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이다.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하는 이승만 세력에 맞서, 김구, 김규식 등은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 협상을 제안했다. 북한의 초청으로 열린 연석회의에는 남한의 좌우익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들이 참여했으나, 북한의 일방적인 태도와 소련의 개입으로 인해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 반대와 미소 양군 철수를 요구하는 데 그쳤다. 회의 이후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에 이용당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남북 모두 단독 정부를 수립하여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48년 한국 - 한국의 군정기
    한국의 군정기는 1945년 일본 항복 후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며 미국과 소련이 남한과 북한에 군정을 실시하여 한반도 분단을 심화시킨 시기이다.
  • 한국의 통일운동 - 좌우합작운동
    좌우합작운동은 해방 직후 좌우익 대립 심화 속에서 김규식, 여운형 등 중도파가 주도한 민족통일운동으로, 미군정 지원과 좌우합작 7원칙 발표 등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냉전 심화, 여운형 암살 등으로 실패하여 1947년 해산되었으나, 남북 분단 방지와 통일 정부 수립 노력으로 평가받는다.
  • 한국의 통일운동 - 남북통일
    남북통일은 한국 전쟁 이후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을 의미하며, 미소 양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과 남북한 정부 수립, 한국 전쟁을 거치며 고착화되었고, 통일 방식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하며, 분단 배경, 통일 방식, 찬반 입장, 통일 정책, 해결 과제 등을 포함한다.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기본 정보
별칭남북 연석회의
날짜1948년 4월 19일 ~ 4월 30일
장소평양직할시
주최김구
김규식
참석 정당 및 사회단체조선독립당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공화국
조선로동당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조선민주당
천도교청우당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조선직업총동맹
북조선민주여성동맹
기타 사회단체 및 개인
배경
배경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시도
목적남북 분단 반대 및 통일 정부 수립 모색
회의 내용
주요 논의 내용남북한 정치 지도자 회담
통일 정부 수립 문제
남북 교류 방안
결과
결과남북한 정치 지도자들의 의견 차이 확인
통일 정부 수립 합의 실패
남북 분단 심화
영향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간접적 원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추진
기타
추가 정보김일성김두봉이 북측 대표로 참석
남측 대표 중 다수가 회의 중도 포기하고 귀환
회의 결과에 대한 남북한의 입장 차이 심화

2.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이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중도파 중심의 남북 통일정부 수립 방안에서 이승만한국민주당 중심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바뀌었고, 한반도 문제는 국제 연합(UN)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소련은 1947년 9월 26일, 1948년 초까지 남북한에서 미·소 양군을 철수하고 한국인들끼리 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안을 했으나,[8] 미국은 이를 북한이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의도로 간주하고 거부했다.[8]

1947년 7월 서울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담소하는 양측 대표. 좌로부터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John R. Hodge) 중장, 소련측 대표 레베데프 소장과 스티코프 상장.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경축 대회.


UN 감시하에 한반도 전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단일정부를 세우는 방안을 소련이 거부하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던 김규식은 중도파 세력을 규합하여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였다.

김구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함께 하던 이승만 세력 및 한국민주당과 마찬가지로 1947년 12월 초까지 북한이 총선을 거부할 경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였다.[9] 그러나 1947년 12월 2일 장덕수 암살 사건이 발생하고 그 배후로 김구가 지목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김구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12] 이승만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치하고 한민당과 연대하여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였다. 이에 김구는 1947년 12월 22일 단독정부 절대 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 해산을 주장하며 이승만과 결별하고 김규식과 노선을 같이 했다.

1948년 1월 8일, UN 한국임시위원단이 방한했다. 1월 26일27일, 김구는 한국임시위원단과의 회담에서 '미·소 양군 철군→남북요인회담→총선에 의한 정부 수립'의 3단계 방안을 제시하고, 2월 4일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2월 10일에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3월 8일 다시 남북협상을 제의했다.

김일성김두봉3월 25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명의로 수락 의사를 밝히고, "조선의 통일적 자주독립을 위하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그러나 김일성김두봉은 이미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해 놓은 상태였다. 3월 30일에는 북조선노동당을 비롯한 북쪽의 9개 정당·단체 이름으로 남쪽의 한국독립당 등 모든 정당·사회단체에 연석회의 개최를 제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북한의 제의에 한국민주당을 제외한 남한의 모든 정당·사회단체는 즉각 지지와 참여를 표명했고, 4월 19일 평양에서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중국 총영사 류위완(劉馭萬)이 본국에 보고한 전문에 따르면, 김구, 김규식의 방북은 북한이 2김이 제안한 5가지 선결 조건(진정한 민주정부 건립, 사유재산제 승인, 전국적인 보선 실시, 외국 군사 근거지 설치 불허, 미소 양국 즉각 담판 개시 및 점령군 철퇴)을 수용하면서 성사되었다.[11][13][14][15]

