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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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6차 십자군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주도한 십자군 원정으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의 파문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과 10년간의 휴전 조약을 맺어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 등을 기독교 세력에게 반환받았으나, 교황과 일부 기독교 세력은 파문된 황제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십자군은 이후 테오발드 1세, 리처드에 의해 이어졌지만, 1244년 호라즘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 십자군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제6차 십자군은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개별 왕들이 주도하는 십자군 원정의 시대를 열었으며, 십자군에 대한 인식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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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차 십자군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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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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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명칭 | 제6차 십자군 |
부분 | 십자군 |
시기 | 1227년–1229년 |
장소 | 근동 |
결과 | 십자군의 정치적 승리 |
상세 결과 | 야파 조약 체결 |
상세 결과 | 예루살렘이 십자군에게 반환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신성 로마 제국 |
교전국 1 추가 | 튜턴 기사단 |
교전국 1 추가 | 시칠리아 왕국 |
교전국 2 | 아이유브 왕조 of 이집트 |
교전국 2 추가 | 아이유브 왕조 of 다마스쿠스 |
지휘관 | |
지휘관 1 | 프리드리히 2세 |
지휘관 1 추가 | 헤르만 폰 잘차 |
지휘관 1 추가 | 토마스 다키노 |
지휘관 1 추가 | 피터 데스 로체스 |
지휘관 1 추가 | 윌리엄 브리워 |
지휘관 1 추가 | 헨리크 폰 림부르크 |
지휘관 1 추가 | 오도 몽벨리아르 |
지휘관 1 추가 | 리카르도 필랑기에리 |
지휘관 1 추가 | 발리앙 그레니에르 |
지휘관 1 추가 | 피에르 드 몽타규 |
지휘관 1 추가 | 베트랑 드 테시 |
지휘관 2 | 알카밀 |
지휘관 2 추가 | 파크르 앗딘 이븐 아스샤이크 |
지휘관 2 추가 | 안나시르 다우드 |
기타 정보 | |
참고 사항 | 예루살렘, 나자렛, 시돈, 야파, 베들레헴이 십자군에게 양도됨. |
2. 배경
5차 십자군은 1221년에 실패로 끝났지만, 근동에서 더 이상의 영향력을 얻지 못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 원정을 서약했음에도 불구하고[3] 실제로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2]
교황 호노리우스 3세와의 협상을 통해 1220년에 황제에 즉위하고 십자군 원정을 서약했으나 출발하지 않은 프리드리히 2세는 비난받았다. 호노리우스 3세는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압박했으나,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시칠리아 왕국에서 자란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에 열광하지 않았고, 십자군을 이탈리아 정책에서 교황과의 협상 카드로 인식했으며, 지중해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신성 로마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1225년 예루살렘 왕 장 드 브리엔의 요청에 따라 그의 딸이자 예루살렘 여왕인 이사벨 2세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위를 얻었다. 1227년 출발하여 브린디시까지 갔으나, 전염병으로 많은 병사와 튀링겐 변경백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하여 돌아왔다. 같은 해 그레고리우스 9세는 이 연기를 서약 위반으로 간주하여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했다.
한편, 시리아와 이집트에서는 아이유브 왕조가 내전에 휘말렸는데, 술탄 알 카밀이 그의 여러 형제들과 다른 친척들과 싸웠다. 술탄은 5차 십자군 동안 제안되었던 평화를 위한 영토 교환 제안을 아직 철회하지 않았고, 프리드리히는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2]
2. 1. 5차 십자군의 실패와 프리드리히 2세
제5차 십자군은 1221년에 실패로 끝났고, 그 원인 중 하나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비난받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 원정을 서약했음에도 불구하고[3] 실제로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 그는 1215년 아헨에서 로마 왕으로 즉위하면서 십자군 참여를 서약했고,[4] 1220년에는 교황에 의해 황제로 재대관식을 치르면서 다시 한번 십자군 서약을 했다.[5]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시칠리아 왕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십자군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십자군을 이탈리아 정책에서 교황과의 협상 카드로 이용하고, 지중해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신성 로마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세력을 확장하는 수단으로 여겼다.
