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프로스 왕국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키프로스 왕국은 1191년 제3차 십자군 원정 중 리처드 1세에 의해 점령된 후 뤼지냥 가문이 통치한 중세 국가이다.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던 키프로스는 1192년 기 드 뤼지냥에게 넘겨졌고, 이후 그의 동생 아모리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왕위를 부여받으면서 왕국으로 인정받았다. 1291년 아크레 함락 이후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나, 1489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병합되면서 멸망했다. 키프로스 왕국은 뤼지냥 가문, 푸아티에뤼지냥 가문, 코르나로 가문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리스계 주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키프로스는 원래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다. 비잔티움의 총독인 이사키오스 콤네노스는 키프로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1191년 제3차 십자군 원정길에 오른 리처드 1세는 성지로 오는 도중에 이 섬을 점령하고 성전 기사단에게 섬을 팔았다. 이듬해 성전 기사단은 다시 예루살렘 왕위 계승에 실패한 기 드 뤼지냥에게 이 섬을 양도했고 그 후부터는 뤼지냥 가문의 영토가 되었다. 1192년 기의 동생 아모리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에게 정식으로 키프로스의 왕위를 인정받았다.[4]
2. 역사
아모리가 죽은 후 왕위는 몇몇 어린 소년왕에게 넘어갔고, 예루살렘 함락 이후 이곳으로 옮겨온 예루살렘 왕국의 유력 가문인 이벨린 가문이 섭정을 맡아 영향력이 커졌다. 1229년 이벨린 가문의 섭정 중 한 명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면서 구엘프와 기벨린 간의 갈등이 섬으로 번졌다. 1232년 아그리디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2세의 지지자들이 패배했지만, 이 갈등은 예루살렘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에서 더 오래 지속되었다. 1268년 위그 3세가 콘라트 3세 사망 후 아크레 영토와 함께 왕위를 주장하며 두 왕국을 통합할 때까지 프리드리히 2세의 호엔슈타우펜 후손들은 예루살렘 왕위를 주장했다. 1291년 앙리 2세 치세에 팔레스타인 영토를 상실했지만, 키프로스 왕들은 계속해서 그 칭호를 주장했다.
원래 키프로스의 주민 대부분은 그리스계였기 때문에 동방 정교회의 영향 아래 있었고 로마 가톨릭교회는 소수였다.
1291년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십자군 거점인 아크레가 함락되자 키프로스는 지중해와 레반트 무역의 중심지로 이탈리아의 제노바, 베네치아 등 무역 국가의 무역 중심지가 되었고 이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14세기경에는 제노바 상인들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졌고, 아비뇽 유수기에는 프랑스의 편을 들어 프랑스가 이탈리아인들을 몰아내 주기를 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1489년 마지막 여왕인 카트린 코르네르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압력으로 섬을 베네치아에 팔도록 강요당하면서 왕국은 해체되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2. 1. 키프로스 왕국 이전의 역사
키프로스는 원래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다. 비잔티움의 총독인 이사키오스 콤네노스는 키프로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15] 1191년 제3차 십자군 원정길에 오른 리처드 1세는 성지로 오는 도중에 이 섬을 점령했다.[15]
로마 제국이 동부와 서로마 제국으로 분할된 후, 키프로스는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당시 키프로스의 주교는 기독교에 여전히 속해 있었지만,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를 통해 자치권을 얻었다.
아랍 무슬림은 650년대에 키프로스를 대규모로 침공했지만, 688년 비잔틴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와 우마이야 칼리프 압드 알-말리크 이븐 마르완은 전례 없는 협정을 맺었다. 이후 300년 동안, 키프로스는 양국 본토 사이의 거의 끊임없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아랍과 비잔틴 제국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공동 통치'' 상태가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그 후 짧은 기간 동안 섬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했지만, 항상 ''현상 유지''가 회복되었다.
