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리쿠스 1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알라리크 1세는 4세기 후반에 태어난 서고트족의 왕으로, 로마 제국 말기에 활약했다. 초기에는 로마 군대에 복무하며 발칸반도에서 활동했으나, 로마의 부당한 처우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고트족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고, 서로마 제국을 침공하여 이탈리아를 약탈했으며, 로마를 포위하고 몸값을 요구했다. 410년에는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을 일으켰으며, 이후 남부 이탈리아에서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 정복을 시도하다가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서고트족은 아키텐 지방에 정착하여 로마 제국 내 최초의 자치적인 게르만 왕국을 건설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370년 출생 - 장손도생
장손도생은 북위의 인물로, 탁발사를 섬기며 군사적 업적을 세우고 송나라의 침공을 막아냈으며, 사공과 시중을 역임하고 상당왕에 봉해졌으며 82세로 사망했다. - 서고트인의 왕 - 아타나길두스
아타나길두스는 554년 서고트 왕국의 왕이 되어 비잔틴 제국의 침입에 대응하고 프랑크 왕국과의 혼인 동맹을 통해 왕국의 안정을 추구했으나, 그의 사후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이 발생했다. - 서고트인의 왕 - 알라리쿠스 2세
알라리쿠스 2세는 485년부터 507년까지 서고트 왕국을 통치하며 로마법 존중, 법률 체계 정비, 교회와의 원만한 관계 유지에 힘썼으나, 프랑크 왕국과의 갈등 심화로 부예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하여 서고트 왕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알라리쿠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서고트의 왕 |
재위 기간 | 395년 – 410년 |
즉위 | 395년 |
선임자 | 아타나리크 |
후임자 | 아타울프 |
왕조 | 발트 |
아버지 | 미상 |
어머니 | 미상 |
출생일 | 기원후 370년경? |
출생지 | 도브루자, 다뉴브 삼각주, 페우케 섬 (현재의 루마니아) |
사망일 | 410년 (40세 전후) |
사망지 | 코젠차, 이탈리아, 로마 제국 (현재의 이탈리아, 코센차) |
매장지 | 칼라브리아, 이탈리아, 부센토 강 |
종교 | 아리우스파 |
고트어 | 𐌰𐌻𐌰𐍂𐌴𐌹𐌺𐍃 |
로마자 표기 | Alarīks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아타울프의 자매 |
자녀 | (서자 또는 의붓아들) 테오도리크 1세 |
2. 초기 생애와 발칸반도에서의 연방 지위
알라리크는 4세기 후반, 오늘날 루마니아의 도나우 삼각주 지역에 있는 페우케 섬에서 서고트족 귀족 가문인 발티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그는 훈족의 침입으로 인해 도나우 강을 건너 대규모 이주를 한 고트족의 일원으로서, 로마와의 전쟁 시기에 로마 제국의 변방에서 성장했다.
382년, 고트족과 로마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포에데라티'')에 따라, 알라리크는 로마 군대에 복무하게 되었다. 이 조약은 로마 제국 영토에서 체결된 최초의 ''페데루스''였으며, 알라리크가 성장한 이 반자치 게르만 부족은 평화, 경작 가능한 토지에 대한 통제, 로마의 직접적인 행정 통제로부터의 자유를 대가로 로마 군대에 병력을 제공해야 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알라리크와 같은 많은 고트족은 "동부 야전군 정규 부대에 소집"되었고, 다른 고트족은 테오도시우스 1세가 서부 찬탈자 마그누스 막시무스와 에우게니우스에 대항하여 이끈 작전에 보조병으로 복무했다.
