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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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찰스 기토는 1841년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난 인물로, 오나이다 공동체에 합류하여 종교 생활을 하였으며 변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880년 제임스 A. 가필드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여 체포되었고,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기토는 자신의 행동이 신성한 영감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재판 과정에서 기괴한 행동을 보였다. 1882년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시신은 해부 실험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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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기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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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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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찰스 줄리어스 기토 |
로마자 표기 | Chalseu Julliuseu Gito |
출생일 | 1841년 9월 8일 |
출생지 | 미국 일리노이주 프리포트 |
사망일 | 1882년 6월 30일 |
사망지 | D.C. 교도소, 워싱턴 D.C., 미국 |
사망 원인 | 교수형 |
정당 | 자유 공화당 (1872년) 공화당 (강경파, 1880년–1882년) |
주요 활동 | 제임스 A. 가필드 암살 |
유죄 판결 | 살인 |
형벌 | 사형 |
배우자 | 결혼: 애니 번 (1869년) 이혼: (1874년) |
동기 | 정신 질환, 신경매독, 정신 분열증 및/또는 과대망상 자기애 관련 가능성 캠페인 지원에 대한 보상 실패에 대한 보복 |
날짜 | 1881년 7월 2일 |
피해자 | 제임스 에이브럼 가필드, 49세 |
장소 | 워싱턴 D.C., 미국 |
직업 | |
직업 | 성직자, 작가, 정치 운동가 |
2. 초기 생애와 교육
찰스 J. 기토는 일리노이주 프리포트에서 태어나 프랑스 위그노 혈통의 가정에서 성장했다.[1][44][45]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가족과 함께 위스콘신주 등지를 옮겨 다녔다.[2][46] 청년기에는 대학 진학을 시도했으나 학업 준비 부족으로 실패했다. 이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뉴욕주의 유토피아적 종교 공동체인 오나이다 공동체에 합류했으나, 공동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떠나게 되었다.[4][3]
2. 1. 출생과 가족
찰스 J. 기토는 일리노이주 프리포트에서 제인 어거스트 하우(1814-1848)와 루터 윌슨 기토(1810-1880)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프랑스 위그노의 후손이었다.[1][44][45] 1848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1850년 가족과 함께 위스콘신주 울라오(현재 그래프턴 근처)로 이사하여 1855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2][46] 이후 기토는 아버지와 함께 프리포트로 돌아왔다.1860년, 기토는 할아버지로부터 1000USD를 상속받아 미시간 대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학업 준비 부족으로 입학 시험에 실패했다. 그는 미시간주 앤아버에 있는 앤아버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와 대수학을 잠시 공부했지만, 아버지로부터 오나이다 공동체를 칭찬하는 편지를 받고 과정을 마치기 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1860년 6월, 그는 아버지가 이미 관계를 맺고 있던 뉴욕주 오나이다의 유토피아적 종교 공동체인 오나이다 공동체에 합류했다. 젊은 기토는 공동체 창시자인 존 험프리 노예스를 숭배했으며, 그에 대해 "모든 면에서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뢰"를 보인다고 쓰기도 했다.[3] 오나이다 공동체는 집단 결혼과 같은 독특한 성 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기토는 그곳에서 5년간 생활하는 동안 구성원들에게 대체로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며, '찰스 기타웃(Charles Gitout)'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으로 불렸다.[4]
그는 공동체를 두 번 떠났는데, 처음에는 뉴저지주 호보켄으로 가서 오나이다 공동체의 이념을 기반으로 한 신문 '더 데일리 시오크랫(The Daily Theocrat)'을 창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다시 오나이다로 돌아갔다가 또 떠난 후에는, 공동체를 위해 일한 대가를 달라며 노예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기토의 아버지는 아들의 행동에 당황하며 노예스를 지지하는 편지를 썼고, 노예스는 기토를 무책임하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인물로 여겼다.
2. 2. 오나이다 공동체 생활
1860년, 기토는 할아버지로부터 1000USD를 상속받아 미시간 대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학업 준비 부족으로 입학 시험에 실패했다. 그는 미시간주 앤아버에 있는 앤아버 고등학교에서 잠시 프랑스어와 대수학을 공부했지만, 오나이다 공동체를 높이 평가하던 아버지의 권유 편지를 받고 과정을 마치기 전에 그만두었다.[3]결국 1860년 6월, 기토는 아버지가 이미 깊이 관여하고 있던 뉴욕주 오나이다의 유토피아적 종교 공동체인 오나이다 공동체에 합류했다. 그는 공동체 창시자인 존 험프리 노예스를 "숭배"하며 "모든 면에서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뢰"를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다.[3]
오나이다 공동체는 집단 결혼과 같은 독특한 성 관념으로 유명했지만, 기토는 그곳에서 5년 동안 생활하는 동안 구성원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는 '찰스 기타웃(Charles Gitout)'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그의 성 '기토(Guiteau)'와 '나가라(Get out)'를 결합한 것이었다.[4]
기토는 공동체를 두 번 떠났다. 처음에는 뉴저지주 호보켄으로 가서 오나이다 공동체의 종교를 기반으로 한 신문인 '더 데일리 시오크랫(The Daily Theocrat)'을 창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오나이다로 돌아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공동체를 떠나 노예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공동체를 위해 일한 대가를 요구했지만, 기토의 아버지는 오히려 노예스를 지지하는 편지를 보내며 아들을 비난했다. 노예스 역시 기토를 무책임하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인물로 여겼다.
