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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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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킬리키아는 터키 남동부에 위치한 지리적, 역사적 지역으로, 험준한 산악 지형과 비옥한 평야로 구분된다. 기원전 2천년기부터 다양한 민족이 거주했으며, 히타이트, 그리스, 로마, 비잔틴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다. 킬리키아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중심지였으며, 십자군과 이슬람 세력 간의 교차로 역할을 했다. 현재는 터키의 메르신, 아다나, 오스마니예, 하타이 주에 해당하며, 농업, 산업, 관광이 발달했다. 주요 도시로는 아다나, 메르신, 안타키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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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키아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리
위치터키 남부
면적38585.16 km²
일반 정보
공식 명칭킬리키아
원어 명칭아랍어: قيليقية
아르메니아어: Կիլիկիա
그리스어: Κιλικία
터키어: Kilikya
별칭추쿠로바
인구6435986 명 (2022년)
인구 밀도자동 계산
주민킬리키아인
언어터키어, 아랍어, 쿠르만지어, 아르메니아어
시간대TRT
UTC 오프셋+3
우편 번호 접두어33xxx, 01xxx, 80xxx, 31xxx
지역 번호324, 322, 328, 326
행정 구역
속한 국가터키
하위 구역메르신
아다나
오스마니예
하타이
최대 도시아다나
경제
총 지역 내 총생산 (명목)431억 4천만 달러 (2018년)
1인당 지역 내 총생산6982 달러 (2018년)

2. 지리

킬리키아는 파밀리아에서 동쪽으로 누르 산맥까지 지중해 연안을 따라 뻗어 있으며, 이 산맥은 킬리키아와 시리아를 구분짓는다. 북쪽과 동쪽에는 험준한 토러스 산맥이 있는데, 이 산맥은 킬리키아와 아나톨리아 고원 중앙부의 높은 고원을 구분하며, 고대에는 킬리키아 문이라 불리는 좁은 협곡으로 관통된다.[4][5]

고대 킬리키아는 자연적으로 리몬루 강을 기준으로 서쪽의 '''킬리키아 트라케아'''(Cilicia Asperala)와 동쪽의 '''킬리키아 페디아스'''(Cilicia Campestrisla)[6][45]로 나뉜다. 킬리키아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뉘는데, 서쪽은 험준한 산악 지대이고 동쪽은 비옥한 평원 지대이다.

2. 1. 지질

이 지역은 추쿠로바 평야(Çukurova Ovası)와 이를 둘러싼 토러스 산맥 등의 산악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스트라보는 이 지역을 "산악 킬리키아(Cilicia Trachea)"와 "평야 킬리키아(Cilicia Pedias)"로 나누어 생각했다.[45]

특히 평야 지역은 대부분 고원과 산악 지대로 구성된 터키 영토에서 몇 안 되는 평지이며, 터키에서 가장 활발한 지역 중 하나이다. 등이 재배되고 있으며, 터키 제4의 도시 아다나가 위치해 다른 산업들도 발달해 있다.

2. 2. 기후

저지대 평야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 겨울은 온화하다. 산악 지대는 겨울에 눈이 내리는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메르신 지역은 킬리키아에서 가장 높은 평균 기온과 강수량을 기록한다.[45]

3. 역사

킬리키아는 산악 지대와 저지대 평야의 기후 차이가 뚜렷하다. 저지대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덥고[21] 겨울은 온화하며, 특히 동부 평야는 비옥하다.[22] 가장 추운 달(1월) 평균 기온은 9°C, 가장 더운 달(8월) 평균 기온은 28°C이다. 산악 지대는 겨울에 눈이 내리는 내륙성 기후를 보인다. 연평균 강수량은 647mm, 연평균 강우일수는 76일이다. 메르신과 그 주변은 킬리키아에서 가장 높은 평균 기온을 보이며, 연평균 강수량(1096mm)과 강우일수(85일)도 높다.

