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야 아키히코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야 아키히코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 야구 해설가이다.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야쿠르트 아톰스·스왈로스에서 포수로 활약하며 7번의 올스타, 6번의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2번의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78년에는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은퇴 후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서 코치와 감독을 역임했으며, 후지 TV와 닛폰 방송에서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야쿠르트 아톰스 선수 - 와카마쓰 쓰토무
와카마쓰 쓰토무는 홋카이도 출신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야쿠르트 아톰즈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통산 타율 0.319로 일본인 선수 역대 1위를 기록하고, 감독으로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센트럴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야쿠르트 아톰스 선수 - 다카쿠라 데루유키
다카쿠라 데루유키는 니시테쓰 라이온스 전성기를 이끈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뛰어난 타격과 수비로 베스트 나인에 3회 선정되었으며 은퇴 후에는 소년 야구 지도자와 니시테쓰 라이온즈 OB 회장으로 활동했다. - 야쿠르트 스왈로스 선수 - 도마시노 겐지
도마시노 겐지는 1988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1989년 신인왕을 수상하고 빠른 발과 수비력을 갖춘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약한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현재 야구 해설가이다. - 야쿠르트 스왈로스 선수 - 이가라시 료타
이가라시 료타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해외 리그에서 활약하며 핵심 불펜 투수로 명성을 얻었고, 현재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 중이다. - 고마자와 대학 동문 - 마쓰카와 도모아키
마쓰카와 도모아키는 쇼난 벨마레 등에서 활약한 일본의 전 축구 선수이며, 주로 중앙 미드필더로 뛰었고 2003년 YKK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 고마자와 대학 동문 - 모리 시게카즈
모리 시게카즈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 감독,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선수 시절 최우수 구원 투수상을 수상했으며,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으로 NPB 최고령 감독 데뷔 기록을 세웠고, 은퇴 후 야구 해설 및 평론가,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오야 아키히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출생일 | 1947년 12월 20일 |
출생지 | 도쿄도 오타구 |
신장 | 170cm |
체중 | 84kg |
포지션 | 포수 / 감독 |
투구 | 우투 |
타석 | 우타 |
프로 입단 | 1969년 |
드래프트 순위 | 7순위 |
첫 출장 | 1970년 4월 22일 |
최종 출장 | 1985년 10월 23일 |
선수 경력 | |
선수 | 야쿠르트 아톰스 / 야쿠르트 스왈로스 (1970–1985) |
감독 및 코치 경력 | |
코치 | 야쿠르트 스왈로스 (1984–1985)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993–1995) |
감독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996–1997, 2007–2009) |
통계 | |
리그 | NPB |
타율 | .245 |
안타 | 1144 |
타점 | 479 |
학력 | |
고등학교 | 와세다 실업 학교 고등부 |
대학교 | 고마자와 대학 |
수상 | |
미쓰이 골든 글러브상 수상 연도 | 1972년 |
일본어 표기 | |
로마자 표기 | Akihiko Ohya |
가나 | おおや あきひこ |
한자 | 大矢 明彦 |
2. 선수 경력
도쿄도 출신으로 와세다 실업고등학교를 거쳐 고마자와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리그에서 활약한 후, 1969년 드래프트 7순위로 야쿠르트 아톰스에 입단하여 포수로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초기부터 주전 포수로 기회를 잡아 강한 어깨와 수비 능력을 바탕으로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1978년에는 야쿠르트의 창단 첫 센트럴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으며, 베스트 나인과 미쓰이 골든 글러브상(당시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여러 차례 수상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명포수로 명성을 떨쳤다. 1985년 10월 23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1986년부터 후지 TV와 닛폰 방송에서 야구 해설위원 및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1993년부터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코치와 감독을 맡아 지도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 '''소속팀'''