3. 경력
시카고에서 변호사 자격을 얻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5][6] 결혼 생활 역시 파탄을 맞았다.[5][7] 이후 정치에 관심을 가져 18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으나[5][8] 기대했던 공직을 얻지는 못했다.[5] 종교에 심취하여 표절 논란이 있는 책을 출판하고 설교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3][9]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자신이 특별한 사명을 지녔다는 과대망상에 빠지기도 했다.[3] 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제임스 A. 가필드를 지지하며 활동했고,[11][12][13] 이후 공직을 기대했으나 1881년 국무장관 제임스 G. 블레인에게 최종적으로 거절당하며 좌절을 겪었다.[3]
3. 1. 법조계 활동과 좌절
기토는 시카고의 한 법률 사무소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며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5] 그러나 그는 변호사로서 성공하지 못했는데, 법정에서 단 한 건의 소송만을 맡았고 그마저도 패소했으며, 주로 채권 추심 업무를 담당했다.[6] 1869년, 그는 사서인 애니 번과 결혼했다.[5] 애니 번은 훗날 기토가 채권 추심 과정에서 과도한 금액을 챙기고 의뢰인에게는 적은 돈만 돌려주는 등 부정직한 행위를 저질렀다고 증언했다.[7]1872년, 기토 부부는 채권 추심업자와 불만을 품은 의뢰인들을 피해 뉴욕 시로 이주했다.[5] 기토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민주당과 연계하여 활동했다.[5] 18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현직 공화당 소속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에 맞서 자유 공화당과 민주당의 후보였던 호레이스 그릴리를 지지했다.[5] 기토는 그릴리를 지지하는 연설을 준비했으나, 정리가 미흡했고 실제 연설은 단 한 차례에 그쳤다.[8] 선거 결과 그릴리는 크게 패배했지만, 기토는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자신이 그릴리의 승리에 기여했으며, 그 대가로 칠레 주재 미국 대사로 임명될 것이라고 믿었다.[5] 기토는 아내에게 신체적 학대를 가했으며, 1874년 아내가 이혼 소송을 제기하자, 자신의 불륜을 입증하기 위해 매춘부를 증인으로 내세우기도 했다.[5]
이후 기토는 다시 종교에 몰두하여 ''진실''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으나, 이 책은 대부분 오나이다 공동체 지도자 존 험프리 노이에스의 저작물을 표절한 것이었다. 1875년경, 기토의 아버지는 아들이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반면, 기토 자신은 자신의 행동이 신성한 영감에서 비롯되었으며, 사도 바울처럼 새로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3] 그는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설교했고, 1877년 12월에는 워싱턴 D.C.의 한 회중 교회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9]
기토는 1880년 상반기를 보스턴에서 보냈으나, 빚을 갚지 못하고 절도 혐의를 받게 되자 그곳을 떠났다.[10] 1880년 6월 11일, 그는 SS ''스토닝턴'' 호에 승선 중이었는데, 배가 코네티컷 강 하구 근처에서 짙은 안개 속에서 SS ''내러갠셋'' 호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스토닝턴'' 호는 항구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내러갠셋'' 호는 화재로 침몰하며 많은 사상자를 냈다. ''스토닝턴'' 호의 승객 중 부상자는 없었으나, 기토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신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고 믿게 되었다.
이후 기토의 관심은 다시 정치로 옮겨갔다. 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공화당은 로스코 콩클링이 이끄는 스테얼워트파와 제임스 G. 블레인을 지지하는 하프브리드파로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기토는 스테얼워트파를 지지하기로 하고, 그랜트를 지지하는 "핸콕에 반대하는 그랜트"라는 제목의 연설문을 작성했다. 이후 제임스 A. 가필드가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자(가필드는 두 파벌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다), 연설문 제목을 "핸콕에 반대하는 가필드"로 수정했다.[11][12] 실제로는 연설문에서 그랜트의 이름을 가필드로 바꾼 것 외에는 거의 수정한 내용이 없었다.[13] 이 연설은 기껏해야 두 번 정도 이루어졌고, 1880년 여름 뉴욕에서 열린 공화당 전국위원회 회의에서 인쇄된 사본이 배포되었을 뿐이지만, 기토는 11월 선거에서 민주당의 윈필드 스콧 핸콕을 누르고 가필드가 승리하는 데 자신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자신의 공헌에 대한 보상으로 영사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처음에는 빈 주재 영사직을 요구했다가 나중에는 파리 주재 영사직이 더 좋겠다고 마음을 바꾸었다. 기토는 가필드와 그의 내각 인사들에게 직접 임명을 요청하기 위해 매일같이 줄을 서는 수많은 구직자 중 한 명이었으며, 그가 보낸 수많은 편지 역시 거절당했다.
1881년 3월 가필드 행정부가 출범한 후, 기토는 워싱턴 D.C.에서 궁핍하게 생활했다. 그는 숙박비와 식비를 내지 못해 하숙집을 전전해야 했고, 낡은 옷차림으로 코트나 모자, 부츠도 없이 춥고 눈 내리는 도시를 걸어 다녔다. 호텔 로비에서 버려진 신문을 읽으며 가필드와 내각의 일정을 파악했고, 호텔의 무료 편지지를 이용해 영사직 임명을 요구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1881년 봄에도 기토는 여전히 워싱턴에 머물렀다. 5월 14일, 그는 국무장관이 된 제임스 G. 블레인을 다시 만나 영사 임명에 대해 문의했다. 이에 격분한 블레인은 결국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파리 영사직에 대해 내게 말하지 마시오!"라고 소리치며 그를 내쫓았다.[3]
3. 2. 종교 활동과 저술
1860년 6월, 기토는 아버지가 깊이 관여하고 있던 뉴욕주 오나이다의 유토피아적 종교 단체인 오나이다 공동체에 참여했다. 이 공동체는 집단 결혼과 같은 독특한 제도를 따랐으나, 기토는 5년간 공동체 내에서 결혼과 무관한 생활을 했으며 "찰스 기토(Gitout)"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공동체를 떠난 후, 그는 뉴저지주 호보켄에서 오나이다 공동체와 관련된 "일간 신권 정치"라는 신문을 창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다시 오나이다로 돌아갔다가 또다시 떠난 후에는 공동체 창시자인 존 험프리 노이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이후 기토는 신학에 몰두하여 ''진실''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으나, 이 책은 노이스의 저작물을 거의 그대로 표절한 것이었다. 1875년경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3] 반면, 기토 자신은 자신의 행동이 신성한 영감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도 바울처럼 "새로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3] 그는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설교했고, 1877년 12월에는 워싱턴 D.C.의 회중 교회에서 강연하기도 했다.[9][47]
1880년 6월 11일, 기토는 SS 스토닝턴호에 승선 중 다른 배(SS 내러갠셋)와의 충돌 사고를 겪었다. 스토닝턴호는 무사히 항구로 돌아왔지만, 다른 배는 침몰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겪은 후 기토는 자신이 어떤 숭고한 목적을 위해 신에게 선택받아 살아남았다고 믿게 되었다.
3. 3. 정치 입문과 좌절
1872년, 기토와 그의 아내는 채권 추심업자와 불만을 품은 의뢰인들을 피해 뉴욕 시로 이사했다.[5] 기토는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민주당과 뜻을 함께했다.[5] 18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현직 공화당 소속 율리시스 S. 그랜트에 맞서 자유 공화당이자 민주당 후보였던 호레이스 그릴리를 지지했다.[5] 기토는 그릴리를 지지하는 정리가 안 된 연설문을 준비하여 딱 한 번 연설했다.[8] 그릴리는 선거에서 참패했지만, 기토는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그릴리가 승리하면 자신을 칠레 대사로 임명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5]1880년 6월 11일, 기토는 SS 스토닝턴호의 승객이었는데, 코네티컷 강 하구 근처에서 짙은 안개 속에서 SS 내러갠셋호와 충돌했다. ''스토닝턴''호는 항구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내러갠셋''호는 수면선까지 불타 침몰하여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스토닝턴''호에 함께 탑승한 승객 중 부상자는 없었지만, 이 사건으로 기토는 자신이 더 높은 목적을 위해 구원받았다고 믿게 되었다.
