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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위임통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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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라크 위임통치령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붕괴된 후, 영국이 이라크 지역을 위임 통치한 시기를 의미한다. 영국은 1920년 산레모 회의를 통해 위임 통치권을 획득하고, 1921년 하심 가문의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하는 이라크 왕국을 건국했다. 이 과정에서 쿠르드족의 자결권이 무시되고 쿠르디스탄 지역에 국경이 그어지면서 쿠르드 분쟁이 발생했다. 영국은 석유 개발에 주력하며 이라크 석유 회사(IPC)를 설립하여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1932년 이라크는 독립했지만, 영국은 군사 기지를 유지하고 석유 이권을 확보하며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시기는 이라크의 근대화를 촉진했지만, 민족 및 종교 갈등을 심화시키고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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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위임통치령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명칭이라크 왕국 (영국 통치 하)
현지 명칭 (아랍어)الانتداب البريطاني على العراق (알-인티다브 알-브리타니 알라 알-이라크)
일반 명칭이라크
지위국제 연맹 위임통치령
종교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야지디교
만다야교
공용어아랍어
쿠르드어
북동 신아람어
통화인도 루피
데모님이라크인
지도
1932년 이라크 지도
1932년 이라크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영국의 위임 통치
고등 판무관퍼시 콕스 (1921–1923)
헨리 도브스 (1923–1929)
프랜시스 험프리스 (1929–1932)
국왕파이살 1세 (1921–1932)
총리압드 알-라흐만 알-길라니 (1920–1922, 최초)
누리 알-사이드 (1930–1932, 마지막)
의회양원제
상원상원
하원대의원
역사
이전 국가바그다드 빌라예트
바스라 빌라예트
모술 빌라예트
알-문타피크
주요 사건산레모 회의 (1920년 4월 25일)
세브르 조약 (1921년 8월 23일, 시작)
파이살 1세 대관식 (1921년 8월 23일)
로잔 조약 (1923년 7월 24일)
앙카라 조약 (1926년 6월 5일)
영국-이라크 조약 (1930년 6월 30일)
이후 국가이라크 왕국
독립1932년 10월 3일
국기 및 국장
이라크 국기 (1924–1959)
국기 (1924–1932)
이라크 왕국 국장 (1921–1958)
국장 (1931–1932)
국가
국가 (1924–1932)السلام الملكي (앗-살람 알-말라키), 왕의 찬가

2. 역사적 배경

오스만 제국은 16세기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했다. 19세기 말부터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아랍 민족주의 운동이 성장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영국은 아랍인들의 독립을 지원하며 오스만 제국에 대항했다.

제1차 세계 대전영국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점령했다. 1920년 산레모 회의에서 영국은 이 지역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획득하였고, 8월 23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이라크 지역을 위임받아 통치하게 되었다. 하심 가문의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하는 이라크 왕국이 건국되었으며, 쿠웨이트는 이라크에서 분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쿠르드족의 민족 자결은 고려되지 않았고, 쿠르디스탄 지역에 국경이 그어지면서 쿠르드 분쟁이라는 소수 민족 문제가 발생했다. 1919년1922년부터 1924년까지 쿠르드족셰이크(샤이프)인 마흐무드 바르잔지가 반란을 일으켜 쿠르디스탄 왕국/Kingdom of Kurdistan영어이 일시적으로 수립되기도 했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는 아흐메드 바르잔지에 의한 반란도 일어났다.

메소포타미아는 "강 사이의 지방"을 의미하며,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 유역 전체를 지칭한다. 역사적으로 바그다드 북부는 아시리아, 남부는 바빌로니아로 나뉘며, 바빌로니아는 다시 북쪽의 아카드, 남쪽의 수메르로 구분된다. 특히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하류 지역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일부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형성된 곳이다.