이 시기는 965년, 니케타스 찰코우체스가 부활한 비잔틴 제국을 위해 섬을 정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185년, 키프로스의 마지막 비잔틴 총독이었던 황실 가문의 방계 혈통 출신인 키프로스의 이사악 콤네노스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 그의 쿠데타 시도는 실패했지만 콤네노스는 섬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잔틴 제국은 시칠리아의 윌리엄 2세의 지원을 받은 콤네노스에 대한 조치를 실패했다. 비잔틴 황제는 이집트 술탄과 키프로스 항구를 십자군에게 폐쇄하기로 합의했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는 십자군으로 예루살렘 왕국을 구원하러 가는 도중, 그의 잉글랜드 함대의 일부가 폭풍을 만나 지중해의 동로마 제국 영토인 키프로스 섬에 표착했다. 이때, 비잔틴 제국의 황족인 이사이오스 콤네노스가 키프로스를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 제국으로부터 자립하고 있었는데, 그는 잉글랜드 함대의 표착선에 있던 승무원들을 붙잡아 감금했다. 이후, 리처드 왕의 여동생 조앤과 왕의 신부 베렝가리아가 탄 배가 폭풍으로 표류하여 역시 키프로스 섬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사이오스는 그녀들의 하선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직후, 리처드 왕은 함대를 이끌고 키프로스에 도착했다. 리처드 왕은 처음에는 키프로스를 점령할 의사가 없었지만, 이사이오스의 지금까지의 악행을 듣고는 이사이오스를 토벌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이사이오스에게는 정적인 비잔틴 제국 황제 안겔로스 가문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살라딘과 밀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도 이 결심에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
키프로스 섬은 매우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고, 성지 원정의 전진 기지로 안성맞춤인 섬이었다. 리처드 왕은 잉글랜드 군을 리마솔 해변에 상륙시켜 키프로스 군과 대치하게 하고, 잉글랜드 궁병과 중장 기병이 이를 지원했다. 콤네노스와 그 신하들은 밤까지 언덕 위로 후퇴했지만, 리처드 왕은 그것을 찾아내어 그들의 야영지를 습격했다. 또다시 콤네노스는 몇 명의 수행원과 도망쳤다. 다음 날, 키프로스의 귀족들은 리처드 왕에게 항복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콤네노스는 리처드 왕에게 20000마르크의 배상금과 500명의 중장 기병을 제공하고, 리처드 왕의 여동생과 신부를 인도했으며, 그의 선행을 보증하기 위해 자신의 거성을 내놓았다.
그러나 콤네노스는 리처드 왕의 마음이 변하여 자신이 살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껴, 위의 것들을 리처드 왕에게 제공한 후, 다시 도주하여 칸타라 요새로 도망쳤다. 5월 12일, 리처드 왕은 신부 베렝가리아와 키프로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로부터 몇 주 후, 콤네노스는 보트를 타고 비잔틴 제국 본토로 도망치려 했지만, 키프로스 섬 동쪽 끝 곶으로 떠밀려 갔다. 그는 리처드 왕에게 붙잡혀 시리아의 마카포스의 성에 유폐되었고, 그대로 사망했다. 리처드 왕은 기 드 뤼지냥이 이끄는 십자군의 원군과 합류하여 그대로 아크레로 떠났다. 그 때, 리처드 왕은 키프로스에 ''리처드 오브 캔빌''(Richard of Canville)과 ''로버트 오브 손햄''(Robert of Thornham) 두 명의 가신을 수비대장으로 남겨두었다.[15]
리처드 수비대장은 그에게 반발한 키프로스 주민의 재산을 압수했다. 또한, 그는 키프로스의 법률과 전통을 유지하는 대신, 그 주민들에게 50%나 되는 재산세를 부담하게 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턱수염을 깎도록 명령했다. 수비대들의 압정에 대한 불만을 높인 키프로스 주민들은, 이사이오스의 친족들을 옹호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로버트 수비대장에 의해 진압되었고, 반란의 수괴는 처형되었다. 그 때, 리처드 수비대장은 로버트 수비대장이 행한 반란의 수괴에 대한 멋대로의 처형을 비난했다. 키프로스의 왕위를 주장하는 자를 리처드 왕의 승인 없이 처형하는 것은 잉글랜드 왕가에 대한 모욕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통치하에서의 키프로스 섬의 역사는 ''Chronicle of Meaux Abbey''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Meaux Abbey의 수도원장과 로버트 수비대장이 인척 관계였던 점도 있어, 내용은 로버트 수비대장에 의한 것이 많다.[16]