그 후 기토의 관심은 다시 정치로 향했다. 18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공화당은 크게 분열되어 로스코 콩클링이 이끄는 스테얼워트파와 제임스 G. 블레인을 지지하는 하프브리드파로 나뉘었다. 기토는 스테얼워트파를 지지하기로 결정하고 그랜트를 지지하는 "한콕에 반대하는 그랜트"라는 연설문을 썼고, 제임스 A. 가필드가 공화당 후보로 지명된 후(두 파벌과는 관련 없음) "한콕에 반대하는 가필드"로 수정했다.[11][12] 결국 기토는 그랜트의 이름을 가필드로 바꾸는 것 외에는 연설문의 내용을 거의 바꾸지 않았다.[13] 그 연설은 기껏해야 두 번 정도 행해졌고, 1880년 여름 뉴욕에서 열린 공화당 전국위원회 회의에서 인쇄된 사본이 배포되었지만, 기토는 11월 민주당 윈필드 스콧 핸콕에 대한 가필드의 승리에 자신이 크게 기여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결정적인 도움에 대해 영사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처음에는 빈을 요구했고, 그 다음에는 파리에 있는 영사직을 갖는 것이 더 좋겠다고 결정했다. 기토는 매일 그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줄을 서는 많은 구직자 중 한 명으로 가필드와 그의 내각에게 개인적으로 요청했고, 그의 수많은 편지도 거절당했다.
1881년 3월에 시작된 가필드 행정부 초기에 기토는 워싱턴 D.C.에서 생활했는데, 가난하여 숙박비와 식비를 지불하지 않고 하숙집 사이를 몰래 드나들어야 했고, 코트, 모자, 부츠 없이 낡은 옷을 입고 춥고 눈이 오는 도시를 걸어 다녀야 했다. 그는 호텔 로비에서 가필드와 그의 내각의 일정을 파악하기 위해 버려진 신문을 읽고, 호텔의 무료 편지지로 영사직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담은 편지를 써서 보냈다. 봄에 기토는 여전히 워싱턴에 있었고, 1881년 5월 14일, 그는 국무장관이 된 제임스 G. 블레인을 다시 만났고, 영사 임명을 문의했다. 격분한 블레인은 마침내 "살아있는 동안 파리 영사직에 대해 다시는 내게 말하지 마시오!"라고 소리쳤다.[3] 이러한 거절은 기토의 정치적 야망에 큰 좌절을 안겨주었다.
4.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 암살
1881년 7월 2일, 공직 임명을 얻으려다 좌절감을 느낀 찰스 기토는 워싱턴 D.C.의 볼티모어 앤드 포토맥 철도역(현재는 없음)에서 가필드 대통령을 기다렸다.[17] 가필드가 뉴저지주 롱브랜치로 휴가를 떠나기 위해 역에 들어서자, 기토는 뒤에서 접근하여 리볼버로 두 발을 쏘았다.[18] 두 번째 총알이 가필드의 등을 관통했으나 척수는 빗나갔다. 기토는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으며, "나는 스탈워트 중의 스탈워트다(I am a Stalwart of the Stalwartseng). ... 이제 아서가 대통령이다!"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20][51]
가필드 대통령은 총격 후 11주(약 80일) 동안 감염 등으로 고통받다가[21][52] 같은 해 9월 19일 사망했다. 기토는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사형이 선고되어 1882년 6월 30일 40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임스 A. 가필드 암살 사건 문서에서 다루고 있다.
4. 1. 암살 동기
기토는 스스로를 충성스러운 공화당원이자 스탈워트 파벌의 일원이라고 생각했으며, 가필드의 대통령 당선에 자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가필드가 정실주의를 폐지하려 하자, 그는 이것이 공화당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특히 블레인 국무장관과의 마지막 만남 이후[3] 절망에 빠진 기토는, 가필드를 제거하고 스탈워트 파벌의 지도자 로스코 콘클링 상원의원의 추종자이자 당시 부통령이었던 체스터 A. 아서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결론지었다. 아서는 가필드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기토는 신이 자신에게 가필드 대통령을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주장했으며, 이 행위를 암살이 아닌 '제거'라고 생각했다.[3] 그는 가필드가 블레인의 영향력으로부터 공화당을 구하기 위해 죽어야 한다고 믿었다.[3] 그는 대통령을 칼로 죽이기에는 자신이 약하다고 판단하여 총기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17] "가필드는 주먹 한 방으로 내 생명을 짓밟아 버렸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7]
암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기토는 친척인 조지 메이너드에게 15USD를 빌렸다.[18][50] 그는 총기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구경이 큰 리볼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워싱턴의 총기 상점에서 나무 손잡이가 달린 .442 웨블리 구경의 브리티시 불독 리볼버와 상아 손잡이가 달린 모델 사이에서 고민하다가,[18][50] 암살 후 박물관에 전시될 때 더 보기 좋을 것이라는 이유로 상아 손잡이 모델을 선택했다. 추가 비용을 지불할 형편이 안 됐지만, 가게 주인이 가격을 깎아주었다.[18] (이 리볼버는 암살 후 회수되어 스미소니언 협회에 보내졌으나 이후 분실되었다.[19]) 기토는 몇 주 동안 총기 사용법을 익히며 사격 연습을 했는데, 처음에는 반동 때문에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기토는 신문 기사를 통해 대통령의 일정을 파악하고 가필드를 미행했다. 처음에는 가필드가 아내 루크레티아를 뉴저지주 롱브랜치의 해변 휴양지로 배웅하기 위해 볼티모어 앤드 포토맥 철도역으로 갈 때 암살을 시도하려 했으나, 당시 루크레티아 여사의 건강이 좋지 않아 그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계획을 연기했다.