킬리키아는 초기 히타이트 시대(기원전 2천년기)에 키즈와트나로 알려졌으며,[27][28] "평야" 킬리키아(우루 아다니야)와 "험준한" 킬리키아(타르자)로 나뉘었다.

알랄라크(현재 텔 아트차나)의 이드리미와 키즈와트나(현재 킬리키아)의 필리아 간의 도망 노예 조약(기원전 약 1480년)


기원전 약 1650년경 히타이트 왕 하투실리 1세무르실리 1세는 피라무스 강(현재 터키 남부의 체이한 강)을 따라 자유롭게 이동했는데, 이는 시리아와의 전투에서 킬리키아를 강력하게 통제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약 1595년 무르실리 사후 후리인들이 통제권을 빼앗아 킬리키아는 2세기 동안 독립했다. 자유 킬리키아의 첫 왕 이스푸타슈(Išputahšu)는 파리야와트리(Pariyawatri)의 아들로, 쐐기문자와 히타이트 상형 문자에 "위대한 왕"으로 기록되었다. 이스푸타슈와 히타이트 왕 텔리피누 사이의 조약은 히타이트어와 아카드어로 기록되었다.[29]

다음 세기에 킬리키아 왕 필리아(Pilliya)는 히타이트 지단타 2세와 알랄라크의 이드리미와 조약을 맺었다. 이드리미는 동부 킬리키아 전역에서 여러 군사 목표물을 공격했다고 언급했다. 알랄라크 왕 니크메파는 킬리키아의 권력을 약화시키려고 미타니의 샤우스타타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히타이트 세력이 강해지면서 키즈와트나 도시가 함락되어 킬리키아 전체가 위협받았다. 수나수라 2세 왕은 히타이트의 속국이 되었고, 고대 킬리키아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30] 무르실리 1세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투쟁으로 히타이트 패권이 붕괴되면서 킬리키아는 독립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21]

기원전 13세기에는 해양 민족이 킬리키아를 휩쓸면서 대규모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 후리인들은 그 지역을 버리고 북동쪽 토러스 산맥으로 이동하여 카파도키아에 정착했다.[31] 철기 시대 초기와 중기에 키리키아는 동쪽의 히야와(Ḫiyawa)와 서쪽의 험준한 국가, 두 개의 주요 정치체에 의해 지배되었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인들이 킬리키아(Κιλικια, Kilikia)라고 불렀던 독립 국가가 타르수스를 수도로 하여 아나톨리아 남동부에 수립되었다. 키리키아 왕국의 가장 초기의 통치자는 시에네시스 1세였는데,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585년 리디아와 메디아 제국 간의 전쟁이 끝난 후 평화 조약을 중재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또한 키리키아인들과 리키아인들이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에게 정복되지 않은 아나톨리아 유일의 민족이었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401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킬리키아의 지방 통치자 시에네시스 3세가 쿠루스 2세의 반란을 지지한 데 대한 반응으로 킬리키아의 자치권을 폐지했다. 이로써 키리키아 왕국은 폐지되었고, 아케메네스 제국에 완전히 통합되어 총독이 다스리는 속주가 되었다. 이러한 상태는 기원전 333년 아케메네스 제국 멸망까지 지속되었다. 쿠루스 2세의 반란이 진압된 후, 키리키아는 기원전 396년에서 395년 사이 에게 해에서의 군사 작전과 기원전 380년대 키프로스 원정을 위한 아케메네스군의 집결지로 다시 사용되었다.

기원전 390년대에는 카미사레스가 키리키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카미사레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다타메스가 키리키아와 카파도키아의 총독이 되었으나, 기원전 362년에 암살당했다.

마자이오스의 주화. 기원전 361/0-334년 키리키아 총독. 타르수스, 킬리키아.


마자이오스의 주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를 파라오로 묘사. 기원전 361/0-334년 키리키아 총독. 타르수스, 킬리키아.