2. 2. 잉글랜드의 키프로스 점령 (1191년)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 도중 지중해의 동로마 제국 영토인 키프로스 섬에 표착했다. 당시 키프로스는 비잔틴 제국의 황족인 이사이오스 콤네노스(Isaac Komnenos of Cyprus)가 반란을 일으켜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상태였다. 이사이오스는 잉글랜드 함대의 표착선에 있던 승무원들을 감금하고, 리처드 1세의 여동생 조앤과 왕의 신부 베렝가리아의 하선도 허락하지 않았다.[4][5]
리처드 1세는 이사이오스의 악행을 듣고 그를 토벌하기로 결심했다. 이사이오스가 살라딘과 밀약을 맺었다는 소문도 이 결심에 영향을 미쳤다.[4] 키프로스 섬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기에, 리처드 1세는 섬을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잉글랜드 군은 리마솔 해변에 상륙하여 키프로스 군과 전투를 벌였다. 잉글랜드 궁병과 중장 기병의 지원을 받은 잉글랜드 군은 콤네노스와 그의 군대를 격파했다. 다음 날, 키프로스 귀족들은 리처드 1세에게 항복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콤네노스는 칸타라 요새로 도망쳤으나, 결국 붙잡혀 시리아의 마카포스 성에 유폐되었고, 그곳에서 사망했다.[4]
리처드 1세는 아크로 떠나기 전, ''리처드 오브 캔빌''(Richard of Canville)과 ''로버트 오브 손햄''(Robert of Thornham)을 수비대장으로 키프로스에 남겨두었다.[6] 이들은 키프로스 주민들에게 50%의 재산세를 부과하고 턱수염을 깎도록 명령하는 등 압정을 펼쳤다.[7] 이사이오스의 친족을 옹호한 반란이 일어났지만, 로버트 오브 손햄에 의해 진압되었다.[7] 잉글랜드 통치하의 키프로스 섬의 역사는 ''Chronicle of Meaux Abbey''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7]
2. 3. 뤼지냥 왕조의 통치 (1192년-1489년)
키프로스는 원래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으나, 비잔티움의 총독 이사키오스 콤네노스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1191년 제3차 십자군 원정 중이던 리처드 1세가 섬을 점령하고 성전 기사단에게 팔았다. 성전 기사단은 예루살렘 왕위 계승에 실패한 기 드 뤼지냥에게 섬을 다시 양도했고, 이후 뤼지냥 가문의 영토가 되었다. 1192년 기의 동생 아모리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에게 정식으로 키프로스 왕위를 인정받았다.[4]
리처드 1세는 키프로스가 성지에서 군사 작전을 펼치는 동안 관리하기 어려운 영토임을 알고, 비잔트 10만 닢에 성전 기사단에게 매각했다. 이 중 4만 닢은 즉시 지불하고 나머지는 할부로 지불하기로 했다.[4] 성전 기사단의 가혹한 통치는 원주민들의 반발을 샀고, 1192년 부활절에 키프로스인들은 성전 기사단을 학살하려 했다. 그러나 기사단은 니코시아 요새로 피신하여 포위 공격을 받았고, 결국 새벽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키프로스인들을 제압했다. 이후 성전 기사단은 통치를 계속하기 어려워 리처드 1세에게 키프로스를 다시 가져가 달라고 요청했고, 리처드 1세는 이를 받아들였다.[8]
예루살렘의 상속녀 시빌라가 사망하고, 남편 기 드 뤼지냥에 대한 반발이 커지자 그는 예루살렘 왕위 계승에서 물러났다.[4] 리처드 1세는 기 드 뤼지냥에게 키프로스 왕국을 제안하여 친구의 체면을 살리고 동방에서 권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골치 아픈 봉신을 제거하려 했다. 리처드 1세가 영토를 주었는지, 팔았는지는 불분명하며, 거래가 이루어졌더라도 대가를 지불받았을 가능성은 낮다.[4]
1194년 기 드 뤼지냥이 상속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형 아모리가 키프로스 왕 아모리 1세가 되었고, 이 왕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승인되었다.[4]
아모리 사후 왕위는 어린 소년들에게 넘어갔고, 예루살렘 함락 이후 키프로스로 옮겨온 이벨린 가문이 섭정을 맡아 영향력이 커졌다. 1229년 이블린 섭정 중 한 명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면서 구엘프와 기벨린 간의 갈등이 섬으로 번졌다. 1232년 아그리디 전투에서 프리드리히의 지지자들이 패배했지만, 이 갈등은 예루살렘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에서 더 오래 지속되었다. 1268년 위그 3세가 콘라트 3세 사망 후 아크레 영토와 함께 왕위를 주장하며 두 왕국을 통합할 때까지 프리드리히의 호엔슈타우펜 후손들은 예루살렘 왕위를 주장했다. 1291년 앙리 2세 치세에 팔레스타인 영토를 상실했지만, 키프로스 왕들은 계속해서 그 칭호를 주장했다.
