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념관 (멜버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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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멜버른 전쟁기념관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멜버른에 세워진 기념관이다. 1920년대 초에 계획되어 1934년 11월 11일에 완공되었으며, 이후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등 호주가 참전한 여러 전쟁의 희생자를 기리는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건축 양식은 고대 할리카르나소스 영묘와 파르테논 신전을 기반으로 하며, 내부에는 성소, 회랑, 크립트, 방문객 센터 등이 있다. 매년 안자크 데이와 현충일에 기념 행사가 열리며, 킹스 도메인에 위치하여 주변에 다양한 기념물과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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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멜버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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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명칭 | 전몰자 위령관 |
영어 명칭 | Shrine of Remembrance |
위치 | 멜버른, 빅토리아주, 오스트레일리아 버드우드 애비뉴 |
상세 정보 | |
종류 | 전쟁 기념관 |
지정 기관 | Shrine of Remembrance Trustees (전몰자 위령관 신탁 관리인) |
좌표 | 37°49′50.0″S 144°58′24.4″E |
설계자 | 필립 허드슨과 제임스 워드롭 |
건립 | 1918년 |
공개 | 1934년 11월 11일 |
웹사이트 | 전몰자 위령관 공식 웹사이트 |
기념 대상 | 제1차 세계 대전 및 이후 전쟁의 호주 군인 |
등록 상태 | 빅토리아 주 등록 문화재 (VICHR) |
등록 기준 | a, c, d, e, g |
등록일 | 1991년 12월 14일 |
유산 보호 구역 번호 | HO489 |
비문 |
2. 역사
호주 최대 규모의 전쟁 기념 시설로, 멜버른 시내 남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어 멀리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매년 ANZAC 데이(4월 25일)와 현충일(11월 11일)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추모 행사를 갖는다.
설계는 고대 그리스 건축의 마우솔로스의 영묘를 모델로 삼았다. 원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쟁 기념비로 건설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호주가 참전한 모든 전쟁을 대상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91] 기념관 건립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제안되어 설계 공모와 여러 논쟁을 거쳤으며, 1934년에 완공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시설 추가, 추모 정원 조성, 방문객 센터 건립 등 여러 차례의 변화를 겪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1. 건립 배경 (1918-1922)
제1차 세계 대전이 1918년 11월에 끝나자마자 멜버른에 전쟁 기념관을 건립하자는 제안이 나왔다.[4] 1920년대 초, 빅토리아 주 정부는 전쟁 기념물 자문 위원회를 임명했다. 이 위원회는 스탠리 경이 의장을 맡았으며, 멜버른 시 남쪽으로 뻗은 주요 도로인 세인트킬다 로드에 "승리의 아치"를 세울 것을 권고했다.[5]1921년 8월에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호주군 사령관이었던 존 모나쉬 장군을 중심으로 집행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곧 "승리의 아치" 건립안을 폐기하고, 대신 세인트킬다 로드 동쪽에 거대한 기념비를 세우자고 제안했다.[30] 이 위치는 도시 중심부에서도 잘 보이는 곳이었다.[6]
1922년 3월, 새로운 기념관 설계를 위한 공모전이 시작되었다. 이 공모전에는 호주에 거주하는 영국인과 해외에 거주하는 모든 호주 시민이 참여할 수 있었다.[7]
2. 2. 설계 공모 및 논쟁 (1922-1927)
1922년 3월, 새로운 기념관 설계를 위한 공모전이 시작되었다. 이 공모전은 호주에 거주하는 영국 시민과 해외에 거주하는 모든 호주 시민에게 열려 있었으며, 총 83개의 작품이 출품되었다.[7] 1923년 12월, 멜버른의 두 건축가이자 전쟁 참전 용사인 필립 허드슨과 제임스 워드로프가 제출한 디자인이 최종 우승작으로 선정되었다.[8]![]() | ![]() |
신사당 건립의 주요 지지자였던 존 모나쉬 경(왼쪽)와, 신사당을 "암울한 무덤"이라 비판하며 반대 입장을 보인 멜버른 신문 더 헤럴드의 편집국장 키스 머독(오른쪽). |