기원전 340년대에는 마자이오스가 키리키아 총독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3년 여름 할리스 강을 건너 킬리키아 관문이 "적이 막으면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힘만으로도 방어자들을 두렵게 하여 돌파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병사들을 모아 공격했다. 밤의 엄호하에 그들은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경비병들을 놀라게 했고, 경비병들과 사트라프는 도망쳤으며, 타르수스로 향하면서 농작물에 불을 질렀다. 이러한 행운 덕분에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군대는 무사히 관문을 통과하여 킬리키아로 진입할 수 있었다.[32]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략 당시, 북서쪽에서 킬리키아로 도망쳐 저항을 조직한 아르사메스라는 하급 장교가 마케도니아군에 맞서 킬리키아를 방어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킬리키아는 경쟁하는 헬레니즘 군주와 왕국들의 격전장이 되었고, 한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지만, 결국 셀레우코스 왕조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왕조는 동쪽 절반 이상을 효과적으로 지배하지 못했다.[45] 헬레니즘 시대 동안 킬리키아에는 많은 도시들이 건설되었고, 이 도시들은 각 폴리스와 관련된 휘장을 새긴 주화를 주조했다.[33]

트라야누스 시대 로마 속주 아시아 소아 지도(킬리키아 포함)


'''킬리키아 트라케아'''는 킬리키아 해적들의 근거지가 되었는데, 기원전 67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코라케시온 전투(현대 알라니야) 이후 진압되었고, 타르수스는 로마 속주 킬리키아의 수도가 되었다. '''킬리키아 페디아스'''는 기원전 103년 로마 영토가 되었는데, 해적 토벌 작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가 처음 정복했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초대 총독으로 재임하며 파르티아의 미트리다테스 2세의 침략을 막았다. 그리고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전 지역이 속주로 편입되었다.[45]

아나자르부스의 로마 시대 개선문(후에 남문으로 개조됨)


기원전 51년, 파르티아 제국은 킬리키아를 침략하였다. 기원전 4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재편되었고, 기원전 27년경 시리아-킬리키아-포에니키아 속주가 되었다. 처음에는 서부 지역은 토착 왕이나 사제 왕조의 지배하에 독립적으로 남겨두었고, 타르콘디모투스 1세 치하의 작은 왕국이 동쪽에 남아 있었다.[34][45] 그러나 이들은 기원후 72년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최종적으로 속주에 통합되었다.[35][45] 알려진 도시가 47개나 될 정도로 중요한 지역이었기에, 프로콘술이 통치하였다.[36]

259년 또는 250년, 페르시아 사산 제국의 왕 샤푸르 1세가 킬리키아 병사들을 포함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발레리아누스의 패배 후 사산 군대는 시리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의 여러 도시들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테트라르키아(약 297년) 하에서 킬리키아는 ''콘술라리스''가 통치했으며, 이사우리아와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리비아 속주와 함께 디오케시스 오리엔티스(4세기 후반 아프리카 지역은 이집트 디오케시스로 분리됨)를 형성했고, 이는 프라이토리안 총독령(오리엔스)의 일부였으며, 동부 로마 제국의 부유한 중심지였다. 킬리키아는 고전 고대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 중 하나였으며, 기독교의 발상지로 여겨질 수 있다.[37][38] 로마 킬리키아는 염소털 천인 ''킬리키움''을 수출했는데, 이것은 천막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타르수스는 또한 초기 기독교 선교사이자 저자인 사도 바울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킬리키아에는 수많은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으며, 사도행전에 여섯 번, 갈라디아서(1:21)에 한 번 언급되어 있다.[39]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된 후, 킬리키아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구의 영토에 포함되었다.[36] 이 지역은 두 개의 시민 및 교회 속주로 나뉘었는데, 타르수스에 대주교구가 있고 폼페이오폴리스, 엘라이우사 세바스테, 코리쿠스, 아다나, 말루스, 제피리움이 조교구인 ''킬리키아 프리마''와, 아나자르부스에 대주교구가 있고 몹수에스티아, 아이가이, 에피파니아, 이레노폴리스, 플라비아스, 카스타발라, 이스켄데룬, 키티디오폴리스, 아르수즈가 조교구인 ''킬리키아 세쿤다''이다. 킬리키아의 여러 교구의 주교들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그 이후의 전례 공의회에 잘 대표되었다.[40]

