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 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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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콜럼버스 기사단은 1882년 미국 가톨릭 사제인 마이클 J. 맥기브니에 의해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가톨릭 이민자들을 위한 상호 부조 단체로 설립되었다. 자선, 단결, 형제애, 애국심을 원칙으로 하며, 가톨릭 신앙 증진, 정치 활동, 자선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2024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210만 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국립 성지, 박물관, 자산 자문 등의 부속 기관을 가지고 있으며, 여성 보조 단체, 청소년 단체인 콜럼비안 스콰이어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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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 기사단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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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칭 | K of C |
| 설립일 | 1882년 3월 29일 |
| 설립자 | 마이클 J. 맥기브니 |
| 설립 장소 |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 |
| 유형 | 가톨릭 형제애 봉사 단체 |
| 본부 |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 콜럼버스 기사단 건물 |
| 지도자 직함 | 최고 기사 |
| 지도자 이름 | 패트릭 E. 켈리 |
| 지도자 직함 2 | 최고 사제 |
| 지도자 이름 2 | 윌리엄 E. 로리 |
| 제휴 단체 | 국제 가톨릭 기사단 연맹 콜럼비안 스콰이어 스콰이어 로즈 콜럼비에트 |
| 웹사이트 | 콜럼버스 기사단 공식 웹사이트 |
2. 역사
콜럼버스 기사단은 1882년 마이클 J. 맥기브니 신부가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가톨릭 이민자들을 위한 상부상조 단체로 설립했지만, 점차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병사 복지 센터를 설립하고, 전쟁 후 재향군인 지원 활동을 펼쳤다. 1922년 오리건주 의무 교육법에 반대하여 ACLU과 함께 소송을 제기, 승소하여 사립학교를 지켜냈다. 또한 인종 및 종교적 소수자 차별에 맞서 싸웠다.
1915년경 쿠 클럭스 클랜(KKK)의 음해에 맞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 KKK의 허위사실 유포를 중단시켰다.
요한 바오로 1세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취임 직후 콜럼버스 기사단 최고 기사를 만났고, 여러 미국 대통령들이 콜럼버스 기사단 최고 회의에서 연설하는 등, 자선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교회와 사회 내 위상도 높아졌다.
2. 1. 초기 (1882년 ~ 1900년)

미국 가톨릭 사제였던 마이클 J. 맥기브니(Michael J. McGivney)는 1882년 뉴헤이븐 세인트 메리 교회(St. Mary's Church)에서 코네티컷주 뉴헤이븐(New Haven, Connecticut)의 가톨릭 이민자들을 위한 상부상조 단체로 콜럼버스 기사단을 설립했다. 맥기브니는 이민자 공동체의 본당 신부로서, 가장이 사망했을 때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직접 목격했다. 이는 대부분의 정부 지원 프로그램이 설립되기 전이었다. 당시 가톨릭 신자들은 종교적, 인종적 차별로 인해 노동 조합, 친목 단체, 그리고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다른 조직들로부터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최초의 지부들은 모두 코네티컷에 있었지만, 이후 수년 동안 단체는 뉴잉글랜드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코네티컷 외부로 확장되면서, 1880년대 후반과 1890년대에 지역, 주, 국가 차원의 정부를 갖춘 연방제 시스템을 기사단에 제공하기 위한 구조적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주와 지역 간의 활동을 조정할 수 있었다.
2. 2. 20세기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콜럼버스 기사단은 미국과 해외에 병사 복지 센터를 설립했다.[1] 전쟁 후에는 재향군인을 위한 교육, 직업 훈련 및 고용 프로그램에 참여했다.[2]1922년 오리건주 의무 교육법은 해당 주에서 가톨릭 학교를 포함한 사립학교를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3] 콜럼버스 기사단은 ACLU와 함께 법원에서 이 법에 이의를 제기했고, 1925년 획기적인 판결(''피어스 대 시스터즈 협회'')에서 미국 대법원은 이 법을 무효화했다.
가톨릭 신자들을 포함한 인종 및 종교적 소수자들을 겨냥한 적대감에 맞서기 위해, 기사단은 1920년대에 그들의 공헌에 대한 일련의 책을 출판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 역사 위원회를 구성했다. "콜럼버스 기사단 인종 공헌 시리즈" 책에는 W. E. B. 뒤부아의 ''The Gift of Black Folk: The Negroes in the Making of America'', 조지 코헨의 ''The Jews in the Making of America'', 프레드릭 슈레이더의 ''The Germans in the Making of America''의 세 편의 책이 포함되어 있다.
역사가 크리스토퍼 카우프만에 따르면, 콜럼버스 기사단은 "헌법에 따라 흑인 회원을 금지하지 않은 유일한 미국의 친목 단체"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콜럼버스 기사단은 가톨릭 군인을 지원하는 공식 기관으로 지정되었고, 그 지원 시설은 군인들에게 개방된 유일한 인종 통합 시설이었다. 에멧 제이 스콧은 "전쟁 중에 운영되던 다른 사회 복지 단체와 달리, 결코 색깔 선을 긋지 않았다"고 썼다.
콜럼버스 기사단이 성장하고 확장됨에 따라, 미국의 일부 평의회는 통합되었고, 다른 평의회는 그렇지 않았다. 통합된 평의회의 예로는 매사추세츠주 사우스보로의 세리던 평의회 119가 있다. 흑인인 새뮤얼 F. 윌리엄스는 회원이었고, 1896년 콜럼버스 기사단 매사추세츠 주 협회 대회 무대에서 연설했는데, 청중에는 미래의 최고 기사 두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각 지역 평의회는 새로운 회원을 투표로 선출했고, 평의회 규모에 관계없이 예비 후보자에 대한 4~5표의 반대표만으로도 가입을 거부할 수 있었다. 1954년 노터데임 대학교를 졸업한 조셉 버트란드는 1963년 진 라이너의 추천을 받은 후 시카고 지역 콜럼버스 기사단 평의회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당했다. 라이너는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그의 얼굴을 그냥 지켜보았습니다. 5개의 검은 공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고, 다른 5명의 평의회 지도자와 함께 콜럼버스 기사단 지부의 직책을 사임했다.