이 당선작은 ''The Age''와 같은 언론, 시드니 기반의 무역 저널 ''Building'', 예술가 노먼 린지, 시드니 대학교 건축학부 학장 레슬리 윌킨슨 등 저명인사들과 공모전에 적극 참여했던 왕립 호주 건축가 협회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9][10] 그러나 이 설계는 일부로부터 강한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특히 키스 머독이 이끄는 ''더 헤럴드''는 신사당 디자인이 지나치게 웅장하고 삭막하며 비용이 많이 든다고 지적했다. 머독은 신사당을 "너무 엄격하고, 딱딱하고 무거우며, 우아함이나 아름다움이 전혀 없는, 암울한 무덤"이라고 묘사한 것으로 알려졌다.[11] ''헤럴드''는 신사당 건설 반대 운동의 일환으로, 기념 병원이나 전쟁 미망인을 위한 쉼터와 같이 더 실용적인 사업에 자금을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하며 대안을 모색했다.[12] 또한 일부 기독교 교회들은 설계에 십자가와 같은 기독교적 요소가 없다는 이유로 이교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58]
이러한 논쟁 속에서 정치적 상황도 변화했다. 1924년 조지 프렌더가스트가 이끄는 새로운 빅토리아 노동당 정부는 ''헤럴드''의 입장을 지지하며 신사당 대신 기념 병원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후 존 앨런의 국가/국민당 연립 정부가 들어서면서 계획은 다시 변경되어, 이전에 제안되었던 세인트 킬다 로드 위에 승리의 아치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논쟁으로 인해 기념관 건설은 상당 기간 지연되었고, 1926년 안자크 데이 행진을 위해 임시로 나무와 석고로 만든 세노타프가 세워졌다. 이 임시 세노타프가 성공을 거두자, 빅토리아 정부는 1926년 기존 계획을 포기하고 국회의사당 앞 버크 스트리트 상단에 영구적인 세노타프를 포함하는 대규모 "안자크 광장" 건설을 제안했다.[13] 이 계획에는 멜버른 시민들이 아끼는 호텔 중 하나였던 윈저 호텔의 철거가 포함되었으나, ''헤럴드'', 참전 군인 리그(RSL), 멜버른 시의회의 지지를 받았다.[14][15]
하지만 존 모나쉬 장군과 참전 용사 지원 단체인 레거시는 여전히 신사당 건립을 강력히 지지했다. 레거시는 집행위원회가 신사당 지지 결정을 내린 후 여론 형성에 나섰고, 시의회, 주 정부, ''헤럴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언론의 지지를 확보했다.[15] 1927년, 당시 요크 공작이었던 앨버트 왕자가 호주를 방문했을 때, 모나쉬는 안자크 데이 전날 열린 RSL 만찬에서 신사당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은 참석자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으며 신사당 지지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이후 투표에서 다수가 신사당 건설 제안에 찬성했다.[16] 다음 날인 1927년 안자크 데이, 모나쉬가 3만 명의 참전 용사들을 이끌고 행진했으며, RSL, ''The Age'', ''The Argus'' 등 주요 기관과 언론이 지지 의사를 표명하면서 신사당 건설 제안은 새로운 추진력을 얻었다.[17] 이러한 강력한 지지와 더불어, 안자크 광장 계획이 과도한 비용을 유발할 것이라는 모나쉬의 주장에 직면한 에드먼드 호건의 새로운 노동당 정부는 결국 신사당 건립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18]
한편, 기념관의 성격과 관련하여 초기 논쟁 중 하나는 "무명 용사의 묘"를 포함시킬지 여부였다. 이 아이디어는 세인트 킬다 RSL이 옹호했으며, 1922년 안자크 데이에 갈리폴리나 프랑스에서 전사한 병사의 유해를 안장할 계획을 발표하면서 제기되었다.[19] 이 제안은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는데,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무명 전사가 대영 제국 전체 전사자를 대표한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모나쉬 또한 국가 기념관에는 무명 용사의 자리가 있을 수 있지만, 빅토리아 주의 기념관인 신사당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반대 입장을 보였다.[20] 결국 신사당에는 무명 용사 대신 '기억의 돌'이 설치되었다.[21] 호주의 무명 용사는 훗날 1993년 11월 11일 캔버라의 호주 전쟁 기념관에 안장되었다.[22]
2. 3. 건립 추진과 완공 (1927-1934)
존 모나쉬 경과 레거시는 세인트킬다 로드 동쪽에 기념비를 세우는 원래의 신사당 계획을 꾸준히 지지했다.[15] 신사당 설계는 일부 언론과 저명인사들의 지지를 받았지만,[9][10] 키스 머독이 이끄는 신문 ''더 헤럴드''는 "너무 엄격하고, 딱딱하고 무거우며, 우아함이나 아름다움이 전혀 없고, 암울한 무덤"이라고 비판하며[11] 병원이나 전쟁 미망인 쉼터 같은 실용적인 대안을 제시했다.[12] 일부 기독교 교회들도 십자가 등 기독교적 요소가 없다며 비판했다.[58] 정치권에서도 논란이 이어져, 조지 프렌더가스트의 노동당 정부는 기념 병원을, 뒤이은 존 앨런의 국민당 연립 정부는 승리의 아치를 선호했다. 1926년에는 국회의사당 앞 버크 거리에 대규모 "안자크 광장"과 영구적인 세노타프를 건설하는 안이 제안되기도 했다.[13]
이러한 반대와 대안 제시 속에서도 모나쉬와 레거시는 신사당 건립을 위한 여론 형성에 힘썼다.[15] 결정적인 계기는 1927년 당시 요크 공작이었던 앨버트 왕자의 호주 방문이었다. 모나쉬는 안자크 데이 전날 참전 군인 리그(RSL) 만찬에서 신사당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참석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내며 여론을 반전시키는 데 성공했다.[16] 다음 날, 모나쉬가 이끄는 3만 명의 참전 용사 행진과 RSL 및 주요 언론의 지지가 더해지면서 신사당 건설 계획은 큰 동력을 얻었다.[17] 결국, 안자크 광장 계획의 막대한 비용 문제까지 제기되자 에드먼드 호건이 이끄는 새로운 노동당 정부는 신사당 건설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18]