2. 1. 방북 전 양김씨 주변 인물들의 동향

김구가 주위 사람들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방북을 결심하고 강행한 데에는 거물 간첩 성시백(成始伯, 1905 ~ 1950)[16]의 설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성시백은 중국공산당원 자격으로 중경에서 지하공작을 하면서 한국독립운동단체에 대한 공작을 맡고 있었는데, 임시정부 요인들과 격의 없는 관계를 형성하였고, 김구, 엄항섭, 조완구 등과도 친했으므로 쉽게 김구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17][18][19][20] 송남헌의 『해방3년사』에는 그가 김구에게 김일성의 서신을 전달한 것으로 나온다.[21][22]

해방 후 비밀리에 서너 차례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는 홍명희가 김구의 방북을 설득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23] 홍명희는 김구 등과 함께 남북협상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소위 "7거두 공동성명(七巨頭共同聲明)"을 발표하기도 했고,[24] 경교장을 방문하여 김구와 밀담을 나누기도 했다.[25] 그러나 남북협상단의 일원으로 북한으로 간 홍명희는 서울로 귀환하지 않았고, 평양에 남아 북한 초대 내각의 부수상까지 되었다. 김일성의 처 김정숙이 사망하자 맏딸이 1950년 1월 김일성과 결혼하여 그의 장인이 되기도 했으므로[26] 일찍부터 북한에 포섭된 인물로 보인다. 홍명희의 딸은 김일성과 결혼 얼마 후에 일찍 죽어 그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김규식의 비서였던 송남헌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잘 모르고 속아서 추천했던 김규식의 또 다른 비서 권태양(權泰陽, ?~1965)은 북한에 포섭된 인물로 간첩 성시백의 직계였으므로,[27] 권태양도 김규식의 방북 결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김규식의 방북을 수행했다가 서울로 돌아왔지만, 6.25 전쟁 당시 김규식의 납북에 직접 간여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10] 김규식이 방북을 결심하는 데에는 문화인 108인이 지지 성명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13][28][29] 성명서를 발표한 문화인 108인 중에는 홍명희의 장남으로 역시 월북한 홍기문(洪起文, 1903 ~ 1992) 같은 인물도 끼어 있었다.

남북협상에 참여한 요인 중 한 명인 조완구는 북한에 잔류한 홍명희의 고모부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방북한 요인들의 주변에는 북한 간첩들이나, 북한에 포섭된 인물들이 많아서, 방북을 유도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30]

3. 연석회의와 '4김 회담'의 개최

4월 19일부터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연석회의에는 남한 41개, 북조선 15개 정당·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석했다. 이는 남북 좌·우익 세력 대부분을 망라한 것이었다. 남한에서는 남조선로동당, 근로인민당좌익계열 정당뿐 아니라 한국독립당, 민족자주연맹우익계열 정당도 참여했고, 박헌영, 백남운,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 좌·우익 인사들도 참석했다.[31]

회의는 4월 19일 주석단 선거, 축문·축전 소개, 20일 휴회, 21일 김일성의 '북조선 정치정세보고'와 백남운, 박헌영의 '남조선 정세보고', 22일 토론 순으로 진행되었다. 22일 토론에서는 UN 한국임시위원단의 단독선거 실시를 규탄하고 5.10 단독선거 저지와 남북 외국군 즉시 철수를 결의했다.[31]

23일에는 '남조선 단선단정반대투쟁 대책에 관한 결정서', '미소 양국 정부에 보내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요청서', '남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전 조선 동포에게 격함' 등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31]

4월 26일부터 30일까지 김규식 제안 5개항을 다룬 '15인지도자협의회'가 열렸다. 남측 김구,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홍명희, 김붕준, 이극로, 엄항섭 (이상 우익), 허헌, 박헌영, 백남운 (이상 좌익)과 북측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주영하 (모두 좌익)가 참석했다. 김구, 김규식 요청으로 4김 회담, 양김 회담도 열렸다.[32]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에게 남한 송전 지속, 연백수리조합 개방, 조만식 월남 허용을 요청했고, 김일성은 앞의 두 항은 수락, 마지막 항은 거부했다. 김일성백범과 우사 귀환 직후 전기와 농업용수를 끊었다.[32]

4월 30일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명의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 4개항 요지는 다음과 같다.[33]

그러나 1항은 남북 동시 총선 거부, 소련 주장 수용으로 미군정과 남한 우파는 수용 불가했다. 2, 3항은 북조선 동의 불가 내용이었다.[34]

3. 1. 남측 인사들의 반발

협상 과정에서 북측이 일방적인 태도를 보이자, 남측 인사들은 반발하였다. 민족자주연맹김규식은 병을 핑계로 4김회담에만 참석하고 회의에는 불참했으며, 연석회의 참석자인 장건상, 여운홍 등은 의사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항의했다.