2. 1. 로마에 대한 반란, 고트족 지도자로 부상
391년, 알라리크는 고트족과 여러 부족 연합의 지도자로 등장하여 트라키아를 침공했으나, 반달족 출신의 로마 장군 스틸리코에게 저지당했다.[1] 로마 시인 클라우디아누스는 알라리크를 남부 트라키아를 공포에 떨게 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위협"으로 폄하했지만, 알라리크의 군대는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헤브루스 강을 건너는 것을 막을 만큼 강력했다.394년, 알라리크는 프리지두스 전투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를 도와 프랑크족 장군 아르보가스트가 옹립한 서로마 황제 에우게니우스에 맞서 고트족 군대를 이끌었다. 이 전투에서 고트족은 1만 명의 병력을 잃는 큰 희생을 치렀으나, 알라리크는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1]
이에 불만을 품은 알라리크는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반란을 일으켰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알라리크는 동서 로마 제국에서 새로운 체제가 시작되면서 더 높은 지위를 원했지만 좌절되었다고 한다. 서고트족은 프리지두스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로마의 부당한 대우와 적은 보상에 실망한 알라리크는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트족 출신 로마 관료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서고트족은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거짓된 평화를 누리는 것보다 스스로의 싸움을 통해 새로운 왕국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알라리크는 서고트족의 왕으로 추대되었다.[1]
3. 테오도시우스 1세 휘하의 복무
392년, 알라리쿠스는 로마 군대에 합류하여 고트족과 로마 간의 적대 행위 감소에 기여했다.[1] 394년, 프리지두스 전투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를 도와 프랑크족 출신 찬탈자 아르보가스트에 맞서 싸웠다.[2] 이 전투에서 테오도시우스는 고트족 ''포에데라티''를 소모품처럼 활용하여 약 1만 명의 병력을 잃었지만,[3] 알라리쿠스는 황제에게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이 참혹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소수 중 한 명이었다.[4] 많은 로마인들은 이 전투를 고트족의 희생을 통한 승리로 여겼다.[5] 알라리쿠스의 전기 작가 더글러스 보인(2020)은 테오도시우스의 통치 방식과 로마 군 복무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6]
4. 동로마 제국 내에서의 준독립적 활동 및 동로마 제국의 인정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고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자, 알라리크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1] 그는 콘스탄티노플 주변까지 진군했으나, 도시를 포위할 수 없음을 깨닫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테살리아를 거쳐 테르모필레를 저항 없이 통과했다.[4] 당시 동로마 제국군은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 훈족의 침입을 막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5]
알라리크는 아티카 지방을 황폐화시키고, 포키스와 보이오티아의 비옥한 땅을 유린하며 주민과 가축을 학살하고 많은 여성들을 약탈했다. 테베는 그냥 지나쳤지만, 아테네와 항구 도시 피레우스를 점령한 후에는 금품을 받고 안전을 보장하는 협정을 맺어 도시와 주민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다.[7] 그러나 396년, 알라리크는 엘레우시스 비의의 마지막 흔적을 파괴하여 청동기 시대부터 이어져 온 고대 그리스인의 종교 의례 전통을 종식시켰다.[8] 또한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진격하여 코린토스, 아르고스, 스파르타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많은 주민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며 도시들을 황폐화시켰다.[9]
397년, 스틸리코가 그리스로 건너와 폴로이 산에서 고트족을 포위하여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나, 알라리크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스틸리코는 동로마 황제의 퇴각 명령을 받고 물러났고, 이후 서고트족은 에피루스(현재의 알바니아)와 일리리쿰까지 진출했다.[11] 동로마 제국의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알라리크의 세력을 인정하고 그를 일리리쿰의 마기스터 밀리툼(군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서로마 제국을 견제하고자 했다.[2][12]
5. 서로마 제국 인정 추구 및 이탈리아 침공
401년, 알라리크는 더 나은 지위와 영토를 얻고자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북부 지역을 약탈하며 로마 시민들에게 공포를 안겨주었다.[13] 반달족과 로마인 혼혈 출신 장군 스틸리코는 알레만니족과의 전투를 급히 마무리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와 알라리크에 맞섰다.[14]
402년 4월 6일, 폴렌티아에서 스틸리코가 이끄는 로마군은 알라리크의 서고트족에게 큰 피해를 입히며 승리했다.[15] 이 전투에서 알라리크의 아내가 포로로 잡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는 서고트족이 민족 이동의 일환으로 여성과 아이들을 동반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다.[17] 같은 해, 알라리크는 베로나에서 다시 한번 스틸리코에게 패배하여 이탈리아에서 물러났다.[3] 406년 라다가이스가 이끄는 고트족의 이탈리아 침공 때, 알라리크는 일리리쿰에 머물렀다.