초기 논쟁 중 하나는 기념관에 "무명 용사의 묘"를 포함할지 여부였다. 1922년 세인트 킬다 RSL 지부가 갈리폴리나 프랑스에서 전사한 병사의 유해를 안장하자고 제안했지만,[19]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무명 전사가 대영 제국 전체 전사자를 대표한다는 반론과 함께 모나쉬 역시 국가 기념관에는 적합할 수 있으나 빅토리아주의 기념관에는 맞지 않다며 반대했다.[20] 결국 무명 용사를 안장할 수 있었던 자리에는 '기억의 돌'이 대신 놓이게 되었다.[21] (호주의 무명 용사는 1993년 11월 11일 캔버라의 호주 전쟁 기념관에 안장되었다.[22])

1927년 11월 11일, 빅토리아 주지사 로드 소머스가 기념관의 기초석을 놓았다.[23] 총 건설 비용 25만파운드 중 빅토리아 주 정부와 연방 정부가 일부를 지원했지만, 약 16만파운드에 달하는 대부분의 비용은 모나쉬의 주도하에 6개월도 채 안 되어 모금된 공공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24][25]
기술자이기도 했던 모나쉬는[26] 1928년부터 시작된 건설 과정을 직접 감독했다.[59] 비록 그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1931년에 사망했지만,[26] 전쟁기념관 건설은 그의 말년에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다.[27]

건설은 1934년 9월에 완료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11일 현충일에 글로스터 공작에 의해 공식적으로 헌정되었다. 헌정식에는 당시 멜버른 인구(약 100만 명)의 3분의 1에 가까운 3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모여 호주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중 집회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28][29]
2.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198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 전쟁에서 전사한 호주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에 새로운 요소를 추가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다시 열린 디자인 공모전에서는 A. S. 폴과 E. E. 밀스턴이 공동 우승했으며,[31] 최종적으로 밀스턴의 디자인이 채택되었다.[32] 이에 따라 기념관 북쪽 면에는 기존의 반사 풀을 대체하는 넓은 석조 공간인 제2차 세계 대전 전면부가 조성되었다. 또한 북쪽 면 바로 서쪽에는 영구적인 가스 불꽃인 영원의 불꽃이 설치되었고, 서쪽으로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높이 12.5m의 제2차 세계 대전 기념관 기념비가 세워졌다.[14] 이러한 확장 시설들은 1954년 2월 2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의해 봉헌되었다.[32]이후 호주가 참전한 한국 전쟁, 보르네오 전역 (1945), 말라야 비상 사태, 북보르네오와 사라왁에서의 인도네시아 대립,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등도 비문을 통해 기념되었다.[14]
1951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호주군 총사령관이었던 토마스 블라미 원수의 시신이 국장으로 치러지기 전 3일간 기념관에 안치되어 일반에 공개되었고, 이 기간 약 2만 명의 시민이 방문하여 추모했다.[33]
베트남 전쟁 중에는 기념관이 사회적 갈등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ANZAC 데이 행사에서 반전 시위대가 호주의 전쟁 참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고,[34] 1971년에는 기념관 북쪽 현관 기둥에 'PEACE!'라는 글자가 흰색 페인트로 크게 쓰여 훼손되는 사건도 있었다.[35]
1985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분쟁에서 복무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 서쪽 면 아래에 추모 정원이 추가되었다.[36]
2. 5. 재개발 (2002-현재)
1990년대 신사 주변의 테라스 복원 공사 중 신사 아래 공간을 활용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신사는 인공 언덕의 속이 빈 부분에 지어졌기 때문에, 당시 건설 잔해로 채워져 있던 지하 공간은 개발을 위한 넓은 공간을 제공했다.[14] 550만호주 달러 규모로 계획된 이 새로운 개발은 방문객 센터, 행정 시설을 마련하고, 생존 참전용사들과 그 가족들 중 많은 이들이 전통적인 의식 입구의 계단을 오르기 어려워함에 따라 신사의 지하 묘역으로의 접근성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37] 재개발 시 새로운 입구 위치 선정에 신중한 고려가 이루어졌는데, 동쪽 터널을 이용하는 초기 계획은 "의식의 느낌이 없다"는 이유로 폐기되고, 대신 두 개의 새로운 안뜰을 개발하고 북쪽 계단 아래에 새로운 갤러리를 배치하기로 결정했다.[38]2002년, 멜버른의 건축 회사 애쉬튼 라가트 맥두걸(Ashton Raggatt McDougall, ARM)의 설계로 공사가 시작되었으며,[39] 새로운 공간은 2003년 8월에 개관했다.[40] 이 프로젝트는 2004년 빅토리아 건축상(Victorian Architecture Awards)에서 최고상인 빅토리아 건축 메달(Victorian Architecture Medal), 멜버른 상(Melbourne Prize), 그리고 유산 건축 부문의 존 조지 나이트 상(John George Knight Award)을 수상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41] 같은 해 호주 건축가 협회(Australian Institute of Architects) 연례 전국 시상식에서는 도시 디자인 부문 월터 벌리 그리핀 상(Walter Burley Griffin Award)을 수상했다.