장건상은 연석회의 중 "우리 겨레는 공산주의를 갖고는 살 수 없다. 우리가 근로인민당 운동을 하는 것은 공산사회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평등의 이념으로 평화롭게 살려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가 북조선 측에 의해 한동안 연금되기도 하였다.[35] 장건상김구, 김규식이 떠난 지 보름 뒤에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이는 북로당 위원장 홍명희·김두봉과의 친분 덕분이었다.[35]

지도자 연석회의 기초위원으로는 홍명희, 엄항섭, 여운홍이 보선되었는데,[36] 기초위원회 소위원회 회의에서 박헌영이 미국을 제국주의로, 5.10 총선거 참가자를 망국노, 반동분자 등으로 과격하게 비판하자, 여운홍은 "이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결정서가 좋을지 모르지만 우리 다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안되겠으니 어구 수정이라도 하라"고 항의하였다.[36] 그러자 박헌영은 "개인이 왈가왈부하지 말고 민주주의적인 결정으로 가부를 결정하자"고 했다. 결국 초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여운홍은 서울로 돌아갈 수 없다는 공포감을 느껴 이후 발언을 중지하고 표결 등에서 기권하였다.[36] 여운홍은 이후 소극적으로 참여하다가 1948년 5월, 남한으로 귀환하였다.

김구는 남북협상에서 김일성에게 이용당한 것을 알고 침울하게 지냈다. 김일성이 2차 회의를 제의했을 때도 완전히 거절하였다.[37] 조소앙은 남북협상 참가 후 인터뷰에서 "이번 방북 길은 완전히 실패다. 우리가 완전히 모욕당하고 들러리를 섰다."[38] 고 하였다.

4. 연석회의 이후

1948년 4월 30일,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명의로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성명서는 외국 군대의 즉시 철수, 외군 철수 후 내전 발생 불가, 전조선정치회의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 남한 단독선거 결과 불인정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33] 그러나 이 내용은 미군정과 남한 우파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고, 북한으로서도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34]

협상 과정에서 북측의 일방적인 태도에 남측 인사들은 반발했다. 김규식은 병을 핑계로 4김회담에만 참석했고, 장건상, 여운홍 등은 의사결정과정에 문제를 제기했다.[35] 장건상공산주의를 비판했다가 연금되기도 했다.[35] 여운홍박헌영의 과격한 언사에 항의하며 어구 수정을 요구했으나, 결국 만장일치로 통과되자 공포감을 느껴 이후 발언을 중지하고 기권했다.[36]

김구는 남북협상에서 김일성에게 이용당했다고 생각했고, 김일성의 2차 회의 제의를 거절했다.[37] 조소앙은 남북협상이 실패했으며, 자신들이 들러리를 섰다고 평가했다.[38]

서울로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공동성명을 통해 남북 대표자들이 남한 단독선거 반대와 미소양군 철퇴에 의견 일치를 보았고, 북측이 단독정부를 수립하지 않겠다고 확언했다고 밝혔다.[39] 그러나 미군 기록에 따르면, 김구는 단독선거를 방해하지 않겠다고 했고, 김규식은 단선에 반대하지 않으나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양김은 미소양군 철수 후에도 북한의 남침은 없을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40]

이후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제2차 연석회의를 해주에서 개최할 것을 제의하며 북측에서도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 모두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민족분열이라며 참가를 거부했다.[41]

1948년 6월 29일, 김구·김규식의 참가 없이 평양에서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가 열려 대한민국 제헌 국회를 비법적 조직체로 규정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정부 수립을 결정했다.

7월 19일, 김구·김규식은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비판하며 한국 전쟁을 예언했다.[41] 조소앙도 남북협상이 이용당했다고 주장했다.

8월 21일, 남쪽 '대표'들이 해주에 모여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북조선의 단독정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립을 가져왔다.

김구·김규식은 1948년 7월 21일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하여 민족통일운동을 계속했지만, 1949년 6월 26일 김구 암살과 이듬해 한국 전쟁, 김규식 납북 등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41]

조봉암은 5·10 단독 총선거에 참여했고, 조소앙사회당을 창당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고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당원들의 출마를 권유했다. 김규식도 민족자주연맹 의원들의 총선 참가를 허용했다.

4. 1. 방북 후 북한에 잔류한 사람들

홍명희洪命熹|홍명희중국어, 김원봉金元鳳|김원봉중국어, 백남운白南雲|백남운중국어, 이극로李克魯|이극로중국어, 성주식成周寔|성주식중국어, 손두환 등은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방북했다가 북한에 잔류하였다.[42] 이들은 갑자기 평양에서 잔류를 결정했다기보다는, 일찍부터 북한에 포섭되어 서울에서 주요 인사들의 방북을 유도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42] 예를 들어,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로 보이지 않았던 홍명희도 해방 직후부터 비밀리에 서너 차례 북한을 다녀온 것이 밝혀져, 북한에 포섭된 인물로 드러났다.[42]

4. 2. 김구 - 류위완(劉馭萬) 대화록에 나타난 방북 후의 김구의 입장

1948년 7월 13일, 중국 총영사 류위완(劉馭萬)은 김구를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었고, 이 대화는 영문으로 기록되어 공개되었다.[46] 이 대화록에서 김구는 북한의 군사력 강화와 남침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김구는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단하고, 그사이 남한에서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맞서는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언급했다.[47] 또한 "소련 사람들은 아주 손쉽게 북한군을 남진하는 데 써먹을 것이고, 단시간에 여기서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이라고 말했다.[47]