1225년,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왕 장 드 브리엔의 딸이자 예루살렘 여왕인 이사벨 2세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위를 획득했다.[6]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십자군 원정을 미루었고, 1227년에야 브린디시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원정군은 전염병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튀링겐 변경백 루트비히 4세마저 사망하면서 프리드리히 2세는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프리드리히 2세에게 우호적이었던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사망하고, 강경파로 알려진 그레고리우스 9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레고리우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원정 연기를 서약 위반으로 간주하여 그를 파문했다.
2. 2. 교황과의 갈등
제5차 십자군의 실패는 기독교 세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예루살렘 함락 후, 이를 탈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유일한 유럽 군주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였다.[3] 그는 1215년 아헨에서 로마 왕으로 즉위하면서 십자군 참여를 서약했고,[4] 1220년에는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재대관되면서 다시 한번 십자군 서약을 했다.[5]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 원정을 즉시 이행하지 않았다. 호노리우스 3세는 1221년 프리드리히 2세에게 서약 이행을 촉구했고, 1223년 페렌티노에서 열린 회의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다시 십자군 참여를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25년 산 제르마노 협정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1227년 8월까지 십자군 원정을 떠나 2년간 성지에 머무를 것을 약속했지만, 여러 차례 연기했다.[6]
1225년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장 드 브리엔의 딸 이사벨 2세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위를 확보했다. 이후, 1227년,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 원정을 위해 브린디시로 향했으나,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사망하고, 튀링겐 변경백 루트비히 4세마저 사망하면서 원정은 또다시 연기되었다.
1227년 호노리우스 3세가 사망하고, 강경한 성향의 그레고리우스 9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레고리우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계속되는 원정 연기를 서약 위반으로 간주하여 그를 파문했다.[7] 프리드리히 2세는 질병을 이유로 들었으나, 교황은 이를 믿지 않았다.[15]
2. 3. 아이유브 왕조의 상황
5차 십자군은 1221년에 끝났지만, 근동에서 더 이상의 영향력을 얻지 못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시리아와 이집트에서는 아이유브 왕조가 내전에 휘말렸는데, 술탄 알 카밀이 그의 여러 형제들과 다른 친척들과 싸웠다. 술탄은 5차 십자군 동안 제안되었던 평화를 위한 영토 교환 제안을 아직 철회하지 않았고, 프리드리히는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2]제5차 십자군의 패배는 알 카밀, 알 무아잠, 알 아쉬라프 형제들의 공동 노력의 결과였다. 1221년 이후 알 무아잠은 형제들과 그들의 의도를 의심하며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 1222년 6월, 그는 휴전을 강화하기 위해 귀 이 엠브리아코(Guy I Embriaco)에 대한 원정을 수행했고, 사촌인 하마의 에미르 알 나시르 킬리즈 아르슬란을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이후 마알라트 알 누만과 살라미야를 점령했다. 알 무아잠은 알 카밀의 명령에 따라 하마 공성을 중단하고 다른 정복지를 포기해야 했다. 그런 다음 그는 살라딘의 전직 장군인 괴크뵈리와, 아마도 술탄 알 나시르의 요청에 따라 그의 형제 알 아쉬라프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다.
또 다른 형제인 알 무자파르 가지는 마이야파리킨(Silvan, Diyarbakır)과 아흘라트(Ahlat)에 임명되었으나, 알 아쉬라프에 반란을 일으킨 후 아흘라트를 잃었다. 가지는 알 무아잠의 반란에 가담했으나, 알 아쉬라프와 알레포군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다시 홈스를 공격했으나, 알 무아잠은 알 카밀의 위협으로 제지되었다. 이제 유리한 위치에 있는 두 형제 모두에 대항하여, 알 무아잠은 술탄의 이집트군의 불만 분자들에게 손을 내밀었고, 감히 시리아에 올 경우 술탄에게 도전했다. 알 아쉬라프에 대항하여 그는 디야르바크르를 공격하기 위해 샤 알 즈알 알 딘 망구르니 휘하의 호라즘 샤의 도움을 요청했다.
1226년, 알 무아잠은 다시 홈스로 이동했고, 괴크뵈리는 모술과 알 자지라를 공격했다. 알 아쉬라프는 홈스에서 그의 형제를 저지하고 괴크뵈리와 싸우기 위해 룸의 셀주크 술탄 카이쿠바드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알 아쉬라프와 모술 통치자 바드르 앗딘 루루는 알 무아잠에게 굴복했지만, 그 전에 즈알은 아흘라트와 이후 아제르바이잔에 투자했다. 그의 아흘라트에 대한 종주권은 알 무아잠에 의해 인정되었고, 그는 또한 다마스쿠스에서 알 아쉬라프를 구금했다. 이 시점에서 알 카밀은 서방과의 평화를 모색하기 시작하여 에미르 파크르 앗딘 이븐 앗 샤이크를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보냈다.