- * 야쿠르트 아톰스·스왈로스 (1970년 ~ 1985년)
2. 1. 프로 입단 전
치과기공사인 아버지가 이끄는 팀에서 야구를 시작했다.[2] 와세다 실업고등학교에서는 중등부부터 진학했다. 2학년 때인 1964년, 전년 봄 선발 대회에서 준결승에 진출했던[3] 투수 오다 카즈오, 신도 카츠미와 배터리를 이루어 여름 고시엔 도쿄 예선에 출전했다. 우승 후보로 꼽혔으나 결승에서 슈토쿠고등학교의 에이스 나리타 후미오에게 막혀 패했다. 3학년 때인 1965년 여름 도쿄 예선에서는 준준결승에서 하기와라 야스히로(1루수), 하라다 하루아키(외야수) 등이 있던 에바라 고등학교에 연장 15회 끝에 끝내기 패배를 당해 고시엔 진출에는 실패했다. 이 예선 4회전에서는 투수로서 도립대 부속 고등학교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1년 선배로는 오다, 신도 외에 1루수 우치다 케이이치가 있었고, 동기로는 유격수 아라카와 타카시가 있다.와세다 대학 야구부의 선수 선발에는 투수로 도전했지만 통과하지 못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 1966년 고마자와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는 곧바로 포수로 돌아와 도토 대학 야구 리그에서 1학년 가을 리그부터 출전했다. 유연한 몸과 강한 손목을 활용한 타격이 돋보였다.[4] 1년 선배인 에이스 노무라 오사무와 배터리를 이루어 3학년 때인 1968년 봄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같은 해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결승에서 타부치 코이치 등이 있던 호세이 대학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4학년 때인 1969년에는 에이스 사토 미치로를 앞세운 니혼 대학에 밀려 춘계와 추계 리그 모두 2위에 그쳤다. 리그 통산 성적은 94경기 출장, 326타수 84안타, 타율 0.258, 12홈런, 53타점이다. 베스트 나인에는 4차례(포수 3회, 1루수 1회) 선정되었다. 대학 동기로는 훗날 같은 야쿠르트에 입단하게 되는 외야수 우치다 쥰조가 있다.
2. 2. 프로 선수 시절
도쿄도 출신으로 와세다 실업고등학교를 거쳐 고마자와 대학에 진학했다. 도토대학 리그 통산 94경기에 출전하여 326타수 84안타, 타율 0.258, 12홈런, 53타점을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을 4차례 선정되었다.1969년 드래프트 7순위로 야쿠르트 아톰스에 지명되어 대학 졸업 후 1970년에 입단했다. 주 포지션은 포수였다. 동기 입단 1순위 지명은 고졸 출신으로 같은 포수인 야에가시 유키오였다. 당시 스카우트 부장은 "프로에서 통용될지 불안했지만, 승부 근성이 있는 타격이 매력"이라고 평가하며, 포수로서보다 타자로서 기대하며 프로에 입단했다.
입단 첫 해인 1970년, 당시 주전 포수였던 가토 토시오가 교통 사고를 일으켜 구단으로부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으면서 5월 말부터 주전 포수로 출장 기회를 얻었다. 최종적으로 93경기에 출장하여 타율은 0.204에 머물렀지만, 강한 어깨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투수가 웨스트 볼을 던지지 않아도 화살 같은 송구로 도루를 잡아내자, 투수진은 "달려도 오야라면 안심"이라며 타자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시바타 이사오 등 센트럴 리그의 빠른 발을 가진 선수들은 "오야일 때는 달려도 소용없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실제로 시바타가 45도루로 4번째 도루왕을 차지한 1972년, 야쿠르트전에서는 5개 팀 중 가장 적은 4번의 도루만 성공했고, 도루 성공률은 0.400에 그쳤다.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최다인 14번,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는 최고의 도루 성공률 0.857을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오야의 존재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와세다 실업고 입학 당시에는 오히려 약한 어깨가 고민이었지만, 필사적인 노력으로 송구 폼의 정확도를 높였고, 투수를 겸임하며 타격 투수를 자청해 어깨를 단련했다.[5]
1971년에는 처음으로 규정 타석 (리그 23위, 타율 0.231)에 도달했고, 올스타 게임에도 팬 투표로 처음 출장했다. 2년 차에 부임한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눈에 띄어 포수 기술을 배웠고, 경기 전 연습 중에는 미하라 감독과 함께 외야 펜스를 따라 걸으며 리드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미하라 감독의 지도에 열중한 나머지 타격 연습을 하지 못한 날도 종종 있었다. 같은 해 주전 포수 자리를 완전히 확보했다.