이러한 김구의 발언은 북한이 이미 남한을 압도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남침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남한이 북한의 군사력에 대항하기 어렵고, 남침이 발생하면 빠르게 적화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47]

실제로 미군정 고위층에서도 미소 양군 철수 후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예상하는 관측이 있었다.[48] 뉴욕 타임스 특파원 존스턴(Richard Johnston)은 1947년 10월 27일자 기사에서 "미군정 고위층이 소련군과 미군 철수 이후 북한 공산주의자의 남한 공격 계획에 관한 보고서는 정확했다"고 보도했다.[48] 이는 당시 남북한의 군사력 불균형과 북한의 남침 위협이 현실적인 문제였음을 시사한다.

4. 3. 6.25 남침과 남북 협상 참여 요인들의 납북

김구가 예상했던 대로 북한은 불과 2년 뒤 6.25 남침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는 남북협상에 임한 북한의 의도가 남한의 총선을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고, 그들이 원하는 남북한 단일정부는 애초부터 남침 전쟁을 통해 남한을 적화하여 달성한다는 계획이었음을 입증한다. 전쟁 준비는 하루 이틀 사이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북한이 해방 직후부터 군사력 강화에 열성적이었다는 것도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소련의 대리인으로 소련군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북한의 실질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김일성이 자신의 권력을 잃을 수도 있는 남북합의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을 진지하게 고려했을 리는 만무하고, 자신이 통일 정부의 최고 권력자가 되는 적화 통일만이 그가 원한 유일한 통일정부 수립 방식이었을 것은 자명하다.

연석회의가 열린 지 불과 10개월 후인 1949년 3월에 김일성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에게[43] 통일을 위한 남침 전쟁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50] 이후 48차례나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내 간청한 끝에[51][52] 간신히 승낙을 얻어 6.25 남침 전쟁을 일으킨다. 이로 보아 북한이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에 나선 것은 남한에 분열과 혼란을 조성하고 총선을 방해할 목적이 있었을 뿐이고, 애초부터 전쟁을 통한 적화통일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인민군은 단기간에 서울을 점령한 후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다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국군과 UN군의 반격으로 남한 적화가 실패할 가능성이 커지자, 남한의 주요 인사들을 납북하기 시작했다. 전 북한정무원 부부장 박병엽 (필명 신경완)의 증언에 의하면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우선 납북 대상이었다.[53] 협상을 위해 방북했던 김규식(1881 ~ 1950), 조소앙(1887 ~ 1958), 조완구(1881 ~ 1954), 엄항섭(1898 ~ 1962), 김붕준(1888 ~ 1950),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7263 최동오]](1892~1963)[54], 원세훈(1887 ~ 1959)[5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594 오하영]](1879 ~ 1960),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0513 박건웅]](1906 ~ ?)[56] 등이 납북되었다. 평양까지 가서 공산주의자들의 실상을 겪어보고도 그들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끝내 그들에 의해 비극적인 일을 당한 것이다. 김구도 생존해 있었더라면 최우선 납북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박병엽 (필명 신경완)은 이들 피납인사들의 납북 후의 운명에 대해서도 증언한 바 있다.[53][57]

남한 측 협상 참여 주요 인사 대다수를 납북한 것만 보아도 북한 측이 협상에 임한 목적은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총선을 방해하기 위한 대남 공작 차원이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5. 남북협상에 대한 미군정의 입장

미군정은 남북협상에 처음부터 반대하였다.[58] 미군정은 원래 이승만, 김구보다는 중도 온건파인 김규식을 지도자로 선호하였으나, 남북협상을 위한 그의 방북에는 반대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미군이 개입할 일이 아니라면서 방북을 강행하였다.[13][28] 미군정은 남북협상에 반대했지만 협상파들의 방북은 막지 않았고, 사태를 관망하였다.

남북협상에 대해 미군이 내린 평가는 "유엔한국위원단 연락장교 웨컬링 장군의 보고서(Report of Weckerling, liaison officer with the 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 1948-06-25)"[59]에 나오는데, 대강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소련과 북한의 목적은 남한의 동조자들에게 자금을 대고 부추겨서 총선을 방해하여 무력화시키고, 미소 양군 철수 후 외국의 간섭을 배제한 한국인들의 정부를 수립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압박하는데 있다.

북한은 방북 인사들이 감명을 받도록 평양 거리를 깨끗이 청소하고 보수하며, 건물들을 도색하고, 평양 근교의 도로들을 개보수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들였다. 방북인사들은 국영공장 노동자들의 열의와, 마을 사람들의 집, 의복, 재봉틀, 침실, 전기 조명, 깨끗한 부엌 등에 감명을 받았으며, 한 공장의 라운지에서 노동자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남북연석회의를 축하하기 위해 김일성 광장에 34만명의 노동자, 농민, 학생, 시민들이 모였다고 평양 라디오는 자랑하였고, 그들의 선전선동 주제는 "미국인의 주구들만 남한의 단독선거를 지지한다", "남한의 단독 정부 계획을 타도하라", "남한의 단독선거에 참여하지 말라"는 등이었다.