1227년 5월까지 알 카밀은 그의 술탄령을 걱정했고, 점점 더 궁지에 몰렸다. 십자군이 도착하기 시작했고, 그는 1226년 프리드리히 2세에게 제안했던 예루살렘에 대한 제안을 다시 고려했는데, 그것은 그에게 유일한 실행 가능한 선택으로 보였다. 그러나 1227년 5월까지 알 아쉬라프는 다마스쿠스에서 풀려났고, 하마의 에미르 알 나시르 킬리즈 아르슬란과 홈스의 알 무자히드는 알 무아잠에 대항했다. 아크레에 모이는 십자군을 두려워한 알 무아잠은 제5차 십자군에서 했던 것처럼, 예루살렘을 포함한 요새의 방어 시설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알 무아잠은 1227년 11월 12일에 사망했고, 알 카밀의 승인을 받아 그의 아들 안 나시르 다우드가 계승했다. 아이유브 왕조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우드는 삼촌의 크라크 드 몽트뢰 포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또 다른 형제인 알 아지즈 우스만(바니야스)이 바알베크의 에미르 바흐람 샤를 공격했다. 다우드의 명령에 따라 물러서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알 아지즈는 고집했고 알 카밀은 1228년 7월 예루살렘과 나블루스를 점령하여 대응했다. 알 아쉬라프는 다마스쿠스로 소환되었고, 그는 탈 알 아줄에서 알 카밀을 만났다. 거기서 알 아쉬라프는 다마스쿠스를, 다우드는 알 자지라를 차지하기로 결정되었다. 알 카밀은 예루살렘에 남아 프리드리히 2세와 협상을 진행했다.
3. 파문 십자군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발표된 교회 결정문 ''Ad Liberandam''은 십자군 원정의 공공 재정 시스템을 형성했다.[8] 교황청 재무부의 지출은 십자군 운동에 필수적인 지원을 제공했지만, 개별 ''십자군 참가자''에 의해 모금된 자금도 중요했다.
1222년 11월, 브리엔의 장은 여러 목표를 가지고 브린디시에 도착했다. 왕국의 재정은 고갈되었고, 미래의 십자군 원정이 분열된 지도력으로 인해 방해받지 않도록 하며, 왕국이 그러한 노력을 주도하도록 하려고 했다. 영국과 스페인의 궁정에서 지원을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프랑스의 필리프 2세로부터 임종 직전에 받은 약속은 이미 성지에 할당된 계좌에서 나온 것이었다. 잉글랜드의 헨리 3세는 결국 부과금을 실시했지만, 자발적인 기부금에서 얼마나 많은 돈이 모였는지는 불분명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인노첸시오 3세가 분배를 통합하면서, 1221년부터 1228년까지 그의 계획된 십자군 원정을 위해 제한된 교회 부과금이 있었다. 이 황제의 제6차 십자군 원정 자금은 황제가 마련해야 했다. 산 제르마노 이후 압수된 금은 십자군 원정의 지연으로 인해 빠르게 소진되었고, 프리드리히 2세는 1228년부터 시칠리아에 대한 부과금을 실시했다. 그는 또한 키프로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고, 예루살렘 왕이 된 후에도 지원을 받았지만, 자금 부족으로 십자군 군대의 규모가 작았다.
1226년이 되자, 제6차 십자군이 실제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침공을 통해 예루살렘 정복을 목표로 일어날 것이 분명해졌다. 프리드리히 2세는 산제르마노 조약의 조건에 따라 본질적으로 십자군을 이끌게 되었다. 1227년 호노리우스 3세가 사망한 후, 새로운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추진하려는 결의와 프리드리히에 대한 오랜 반감을 가지고 교황청에 들어섰다.[11]
십자군 원정의 초기 단계는 여러 차례의 파병, 아이유브 왕조와의 협상, 프리드리히 2세의 질병으로 인한 출발 지연, 그에 따른 파문, 그리고 마침내 아크레에 도착하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프리드리히 2세의 새로운 역할은 십자군의 목표에도 영향을 미쳤다. 1224년, 이집트 침공 계획에는 나일 삼각주로 진입할 수 있는 적절한 배가 필요했다. 이제 독일 출신의 병사들과 시칠리아의 자금을 바탕으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원정이 강조되었다.