기는 프랑스 출신 기사로, 십자군으로 예루살렘에 갔다. 이후 예루살렘 왕국 공주 시빌라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으나,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에게 패배하고 티르로 쫓겨났다. 리처드 1세 등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왕국 구원에 어려움을 겪었다.
티르는 레반트 무역의 중요 항구였고, 기는 막대한 관세 수입을 얻었다. 기는 살라딘에게 밀려나면 키프로스로 도망갈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 섬은 십자군 국가의 중요한 후방 공급 기지가 되었다.
1194년 기가 사망하자 예루살렘 왕국은 시빌의 이복 여동생 이사벨 1세에게 계승되었다. 키프로스 섬은 기의 형제 아모리 드 루지냥에게 계승되었고, 아모리는 1197년 이사벨 1세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도 겸했다. 1205년 아모리 사후 키프로스는 예루살렘 왕국에서 분리되어 이후 300년간 뤼지냥 왕조가 통치했다.
키프로스 주민 대부분은 그리스계 동방 정교회 신자였고, 로마 가톨릭교회는 소수였다. 1291년 아크레 함락 이후 키프로스는 지중해와 레반트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고, 제노바, 베네치아 등 무역 국가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14세기에는 제노바 상인들의 영향력이 강해졌고, 아비뇽 유수기에는 프랑스 편을 들어 프랑스가 이탈리아인들을 몰아내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1489년 마지막 여왕 카트린 코르네르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압력으로 섬을 베네치아에 팔도록 강요당하면서 왕국은 해체되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3. 키프로스 왕국의 지배자
예루살렘 왕국의 상속 여왕 시빌라가 사망하면서 남편이자 공동 왕이었던 기 드 뤼지냥의 통치에 대한 반대가 커져, 그는 예루살렘 왕위 계승에서 물러나게 되었다.[4] 기는 오랫동안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리처드 1세는 기 드 뤼지냥에게 키프로스 왕국을 제안함으로써 친구의 체면을 살리고 동방에서 권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골치 아픈 봉신을 제거하려 했다. 리처드 왕이 그에게 영토를 주었는지, 팔았는지는 불분명하며, 거래가 이루어졌더라도 대가를 지불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4]
1194년, 기 드 뤼지냥은 상속자 없이 사망했고, 그의 형인 아모리가 키프로스 왕 아모리 1세가 되었으며, 이 왕위와 칭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 의해 승인되었다.[4]
아모리 드 뤼지냥이 사망한 후, 왕국은 계속해서 어린 소년들이 왕으로 즉위했다. 예루살렘 왕국이 몰락하기 전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던 이블린 가문은 이 초기 몇 년 동안 섭정 역할을 했다. 1229년, 이블린 섭정 중 한 명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권력에서 물러났고, 그는 구엘프와 기벨린 사이의 투쟁을 섬으로 가져왔다. 프리드리히의 지지자들은 1232년 아그리디 전투에서 키프로스 군대에 의해 패배했지만, 이는 예루살렘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에서 더 오래 지속되었다. 프리드리히의 호엔슈타우펜 후손들은 1268년 위그 3세가 콘라트 3세가 사망하자 아크레의 영토와 함께 그 칭호를 주장하며 두 왕국을 통합할 때까지 예루살렘의 왕으로 계속 통치했다.