1881년 7월 2일, 기토는 볼티모어 앤드 포토맥 철도역(현재는 없음)에서 가필드를 기다렸다. 그는 구두를 닦고 역 주변을 서성이며, 범행 후 도주를 위해 택시를 미리 불러두었다. 가필드 대통령이 롱브랜치에서 아내와 휴가를 보내기 위해 역 안으로 들어서자, 기토는 뒤에서 접근하여 두 발의 총을 쏘았다. 두 번째 총알은 가필드의 등 쪽 제1 요추를 관통했으나 척수는 빗나갔다. 기토는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나는 스탈워트 중의 스탈워트다! ... 이제 아서가 대통령이다!"라고 외쳤다.[20][51]
가필드 대통령은 총격 후 80일간 고통스럽게 버티다 9월 19일 사망했다. 주요 사인은 총상 자체보다는 당시 의료진이 소독되지 않은 손과 기구로 상처를 처치하면서 발생한 감염증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10년 후 미국에서 일반화된 살균 처리된 의료 기구를 사용했다면 가필드가 쉽게 회복했을 것이라는 외과 의사들의 견해가 많다.[52]
4. 2. 암살 계획 및 실행
기토는 스스로를 충성스러운 공화당원이자 스탈워트파로 여겼으며, 가필드의 대통령 당선에 자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믿었다. 이후 가필드가 정실주의를 폐지함으로써 공화당을 파괴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블레인과의 마지막 만남 이후 절망한 그는 유일한 해결책은 가필드를 제거하고 부통령 체스터 A. 아서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결정했다. 아서는 그랜트의 1880년 선거 운동을 관리했으며, 가필드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스탈워트 지도자 로스코 콘클링 상원의원의 추종자였다. 기토는 신이 자신에게 대통령 살해를 명했다고 느꼈으며, 이러한 행위를 암살이 아닌 "제거"라고 생각했다.[3] 또한 그는 가필드가 블레인의 영향력으로부터 공화당을 구하기 위해 죽어야 한다고 믿었다.[3]기토는 대통령을 칼로 죽이기에는 너무 강할 것이라고 판단하며 "가필드는 주먹 한 방으로 내 생명을 짓밟아 버렸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무기를 사용할지 고민하다가 총을 선택했다.[17] 결혼을 통해 친척이 된 조지 메이너드에게 15USD를 빌린[18][50] 기토는 리볼버를 사러 갔다. 그는 총기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대구경 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워싱턴의 오미라 상점에서 쇼핑을 하던 중, 그는 나무 손잡이가 달린 .442 웨블리 구경의 브리티시 불독 리볼버[18] 또는 상아 손잡이가 달린 리볼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는 암살 후 박물관 전시품으로 더 멋져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상아 손잡이가 달린 것을 선호했다.[50] 비록 그는 상아 손잡이에 대한 추가 1USD를 지불할 여유가 없었지만, 가게 주인은 그를 위해 가격을 낮춰주었다. 그는 다음 몇 주 동안 사격 연습을 했다. 리볼버의 반동은 그가 처음 발사했을 때 거의 그를 넘어뜨릴 뻔했다. 기토의 무기는 암살 후 회수되어 스미소니언 협회에 넘겨졌지만, 그 이후 분실되었다.[19][48][49]]]
어느 날, 기토는 가필드가 아내 루크레티아 가필드를 뉴저지주 롱브랜치의 해변 휴양지로 배웅하기 위해 볼티모어 앤드 포토맥 철도역으로 가는 것을 따라갔다. 그러나 당시 가필드의 아내 루크레티아가 건강이 좋지 않았고, 기토는 그녀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계획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신문 기사를 통해 대통령의 일정을 알게 된 그는 1881년 7월 2일, 볼티모어 앤드 포토맥 철도역(현존하지 않음)에서 가필드를 기다렸다. 그는 구두를 닦고, 역 주변을 서성이며, 나중에 자신을 역으로 데려다줄 택시를 불렀다. 가필드가 롱브랜치에서 아내와 휴가를 보낼 생각으로 역에 들어서자, 기토는 앞으로 나아가 가필드를 뒤에서 두 번 쐈다. 두 번째 총알은 첫 번째 요추 척추뼈를 관통했지만 척수는 빗나갔다. 당국에 순순히 체포되면서 기토는 "나는 스탈워트 중의 스탈워트다(I am a Stalwart of the Stalwartseng). ... 이제 아서가 대통령이다!"라고 외쳤다.[20][51]
총격 후 11주가 지난 9월 19일, 가필드 대통령은 사망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사인은 의사가 불결한 손과 비위생적인 기구로 상처를 처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감염증으로 추정된다. 이후 많은 외과 의사들은 당시 살균 처리된 의료 기구를 사용했다면 가필드가 쉽게 회복했을 것이라고 보았다.[52]
4. 3. 가필드 대통령의 죽음
[48][49]1881년, 공직 임명을 얻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찰스 기토는 가필드 대통령 암살을 계획했다. 그는 메이너드라는 인물에게 15USD를 빌려[50] 회전식 권총을 구입했다. 총기에 대한 지식은 부족했지만 구경이 큰 총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442 웨블리 구경의 브리티시 불도그 리볼버 모델 중 나무 손잡이와 상아 손잡이 모델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암살 후 박물관에 전시될 것을 고려하여 상아 손잡이 모델을 선택했다.[50] 가진 돈이 부족했지만 가게 주인이 가격을 깎아주었다. 이 총은 범행 후 회수되어 20세기 초 스미소니언 재단에서 사진 촬영까지 했으나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총을 구입한 후 기토는 몇 주 동안 사격 연습을 하고 가필드를 미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총의 반동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기토는 가필드 대통령이 모교인 윌리엄스 대학교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서 저격할 기회를 노렸다. 1881년 7월 2일, 가필드 대통령이 아내 루크레티아 가필드와 함께 뉴저지주 롱브랜치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해 워싱턴 D.C.의 볼티모어 포토맥 철도역(현재는 없음)에 도착했을 때, 기토는 뒤에서 접근하여 두 발의 총을 쏘았다. 두 번째 총알은 가필드의 제1 요추를 관통했지만 척수에는 닿지 않았다. 기토는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고, 군중에게 둘러싸인 채 "나는 지지자 중의 지지자다(I am a Stalwart of the Stalwarts!). 이로써 체스터 A. 아서가 대통령이 되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51]
가필드 대통령은 총격 후 11주(약 80일) 동안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이어가다 9월 19일에 사망했다. 그의 직접적인 사인은 감염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의료진이 멸균되지 않은 손과 도구로 상처를 검사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 의학 전문가들은 당시로서는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던 멸균 처리된 의료 기술이 적용되었다면 가필드가 충분히 회복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21] 작가 캔디스 밀라드는 오히려 의료진의 개입 없이 상처를 그대로 두었다면 가필드가 생존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22] 뉴저지 의과대학의 외과 교수 루트코는 영양 부족 또한 사망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지적하며, "가필드의 상처 자체는 치명적이지 않았으며, 현대 의학 기준으로는 며칠 내 퇴원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21]
2013년 ''미국 외과 저널''에 발표된 테오도르 파파스와 샤흐르자드 조하리파드의 연구는 가필드의 사망 원인에 대해 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이들은 총알이 비장 동맥 근처를 지나가면서 발생한 비장 동맥 가성동맥류가 뒤늦게 파열된 것이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가필드가 겪은 패혈증은 외상 후 급성 무결석 담낭염으로 인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부검 보고서를 토대로, 연구진은 가필드의 담낭이 파열되면서 담즙이 포함된 큰 농양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1881년 7월 23일부터 나타난 상태 악화의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23]
기토는 처음에는 살인 미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가필드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재판 끝에 사형이 선고되었고, 1882년 6월 30일, 40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5. 재판과 처형
가필드 대통령 사망 후, 찰스 기토는 1881년 10월 살인 혐의로 공식 기소되었다.[24] 다음 달 워싱턴 D.C.에서 시작된 재판은 미국 역사상 정신 이상 항변이 주요 쟁점이 된 첫 사례 중 하나였다.[25] 기토는 범행 당시 신의 영감을 받아 법적으로 정신 이상 상태였다고 주장하면서도, 의학적으로는 정신 이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여 변호인단과 갈등을 빚었다.[26]
재판 내내 기토는 욕설과 돌발 행동 등 기이한 모습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가필드의 사망 원인이 의료 과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29][53] 1882년 1월 유죄 판결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고, 항소는 기각되었다.