잉글랜드의 헨리 3세는 1220년 5월 즉위식에서 십자군 십자를 받았고, 루이 9세의 실패 이후 십자군을 계획했었다.[13] 1223년 호노리우스 3세는 헨리에게 성지 원정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존과 마찬가지로, 더 가까운 곳의 위기가 우선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6차 십자군에는 상당한 잉글랜드의 참여가 있었다.
윌리엄 브리웨어 엑서터의 주교는 그의 삼촌 윌리엄 브류어를 대신하여 십자군에 참여했다. 윌리엄 브류어는 십자군 서약을 이행하기 전에 사망했다. 브리웨어는 윈체스터 주교인 피터 데 로슈와 함께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14] 주교들은 프리드리히 2세의 영향력 있는 고문이었다. 교황은 파문당한 프리드리히와 협력하는 사람이 없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두 주교 모두 교황의 명령을 무시하고 프리드리히와 긴밀하게 협력했다. 두 주교가 가져온 재정적 자원은 십자군에게 특히 감사하게 여겨졌다. 카이사레아와 야파의 요새는 그들의 돈으로 건설되었다. 두 사람 모두 1229년 2월 알-카밀과의 조약 체결에 증인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마지막으로 그레고리오 9세와 화해하려 시도하여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알베르트 1세와 두 명의 시칠리아 법무관을 교황에게 보냈다. 그러나 효과가 없었고, 프리드리히 2세는 1228년 6월 28일 브린디시에서 출항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을 해제하기 위해 교황과 협상을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1228년 6월 파문된 채로 십자군에 출발했다. 하지만 파문된 황제의 십자군에 반감을 느껴 귀국하는 사람도 많았다. 9월 7일에 아크레에 도착했지만, 여기서도 성 요한 기사단과 템플 기사단은 따르지 않았고, 현지 영주들도 협력에 소극적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예전부터 아이유브 왕조와의 관계가 있었다. 술탄인 알 카밀은 당시 시리아의 형제들과 다투고 있었고, 동맹을 조건으로 예루살렘을 반환할 의향이었다. 1229년 2월 예루살렘(돔 모스크 제외), 나자렛, 시돈, 야파, 베이루트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10년간의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평화적으로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했지만, 기독교 측에서의 평가는 낮았다. 가톨릭교회 측은 파문된 황제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3월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대관식을 거행했지만, 예루살렘 총대주교청과 성 요한 기사단, 템플 기사단의 총장은 불참했다.
3. 1. 프리드리히 2세의 출발과 지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1227년 여름, 브린디시 항구를 출발지로 정하고 십자군을 소집했다. 그러나 집결 과정에서 과밀, 폭염, 질병 등으로 인해 많은 십자군 병사들이 사망하거나 귀국했다.[14] 아우크스부르크 주교 지크프리트 폰 레흐베르크도 이때 사망했다.1227년 8월, 토마스 아퀴나스와 림부르크의 앙리가 지휘하는 독일군, 피에르 드 로슈와 윌리엄 브리웨어 주교가 이끄는 프랑스와 영국 군이 포함된 첫 번째 부대가 시리아로 먼저 출발했다.[14] 이들은 아크레에서 왕국의 군대와 합류하여 카이사레아와 야파를 요새화하고, 시돈에서 무슬림을 몰아내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
프리드리히 2세와 주력 부대는 1227년 9월 8일에 출항했으나, 오트란토에 도착하기 전에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렸고, 튀링겐의 루이는 사망했다.[12] 프리드리히 2세는 치료를 위해 상륙했고, 맹세를 지키기 위해 20척의 갤리선 함대를 아크레로 보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질병을 믿지 않았고, 약속 불이행을 이유로 1227년 9월 29일 그를 파문했다.[11] 프리드리히 2세는 사절단을 보내 상황을 설명하려 했으나 교황은 만나주지 않았다.
파문 소식과 질병으로 인한 지연은 십자군 내부에 동요를 일으켰다. 많은 십자군들이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반감을 품고 귀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2세는 1228년 6월, 파문당한 상태로 십자군 원정을 강행했다.