1972년에는 제1회 미쓰이 골든 글러브상(현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오른팔 에이스 마츠오카 히로시, 왼팔 에이스 야스다 타케시 등 동갑내기 투수들과 호흡을 맞추며 투수진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베테랑 이시도 시로쿠는 "캐칭이 좋다. 좋은 소리로 잡아준다"고 평가했고, 이시오카 야스조는 "힘차게 밀어준다"고 칭찬했다. 정확한 포구, 투수의 장점을 살리는 두뇌적인[6] 리드, 냉정한 판단력과 높은 수비율도 그의 강점이었다.
이후 올스타 게임에 6번(1972년, 1974년~1975년, 1978년~1980년),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5번(1975년~1978년, 1980년), 베스트 나인 2번(1978년, 1980년)을 수상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포수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리그 최다 도루 저지율 5회, 11년간(1970년~1980년) 10번의 도루 저지율 4할 이상을 기록하는 등 강한 어깨로 명성을 떨쳤다.
1978년에는 전년에 다친 오른손등 골절이 완치되지 않은 상태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118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0.268의 좋은 성적을 남기고 베스트 나인에 처음 선정되었다. 비판적인 평론가로 알려진 히로오카 타츠로 감독조차 "오야의 매력은 모든 면에서 합격점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베스트 나인은 당연하다"고 단언했다. 경기 전에 따뜻한 물로 부상 부위를 데우면서 출전을 강행했고, 주전 포수로서 구단 사상 첫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4월 5일 한신 타이거스전(진구 구장)에서는 야스다의 대타로 나와 후루사와 겐지로부터 끝내기 홈런을 치기도 했다.[7]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7경기 모두 선발 출장하여 24타수 6안타 4타점 1홈런을 기록했고, 투수진을 안정적인 리드로 이끌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10월 18일 열린 4차전(니시노미야 구장)에서는 마츠오카 히로시와 배터리를 이뤄 후쿠모토 유타카의 도루를 저지했다. 10월 22일 7차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5회말 2사 2루 상황에서 데이브 힐튼의 타석 때, 힐튼이 2루수와 유격수 사이로 높은 바운드의 땅볼을 쳤다. 이를 잡은 바비 말카노가 1루로 송구했으나 세이프 판정을 받았다. 이 판정에 불복한 한큐의 가토 에이지 감독이 항의하는 사이, 2루 주자였던 오야가 틈을 타 홈을 밟아 귀중한 득점을 올렸다. 이후 경기는 오스기 가츠오의 홈런 판정을 둘러싸고 1시간 19분간 중단되는 등 혼란 속에서 야쿠르트가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베테랑이 되어서도 성실하고 연습에 열심이었으며, 기본 연습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80년에는 타율 0.283(리그 16위)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고, 개인 최고 기록인 50타점을 올리며 승부사 기질도 발휘했다. 야쿠르트는 전년도 최하위에서 2위로 약진했으며, 오야는 2년 만에 두 번째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81년에 부상을 당해 무릎에 물이 차기 시작하면서 공수 양면에서 성적이 크게 떨어졌다. 하지만 같은 해 7월 15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진구 구장)에서 고마츠 타츠오를 상대로 개인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다.
1983년에는 야에가시 유키오에게 주전 포수 자리를 내주었다.
1984년부터는 코치를 겸임했다.[8] 의사로부터 "더 이상 선수 생활을 하면 50세에 걷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9]
1985년 10월 23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전을 끝으로 38세의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2. 3. 수상 및 기록
- 베스트 나인: 2회 (1978년, 1980년)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6회 (1972년, 1975년 ~ 1978년, 1980년)
- * 1972년은 포수 부문에서 센트럴 리그 사상 최초 수상
- * 센트럴 리그 포수 부문 4년 연속 수상은 역대 최장 타이 기록(그 외 후루타 아츠야)
- 월간 MVP: 1회 (1980년 8월)
3. 지도자 경력
1985년 선수 은퇴 후, 1986년부터 1992년까지 후지 TV와 닛폰 방송에서 야구 해설위원 및 평론가로 활동했다.
1993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배터리 코치로 부임하여 1995년까지 재직하며 다니시게 모토노부를 지도했다.
=== 요코하마 1기 감독 시절 (1996년 ~ 1997년) ===
1996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감독으로 부임하여 1997년까지 2년간 팀을 이끌었다. 감독 부임 첫해, 내야진의 대대적인 포지션 변경을 단행했다.
