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노 (항공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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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나노는 1939년 제4차 해군 군비 확충 계획에 따라 건조된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이다. 원래 야마토급 전함으로 건조가 시작되었으나, 미드웨이 해전 이후 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다. 1944년 11월 취역했지만, 구레로 이동하던 중 미국 잠수함 아처피시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시나노는 구조적 결함과 미흡한 준비로 인해 짧은 운용 기간을 가졌으며, 일본 해군의 패배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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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노 (항공모함) - [배(Ship)]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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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우현으로 기울어져 있다. | |
함종 | 항공모함 |
함명 유래 | 시나노 국 |
건조 | 요코스카 해군 공창 |
기공 | 1940년 5월 4일 |
진수 | 1944년 10월 8일 |
취역 (공식 시험) | 1944년 11월 19일 |
침몰 | 1944년 11월 29일, 에 의해 침몰 |
제적 | 1945년 8월 31일 |
소속 | 일본 제국 해군 |
모항 | 요코스카 |
건조 비용 | 전함 시기 성립 예산: 130,000,000 엔 실질 예산: 147,700,000 엔 |
제원 | |
기준 배수량 | 62,000 영국 톤 |
공시 배수량 | 68,059 톤 또는 68,060 톤, 69,100 톤 |
만재 배수량 | 71,890 톤 |
전체 길이 | 266.0 m (함수에서 후부 기총 플랫 후단까지) |
수선 길이 | 256.0 m |
수선 폭 | 38.90 m (수선 하) 또는 38.0 m |
흘수선 폭 | 36.30 m 또는 36.9 m |
깊이 | 18.915 m (비행 갑판 측선까지 24.81 m) |
흘수 | 10.312 m |
비행 갑판 | 256.00 x 40.00 m 엘리베이터 2기 |
추진축 | 4축 x 225 rpm, 직경 5.100 m |
주기관 | 함본식 터빈 (고저압 2조) 4기 |
출력 | 150,000 hp 또는 160,000 shp |
보일러 | 로호 함본식 솥 (공기 여열기 부착) 12기 |
속력 | 27.0 노트 (예정) 또는 27.3 노트 |
연료 | 8,900 톤 (만재) 또는 9,000 톤 또는 7,350 톤 |
항속 거리 | 10,000 해리 / 18 노트 |
승무원 | 2,400 명 또는 1944년 10월 1일부 정원 2,515명 (사관 88명, 특무사관 52명, 준사관 66명, 하사관 582명, 병 1727명) |
무장 | |
주포 | 12.7cm 연장 고각포 8기 16문 |
대공포 | 25mm 3연장 기총 37기 또는 35기 25mm 단장 기총 40기 |
로켓포 | 12cm 28연장 분진포 12기 (후일 장비) |
장갑 | |
비행 갑판 | 20mm DS+75mm CNC강 |
현측 | 160-270mm NVNC강 (경사 20도) |
갑판 | 190mm NVNC강 |
경질유 탱크 현측 | 25mm DS강 2매, 갑판 25mm DS+70mm 강 |
레이더 및 소나 | |
레이더 | 21호 전탐 2기 13호 전탐 2기 |
소나 | (정보 없음) |
탑재기 | |
탑재기 수 | 상용 42기 + 보충 5기 (총 50기 설도 있음) |
기타 | |
전함 | 야마토급 전함 (3번함) -> 항공모함 |
이전 함급 | 운류급 항공모함 |
이후 함급 | 이부키(미완성) |
2. 건조 배경 및 과정
시나노는 원래 야마토급 전함의 3번함(제110호함)으로 계획되어 1940년 5월 4일 요코스카 해군 공창에서 건조가 시작되었다.[92] 그러나 태평양 전쟁 발발이 임박하고 자원 및 인력 부족 문제가 심화되면서 1941년 여름 건조가 일시 중단되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참패였다.[117] 주력 항공모함 4척을 한꺼번에 상실한 일본 제국 해군은 항공모함 전력 보강이 시급해졌고, 이에 따라 건조가 중단되었던 제110호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하기로 결정했다.[117][177]
항공모함으로 개조되면서 시나노는 강력한 방어력에 중점을 두었다. 비행갑판 장갑은 1,000파운드 폭탄의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이를 위해 약 1만 7,700톤의 강철이 추가로 투입되었다. 만재 배수량은 7만 2,000톤에 달해, 1961년 미국의 USS 엔터프라이즈가 취역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모함이었다. 시나노는 대규모 수리 시설과 연료 저장고를 갖춘 지원 항모로서, 다른 항모의 작전을 지원하고 손실된 함재기를 보충하는 역할을 맡도록 계획되었다. 자체 탑재 항공기는 소수였지만, 여분의 항공기를 다수 격납하여 함대의 항공 전력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자 했다. 최고 속도는 27노트(시속 약 50km)로 설계되어 당시 미군 잠수함보다 빨랐다.
시나노의 건조는 극도의 보안 속에서 진행되었다. 건조 중인 도크 주변에는 높은 담장이 설치되었고, 동원된 노동자들은 외부와 격리된 채 생활해야 했다. 함선의 이름조차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보안 유지가 엄격했다. 이러한 비밀주의 때문에 시나노는 20세기에 건조된 대형 전투함 중 유일하게 건조 과정에서 촬영된 공식 사진이 남아있지 않다.
1944년 6월 마리아나 해전에서 또다시 주력 항모 3척을 잃자[144], 일본 해군 지도부는 시나노의 완성을 더욱 서둘렀다.[146] 당초 1945년 완공 예정이었던 일정을 무리하게 앞당겨 1944년 10월 15일까지 준공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51][149] 숙련공 부족과 자재난 속에서 공사가 강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시험과 검사가 생략되었다.[148][155]
이러한 졸속 건조 끝에 시나노는 1944년 10월 5일 진수되었고,[77] 10월 8일 '信濃|시나노일본어'라는 이름이 공식 부여되었다.[77][176] 11월 11일 시험 항해를 거쳐[77] 11월 19일 정식으로 취역했다.[77][182]
하지만 취역 당시 시나노는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190] 방수 격벽의 기밀 시험조차 제대로 완료되지 않았고[148][155], 승조원 대부분은 실전 경험이 부족했으며 함선에 대한 훈련도 미흡하였다. 또한 12기의 보일러 중 4기는 작동하지 않는 상태였다. 아베 토시오 함장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때까지 출항을 연기하기를 원했으나,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을 우려한 해군 지도부는 이를 묵살하고 1944년 11월 28일 추가 의장 공사를 위해 구레 항으로의 회항을 강행했다. 해군 본부는 시나노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커서, 패색이 짙던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러한 기대감은 아베 함장이 구레 항에 도착하면 해군 소장으로 진급시키기로 한 결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미완성 상태에서의 무리한 출항은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 1. 야마토급 전함 계획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체결된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및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은 일본 해군의 해군력 보유를 제한했다. 국력과 경제력에서 미국에 비해 열세였던 일본 해군은 이에 대응하여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전략을 세우고, 강력한 46cm 주포를 탑재한 야마토급 전함의 건조를 계획했다.[2]군축 조약의 효력이 상실된 1937년, 일본은 제70회 제국 의회에서 제3차 해군 군비 보충 계획(③계획)을 승인받아 야마토급 1번함 야마토와 2번함 무사시의 건조를 시작했다. 이듬해인 1938년에는 제4차 해군 군비 충실 계획(④계획)에 따라, 함령 30년이 넘은 노후 콩고급 전함 하루나와 키리시마를 대체하기 위해 야마토급 전함 2척(건조 번호 제110호함, 제111호함)의 추가 건조를 결정했다. 이 두 척은 기존 야마토급의 설계를 개선하여 건조될 예정이었다.[81][82]
제110호함은 전함에 대한 일본 함선 명명 규칙에 따라 옛 시나노국의 이름을 따 '시나노'로 명명될 예정이었다.[3] 개량된 야마토급 설계를 바탕으로 했으며, 몇 가지 개선점이 있었다. 장갑은 기존 함선보다 10mm에서 20mm 가량 얇아졌는데, 이는 기존 장갑이 필요 이상으로 두껍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력 대공포로는 기존의 40구경 12.7cm 89식 포보다 탄도 특성과 발사 속도가 우수한 신형 65구경 10cm 98식 양용포를 탑재할 계획이었다.[4]

제110호함의 건조는 요코스카 해군 공창에 새로 건설된 제6선거(드라이 도크)에서 진행되었다.[84] 7만 톤이 넘는 야마토급 전함 4척의 건조 및 향후 수리, 개조를 위해서는 기존 구레의 도크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고, 요코스카를 구레와 동등한 수준의 해군 중요 거점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기에 새로운 대형 도크를 건설하게 된 것이다.[85][86] 이 도크는 2년 3개월의 기간과 약 1700만엔(당시 화폐 가치)의 비용을 들여 길이 336m, 폭 62m, 깊이 18m 규모로 완성되었다.[88] 건설 과정에서 나온 흙은 인근 해군 포술 학교의 해안 매립에 사용되었다.[89]
제2복원국 자료에 따르면 110호함의 기공일은 1940년 4월 7일이지만,[90][91] 도크 완공과 함께 기공식이 거행된 것은 1940년 5월 4일이다.[92] 제110호함 건조에는 약 1.4769999999999999억엔(당시)의 예산이 책정되었는데, 이는 당시 국회의사당( 2570만엔 ) 6개를 지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93] 건조 과정은 극비리에 진행되어, 기공식 제사조차 외부 신관을 부르지 않고 공창 내부의 자격 있는 직원이 맡았다.[94][95] 공창 직원들 사이에서는 '3호함'[96] 또는 단순히 '110'[97]이라는 속칭으로 불렸다.