한편, 교회 관계자와 단체들은 통합을 점점 더 장려했다. 1950년대 말까지 KoC 최고 기사 루크 E. 하트는 평의회가 흑인 후보를 받아들이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1963년 하트는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시민권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주최한 백악관 특별 회의에 참석했다. 시카고에서 조셉 버트란드의 회원 가입 신청이 거부된 후, 하트는 다음 최고 협회에서 회원 가입 절차를 개정하여 회원 가입 거절에 지역 평의회 회원의 과반수 찬성이 필요하도록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변화는 일어났지만 하트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1915년경, 미국 인종 관계의 최악의 시기 동안, 쿠 클럭스 클랜은 4등급 기사들이 프리메이슨과 프로테스탄트를 몰살하기 위한 맹세를 했다는 내용의 음모론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콜럼버스 기사단은 그러한 맹세는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며 그러한 소문을 명예 훼손이라고 불렀다. 1923년 콜럼버스 기사단은 4등급 회원에게 돌려진 가짜 맹세가 어떤 진정한 의식의 일부임을 증명하는 사람에게 25000USD를 제공했다. 콜럼버스 기사단은 이를 막기 위해 배포자들을 상대로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KKK는 가짜 맹세의 발표를 중단했다.
2. 3. 현대
단체와 그 자선 사업이 성장함에 따라 교회 내에서의 위상도 높아졌다.[1] 요한 바오로 1세가 평신도와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최고 기사 버질 C. 데샹트였으며, 요한 바오로 2세는 즉위 3일 후에 최고 기사 데샹트를 만났다.[1] 1979년 교황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최고 책임자와 이사회는 교황을 알현한 유일한 평신도 단체였다.[2]리처드 닉슨은 1971년 최고 회의에서 연설했다.[3] 로널드 레이건은 1982년과 1986년에, 조지 W. 부시는 2004년에 연설했다. 조지 H. W. 부시는 1984년 미국 부통령으로, 그리고 1992년 대통령으로서 연설했다. 빌 클린턴은 111차 최고 회의에 비디오 메시지를 보내 "가톨릭 교회와 여러분의 공동체에 대한 기사단의 공헌은 우리의 박수를 받을 만하다"고 말했다.
교회 사학자 마시모 파졸리는 기사단의 자선 사업 규모가 "특히 로마나 워싱턴 D.C.와 같은 중요한 곳에서 돈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는다.
3. 조직 및 원칙
콜럼버스 기사단은 1882년 마이클 J. 맥기브니 신부가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의 뉴헤이븐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가톨릭 이민자들을 위한 상부상조 단체로 설립했다. 당시 가톨릭 신자들은 종교적, 인종적 차별로 인해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체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맥기브니 신부는 주요 생계 수입자가 사망했을 때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목격하고, 이들을 돕기 위해 기사단을 창설했다.
최초의 지부들은 코네티컷에 있었지만, 이후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880년대 후반과 1890년대에는 지역, 주, 국가 차원의 정부를 갖춘 연방제 시스템이 도입되어 주와 지역 간의 활동을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콜럼버스 기사단은 미국과 해외에 병사 복지 센터를 설립하고, 전쟁 후에는 재향군인을 위한 교육, 직업 훈련 및 고용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1922년 오리건주 의무 교육법은 사립학교를 금지하려 했으나, 콜럼버스 기사단은 미국 시민 자유 연맹(ACLU)과 함께 법원에 이의를 제기하여 1925년 ''피어스 대 시스터즈 협회'' 판결에서 승소했다.
1920년대에는 가톨릭 신자를 포함한 소수자들의 공헌을 알리는 역사 위원회를 구성하여 W. E. B. 뒤부아의 ''The Gift of Black Folk: The Negroes in the Making of America'' 등 세 편의 책을 출판했다.
콜럼버스 기사단은 흑인 회원을 금지하지 않은 유일한 미국의 친목 단체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가톨릭 군인을 지원하는 공식 기관으로 지정되었고, 그 지원 시설은 인종 통합 시설이었다. 그러나 일부 평의회는 통합되었고, 다른 평의회는 그렇지 않았다. 1950년대 말부터 최고 기사 루크 E. 하트는 평의회가 흑인 후보를 받아들이도록 장려했고, 1963년에는 회원 가입 절차를 개정하여 회원 가입 거절에 지역 평의회 회원의 과반수 찬성이 필요하도록 했다.
미국 인종 관계의 최악의 시기인 1915년경, 쿠 클럭스 클랜(KKK)은 4등급 기사들이 프리메이슨과 프로테스탄트를 몰살하기 위한 맹세를 했다는 음모론을 퍼뜨렸다. 콜럼버스 기사단은 이를 부인하며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KKK는 가짜 맹세의 발표를 중단했다.
콜럼버스 기사단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 평의회, 집회, 서클 구성 | ||
|---|---|---|
| 평의회 | 집회 | 서클 |
| 대기사 | 충실한 항해사 | 수석 조교 |
| 사제* | 충실한 수사* | 수도원장 |
| 대기사 부관 | 충실한 대장 | 수석 조교 부관 |
| 서기 | 충실한 제독* | 원수 조교 |
| 기록관 | 충실한 서기 | 공증인 조교 |
| 재무 서기관 | 충실한 회계관 | 회계 조교 |
| 회계 담당자 | 충실한 재무관 | 회계 조교 |
| 강사* | 없음 | 없음 |
| 변호사 | 없음 | 없음 |
| 감시관 | 충실한 조종사 | 원수 조교 |
| 내부 경비원 | 내부 감시자 | 보초병 |
| 외부 경비원 | 외부 감시자 | 보초병 |
| 이사(3년 임기) | 이사(3년 임기) | 없음 |
| 이사(2년 임기) | 이사(2년 임기) | 없음 |
| 이사(1년 임기) | 이사(1년 임기) | 없음 |
| 없음 | 색채 부대 사령관* | 없음 |
| (*각 평의회의 대기사 또는 충실한 항해사가 매년 임명) | ||
| (최고 기사가 3년 임기로 임명) | ||
| (*집회의 전 충실한 항해사와 충실한 항해사가 임명) | ||
이 단체는 자선, 단결, 형제애, 애국심이라는 원칙에 헌신하고 있다.
최고 평의회는 단체의 지배 기구이다. 24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3년 임기의 보험 회원을 선출한다. 지도자들의 급여는 이사회가 설정하고 최고 협의회 대표가 승인한다. 콜럼버스 기사단 고위 간부들의 7자릿수 연봉은 과도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69년 기사단은 뉴헤이븐에 23층짜리 본부 건물을 개설했다.
3. 1. 회원
회원 자격은 교황청과 연합한 실천적인 가톨릭 신자이며 교회에서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만 18세 이상의 남성으로 제한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210만 명이 넘는 콜럼버스 기사단원이 있으며, 대다수가 북미에 있다.[1]입회 후 자선의 실증을 완료하면 새로운 회원은 1급 기사가 된다. 그런 다음 단결과 형제애의 후속 실증을 완료한 후 2급과 3급으로 진급한다. 3급 기사는 완전한 “기사” 자격을 획득한 것으로 간주된다. 3급 회원의 특권에는 지역 평의회 임원으로서 봉사할 수 있는 능력과 주 및 최고 평의회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권한이 포함된다.