기토는 1882년 6월 30일 워싱턴 D.C.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처형 후 그의 뇌 일부는 부검을 거쳐 연구 및 전시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의 뮤터 박물관과 메릴랜드주의 국립 건강 및 의학 박물관 등에 보존되었다.[3][34][55]
5. 1. 재판 과정



가필드 대통령이 사망하자 정부는 기토를 살인 혐의로 공식 기소했다. 1881년 10월 14일, 기존의 살인 미수 혐의에서 변경되어 살인죄로 정식 기소되었으며, 기토는 혐의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다. 재판은 1881년 11월 17일 워싱턴 D.C.의 컬럼비아 특별구 대법원(현재의 미국 컬럼비아 특별구 지방 법원)에서 시작되었고, 재판장은 월터 스미스 콕스 판사가 맡았다.
기토는 재판 내내 스스로 변호하려 했으나, 법원은 리 로빈슨을 변호인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로빈슨은 재판 시작 일주일도 안 되어 사임했고, 이후 기토의 매제인 조지 스코빌이 주임 변호인을 맡게 되었다. 스코빌은 주로 부동산 관련 법률 경험만 있었지만, 다른 누구도 변호를 맡으려 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변호에 나섰다. 검찰 측은 웨인 맥베이 당시 미국 법무 장관이 수석 검사를 맡았으며, 조지 코크힐, 월터 데이비지, 은퇴 판사 존 K. 포터, 엘리후 루트, E. B. 스미스 등 다섯 명의 변호사가 검사팀으로 참여했다.[24]
기토의 재판은 미국 역사상 일시적 정신 이상 주장이 주요 쟁점이 된 첫 사례 중 하나였다.[25] 기토는 범행 당시 신이 자신의 자유 의지를 빼앗아 법적으로 정신 이상 상태였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의학적으로는 정신 이상이 아니라고 강변하여 변호팀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판사는 배심원단에게 맥노튼 규칙에 따라 판단할 것을 지시했다.[26]
변호 측은 정신 이상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당시 선구적인 정신과 의사였던 에드워드 찰스 스피츠카를 전문 증인으로 내세웠다. 스피츠카는 기토가 "현재 정신 이상일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다른 무엇이었던 적이 결코 없다"고 단언하며, 그가 정신 이상일 뿐 아니라 "도덕적 괴물"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증언했다. 그는 기토가 정신병원 환자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정신 이상적인 태도"를 보이며, 현실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 "병적인 자기 중심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스피츠카는 이러한 상태가 "뇌의 선천적인 기형" 때문일 수 있다고 보았다.[27]
반면, 검사팀의 일원이었던 컬럼비아 특별구 지방 검사 조지 코크힐은 재판 전 언론 발표를 통해 기토의 정신 이상 주장에 대한 검찰의 입장을 밝혔는데, 이는 당시 대중의 시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코크힐은 "그는 나만큼 정신 이상이 아니다. 기토에게는 미친 구석이 전혀 없다. 그는 냉정하고 계산적인 악당이며, 세련된 건달로, 세상 앞에서 이런 식으로 행동할 준비를 점차적으로 해왔다. 그는 순수하고 단순한 무임승차자였고, 결국 그 단조로움에 지쳐 다른 종류의 흥분과 악명을 얻고자 일을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판 과정에서 기토는 기이한 행동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판사, 증인, 검사, 심지어 자신의 변호인단에게까지 잦은 욕설과 모욕을 퍼부었다. 자신의 증언을 장황한 서사시 형태로 낭송하기도 했고, 방청석에 앉은 사람들에게 쪽지를 보내 법률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뉴욕 헤럴드''에는 자신의 자서전을 구술하여 실었는데, "30세 미만의 멋진 기독교 여성"을 찾는다는 개인 광고로 마무리하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미국 대중의 증오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듯, 법정 안팎에서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기토는 자신이 아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으니 그 대가로 석방해야 한다는 편지를 아서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했다.[28] 또한 콕스 판사 앞에서 가필드 대통령이 총알 때문이 아니라 의료 과실로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의사들이 가필드를 죽였고, 나는 그를 쐈을 뿐"이라고 말했다.[29] 재판 기간과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 기토는 워싱턴 D.C. 남동부의 세인트 엘리자베스 병원에 수감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암살 행위를 변호하고 재판 과정을 기록한 글을 썼으며, 이는 나중에 ''진실과 제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기토는 자신이 곧 석방될 것이라 믿으며 1884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계획하는 등 재판을 둘러싼 미디어 서커스를 즐겼다. 그러나 1882년 1월 25일, 배심원단은 유죄 평결을 내렸고 기토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유죄 판결이 낭독되자 기토는 변호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을 향해 "여러분 모두 저급하고, 완벽한 얼간이들입니다!"라고 소리쳤으며, 온갖 욕설을 퍼붓다가 간수들에게 끌려 감방으로 이송되었다. 기토는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했지만 기각되었다.