당초 제110호함은 1943년 10월 진수, 1945년 3월 말 완성을 목표로 건조가 진행되었으나,[98] 함저 방어 설계 변경 등의 문제로 공정은 계획보다 늦어지고 있었다.[99] 그러던 중 미국과의 전쟁이 임박하자 1941년 11월, 일본 해군은 함정 건조 계획을 재검토하여 잠수함과 항공기 생산을 우선하기로 결정하고 대형함 건조를 중단했다.[100] 이에 따라 제110호함의 자매함이 될 예정이었던 제111호함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건조가 완전히 중단되어 해체되었다.[101][76] 해체된 자재와 함체 일부는 이세급 전함을 항공전함으로 개조하거나[102] 독일 여객선 샬른호르스트를 항공모함 신요로 개조하는 데 사용되었다.[103] 111호함용으로 제작된 갑판 장갑 일부는 요코스카로 옮겨져 제110호함에 사용되었다는 설도 있다.[104]
개전 당시(1941년 12월 8일) 제110호함의 공정은 선체 하부 구조 공사가 진행 중인 상태였다.[99] 해군 상층부는 제110호함을 전함으로 완성하는 대신, 배를 띄워 도크에서 꺼낼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공사만 진행하여 가능한 한 빨리 도크를 비우도록 명령했다. 이는 비워진 도크를 중형 항공모함 건조나 손상된 함선의 수리에 활용하기 위함이었다.[105] 1942년 10월까지 선체를 완성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건조 자재가 다른 곳으로 돌려지고 공창 직원들의 사기도 저하되면서 공사는 지지부진했다.[106]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소장의 일기인 전조록에는 1942년 4월 23일, 군령부 간부들이 연합함대 사령부를 방문하여 "전함 건조는 '제3호함'(110호함)까지만 하고, 남는 역량은 항공모함 건조에 집중하며 초갑순 건조는 보류한다"는 등의 논의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07]
2. 2. 건조 중단과 항공모함으로의 전환
야마토급 전함 3번함으로 계획된 '''110호함'''은 1937년 ③계획으로 예산이 승인된 야마토, 무사시에 이어, 1938년 ④계획에 따라 콩고형 전함 대체함으로 111호함과 함께 건조가 결정되었다[81][82]。110호함과 111호함은 야마토, 무사시의 설계를 개선하여 완성도를 높일 예정이었다[81][82]。110호함 건조를 위해 요코스카 해군 공창에는 제6선거가 새로 건설되었다[84]。이는 7만 톤급 야마토형 전함 4척의 건조 및 향후 수리, 개조에 대비하고 요코스카를 구레에 버금가는 해군 거점으로 만들려는 의도였다[85][86]。약 1700만엔(당시)의 비용과 2년 3개월의 기간을 들여 길이 336m, 폭 62m, 깊이 18m의 도크가 완성되었고[88], 1940년 5월 4일 도크 완공과 함께 110호함의 기공식이 거행되었다[92]。함 자체 예산은 약 1.4769999999999999억엔(당시)이었다[93]。 공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110'이라는 약칭으로 불렸다[97]。 당초 110호함은 1945년 3월 말 완성을 목표로 공사가 진행되었다[98]。
그러나 태평양 전쟁 발발이 임박하면서 1941년 11월, 일본 해군은 잠수함과 항공기 생산을 우선시하기로 결정하고 대형함 건조 계획을 재검토했다[100]。 이 결정에 따라 110호함은 건조가 일시 중단되었고, 자매함인 111호함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건조가 완전히 취소되어 해체되었다[101][76]。 개전 당시 110호함은 선체 하부 구조 공사가 진행 중인 상태였다[99]。 해군은 도크를 중형 항공모함 건조나 손상함 수리에 활용하기 위해, 110호함을 부양시켜 도크에서 꺼낼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공사만 진행하도록 명령했다[105]。 하지만 자재 부족과 공원들의 사기 저하로 공사는 지지부진했다[106]。
1942년 4월 18일, 미군의 둘리틀 공습 당시 요코스카도 공습을 받았다[109]。 110호함 근처에서 항공모함으로 개조 중이던 잠수모함 다이게이(후의 항공모함 류호)가 피격당했지만, 110호함은 피해를 입지 않았고 미군에게 발견되지도 않았다[110][111]。 이 공습은 일본 본토 방어의 취약성을 드러냈고, 해군 전략에 영향을 미쳤다[112]。
결정적인 전환점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참패였다[113][114]。 주력 항공모함 4척을 한꺼번에 잃은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전력 재건이 시급해졌다[115]。 1942년 6월 30일, 해군은 전시 급조 항공모함 건조 계획의 일환으로, 건조가 중단된 110호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하기로 최종 결정했다[116][117]。 당초에는 110호함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운룡형 항공모함 2척을 건조하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나[118], 이미 상당히 진행된 선체를 해체하는 어려움과 더불어, 야마토형의 상징인 46cm 주포를 운반할 전용 수송선 카시노가 미 잠수함 그라울러에 격침되면서[102][119] 110호함을 전함으로 완성하는 것 역시 불투명해졌다[102][119]。
110호함의 항공모함 개조 설계 과정에서는 의견 대립이 있었다. 함정본부는 격납고를 최소화하고 연료와 탄약 보급에 중점을 둔 '해상 이동 항공기지' 개념을 제안했지만[125][99], 군령부와 항공본부는 아웃레인지 전법을 비판하며 공격 능력을 갖춘 정규 항공모함으로의 개조를 주장했다[99][129]。 결국, 강력한 방어력을 바탕으로 자체 함재기(전투기 위주)를 운용하면서 다른 항모의 함재기까지 수용하고 지원할 수 있는 절충적인 형태로 설계 방향이 정해졌다[130]。 이는 다이호의 설계 사상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설계 변경은 1942년 7월 말 결정되어 11월에 기본 설계가 완료되었고, 1943년 초부터 개조 공사가 재개되었다[131][132]。
하지만 과달카날 섬 전투 등에서 함정 손실이 계속되자, 1943년 3월 일본 해군은 손상 함선 수리를 최우선으로 하고 신규 건조는 마쓰형 구축함과 잠수함으로 제한하라는 지침을 내렸다[133]。 이로 인해 110호함의 건조는 1943년 8월 다시 중단되었다[134]。 요코스카 공창은 운룡, 노시로, 마쓰형 구축함, 병형 해방함 건조 및 지토세 항모 개조, 쇼카쿠, 히요 등 다수 함정의 수리 작업으로 이미 포화 상태였다[139][140]。
1944년 6월 마리아나 해전에서 쇼카쿠, 다이호, 히요 등 주력 항모 3척을 또다시 잃는 대패를 겪자[144], 일본 해군은 110호함의 완성을 서두르게 되었다[146][139]。 특히 110호함(시나노)의 설계에 영향을 준 다이호의 상실은 큰 충격이었다[145]。 1944년 7월 1일, 110호함은 '''군함 시나노'''(信濃)로 정식 명명되고 항공모함으로 등록되었으며[42][51], 1944년 10월 15일까지 준공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51]。 이는 당초 예정보다 5개월이나 앞당겨진 무리한 일정이었다[149]。
준공 기한을 맞추기 위해 거주 설비 간소화, 창고 설비 축소, 목재 사용 최소화, 각종 기밀 시험 생략 등 공사가 극도로 간략화되었다[148][51]。 숙련공 부족으로 민간 조선소 인력, 학생, 여성 의용대까지 동원되었고[150], "시나노가 일본을 구한다"는 구호 아래 작업이 강행되었다[151][152]。 야마토급 전함 설계자였던 마키노 시게루는 당시 시나노 내부가 장식 없이 썰렁하고 기밀 시험도 제대로 완료되지 않아 "철의 관" 같았다고 회고했다[154]。 이러한 졸속 건조는 이후 시나노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만, 다이호 침몰의 교훈을 반영하여 항공 연료 탱크 주변에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보강 작업은 이루어졌다[156]。
2. 3. 건조 재개와 문제점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는 참패를 겪은 일본 제국 해군은 항공모함 전력 재건이 시급해졌다.[113][114] 이에 따라 1941년 여름부터 건조가 중단되었던 야마토급 전함 3번함(제110호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하기로 결정했다.[7] 미드웨이 해전 당시 제110호함의 선체는 약 45% 정도 완성된 상태였다.[8]항공모함 개조를 두고 함정본부와 군령부 및 항공본부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다.[124] 함정본부는 제110호함을 고유 함재기 없이 다른 항모의 함재기에 연료와 무장을 보급하는 '해상의 이동 항공 기지'로 만들자는 안을 제시했다.[125][99] 이는 미드웨이 해전의 교훈을 반영하여 함내에 폭발 위험이 있는 공격기나 폭탄, 어뢰를 탑재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128] 그러나 군령부와 항공본부는 제110호함을 공격용 항공모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99][129] 결국 양측의 의견을 절충하여, 중장갑을 갖춘 지원 항모 역할과 더불어 자체적인 전투기 및 공격기 운용 능력까지 갖추는 방향으로 최종 설계가 결정되었다.[130] 이는 다이호와 유사하게, 다른 항모가 손상되었을 때 그 함재기까지 수용하여 함대의 항공 전투 능력을 유지하려는 구상이었다.[130]
1942년 9월 건조가 재개되었으나[133], 과달카날 섬 전투에서 함선 손실이 계속되자 1943년 3월, 일본 제국 해군은 손상 함선 수리를 최우선으로 하고 신규 건조는 마쓰형 구축함과 잠수함으로 한정하라는 지침을 내렸다.[133] 이로 인해 제110호함의 건조는 같은 해 8월 다시 중단되었다.[134] 당시 요코스카 해군 공창은 운류, 노시로, 마쓰형 구축함, 해방함 건조와 지토세 개조, 쇼카쿠, 히요 수리 등 과중한 작업량에 시달리고 있었다.[139][140]
1944년 6월 마리아나 해전에서 쇼카쿠, 다이호, 히요 등 주력 항모 3척을 또다시 잃는 대패를 당하자[144], 일본 해군은 제110호함의 완성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146][139] 7월 1일, 제110호함은 '''군함 시나노'''(信濃일본어)로 정식 명명되었고[42][51], 준공 기한을 당초 1945년 2월 말에서 3개월 이상 앞당겨 1944년 10월 15일까지 완료하라는 극히 무리한 명령이 내려졌다.[51][149] 이는 "일단 전투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필요한 설비만 우선 완성시키고 나머지는 귀항 후 공사"한다는 조건부였다.[51]
하지만 이미 숙련된 노동력은 징병으로 크게 부족한 상태였고, 민간 조선소 인력과 해군 공작학교 학생은 물론, 관련 없는 학부의 학생들까지 학도 근로 동원이라는 명목으로 동원되었다. 여기에 더해 조선인과 대만인 노동자, 여성 의용대까지 강제로 투입되는 등[150], 당시 일본 제국의 비인도적인 전시 총동원 체제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시나노의 완성이 일본을 구한다", "시나노가 없으면 전쟁에서 진다"는 등의 선전 구호 아래 작업이 강행되었지만[151][152], 이러한 졸속 건조는 심각한 문제점을 낳았다.