알라리크의 이탈리아 침공은 비록 실패했지만, 중요한 역사적 결과를 낳았다. 402년, 호노리우스 황제는 방어상의 이점과 동로마 제국과의 연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서로마 제국의 수도를 밀라노에서 라벤나로 옮겼다.[18] 또한, 브리튼 섬 주둔 로마 군단 철수는 409년 로마 제국의 브리타니아 지배 종식, 픽트족과 색슨족의 침입을 야기했다.[18]
5. 1. 이탈리아 1차 침공 (401년~403년경)
401년, 알라리크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을 약탈했다.[3] 이탈리아 침입은 401년 말에 시작되었으나, 스틸리코가 "변방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레티아''에 있었기 때문에 402년까지는 서로 대치하지 않았다.[14] 알라리크의 이탈리아 진입은 아퀼레이아 근처의 알프스 국경을 넘는 경로를 따랐다.[3] 이후 6개월에서 9개월 동안, 북부 이탈리아 도로에서 고트족의 공격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3]402년, 폴렌티아와 베로나에서 스틸리코에게 패배했다.[3] 폴렌티아 전투는 부활절 일요일에 벌어졌으며, 스틸리코는 알라리크의 아내와 자녀를 포로로 잡고, 알라리크가 약탈하여 축적한 많은 보물을 압수하는 승리를 거두었다.[3] 그러나 스틸리코는 알라리크를 완전히 격파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 이탈리아에서 물러나게 했다.[3] 이러한 스틸리코의 결정에 대해, 쿨리코프스키는 "스틸리코가 콘스탄티노플과의 냉전을 고려할 때, 알라리크만큼 순종적이고 폭력적인 잠재적 무기를 파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3]
404년과 405년 사이, 알라리크는 네 개의 ''판노니아'' 주 중 하나에 머물면서, "동쪽과 서쪽을 경쟁시키면서 잠재적으로 둘 모두를 위협할 수 있었다".[3]
5. 2. 이탈리아 2차 침공, 서로마 정권과의 합의
406년부터 407년에 걸쳐, 반달족, 수에비족, 알라니족 등 게르만 부족들이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를 침공하고 브리타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서로마 제국에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알라리크는 다시 한번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노리쿰(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19]408년, 알라리크는 서로마 제국에 에피루스 침공에 대한 보상으로 금 약 1814.37kg를 요구했다. 이는 당시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였던 스틸리코의 강력한 압력으로 로마 원로원에서 지불이 합의되었다.[19] 그러나 몇 달 뒤, 스틸리코와 그의 참모들은 호노리우스 황제의 명에 의해 살해당했다.[20]
스틸리코 사후, 이탈리아 각지에서는 반 게르만 정서가 확산되면서, 포에데라티로 복무하던 고트족과 반달족 등 게르만족 병사들의 가족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살아남은 3만 명의 게르만족 병사들은 알라리크에게 의탁하여 로마에 대한 복수를 간청했다.[21] 알라리크는 이들을 이끌고 줄리안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군했다.[22]
알라리크는 로마를 포위하고 식량 공급을 차단하는 전략을 사용했다.[23] 굶주림에 지친 로마 시민들은 알라리크와 협상하여 금 약 2267.96kg, 은 약 13607.76kg, 비단 옷 4천 벌, 염색 의류 3천 벌, 종이 약 1360.78kg를 제공하고, 4만 명의 고트족 노예를 해방하는 조건으로 포위를 풀었다.[24]
5. 3. 서로마 쿠데타 이후의 적대 관계 재개