앙리 2세가 왕으로 있을 때인 1291년에 팔레스타인 영토는 최종적으로 상실되었지만, 키프로스 왕들은 계속해서 예루살렘 왕 칭호를 주장했다. 예루살렘과 마찬가지로 키프로스에도 ''오트 코르''(고등 법원)가 있었지만, 예루살렘에서보다 그 권한이 약했다. 섬은 예루살렘보다 더 부유하고 봉건적이었기에 왕은 더 많은 개인적인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오트 코르를 무시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봉신 가문은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 이벨린 가문이었다. 그러나 키프로스는 1291년 아크레 함락 이후 아프리카와 아시아와의 유럽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에 왕은 종종 이탈리아 상인, 특히 이탈리아 상인들과 갈등을 겪었다.
결국 키프로스 왕국은 14세기 들어 제노바 공화국의 지도 아래 제노바 상인들에게 점점 더 지배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키프로스는 아비뇽 교황청에 편을 들었고, 대분열 시기에 프랑스가 제노바인들을 몰아낼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 후 맘루크는 1426년에 키프로스 왕국을 조공국으로 만들었다.
키프로스 왕국의 군주 목록은 다음과 같다.사진 이름 수명 재위 시작 재위 종료 비고 섭정 기 1150년경–1194년 7월 18일 (43–44세) 1192년 1194년 7월 18일 뤼지냥의 위그 8세의 아들. 아모리 1153년경–1205년 4월 1일 (51–52세) 1194년 7월 18일 1205년 4월 1일 뤼지냥의 위그 8세의 아들. 위그 1세 1194/5년–1218년 1월 10일 (22–23세) 1205년 4월 1일 1218년 1월 10일 아모리의 아들. 몽벨리아르의 발터 (1205–1210) 앙리 1세
뚱보 앙리1217년 5월 3일–1253년 1월 18일 (35세) 1218년 1월 10일 1253년 1월 18일 위그 1세의 아들. 위그 2세 1252/3년–1267년 (14세) 1253년 1월 18일 1267년 12월 앙리 1세의 아들. 안티오키아의 플레상스 (1253–1261)
안티오키아-뤼지냥의 위그 (1261–1267)위그 3세
위대한 위그1235년경–1284년 3월 24일 (48–49세) 1267년 12월 1284년 3월 24일 안티오키아의 앙리의 아들.
앙리 1세의 조카.장 1세 1268년경–1285년 5월 20일 (17세) 1284년 3월 24일 1285년 5월 20일 위그 3세의 아들. 앙리 2세 1270년 6월–1324년 3월 31일 (53세) 1285년 5월 20일 1324년 3월 31일 위그 3세의 아들. 티레의 아말릭 (1306–1310) 위그 4세 1295년경–1358년 11월 24일 (62–63세) 1324년 3월 31일 1358년 11월 24일 푸아티에-뤼지냥의 기의 아들.
앙리 2세의 조카.피에르 1세 1328년 10월 9일–1369년 1월 17일 (40세) 1358년 11월 24일 1369년 1월 17일 위그 4세의 아들. 피에르 2세
뚱보 피에르1354년경 또는 1357년–1382년 10월 13일 (24–27세) 1369년 1월 17일 1382년 10월 13일 피에르 1세의 아들. 자크 1세 1334년–1398년 9월 9일 (63–64세) 1382년 10월 13일 1398년 9월 9일 위그 4세의 아들. 야누스 1375년–1432년 6월 29일 (56–57세) 1398년 9월 9일 1432년 6월 29일 자크 1세의 아들. 장 2세 1418년 5월 16일–1458년 7월 28일 (40세) 1432년 6월 29일 1458년 7월 28일 야누스의 아들. 샤를로트 1444년 6월 28일–1487년 7월 16일 (43세) 1458년 7월 28일 1464년 장 2세의 딸.
남편 루이와 공동 통치 (1459–1464).루이 1436년 6월–1482년 4월 (45세) 1459년 10월 7일 1464년 사보이 공작 루이의 아들.
아내 샤를로트와 공동 통치.자크 2세 1438/9년경–1473년 7월 10일 (34–36세) 1464년 1473년 7월 10일 장 2세의 사생아. 자크 3세 1473년 8월 6일–1474년 8월 26일 (1세) 1473년 8월 6일 1474년 8월 26일 자크 2세와 카테리나 코르나로의 아들. 카테리나 코르나로 카테리나 1454년 11월 25일–1510년 7월 10일 (55세) 1474년 8월 26일 1489년 2월 26일 마르코 코르나로의 딸.