야마토급 전함 2번함 무사시의 경우 19개월이 걸렸던 마무리 공사를 시나노는 불과 3개월 만에 강행해야 했다.[153] 공사 간소화를 위해 거주 설비는 최소화되었고, 각종 창고 설비도 극히 간단하게 처리되었다.[148] 특히 방수 구획의 기밀 시험은 대부분 생략되었는데[148][155], 이는 훗날 시나노의 침몰에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설계자 중 한 명인 마키노 시게루는 당시 시나노 내부가 장식 하나 없이 썰렁하고 기밀 시험도 제대로 되지 않아 마치 "철의 관" 같았다고 회고했다.[154] 다만, 다이호 침몰의 교훈으로 항공 연료 탱크 주변에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작업은 이루어졌다.[156]
무리한 공기 단축은 결국 사고로 이어졌다. 1944년 10월 5일 진수식 당일, 도크에 물을 채우던 중 케이슨의 밸러스트 탱크 주수를 잊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케이슨이 떠오르면서 바닷물이 급격히 유입되었다.[167][168][171] 이 급류에 함체가 떠밀려 함수 벌브 선미가 도크 벽에 여러 차례 충돌하여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했다.[170] 이는 명백한 인적 실수였지만, 극단적인 공기 단축이 낳은 예고된 인재(人災)이기도 했다.[173]
10월 8일, 요나이 미츠마사 해군 대신이 참석한 가운데 명명식이 거행되었고[77][176], 시나노는 정식으로 요코스카 진수부 소속 함선이 되었다.[179] 이후 함수 수리를 거쳐[180] 11월 19일에 최종 준공되었다.[51][182] 준공 직전인 11월 11일과 12일에는 도쿄 만 내에서 영식 함상 전투기, 텐잔 함상 공격기, 시덴카이, 류세이, 사이운 등 함재기들의 이착함 실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이것이 시나노에서 항공기가 발착함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가 되었다.[186][187][399]

3. 구조 및 특징
시나노(信濃)는[42] 본래 야마토급 전함의 3번함(110호함)으로 1940년 5월 요코스카 해군 공창에서 기공되었다.[4][2] 전함으로서의 이름은 옛 지명인 시나노국에서 따왔다.[3] 초기 설계는 개량된 야마토급을 기반으로 했으나,[4] 1941년 여름 건조가 중단되었다가 미드웨이 해전 이후 항공모함으로 설계를 변경하여 건조가 재개되었다.[117][177]
항공모함 개조 시 방어력 강화에 중점을 두었으며, 특히 비행 갑판은 500kg 폭탄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장갑이 강화되었다.[108] 전함 기반 선체 덕분에 주요 구획의 방어력은 강력했으나, 개조 과정에서 수선상 현측 장갑은 410mm에서 200mm로 축소되었다.[380] 선저는 자기 기뢰 등에 대비해 삼중저 구조로 강화되었다.[384] 만재 배수량은 약 72000ton에 달해, 1961년 엔터프라이즈 취역 전까지 세계 최대 항공모함이었다.[363]
시나노는 최전선 전투보다는 후방 지원 역할이 강조된 '지원 항모'로 설계되었다. 대규모 수리 시설과 연료 저장 공간을 갖추었으며,[364] 자체 함재기는 약 47기[409][52][49] 정도였으나, 예비 항공기 최대 120기를 추가로 탑재할 수 있었다.[9]
함체 구조는 전함의 특징을 유지하여, 함교는 우현 중앙부에 연돌과 일체화된 대형 구조물이었다.[392][393] 기관은 야마토급과 동일한 150000shp 출력의 증기 터빈을 탑재하여 설계 최고 속도는 27kn이었다.[12][397] 내부 구조는 매우 복잡하여 "지하가"로 묘사될 정도였다.[389]
건조는 극비리에 진행되었으며 공식 사진이 거의 없다.[4] 1944년 10월 5일 진수식 때는 사고로 함체가 손상되었고,[167][168][170] 11월 19일 취역 당시에도[77] 방수 격벽 미검사, 일부 보일러 미작동 등 미완성 상태였다.[190] 승조원의 훈련도 부족했다.
전후 분석 결과, 수선부 주 장갑과 어뢰 방어용 벌지 사이의 연결부가 구조적으로 취약한 설계 결함이 지적되었다.[20] 이 결함은 1944년 11월 29일, USS Archer-Fish 잠수함의 어뢰 공격 시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피격된 어뢰 4발은 모두 이 취약 부위에 명중했고,[79] 급격한 침수를 유발하여 피격 약 7시간 만에 침몰했다.[317] 시나노는 잠수함에 의해 격침된 가장 큰 군함으로 기록되었다.
3. 1. 비행 갑판 및 격납고
''시나노''는 미드웨이 해전과 산호해 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함재기 급유 및 무장 작업을 기존의 격납고가 아닌 비행 갑판에서 수행하도록 설계되었다.[376] 이는 작업 중 피격 시 항공모함의 위험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이에 따라 폭탄 및 어뢰는 격납고를 거쳐 비행 갑판으로 직접 올리는 구조를 채택했다.[376]격납고는 환기를 위해 상당 부분 개방형 구조였으나, 필요시 강철 셔터로 측면 대부분을 닫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탄약이나 불타는 항공기를 바다로 버릴 수 있었는데, 이는 폐쇄형 격납고를 가진 이전 항모에서는 불가능한 기능이었다.[8] 안정성을 고려하여 격납고는 높이 5m의 단일 층 구조로 설계되었으며,[12] 측면에는 장갑이 없었다. 격납고 전방 구역은 정비 및 보관 시설로 사용되었다.[12]
야마토급 전함 선체 위에 설치된 비행 갑판은 길이 256m,[12] 최대 폭 40m로[369] (폭 50m라는 전 승무원 증언도 있음[370]), 양쪽 끝이 선체를 벗어나 돌출되었고 한 쌍의 기둥으로 지지되었다.[12] 매우 넓은 갑판 덕분에 영전 착함 실험을 했던 고쿠후쿠다 코후미 소좌는 착함이 매우 용이했다고 평가했으며,[185] 가가 탑승원 출신 시가 요시오 소좌도 그 광대함에 감탄했다.[371]
장갑 비행 갑판은 500kg 급강하 폭격 폭탄에 견디도록 설계되었으며,[108] 20mm DS 강판 위에 75mm NVNC 장갑판을 덧씌운 구조였다.[372][8] 장갑 범위는 길이 약 210m, 폭 약 30m로 하부 격납고와 동일했다.[373] 이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상자형 빔 위에 14mm 강철을 덮었다.[374] 일본 최초의 장갑 항모 다이호와 달리, 공사 간소화를 위해 비행 갑판 전체를 톱밥 입자 시멘트로 덮었다.[375] 전 승무원 증언에 따르면 비행 갑판에는 신개발 형광등이 매설되어 있었다고 한다.[378] 비행 갑판에는 15개의 가로 어레스팅 와이어와 7500kg 항공기를 멈출 수 있는 3개의 크래시 배리어가 설치되었고,[13] 이 중 5개는 함수 착함을 위해 앞쪽에 배치되었다.[8]
항공기는 두 개의 엘리베이터로 격납고와 비행 갑판 사이를 오갔다. 전방 엘리베이터는 크기 15m × 14m, 무게 180t이었고, 후방 엘리베이터는 13m × 13m, 무게 110t이었다.[377] 엘리베이터 역시 비행 갑판과 동일한 75mm NVNC 장갑이 적용되었으며,[377] 최대 7500kg의 항공기를 인양할 수 있었다.[12]
함선은 720000L의 항공 가솔린 (avgas) 탑재 용량을 가졌다.[12] 다이호 침몰의 교훈에 따라, 가솔린 누출 시 증기 배출을 위해 격납고 갑판에 대형 환풍기가 설치되었고, 엘리베이터 입구에는 공기 유입을 늘리기 위한 캔버스 풍구가 마련되었다.[16] 또한 응급 대책으로 수선하 벌지 등 항공 연료 탱크 주변에 콘크리트를 채워 방호력을 보강했다.[386]
자체 항공대는 미쓰비시 A7M ''Reppū'' (연합군 코드명 "Sam") 전투기 18대(예비 2대 포함), 아이치 B7A ''Ryusei'' ("Grace") 어뢰 폭격기 18대(예비 2대 포함), 나카지마 C6N ''Saiun'' ("Myrt") 정찰기 6대(예비 1대 포함)로 구성될 예정이었다.[8] 격납고의 나머지 공간에는 다른 항모나 기지를 위한 교체용 항공기 최대 120대를 수용할 수 있었다.[9]
3. 2. 장갑 및 방어력
야마토급 전함으로 계획되었던 만큼, 항공모함으로 개조된 후에도 시나노는 강력한 방어력을 갖추도록 설계되었다. 항공모함으로서의 재설계 시 방어 성능 목표는 현측 수선 방어의 경우 사거리 10000m에서 발사되는 20cm 포탄을, 수평 방어는 고도 4000m에서 투하되는 800kg 폭탄을 견뎌내는 것이었다.[379]'''장갑'''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설계가 변경되면서, 수선상 현측 장갑은 기존 410mm에서 200mm로 줄어들어 순양함 수준이 되었다.[380] 다만, 탄약고 전방에 이미 설치된 400mm 장갑은 그대로 유지되었다.[20] 수선 아래에는 200mm 두께에서 시작하여 선체 바닥 가장자리에서 75mm까지 점차 얇아지는 장갑판이 설치되었다.[20] 기계실과 탄약고 공간 위의 장갑 갑판 평탄부는 100mm에서 190mm 사이 두께를 유지했으며, 주 장갑대 바닥을 향해 아래로 기울어진 경사부는 230mm 두께였다.[20] 격납고 천장에는 20mm DS 강판과 14mm DS 강판이 접합되었다.