408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와 그의 가족을 고트족과의 거래 혐의로 처형했다.[3] 호노리우스는 로마 주민들에게 "포에데라티"(동맹 부족)로서 로마군에 제공된 고트족의 처자를 죽이도록 선동했다. 이로 인해 약 3만 명의 고트족 병사들이 살해된 가족의 복수를 위해 알라리크에게 돌아섰고, 로마 진군에 참여했다.[3] 알라리크는 다시 황제의 적으로 선포되었다.[1] 올림피우스의 병사들은 연방군 병사들의 가족을 학살했고, 군대는 알라리크에게 대거 탈주했다.[1] 수천 명의 야만족 용병들이 아내와 자녀와 함께 노리쿰에서 알라리크에 합류했다.[1]5. 4. 로마 1차 포위, 합의된 몸값
408년, 알라리쿠스는 살해된 가족에게 복수하고자 새로 합류한, 의욕 넘치는 약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그는 율리안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이동하여, 라벤나의 황실을 우회하여 같은 해 9월 로마 시를 봉쇄했다. 알라리쿠스는 굶주림을 무기로 삼았고, 평화를 간청하는 원로원 사절단에게 "건초가 두꺼울수록 베기가 쉽다!"라는 유명한 대답을 했다.흥정 끝에 기근에 시달린 시민들은 아래와 같은 몸값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1]
품목 | 수량 |
---|---|
금 | 약 2267.96kg |
은 | 약 13607.76kg |
비단 튜닉 | 4,000 벌 |
진홍색 가죽 | 3,000 개 |
후추 | 약 1360.78kg |
해방된 고트족 노예 | 약 40,000 명 |
5. 5. 서로마와의 합의 실패, 알라리크의 자체 황제 옹립
409년, 알라리크는 로마 제국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프리스쿠스 아탈루스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고 자신은 군사령관(마기스터 밀리툼)에 임명되었다.[1][27] 그러나 아탈루스는 권력의 한계와 알라리크에 대한 의존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알라리크의 조언을 따르지 않아 아프리카의 곡물 공급을 호노리우스를 지지하는 ''아프리카 총독(comes Africae)'' 헤라클리안에게 잃었다. 결국 알라리크는 아탈루스를 폐위시키고, 라벤나와 다시 협상을 시도하려 했다.[26]6. 로마 약탈 (410년)
410년 8월 24일, 알라리크와 그의 군대는 로마 약탈을 시작하여 사흘 동안 지속되었다.[30] 서고트 군대는 살라리아 문을 통해 로마 시내로 진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30]
이 약탈로 아우구스투스 영묘와 하드리아누스 영묘 등 역대 황제의 묘소가 파헤쳐지고 유골함이 파괴되는 등 로마를 상징하는 많은 공공 시설이 피해를 입었다. 라테라노 궁전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증한 은제 성체 용기가 약탈당했다. 시내 전역에서 가치 있는 물건들이 약탈되었지만, 건물 자체의 파괴는 포룸 로마눔의 원로원 의사당 부근과 살라리아 문 부근에 한정되었다. 살라리아 문 근처의 살루스티우스 정원은 파괴되어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고, 포룸 로마눔의 바실리카 아이밀리아 및 바실리카 율리아도 이때 불탔다. 교회 관계 시설은 파괴를 면했다.[31]
호노리우스 황제는 알라리크에게 라벤나 성 밖 12km 떨어진 곳에서 직접 회담을 제안했고, 알라리크는 회담에 참석했지만, 알라리크와 적대 관계에 있던 고트족 족장 살루스가 이끄는 로마 소부대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알라리크는 공격에서 살아남았고,[29] 로마의 배신에 실망하여 로마로 진격을 시작했다.
로마는 4만 명의 서고트 군에 포위되어 식량이 부족해 기아에 시달렸다. 로마는 평화 협상을 통해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포위를 풀기로 약속했지만, 황제가 승인하지 않아 실패했다.
당대 교회의 기록에 따르면, 서고트족은 기독교 교회를 약탈하지 않았고, 도망쳐 온 사람들을 보호했으며, 성 베드로의 것이라며 개인 저택의 금은 식기를 빼앗지 않는 등 관대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31]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예외적인 사례이며, 로마 시민들은 도시 포위와 약탈로 인한 파멸의 공포를 겪어야 했다.