3. 2. 아크레 도착과 현지 상황
프리드리히 2세는 1228년 9월 7일 아크레에 도착했다. 템플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성직자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지만, 그가 파문되었기 때문에 평화의 입맞춤은 거부했다.[11]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화해를 시도했지만, 그레고리오 9세는 이미 황제의 파문이 유효하다는 통보를 라틴 총대주교와 군사 기사단장들에게 보낸 후였다.아크레에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지지는 분열되어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 자신의 군대와 튜턴 기사단은 그를 지지했지만, 템플 기사단, 총대주교, 시리아 성직자들은 교황의 적대적인 입장을 따랐다. 피사와 제노바인들은 황제를 지지했고, 잉글랜드는 처음에는 프리드리히를 지지하다가 교황으로, 다시 프리드리히를 지지하는 등 입장이 흔들렸다.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 소식이 퍼지자 그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크게 줄었다.
요한 기사단과 템플 기사단의 입장은 더 복잡했다. 그들은 황제의 군대에 직접 합류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자신의 이름을 공식 명령에서 제거하는 데 동의하자 십자군을 지지했다. 울트레메르(Outremer) 귀족들은 처음에는 프리드리히 2세를 환영했지만, 황제의 중앙 집권화 정책과 황권을 부과하려는 그의 열망에 대해 경계했다. 이는 프리드리히 2세가 키프로스에서 이벨린 가문의 장을 다룬 방식과 그들의 헌법적 우려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는 크지 않았고, 1227년에 림부르크의 하인리히의 지휘 아래 파견된 병력 대부분은 교회를 불쾌하게 할까 봐, 또는 조급함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울트레메르에서 이용 가능한 병력으로 증강되었더라도, 무슬림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효과적인 군대를 모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섭정 라이날도가 안코나 변경백국 공격에 실패했고 그레고리우스 9세가 그의 왕국을 침략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성지에서 장기간의 전쟁을 감당할 수도, 시작할 수도 없었다. 결국 제6차 십자군은 협상을 통한 십자군이 될 것이었다.
3. 3. 외교적 협상
프리드리히 2세는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과 외교적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반환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1226년부터 시작된 협상에서 알 카밀은 시리아 내전 상황에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며 성지의 상당 부분을 기독교 지배하에 반환할 것을 제안했다.[17]프리드리히 2세는 알 카밀과의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 반환을 목표로 하였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발리앙 드 시돈을 파견하여 술탄과 협상을 진행했다. 알 카밀은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확답을 주저했다.
1229년 2월, 양측은 야파 조약을 체결하여 10년간의 휴전과 함께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 시돈 지방의 일부, 야파, 토론을 프리드리히 2세에게 할양했다.[17] 그러나 템플 마운트 지역, 알아크사 모스크, 돔 오브 더 록은 무슬림의 지배하에 남았다.
알 카밀이 예루살렘 반환에 동의한 배경에는 시리아 내전의 해결과 더불어 몽골 제국의 위협이 있었다. 그는 다마스쿠스 공성전에 집중하고 있었으며, 몽골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와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기독교 측에서는 이 협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다. 이슬람 측이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전투를 통해 더 큰 영토를 회복할 수 있었다는 주장과, 성벽 없는 예루살렘과 몇몇 도시의 반환만으로는 유지가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4. 예루살렘 탈환과 그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알 카밀과의 외교적 협상을 통해 1229년 2월 18일 야파 조약을 체결하고, 예루살렘을 포함한 성지 대부분을 평화적으로 반환받았다.[17] 이 조약에는 10년간의 휴전 조항도 포함되었다.
알 카밀은 다마스쿠스에서 그의 조카 안-나시르 다우드와의 분쟁에 집중하고 있었고, 프리드리히 2세의 군사력이 약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알 카밀은 예루살렘을 양도하고, 베들레헴, 나사렛, 시돈 지방의 일부, 야파, 토론 등 해안 지역을 기독교 세력에게 반환하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이 조약은 완전한 승리가 아닌 타협의 결과였다. 무슬림들은 템플 마운트 지역, 알아크사 모스크, 돔 오브 더 록 등 예루살렘 내 주요 성지를 계속 통제했다. 또한, 요르단 동부의 성들은 여전히 아유브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다.