양호한 상태의 3급 기사는 애국심의 실증을 완료하고 4급으로 진급할 수 있다. 이것은 선택적인 단계이지만, 이 단체의 최고 이상을 나타낸다. 이 수준에 도달한 기사는 “기사님”으로 불린다.
각 회원은 전 세계 17,000개가 넘는 '''지역 평의회''' 중 하나에 속한다.[1] 대부분은 가톨릭 교구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일부는 지역 사회 내에 자체 평의회 건물을 보유하고 있다. 각 지역 평의회는 이 단체의 원칙에 따라 지역 사회의 필요를 돕기 위해 노력한다.
1898년 미국 가톨릭 대학교에서 시작된 '''대학 평의회''' 프로그램은 전 세계 대학 캠퍼스의 남성들의 도덕적, 지적, 영적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대학 평의회는 1910년에 설립된 노터데임 대학교 평의회 #1477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340개가 넘는 대학 평의회가 있다.
역사 대부분 동안 콜럼버스 기사단은 군인과 그 가족들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제공해 왔다. 현재 북미와 전 세계 군사 기지에 50개가 넘는 '''군사 평의회'''가 있다.
4급에 도달한 기사는 '''4급 집회'''에도 속한다. 4급 기사들은 이 단체의 네 번째 원칙인 애국심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남성들이다. 4급 집회는 지역 지리적 지역 내 여러 평의회에서 회원을 모집한다. 그들은 재향군인과 현역 군인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주도하고 충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충실한 시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구현한다. [2] 현재 전 세계적으로 3,600개가 넘는 4급 집회가 있다.
4급 집회는 4급의 선택 부서인 '''색채 부대'''를 구성할 수 있으며, 그들의 독특한 존재감은 퍼레이드, 화환 헌화식, 견진성사 및 기타 가톨릭 행사에서 기사들의 지역 사회 봉사를 보여주는 시각적 상징이다. 4급 색채 부대는 종종 기사들의 가장 눈에 띄는 부서이다.
최고 평의회는 이 단체의 지배 기구이다. 24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3년 임기의 보험 회원을 선출한다. 지도자들의 급여는 이사회가 설정하고 최고 협의회 대표가 승인한다. 콜럼버스 기사단 고위 간부들의 7자릿수 연봉은 과도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평의회, 집회, 서클 구성 | ||
|---|---|---|
| 평의회 | 집회 | 서클 |
| 대기사 | 충실한 항해사 | 수석 조교 |
| 사제* | 충실한 수사* | 수도원장 |
| 대기사 부관 | 충실한 대장 | 수석 조교 부관 |
| 서기 | 충실한 제독* | 원수 조교 |
| 기록관 | 충실한 서기 | 공증인 조교 |
| 재무 서기관 | 충실한 회계관 | 회계 조교 |
| 회계 담당자 | 충실한 재무관 | 회계 조교 |
| 강사* | 없음 | 없음 |
| 변호사 | 없음 | 없음 |
| 감시관 | 충실한 조종사 | 원수 조교 |
| 내부 경비원 | 내부 감시자 | 보초병 |
| 외부 경비원 | 외부 감시자 | 보초병 |
| 이사(3년 임기) | 이사(3년 임기) | 없음 |
| 이사(2년 임기) | 이사(2년 임기) | 없음 |
| 이사(1년 임기) | 이사(1년 임기) | 없음 |
| 없음 | 색채 부대 사령관* | 없음 |
| (*각 평의회의 대기사 또는 충실한 항해사가 매년 임명) | ||
| (최고 기사가 3년 임기로 임명) | ||
| (*집회의 전 충실한 항해사와 충실한 항해사가 임명) | ||
3. 2. 구조
이 단체는 자선, 단결, 형제애, 애국심이라는 원칙에 헌신하고 있다. 회원 자격은 교황청과 연합한 실천적인 가톨릭 신자이며 교회에서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만 18세 이상의 남성으로 제한된다.입회 후 자선을 실증하면 새로운 회원은 1급 기사가 된다. 이후 단결과 형제애를 실증하면 2급과 3급으로 진급한다. 3급 기사는 완전한 “기사” 자격을 획득한 것으로 간주된다. 3급 회원은 지역 평의회 임원으로서 봉사할 수 있고, 주 및 최고 평의회 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
양호한 상태의 3급 기사는 애국심을 실증하고 4급으로 진급할 수 있다. 이는 선택적인 단계이지만, 단체의 최고 이상을 나타낸다. 이 수준에 도달한 기사는 “기사님”으로 불린다.
각 회원은 전 세계 17,000개가 넘는 지역 평의회 중 하나에 속한다.[1] 대부분은 가톨릭 교구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일부는 지역 사회 내에 자체 평의회 건물을 보유하고 있다. 각 지역 평의회는 단체의 원칙에 따라 지역 사회의 필요를 돕기 위해 노력한다.
1898년 미국 가톨릭 대학교에서 시작된 대학 평의회 프로그램은 전 세계 대학 캠퍼스의 남성들의 도덕적, 지적, 영적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대학 평의회는 1910년에 설립된 노터데임 대학교 평의회 #1477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340개가 넘는 대학 평의회가 있다.
콜럼버스 기사단은 역사 대부분 동안 군인과 그 가족들에게 적극적으로 지원을 제공해 왔다. 현재 북미와 전 세계 군사 기지에 50개가 넘는 군사 평의회가 있다.
4급에 도달한 기사는 4급 집회에도 속한다. 4급 기사들은 단체의 네 번째 원칙인 애국심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남성들이다. 4급 집회는 지역 지리적 지역 내 여러 평의회에서 회원을 모집한다. 이들은 재향군인과 현역 군인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주도하고, 충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충실한 시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구현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3,600개가 넘는 4급 집회가 있다.
4급 집회는 4급의 선택 부서인 색채 부대를 구성할 수 있으며, 그들의 독특한 존재감은 퍼레이드, 화환 헌화식, 견진성사 및 기타 가톨릭 행사에서 기사들의 지역 사회 봉사를 보여주는 시각적 상징이다. 4급 색채 부대는 종종 기사들의 가장 눈에 띄는 부서이다.