7세기에 킬리키아는 이슬람 아랍인들에게 침략당했다.[41] 이 지역은 한동안 격전지이자 무주지였다가, 8세기 초 아랍인들이 정복했다. 압바스 칼리파 시대에 킬리키아는 재정착되었고 요새화된 국경 지대(''투구르'')로 변모했다. 787/788년에 재건된 타르수스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정착지이자 아랍인들이 비잔티움 제국이 지배하던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무슬림들은 965년 니케포루스 2세 황제에 의해 재점령될 때까지 이 지역을 지배했다.[45] 이 시기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이 이 지역에 점차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11세기 동안 제국 통치가 코카서스로 더 깊이 확장되면서 그러했다. 중세 아랍어로 킬리키아는 "레반트 변방"을 뜻하는 ''Ath-Thugur As-Shamiyya''로 알려져 있었다.

1199년부터 1375년까지의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제1차 십자군 전쟁 당시 이 지역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셀주크 투르크의 아르메니아 침략 이후 아르메니아인들은 서쪽으로 비잔티움 제국으로 이주했고, 1080년 루벤(아니의 마지막 왕의 친척)은 킬리키아 타우루스 산맥 중심부에 작은 공국을 세웠고, 이는 점차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성장했다.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여 존재 자체가 위협받던 이 기독교 국가는 약 300년 동안 격변의 역사를 겪으면서 십자군에게 귀중한 지원을 제공하고 이탈리아의 주요 상업 도시들과 무역을 했다.[45]

아야스, 코리코스, 몹수에스티아의 세 주요 항구뿐 아니라 모든 주요 도로를 확보한 광범위한 방어 시설 네트워크 덕분에 3세기 동안 번영했다.[42] 십자군 국가들과의 복잡한 동맹을 통해 아르메니아 귀족과 왕들은 종종 십자군을 초청하여 왕국 내부와 국경을 따라 바그라스, 트라페삭, 틸 함툰, 하루니아, 셀레프키아, 아무다, 사르반디카르 등의 성을 유지하도록 했다.

고스단틴 (재위 1095년 – 약 1100년)은 십자군이 안티오크로 진군하는 것을 지원했으며, 기사와 후작 작위를 받았다. 토로스 1세 (재위 약 1100년 – 1129년)는 시리아의 기독교 공주들과 동맹을 맺고 비잔티움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에 맞서 성공적인 전쟁을 수행했다. 레봉 2세 (레오 대왕, 재위 1187년–1219년)는 왕국을 타우루스 산맥 너머로 확장하고 수도를 시스로 정했다. 그는 십자군을 지원했고, 마인츠 대주교에 의해 왕으로 즉위했으며, 십자군 키프로스 왕국의 루지냥 가문의 한 여성과 결혼했다.[45]

13세기 킬리키아 및 그 주변 지역의 민족 분포도


헤툼 1세(재위 1226~1270)는 몽골과 동맹을 맺고,[45] 자신의 동생인 셈파드를 직접 몽골 궁정으로 보냈다.[43][44] 그 후 몽골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로부터 킬리키아 방어를 지원했지만, 몽골 자체가 이슬람으로 개종할 때까지였다.[45] 일 칸국은 아부 사이드 바하두르 칸(재위 1316~1335년) 사후 결속력을 잃었고, 따라서 킬리키아 방어에 있어 아르메니아 왕국을 지원할 수 없었다. 아르메니아 왕국 내부의 갈등과 1348년에 도착한 흑사병으로 인한 황폐화로 인해 유목민 투르크멘들은 불안정한 킬리키아로 눈을 돌렸다. 1352년, 라마잔 베그는 찰다으 남쪽에 정착한 투르크멘들을 이끌고 최초의 정착지인 카밀리를 건설했다. 같은 해 말, 라마잔 베그는 카이로를 방문하여 술탄으로부터 킬리키아에 새로운 국경 투르크멘 토후국을 세울 허가를 받았다.[46]

