
서적
《후한기》
[32]
서적
《삼국지》
[33]
서적
《삼국지》
[34]
서적
《헌제춘추》
[35]
서적
《[[자치통감]]》
[36]
서적
자치통감
[37]
서적
한진춘추
[38]
서적
속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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