선수 | 기존 포지션 | 변경 후 포지션 | 결과 |
---|---|---|---|
이시이 타쿠로 | 3루수 | 유격수 | 성공 (팀 역대 최다 출장 유격수 성장, 3년 연속 골든글러브상 수상은 3루수 시절) |
신도 타츠야 | 유격수 | 2루수 | 실패 (2루수 특유의 역 스로우 동작으로 허리 부상, 조기 이탈) |
로버트 로즈 | 2루수 | 3루수 | 실패 (3루 수비 불안으로 5월 말 2루수 복귀) |
- 1루수 고마다 노리히로는 제외되었다. 로즈가 2루수로 복귀하고 신도가 빈 3루를 맡게 되어, 실질적으로 이시이와 신도의 포지션을 맞바꾼 형태가 되었다.
투수진에서는 당시 리그 정상급 중계 투수였던 모리타 코우키를 선발로 전환시키고, 선발, 중계, 마무리를 오가던 이가라시 히데키를 셋업맨으로 고정했다. 이가라시의 보직 변경은 성공적이었으나, 모리타의 선발 전환은 성공하지 못했다. (심각한 선발 투수 부족과 시범 경기에서의 호투로 인해 모리타는 다음 해인 1997년에도 개막 투수를 맡았다.)
1996년에는 선발 투수진에게 완투를 자주 요구하여 팀 완투 수는 리그 2위인 25개를 기록했다. (완투 수 리그 1위는 우승팀인 요미우리의 30개였다.) 특히 에이스 사이토 타카시는 연장전 포함 11번의 완투를 기록하며 혹사 논란이 있었다. 완투는 늘었지만 팀 실점은 리그 최하위인 660점, 팀 평균자책점 역시 4.67로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며 전년(4.37)보다 악화되었다.
한편, 코치 시절부터 지도했던 다니시게 모토노부를 주전 포수로 적극 기용하여 리그를 대표하는 포수로 성장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1997년에는 팀 개혁이 성과를 보여 시즌 막판까지 야쿠르트와 우승 경쟁을 벌였다. 8월에는 20승 6패의 상승세로 선두 야쿠르트를 3.5게임 차까지 추격했으나, 9월 2일 맞대결에서 이시이 카즈히사에게 노히트 노런을 당하고 다음 날 경기에서도 패배하며[20] 기세가 꺾였다. 최종 성적은 리그 2위였으나 시즌 종료 후 해임되었고, 선수들은 마지막 경기 후 오야 감독을 헹가래 쳤다.[21]
=== 요코하마 2기 감독 시절 (2007년 ~ 2009년) ===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다시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2007년 10년 만에 요코하마 감독으로 복귀했다. 헤드 겸 타격 코치로 히로타, 투수 코치로 사이토 아키오를 영입했다.
2기 감독 시절에도 적극적인 포지션 변경 정책을 펼쳤다.
- 요시무라 히로키: 외야수 → 1루수 (2007년) → 외야수 복귀 (2008년, 사에키 타카히로와 교체)
- 카토 타케하루, 카와무라 타케오: 중계 투수 (우시지마 카즈히코 감독 시절 '콰트로 K'의 일원) → 선발 투수 (결과적으로 실패)
- 나스노 타쿠미: 선발 투수 → 중계 투수 (2007년, 좌완 부족으로 변경, 성공적이었으나 이듬해 팀 사정으로 선발 복귀 후 부진)
- 요시미 유지: 선발 투수 ↔ 중계 투수 (2008년 시즌 중)
- 테라하라 하야토: 선발 투수 → 마무리 투수 (2008년 시즌 중, 마크 크룬 이적 공백)
1루수로 변경된 요시무라 대신 베테랑 1루수 사에키 타카히로가 외야수로 출전하게 되었다. (요시무라는 다음 해 사에키와 자리를 바꿔 외야수로 복귀했다.)