'''비행 갑판'''
비행 갑판은 20mm DS 강판 위에 75mm NVNC 갑판을 얹어 장갑화했다.[372] 이 장갑은 길이 약 210m, 폭 약 30m 범위에 걸쳐 하부 격납고와 동일한 영역에 설치되었다.[373] 초기 설계안에서는 800kg 폭탄의 급강하 폭격을 견디도록 요구되었으나, 갑판 무게 증가와 제조 능력의 한계로 인해 500kg 폭탄의 급강하 폭격에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변경되었다.[108] 일본 항모 최초로 비행 갑판을 장갑화한 다이호와 달리, 시나노는 공사 간소화를 위해 비행 갑판 전체를 톱밥 입자 시멘트로 덮었다.[375] 미드웨이 해전의 교훈을 반영하여 함재기 급유 및 폭탄, 어뢰 장착 장소도 비행 갑판 위로 변경되었고,[376] 이를 위해 양탄통과 양어뢰통은 격납고를 거치지 않고 비행 갑판으로 직접 올라오는 구조였다.[376] 비행 갑판 앞뒤의 항공기용 엘리베이터 역시 75mm NVNC 장갑이 적용되었으며, 무게는 전방 엘리베이터(15m×14m)가 180t, 후방 엘리베이터(13m×13m)가 110t에 달했다.[377]
'''수선 하부 및 연료 탱크 방어'''
수선 아래에는 대형 외부 벌지(bulge)가 어뢰에 대한 주요 방어 수단으로 설치되었으며, 그 뒤에는 파편 방지용 장갑 격벽과 방수 격벽이 있었다.[20] 선저는 자기 기뢰와 선저 기폭 어뢰에 대비해 기존 야마토급의 이중저 구조에서 삼중저 구조로 강화되었다.[384]
항공기용 가솔린 탱크는 155mm 포탄에 견딜 수 있는 장갑으로 보호되었으며,[16] 본래 장갑이 없던, 주요부 앞뒤의 중유 탱크가 위치한 부분에 증설되었다.[402] 이 부분에는 통상적인 25mm 장갑에 더해, 해체된 자매함 제111번 함의 탄약고 바닥 장갑 80mm를 추가로 부착했다.[382]
1944년 6월 마리아나 해전에서 다이호가 어뢰 1발 피격 후 가솔린 증기 누출로 인한 대폭발로 침몰하자,[385] 시나노에는 긴급 대책이 적용되었다. 가솔린 탱크와 커퍼댐 사이의 빈 공간에 2400ton의 콘크리트를 채워 넣어 증기 누출을 막고자 했다.[16][383][386] 이 콘크리트 충전 등으로 인해 공시 상태 배수량은 초기 계획 62,000t에서 68,000t으로 증가했다.[386]
'''설계상의 문제점'''
전후 미국 해군 기술 임무 분석가들은 시나노의 설계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특히, 선체의 주 장갑대와 수선 아래의 어뢰 방어용 벌지 사이의 연결부가 구조적으로 취약하게 설계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20] 실제로 USS Archer-Fish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는 모두 이 연결 부위를 따라 폭발했다. 어뢰 폭발 충격은 기관실 중 하나의 H형 들보를 밀어내, 인접한 기관실 사이의 격벽에 구멍을 내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덧붙여, 방수 격벽의 문제도 침몰에 크게 기여했는데, 생존자들은 침수가 너무 급격히 진행되어 도무지 대응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다른 증언에 따르면 접합부의 리벳이 터져버려 침수가 급격히 진행되었다고 한다. 강화된 방어 설계에도 불구하고, 시나노는 이러한 구조적 결함과 더불어 승조원의 훈련 부족, 방수 격벽의 문제 등이 겹쳐 첫 항해에서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하게 되었다.
3. 3. 함교 및 기관
함교는 우현 중앙부에 연돌과 일체화된 대형 구조물로 설치되었다.[392] 이는 선체 상부 갑판과 비행 갑판 사이의 높이가 충분하지 않아 기존 일본 제국 해군 항공모함처럼 현측으로 돌출된 만곡형 연돌을 설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392] 대신 다이호형 항공모함과 개조 항공모함인 준요급 항공모함 (히요형)의 설계를 따라 함교와 연돌을 통합하고, 연돌 상부에서 바깥쪽으로 26도 기울여 연기를 배출하는 방식을 채택했다.[393] 함교 설계를 위해 실물 크기의 모형을 항공 학교 옥상에 만들어 시험했으며,[394] 준공 직전인 1944년 9월 4일에는 제1기동함대의 의견을 반영하여 방공 지휘소 장비를 개수하기도 했다.[395] 함교에는 21호 전탐과 통신 마스트가 배치되었다.[396] 다만, 설계에 참여했던 후쿠다 게이지 중장은 이 함교가 미적으로는 뛰어나지 않다고 회고했다.[396]기관은 야마토급 전함으로서의 기초 설계가 이미 완성된 상태에서 개조되었기 때문에, 기관 배치나 예정된 기관 출력은 야마토급과 동일했다.[12][397] 총 150,000 마력(shp)의 출력을 내는 4개의 기어식 증기 터빈 세트가 장착되었고, 각 터빈은 12개의 Kampon 수관 보일러에서 공급되는 증기를 이용해 1개의 프로펠러 샤프트를 구동했다.[12] 프로펠러의 회전수는 야마토급과 같았지만, 직경은 야마토급의 5m보다 큰 5.1m였고 피치(pitch)도 달랐다.[397] 설계 최고 속도는 27kn이었으나,[12][397] 전속력 해상 시험을 거치지 않아 실제 최고 속도는 알려지지 않았다.[12] 연료유는 약 9046882.49kg를 탑재하여 18kn의 속력으로 약 10000nmi를 항해할 수 있었다.[9]
시나노는 야마토급 전함에 비해 주포탑이나 일부 장갑을 제거했지만, 비행 갑판과 탄약고 등에 중장갑을 적용한 결과 만재 배수량은 야마토급(72000ton)과 비슷한 71000ton에 달했다. 이 때문에 정규 항공모함으로서는 속력이 느린 편이었고, 당시 5ton이 넘는 유성 함상 폭격기의 발함 성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398] 요코스카에서 실시된 시험 항해에서는 보일러 8기만 가동하여 20kn 정도의 속력으로 항해했는데, 이 상태에서 자전 개, 유성, 텐잔 함상 공격기의 이착함 시험에 성공했다.[398] 당시 테스트 파일럿이었던 야마모토 시게히사 대위는 시나노의 비행 갑판이 아카기나 쇼카쿠보다 커서 이착함이 양호하다고 증언했다.[398]
3. 4. 탑재 항공기 및 무장
격납고는 1층 구조였는데[400], 이는 건조 재개 시 이미 함 중앙부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401], 전황에 따른 조기 준공 요구, 연돌 배치, 비행 갑판의 중장갑 시공, 그리고 계획된 항공기 탑재 수 등을 고려한 결과였다.[402] 격납고 예정 위치 양쪽에 고사포와 기관총탄 양탄통이 준비되어 격납고 면적도 좁아졌다.[403] 또한 선체 구조상 2단 격납고는 어려웠다.[404]격납고의 전방 약 125m는 공격 시 화재 열풍 배출과 폭탄/어뢰 투기를 위해 개방식으로 설계되었고[406], 야간 정비를 위해 캔버스 차광막과 내부 조명이 설치될 예정이었다.[407] 그러나 개방부 크기 문제로 실제 항공기 해중 투기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407] 후방 약 83m는 두께 25mm DS강 2겹의 측벽을 가진 밀폐식 구조였다.[380][372] 화재 대비를 위해 격납고 전역에 포말 소화 장치, 독립 소화 펌프 3개, 방호 처리된 관제 지휘소 등이 설치되었다.[407]
탑재 예정 항공기의 종류와 수는 자료 및 계획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다.