최고 평의회는 단체의 지배 기구이다. 24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3년 임기의 보험 회원을 선출한다. 지도자들의 급여는 이사회가 설정하고 최고 협의회 대표가 승인한다. 콜럼버스 기사단 고위 간부들의 7자릿수 연봉은 과도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69년 기사단은 뉴헤이븐에 23층짜리 본부 건물을 개설했다.
| 평의회 | 집회 | 서클 |
|---|---|---|
| 대기사 | 충실한 항해사 | 수석 조교 |
| 사제* | 충실한 수사* | 수도원장 |
| 대기사 부관 | 충실한 대장 | 수석 조교 부관 |
| 서기 | 충실한 제독* | 원수 조교 |
| 기록관 | 충실한 서기 | 공증인 조교 |
| 재무 서기관 | 충실한 회계관 | 회계 조교 |
| 회계 담당자 | 충실한 재무관 | 회계 조교 |
| 강사* | 없음 | 없음 |
| 변호사 | 없음 | 없음 |
| 감시관 | 충실한 조종사 | 원수 조교 |
| 내부 경비원 | 내부 감시자 | 보초병 |
| 외부 경비원 | 외부 감시자 | 보초병 |
| 이사(3년 임기) | 이사(3년 임기) | 없음 |
| 이사(2년 임기) | 이사(2년 임기) | 없음 |
| 이사(1년 임기) | 이사(1년 임기) | 없음 |
| 없음 | 색채 부대 사령관* | 없음 |
(*각 평의회의 대기사 또는 충실한 항해사가 매년 임명)
(**최고 기사가 3년 임기로 임명)
(***집회의 전 충실한 항해사와 충실한 항해사가 임명)
4. 자선 활동
자선은 콜럼버스 기사단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2024년 8월 열린 콜럼버스 기사단 총회에서 최고 기사 패트릭 켈리는 2023년에 1.9억달러와 4천 7백만 시간의 자원봉사를 자선 사업에 기부했다고 밝혔다.[1]
1897년부터 전국위원회는 지역 위원회가 1890년대 불황의 영향을 받는 회원들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을 조성하도록 장려했다. 위원회는 또한 고용 알선 서비스를 제공하고 빈민과 병자를 지원했다. 1903년 캔자스 홍수를 시작으로 자연재해와 인재 피해자 지원도 이루어졌다. 2015년 한 해 동안만 해도 콜럼버스 기사단은 태풍 및 기타 자연재해 피해자들에게 수십만 달러를 기부했다.
콜럼버스 기사단은 전쟁 중 난민 지원, 중동의 기독교인과 다른 종교 소수자 지원, 멕시코-미국 국경 난민 지원,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피해자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중동의 박해받는 기독교인과 다른 종교 소수자에게 식량, 숙소, 의류 및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200만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2018년에는 미국 망명을 추구하는 멕시코-미국 국경을 넘는 난민을 돕기 위해 25만달러를 기부했고, 이후 프로그램을 확장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에는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에서 피해자들을 도왔으며, 전쟁 시작 이후 850만 파운드 이상의 구호 물품을 전달하고 우크라이나 인도적 지원을 위해 1700만달러 이상을 제공했다.[1]
콜럼버스 기사단은 지적 및 신체적 장애인들에게 6억달러 이상을 기부했으며, 스페셜 올림픽을 주요 지원 대상 중 하나로 삼고 있다. 2023년 기사단은 스페셜 올림픽에 400만달러 이상을 기부하고 거의 4,000개의 경기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
2009년부터 2019년까지 콜럼버스 기사단은 위기 임신 센터에 1,000대 이상의 초음파 기기를 기증했으며, 미국 대법원의 ''돕스 대 잭슨 여성 건강 기구'' 판결에 따라 최고 기사 패트릭 켈리는 임신 후 지원(ASAP) 계획을 통해 계획되지 않은 임신과 위기 임신을 겪는 여성에 대한 지원을 늘리도록 촉구했다.
글로벌 휠체어 미션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휠체어와 이동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독립적인 국제 기구들의 연합체이다. 2023년 기사단은 글로벌 휠체어 미션에 1만 1천 대 이상의 휠체어를 제공했다.[3][1]
기사단은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 및 캐나다 가톨릭 주교회의를 포함한 교회 기관에도 기부한다. 2017년 기준으로, 기사단의 '비카리우스 크리스티' 기금은 교황의 자선 활동에 5700만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기사단은 수십 년 동안 바티칸의 뉴스 운영을 지원해왔다.
교육 분야에서 콜럼버스 기사단은 신학생, 참전용사 및 미국 가톨릭 대학교 및 기타 가톨릭 대학의 학생들을 위한 많은 장학금 및 기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기사단은 인종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전투에 참여하는 군인을 지원하기 위해 여러 "막사"를 운영했다.
5. 보험 프로그램
콜럼버스 기사단은 2023년 6월 기준 1.21조달러 이상의 생명보험 계약과 260억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현대적이고 전문적인 보험 운영을 제공한다. 이는 콜럼버스 기사단을 포춘 1000 목록에 포함시키기에 충분하며, 북미의 모든 생명보험회사 중 49위를 차지할 만큼 큰 규모이다.
콜럼버스 기사단의 상품은 종신보험, 단기보험, 연금, 장기 요양 보험, 장애 보험을 포함한다. 이 보험 프로그램은 회원과 그 가족을 위한 것으로, 기사단이 다른 기관에 제공하는 별도의 사업이 아니다. 모든 보험 담당자는 기사단 회원이다.
콜럼버스 기사단의 보험 프로그램은 북미에서 가장 높은 등급을 받은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40년 이상 연속으로 A. M. 베스트(A. M. Best)로부터 최고 등급인 A++를 받았다. 포브스는 매년 "미국 최고의 보험 회사" 목록을 발표하는데, 2022년부터 콜럼버스 기사단의 보험 프로그램을 이 목록에 포함시켰다.
콜럼버스 기사단은 두 가지 투자 전략을 유지한다. 첫째, 회사가 건전한 투자 대상이어야 하고, 둘째, 회사의 활동이 가톨릭 사회 교리와 상충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지침에는 인간 생명 보호, 인간 존엄성 증진, 무기 생산 감소, 경제 정의 추구, 환경 보호, 기업 책임 장려가 포함된다. 2017년 기준으로 에시스피어 연구소(Ethisphere Institute)로부터 5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윤리적인 기업"으로 선정되었다. 콜럼버스 기사단은 수상 경력을 인용하여 자신들을 "윤리적 투자의 선두주자"라고 부른다.
2017년에 9.65억달러 이상의 혜택이 지급되었다. 기사단 설립 이후 35억달러의 사망 보험금이 지급되었다. 190만 명의 회원과 그 가족의 보험 가입률은 3.5%로 낮은 편이다.