7세기 이슬람 세력 발흥 이후 바그다드는 아바스 왕조의 수도로서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그러나 13세기 몽골의 침입을 받는 등 고난도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오랜 지배 이후 근대에는 아랍계 주민들의 독립 운동이 일어났으나, 시리아 방면에서는 프랑스, 인도·이란 방면에서는 영국이 진출하여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위임 통치령으로 분할 지배되었다. 현재는 대부분 이라크 공화국에 포함되어 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 등 잇따른 전쟁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적이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

2. 1. 오스만 제국의 지배와 제1차 세계 대전

오스만 제국은 16세기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했다. 19세기 말부터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아랍 민족주의 운동이 성장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은 아랍인들의 독립을 지원하며 오스만 제국에 대항했다.

2. 2. 영국의 메소포타미아 점령과 위임통치

제1차 세계 대전영국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점령했다. 1920년 산레모 회의에서 영국은 이 지역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획득하였고, 8월 23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이라크 지역을 위임받아 통치하게 되었다. 하심 가문의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하는 이라크 왕국이 건국되었으며, 쿠웨이트는 이라크에서 분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쿠르드족의 민족 자결은 고려되지 않았고, 쿠르디스탄 지역에 국경이 그어지면서 쿠르드 분쟁이라는 소수 민족 문제가 발생했다. 1919년1922년부터 1924년까지 쿠르드족셰이크(샤이프)인 마흐무드 바르잔지가 반란을 일으켜 쿠르디스탄 왕국/Kingdom of Kurdistan영어이 일시적으로 수립되기도 했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는 아흐메드 바르잔지에 의한 반란도 일어났다.

메소포타미아는 "강 사이의 지방"을 의미하며,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 유역 전체를 지칭한다. 역사적으로 바그다드 북부는 아시리아, 남부는 바빌로니아로 나뉘며, 바빌로니아는 다시 북쪽의 아카드, 남쪽의 수메르로 구분된다. 특히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하류 지역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일부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형성된 곳이다.

7세기 이슬람 세력 발흥 이후 바그다드는 아바스 왕조의 수도로서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그러나 13세기 몽골의 침입을 받는 등 고난도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오랜 지배 이후 근대에는 아랍계 주민들의 독립 운동이 일어났으나, 시리아 방면에서는 프랑스, 인도·이란 방면에서는 영국이 진출하여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까지 위임 통치령으로 분할 지배되었다. 현재는 대부분 이라크 공화국에 포함되어 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 등 잇따른 전쟁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적이 훼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

3. 위임통치 시기의 정치

1920년 이라크 봉기는 현대 이라크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처음으로 수니파와 시아파, 부족과 도시가 공동의 노력으로 뭉쳤다. 한나 바투투에 따르면, 이라크의 국민 국가 건설은 시아파와 수니파를 새로운 정치 체제에 통합하는 것과 부족과 강변 도시 간의 오랜 갈등, 그리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식량 생산 평야를 놓고 부족 간의 갈등을 성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1920년 봉기는 비록 짧게나마 이러한 집단을 하나로 묶었고, 이는 이라크의 갈등에 휩싸인 사회 구조에서 국가를 건설하는 길고 힘든 과정의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1921년 위임 통치령 이라크. 파이살 1세 국왕 대관식 기념 깃발


1918년과 1919년 동안 이라크에서는 3개의 중요한 반식민 비밀 결사가 결성되었다. 나자프에서 조직된 이슬람 각성 연맹(자미야 안나흐다 알이슬라미야/Jam'iyya an-naḥda al-islāmiyyaar-Latn), 대규모 저항을 위해 인구를 조직하고 동원할 목적으로 결성된 무슬림 민족 연맹(알자미야 알와타니야 알이슬라미야/al-Jam'iyya al-waṭaniyya al-islāmiyyaar-Latn)이 있었다. 1919년 2월, 바그다드에서는 시아파 상인, 수니파 교사, 공무원, 수니파와 시아파 울라마, 그리고 이라크 장교들이 연합하여 독립 수호자 (하라스 알이스티클랄/Harās al-istiqlālar-Latn)를 결성했다. 이스티클랄은 카르발라, 나자프, 쿠트, 힐라에 지부들을 두었다.