4. 1. 예루살렘 입성과 대관식
프리드리히 2세는 1229년 3월 17일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알-카밀의 대리인으로부터 도시의 정식 항복을 받았다.[16] 그는 다음 날 성묘 교회에 가서 스스로 관을 썼다. 헤르만 폰 잘차는 황제의 성명을 낭독하며, 그의 파문이 교황 때문이 아니라 그의 고문들 때문이라고 비난했다.[16] 총대주교의 부재로 인해 그가 이것을 예루살렘 왕으로서의 공식 즉위로 해석하기를 의도했는지는 의문스러웠다. 프리드리히가 쓴 왕관이 실제로는 황제의 왕관이었음을 시사하는 증거가 있지만, 어쨌든 예루살렘에 대한 그의 지배를 선포하는 것은 도발적인 행위였다.[16] 법적으로 그는 1228년 프리드리히가 떠나기 직전에 태어난 그의 아들 콘라트와 이사벨라 2세의 섭정에 불과했다.[16]제롤드 드 로잔느 예루살렘 총대주교와 군사 수도회의 수장들은 조약과 그에 따른 양보에 배신감을 느꼈다.[16] 헤르만 폰 잘차는 제롤드에게 화해 제안을 했지만, 총대주교는 속임수로만 여기고 군대의 파문을 위협하고 도시를 교령으로 봉쇄함으로써 프리드리히의 예루살렘 입성을 막으려 했다.[16]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에서 대관식을 거행했지만, 예루살렘 총대주교청과 성 요한 기사단, 템플 기사단의 총장은 불참했다. 튜턴 기사단 총장 등 몇몇 인물만 참석한 가운데, 스스로 예루살렘 왕위에 올랐다.
4. 2. 기독교 측의 비판과 평가
프리드리히 2세가 평화적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했지만, 기독교 측의 평가는 낮았다. 이슬람 측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서지 않았던 상황을 고려하면, 전투에서 승리했을 경우 예루살렘 왕국 영토 전체를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다.[17] 또한, 십자군의 본래 목적은 이슬람교도와의 전투였는데, 처음부터 타협을 통해 결과를 얻어냈다는 점도 지적되었다.[17]1217년 이슬람 측에 의해 파괴되어 성벽도 없는 예루살렘과 몇몇 도시를 반환받았을 뿐이어서, 이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제기되었다.[17] 특히 가톨릭교회 측에서는 파문된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았다.[17]
4. 3. 프리드리히 2세의 귀국
프리드리히 2세는 이탈리아에서 교황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성지에서 급히 귀국해야 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가 십자군 원정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하며 그를 파문했다.[11]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된 상태에서도 십자군을 이끌고 성지에 도착했지만, 교황청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1229년 3월,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대관식을 거행했지만, 예루살렘 총대주교청과 성 요한 기사단, 템플 기사단의 총장은 불참했다.[15] 이는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 상태와 더불어, 그가 무슬림과의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얻어낸 것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 왕으로서의 정통성에도 의문을 제기받았다. 그의 아내 이사벨라 2세가 콘라트 4세를 낳은 후 사망했기 때문이다. 현지 영주들 역시 프리드리히 2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은 파문된 황제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고, 군대를 제국으로 침공시켰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아크레 등에 대리인을 남겨두고 1229년 5월, 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1229년 6월 10일 브린디시에 도착했고, 가을까지 제국 내 자신의 소유권을 회복했다. 1230년 8월 28일 산제르마노 조약을 통해 교황으로부터 파문 해제를 얻어냈다.[16]
결과적으로 제6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로부터 십자군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결말을 맞이했다.
5. 6차 십자군의 유산과 영향
제6차 십자군은 십자군 운동과 중동 지역에 여러 영향을 미쳤다.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발표된 ''Ad Liberandam''에 의해 십자군 원정의 재정 시스템이 형성되었다.[8] 교황청 재무부의 지원 외에도 개별 십자군 참가자들이 모금한 자금이 중요했는데, 1220년까지 인노첸시오 3세가 분배를 통합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러한 혜택을 받지 못했고, 1221년부터 1228년까지 계획된 십자군 원정을 위해 제한된 교회 부과금만 있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자금으로 십자군 원정을 진행해야 했고, 시칠리아에 부과금을 실시하고 키프로스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
제6차 십자군의 결과에 대해서는 기독교 측과 이슬람 측의 평가가 엇갈렸다. 프리드리히 2세는 잉글랜드의 헨리 3세에게 보낸 서신에서 성공을 자랑했지만, 로잔의 총대주교 제롤드는 황제와 그의 업적을 비판적으로 묘사했다. 이슬람 측에서는 알-카밀 자신이 협정에 만족했지만, 아랍어 자료들은 이 조약을 "이슬람의 가장 비참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하며 술탄을 비난했다.