2008년과 2009년에는 선발 투수진이 약화되어 릴리프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1기 감독 시절 선발이었던 노무라 히로키의 은퇴, 사이토와 카와무라의 구원 전환 이후 에이스 미우라 다이스케와 간간이 선발과 구원을 오간 요시미 외에는 새로운 선발 투수가 성장하지 못했다. 2기 첫해인 2007년에는 이적해 온 테라하라, 도히 요시히로, 쿠도 키미야스 등 선발 투수들의 활약으로 4위를 기록했지만, 2008년에는 테라하라의 구원 전환과 도히, 쿠도의 부진으로 선발진이 다시 약화되었다. 원포인트 릴리프 기용이 잦아 한 경기에 많은 투수를 투입하는 경우가 많았고, 인터넷 게시판이나 SNS 등에서는 요코하마의 머신건 타선에 빗대어 "'''머신건 계투'''"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오야 감독 퇴임 후에도 선발진 약화는 계속되어 후임 오바나 타카오 감독 역시 잦은 투수 교체를 했고, 2011년에는 시즌 총 투수 등판 인원 664명이라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오야 감독은 "베테랑에게 패전 처리를 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프라이드를 상하게 해서 썩을 뿐). 젊고 경험이 적은 투수라면 패전 처리라도 '던지게 해준다'라고 플러스로 작용시킬 수 있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주전 포수로는 2007년과 2008년에 아이카와 료지를 기용했다. 2008년 시즌 후 아이카와가 FA로 이적하자, 한신에서 FA로 노구치 토시히로를 영입하여 2009년에 임했다. 하지만 노구치가 스프링캠프에서 오른쪽 어깨 힘줄 파열 부상을 당하면서[22] 신인 호소야마다 타케시에게 기대를 걸고 적극적으로 기용했지만, 팀은 부진을 면치 못했고 오야 본인은 시즌 도중 휴양(사실상 경질)에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1년차는 4위로 끝났지만, 2년차·3년차 모두 90패·승률 3할대로, 선두와의 게임차가 2년차 36.5, 3년차 42.5로 크게 벌어진 최하위를 기록했다. 2009년 5월 18일,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시즌 도중 자진 사임했다. 이후 2010년부터 다시 후지 TV와 닛폰 방송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4. 해설가 및 기타 경력
1985년 10월 23일 다이요 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 후, 1986년부터 1992년까지 후지 TV와 닛폰 방송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야구 평론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1993년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배터리 코치로 부임하여 1995년까지 재직하며 다니시게 모토노부를 지도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1996년부터 1997년까지 2년간 같은 팀의 감독을 맡았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다시 후지 TV와 닛폰 방송에서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2007년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감독으로 다시 부임하며 10년 만에 지도자로 복귀했으나, 2009년 시즌 도중 팀의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5월 18일 자진 사임했다. 2010년부터는 다시 후지 TV와 닛폰 방송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둘째 딸인 오야 요코는 요코하마 구단의 2대 오피셜 리포터로 활동한 바 있다.
'''보도・정보 프로그램'''
기간 | 프로그램명 | 역할 | 담당일 | 비고 | |
---|---|---|---|---|---|
1988년 4월 | 1992년 3월 | 프로 야구 뉴스 (후지 TV) | 캐스터 | 휴일 | |
1992년 4월 1일 | 1993년 3월 31일 | 모닝 LIVE (후지 TV) | 『스포츠 제일!』담당 | 평일 | 후지 TV・닛폰 방송 야구 해설자로서 출연 |
2003년 | CS 프로 야구 뉴스 (후지 TV ONE) | 캐스터 | 월요일 | rowspan=3| | |
2004년 | 2006년 | 금요일 | |||
2011년 9월 25일 | 선데이 모닝 (TBS 텔레비전) | 『주간 의견 번』 코너 게스트 출연 | 일요일 |
'''버라이어티 프로그램・기타'''
5. 출신 학교
- 와세다 실업고등학교
- 고마자와 대학
6. 연도별 성적
- '''등번호'''
- * '''32''' (1970년)
- * '''27''' (1971년 ~ 1985년)
- * '''75''' (1993년 ~ 1995년)
- * '''81''' (1996년 ~ 1997년)
- * '''85''' (2007년 ~ 2009년)[23]
6. 1. 타격 성적
- 야쿠르트 아톰스·야쿠르트 스왈로스 (1970년 ~ 1985년)
- '''통산 1000경기 출장''' : 1978년 8월 6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7차전(후지사키다이 현영 야구장), 7번·포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202번째