콜럼버스 기사단의 보험 운영은 여러 교회, 학교 및 기타 가톨릭 기관에 대한 대출에 투자한다. 2008년 기준으로 ChurchLoan 프로그램을 통해 5억달러 이상이 대출되었다. COVID-19 팬데믹 초기에 기사단은 교구가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도록 돕기 위해 1억달러 규모의 단기 대출 기금을 조성했으며, 각 교구는 100만달러의 담보 대출 한도를 받을 수 있었다.
| 연도 | 발행 중인 보험 (10억 달러) | 자산 (10억 달러) |
|---|---|---|
| 2023 | 1.21조달러 | |
| 2021 | 1.14조달러 | 260억달러 |
| 2020 | 1.1조달러 이상 | 2000억달러 이상 |
| 2019 | 1.09조달러 이상 | 2600억달러 이상 |
| 2018 | 1.09조달러 | 260억달러 |
| 2017 | 1.09조달러 | |
| 2015 | 990억달러 | |
| 2014 | 1000억달러 | 240억달러 |
| 2013 | 900억달러 | 198억달러 |
| 2012 | 884억달러 | 194억달러 |
| 2011 | 835억달러 | 180억달러 |
| 2010 | 790억달러 | 169억달러 |
| 2009 | 743억달러 | 155억달러 |
| 2008 | 700억달러 | 140억달러 |
| 2007 | 660억달러 | 130억달러 |
| 2006 | 619억달러 | 122억달러 |
| 2005 | 577억달러 | |
| 2004 | 533억달러 | |
| 2003 | 491억달러 | |
| 2002 | 456억달러 | |
| 2001 | 429억달러 | |
| 2000 | 404억달러 | |
| 1999 | 380억달러 | |
| 1997 | 300억달러 | |
| 1992 | 200억달러 | |
| 1990 | 140억달러 | 36억달러 |
| 1981 | 64억달러 | 10억달러 |
| 1976 | 36억달러 | 6.56억달러 |
| 1975 | 30억달러 | |
| 1971 | 20억달러 | |
| 1964 | 10억달러 이상 | |
| 1960 | 10억달러 |
5. 1. 초기
마이클 J. 맥기브니 신부는 1882년 뉴헤이븐 세인트 메리 교회에서 콘네티컷주 뉴헤이븐의 가톨릭 이민자들을 위한 상부상조 단체로 콜럼버스 기사단을 설립했다. 당시 대부분의 정부 지원 프로그램이 설립되기 전이었고, 19세기 후반 가톨릭 신자들은 종교적, 인종적 차별 때문에 노동 조합, 친목 단체 및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조직에서 배제되곤 했다. 맥기브니 신부는 이민자 공동체의 본당 신부로서 주요 생계 수입자가 사망했을 때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목격했기에 이러한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다.최초의 지부들은 모두 코네티컷에 있었지만, 이후 수년 동안 이 단체는 뉴잉글랜드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880년대 후반과 1890년대에는 코네티컷 외부로 확장됨에 따라 지역, 주 및 국가 차원의 정부를 갖춘 연방제 시스템이 도입되어 주와 지역 간의 활동을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맥기브니가 고안한 최초의 보험 시스템은 사망한 기사의 미망인에게 1000USD의 사망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이었다. 각 회원은 사망 시 1USD를 부담했고, 기사단원 수가 1,000명을 넘어서면 증가율에 따라 부담금이 감소했다.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회원이 동일하게 부담금을 납부했기 때문에, 젊고 건강한 회원은 나이가 들어서 가입한 회원보다 평생 더 많은 금액을 납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또한 질병으로 인해 일을 할 수 없는 회원을 위한 질병 보험금 적립금도 있었다. 질병에 걸린 기사는 13주 동안 주당 최대 5USD(2022년 달러로 약 155USD에 해당)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 이후에도 질병이 지속되면 소속된 평의회가 지급할 금액을 결정했다.
유행병 시대를 위한 준비금의 필요성은 초창기부터 인식되었지만, 1892년에 마침내 설립되기 전까지 여러 차례 거부되었다. 1896년에는 12000USD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1897년에는 프로그램 자금 조달 방식이 변경되어, 각 회원은 100개월 동안 매월 5센트를 부담하여 총 5USD를 기부했다.
1890년대 후반 코네티컷주 메리든의 세인트 로즈 교회에 최초로 대출을 제공한 이후로 콜럼버스 기사단은 교구, 교구청 및 기타 가톨릭 기관에 대출을 제공해왔다. 1954년까지 3억달러가 넘는 금액이 대출되었고, 이 프로그램은 "원금이나 이자를 한 푼도 잃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시대에 장기 채권의 이자율이 기사단의 보험 프로그램이 유지될 수 있는 수준 이하로 떨어지자, 기사단은 부동산 투자의 보다 공격적인 프로그램으로 전환시켰다. 기사단은 부동산을 매입한 후 원래 소유주에게 재임대하는 리스백 투자 프로그램을 설립했으며, "일반적으로 우리 기사단에 정상적인 모기지 이자율과 같은 순 임대료를 가져다줄 조건으로" 이루어졌다. 1952년부터 1962년 사이에 총 2900만달러에 달하는 18개의 토지가 매입되었다. 1953년 말에 기사단은 양키 스타디움 아래 토지를 250만달러에 매입했다. 1971년 뉴욕시는 수용권을 행사하여 토지를 획득했다.
| 연도 | 보험 가입액 | 자산 |
|---|---|---|
| 1957 | 6.9억달러 | 1.24억달러 |
| 1956 | 6.5억달러 | |
| 1955 | 5.62억달러 | |
| 1953 | 4.2억달러 | |
| 1932 | 3억달러 | |
| 1919 | 1.4억달러 | |
| 1897 | 42282USD | |
| 1896 | 12000USD |
5. 2. 현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콜럼버스 기사단은 미국과 해외에 병사 복지 센터를 설립했다. 전쟁 후에는 재향군인을 위한 교육, 직업 훈련 및 고용 프로그램에 참여했다.[1]1922년 오리건주 의무 교육법은 해당 주에서 가톨릭 학교를 포함한 사립학교를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2][3] 콜럼버스 기사단은 ACLU와 함께 법원에서 이 법에 이의를 제기했고, 1925년 획기적인 판결(''피어스 대 시스터즈 협회'')에서 미국 대법원은 이 법을 무효화했다.