이런 것들은 남한의 반대정파 지도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인 계획된 보여주기에 지나지 않지만, 김구김규식이 계속 이에 대한 발언을 하도록 하고, 미국 관리들에게 북한에서 본 것들에 대해 감동받았다고 말하도록 하는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다른 온건파나 좌파 귀환자들은 이 두 사람과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상당히 저명한 좌파 한 사람은 평양의 주장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자 1주일간 구금을 당했고, 그는 북한에 비해 남한은 천국이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북한 공산 지도자들의 비타협적 태도는 러시아를 대신해서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겠다는 일관된 야망의 징표라고 생각했다.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 없는 남북 지도자들의 회동은 전체적으로는 실패이다. 명백히 남한의 선거를 파탄내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계획의 일부일 뿐이며, 남북지도자들의 연합을 이끌어 내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한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이 회동을 통해 얻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은 선거 며칠 전에 소련군과 미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즉각적인 군대 철수와 한국 문제를 한국인들에게 맡길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준비하는 것과 인민위원회가 임시헌법을 채택하도록 하는 것 등이다.

북한의 소련군 사령관은 회동에서 채택된 이 편지에 즉각 답하며 "미군도 동시에 철수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해 소련군은 철수 준비를 완료했다"고 하였다. 이런 것은 남한 선거에 반대하는 최대의 선전효과를 노려 치밀하게 준비한 말투이며 선거에 별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미군이 기록한 "김구, 김규식이 발표한 공동성명(Kim Koo and Kim Kiusic issue joint statement: 1948-05-06)"[40]에도 귀환한 김구, 김규식의 발언들이 나온다. 두 사람 모두 미소 양군이 철수해도 북한의 남침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구가 남한에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 사진을 내걸지도 않는데 북한은 어디에나 스탈린 사진을 걸어놓은 것을 지적하자 공산주의자들이 분노했다고 했다. 김규식김두봉은 고집불통이었고, 김일성이 더 대화할만한 상대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출발 전에는 김규식김일성은 가짜라는 소문도 있고, 만난 적도 없는 모르는 사람이지만, 김두봉은 독립운동 당시부터 잘 아는 사람이니 협상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었다.[28]

6. 소련 문서 공개로 드러난 새로운 사실

레베데프(Nikolai Lebedev, 1901 – 1992) 소장이 남긴 ≪레베데프 비망록≫이 1994년 공개되면서, 1948년 봄의 남북정치협상은 스티코프와 레베데프 등 소련군정 핵심인사들이 주도한 치밀한 정치공작에 따른 것으로 밝혀졌다.[60][61]

≪레베데프 비망록≫에는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3월 17일부터 검토되었고, 3월 24일 자에는 연석회의 대회 일정이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다.[62]

중앙일보가 보도한 ≪레베데프 비망록≫의 요지 중 남북협상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은 소련이 내세운 대리인에 불과했기 때문에 남북협상과 같은 중요한 사안은 소련이 막후에서 조종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된 일이었고, ≪레베데프 비망록≫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북한이 김구김일성과의 단독 회담에서 자신의 노후를 부탁했다고 주장해 온 것의 사실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었는데,[63] 이 비망록에 그러한 내용이 나오므로 사실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소련의 대리인으로 발탁된 김일성뿐만 아니라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소련에 종속되어 있었다. 2004년에 번역 간행된 《스티코프 일기》에 따르면, 박헌영은 스티코프에게 자주 행동 지침을 문의했고,[64] 스티코프는 박헌영에게 지침을 내리는 한편 수시로 남한 좌파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서울의 소련 부영사였던 아나톨리 샵신박헌영이 자신의 심복(henchman)이라고 말하기도 했다.[65] 김일성, 박헌영 등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하수인이었고, 조만식 등 북한의 반소 또는 반공 인사들은 이미 제거되었으므로, 남북협상은 조선인들끼리 자주적으로 통일정부를 세우는 협상을 하는 자리가 될 수 없었다.

이 협상의 실질적 당사자는 김일성, 김두봉을 대리인으로 내세운 소련과 남한의 총선 반대파들이었고, 애초에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없었다. 소련은 남한에서 온 대표들을 공작 대상으로만 생각했을 뿐 진지한 협상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 협상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소련과 북한은 남한 사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을 빚게 만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7. 평가

이승만크렘린 당국이 합리적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고 예상하는 것은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66]