- '''통산 1000안타''' : 1981년 7월 15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14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2회말에 고마쓰 다쓰오로부터 우전 안타 ※역대 120번째
- '''통산 1500경기 출장''' : 1984년 7월 27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4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8번·포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79번째
- '''올스타전 출장''' : 7회(1971년, 1972년, 1974년, 1975년, 1978년 ~ 1980년)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번 | 희생플 | 볼넷 | 고의 4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70년 | 야쿠르트 | 93 | 281 | 255 | 17 | 52 | 10 | 1 | 6 | 82 | 27 | 1 | 2 | 9 | 0 | 16 | 4 | 1 | 43 | 7 | .204 | .254 | .322 | .575 |
1971년 | 127 | 432 | 377 | 29 | 87 | 16 | 3 | 10 | 139 | 40 | 2 | 3 | 18 | 5 | 28 | 7 | 4 | 39 | 9 | .231 | .287 | .369 | .656 | |
1972년 | 120 | 416 | 361 | 44 | 97 | 24 | 2 | 5 | 140 | 40 | 6 | 2 | 15 | 4 | 36 | 12 | 0 | 33 | 9 | .269 | .332 | .388 | .719 | |
1973년 | 121 | 393 | 355 | 28 | 67 | 8 | 2 | 7 | 100 | 21 | 3 | 2 | 10 | 3 | 25 | 7 | 0 | 46 | 14 | .189 | .240 | .282 | .522 | |
1974년 | 130 | 471 | 431 | 31 | 103 | 20 | 0 | 13 | 162 | 41 | 6 | 3 | 6 | 4 | 28 | 7 | 2 | 44 | 11 | .239 | .286 | .376 | .662 | |
1975년 | 130 | 466 | 436 | 27 | 106 | 17 | 0 | 9 | 150 | 43 | 2 | 3 | 0 | 4 | 26 | 8 | 0 | 38 | 14 | .243 | .283 | .344 | .627 | |
1976년 | 122 | 454 | 408 | 30 | 93 | 17 | 1 | 7 | 133 | 42 | 4 | 4 | 9 | 1 | 34 | 3 | 2 | 29 | 14 | .228 | .290 | .326 | .616 | |
1977년 | 85 | 308 | 282 | 28 | 71 | 14 | 1 | 8 | 111 | 29 | 1 | 1 | 4 | 4 | 17 | 7 | 1 | 30 | 5 | .252 | .293 | .394 | .686 | |
1978년 | 118 | 408 | 365 | 44 | 98 | 13 | 0 | 7 | 132 | 44 | 2 | 2 | 13 | 3 | 26 | 2 | 1 | 29 | 10 | .268 | .316 | .362 | .678 | |
1979년 | 100 | 342 | 321 | 26 | 87 | 10 | 0 | 6 | 115 | 31 | 6 | 3 | 4 | 1 | 11 | 1 | 5 | 32 | 7 | .271 | .305 | .358 | .663 | |
1980년 | 110 | 404 | 368 | 35 | 104 | 15 | 3 | 8 | 149 | 50 | 1 | 10 | 4 | 4 | 25 | 2 | 3 | 32 | 14 | .283 | .330 | .405 | .735 | |
1981년 | 82 | 234 | 213 | 21 | 47 | 8 | 3 | 2 | 67 | 23 | 2 | 1 | 9 | 2 | 10 | 1 | 0 | 18 | 10 | .221 | .253 | .315 | .568 | |
1982년 | 81 | 271 | 247 | 16 | 67 | 9 | 0 | 1 | 79 | 18 | 3 | 1 | 2 | 3 | 18 | 7 | 1 | 25 | 5 | .271 | .320 | .320 | .640 | |
1983년 | 66 | 178 | 150 | 12 | 39 | 5 | 1 | 2 | 52 | 20 | 1 | 1 | 5 | 2 | 21 | 5 | 0 | 16 | 3 | .260 | .347 | .347 | .693 | |
1984년 | 50 | 89 | 77 | 10 | 23 | 1 | 1 | 2 | 32 | 9 | 1 | 0 | 4 | 0 | 7 | 0 | 1 | 6 | 1 | .299 | .365 | .416 | .780 | |
1985년 | 17 | 20 | 19 | 1 | 3 | 1 | 0 | 0 | 4 | 1 | 0 | 0 | 1 | 0 | 0 | 0 | 0 | 6 | 0 | .158 | .158 | .211 | .368 | |
통산 : 16년 | 1552 | 5167 | 4665 | 399 | 1144 | 188 | 18 | 93 | 1647 | 479 | 41 | 38 | 113 | 40 | 328 | 73 | 21 | 466 | 133 | .245 | .295 | .353 | .648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