가톨릭 신자들을 포함한 인종 및 종교적 소수자들을 겨냥한 적대감에 맞서기 위해, 기사단은 1920년대에 그들의 공헌에 대한 일련의 책을 출판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 역사 위원회를 구성했다. "콜럼버스 기사단 인종 공헌 시리즈" 책에는 W. E. B. 뒤부아의 ''The Gift of Black Folk: The Negroes in the Making of America'', 조지 코헨의 ''The Jews in the Making of America'', 프레드릭 슈레이더의 ''The Germans in the Making of America''의 세 편의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역사가 크리스토퍼 카우프만에 따르면, 콜럼버스 기사단은 "헌법에 따라 흑인 회원을 금지하지 않은 유일한 미국의 친목 단체"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콜럼버스 기사단은 가톨릭 군인을 지원하는 공식 기관으로 지정되었고, 그 지원 시설은 군인들에게 개방된 유일한 인종 통합 시설이었다. 에멧 제이 스콧은 "전쟁 중에 운영되던 다른 사회 복지 단체와 달리, 결코 색깔 선을 긋지 않았다"고 썼다.
콜럼버스 기사단이 성장하고 확장됨에 따라, 미국의 일부 평의회는 통합되었고, 다른 평의회는 그렇지 않았다. 통합된 평의회의 예로는 매사추세츠주 사우스보로의 세리던 평의회 119가 있다. 흑인인 새뮤얼 F. 윌리엄스는 회원이었고, 1896년 콜럼버스 기사단 매사추세츠 주 협회 대회 무대에서 연설했는데, 청중에는 미래의 최고 기사 두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각 지역 평의회는 새로운 회원을 투표로 선출했고, 평의회 규모에 관계없이 예비 후보자에 대한 4~5표의 반대표만으로도 누군가의 가입을 거부할 수 있었다. 1954년 노터데임 대학교를 졸업한 조셉 버트란드는 1963년 진 라이너의 추천을 받은 후 시카고 지역 콜럼버스 기사단 평의회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당했다. 라이너는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그의 얼굴을 그냥 지켜보았습니다. 5개의 검은 공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6. 가톨릭 신앙 증진 활동
마이클 J. 맥기브니 신부는 1882년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의 가톨릭 이민자들을 위한 상부상조 단체로 콜럼버스 기사단을 설립했다. 당시 가톨릭 신자들은 종교적, 인종적 차별로 인해 사회 서비스 제공 단체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초기 지부들은 모두 코네티컷에 있었지만, 이후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880년대 후반과 1890년대에는 주와 지역 간 활동 조정을 위한 구조적 변화가 도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콜럼버스 기사단은 미국과 해외에 병사 복지 센터를 설립하고, 전쟁 후에는 재향군인을 위한 교육, 직업 훈련 및 고용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1922년 오리건주 의무 교육법에 맞서 미국 시민 자유 연맹(ACLU)과 함께 법원에 이의를 제기, 1925년 ''피어스 대 시스터즈 협회'' 판결을 통해 법을 무효화했다. 1920년대에는 역사 위원회를 구성하여 소수 인종 및 종교 집단의 공헌을 다룬 책을 출판했다.
콜럼버스 기사단은 흑인 회원을 명시적으로 금지하지 않았지만, 일부 평의회에서 흑인 회원의 가입을 거부하는 사례도 있었다. 1963년 시카고에서 흑인 회원 가입이 거부되자 평의회 지도자들이 사임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후 회원 가입 절차가 개정되었다. 쿠 클럭스 클랜(KKK)은 콜럼버스 기사단에 대한 음모론을 퍼뜨렸으나, 기사단은 명예훼손 소송으로 대응했고 KKK는 가짜 맹세 유포를 중단했다.
단체와 자선 사업이 성장함에 따라 교회 내 위상도 높아졌다. 요한 바오로 1세와 요한 바오로 2세는 최고 기사를 만났고, 1979년 교황 방미 시 최고 책임자와 이사회는 교황을 알현한 유일한 평신도 단체였다.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조지 W. 부시, 빌 클린턴 등 여러 미국 대통령들이 콜럼버스 기사단과 관계를 맺었다.
교회 사학자 마시모 파졸리는 기사단의 자선 사업 규모가 "특히 로마나 워싱턴 D.C.와 같은 중요한 곳에서 돈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6. 1. 종교 차별 반대 노력
마이클 J. 맥기브니 신부가 콜럼버스 기사단을 설립한 배경에는 19세기 후반 미국 사회의 종교적, 인종적 차별이 있었다. 당시 가톨릭 신자들은 노동 조합이나 친목 단체 등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차별에 맞서 콜럼버스 기사단은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상호부조 단체로 시작되었다.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콜럼버스 기사단은 미국과 해외에 병사 복지 센터를 설립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인종 차별 없이 서비스를 제공했다. 전쟁 후에는 재향군인을 위한 교육, 직업 훈련 및 고용 프로그램을 지원했다.
1922년 오리건주에서 사립학교를 금지하려는 법률이 제정되자, 콜럼버스 기사단은 미국 시민 자유 연맹(ACLU)과 함께 법원에 이의를 제기했다. 1925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피어스 대 시스터즈 협회'' 판결을 통해 이 법률을 무효화했다.
1920년대에는 가톨릭 신자를 포함한 소수 인종 및 종교 집단에 대한 적대감에 맞서기 위해 역사 위원회를 구성하여 그들의 공헌을 다룬 책을 출판했다. 이 시리즈에는 W. E. B. 뒤부아의 ''The Gift of Black Folk: The Negroes in the Making of America'' 등이 포함되었다.
콜럼버스 기사단은 흑인 회원을 명시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일부 평의회에서는 흑인 회원의 가입을 거부하는 사례도 있었다. 1963년 시카고에서는 흑인 회원의 가입이 거부되자, 평의회 지도자들이 사임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콜럼버스 기사단 최고 기사 루크 E. 하트는 회원 가입 절차를 개정하여 지역 평의회 회원 과반수의 찬성이 있어야 가입을 거부할 수 있도록 했다.
쿠 클럭스 클랜(KKK)은 콜럼버스 기사단 4등급 회원들이 프리메이슨과 개신교를 몰살하려는 맹세를 했다는 음모론을 퍼뜨리기도 했다. 콜럼버스 기사단은 이러한 주장을 강력하게 부인하며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KKK는 가짜 맹세 유포를 중단했다.
콜럼버스 기사단은 초창기부터 "가톨릭 명예훼손 방지 단체"였다. 1914년에는 종교적 편견에 대한 위원회를 설립하고, 팸플릿 배포와 강연 등을 통해 가톨릭 신자에 대한 편견에 맞서는 활동을 펼쳤다.