처형을 29일 앞두고 기토는 긴 시를 지어, 자신이 블레인 국무장관의 칠레 및 페루와의 전쟁 "음모"를 막기 위해 신의 명령을 받아 가필드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아서 대통령이 자신의 암살 덕분에 미국이 구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을 사면하지 않는 것은 "가장 비열한 배은망덕"이라고 비난했다. 더불어 아서 대통령이 미국 대법원에 압력을 넣어 자신의 항소를 심리하게 할 것이라고 잘못 예측하기도 했다.[30]

기토는 1882년 6월 30일, 가필드 대통령 저격 사건 1주년을 이틀 앞두고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피해자인 가필드 대통령보다 9개월 11일을 더 살았는데, 이는 역대 미국 대통령 암살범 중 가장 긴 기간이다. 처형장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기토는 구경꾼들과 기자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교수대로 춤을 추듯 걸어가 처형 집행인과 악수를 나누는 기행을 보였다. 교수대 위에서 그는 "마지막 임종 기도"라며 신이 자신의 암살 행위를 "영감을 주셨다"고 선언하고, 이 일로 인해 미국 정부와 국가는 신의 영원한 적대감을 사게 될 것이며 "보복의 신성한 법"이 미국과 자신을 살해한 자들을 칠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한 아서 대통령을 "자신을 만들고 자신의 당과 땅을 전복으로부터 구한 사람에게 배은망덕한 비겁자"라고 맹비난했다.[31] 마지막 요청으로, 그는 수감 중에 쓴 "주님께 가겠습니다"라는 시를 낭송했다. 그는 원래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시를 낭송하고 싶어 했으나 이 요청은 거부되었다.[32]
처형 집행인의 요청에 따라, 기토는 시 낭송을 마친 뒤 들고 있던 종이를 떨어뜨려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그의 머리에 검은 두건이 씌워졌고, 잠시 후 교수대의 발판이 열리면서 기토는 즉사했다.[33] 그의 시신은 가족에게 인계되지 않았는데, 유족이 장례 비용을 감당할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부검 후 감옥 마당 한구석에 매장되었다.[33]
처형 로프 조각이 기념품으로 팔리기 시작하자, 감옥 간수들이 수요를 맞추기 위해 기토의 시신을 몰래 파내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33] 스캔들을 우려한 당국은 시신을 이장하기로 결정했다.[34] 시신은 메릴랜드주에 위치한 국립 건강 및 의학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부검 중 적출된 기토의 뇌와 비대해진 비장이 보존 처리되었으며, 뼈대는 표백되어 보관되었다.[34] 기토의 뇌 일부는 현재 필라델피아의 뮤터 박물관 유리병 안에 전시되어 있다.[3]
5. 2. 정신 이상 항변과 논란
가필드 대통령이 사망하자 정부는 기토를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1881년 10월 14일, 기존의 살인 미수 혐의에서 변경되어 살인 혐의로 공식 기소되었고, 기토는 무죄를 주장했다. 재판은 1881년 11월 17일 워싱턴 D.C.의 컬럼비아 특별구 대법원(현재 컬럼비아 특별구 미국 지방 법원)에서 월터 스미스 콕스 판사의 주재로 시작되었다. 법원은 기토를 위해 리 로빈슨을 변호인으로 임명했으나, 기토는 스스로 변호하겠다고 주장했다. 재판 시작 일주일도 안 되어 로빈슨은 사임했고, 기토의 매형인 조지 스코빌이 주임 변호를 맡았다. 스코빌은 부동산 관련 법률 경험만 있었으나, 다른 변호사들이 기피하여 변호를 맡게 되었다. 웨인 맥베이 미국 법무 장관이 수석 검사를 맡았고, 조지 코크힐, 월터 데이비지, 은퇴 판사 존 K. 포터, 엘리후 루트, E. B. 스미스가 검사팀으로 참여했다.[24]
기토의 재판은 미국에서 일시적 정신 이상 주장이 주요 쟁점이 된 첫 사례 중 하나였다.[25] 기토는 범행 당시 신이 자신의 자유 의지를 빼앗아 법적으로 정신 이상 상태였다고 주장했지만, 의학적으로는 정신 이상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변호인단과 주요한 갈등을 빚었다. 판사는 배심원단에게 맥노튼 규칙에 따라 판단하도록 지시했다.[26]
변호 측은 정신 이상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당시 선구적인 정신과 의사였던 에드워드 찰스 스피츠카를 전문 증인으로 내세웠다. 스피츠카는 기토가 "현재 정신 이상일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고 단언하며, 기토가 정신 이상일 뿐 아니라 "도덕적 괴물"이라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증언했다. 그는 기토가 "정신병원에서 자주 관찰되는" "정신 이상적인 태도"를 보이며, "삶의 실제 사건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 "병적인 자기 중심주의"를 가졌다고 결론 내렸다. 스피츠카는 이러한 상태가 "뇌의 선천적인 기형" 때문이라고 보았다.[27]
반면, 컬럼비아 특별구 지방 검사이자 검사팀 일원이었던 코크힐은 기토의 정신 이상 주장에 대해 "그는 나만큼 정신 이상이 아니다. 기토에게는 미친 구석이 전혀 없다. 그는 냉정하고 계산적인 악당이며, 세련된 건달로, 세상 앞에서 이런 식으로 행동할 준비를 점차적으로 해왔다. 그는 순수하고 단순한 무임승차자였다. 결국, 그는 무임승차의 단조로움에 지쳤다. 그는 다른 종류의 흥분과 악명을 원했고... 그것을 얻었다"고 재판 전 언론 발표에서 밝혔으며, 이는 당시 대중의 여론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기토는 재판 내내 기이한 행동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판사, 증인, 검사, 심지어 자신의 변호인단에게까지 잦은 욕설과 모욕을 퍼부었다. 자신의 증언을 장황한 서사시 형태로 낭송하기도 하고, 방청석에 앉은 불특정 다수에게 쪽지를 보내 법률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뉴욕 헤럴드''에 자신의 자서전을 구술하며 "30세 미만의 멋진 기독교 여성"을 찾는 개인 광고로 마무리하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미국 대중의 증오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으며, 법정 안팎에서 자주 관람객과 기자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기토는 아서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아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봉급을 인상시켜 주었으니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8] 또한 콕스 판사 앞에서 가필드가 총알이 아닌 의료 과실로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의사들이 가필드를 죽였고, 나는 그를 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29][53] 재판 기간과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 기토는 워싱턴 D.C. 남동부의 세인트 엘리자베스 병원에 수감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암살에 대한 변명과 재판에 대한 기록을 담은 ''진실과 제거''라는 책을 썼다.
기토는 자신이 곧 석방될 것이라 믿으며 18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계획하는 등 재판을 둘러싼 미디어 서커스를 즐겼다. 그러나 1882년 1월 25일, 그는 유죄 판결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이 낭독되자 기토는 변호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단을 향해 "여러분 모두 저급하고, 완벽한 얼간이들입니다!"라고 소리치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항소했지만 기각되었다.
처형 29일 전, 기토는 자신이 가필드를 죽이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으며, 이는 블레인의 칠레 및 페루와의 전쟁 "음모"를 막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하는 긴 시를 썼다. 그는 또한 아서 대통령이 암살이 미국을 구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사면하지 않는 것은 "가장 비열한 배은망덕"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아서가 미국 대법원에 자신의 항소를 심리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잘못 추측하기도 했다.[30]
기토는 1882년 6월 30일, 암살 사건 발생 1주년 이틀 전에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피해자인 가필드 대통령보다 9개월 11일 더 오래 생존했는데, 이는 역대 미국 대통령 암살범 중 가장 긴 기간이다. 처형장으로 이송되는 동안에도 그는 관람객과 기자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교수대로 춤을 추듯 걸어가 처형인과 악수하는 기행을 보였다. 교수대 위에서 그는 "마지막 임종 기도"를 통해 신이 "내가 지금 살해당한 행위를 영감을 주셨다"고 선언하고 "이 정부와 이 나라는 이 행위로 인해 당신의 영원한 적대감을 갖게 될 것"이며 "보복의 신성한 법은 이 나라와 나의 살해자들을 칠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한 아서 대통령을 "자신을 만들고 자신의 당과 땅을 전복으로부터 구한 사람에게 배은망덕한 비겁자"라고 비난했다.[31] 마지막 요청으로, 그는 수감 중에 쓴 "주님께 가겠습니다"라는 시를 낭송했다. 원래 오케스트라 연주를 요청했으나 거부되었다.[32]
처형인의 요청에 따라 기토는 시 낭송을 마친 뒤 종이를 떨어뜨려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그의 머리에 검은 두건이 씌워졌고, 잠시 후 교수대의 트랩 도어가 열리면서 기토는 사망했다.[33] 그의 시신은 가족에게 인계되지 않았고, 대신 부검 후 감옥 마당 구석에 묻혔다.[33]
이후 처형 로프 조각이 기념품으로 팔리기 시작하자, 간수들이 시신을 파내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33] 스캔들을 우려하여 시신은 메릴랜드주에 있는 국립 건강 및 의학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박물관은 기토의 뇌와 부검에서 발견된 비대해진 비장, 그리고 표백된 뼈대를 보존하여 보관했다.[34] 기토의 뇌 일부는 현재 필라델피아의 뮤터 박물관 유리병에 전시되어 있다.[3][55]
5. 3. 기토의 기행
가필드 대통령 암살 혐의로 기소된 찰스 기토는 재판 과정 내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아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재판정에서 잦은 욕설을 내뱉고 판사, 증인, 검사, 심지어 자신의 변호인단까지 모욕하는 등 상식 밖의 행동을 보였다.[24] 자신의 증언은 장황한 서사시 형태로 낭송했으며, 방청석에 앉은 사람들에게 쪽지를 보내 법률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기토는 『뉴욕 헤럴드』에 자신의 자서전을 구술하여 연재하게 했고, 글 말미에는 "30세 미만의 멋진 기독교 여성"을 찾는다는 개인 광고를 싣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미국 대중의 극심한 증오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듯 보였는데, 실제로 재판 전후로 두 차례나 암살 위협을 겪었음에도 법정 안팎에서 기자나 구경꾼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일이 잦았다.