공사 완료 후에도 부지를 더 개발하고, 특히 전쟁에 대한 교육 시설을 제공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39] 2006년에는 박물관과 지하 주차장을 포함하는 6200만호주 달러 규모의 추가 개발 제안이 제시되었다. 이 제안 역시 ARM 건축(ARM Architecture)이 설계했지만, 지역 주민들과 일부 시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혔고,[42] 연방 정부의 자금 지원 거부로 심각한 재정 문제에 직면했다.[43]

2012년, 빅토리아 주 정부는 전쟁기념관 지하 공간을 재개발하고 남쪽으로 확장하기 위해 2250만호주 달러를 배정한다고 발표했다. 2003년 방문객 센터 설계를 맡았던 ARM 아키텍처가 다시 새로운 확장 설계를 담당했다.[44] '기억의 전시관'(Galleries of Remembrance)으로 명명된 새로운 전시 공간은 2014년 현충일에 개관했다.[45] 1915년 갈리폴리 전투 초기 안작 만 상륙 작전 중 사용되었던 SS 데바나호의 구명정이 이 새로운 개발의 핵심 전시물이 되었다.[45][46]
기억의 전시관 프로젝트는 건축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2015년 빅토리아 건축상에서 빅토리아 건축 메달, 공공 건축 부문 윌리엄 워델 상(William Wardell Award), 멜버른상, 유산 건축 부문 존 조지 나이트 상, 도시 디자인 건축상(Urban Design Architecture Award)을 수상했다.[47] 같은 해 후반, 이 프로젝트는 전국 건축상에서 호주 건축가 협회로부터 공공 건축 부문 서 젤만 코웬 상(Sir Zelman Cowen Award)을 수상했다.[48]
2021년 9월 22일, 빅토리아주의 코로나19 범유행 관련 6차 봉쇄 기간 동안, 코로나19 백신 의무 접종에 반대하는 1,000명 이상의 시위대가 전쟁기념관에 모여 평화 시위를 벌였다.[49] 시위를 위해 전쟁기념관을 장소로 선택한 것과 시위대의 행동은 비판을 받았다.[50][51][52][53] RSL 빅토리아(RSL Victoria)는 성명을 통해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기념관은 시위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이나 단체가 언제든지 전쟁기념관 구내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 입장 또는 이념적 이론을 표명하려 한다면, 그들은 이 존경받는 공간의 신성함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54] 시위대는 결국 빅토리아 경찰(Victoria Police)에 의해 비살상탄과 최루탄을 사용하여 해산되었다.[55]
3. 건축과 특징
전쟁기념관의 기초석은 1927년 11월 11일 빅토리아 주지사 로드 소머스가 놓았다.[23] 총 건설 비용 25만 파운드 중 대부분인 16만 파운드는 6개월 이내에 공공 기부로 충당되었으며,[24] 존 모나시 장군이 모금을 주도했다.[25] 기술자이기도 했던 모나시는 1928년 시작된 건설 과정을 직접 감독했으나,[26][59] 완공 전인 1931년에 사망했다.[26][27]
건설은 1934년 9월 완료되었고, 같은 해 11월 11일 글로스터 공작이 30만 명 이상의 군중 앞에서 공식 헌정했다.[28][29]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공습 대피소로 사용되기도 했다.[30]
기념관은 고대 할리카르나소스 영묘와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되었으며,[58] 호주산 화강섬록암, 사암, 대리석 등이 건축 재료로 사용되었다.[56][59] 내부 중심에는 성소(Sanctuary)와 기념비의 돌(Stone of Remembrance)이 있다.[61][62]
시간이 흐르면서 기념관은 여러 차례 확장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몰장병을 기리기 위해 북쪽 면 앞에 제2차 세계 대전 전면부, 영원의 불꽃, 위령탑이 추가되었고(1954년 봉헌),[31][32][14] 1985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분쟁 참전자를 위한 추모 정원이 서쪽 면 아래에 조성되었다.[36]
1990년대부터는 접근성 개선과 교육 기능 강화를 위해 지하 공간 개발이 이루어졌다.[14][37] 멜버른 건축 회사 애쉬튼 라가트 맥두걸의 설계로 2003년 방문객 센터가,[39][40] 2014년에는 기억의 전시관(Galleries of Remembrance)이 개관하여 갈리폴리 전투 당시 사용된 SS ''데바나''호의 구명정 등이 전시되었다.[44][45][46] 이러한 재개발 프로젝트는 빅토리아 건축 메달 등 다수의 건축상을 수상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41][47][48] 전쟁기념관은 ANZAC 데이와 현충일에 주요 추모 행사가 열리는 호주 최대 규모의 전쟁 기념 시설이다.
3. 1. 건축 양식 및 재료
성소의 설계는 고대 그리스 건축의 마우솔로스의 영묘를 모델로 하였다.[91]
건축에 사용된 재료는 모두 호주에서 조달되었다. 주요 건축 석재로는 타이농에서 채석된 화강섬록암이 선택되었다.[56] 내부 벽에는 레드데일에서 가져온 사암이 사용되었으며, 검은색 대리석 기둥은 부찬에서 채석된 석재로 만들어졌다.[59]
과거 타이농 채석장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면서 성소를 재개발할 때 재료 조달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폐쇄된 채석장을 다시 여는 데에는 상당한 비용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인근의 다른 채석장에서 필요한 석재를 공급받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57]
3. 2. 외부
전쟁기념관의 설계는 고대 할리카르나소스 영묘,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며,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기반으로 한다.[58] 이 건물은 정방형 평면 구조로, 계단식 피라미드 지붕을 가지고 있으며, 북쪽과 남쪽으로 고전적인 주랑 현관을 통해 진입할 수 있다. 각 주랑 현관은 8개의 홈이 파인 도리아식 기둥이 있으며, 높은 부조 조각이 있는 박공을 받치고 있다. 주랑 현관은 기념관이 위치한 기단까지 여러 단계로 올라가는 넓은 계단으로 접근할 수 있다.[59]동쪽과 서쪽 정면의 모퉁이에는 폴 라파엘 몬트포드가 조각한 4개의 조각상 그룹이 있으며, 이는 평화, 정의, 애국심 및 희생을 나타낸다. 아르 데코 양식과 모티프는 그리스와 아시리아 조각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상징주의는 신고전주의이다.