6. 2. 새로운 복음화
콜럼버스 기사단은 새로운 복음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도록 촉구받아 왔다. 기사단은 2011년 새로운 복음화에 관한 연재물을 발표했으며, 다른 가톨릭 대중 매체 서비스에 대한 기부는 기사단의 주요 지출 중 하나이다. 기사단은 또한 세속 및 가톨릭 대학교 모두에 평의회를 설립했다.7. 수상
콜럼버스 기사단은 여러 국제적인 상을 후원한다. 그중 최고 영예는 "가우디움 에트 스페스 상"(Gaudium et Spes Award)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서인 가우디움 에트 스페스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상은 "특별한 상황에서만, 그리고 뛰어난 공적을 세운 개인에게만 수여"되며, 100000USD의 사례금이 함께 제공된다. 1992년 제정된 이후 처음 25년 동안에는 12번만 수여되었다. 이 상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신앙과 봉사의 메시지를 실현하기 위한 모범적인 공헌을 한 개인을 인정"한다.
| 가우디움 에트 스페스 상(Gaudium et Spes Award) | |
|---|---|
| 연도 | 수상자 |
| 2023 | 어그니스 메리 도노반 수녀 |
| 2016 | 가난한 자매회 |
| 2015 | 프랜시스 조지 추기경 |
| 2005 | 장 바니에 |
| 2002 | 마이클 사바 대주교 |
| 2001 | 윌리엄 웨이크필드 바움 추기경 |
| 2000 | 제임스 알로이시우스 히키 추기경 |
| 1994 | 존 오코너 추기경 |
| 1992 | 테레사 수녀 |
"카리타스 상"(Caritas Award)은 "자선" 또는 "사랑"으로 번역되는 신학적 덕목의 이름을 딴 상으로, "특별한 자선과 봉사의 업적"을 인정하며 2013년에 제정되었다. 첫 번째 수상자는 코네티컷주 뉴타운의 성 로사 데 리마 교회의 로버트 와이스 신부였고, 두 번째 수상자는 성 비르길리우스 콜럼버스 기사단 185 위원회였다. 두 수상자 모두 샌디 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이후의 행동으로 이 영예와 100000USD의 사례금을 받았다.
"성 미카엘 상"(Saint Michael Award)은 콜럼버스 기사단을 위해 평생 봉사를 실천한 기사단원을 인정하기 위해 "카리타스 상"과 함께 제정되었다. 또한 기사단은 매년 연례 총회에서 다른 개인과 위원회에게 상을 수여한다. 여기에는 올해의 가족상과 교회, 지역 사회, 위원회, 생명 문화, 가족, 청소년 등의 분야에서 최고의 활동에 대한 상이 포함된다. 또한 최고 판매 일반 및 현장 보험 담당자, 최고 모집 개인 및 위원회도 인정받는다.
기사단은 콜럼버스 기사단 대십자훈장을 제정했지만, 1893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콜럼부스의 후손인 크리스토발 콜론 이 데 라 세르다(베라과 공작)에게만 수여했다.
8. 정치 활동
콜럼버스 기사단은 초창기부터 정치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22년 오리건주 의무 교육법이 사립학교를 금지하려 하자, 콜럼버스 기사단은 법원에 이의를 제기하여 1925년 미국 대법원에서 ''피어스 대 시스터즈 협회'' 판결로 승소했다.
가톨릭 신자를 포함한 소수자 차별에 맞서기 위해 1920년대 역사 위원회를 설립하고, W. E. B. 뒤부아의 저서 등을 출판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인종 통합 시설을 운영하며 차별 없는 지원을 제공했다.
1950년대 말, 최고 기사 루크 E. 하트는 흑인 회원 가입을 장려했고,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시민권 문제를 논의했다. 회원 가입 절차를 개정하여 인종 차별을 방지하려 노력했다.
1915년경, 쿠 클럭스 클랜은 콜럼버스 기사단에 대한 음모론을 퍼뜨렸으나, 기사단은 소송을 통해 이를 중단시켰다.
리처드 닉슨,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조지 W. 부시, 빌 클린턴 등 여러 미국 대통령들이 콜럼버스 기사단 행사에서 연설하거나 메시지를 보냈다.
콜럼버스 기사단은 501(c)(8) 단체로, 제한적인 정치 활동이 가능하다. 공공 정책 활동은 주로 가톨릭 가족과 생명 존중 문제에 집중한다. 멕시코 가톨릭 박해와 공산주의에 반대했으며, 인종차별주의에 맞서 싸웠다. 노동 조합주의를 지지하고 다양한 지식인들의 작품을 출판했다.
냉전 시기에는 반사회주의, 반공주의 운동을 벌였고, 충성 서약에 "하느님 밑에"라는 문구를 추가하도록 로비했다. 동성 결혼 합법화에 반대하며, 낙태 반대 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9. 부속 기관
콜럼버스 기사단은 자체적인 자선 활동 외에도 박물관, 콜럼버스 기사단 자산 자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국립 성지 등의 부속 기관을 운영하며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9. 1. 박물관
2001년 3월 10일, 기사단은 뉴헤이븐에 기사단의 역사를 전시하는 박물관을 열었다. 약 7153.53m2 규모의 건물 개조에는 1000만달러가 들었다. 이곳에는 바티칸에서 대여한 모자이크와 교황의 선물, 존 F. 케네디의 회원 가입 신청서, 그리고 기사단 역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입구 근처에는 기사단의 자금 지원을 받은 보수 공사를 거치기 전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들고 있던 십자가가 있다. 성 베드로 대성전(St. Peter's Basilica) 정면에 있던 십자가이다.9. 2. 콜럼버스 기사단 자산 자문 (Knights of Columbus Asset Advisors)
콜럼버스 기사단 자산 자문(Knights of Columbus Asset Advisors)은 2015년에 설립된 자산운용사로, 가톨릭 사회 교리에 따라 투자한다.[2] 2023년 초 기준, 258억달러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이 회사는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가 발표한 사회적 책임 투자 지침을 따르는데,[2] 여기에는 인간 생명 보호, 인간 존엄성 증진, 무기 생산 감소, 경제 정의 추구, 환경 보호,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 등이 포함된다.
콜럼버스 기사단은 보스턴 어드바이저스(Boston Advisors)의 지분 20%를 인수하여 기관 및 고액 순자산 투자자를 위한 자산도 운용한다.[2] 콜럼버스 기사단 자산 자문은 자체 펀드의 채권 전략을 운용하고, 보스턴 어드바이저스는 주식 전략에 대해 하위 자문을 제공한다. 또한 모델 포트폴리오, 외부 CIO 서비스, 은행 대출 전략 및 기타 대체 투자 전략도 제공한다.[2] 2019년에는 보스턴 어드바이저스의 기관 운용 사업부를 인수했다.