또한 그는 자신이 아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고 그의 봉급 인상에도 기여했으니 자신을 석방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을 담은 편지를 아서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했다.[28] 재판정에서는 가필드 대통령이 자신이 쏜 총알 때문이 아니라 의사들의 의료 과실로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의사들이 가필드를 죽였고, 나는 그를 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29] 이러한 발언들은 법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재판 기간과 이후 처형될 때까지 기토는 워싱턴 D.C. 남동부의 세인트 엘리자베스 병원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자신의 암살 행위를 변호하고 재판 과정을 기록한 글을 썼는데, 이는 나중에 The Truth and the Removal|진실과 제거eng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기토는 재판을 둘러싼 언론의 관심을 즐기는 한편, 자신이 곧 석방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18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882년 1월 25일, 배심원단은 그에게 유죄를 평결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판결이 낭독되자 기토는 변호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을 향해 "여러분 모두 저급하고, 완벽한 얼간이들입니다!"라고 소리치는 등 마지막까지 소란을 피웠다. 항소는 기각되었다.
1882년 6월 30일, 처형 당일에도 기토의 기행은 계속되었다. 그는 처형장으로 이송되는 동안에도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고, 교수대까지 춤을 추듯이 걸어가 처형 집행인과 악수를 나누었다. 교수대 위에서는 자신이 쓴 I am Going to the Lordy|주님께 가겠습니다eng라는 시를 낭송하는 것을 마지막 소원으로 요청했다. 그는 원래 오케스트라 반주를 원했지만 이는 거부되었다.[32] 시 낭송을 마친 기토는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로 손에 든 종이를 떨어뜨렸고, 곧 교수형이 집행되었다.[33]
5. 4. 유죄 판결과 처형
가필드 대통령이 사망하자 정부는 공식적으로 기토를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그는 1881년 10월 14일, 체포 당시 적용되었던 살인 미수 혐의에서 변경되어 살인 혐의로 정식 기소되었다. 기토는 혐의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다. 재판은 1881년 11월 17일 워싱턴 D.C.의 컬럼비아 특별구 미국 지방 법원에서 시작되었으며, 재판장은 월터 스미스 콕스였다. 기토는 재판 내내 스스로 변호하려 했지만, 법원은 그를 변호하기 위해 리 로빈슨을 임명했다. 그러나 로빈슨은 재판 시작 일주일도 안 되어 사임했고, 이후 기토의 매형인 조지 스코빌이 주임 변호를 맡게 되었다. 스코빌은 부동산 관련 법률 경험만 있었으나, 다른 누구도 변호를 맡으려 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나섰다. 웨인 맥베이 미국 법무 장관이 수석 검사를 맡았고, 조지 코크힐, 월터 데이비지, 은퇴 판사 존 K. 포터, 엘리후 루트, E. B. 스미스 등 다섯 명의 변호사가 검사팀에 합류했다.[24]
기토의 재판은 미국에서 일시적 정신 이상 주장이 주요 쟁점이 된 첫 사례 중 하나였다.[25] 기토는 범행 당시 신이 자신의 자유 의지를 빼앗아 법적으로 정신 이상 상태였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의학적으로는 정신 이상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변호인단과 갈등을 빚었다. 판사는 배심원에게 맥노튼 규칙에 따라 판단하도록 지시했다.[26]
변호 측은 정신 이상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선구적인 정신과 의사인 에드워드 찰스 스피츠카를 전문 증인으로 내세웠다. 스피츠카는 기토가 "현재 정신 이상일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다른 무엇이었던 적이 결코 없다"고 단언하며, 기토가 정신 이상일 뿐 아니라 "도덕적 괴물"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증언했다. 그는 기토가 "정신병원에서 자주 관찰했던" "정신 이상적인 태도"를 보이며, "삶의 실제 사건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 "병적인 자기 중심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스피츠카는 이러한 상태가 "선천적인 뇌의 기형" 때문이라고 보았다.[27]
반면, 검사팀의 일원이자 컬럼비아 특별구 지방 검사였던 코크힐은 기토의 정신 이상 주장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재판 전 언론 발표에서 "그는 나만큼 정신 이상이 아니다. 기토에게는 미친 구석이 전혀 없다. 그는 냉정하고 계산적인 악당이며, 세련된 건달로, 세상 앞에서 이런 식으로 행동할 준비를 점차적으로 해왔다. 그는 순수하고 단순한 무임승차자였다. 결국, 그는 무임승차의 단조로움에 지쳤다. 그는 다른 종류의 흥분과 악명을 원했고... 그것을 얻었다"라고 말하며, 이는 당시 대중의 여론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재판 내내 기토는 기이한 행동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판사, 증인, 검사, 심지어 자신의 변호인단에게까지 잦은 욕설과 모욕을 퍼부었다. 자신의 증언을 장황한 서사시 형식으로 낭송하고, 방청석의 관람객에게 쪽지로 법률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뉴욕 헤럴드에 자신의 자서전을 구술하며 "30세 미만의 멋진 기독교 여성"을 구하는 개인 광고로 마무리하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미국 대중의 증오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듯, 법정 안팎에서 관람객과 기자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기토는 아서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아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그의 봉급 인상에도 기여했으니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8] 또한 콕스 판사 앞에서 가필드가 총알이 아니라 의료 과실로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의사들이 가필드를 죽였고, 나는 그를 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29] 재판 기간과 처형 전까지 기토는 워싱턴 D.C. 남동부의 세인트 엘리자베스 병원에 수감되었다. 수감 중 그는 자신의 암살 행위에 대한 변호와 재판 기록을 담은 글을 썼고, 이는 ''진실과 제거''(The Truth and the Removal)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기토는 자신이 곧 석방될 것이라 믿으며 1884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계획하는 등 재판을 둘러싼 언론의 관심을 즐겼다. 그러나 1882년 1월 25일, 그는 유죄 판결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유죄 판결이 낭독되자 기토는 변호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을 향해 "여러분 모두 저급하고, 완벽한 얼간이들입니다!"라고 소리치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고 감방으로 끌려갔다. 기토는 항소했지만 기각되었다.