단, 레이센은 개발 지연으로 인해 시덴카이 함상전투기형으로 변경될 예정이었다.
주 무장으로는 40구경 12.7cm 89식 연장 고사포 8기(총 16문)를 선체 각 모서리에 2문씩 장착했다.[13] 이 포는 대수상 목표 사격 시 사거리가 14700m였고, 최대 고각 90도에서 9440m 고도까지 도달 가능했다. 최대 발사 속도는 분당 14발, 지속 발사 속도는 분당 약 8발이었다.[15]
또한 96식 25mm 경(輕) 대공포를 3연장 포좌 35기(일부 자료에서는 37기[67])와 단장 포좌 40기에 탑재하여 총 145문(또는 151문[67], 140문[412])을 갖출 예정이었다.[16][50] 이 25mm 포의 유효 사거리는 1500m에서 3000m, 유효 고도는 5500m였다. 하지만 15발들이 탄창을 자주 교체해야 했기에 유효 발사 속도는 분당 110~120발에 불과했다.[17] 이 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해군의 표준 경 대공포였으나, 역사가 마크 스틸(Mark Stille)에 따르면 "수동 또는 동력 조작 속도가 느려 고속 목표 대응이 어렵고, 조준경도 부적합했으며, 진동과 포구 폭발이 심했다"는 등 여러 설계 결함으로 인해 실효성이 떨어졌다.[18]
이를 보완하기 위해 28연장 12cm 대공 로켓 발사기 12기를 현측에 장비할 예정이었다.[12] 각 로켓은 무게 22.5kg, 최대 속도 200m/s, 최대 사거리 4800m였다.[19] 그러나 출항 시 로켓 발사기는 탑재되지 않았다.[413] 시나노 비행장 시가 요시오 소좌나 공원 카미야 타케히사 등의 증언에 따르면 다른 무장은 일부 장비된 상태였다고 한다.[414]
고사포 통제를 위해 94식 고각 사격 통제 장치 4기가 장착되었다. 좌현 포용 2기는 해당 포 옆에, 우현 포용 2기는 함교 전후에 설치되어 필요시 각각 전방 및 후방 포 전체를 통제할 수 있었다.[13] 22식 수상 탐색 레이더와 13식 대공 탐색 레이더가 장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9]
4. 취역과 침몰
1944년 11월 19일, 시나노는 일본 제국 해군에 정식으로 취역하였다[77]. 그러나 필리핀 해 해전 패배 이후 미군의 본토 공습 우려로 건조 일정이 무리하게 단축되어[21], 시공이 부실했고 방수 격벽 공사 등이 완료되지 않은 미완성 상태였다[190][27].
취역 직후, 잔여 공사 마무리 및 미군 공습 회피를 위해 요코스카 해군 공창에서 구레 해군 공창으로 회항이 결정되었다. 아베 토시오 대좌가 함장으로 임명되었고[160], 1944년 11월 28일 저녁, 제17구축대 소속 구축함 3척(이소카제, 하마카제, 유키카제)의 호위를 받으며 구레로 출항했다[26].
출항한 지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조셉 엔라이트(Joseph F. Enright) 소령이 지휘하는 미국 해군 잠수함 아처피시(SS-311)에게 발견되었다. 아베 함장이 미군 잠수함의 공격 전술을 오판하여[233] 대응이 늦어진 사이, 1944년 11월 29일 새벽 3시 17분경 기이반도 다이보자키 해상에서 아처피시가 발사한 어뢰 4발에 우현을 피격당했다[79][80][271].
함선의 미비점과 초기 대응 미숙으로[32][380] 침수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피격 약 7시간 만인 오전 10시 57분경 시나노는 전복되어 침몰했다[317]. 이로써 아베 함장을 포함한 1,435명이 사망했다[22].
취역한 지 불과 10일 만의 침몰이었다[72]. 시나노는 잠수함에 의해 격침된 역사상 가장 큰 군함으로 기록되었다. 일본 해군의 기대를 모았던 거대 항공모함 시나노의 허무한 최후는 패망으로 치닫던 일본 군국주의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4. 1. 구레 회항
1944년 11월 19일, 시나노는 공시 운전을 거쳐 일본 제국 해군에 인도되었고[139], 제1항공전대에 편입되었다[189][190]. 당시 제1항공전대는 시나노를 포함하여 운류형 항공모함 3척(운류, 아마기, 카츠라기) 등 총 6척의 항공모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91].11월 24일,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요다 소에무 대장은 GF 전령 550호를 통해 "『시나노』 및 제17 구축대는, 『시나노』 함장이 이를 지휘하여 요코스카에서 출항, 기회를 봐서 내해 서부로 회항할 것"을 명령했다[192]. 이는 남은 의장과 병장 탑재를 완료하고, 동시에 요코스카 해군 공창에 대한 미군의 공습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레 해군 공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었다[194]. 실제로 11월 1일 요코스카 상공을 비행한 미군 F-13 정찰기가 시나노를 촬영했으며[1][196], 일본 해군 지휘부는 임박한 공습을 예측하고 있었다[195]. 그러나 당시 미군은 시나노의 존재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197]. 또한, 징용공 다수로 인한 요코스카 공창의 기술력 저하를 우려한 해군이 구레 공창에서의 의장 공사를 검토했고, 야마토급 전함의 조선 주임이었던 니시지마 료지 기술 대좌가 시나노의 잔여 공사 인수에 의욕을 보이자 구레 회항이 최종 결정되었다[198].
그러나 회항 결정 당시 시나노는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아베 토시오 함장은 출항 연기를 요청했지만[27], 방수문의 대부분이 설치되지 않았고 구획 공기 테스트도 실시되지 않았으며, 각종 배관과 케이블이 통과하는 격벽의 구멍들이 밀봉되지 않은 상태였다[27]. 소화전과 배수 펌프 역시 작동하지 않았다[24]. 승조원 대부분은 항해 경험이 있었으나[23], 함내 휴대용 펌프 사용 훈련 등 피해 대응 훈련은 부족했다[24]. 게다가 12기의 보일러 중 8기만 가동 가능하여 최대 속력은 20노트 정도에 불과했고[199], 고각포, 분사포, 기총 등 대공 무장도 거의 탑재되지 않았다[178]. 아베 함장의 연기 요청은 미군 공습을 우려한 해군 지휘부에 의해 거부되었다[27]. 아베 함장은 20노트 정도의 속력이면 미군 잠수함을 따돌릴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28].
시나노에는 아베 토시오 함장이 지휘하는 2,175명의 장교와 사병 외에 300명의 조선소 직원과 40명의 민간인 직원이 탑승했다[26]. 구레 회항 시 항공기는 탑재되지 않았고, 비행장 시가 요시오 소좌도 요코스카에 남았다[371]. 다만, 함상 폭격기 3기를 탑재했다는 증언[200], 오카 자살 비행 폭탄 50기[22][201] 또는 신요 자살 보트 수 척[202]을 화물로 싣고 있었다는 설도 존재한다.
호위를 맡은 제17 구축대 소속 카게로급 구축함 3척(하마카제, 이소카제, 유키카제)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들은 레이테 만 해전 직후라 승조원들의 피로가 누적되었고 숙련도도 부족했으며, 제대로 된 휴식이나 정비 없이 회항 임무에 투입되었다[204]. 특히 이소카제와 하마카제는 레이테 만 해전에서 입은 손상으로 수중 탐사기를 사용할 수 없었고, 하마카제는 피탄 여파로 28노트 이상 속력을 낼 수 없었다[205]. 더욱이 제17 구축대는 얼마 전 호위하던 전함 콩고와 구축대 사령함 우라카제가 미 잠수함 실리온(''USS Sealion, SS-315'')의 공격으로 격침당하면서 제17 구축대 사령 타니이 타모츠 대좌가 전사하여 지휘관마저 공석인 상태였다[206][207][208].
11월 25일 요코스카에 도착한 제17 구축대와 시나노 측은 회항 항로를 두고 논의를 벌였다. 제17 구축대 측은 잠수함 매복을 우려하여 일본 초계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주간 연안 이동을 강력히 주장했다. 특히 유키카제 함장 테라우치가 가장 강하게 반대했다고 전해진다[214]. 그러나 아베 함장은 군령부로부터 항공 지원 불가 통보를 받은 상태였고[212], 잠수함 위협보다는 미군 기동부대의 공습을 더 우려하여[213] 야간에 20노트 이상의 속력으로 원양 항해를 하면 잠수함을 회피할 수 있다고 판단, 구축대의 제안을 기각했다[211]. 해상 호위 총사령부 참모였던 오이 아쓰시 역시 연안 항로나 주간 항해를 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17]. 결국 시나노는 야간 원양 항로를 택하여 11월 28일 18시에 요코스카를 출항했다[26].
4. 2. 아처피시와의 조우 및 공격


1944년 11월 28일 오후 1시 30분, 시나노는 추가 장비 설치와 요코스카 공습을 피하기 위해 구레 해군 공창으로 회항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항했다[194][218]. 함대는 제17구축대 소속 카게로급 구축함 3척(하마카제, 이소카제, 유키카제)의 호위를 받았다[219]. 당시 함장은 아베 도시노 대좌였으며, 2,175명의 장교와 사병, 300명의 조선소 직원, 40명의 민간인이 탑승했다[26]. 시나노는 아직 내부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고각포, 분사포, 기총 등 무장은 거의 탑재되지 않았으며[178], 12기의 보일러 중 8기만 가동 가능하여 최대 속력은 약 20kn에 불과했다[199][221]. 방수 격벽 공사도 완료되지 않았고, 구획 간 구멍도 제대로 밀봉되지 않은 상태였다[27].