연석회의의 결정에 따라 남한에서는 5·10선거 반대투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지만, 이를 주도한 것이 주로 좌파세력에 국한되어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31] 북조선이 연석회의를 수락하기 전인 1948년 2월 8일조선인민군을 창설하고, 2월 11일부터는 1947년 12월에 작성된 임시헌법 초안을 '전(全) 인민 토의'에 붙이는 등 북한정권 수립을 위한 수순을 밟고 있었다는 점[34]이 드러나면서, 연석회의가 결과적으로 김일성 체제 확립 전략의 일환이었다는 비판과 함께 '김구와 김규식이 이용만 당했다'는 조롱섞인 비판도 있다.[32] 또한 이러한 한계로 인해 이후 김구·김규식이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 과정과 이에 대응한 북조선의 정부 수립 등에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평가도 있다.[31]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은 북조선의 3월 25일 제의에 대해 "미리 다 준비한 잔치에 참례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라 우려하고 있었으며, 4월 19일부터 연석회의에 참가하면서도 인사말만 한 번 하거나(김구), 아예 참가하지 않는 등 (김규식) 북의 프로그램에 따라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연석회의에 비판적이었다.[32][34] 장건상은 남북협상 중 '우리 겨레는 공산주의를 갖고는 살 수 없다. 우리가 근로인민당 운동을 하는 것은 공산사회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평등의 이념으로 평화롭게 살려는 데 있다'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한동안 북조선에 감금당하기도 했다.[35]

김규식은 북에 이용당하지 않으면서도 통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독재정권 배격·총선거 실시·전쟁방지방안 마련 등 5개항을 북에 제시하기도 했다.[34] 조소앙은 남북협상을 실패로 규정하며 '이번 방북 길은 완전히 실패다. 우리가 완전히 모욕당하고 들러리를 섰다.'[38] 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성균관대학교 교수 서중석은 연석회의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처음으로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으며, 이 자리에서 결의된 공동성명서에 담긴 내용은 당장에 실현되기는 어려웠으나 통일국가수립 방안을 구체화했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34]

소련군은 북한에 진주한 직후부터 5년간 소련군 부대에서 교육시켜 데려온 김일성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조만식 등 반대파를 제거하여 그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해주고, 토지 몰수 등 각종 공산주의식 개혁을 단행하여 1948년에 들어서면 남한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사회가 되어 있었으므로 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남한 일부 정파의 대표에 지나지 않는 김구, 김규식과 달리 김일성은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북한의 실질적 권력을 장악해 있었으므로 그가 원하는 통일정부라면 자신이 최고지도자가 되는 경우 외의 다른 방안은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는 곧 적화통일에 다름 아니다. 이를 위해 북한은 연석회의 이후 불과 2년도 못되어 6.25 남침을 감행하였다. 이 또한 남북협상에 임하는 북한의 진의는 협상을 통해 남북 단일 정부를 구성하는 데에 있지 않고, 남한의 총선을 방해할 목적이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해방 당시 국내에 지지기반이 전혀 없던 김일성이 소련의 대리인이 되어 소련군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북한의 권력을 장악해 있는 사정을 도외시하고, 그가 마치 북한 주민들의 대표인 것처럼 간주하여 미소양군이 철수하고 조선인들끼리 주체적으로 단일정부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그와 협상을 벌인 것도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힘을 가진 미국도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을 상대로 아무런 합의를 도출할 수 없었는데, 아무런 실질적인 힘도 가지지 못한 남한의 총선 반대파들이 북의 소련 대리인들을 상대로 아무런 의미 있는 합의도 끌어내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북한에는 전 지역 도처에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내걸어 놓고 있었다. 이는 김일성이 스탈린의 대리인으로 독재를 하고 있다는 노골적인 증거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독재도 반대하며 미소양군 철퇴와 조선인끼리의 통일정부 협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공허한 주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으로 출발하기도 전에 북한은 양김씨(兩金氏)가 이미 항복(降服)했다고 선전(宣傳)하고 있었고, 서울의 신문들도 이런 사실을 보도하고 있었다.[67] 북한의 의도는 처음부터 뻔한 것이었는데도 두 사람이 방북을 강행하여 결과적으로 이용당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연석회의에 동행한 남측 인사 226명 중 홍명희 등 70여 명이 서울로 귀환하지 않고 평양에 잔류했다는 사실은 연석회의 참석자의 약 3분의 1이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 북한의 의도를 대변하여 남북협상을 주장한 자들이었음을 시사한다.[68][69] 양김씨의 방북은 이들이 당당하게 월북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역할도 했다.