처형 29일 전, 기토는 자신이 블레인의 칠레 및 페루와의 전쟁 "음모"를 막기 위해 신의 명령으로 가필드를 죽였다고 주장하는 긴 시를 썼다. 그는 또한 아서 대통령이 암살이 미국을 구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사면하지 않는 것은 "가장 비열한 배은망덕"이라고 비난했고, 아서가 미국 대법원에 자신의 항소를 심리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잘못) 추측했다.[30]
기토는 1882년 6월 30일, 총격 사건 발생 1주년 이틀 전인 워싱턴 D.C.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피해자인 가필드 대통령보다 9개월 11일 더 오래 생존했는데, 이는 역대 미국 대통령 암살범 중 피해자 사망 후 가장 오래 생존한 경우이다.
처형장으로 이송되는 동안에도 기토는 관람객과 기자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교수대로 춤을 추듯 걸어가 처형 집행인과 악수했다고 한다. 교수대 위에서 그는 "마지막 임종 기도"를 통해 신이 "내가 지금 살해당하는 원인이 된 행위를 하도록 영감을 주셨다"고 선언하고, "이 정부와 이 나라는 이 행위로 인해 당신의 영원한 적대감을 갖게 될 것"이며 "보복의 신성한 법은 이 나라와 나의 살해자들을 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또한 아서 대통령을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당과 나라를 전복으로부터 구한 사람에게 배은망덕한 비겁자"라고 비난했다.[31] 마지막 요청으로, 그는 수감 중에 쓴 "주님께 가겠습니다"라는 시를 낭송했다. 그는 원래 시 낭송에 맞춰 오케스트라 연주를 요청했으나 거부되었다.[32]
처형인의 요청에 따라 기토는 시 낭송을 마친 뒤 종이를 떨어뜨려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그의 머리에 검은 두건이 씌워졌고, 잠시 후 교수대의 발판(trap door)이 열리면서 밧줄이 그의 목을 즉시 부러뜨렸다고 한다.[33] 기토의 시신은 유족에게 인계되지 않았고, 대신 부검 후 감옥 마당 구석에 묻혔다고 한다.[33]
처형 로프 조각이 기념품으로 팔리기 시작하자, 간수들이 수요를 맞추기 위해 기토의 시신을 파내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33] 논란을 우려하여 시신은 메릴랜드에 있는 국립 건강 및 의학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기토의 뇌와 부검에서 발견된 비대해진 비장, 그리고 뼈대가 보존 처리되어 보관되었다고 한다.[34] 기토의 뇌 일부는 현재 필라델피아의 뮤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다른 뇌 일부와 비장, 뼈대는 국립 건강 및 의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3][55]
6. 사후
처형 후 찰스 기토의 시신은 해부되어 의학 연구에 사용되었다. 특히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한 다양한 정신 의학적 및 심리학적 분석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당시 사회적 관심을 반영한다.[35][36][3][37] 그의 유품 일부는 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다.
6. 1. 시신과 유품
처형된 뒤 찰스 기토의 시신은 해부 실험용으로 의사들에게 보내졌다. 그의 두개골은 워싱턴 의학 박물관에 전시되었으나, 도난당한 후 다시 발견되지 않았다.6. 2. 심리 분석

정신과 의사 앨런 맥클레인 해밀턴은 1881년 기토가 가필드를 암살했을 때 정신적으로 온전했다고 증언했다.[35] 기토의 부검 결과, 그는 포경 상태, 즉 포피를 뒤로 젖힐 수 없는 상태였는데, 당시에는 이 상태가 그가 가필드를 암살하게 만든 정신 이상을 유발한 것으로 여겨졌다.[36]

그의 뇌 부검 결과, 경막이 비정상적으로 두꺼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그가 정신 불안정을 유발하는 질병인 신경 매독을 앓았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기토는 매춘부로부터 매독에 감염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 신경학 전 학과장인 조지 폴슨은 신경 매독 진단을 반박하며, 기토가 정신 분열증과 "과대 자기애"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3]
2014년, 범죄 심리학자 켄트 키엘은 기토를 사이코패스로 진단했으며, PCL-R 척도에서 40점 만점에 37.5점을 받았다고 평가했다.[37]
7. 대중문화
- 제임스 아게이트 주니어의 라디오 드라마 "암살자의 초상"은 기토의 삶, 특히 그의 심리적 문제와 가필드 암살 계획에 초점을 맞춘다. 이 연극은 ''CBS 라디오 미스터리 극장''의 1125번째 에피소드로 제작되어 1980년 10월 8일 처음 방송되었으며, 존 리스고가 기토 역을 맡았다.
- 스티븐 손드하임과 존 웨이드먼의 뮤지컬 ''어새신''에 등장한다. 극 중에서 기토는 제럴드 포드 암살 미수범인 사라 제인 무어의 멘토 역할을 하며,[38] 뮤지컬 넘버 "기토의 발라드"에서 "나는 주님께 갈 것이다"의 일부를 부른다.[39] 다른 암살범인 존 윌크스 부스, 레온 촐고쉬, 리 하비 오스왈드와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 애니메이션 ''아메리칸 대드!''의 에피소드 "가필드와 친구들"에서는 헤일리 스미스가 기토의 DNA를 이용해 그를 복제하고, 복제된 기토를 블러드하운드처럼 이용하여 부활한 가필드를 추적하는 내용이 나온다.[40]
- 마이클 P. 쿠베-맥도웰이 쓴 대체 역사 단편 소설 "나는 영광스러운 비행을 할 것이다"에서는 기토와 가필드가 독재자가 된 새뮤얼 J. 틸든에 맞서 동맹을 맺는다는 설정이다. 이 소설은 마이크 레스닉이 편집하여 1992년에 출간된 앤솔로지 ''얼터네이트 프레지던트''에 수록되었다.[41]
- 배우 윌 자노비츠는 2016년 PBS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익스피리언스: 대통령 살해''에서 기토 역을 연기했다.[42]
- 가수 램블린 잭 엘리엇의 노래 "미스터 가필드의 죽음"은 가필드 암살 사건과 이를 목격한 가상의 인물의 반응을 다룬다.[43] 조니 캐쉬는 엘리엇에게 이 노래를 배운 뒤, "미스터 가필드"라는 제목으로 편곡하여 녹음했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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