아유브 왕조 내부에서는 이 조약으로 인해 술탄 알-카밀과 그의 형제 알-아슈라프 무사가 조카 안-나시르 다우드를 물리치고 1229년 6월 다마스쿠스를 점령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의 개입 없이 십자군에서 성공을 거두는 전례를 세웠다. 그는 병력 부족으로 인해 싸우지 않고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는 아유브 왕조가 시리아의 반란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이는 이후 나바라의 테오발드 1세(바론들의 십자군), 프랑스의 루이 9세(제7차 십자군 및 제8차 십자군),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제9차 십자군)와 같이 개별 왕들이 십자군을 시작하면서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5. 1. 이후의 십자군 원정 (테오발드 1세, 리처드)
1238년, 나바라 왕 테오발드 1세는 성지 예루살렘으로 원정군을 이끌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성과를 적과의 타협으로 여겨 무력을 통한 이슬람교도 타도를 구상했으나, 이는 실패하고 테오발드 1세를 비롯한 프랑스 봉신들의 소규모 출병으로 이어졌다.1239년 여름, 팔레스타인에 상륙한 이들은 거의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 이미 예루살렘과 다른 영토는 기독교도 측에 있었고, 휴전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오발드 1세 일행은 아크레의 궁정에서 시간을 보내며 아스칼론에 성을 쌓았다. 이들은 카이로와 다마스쿠스로 나뉘어 싸우는 아이유브 왕조 양쪽으로부터 동맹 제의를 받고, 협상을 통해 요르단 강과 지중해 사이의 예루살렘 왕국 영토를 확장하여 하틴 전투 이전 수준으로 회복했다. 이는 제1차 십자군에 필적하는 영토적 성과였지만, 현지 정세를 이용한 결과였고 테오발드 1세의 원정 전 의도와는 달랐다.
1240년 말, 잉글랜드의 콘월 백작 리처드가 도착하기 전, 테오발드 1세는 예루살렘의 주도권 다툼을 혐오하여 팔레스타인을 떠났다. 그레고리우스 9세의 지시를 받고 원정한 콘월 백작 역시 전투 없이 아이유브 왕조로부터 영토를 받고 아스칼론 성을 쌓은 후 귀환했다.
1239년에 휴전 기한이 만료된 후, 1243년에는 프리드리히 2세가 성지에 둔 대리인에 대한 현지 봉신들의 반란이 발생하여 프리드리히 2세의 지배는 무너졌다. 1244년, 몽골에 쫓겨 온 호라즘의 일파가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에 고용되어, 다마스쿠스 정권의 동맹국이었던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1244년 예루살렘 포위전). 해안 지역 분쟁에 몰두해 온 현지 봉신들은 내륙으로부터의 공격에 허를 찔렸다. 성벽이 없는 예루살렘은 쉽게 침입을 허용했고, 성묘 교회와 역대 예루살렘 왕의 무덤은 파괴되었으며, 많은 기독교인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서구에서 다시 십자군 파병의 목소리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제7차 십자군이 파병되는 결과를 낳았다.
5. 2. 십자군에 대한 인식 변화
프리드리히 2세와 알-카밀 사이의 10년 만료 조약은 그레고리우스 9세로 하여금 1239년 이후에도 성지를 기독교 세계에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십자군을 요구하게 만들었다.[11] 이는 바론들의 십자군으로 이어졌는데, 프리드리히 2세와 교황 모두로부터 상대적으로 제한된 지원을 받은 무질서한 사건이었지만, 제6차 십자군보다 더 많은 땅을 되찾았다.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의 개입 없이 십자군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전례를 세웠다. 그는 아유브 왕조와 싸울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싸우지 않고도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는 아유브 왕조가 시리아의 반란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이후 나바라의 테오발드 1세 (바론들의 십자군), 프랑스의 루이 9세 (제7차 십자군 및 제8차 십자군), 그리고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 (제9차 십자군)와 같이 개별 왕들이 추가적인 십자군을 시작하면서 교황의 권위가 약화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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