참조

[1] 일반
[2]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3] 웹사이트 남북연석회의 http://contents.arch[...] 국가기록원 2006-12-01
[4] 웹사이트 남북협상(남북연석회의) http://contents.arch[...] 국가기록원 2006-12-01
[5] 서적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웅진 지식하우스
[6]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7] 일반
[8] 뉴스 赤色政權企圖凖備(적색정권기도준비)?「슈」氏提案(씨제안)에 在京美高官談(재경미고관담)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47-09-28
[8] 뉴스 南朝鮮支配(남조선지배)를 陰謀(음모) 美國官民側(미국관민측)의 反響(반향)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47-09-28
[9] 뉴스 남북통일(南北統一) 불능시(不能時)는 남선(南鮮) 선거(選擧) 주장(主張), 김구씨(金九氏) 정부수립성명발표(政府樹立聲明發表) http://www.nl.go.kr/[...] 영남일보 1947-12-02
[9] 뉴스 남북(南北)을 통(通)한 선거(選擧)아니라도, 정부(政府)는 통일정부(統一政府), 김구씨(金九氏)·성명발표(聲明發表) http://www.nl.go.kr/[...] 부녀일보 1947-12-02
[10] 간행물 '건국이념의 상실'이 한국미래 어둡게 해 http://www.syngmanrh[...] 한국논단 2009-08
[11] 기록 류위완(劉馭萬, 유어만) 총영사의 대전(代電) http://db.history.go[...] 1948-04-20
[12]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2005-04-08
[13] 뉴스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2>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2) 密使(밀사)의 往來(왕래)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1-10-05
[14] 뉴스 金博士(김박사)도昨日北行(작일북행) 出發前五個提案發表(출발전 5개안 발표)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48-04-22
[15] 뉴스 독재정치 배격(獨裁政治排擊), 남북 선거로 통일정부, 金박사 주장 5원칙 http://db.history.go[...] 자유신문 1948-04-22
[16] 백과사전 성시백간첩사건(成始伯間諜事件) http://encykorea.aks[...]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7] 간행물 거물간첩 성시백 프로젝트 월간중앙 1992-06
[17] 서적 해방공간과 성시백사건 도서출판 글 1993
[18] 뉴스 성시백 관련 기사 로동신문 1997-05-26
[19] 웹사이트 김구를 포섭한 공산주의 혁명가, 성시백의 일생 http://www.konas.net[...] 코나스넷 2006-06-06
[19] 웹사이트 金九를 포섭한 金日成의 스파이 성시백 http://www.futurekor[...] 미래한국 2006-03-25
[20] 웹사이트 김구를 포섭한 공산주의 혁명가, 성시백의 일생 http://www.bluetoday[...] 블루투데이 2012-05-14
[21] 서적 해방3년사 까치
[22] 간행물 1948년 남북협상과 관련된 북한의 대남 정치공작 http://www.kanis.or.[...] 국가정보연구 2010-08-17
[23] 서적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일보사
[23] 간행물 1948년의 남북협상에 관한 연구 http://book.aks.ac.k[...] 정신문화연구 2010-06
[23] 간행물 1948년 남북협상과 관련된 북한의 대남 정치공작 http://www.kanis.or.[...] 국가정보연구 2010-08-17
[23] 간행물 해방공간에서의 남북한 정보·정치공작 활동 http://www.kanis.or.[...] 2010-02-23
[24] 뉴스 南北單政企圖는 慘禍만을 더 釀成: 金九氏等七巨頭共同聲明 http://www.nl.go.kr/[...] 군산신문 1948-03-13
[25] 뉴스 홍명희, 京橋莊(경교장) 방문, 김구와 요담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48-03-18
[26] 뉴스 홍명희(洪命熹) 맏딸과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http://www.nl.go.kr/[...] 연합신문 1950-01-25
[26] 뉴스 김일성(金日成)이 재혼(再婚), 홍명희(洪命熹) 맏딸 영숙(永淑)과 http://db.history.go[...] 자유신문 1950-01-25
[26] 뉴스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http://www.nl.go.kr/[...] 한성일보 1950-01-25
[26] 뉴스 깨여지는 괴뢰(傀儡)의 백일몽(白日夢) 치열화(熾烈化)한 반소반공운동(反蘇反共運動)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50-01-25
[26] 기록 김일성(金日成) 전속 간호부 조옥희(趙玉姬), 체포 후 기자회견 http://db.history.go[...] 부산일보 1951-03-01
[26] 기록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http://www.fas.org/i[...] U.S. Army Far East Command 1952-07-31
[26] 서적 歷史의 證人 http://dlps.nanet.go[...] 韓國亞細亞反共聯盟
[27] 서적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8] 뉴스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7>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7) 金奎植(김규식)의 心境(심경)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1-10-16
[29] 뉴스 南北協商만이 救國에의 길, 薛義植氏等 108 文化人이 支持聲明 http://www.nl.go.kr/[...] 독립신보 1948-04-29
[29] 뉴스 文化人 百八名 連署, 南北會談 支持 聲明, 兩軍 同時 撤兵은 大經大法이다. http://www.nl.go.kr/[...] 조선중앙일보 1948-04-29
[30] 간행물 1948년 남북협상과 관련된 북한의 대남 정치공작 http://www.kanis.or.[...] 국가정보연구 2010-08-17
[30] 간행물 1948년의 남북협상에 관한 연구 http://book.aks.ac.k[...] 정신문화연구 2010-06
[31] 웹인용 남북연석회의 http://contents.arch[...] 국가기록원 2006-12-01
[32] 웹인용 남북협상(남북연석회의) http://contents.arch[...] 국가기록원 2006-12-01