호위를 맡은 제17구축대는 레이테 만 해전 이후 제대로 된 휴식이나 정비를 받지 못해 피로가 누적되었고, 함선 자체도 손상을 입어 2척(이소카제, 하마카제)은 수중 탐지기를 사용할 수 없었으며, 특히 하마카제는 피탄으로 인해 28kn 이상의 속력을 낼 수 없었다[204][205]. 게다가 제17구축대 사령관 타니이 타모츠 대좌가 전사하여 지휘관도 공석인 상태였다[207][208].
출항 전 회의에서 제17구축대 측은 잠수함의 위협을 우려하여 일본 초계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주간 연안 항로를 주장했으나, 아베 함장은 야간 원양 항해를 고집했다[211]. 그는 20kn 정도의 속력이면 미군 잠수함을 따돌릴 수 있다고 판단했고[214], 잠수함보다는 미군 기동부대의 공습을 더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213]. 결국 시나노 부대는 11월 28일 오후 6시 30분, 외해로 나섰다[219].
오후 8시 48분, 조셉 엔라이트(Joseph F. Enright) 소령이 지휘하는 미국 해군 잠수함 아처피시(SS-311)가 레이더로 시나노 함대를 발견하고 추적을 시작했다[244]. 시나노 측도 오후 7시경부터 적 잠수함의 전파를 탐지하고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다[222][223]. 오후 10시 45분경, 시나노는 우현 전방에서 부상한 아처피시를 발견했다[234]. 호위 구축함 하마카제가 조사 및 공격을 위해 접근했으나[232][251], 아베 함장은 아처피시가 여러 척의 잠수함으로 구성된 울프팩의 미끼일 수 있다고 오판하여, 소재 노출을 우려해 공격을 금지하고 하마카제를 함대 대열로 복귀시켰다[233][235][253]. 그는 시나노의 속력으로 잠수함을 따돌릴 수 있다고 믿고 함대를 계속 전진시켰다. 그러나 자정 무렵, 시나노는 우현 중간축 베어링 과열 문제로 속력을 18kn으로 줄여야 했고[260][261], 이는 아처피시의 추격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아베 함장은 울프팩 전술을 피하기 위해 지그재그 기동을 명령했지만, 이는 오히려 직선으로 추격해오던 아처피시에게 시나노의 우현을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1월 29일 오전 3시 13분, 하마나 호 남방 176km 해역에서 아처피시는 약 약 1280.16m 거리에서 시나노를 향해 어뢰 6발을 발사했다[265][268]. 엔라이트 함장은 항공모함의 전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어뢰의 심도를 약 3.05m로 얕게 설정했다[270]. 오전 3시 16분에서 17분 사이, 어뢰 4발이 시나노 우현의 방뢰 벌지 상부와 흘수선 사이에 명중했다[79][271]. 첫 번째 어뢰는 함미 냉장고실과 빈 항공유 탱크를 강타했고, 두 번째는 우현 외측 프로펠러 축실, 세 번째는 제3 보일러실, 네 번째는 공기 압축기실과 대공포 탄약고 등을 파괴하며 광범위한 침수를 유발했다[273][32]. 특히 제3 보일러실 피격은 구조적 결함으로 인해 인접한 제1, 제7 보일러실까지 침수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피격 직후 시나노는 우현으로 10도 기울었지만[274], 아베 함장을 포함한 승무원들은 함선의 강력한 장갑을 과신하여 초기 대응에 소극적이었다[26][33]. 아베 함장은 미군 어뢰의 위력을 과소평가하고 최대 속도 유지를 명령했는데[33], 이는 오히려 파공 부위로 더 많은 해수가 유입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함선의 기울기는 계속 증가하여 13도에 달했고[34], 좌현에 약 3048141.00kg의 해수를 주입하는 대응 침수를 실시했음에도 기울기는 계속 심화되었다. 오전 5시경, 아베 함장은 민간인들을 호위 구축함으로 이동시켰다[35].
오전 6시경, 우현 보일러실이 완전히 침수되면서 기울기가 20도로 급증했고, 대응 침수를 위한 좌현 밸브가 수면 위로 노출되어 무용지물이 되었다. 오전 7시경에는 모든 동력을 상실했고[36], 하마카제와 이소카제에 의한 예인 시도도 함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실패했다[36]. 오전 10시 18분, 아베 함장은 공식적인 퇴함 명령 없이 승무원들에게 자력으로 탈출하라고 지시했다[36]. 당시 함선은 이미 30도 이상 기울어져 있었고, 열려 있던 엘리베이터 통로와 배기구를 통해 침몰 과정에서 많은 승무원들이 함내로 빨려 들어갔다[36].
오전 10시 57분, 시나노는 전복되어 함수부터 침몰했다. 침몰 위치는 시오노미사키 남동쪽 약 약 104.61km 해상(북위 33도 07분, 동경 137도 04분[22])이며, 수심은 약 4000m이다[22]. 이 침몰로 아베 함장과 항해사 2명을 포함한 1,435명이 사망했고, 1,080명(장교 55명, 사병 993명, 민간인 32명)이 구조되었다[22]. 생존자들은 함선 손실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1945년 1월까지 미츠코지마 섬에 격리되었다[37].
아처피시의 엔라이트 함장은 처음에는 약 28449316.00kg톤급 히요급 항공모함을 격침한 것으로 인정받았으나, 전후 일본 측 기록과 대조한 결과, 약 73155384.00kg에 달하는 거대 항공모함 시나노를 격침시킨 사실이 확인되었다[38]. 이 공로로 엔라이트 함장은 해군 십자 훈장을 받았다[38]. 시나노는 역사상 잠수함에 의해 격침된 가장 큰 군함으로 기록되었다.
전후 미국 해군 기술 조사단은 시나노의 설계 자체에 결함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특히 수선 장갑과 수면 아래 방뢰 벌지 사이의 연결부 설계가 취약하여 어뢰가 모두 이 부분을 따라 폭발했으며, 어뢰 폭발 충격으로 내부 구조물이 파괴되어 침수를 가속화시킨 점, 방수 격벽 공사가 미비했던 점 등이 주요 침몰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생존자들은 침수가 너무 빨라 손쓸 틈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아베 함장의 초기 상황 오판과 미숙한 대응 역시 피해를 키운 요인으로 평가된다.
4. 3. 침몰과 피해
1944년 11월 28일, 시나노는 추가 장비 설치를 위해 3척의 구축함(이소카제, 유키카제, 하마카제)의 호위를 받으며 요코스카를 떠나 구레 항으로 향했다. 함장 아베 도시노 대좌가 2,176명의 승조원과 300명의 조선소 인부, 40명의 민간인 고용원을 지휘했다. 당시 시나노는 완벽한 상태가 아니었다. 방수 격벽의 기밀 검사가 완료되지 않았고, 12기의 보일러 중 4기는 작동하지 않았으며, 승조원 대부분은 실전 경험이 부족하고 손상 통제 훈련도 미흡했다. 아베 함장은 출항 연기를 요청했으나,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을 우려한 해군 지도부는 이를 거부했다. 8기의 보일러만으로도 20kn의 속력을 낼 수 있었기에, 혼슈 남쪽 해역의 미군 잠수함을 따돌릴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출항 몇 시간 후인 20시 48분, 조셉 F. 엔라이트 소령이 지휘하는 미국 해군 잠수함 가 레이더로 시나노 함대를 탐지하고 추격을 시작했다. 시나노 측도 1시간 반 전에 잠수함 레이더를 탐지했다.[29] 아베 함장은 아처피시가 호위함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이며, 실제로는 여러 척의 잠수함으로 구성된 울프팩의 일부일 것이라고 오판했다. 22시 45분, 감시병이 수면 위의 아처피시를 발견하자 구축함 이소카제가 명령을 어기고 대열에서 이탈해 조사를 시작하려 했으나, 아베 함장은 이를 불러들여 대형을 유지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시나노의 속도(당시 2kn 더 빨랐음)로 잠수함을 따돌릴 수 있다고 믿었으나, 23시 22분경 우현 프로펠러 축의 베어링 과열 문제로 속도를 18kn으로 줄여야 했고, 이는 대부분의 미국 잠수함과 비슷한 속도였다.[30] 잠수함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지그재그 기동을 하던 시나노는 결국 아처피시에게 우현을 노출하게 되었다.
1944년 11월 29일 02시 56분, 시나노는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아처피시 쪽으로 직진했다. 8분 후, 아처피시는 동쪽으로 변침하며 잠수했고, 엔라이트 소령은 어뢰 심도를 약 3.05m로 설정하여 선체 상부에 명중시켜 전복 가능성을 높이려 했다. 03시 15분, 아처피시는 약 약 1280.16m 거리에서 6발의 어뢰를 발사했고, 호위함들의 폭뢰 공격을 피해 약 121.92m까지 급속 잠항했다.[31]
6발 중 4발의 어뢰가 평균 4.3m 심도로 시나노의 우현, 방뢰 벌지와 수선 사이의 비교적 취약한 부분에 명중했다.[26]
- 첫 번째 어뢰: 함미 냉장고실과 빈 항공유 탱크 명중, 해당 구역 기술 인력 다수 사망.