위레기르 투르크멘들은 아다나 남동쪽에서 7년 동안 소규모 공동체로 생활하며 자신들의 새로운 땅을 위레기르라고 명명했다. 레옹 5세(Levon V)가 사망하자(1342년), 루지냥의 잔이 콘스탄틴 4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아르메니아인들을 로마 가톨릭교회에 순응시키려 하고 모든 요직에 라틴인들을 임명함으로써 아르메니아 원주민들을 소외시켰다. 마침내 내분에 휩싸인 왕국은 1375년 킬리키아 페디아스를 라마단 왕조의 지원을 받는 맘루크 이집트에 할양했다.[45]

15세기 오스만 제국은 여러 봉건국들이 난립하던 아나톨리아 반도의 평정을 시도하는데, 그 일환으로 1471년 킬리키아 서부의 고도인 셀레우케이아(현 터키 시리프케(Silifke))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다.[45] 16세기에 셀림 1세는 마르쥬 다빅 전투에서 킬리키아 평야 지대와 시리아를 병합한다.[47]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터키는 1919년 열강에 의해 분할 통치되고, 킬리키아는 프랑스령이 된다. 1921년 킬리키아는 터키에 반환된다.[58] 가파른 언덕길의 협로로서 오랫동안 방어의 요충지였던 킬리키아의 문은 현재 공사로 도로 폭이 넓어지고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더 이상 방어 거점이 아니다.

3. 1. 선사 시대

킬리키아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24][25] 이 지역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까지의 유적지가 발견되었다.[25]

각 시대별 유적의 연대는 다음과 같다.

시대연대
무경질토기 신석기 시대기원전 8천년기 ~ 7천년기
초기 구리석기 시대기원전 5800년
중기 구리석기 시대 (할라프 및 우바이드 문화와 관련)기원전 약 5400년 ~ 4500년
후기 구리석기 시대기원전 4500년 ~ 약 3400년
초기 청동기 시대 IA기원전 3400년 ~ 3000년
초기 청동기 시대 IB기원전 3000년 ~ 2700년
초기 청동기 시대 II기원전 2700년 ~ 2400년
초기 청동기 시대 III A-B기원전 2400년 ~ 2000년


3. 2. 고대

킬리키아 지역은 초기 히타이트 시대(기원전 2천년기)에는 키즈와트나로 알려져 있었다.[27][28] 이 지역은 "평야" 킬리키아(우루 아다니야)와, 비옥한 평야와 산악 지대인 서쪽의 "험준한" 킬리키아(타르자)로 나뉘었다.

기원전 약 1650년경 히타이트 왕 하투실리 1세무르실리 1세가 피라무스 강(현재 터키 남부의 체이한 강)을 따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는 증거가 있으며, 이는 그들이 시리아와의 전투에서 킬리키아를 강력하게 통제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약 1595년 무르실리 사후 후리인들이 히타이트로부터 통제권을 빼앗았고, 킬리키아는 2세기 동안 독립을 유지했다. 자유 킬리키아의 첫 번째 왕인 이스푸타슈(Išputahšu)는 파리야와트리(Pariyawatri)의 아들이었으며, 쐐기문자와 히타이트 상형 문자 모두에 "위대한 왕"으로 기록되었다. 이스푸타슈와 히타이트 왕 텔리피누 사이의 조약은 히타이트어와 아카드어로 기록되어 있다.[29]