[33] 웹사이트 신편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4) 남북지도자회의-연석회의와 남북협상 > (3) 연석회의와 남북협상 > 나. 남북요인회담 및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http://db.history.go[...]
[34] 서적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웅진 지식하우스 2005-04-08
[35]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인물과사상사 2005-04-08
[36] 서적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06-01
[37] 서적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38] 서적 건국 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39] 뉴스 兩金氏(양김씨) 共同聲明發表(공동성명발표)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48-05-07
[40] 간행물 Kim Koo and Kim Kiusic issue joint statement (김구와 김규식의 공동성명) http://db.history.go[...] JACOBS 1948-05-06
[41] 서적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02-05
[42] 서적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https://www.kyoboboo[...] 선인 2010
[43] 웹사이트 March 05, 1949 Meeting Between Stalin and Kim Il Ssung http://digitalarchiv[...]
[44] 뉴스 單政 不遠 無用化, 金九氏 記者團과 一問一答 http://webviewer.nl.[...] 조선중앙일보 1948-06-25
[45] 뉴스 劉領事京橋莊訪問(유영사경교장방문) 金九氏(김구씨)와要談(요담)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48-07-13
[46] 웹사이트 Record of Conversation between Kim Gu and Liu Yuwan : July 11, 1948 http://digitalarchiv[...]
[47] 뉴스 김구 “소련, 북한군을 남진에 써먹을 것”… 전쟁 가능성 예견 http://news.joins.co[...] 중앙일보 2015-07-18
[48] 웹사이트 FRUS 1947, The Far East Volume VI > 한국 > 미군 철수 후 북한의 남한 공격을 예견하는 뉴욕 타임즈 기사 관련 http://db.history.go[...]
[49] 웹사이트 자료대한민국사 제6권 > 1948년 > 뉴욕타임즈 서울특파원 존스턴, 북조선 국가수립설에 대한 전망 피력 http://db.history.go[...]
[50] 뉴스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http://newslibrary.n[...] 한겨레신문 1994-07-22
[51] 웹사이트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https://www.wilsonce[...] 1993
[52] 뉴스 소련, “남침 준비 부족, 게릴라전 주력하라” http://mn.kbs.co.kr/[...] Kbs News 2010-06-24
[53] 서적 (현대사실록) 압록강변의 겨울 : 납북 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 http://www.kwafu.org[...] 다섯수레 1991
[54] 뉴스 김일성(金日成)은 나의 제자(弟子)다? 삼팔선(三八線) 넘는 최동오씨담(崔東旿氏談) http://www.nl.go.kr/[...] 민중일보 1948-04-22
[55] 웹사이트 원세훈(元世勳, 1887 ~ 1959) http://encykorea.aks[...]
[56] 뉴스 金박사도 昨朝에 北行, 방해를 일축 후 病軀 이끌고 發程 http://db.history.go[...] 자유신문 1948-04-22
[57] 뉴스 증언(證言) 납북인사(拉北人士) 그때 그 순간 : 신경완(申敬完) 전(前) 북한정무원 부부장(副部長) 공개 http://www.kwari.org[...] 조선일보 1991-10-02, 1991-10-03, 1991-10-04
[58] 뉴스 하지 中將(중장), 南北協商(남북협상)의 矛盾性 剔抉(모순성척결)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48-04-07
[59] 간행물 Report of Weckerling, liaison officer with the 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유엔한국위원단 연락장교 웨컬링 장군의 보고서) http://db.history.go[...] JACOBS 1948-06-25
[60] 서적 레베데프 비망록 : 대구, 매일신문 1995.1.1.~2.28. 24회 연재기사 全文: 1947.5.14~1948.12.26 기록 http://dl.nanet.go.k[...] 해동인쇄사 2016
[61] 뉴스 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 - 蘇 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http://news.joins.co[...] 중앙일보 1994-11-15, 1994-11-16, 1994-11-17, 1994-11-21, 1994-11-22, 1994-11-23, 1994-11-24
[62] 웹사이트 신편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4) 남북지도자회의-연석회의와 남북협상 > (2) 북의 연석회의 제안 http://db.history.go[...]
[63] 뉴스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김구와 김일성의 다른 계산 : 남북협상 http://weekly.chosun[...] 주간조선 2015-08-24
[64] 웹사이트 해외사료총서 10권 쉬띄꼬프일기 > 쉬띄꼬프 일기(번역) > 쉬띄꼬프 일기 Ⅱ부 > 1946년 12월 25일, 쉬띄꼬프일기 1946년 9월 9일 http://db.history.go[...]
[65] 웹사이트 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 http://db.history.go[...]
[66] 서적 雩南 李承晩 태극출판사 1970
[67] 뉴스 『양김씨(兩金氏) 이미 항복(降服)』 북조선(北朝鮮)의 모략선전(謀略宣傳) http://webviewer.nl.[...] 현대일보 1948-04-15
[68] 간행물 1948년의 남북협상에 관한 연구 http://book.aks.ac.k[...] 정신문화연구 2010-06
[69] 간행물 劉馭萬 총영사의 代電 http://db.history.go[...] 1948-04-2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