자크 2세의 아내이자 자크 3세의 어머니.
마지막 여왕 카테리나 코르나로가 베네치아 공화국에 섬을 팔도록 강요당한 1489년까지 남아있는 군주들은 점차 거의 모든 독립을 잃었다.[9]
3. 1. 키프로스 영주 (1192년-1196년)
기 드 뤼지냥 (1192년-1194년)[4]
아모리 (1194년-1196년)[4]
예루살렘 왕국의 상속 여왕 시빌라가 사망하면서 남편이자 공동 왕이었던 기 드 뤼지냥의 통치에 대한 반대가 커져, 그는 예루살렘 왕위 계승에서 물러나게 되었다.[4] 기는 오랫동안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리처드 1세는 기 드 뤼지냥에게 키프로스 왕국을 제안함으로써 친구의 체면을 살리고 동방에서 권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골치 아픈 봉신을 제거하려 했다. 리처드 왕이 그에게 영토를 주었는지, 팔았는지는 불분명하며, 거래가 이루어졌더라도 대가를 지불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4]
1194년, 기 드 뤼지냥은 상속자 없이 사망했고, 그의 형인 아모리가 키프로스 왕 아모리 1세가 되었으며, 이 왕위와 칭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 의해 승인되었다.[4]
3. 2. 키프로스 왕 (1196년-1489년)
뚱보 앙리1217년 5월 3일–1253년 1월 18일 (35세) 1218년 1월 10일 1253년 1월 18일 위그 1세의 아들. 위그 2세 1252/3년–1267년 (14세) 1253년 1월 18일 1267년 12월 앙리 1세의 아들. 안티오키아의 플레상스 (1253–1261)
안티오키아-뤼지냥의 위그 (1261–1267)위그 3세
위대한 위그1235년경–1284년 3월 24일 (48–49세) 1267년 12월 1284년 3월 24일 안티오키아의 앙리의 아들.
앙리 1세의 조카.장 1세 1268년경–1285년 5월 20일 (17세) 1284년 3월 24일 1285년 5월 20일 위그 3세의 아들. 앙리 2세 1270년 6월–1324년 3월 31일 (53세) 1285년 5월 20일 1324년 3월 31일 위그 3세의 아들. 티레의 아말릭 (1306–1310) 위그 4세 1295년경–1358년 11월 24일 (62–63세) 1324년 3월 31일 1358년 11월 24일 푸아티에-뤼지냥의 기의 아들.
앙리 2세의 조카.피에르 1세 1328년 10월 9일–1369년 1월 17일 (40세) 1358년 11월 24일 1369년 1월 17일 위그 4세의 아들. 피에르 2세
뚱보 피에르1354년경 또는 1357년–1382년 10월 13일 (24–27세) 1369년 1월 17일 1382년 10월 13일 피에르 1세의 아들. 자크 1세 1334년–1398년 9월 9일 (63–64세) 1382년 10월 13일 1398년 9월 9일 위그 4세의 아들. 야누스 1375년–1432년 6월 29일 (56–57세) 1398년 9월 9일 1432년 6월 29일 자크 1세의 아들. 장 2세 1418년 5월 16일–1458년 7월 28일 (40세) 1432년 6월 29일 1458년 7월 28일 야누스의 아들. 샤를로트 1444년 6월 28일–1487년 7월 16일 (43세) 1458년 7월 28일 1464년 장 2세의 딸.
남편 루이와 공동 통치 (1459–1464).루이 1436년 6월–1482년 4월 (45세) 1459년 10월 7일 1464년 사보이 공작 루이의 아들.
아내 샤를로트와 공동 통치.자크 2세 1438/9년경–1473년 7월 10일 (34–36세) 1464년 1473년 7월 10일 장 2세의 사생아. 자크 3세 1473년 8월 6일–1474년 8월 26일 (1세) 1473년 8월 6일 1474년 8월 26일 자크 2세와 카테리나 코르나로의 아들. 카테리나 코르나로 카테리나 1454년 11월 25일–1510년 7월 10일 (55세) 1474년 8월 26일 1489년 2월 26일 마르코 코르나로의 딸.
자크 2세의 아내이자 자크 3세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