- 두 번째 어뢰: 우현 외측 프로펠러 축실 명중, 외측 기관실 침수.
- 세 번째 어뢰: 제3 보일러실 명중, 근무자 전원 사망. 구조적 결함으로 인접 보일러실 2곳 추가 침수.
- 네 번째 어뢰: 우현 공기 압축기실, 인접 대공포 탄약고, 제2 손상 통제소 침수, 인접 연료 탱크 파열.[32]
피해는 심각했지만, 승조원들은 시나노의 견고한 장갑을 과신하여 초기 손상 통제 노력이 미흡했다.[26] 아베 함장 역시 일본 어뢰보다 위력이 약한 미군 어뢰의 피해를 과소평가하여, 피격 후에도 최대 속도 유지를 명령했다. 이는 오히려 선체 파공 부위로 더 많은 해수가 유입되는 결과를 낳았다.[33] 시나노는 즉시 우현으로 10도 기울어졌고, 좌현 빌지에 약 3048141.00kg의 해수를 채워넣는 대응 침수에도 불구하고 기울기는 13도로 증가했다.[34] 피해가 예상보다 심각함을 인지한 아베 함장은 가장 가까운 육지인 기이 반도의 시오노미사키로 항로를 변경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침수는 계속되어 03시 30분에는 15도, 05시에는 좌현 빈 탱크에 추가 대응 침수를 했음에도 12도에서 더 줄어들지 않았다. 아베 함장은 민간인들을 호위 구축함으로 이동시켰다.[35]
30분 후, 시나노는 13도의 기울기로 10kn의 속도로 항해하고 있었다. 06시경, 우현 보일러실이 완전히 침수되면서 기울기는 20도로 급격히 증가했고, 좌현 트림 탱크 밸브가 수면 위로 노출되어 무용지물이 되었다. 07시경에는 증기 압력 부족으로 모든 기관이 정지했고, 아베 함장은 기관실 폐쇄 및 전원 퇴거 명령을 내렸다. 좌현 외측 보일러실 3곳에 추가 침수를 시도했으나 기울기를 바로잡는 데는 실패했다. 구축함 하마카제와 이소카제에 예인을 명령했지만, 약 5000ton에 불과한 구축함들의 배수량으로는 시나노의 거대한 중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첫 예인줄은 끊어졌고, 두 번째 시도는 안전 문제로 중단되었다. 09시경 시나노는 모든 동력을 상실했고, 기울기는 20도를 넘어섰다. 10시 18분, 아베 함장은 공식적인 퇴함 명령 없이 승조원들에게 각자 살아남으라고 지시했다. 이때 기울기는 이미 30도에 달했다. 함선이 기울어지면서 열려 있던 엘리베이터 통로와 비행갑판 아래 배기구를 통해 해수가 쏟아져 들어왔고, 탈출하던 많은 승조원들이 함내로 빨려 들어갔다.[36]
10시 57분, 시나노는 마침내 전복되어 함미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 침몰 위치는 시오노미사키 남동쪽 약 약 104.61km 해상(북위 33도 07분, 동경 137도 04분), 수심 약 4000m 지점이었다. 아베 함장과 항해사 2명을 포함한 1,435명의 장교, 사병, 민간인이 함선과 운명을 함께 했다. 생존자는 장교 55명, 부사관 및 사병 993명, 민간인 32명 등 총 1,080명이었다.[22] 구조된 생존자들은 시나노의 손실을 비밀에 부치기 위해 1945년 1월까지 미츠코지마 섬에 격리되었다.[37] 항공모함은 8월 31일 공식적으로 해군 목록에서 제적되었다.[22]
전후 미국 해군 기술 조사단은 시나노의 침몰 원인을 분석하며 설계상의 심각한 결함을 지적했다. 특히, 선체 측면 장갑과 수선 하부의 방뢰 벌지 사이 연결부 설계가 매우 취약하여 어뢰가 모두 이 부분을 따라 폭발했다는 점, 어뢰 폭발 충격으로 기관실의 H빔이 이탈하며 인접 구획 격벽을 파괴하는 '망치' 역할을 했다는 점, 그리고 방수 격벽의 미비(리벳 접합 불량 및 기밀 테스트 미완료)로 인해 침수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어 효과적인 손상 통제가 불가능했다는 점 등이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생존자들은 침수가 너무 빨라 손쓸 틈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시나노는 잠수함의 공격으로 격침된 역사상 가장 큰 군함으로 기록되었다. 미국 해군 정보국은 시나노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으며, 아처피시의 전과를 처음에는 순양함 격침으로 인정했다가 이후 약 28449316.00kg 항공모함으로 정정했다. 전후 일본 측 기록과 대조한 후에야 아처피시가 격침한 것이 만재배수량 약 73155384.00kg에 달하는 거대 항공모함이었음을 확인하고 엔라이트 소령에게 해군 십자 훈장을 수여했다.[38]
5. 전후 분석 및 평가
미국 해군성은 시나노의 출항 당시 그 존재를 정확히 알지 못했고, 단지 야마토급 전함 3번함의 건조 가능성만 추정하고 있었다.[38] 아처피쉬는 처음에는 순양함을 격침시킨 것으로 보고했으나, 이후 28000ton급 항공모함을 격침한 것으로 정정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양측의 기록을 대조하고 나서야 미국은 아처피쉬가 격침한 함선이 실제로는 기준 배수량 6만 톤이 넘는 거대 항공모함 시나노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5. 1. 설계 및 구조적 결함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 해군 기술 임무단은 ''시나노''를 분석하여 심각한 설계상의 결함이 있었음을 밝혀냈다.[40]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선체 상부의 수선 장갑대와 수면 아래의 대어뢰 벌지 사이의 연결부 설계가 매우 부실했다는 점이다. 이는 ''야마토급 전함''과 공유하는 구조적 약점이기도 했다.[40] 아처피쉬가 발사한 어뢰는 모두 이 취약한 연결부에 명중했다.[40]어뢰의 폭발 충격은 단순히 선체에 구멍을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추가적인 손상을 유발했다. 폭발의 위력으로 인해 보일러실 중 하나의 I형강이 구조물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인접한 다른 보일러실 벽에 구멍을 뚫는 결과를 초래했다.[40] 이는 연쇄적인 침수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방수 격벽의 문제도 ''시나노''의 침몰을 가속화한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다. 출항 전에 각 격실의 방수 테스트를 제대로 실시하지 않아 잠재적인 누수 지점을 미리 발견하고 보수할 기회를 놓쳤다.[40] 부장은 선내로 엄청난 양의 물이 들어온 것이 격실의 기밀 테스트 실패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마지막 어뢰 피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방수문 틈새로 공기가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는 해수가 빠른 속도로 배 안으로 밀려들고 있음을 의미하며 방수문 자체의 부실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41] 다른 생존자들도 침수가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 손쓸 틈이 없었다고 증언했으며, 일부는 격벽 접합부의 리벳이 터져나가면서 침수가 급격히 진행되었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설계 및 구조적 결함들은 ''시나노''가 어뢰 피격 후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침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5. 2. 역사적 의의
야마토급 전함 3번함으로 건조가 시작되었으나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 이후 항공모함으로 개조된 시나노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항공모함으로 일본 해군의 큰 기대를 모았다.[42] 일본 해군 본부는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는 상황에서 시나노가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 달리, 시나노는 1944년 11월 19일 취역한 지 불과 열흘 만인 11월 29일, 첫 항해 중 미국 해군 잠수함 아처피시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72][317]시나노의 침몰은 여러 가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첫째, 일본 해군력의 약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나노는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여 건조된 최신예 거대 항공모함이었지만, 미완성 상태[190]에서 무리하게 회항을 강행하다가 단 한 척의 잠수함 공격에 허무하게 격침되었다. 이는 전쟁 말기 일본의 자원 부족, 기술적 한계, 그리고 작전 운용 능력의 저하를 드러내는 명백한 증거였다. 특히 아베 도시노 함장의 상황 오판과 초기 대응 미숙, 승조원들의 훈련 부족, 방수 격벽 문제[34] 등 총체적인 문제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피해를 키웠다. 이는 일본 해군이 더 이상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능력을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둘째, 태평양 전쟁의 결정적인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될 수 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항공모함 전력 보강을 위해 개조된 시나노였지만, 실전에 투입되기도 전에 상실됨으로써 일본의 항모 전력 회복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이는 일본의 패망을 더욱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조차 그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38] 거대 항모가 첫 항해에서 침몰했다는 사실은 일본 군부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전쟁 수행 의지를 심각하게 꺾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일본 군국주의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극비리에 건조되며 큰 기대를 모았던 시나노의 허무한 최후는 당시 일본 군국주의 체제가 안고 있던 문제점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미군의 공습을 우려하여 미완성 상태의 함선을 무리하게 출항시킨 지도부의 조급증, 설계상의 결함[22]과 건조 과정의 부실함, 그리고 실전 경험 부족과 지휘관의 오판 등은 당시 일본 군부의 경직된 의사결정 구조와 기술적, 전략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는 거함거포주의에 대한 집착과 시대 변화에 대한 둔감함이 빚어낸 비극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특히 한국의 관점에서 시나노의 침몰은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 정책 실패와 일제 강점기 종식의 필연성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일본의 군사적 패배는 곧 식민지 지배의 종말을 의미했으며, 시나노와 같은 강력한 군함의 손실은 일본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이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시나노의 침몰은 일본 제국주의의 야욕이 결국 좌절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결론적으로 시나노는 잠수함에 의해 격침된 역사상 가장 큰 군함[22]이라는 기록과 함께, 일본 해군의 몰락과 태평양 전쟁의 향방, 나아가 일본 군국주의 시대의 종언을 상징하는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6. 인양 계획 및 유물
종전 직후, 침몰 지점은 시마 반도 남서쪽 약 3.22km 해역으로 추정되었고,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허가만 얻으면 인양이 비교적 쉬울 것으로 여겨졌다. 1951년 10월에는[419] 연합군 최고사령부로부터 대장성으로 함체가 반환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도카이 재무국이 수심 조사 등 인양 준비를 시작했다고 보도되기도 했으나, 실제로 인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나노에 탑재될 예정이었던 주포탑 전면 방패는 전후 미국군이 기술 조사를 위해 압수하여 미국 본토로 가져갔다. 두께 65cm에 달하는 이 장갑판은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40cm 포탄 시험에서 파괴되었으며, 그 잔해는 워싱턴 해군 공창 공원에 전시되어 현재도 볼 수 있다. 일본 측에서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부되었다.