다음 세기에는 킬리키아 왕 필리아(Pilliya)가 히타이트의 지단타 2세와 알랄라크의 이드리미와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드리미는 동부 킬리키아 전역에서 여러 군사 목표물을 공격했다고 언급했다. 알랄라크 왕으로 이드리미의 뒤를 이은 니크메파는 킬리키아의 지역 내 권력을 약화시키려고 미타니의 샤우스타타르와 같은 후리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히타이트의 세력이 증가함에 따라 키즈와트나 도시가 히타이트에 함락되면서 킬리키아 전체가 위협받게 되었다. 곧이어 수나수라 2세 왕은 히타이트의 속국이 되었고, 고대 킬리키아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30] 무르실리 1세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투쟁으로 히타이트의 패권이 붕괴되면서 킬리키아는 독립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21]

기원전 13세기에는 해양 민족이 킬리키아를 휩쓸면서 대규모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 그곳에 거주하던 후리인들은 그 지역을 버리고 북동쪽 토러스 산맥으로 이동하여 카파도키아 지역에 정착했다.[31]

철기 시대 초기와 중기에 키리키아(Cilicia)는 두 개의 주요 정치체에 의해 지배되었다.

  • 동쪽에는 키리키아 평야(Plain Cilicia)에 해당하는 히야와(Ḫiyawa)가 있었다.
  • 서쪽에는 험준한 키리키아(Rough Cilicia)에 해당 하는 국가가 있었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인들이 키리키아(Κιλικια, Kilikia)라고 불렀던 독립 국가가 아나톨리아 남동부에 수립되었으며, 수도는 타르수스(Tarsus)였다.

키리키아 왕국의 가장 초기의 통치자는 시에네시스 1세였는데,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585년 리디아와 메디아 제국 간의 전쟁이 끝난 후 평화 조약을 중재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또한 키리키아인들과 리키아인들이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에게 정복되지 않은 아나톨리아 유일의 민족이었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401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키리키아의 지방 통치자 시에네시스 3세가 쿠루스 2세의 반란을 지지한 데 대한 반응으로 키리키아의 자치권을 폐지했다. 이로써 키리키아 왕국은 폐지되었고, 아케메네스 제국에 완전히 통합되어 총독이 다스리는 속주가 되었다. 이러한 상태는 기원전 333년 아케메네스 제국 멸망까지 지속되었다.

쿠루스 2세의 반란이 진압된 후, 키리키아는 기원전 396년에서 395년 사이 에게 해에서의 군사 작전과 기원전 380년대 키프로스 원정을 위한 아케메네스군의 집결지로 다시 사용되었다.

기원전 390년대에는 카미사레스가 키리키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카미사레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다타메스가 키리키아와 카파도키아의 총독이 되었으나, 기원전 362년에 암살당했다.

기원전 340년대에는 마자이오스가 키리키아 총독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3년 여름 할리스 강을 건너 킬리키아 관문이 "적이 막으면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힘만으로도 방어자들을 두렵게 하여 돌파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병사들을 모아 공격했다. 밤의 엄호하에 그들은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경비병들을 놀라게 했고, 경비병들과 사트라프는 도망쳤으며, 타르수스로 향하면서 농작물에 불을 질렀다. 이러한 행운 덕분에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군대는 무사히 관문을 통과하여 킬리키아로 진입할 수 있었다.[32]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략 당시, 북서쪽에서 킬리키아로 도망쳐 저항을 조직한 아르사메스라는 하급 장교가 마케도니아군에 맞서 킬리키아를 방어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킬리키아는 경쟁하는 헬레니즘 군주와 왕국들의 격전장이 되었고, 한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지만, 결국 셀레우코스 왕조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왕조는 동쪽 절반 이상을 효과적으로 지배하지 못했다.[45]

헬레니즘 시대 동안 킬리키아에는 많은 도시들이 건설되었고, 이 도시들은 각 폴리스와 관련된 휘장을 새긴 주화를 주조했다.[33]

'''킬리키아 트라케아'''는 킬리키아 해적들의 근거지가 되었는데, 기원전 67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코라케시온 전투(현대 알라니야) 이후 진압되었고, 타르수스는 로마 속주 킬리키아의 수도가 되었다. '''킬리키아 페디아스'''는 기원전 103년 로마 영토가 되었는데, 해적 토벌 작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가 처음 정복했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초대 총독으로 재임하며 파르티아의 미트리다테스 2세의 침략을 막았다. 그리고 기원전 64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전 지역이 속주로 편입되었다.[45]

기원전 51년, 파르티아 제국은 킬리키아를 침략하였다.