9. 3. 성 요한 바오로 2세 국립 성지 (Saint John Paul II National Shrine)
콜럼버스 기사단은 워싱턴 D.C.에 있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국립 성지를 소유하고 운영한다. 2011년, 기사단은 13만 평방피트 규모의 요한 바오로 2세 문화 센터를 매입했다. 2009년에 문화 센터로서의 임무는 종료되었고, 기사단은 이를 요한 바오로 2세 성지로 재개장했다. 교황이 시성된 직후,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는 이 건물을 국립 성지로 지정했다.매년 6만 4천 명의 순례자가 이 성지를 방문하는데, 여기에는 비디오 콘텐츠, 인터랙티브 전시물, 그리고 요한 바오로 2세의 개인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교황의 혈흔이 담긴 1급 성물이 경배를 위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워싱턴 D.C.에 있는 기사단의 기지 역할도 한다.
10. 주목할 만한 회원

미국의 주목할 만한 회원으로는 존 F. 케네디, 테드 케네디,[2] 알 스미스,[3] 서전트 슈라이버, 새뮤얼 알리토, 콘래드 힐튼, 존 베이너, 레이 플린, 젭 부시, 영화 제작자 존 포드, 2번의 명예훈장 수상자인 상사 다니엘 댈리 등이 있다.
스포츠계에서는 그린베이 패커스의 유명한 전 감독인 빈스 롬바르디, 근대 올림픽 최초의 금메달리스트인 제임스 코놀리, 전 헤비급 복싱 챔피언 플로이드 패터슨, 그리고 야구 전설 베이브 루스가 회원으로 활동했다.
2006년 10월 15일, 라파엘 기사르 이 발렌시아(1878–1938) 주교는 로마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2000년에는 멕시코 혁명 이후 폭력 사태로 사망한 6명의 기사단원이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11. 단체 상징
이 단체는 자선, 단결, 형제애, 애국심이라는 원칙에 헌신하고 있다. 회원 자격은 교황청과 연합한 실천적인 가톨릭 신자이며 교회에서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만 18세 이상의 남성으로 제한된다. 4도 의식은 평의회와는 별개이며, 자체 임원과 별도의 휘장을 가지고 있다. 이 선택적인 애국적인 의식은 1900년에 제정되었다.
11. 1. 콜럼버스 기사단 상징 (Emblem of the Order)
이 단체의 상징은 과거 최고 기사 제임스 T. 멀렌(James T. Mullen)이 디자인하였고, 1883년 5월 12일 두 번째 최고 의회 회의에서 채택되었다. 중세 기사들이 사용했던 문장이 디자인의 영감이 되었다. 이 상징은 십자가 형태의 장식 십자가(Formée cross)에 방패가 장착된 형태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이 단체의 가톨릭 정체성을 나타낸다.
방패에는 세 가지 물체가 장착되어 있다. 파스케스(fasces), 닻, 그리고 칼이다. 고대 로마에서 파스케스는 관리 앞에서 권위의 상징으로 휴대되었다. 이 단체는 이를 "단단하게 결속되고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에 있어야 할 권위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닻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나타내며, 스페인 국왕의 명령을 받은 제독이자 이 파트너십의 수호성인으로서, 아메리카에 대한 가톨릭의 공헌을 상징한다. 짧은 칼, 또는 단검은 중세 기사들이 사용했던 무기였다. "K of C"라는 글자가 새겨진 방패 전체는 "조직화된 자비로운 행동을 하는 가톨릭 기사단"을 의미한다.
11. 2. 4도 삼위일체 휘장 (Triad Emblem of the Fourth Degree)

4도 삼위일체 휘장은 흰 비둘기, 붉은 십자가, 푸른 지구본이 특징이다. 평화와 성령의 고전적인 상징인 비둘기는 지구본 위에 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둘 다 십자군 십자가의 변형 위에 장식되어 있는데, 이 십자가는 중세 기사들의 튜닉과 망토에 달려 있던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성 삼위일체를 나타낸다.
- 지구본은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나타낸다.
- 십자가는 인류의 구세주이신 하느님 아들을 나타낸다.
- 비둘기는 인류의 성화자인 성령을 나타낸다.
휘장의 빨강, 흰색, 파랑은 콜럼버스 기사단이 시작된 미국의 국기 색깔이다. 이 색깔들은 또한 4도의 기본 원칙인 애국심의 가치를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된다.[1]
12. 보조 단체
콜럼버스 기사단에는 여러 평의회에 여성 보조 단체가 있으며, 콜럼비안 스콰이어스(Columbian Squires)는 콜럼버스 기사단의 공식 청소년 단체이다.
12. 1. 여성 보조 단체
많은 평의회에 여성 보조 단체가 있다. 20세기 초, 지역 평의회에서 이사벨라의 딸들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확장하여 다른 모임에 헌장을 발급했지만, 결코 합병되지 않았다. 새로운 단체는 1921년에 미국 가톨릭 딸들로 이름을 바꾸었고, 두 단체 모두 콜럼버스 기사단과는 독립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른 단체는 콜럼비엣으로 알려져 있다. 필리핀에서는 여성 보조 단체를 성모 마리아의 딸들(Daughters of Mary Immaculate)이라고 한다.1896년에 여성을 위한 평의회 설립 제안은 통과되지 않았고, 다시는 제안되지 않았다.
12. 2. 콜럼비안 스콰이어스 (Columbian Squires)
콜럼비안 스콰이어스(Columbian Squires)는 콜럼버스 기사단의 공식 청소년 단체이다. 창립자 바나바스 맥도널드(Barnabas McDonald)에 따르면, 콜럼비안 스콰이어스의 최고 목적은 인격 형성이다.바나바스 맥도널드(Barnabas McDonald)는 1925년 미네소타주 덜루스(Duluth)에서 콜럼비안 스콰이어스를 설립하였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새로운 스콰이어 서클(Squire Circles) 결성이 권장되지 않는데, 이는 단체가 청소년 활동을 독점적인 클럽에서 지역 교구 청소년 그룹으로 전환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13. 유사 기독교 단체
콜럼버스 기사단은 국제 가톨릭 기사 연맹(IACK)의 회원이며, 여기에는 다음 15개의 형제 단체가 포함된다.
| 단체명 | 국가 |
|---|---|
| 성 콜룸바누스 기사단 | 아일랜드 |
| 성 콜룸바 기사단 | 영국 |
| 피터 클래버 기사단 | 미국 |
| 남십자 기사단 |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
| 마셜 기사단 | 가나 |
| 다 가마 기사단 | 남아프리카 공화국 |
| 성 멀룸바 기사단 | 나이지리아 |
참조
[1]
journal
2024 Annual Report of the Supreme Knight
https://issuu.com/co[...]
2024-11-12
[2]
웹사이트
Who Are the Fourth Degree Knights?
https://www.kofc.org[...]
2024-11-12
[3]
웹사이트
Global Wheelchair Mission
https://www.kofc.org[...]
202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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