기념관의 외부 경계를 표시하는 외부 석조 난간 주변에는 16개의 석조 "전투 명예" 원반이 있다.[60] 이들은 조지 5세가 수여한 전투 명예를 나타내며, 다음 전투에 대한 호주의 기여를 기념한다.[60]
전투 명예 | 관련 전투/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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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크 상륙 | 갈리폴리 |
사리 바르 | 갈리폴리 |
루마니 | 시나이-팔레스타인 전역 |
가자-브에르세바 | 시나이-팔레스타인 전역 |
북해 | 제1차 세계 대전 해전 |
코코스 제도 | 인도양 |
메기드 | 시나이-팔레스타인 전역 |
다마스쿠스 | 시나이-팔레스타인 전역 |
빌레-브르토네 | 서부 전선 |
아미앵 | 서부 전선 |
몽 생 캉탱 | 서부 전선 |
힌덴부르크 선 | 서부 전선 |
이프르 | 서부 전선 |
메시네 | 서부 전선 |
포지에르 | 서부 전선 |
불레쿠르 | 서부 전선 |
3. 3. 내부

전쟁기념관 내부는 고전적인 디자인으로 설계되었으며, 4개의 높은 문을 통해 높은 아치형 공간인 성소(Sanctuary)로 들어갈 수 있다. 성소 안에는 16개의 높고 홈이 파인 이오니아식 기둥이 있으며, 그 위에는 간단한 엔타블러처가 놓여 있다. 기둥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대의 활동을 묘사한 린든 대드스웰(Lyndon Dadswell)이 조각한 12개의 부조 패널이 있는 프리즈를 지지한다.[61]
성소 중앙에는 기념비의 돌(Stone of Remembrance)이 있다.[62] 이 대리석 기념석은 바닥보다 낮게 놓여 있어, 방문객들은 돌에 새겨진 비문을 읽기 위해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게 된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 비문은 성경 요한복음 15장 13절의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구절의 일부이다.[62] 기념비의 돌은 성소 지붕의 구멍과 정확히 정렬되어 있어, 매년 현충일(Remembrance Day)인 11월 11일 오전 11시 정각에 햇빛이 돌에 새겨진 'LOVE'라는 단어를 비춘다.[2]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킨 휴전 협정이 발효된 시간과 날짜를 상징한다. 빅토리아주에서 일광 절약 시간제가 도입된 이후 자연광만으로는 정확한 시간에 빛을 비추기 어려워졌으나, 거울 시스템을 설치하여 여전히 11월 11일 오전 11시에 햇빛이 'LOVE' 단어에 정확히 떨어지도록 조정하고 있다.[62] 다른 날에는 인공조명을 사용하여 이 효과를 재현한다.[62]

서쪽 벽에는 존 모나시 장군이 T. G. 터커 교수, 버나드 오다우드, 펠릭스 마이어의 도움을 받아 필립 허드슨의 초안을 수정하여 완성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20]
: 모든 사람이 이곳이 성지임을 알게 하십시오. 단단한 땅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마음에 세워진 이 기념관은 국민의 용기와 희생을 기념합니다. 그러므로 뒤에 오는 너희는 기억하라.
이 비문은 특정 종교적 색채가 없다는 점에서 일부 비판도 있었으나,[14] 당시 호주의 '스토아적 애국심' 전통에 부합한다는 평가를 받았다.[20]
동쪽 벽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 이 기념물은 1914-1918년의 대전에서 제국을 위해 복무한 남녀를 기리는 고마운 국민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성소 주변은 회랑(Ambulatory)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에는 42개의 청동 함이 있으며, 각 함에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호주 제국군(AIF) 또는 호주 해군 및 군사 원정군 소속으로 참전했거나 복무 중 사망한 빅토리아주 출신 모든 병사들의 이름이 손으로 정성스럽게 기록된 채색 필사본 형태의 기념 서적(Books of Remembrance)이 보관되어 있다.[63]
성소 아래층에는 크립트(Crypt)가 위치하며, 이곳에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아들과 아버지를 형상화한 청동상(Father and Son sculpture)이 있다.[64] 크립트 벽면에는 모든 호주 제국군(AIF) 부대의 목록과 부대 식별을 위한 어깨 패치 색상이 표시된 패널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여러 대대와 연대의 부대기와 그들이 세운 전투 공적(Battle honours) 목록이 전시되어 있다.