기원전 47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재편되었고, 기원전 27년경 시리아-킬리키아-포에니키아 속주가 되었다. 처음에는 서부 지역은 토착 왕이나 사제 왕조의 지배하에 독립적으로 남겨두었고, 타르콘디모투스 1세 치하의 작은 왕국이 동쪽에 남아 있었다.[34][45] 그러나 이들은 기원후 72년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최종적으로 속주에 통합되었다.[35][45] 알려진 도시가 47개나 될 정도로 중요한 지역이었기에, 프로콘술이 통치하였다.[36]

259년 또는 250년, 페르시아 사산 제국의 왕 샤푸르 1세가 킬리키아 병사들을 포함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발레리아누스의 패배 후 사산 군대는 시리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의 여러 도시들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테트라르키아(약 297년) 하에서 킬리키아는 ''콘술라리스''가 통치했으며, 이사우리아와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리비아 속주와 함께 디오케시스 오리엔티스(4세기 후반 아프리카 지역은 이집트 디오케시스로 분리됨)를 형성했고, 이는 프라이토리안 총독령(오리엔스)의 일부였으며, 동부 로마 제국의 부유한 중심지였다. 킬리키아는 고전 고대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 중 하나였으며, 기독교의 발상지로 여겨질 수 있다.[37][38]

로마 킬리키아는 염소털 천인 ''킬리키움''을 수출했는데, 이것은 천막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타르수스는 또한 초기 기독교 선교사이자 저자인 사도 바울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킬리키아에는 수많은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으며, 사도행전에 여섯 번, 갈라디아서(1:21)에 한 번 언급되어 있다.[39]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된 후, 킬리키아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구의 영토에 포함되었다.[36] 이 지역은 두 개의 시민 및 교회 속주로 나뉘었는데, 타르수스에 대주교구가 있고 폼페이오폴리스, 엘라이우사 세바스테, 코리쿠스, 아다나, 말루스, 제피리움이 조교구인 ''킬리키아 프리마''와, 아나자르부스에 대주교구가 있고 몹수에스티아, 아이가이, 에피파니아, 이레노폴리스, 플라비아스, 카스타발라, 이스켄데룬, 키티디오폴리스, 아르수즈가 조교구인 ''킬리키아 세쿤다''이다. 킬리키아의 여러 교구의 주교들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그 이후의 전례 공의회에 잘 대표되었다.[40]

3. 3. 중세

7세기에 킬리키아는 이슬람 아랍인들에게 침략당했다.[41] 이 지역은 한동안 격전지이자 무주지였다가, 8세기 초 아랍인들이 정복했다. 압바스 칼리파 시대에 킬리키아는 재정착되었고 요새화된 국경 지대(''투구르'')로 변모했다. 787/788년에 재건된 타르수스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정착지이자 아랍인들이 비잔티움 제국이 지배하던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무슬림들은 965년 니케포루스 2세 황제에 의해 재점령될 때까지 이 지역을 지배했다.[45] 이 시기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이 이 지역에 점차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11세기 동안 제국 통치가 코카서스로 더 깊이 확장되면서 그러했다. 중세 아랍어로 킬리키아는 "레반트 변방"을 뜻하는 ''Ath-Thugur As-Shamiyya''로 알려져 있었다.