시나노용 46cm 포신은 7개가 완성되었는데, 이 중 2개는 미군에 압수되어 미국 본토로 보내졌으나 시험 사격 없이 분해되어 고철 처리된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포신은 야마토나 무사시의 포신 교체에 사용되지 못하고 일본 내에서 파괴되었다.
시나노를 상세하게 촬영한 사진은 도쿄만 내 공시 중 요코하마 앞바다에서 이시카와지마 조선소 기술자 아라카와 히로시가 촬영한 것이 유일하게 확인된다. 그 외에는 미군 정찰기가 요코스카항 상공에서 촬영한 사진에 항행 중인 모습이 우연히 찍힌 것 1장과, 요코스카항의 6호 건조 독에 입거한 상태를 공중 촬영한 사진(전문가 분석 결과 시나노로 단정)이 현존한다.
시나노를 건조했던 요코스카 해군 공창의 6호 건조 독은 현재 주일 미군이 항공모함 및 각종 함선의 정비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독의 외벽은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현용 군사 시설이므로 특별 허가 없이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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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安藤 信濃, 豊田 信濃生涯
[285]
서적
豊田 信濃生涯
[286]
서적
猛き艨艟
[287]
문서
S1911十七駆日誌(1)
[288]
서적
豊田 信濃生涯
[289]
서적
豊田 信濃生涯
[290]
서적
海上護衛戦(角川)
[291]
간행물
昭和18年9月1日~昭和19年 11月30日 伊勢防備隊戦時日誌戦闘詳報(14)
https://www.jacar.ar[...]
[292]
문서
S1911十七駆日誌(1)
[293]
문서
S1911十七駆日誌(1)
[294]
서적
豊田 信濃生涯
[295]
서적
エンライト 信濃!
[296]
서적
安藤 信濃, 豊田 信濃生涯
[297]
서적
完本太平洋戦争下
[298]
서적
エンライト 信濃!
[299]
서적
空母二十九隻
[300]
서적
井上 磯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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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S1911十七駆日誌(1)
[302]
서적
空母二十九隻
[303]
서적
安藤 信濃, 雪風ハ沈マズ新装, 信濃少年兵
[304]
서적
世界奇跡の駆逐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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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BS1スペシャル 「幻の巨大空母“信濃”~乗組員が語る 大和型“不沈艦”の悲劇~」(後編)
https://www.nhk-o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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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信濃少年兵
[307]
서적
豊田 信濃生涯
[308]
서적
安藤 信濃
[309]
서적
武藏下
[310]
문서
S1911十七駆日誌(1)
[311]
서적
安藤 信濃, 豊田 信濃生涯
[312]
서적
安藤 信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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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S1911十七駆日誌(1)
[314]
문서
S1911十七駆日誌(1)
[315]
서적
安藤 信濃
[316]
서적
続海軍くろし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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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1911十七駆日誌(1)
[318]
서적
エンライト 信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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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安藤 信濃
[318]
서적
奇跡の駆逐艦
[319]
서적
野元、航母(2013)
[320]
서적
諏訪 撃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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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エンライト 信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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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元、航母(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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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エンライト 信濃!
[323]
서적
エンライト 信濃!
[323]
서적
安藤 信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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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諏訪 撃沈
[325]
서적
安藤 信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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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藏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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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1911十七駆日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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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藤 信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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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豊田 信濃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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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軍技術研究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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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猛き艨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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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海軍航空部隊編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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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昭和20年9月3日(月)海軍公報 第5175号 p.1
https://www.jacar.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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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豊田 信濃生涯
[337]
서적
安藤 信濃
[338]
서적
空母二十九隻
[339]
서적
続海軍くろし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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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戦艦十二隻(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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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豊田 信濃生涯
[342]
서적
豊田 信濃生涯
[343]
서적
相良 信濃
[344]
서적
豊田 信濃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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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藤 信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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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猛き艨艟
[347]
서적
庭田、建艦秘話
[348]
서적
庭田、建艦秘話
[349]
서적
相良 信濃
[349]
서적
牧野ノート
[350]
서적
奇跡の駆逐艦
[351]
문서
海上護衛戦(角川)
[352]
문서
相良 信濃
[353]
문서
相良 信濃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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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母二十九隻
[355]
문서
豊田 信濃生涯, 相良 信濃
[356]
문서
エンライト 信濃!
[357]
문서
高松宮日記8巻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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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田 信濃生涯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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エンライト 信濃!
[360]
문서
エンライト 信濃!
[361]
문서
真相はかうだ
[362]
웹사이트
七萬一千噸、世界最大の怪物航空母艦「信濃」の劇的最後 ○沈みゆく信濃
https://hojishinbun.[...]
Hawaii Times
2024-02-11
[363]
문서
猛き艨艟
[364]
문서
歴史群像22信濃, 日本の航空母艦パーフェクトガイド
[365]
문서
日本の航空母艦パーフェクトガイド
[366]
문서
歴史群像22信濃
[367]
문서
歴史群像22信濃
[368]
문서
歴史群像22信濃
[369]
문서
相良 信濃, 牧野ノート
[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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諏訪 撃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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母艦航空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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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安藤 信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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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野ノート, 歴史群像22信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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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藤 信濃, 相良 信濃, 牧野ノー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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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野ノー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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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藤 信濃, 牧野ノー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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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ビジュアル解析】戦艦「大和」別冊宝島編集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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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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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牧野ノー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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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相良 信濃, 歴史群像22信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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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安藤 信濃, 牧野ノート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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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良 信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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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牧野ノート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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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良 信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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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田 信濃生涯, 131頁, 諏訪 撃沈, 15頁, 安藤 信濃, 131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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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元、航母(2013), 179-181頁〔 処女航海についた信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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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戦艦大和発見
角川春樹事務所ハルキ文庫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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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小林昌信ほか『戦艦「大和」檣頭下に死す』22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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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豊田 信濃生涯, 129頁。正田真五(兵曹長、操舵長)
[391]
문서
安藤 信濃, 148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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エンライト 信濃!, 66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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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良 信濃, 98頁
[394]
문서
安藤 信濃, 115-116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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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高松宮日記7巻, 543頁〔 九月四日(月)晴 〇六五七品川発、海軍砲術学校|横砲校へ。〇九〇〇工廠ニテ「信濃」防空指揮所装備ニツキ研究アリ。機動艦隊ノ意見ニヨル改装ニ決スル 〕
[396]
문서
エンライト 信濃!, 66、352頁。千早正隆訳「私が設計したマンモス空母信濃の秘密」丸1960年11月号より孫引き。
[397]
간행물
丸
2011-02
[398]
문서
最強戦闘機紫電改, 136-137頁
[399]
문서
母艦航空隊, 326-328頁『艦上戦闘機「紫電改」信濃飛行甲板上の勇姿 菊原静男』
[400]
문서
相良 信濃, 98頁, 歴史群像22信濃, 99頁
[401]
문서
牧野ノート, 196頁
[402]
문서
牧野ノート, 201頁
[403]
문서
幻の航空母艦, 262頁
[404]
문서
海軍造船技術概要, p.288
[405]
문서
相良 信濃, 98頁, 牧野ノート, 201-202頁
[406]
문서
相良 信濃, 99頁, 牧野ノート, 190頁
[407]
문서
牧野ノート, 190頁
[408]
문서
歴史群像22信濃, 167頁, 神谷武久(工員)談。
[409]
문서
安藤 信濃, 11-14頁, 歴史群像22信濃, 82頁
[410]
문서
常時運用する常用機と異なり、分解収納して修理の際の部品として使用したり、未搭載であっても予算上確保していて、損失機が出た時に即座に(手続き上)補充できるようにしている機体のこと
[411]
문서
昭和19年10月19日作成
[412]
문서
牧野ノート, 204頁
[413]
문서
諏訪 撃沈, 15頁, 海軍技術研究所, 251頁
[414]
서적
最後の戦闘機紫電改
光人社
1994
[415]
문서
豊田 信濃生涯, 308頁, 諏訪繁治(兵曹、通信科)
[416]
간행물
歴史群像太平洋戦史シーリズ 大和型戦艦2 最新の模型・考証・資料で今甦る超超弩級艦の実相
学習研究社
1998
[417]
웹사이트
BS1スペシャル 「幻の巨大空母“信濃”~乗組員が語る 大和型“不沈艦”の悲劇~」(前編)
https://www.nhk-onde[...]
[418]
간행물
丸
2019-11
[419]
뉴스
青鉛筆
朝日新聞
1951-10-21
[420]
문서
昭和20年2月16日(昭和19年11月29日付)海軍辞令公報(甲)第1723号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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