카르발라의 대 무즈타히드인 이맘 시라지와 그의 아들 미르자 무하마드 리자는 반란 노력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시라지는 이후 판결을 내리고 영국에 대한 저항을 촉구했다. 1920년 7월까지 모술은 영국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고, 무장 저항은 유프라테스 강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오랫동안 정치적 자치를 소중히 여긴 남부 부족들은 싸움에 참여하는 데 거의 유인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영국에 대한 조직적인 노력에 협력하지 않아 봉기의 효과를 제한했다.

3. 1. 초기 저항과 1920년 이라크 봉기

1918년과 1919년 동안 이라크에서는 3개의 중요한 반식민 비밀 결사가 결성되었다. 나자프에서 조직된 이슬람 각성 연맹(자미야 안나흐다 알이슬라미야/Jam'iyya an-naḥda al-islāmiyyaar-Latn), 대규모 저항을 위해 인구를 조직하고 동원할 목적으로 결성된 무슬림 민족 연맹(알자미야 알와타니야 알이슬라미야/al-Jam'iyya al-waṭaniyya al-islāmiyyaar-Latn)이 있었다. 1919년 2월, 바그다드에서는 시아파 상인, 수니파 교사, 공무원, 수니파와 시아파 울라마, 그리고 이라크 장교들이 연합하여 독립 수호자 (하라스 알이스티클랄/Harās al-istiqlālar-Latn)를 결성했다. 이스티클랄은 카르발라, 나자프, 쿠트, 힐라에 지부들을 두었다.

카르발라의 대 무즈타히드인 이맘 시라지와 그의 아들 미르자 무하마드 리자는 반란 노력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시라지는 이후 판결을 내리고 영국에 대한 저항을 촉구했다. 1920년 7월까지 모술은 영국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고, 무장 저항은 유프라테스 강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오랫동안 정치적 자치를 소중히 여긴 남부 부족들은 싸움에 참여하는 데 거의 유인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영국에 대한 조직적인 노력에 협력하지 않아 봉기의 효과를 제한했다.

1920년 이라크 봉기는 현대 이라크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처음으로 수니파와 시아파, 부족과 도시가 공동의 노력으로 뭉쳤다. 한나 바투투에 따르면, 이라크의 국민 국가 건설은 시아파와 수니파를 새로운 정치 체제에 통합하는 것과 부족과 강변 도시 간의 오랜 갈등, 그리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식량 생산 평야를 놓고 부족 간의 갈등을 성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1920년 봉기는 비록 짧게나마 이러한 집단을 하나로 묶었고, 이는 이라크의 갈등에 휩싸인 사회 구조에서 국가를 건설하는 길고 힘든 과정의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3. 2. 파이살 1세의 즉위와 하심 왕조

1921년 카이로 회담에서 영국은 하심 가문의 파이살 1세(Faisal I of Iraq)를 이라크의 초대 국왕으로 선택했다. 파이살 1세는 메카의 샤리프였던 셰리프 후세인 빈 알리(Sherif Hussein ibn Ali)의 아들로, 무함마드의 가문인 바누 하심 가문 출신이었다. 영국은 파이살 1세가 민족주의적, 이슬람적 자질을 갖춰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있으면서도 영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1921년 국민 투표를 통해 파이살 1세의 즉위가 확정되었는데, 이 투표는 96%의 찬성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투표는 이라크 국민의 진정한 감정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는, 영국 정부에 의해 신중하게 준비된 결과였다.

파이살 1세는 1922년 영국-이라크 조약(Anglo-Iraqi Treaty of 1922)을 통해 이라크 내 영국의 영향력을 제한하려 했지만, 군주제가 영국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온건한 접근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 조약은 당초 20년으로 설정되었으나 후에 4년으로 단축되었고, 1924년 6월에 비준되었다. 조약은 국왕이 영국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와 재정 정책에 대해 영국의 조언을 따르도록 규정했으며, 영국 관리들이 여러 부서에 고문 및 감찰관으로 임명될 것이라고 명시했다.