3. 4. 방문객 센터
1990년대 신사 주변의 테라스 복원 공사 중 신사 아래 공간을 활용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신사는 인공 언덕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지하 공간은 개발을 위한 넓은 공간을 제공했다.[14] 빅토리아 주 정부는 550만호주 달러의 예산을 투입하여 방문객 센터, 행정 시설, 그리고 신사 지하 묘역으로의 접근성 개선을 목표로 새로운 개발을 추진했다. 이는 생존 참전용사들과 그 가족들 중 많은 이들이 전통적인 입구의 계단을 오르기 어려워했기 때문이다.[37] 재개발 과정에서 새로운 입구 위치가 중요하게 고려되었으며, 최종적으로 두 개의 새로운 안뜰을 개발하고 북쪽 계단 아래에 새로운 갤러리를 배치하기로 결정했다.[38]2002년 멜버른의 건축 회사 애쉬튼 라가트 맥두걸의 설계로 공사가 시작되었으며,[39] 새로운 방문객 센터 공간은 2003년 8월에 개관했다.[40] 이후 2012년, 빅토리아 주 정부는 2250만호주 달러를 추가로 투입하여 전쟁기념관 지하 공간을 재개발하고 남쪽으로 확장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확장 공사 역시 애쉬튼 래거트 맥두걸이 설계를 맡았으며,[44] '기억의 전시관'(Galleries of Remembrance)으로 명명된 새로운 전시 공간은 2014년 현충일에 문을 열었다.[45]
방문객들은 입구 안뜰을 통해 신사로 들어서게 된다. 이 안뜰의 한쪽 벽에는 "Lest We Forget|우리가 잊지 않으리eng"라는 문구가, 다른 쪽 벽에는 전 총독 윌리엄 딘 경의 인용구가 새겨져 있다.[65] 같은 방향으로 정원 안뜰이 이어지며, 이곳에는 레거시(Legacy) 올리브 나무와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두 안뜰은 모두 타이농(Tynong) 화강암으로 마감되었다.[66]

지하 공간에는 훈장 전시관(Gallery of Medals)이 있다. 길이 40m의 벽에는 전쟁과 평화 유지 작전에 참전한 빅토리아주 출신 100명과 사망자 6명을 기리는 약 4,000개의 훈장이 전시되어 있다.[67] 이 전시관의 주요 전시물 중 하나는 1917년 메신 전투에서 로버트 그리브 대위에게 수여된 빅토리아 십자 훈장이다. 이 훈장은 멜버른 웨슬리 칼리지에서 전쟁기념관에 대여한 것이다.[57]
기억의 전시관(Galleries of Remembrance)의 중심에는 1915년 갈리폴리 전투 초기 안작 만 상륙 작전에 투입되었던 SS ''데바나''호의 구명정이 전시되어 있다.[45][46]
3. 5. 제2차 세계 대전 전면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호주가 참전한 이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에 새로운 요소를 추가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공모전을 통해 E. E. 밀스턴의 디자인이 채택되었고,[31][32] 기념관 북쪽 면 앞에 넓은 석조 공간인 제2차 세계 대전 전면부가 조성되었다. 이 확장 공사에는 북쪽 면 바로 서쪽에 설치된 영구적인 가스 불꽃인 영원의 불꽃과, 서쪽으로 조금 더 떨어진 곳에 세워진 높이 12.5m의 제2차 세계 대전 기념관(위령탑)도 포함되었다.[14] 이 전면부는 기존에 기념관 앞에 있던 반사 풀을 대체했다. 새롭게 확장된 부분은 1954년 2월 2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의해 봉헌되었다.[32]
위령탑은 빅토리아 주 하코트에서 채석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은 기둥이다. 표면에는 국군 부대와 그들이 참전했던 전쟁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68] 위령탑 꼭대기에는 현무암으로 조각된 6명의 군인이 오스트레일리아 국기로 덮인 관을 운반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이 조각상은 "산 자가 죽은 자에게 진 빚"을 상징한다.[68]
불멸의 불꽃은 위령탑 근처에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68] 이 불꽃은 처음 점화된 이후 몇 차례 중단을 제외하고는 계속 타오르고 있다.[68][69]
전면부의 다른 쪽에는 세 개의 깃대가 있다. 일반적으로 왼쪽에는 오스트레일리아 국기, 가운데에는 빅토리아 주 기, 오른쪽에는 세 국군 부대 중 하나의 깃발이 게양된다. 특별한 행사 시에는 정해진 규정에 따라 다른 깃발이 게양될 수 있다.[68]
3. 6. 추모 정원
1985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분쟁에서 복무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 서쪽 면 아래에 추모 정원이 추가되었다.[36] 이 정원에는 연못과 폭포가 있으며, 하코트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벽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호주가 참여했던 분쟁 및 평화 유지 작전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예를 들어 쿠웨이트(걸프 전쟁)와 동티모르에서의 활동 등이 기록되어 있다.[36]4. 기념 행사
1934년 완공 이후, 전쟁기념관은 멜버른의 전쟁 기념 행사를 위한 중심 장소로 자리 잡았다.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의 중요한 기념일인 ANZAC 데이(4월 25일)와 현충일(11월 11일)에는 많은 시민들이 이곳에 모여 전몰 장병들을 추모한다.[84][85]
ANZAC 데이에는 새벽 예배를 시작으로 헌화 행사, 기념 행진 등 다양한 추모 행사가 하루 종일 이어진다.[83][84] 현충일에는 빅토리아주의 주요 인사들과 시민들이 참석하여 오전 11시에 1분간의 묵념을 통해 희생자들을 기린다.[85][86]
이 외에도 연중 다양한 시기에 빅토리아주 부대 협회나 대대별로 성소(Sanctuary), 기념관 내 기념비, 또는 관련 기념 나무 근처에서 자체적인 기념식과 헌화 행사를 개최한다.[87]
4. 1. ANZAC 데이

1934년 완공 이후, 전쟁기념관은 멜버른의 전쟁 기념 행사를 위한 중심 장소로 자리 잡았다. 현충일(11월 11일)이 공식적인 전몰 장병 추모일이지만, 이와 별개로 호주와 뉴질랜드 고유의 기념일이자 공휴일인 ANZAC 데이(4월 25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점차 커지고 있다.
전쟁기념관에서 열리는 ANZAC 데이 행사는 여러 기념식을 통해 진행된다.
- 새벽 예배 (Dawn Service): ANZAC 데이의 첫 행사로, 2007년에는 35,000명 이상의 기록적인 인파가 모여 참전 용사들을 기렸다.[83]
- 헌화 행사: 새벽 예배 후, 관계자들이 전쟁기념관으로 행진하여 성소(Sanctuary)에 화환을 놓는 공식적인 행사가 이어진다.
- ANZAC 데이 행진: 참전 용사와 시민들이 참여하는 행진은 세인트 킬다 로드(St Kilda Road)와 기념관 앞마당을 지나 전쟁기념관 계단에서 해산한다.