주민들은 큰 피해를 보았고, 황제의 여동생 갈라 플라키디아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노예로 팔리거나 강간, 학살당했으며, 극소수만이 몸값을 지불하고 구출되었다. 화를 면한 주민들은 멀리 아프리카 속주로 피신했다.[33]
7. 이탈리아 남부로의 이동, 질병으로 인한 죽음
로마 약탈 이후, 알라리크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남쪽 캄파니아로 이동하여 시칠리아로 항해하려 했다. 이는 곡물과 기타 물품을 얻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폭풍으로 인해 함대가 파괴되면서 계획은 좌절되었다.[34] 411년 초, 이탈리아 북쪽으로 돌아가는 여정 중 알라리크 1세는 브루티움의 콘센티아(오늘날의 칼라브리아 코센차)에서 병을 얻어 사망했다.[35] 그의 사인은 열병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35] 학자들은 종종 알라리크 1세의 사망 원인에 대해 궁금해했는데, 2016년에 이르러 프란체스코 갈라시와 그의 동료들은 알라리크 1세의 죽음에 대한 모든 역사적, 의학적, 역학적 자료를 자세히 검토한 후, 근본적인 원인이 말라리아라고 결론 내렸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시신은 서고트족의 이교도 관습에 따라 부젠토 강 강바닥에 묻혔다고 한다. 무덤을 파는 동안 강은 일시적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그 안에 알라리크 1세와 그의 가장 귀중한 전리품이 매장되었다. 일이 끝나자 강은 다시 평소의 흐름으로 돌아갔고, 무덤 위치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작업을 완료한 포로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36]
8. 여파
알라리크 사후, 그의 매제이자 후계자인 아타울프가 서고트족 군대의 지휘권을 승계받았다.[4] 아타울프는 3년 후 호노리우스의 누이인 갈라 플라키디아와 결혼했다.[5]
알라리크의 지도력 아래, 서고트족은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되었고, 아키텐 지방에 정착하여 로마 제국 내 최초의 자율적인 게르만족 왕국을 건설했다.[6] 서고트족은 418년 또는 419년경 호노리우스 황제가 로마의 속주였던 아키텐을 양도하면서 정착할 수 있었다.[7]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과 아타울프의 아키텐 정착 이후, 서부 지역에서는 게르만족 집단이 급격히 성장하여 여러 서부 속주를 통제하기 시작했다.[8] 이들 중에는 스페인과 아프리카의 반달족, 스페인과 아키텐의 서고트족, 상부 라인과 남부 골의 부르군트족, 하부 라인과 북부 및 중부 골의 프랑크족 등이 있었다.[9]
9. 관련 작품
- BBC 제작, 『로마 제국의 탄생과 몰락』 제6화 '몰락의 시작'
- 『바바리안 라이징 ~로마 제국에 반역한 전사들~』 제6화
참조
[1]
서적
ギボン(4)(1996)
[2]
서적
ギボン(4)(1996)
[3]
서적
ギボン(4)(1996)
[4]
서적
ギボン(4)(1996)
[5]
서적
ギボン(4)(1996)
[6]
서적
ギボン(4)(1996)
[7]
서적
ギボン(4)(1996)
[8]
서적
ギボン(4)(1996)
[9]
서적
ギボン(4)(1996)
[10]
서적
ギボン(4)(1996)
[11]
서적
ギボン(4)(1996)
[12]
서적
ギボン(4)(1996)
[13]
서적
ギボン(4)(1996)
[14]
서적
ギボン(4)(1996)
[15]
서적
ギボン(4)(1996)
[16]
서적
ギボン(4)(1996)
[17]
서적
ギボン(4)(1996)
[18]
서적
ギボン(4)(1996)
[19]
서적
ギボン(4)(1996)
[20]
서적
ギボン(4)(1996)
[21]
서적
ギボン(5)(1996)
[22]
서적
ギボン(5)(1996)
[23]
서적
ギボン(5)(1996)
[24]
서적
ギボン(5)(1996)
[25]
서적
ギボン(5)(1996)
[26]
서적
ギボン(5)(1996)
[27]
서적
ギボン(5)(1996)
[28]
서적
ギボン(5)(1996)
[29]
서적
ギボン(5)(1996)
[30]
서적
ギボン(5)(1996)
[31]
서적
ギボン(5)(1996)
[32]
서적
ギボン(5)(1996)
[33]
서적
ギボン(5)(1996)
[34]
서적
ギボン(5)(1996)
[35]
서적
ギボン(5)(1996)
[36]
서적
ギボン(5)(1996)
[37]
서적
ギボン(5)(1996)
[38]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