영국은 이라크 군대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이라크 정치 체제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군대가 가장 잘 조직된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대 내에서 수니파의 지배가 유지되면서, 장교들은 오스만 제국에서 복무한 수니파였고 하위 계급은 주로 시아파 부족민들로 구성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0년 8월 10일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었고, 8월 23일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현재의 이라크 지역은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이후 하심 가문의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하는 이라크 왕국이 건국되었다.

3. 3. 영국-이라크 조약 (1922년, 1930년)

1920년 산레모 회의에서 영국이 국제 연맹으로부터 이라크 위임통치권을 부여받은 후, 1922년 영국-이라크 조약이 체결되었다.[9] 이 조약은 이라크의 주권을 제한하고 영국의 이익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하는 이라크 왕국이 수립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1930년에는 새로운 영국-이라크 조약이 체결되었다.[9] 이 조약은 "긴밀한 동맹"을 규정하고, "모든 외교 정책 문제에 대한 양국 간의 완전하고 솔직한 협의"를 약속했으며, 전쟁 발생 시 상호 지원을 제공했다.[9] 이라크는 영국에게 바스라 인근과 하바니야에 있는 공군 기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으며, 자국 영토를 통해 군대를 이동할 권한을 부여했다.[9] 이 조약은 25년 동안 지속될 예정이었으며, 이라크가 국제 연맹에 가입하면 발효될 예정이었다. 이 조약으로 이라크는 1932년 국제 연맹에 가입하여 형식적으로는 독립을 이루었지만, 영국은 여전히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1930년 조약 서명과 모술 문제 해결 이후, 이라크 정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새롭게 부상한 수니파 및 시아파 토지 소유 부족 셰이크 계급은 부유하고 명망 있는 도시에 기반을 둔 수니파 가문, 오스만 제국에서 훈련받은 군 장교 및 관료들과 권력 경쟁을 벌였다.[9] 이라크의 정치 기구는 외세의 산물이었고, 민주주의 정부라는 개념은 이라크 역사에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바그다드의 정치인들은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고, 깊이 뿌리내린 지지 기반을 형성하지 못했다.[9] 따라서 헌법과 선출된 의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정치는 서구적 의미의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중요한 인물과 파벌 간의 변화하는 동맹에 가까웠다.[9] 광범위한 정치 기구의 부재는 초기 민족주의 운동이 이라크의 다양한 사회 구조에 깊숙이 침투하는 것을 방해했다.[9]

1936년1937년에는 농업 문제와 군대 징집을 둘러싸고 이라크 정부에 대한 다양한 시위와 반란이 발생했다.[9] 이들은 RAF 이라크 사령부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고, "살해는 무차별적이었고, 노인, 여성, 어린이들이 희생자였다"고 기록되었다.[9] 1937년에 농업 문제와 징집을 놓고 발생한 무장 반란 또한 "무차별적인 공중 폭격의 도움으로 진압되었다."[9] 이 혼란 속에서 시아파 종교 지도자들은 페르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이라크에서 추방되었다.[9]

영국 위임 통치와 이라크 군주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역사학자 카난 마키야는 영국 위임 통치를 "근대화의 대리인"으로 간주한다.[10] 반면, 케두리는 영국이 메소포타미아에 가져온 것은 "비참한 정치"였다고 평가한다.[11]

3. 4. 쿠르드족의 저항

쿠르드족은 이라크 위임통치령 기간 동안 자치권을 요구하며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1919년1922년 11월부터 1924년 7월까지 마흐무드 바르잔지의 난이 발생하여 쿠르디스탄 왕국/Kingdom of Kurdistan영어이 일시적으로 수립되기도 했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는 아흐메드 바르잔지가 주도한 봉기(아흐메드 바르잔지 난)가 일어났다. 이러한 쿠르드족의 저항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0년8월 10일 체결된 세브르 조약에서 쿠르드족의 민족 자결이 고려되지 않고 쿠르디스탄 지역에 국경이 그어진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는 중동 지역에서 심각한 소수 민족 문제인 쿠르드 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 봉기들은 영국 공군(RAF)의 개입으로 진압되었다.