- 기념식: 오후 1시에서 1시 30분 사이에 기념식이 열려 ANZAC 데이 행사를 마무리한다.[84]
이처럼 ANZAC 데이는 전쟁기념관에서 다양한 행사를 통해 호주와 뉴질랜드의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날로 기념되고 있다.
4. 2. 현충일
현충일(11월 11일)에는 빅토리아주 지도자들과 지역 사회 구성원들이 모여 "모든 전쟁, 분쟁 및 평화 작전에서 사망하거나 고통받은 남녀를 기린다".[85] 오전 11시에는 빛의 광선이 기억의 돌에 LOVE라는 단어를 비추는 가운데 1분간의 묵념을 한다.[86]연중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빅토리아주 부대 협회와 대대가 성소, 전쟁기념관 보존 구역의 기념비 주변, 그리고 다양한 협회와 관련된 기념 나무 근처에서 기념식과 헌화 행사를 개최한다.[87]
5. 관리
전쟁 기념관은 빅토리아 주 정부의 재향 군인부 장관의 자문에 따라 주지사가 임명한 10명의 개인으로 구성된 전쟁 기념관 관리 위원회에서 관리한다.[88] 위원회는 전쟁 기념관과 전쟁 기념관 부지의 관리, 유지 보수 및 보존을 담당한다.[88]
전통적으로, 전쟁 기념관의 경비는 군 경력자들로 구성된 전쟁 기념관 경비대가 제공해 왔다. 전쟁 기념관 경비대의 원래 12명은 모두 제1차 세계 대전 중 용맹 훈장을 받았다.[89] 전쟁 기념관 경비대가 빅토리아 주 경찰 보호 서비스와 합병되면서 일부 민간인들이 근무하기 시작했다.[89] 전쟁 기념관이 대중에 공개되거나 어떤 의식에 사용되는 동안, 경비대는 빅토리아 주 경찰 휘장이 달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경마병의 제복을 착용한다.[90]
6. 주변 환경
전쟁기념관은 멜버른의 넓은 공원 지역(킹스 도메인)에 자리 잡고 있으며, 언덕 위에 세워져 있어 멀리서도 눈에 띈다. ANZAC 데이(4월 25일)와 현충일(11월 11일)에는 많은 시민들이 이곳을 찾아 추모 행사를 갖는다.
건축 양식은 고대 그리스 건축의 마우솔로스의 영묘를 본떠 설계되었다. 처음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참전한 모든 전쟁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장소로 의미가 확장되었다.[91]
초기 건축 계획에는 4명의 전쟁 지도자 동상을 포함하는 안도 있었으나, 모나시 장군은 이를 거부했다. 대신 추모관 건물 자체에는 특정 인물을 기리는 동상을 두지 않고, 주변 공원 곳곳에 다양한 기념물과 조각상들이 세워지게 되었다.[71]
6. 1. 킹스 도메인
추모관은 공식적으로 킹스 도메인이라고 불리는 넓은 공원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공원에는 여러 전쟁 기념물들이 세워졌다. 대표적으로 그리스와 크레타 전투에서 전사한 호주군과 그리스군을 기리는 호주-헬레니 기념관이 있으며, 모나시 장군과 블레이미 장군의 동상도 이곳에 위치한다.[71]원래 추모관 건축가들은 4명의 전쟁 지도자 동상을 포함시키려 했으나, 모나시 장군은 이 계획에 반대했다. 대신 추모관 자체에는 특정 인물을 기리는 동상을 두지 않고, 주변 공원에 여러 동상을 추가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71] 공원에 세워진 첫 번째 동상은 "당나귀를 든 남자"로, 이는 갈리폴리 전역에서 부상병을 구조한 것으로 유명한 존 심슨 키르크패트릭을 상징하지만, 동상에는 그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공식적으로 이 작품은 "호주 병사의 용기와 연민"을 나타낸다고 설명된다.[70] 이 동상은 1936년 조각가 윌리스 앤더슨이 제작했으며, "어머니의 헌사" 기금을 마련한 여성들의 노력으로 세워졌다.[71] 모나시 장군의 동상 역시 의뢰되었고, 레슬리 보울스가 디자인했다. 1938년에 주조를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작업이 지연되어 1950년에야 설치되었다.[72] 이 동상 역시 심슨의 동상처럼 추모관 본 건물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추모관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늘어선 대부분의 나무에는 참전 용사 단체들이 설치한 명판이 붙어 있다. 이 명판들은 개별 호주 육군 부대, 해군 함정, 또는 호주 공군 비행대를 기리고 있다. 또한, 공원 내 세인트 킬다 로드와 도메인 로드 교차점 근처에는 1899년부터 1902년까지 벌어진 제2차 보어 전쟁에서 사망한 빅토리아주 출신 병사들을 위한 오래된 기념비도 찾아볼 수 있다.[73]

추모관 보호 구역 안에는 '운전자와 와이퍼 기념관'이 있다. 이는 파스샹달 전투(제3차 이프르 전투)에서 희생된 수천 명의 호주 병사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와이퍼스(Wipers)"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병사들이 벨기에 도시 이프르(Ypres)를 발음하던 방식이었다.[70] 이 기념관의 청동 조각상들은 영국의 조각가 찰스 사전트 재거가 제작했으며, 원래는 멜버른의 빅토리아 박물관과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 밖에 있었다가 1998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70] '운전자' 조각상은 말 채찍과 굴레를 들고 군복 바지, 보호용 각반, 박차, 철모를 착용한 포병 병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조각상은 영국 런던 하이드 파크에 있는 왕립 포병 기념관의 조각상 중 하나를 다시 주조한 것이다. 다른 청동상인 '와이퍼스'는 표준 제식 소총인 리-엔필드.303 소총과 총검을 갖추고, 발 앞에 독일군 철모를 둔 영국 보병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역시 영국 머지사이드의 호이레이크 및 웨스트 커비 전쟁 기념관에 있는 조각상을 재주조한 것이다.[74]