4. 경제

영국은 이라크의 경제, 특히 석유 자원에 큰 관심을 가졌다.

== 석유 개발과 이라크 석유 회사 (IPC) ==

오스만 제국 붕괴 전, 영국이 통제하던 터키 석유 회사(TPC)는 모술 ''빌라야''(지방)에 대한 석유 개발 양허권을 보유하고 있었다.[15] 1916년 사이코-피코 협정에 따라 모술 지역은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에 놓일 예정이었으나, 1919년 롱-베랑제 협정을 통해 프랑스는 모술에 대한 권리를 영국에 양보하고 TPC의 지분 25%를 보상으로 받았다.[15]

1923년부터 영국과 이라크는 새로운 석유 양허 협상을 진행했다.[15] 이라크는 회사 지분 20% 참여를 요구했지만, 국제 연맹의 모술 귀속 투표를 앞두고 영국의 지원이 필요했던 이라크는 결국 이 요구를 철회했다.[15] 1925년 3월, 이라크의 요구 사항이 반영되지 않은 채 TPC는 이라크 석유 회사(IPC)로 명칭을 변경하고 75년 간의 석유 개발권을 획득했다.[15]

== 베두인 부족의 경제적 어려움 ==

이라크 내 유목민 베두인 부족들은 이전에는 중동 전역에서 무역을 했지만, 이라크 위임통치령의 국경 내에서만 무역을 하게 되었다.[14] 식민 행정부의 이러한 결정은 베두인에게 경제적으로 어렵고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14]

4. 1. 석유 개발과 이라크 석유 회사 (IPC)

오스만 제국 붕괴 전, 영국이 통제하던 터키 석유 회사(TPC)는 모술 ''빌라야''(지방)에 대한 석유 개발 양허권을 보유하고 있었다.[15] 1916년 사이코-피코 협정에 따라 모술 지역은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에 놓일 예정이었으나, 1919년 롱-베랑제 협정을 통해 프랑스는 모술에 대한 권리를 영국에 양보하고 TPC의 지분 25%를 보상으로 받았다.[15]

1923년부터 영국과 이라크는 새로운 석유 양허 협상을 진행했다.[15] 이라크는 회사 지분 20% 참여를 요구했지만, 국제 연맹의 모술 귀속 투표를 앞두고 영국의 지원이 필요했던 이라크는 결국 이 요구를 철회했다.[15] 1925년 3월, 이라크의 요구 사항이 반영되지 않은 채 TPC는 이라크 석유 회사(IPC)로 명칭을 변경하고 75년 간의 석유 개발권을 획득했다.[15]

4. 2. 베두인 부족의 경제적 어려움

이라크 내 유목민 베두인 부족들은 이전에는 중동 전역에서 무역을 했지만, 이라크 위임통치령의 국경 내에서만 무역을 하게 되었다.[14] 식민 행정부의 이러한 결정은 베두인에게 경제적으로 어렵고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14]

5. 사회와 문화

이라크 위임통치령 시기 이라크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 민족 및 종교 갈등 ====

이라크 위임통치령 시기에는 수니파, 시아파, 쿠르드족 등 다양한 민족과 종교 집단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영국은 수니파를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여 시아파와 쿠르드족의 불만을 샀다.

쿠르드족의 민족 자결은 고려되지 않고 쿠르디스탄 지역에 국경이 그어지면서, 중동 지역에서 심각한 소수 민족 문제인 쿠르드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1919년, 1922년 11월부터 1924년 7월에 걸쳐 쿠르드족셰이크(샤이프), 마흐무드 바르잔지/Mahmud Barzanji영어에 의한 마흐무드 바르잔지의 난이 일어났고, (1922년 - 1924년)이 일시적으로 수립되었다. 또한 아흐메드 바르잔지/Ahmed Barzani영어에 의한 아흐메드 바르잔지 난/Ahmed Barzani revolt영어(1931년 - 1932년)이 일어났다.