2008년 7월 19일, 프롬멜 전투 92주년을 맞아 피터 코를렛이 1998년에 제작한 조각상의 복제품이 공개되었다.[75][76] 이 조각상은 프롬멜 전투 후 무인지대에서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하는 제57 대대 소속 사이먼 프레이저 중사(빅토리아주 비아두크 출신의 농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추모관 입구 근처에는 1978년에 조성된 '레거시 감사의 정원'이 있다. 십자 모양의 이 정원은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프랑스 빌레르브르토네에서 가져온 씨앗으로 심은 붉은 플랜더스 양귀비가 늦봄에 꽃을 피운다. 정원 안에는 조각가 루이 라우멘이 제작한 "미망인과 아이들"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는 1998년 참전용사 지원 단체인 레거시 오스트레일리아 창립 75주년을 기념하여 의뢰된 것이다.[77] 추모관 북쪽에는 '여성 정원'이 있다. 이 정원에는 자카란다 나무 숲 속에 콘크리트로 만든 기념 제비꽃 조형물이 있다. 정원의 중심에는 1985년에 세워졌다가 2010년 킹스 도메인 내 현재 위치로 이전된 '전 참전 여성 기념탑'이 자리하고 있다.[77]
론 파인(학명: ''Pinus brutia'') 한 그루는 1933년, 멜버른 레거시의 창립자인 스탠리 사비지 중장이 추모관 북동쪽 모퉁이 근처에서 공식 행사를 통해 심었다.[78] 이 소나무는 갈리폴리 전역 당시 키스 맥도웰 상병이 론 파인 전투 현장에서 가져온 솔방울의 씨앗에서 자라난 네 그루의 묘목 중 하나였다.[79][80] 안타깝게도 이 역사적인 나무는 곰팡이의 일종인 ''Diplodia pinea''에 의한 병으로 인해 2012년 8월에 제거되었다.[81][82] 다행히 2006년에 원조 나무의 자손 격인 "손자 나무"가 근처에 심어져 그 명맥을 잇고 있다.[82]
6. 2. 기타 기념물
추모관 보호 구역 내에는 여러 기념물이 자리 잡고 있다. 운전자와 와이퍼 기념관은 이프르 전투에서 희생된 수많은 호주 병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와이퍼스(Wipers)"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군인들이 벨기에의 도시 "이프르(Ypres)"를 발음하던 방식이다.[70] 이 기념관의 청동 조각상들은 영국의 조각가 찰스 사전트 재거의 작품으로, 원래 멜버른의 빅토리아 박물관과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 외부에 있었으나 1998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70] 조각상 중 하나인 '운전자(Driver)'는 말 채찍과 굴레를 들고 있으며, 브리치스, 보호 레깅스, 박차, 강철 헬멧을 착용한 포병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영국 런던 하이드 파크의 왕립 포병 기념관에 있는 조각상을 다시 주조한 것이다. 다른 하나인 '와이퍼스(Wipers)'는 표준 .303 소총과 총검을 갖추고 발 앞에 독일군 헬멧을 둔 영국 보병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역시 영국 머지사이드의 호이레이크 및 웨스트 커비 전쟁 기념관에 있는 조각상을 재주조한 것이다.[74]
2008년 7월 19일, 프롬멜 전투 92주년을 기념하여 호주 기념 공원에 있는 피터 코를렛의 1998년 조각상 복제품이 공개되었다.[75][76] 이 조각상은 전투 후 무인지대에서 부상당한 동료를 구출하는 제57 대대 소속 사이먼 프레이저 중사(비아두크 출신 농부)를 묘사한다.
추모관 입구 근처에는 1978년에 조성된 레거시 감사의 정원이 있다. 십자 모양의 이 정원은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고, 늦봄에는 프랑스 빌레르브르토네에서 가져온 씨앗으로 심은 붉은 플랜더스 양귀비가 피어난다. 정원 안에는 레거시 오스트레일리아 창립 75주년을 기념해 1998년에 의뢰된 루이 라우멘의 조각상 "미망인과 아이들"이 있다.[77]
추모관 북쪽에는 여성 정원이 자리한다. 이 정원은 자카란다 나무 숲 안에 콘크리트로 만든 기념 제비꽃 조형물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원의 중심에는 2010년 킹스 도메인에서 옮겨온 '전 참전 여성 기념탑'(1985년작)이 있다.[77]
추모관 북동쪽 모퉁이 근처에는 론 파인(''Pinus brutia'')이 있었다. 이 소나무는 1933년 멜버른 레거시의 설립자인 스탠리 사비지 중장이 공식 행사를 통해 심었다.[78] 이 나무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갈리폴리 전투 현장에서 키스 맥도웰 상병이 가져온 솔방울의 씨앗에서 자란 네 그루의 묘목 중 하나였다.[79][80] 안타깝게도 이 나무는 곰팡이(''Diplodia pinea'') 병으로 2012년 8월에 제거되었다.[81][82] 하지만 2006년에 원조 나무의 자손 격인 "손자 나무"가 근처에 심어져 그 의미를 잇고 있다.[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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