==== 근대화와 서구 문화의 영향 ====

영국의 통치 하에 이라크에는 서구식 교육, 행정 시스템, 법률 등이 도입되었다. 이는 이라크 사회의 근대화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사회 구조와 가치관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5. 1. 민족 및 종교 갈등

이라크 위임통치령 시기에는 수니파, 시아파, 쿠르드족 등 다양한 민족과 종교 집단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영국은 수니파를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여 시아파와 쿠르드족의 불만을 샀다.

쿠르드족의 민족 자결은 고려되지 않고 쿠르디스탄 지역에 국경이 그어지면서, 중동 지역에서 심각한 소수 민족 문제인 쿠르드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1919년, 1922년 11월부터 1924년 7월에 걸쳐 쿠르드족셰이크(샤이프), 마흐무드 바르잔지/Mahmud Barzanji영어에 의한 마흐무드 바르잔지의 난이 일어났고, (1922년 - 1924년)이 일시적으로 수립되었다. 또한 아흐메드 바르잔지/Ahmed Barzani영어에 의한 아흐메드 바르잔지 난/Ahmed Barzani revolt영어(1931년 - 1932년)이 일어났다.

5. 2. 근대화와 서구 문화의 영향

영국의 통치 하에 이라크에는 서구식 교육, 행정 시스템, 법률 등이 도입되었다. 이는 이라크 사회의 근대화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사회 구조와 가치관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6. 이라크 왕국의 독립 (1932년)

1932년 10월 3일, 하심 왕국 이라크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완전한 주권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군사 기지를 유지하고 석유 이권을 확보하는 등 실질적인 영향력을 계속 행사했다. 하심 가문이 통치한 이라크 왕국은 1958년까지 존속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0년 8월 10일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었고, 8월 23일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현재의 이라크 지역은 영국의 위임 통치 하에 들어갔다. 하심 가문의 파이살 1세가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이라크 왕국이 건국되었고, 이때 쿠웨이트는 분리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결정에는 쿠르드족의 민족 자결권이 고려되지 않았고, 쿠르디스탄 지역에 국경이 그어지면서 중동 지역의 심각한 소수 민족 문제인 쿠르드 분쟁을 야기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쿠르드족셰이크(샤이프)인 마흐무드 바르잔지가 반란을 일으켜 쿠르디스탄 왕국(1922년 - 1924년)을 일시적으로 수립하기도 했다. 또한 1931년부터 1932년까지는 아흐메드 바르잔지에 의한 아흐메드 바르잔지 난이 일어났다.

7. 평가 및 유산

영국 위임통치령 시기는 현대 이라크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통치는 이라크의 근대화를 촉진했지만, 동시에 민족, 종교 갈등을 심화시키고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카난 마키야와 같은 역사학자는 영국 위임통치를 근대화의 대리인으로 평가하며, 경제 발전과 사회 기반 시설 구축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엘리 케두리와 같은 역사학자는 영국 위임통치가 이라크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부족 간 갈등을 조장하며,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했다고 비판한다. 특히, 쿠르드족의 민족 자결은 고려되지 않고 쿠르디스탄 지역에 국경이 그어지면서, 중동 지역에서 심각한 소수 민족 문제인 쿠르드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1919년, 1922년 11월부터 1924년 7월에 걸쳐 쿠르드족셰이크(샤이프), 마흐무드 바르잔지에 의한 마흐무드 바르잔지의 난이 일어나 (1922년 - 1924년)이 일시적으로 수립되었다. 또한 아흐메드 바르잔지에 의한 아흐메드 바르잔지 난(1931년 - 1932년)이 일어났다. 이는 이라크 내 민족 갈등의 뿌리깊은 원인이 되었으며, 영국의 분할 통치 정책이 이러한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7. 1. 긍정적 평가

카난 마키야와 같은 역사학자는 영국 위임통치를 근대화의 대리인으로 평가하며, 경제 발전과 사회 기반 시설 구축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7. 2. 부정적 평가

엘리 케두리와 같은 역사학자는 영국 위임통치가 이라크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부족 간 갈등을 조장하며,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했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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