제1차 십자군 전쟁 당시 이 지역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셀주크 투르크의 아르메니아 침략 이후 아르메니아인들은 서쪽으로 비잔티움 제국으로 이주했고, 1080년 루벤(아니의 마지막 왕의 친척)은 킬리키아 타우루스 산맥 중심부에 작은 공국을 세웠고, 이는 점차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성장했다.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여 존재 자체가 위협받던 이 기독교 국가는 약 300년 동안 격변의 역사를 겪으면서 십자군에게 귀중한 지원을 제공하고 이탈리아의 주요 상업 도시들과 무역을 했다.[45]

아야스, 코리코스, 몹수에스티아의 세 주요 항구뿐 아니라 모든 주요 도로를 확보한 광범위한 방어 시설 네트워크 덕분에 3세기 동안 번영했다.[42] 십자군 국가들과의 복잡한 동맹을 통해 아르메니아 귀족과 왕들은 종종 십자군을 초청하여 왕국 내부와 국경을 따라 바그라스, 트라페삭, 틸 함툰, 하루니아, 셀레프키아, 아무다, 사르반디카르 등의 성을 유지하도록 했다.

고스단틴 (재위 1095년 – 약 1100년)은 십자군이 안티오크로 진군하는 것을 지원했으며, 기사와 후작 작위를 받았다. 토로스 1세 (재위 약 1100년 – 1129년)는 시리아의 기독교 공주들과 동맹을 맺고 비잔티움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에 맞서 성공적인 전쟁을 수행했다. 레봉 2세 (레오 대왕, 재위 1187년–1219년)는 왕국을 타우루스 산맥 너머로 확장하고 수도를 시스로 정했다. 그는 십자군을 지원했고, 마인츠 대주교에 의해 왕으로 즉위했으며, 십자군 키프로스 왕국의 루지냥 가문의 한 여성과 결혼했다.[45]

헤툼 1세(재위 1226~1270)는 몽골과 동맹을 맺고,[45] 자신의 동생인 셈파드를 직접 몽골 궁정으로 보냈다.[43][44] 그 후 몽골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로부터 킬리키아 방어를 지원했지만, 몽골 자체가 이슬람으로 개종할 때까지였다.[45] 일 칸국은 아부 사이드 바하두르 칸(재위 1316~1335년) 사후 결속력을 잃었고, 따라서 킬리키아 방어에 있어 아르메니아 왕국을 지원할 수 없었다. 아르메니아 왕국 내부의 갈등과 1348년에 도착한 흑사병으로 인한 황폐화로 인해 유목민 투르크멘들은 불안정한 킬리키아로 눈을 돌렸다. 1352년, 라마잔 베그는 찰다으 남쪽에 정착한 투르크멘들을 이끌고 최초의 정착지인 카밀리를 건설했다. 같은 해 말, 라마잔 베그는 카이로를 방문하여 술탄으로부터 킬리키아에 새로운 국경 투르크멘 토후국을 세울 허가를 받았다.[46]

위레기르 투르크멘들은 아다나 남동쪽에서 7년 동안 소규모 공동체로 생활하며 자신들의 새로운 땅을 위레기르라고 명명했다. 레옹 5세(Levon V)가 사망하자(1342년), 루지냥의 잔이 콘스탄틴 4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아르메니아인들을 로마 가톨릭교회에 순응시키려 하고 모든 요직에 라틴인들을 임명함으로써 아르메니아 원주민들을 소외시켰다. 마침내 내분에 휩싸인 왕국은 1375년 킬리키아 페디아스를 라마단 왕조의 지원을 받는 맘루크 이집트에 할양했다.[45]

3. 4. 근대 및 현대

15세기 오스만 제국은 여러 봉건국들이 난립하던 아나톨리아 반도의 평정을 시도하는데, 그 일환으로 1471년 킬리키아 서부의 고도인 셀레우케이아(현 터키 시리프케(Silifke))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다.[45] 16세기에 셀림 1세는 마르쥬 다빅 전투에서 킬리키아 평야 지대와 시리아를 병합한다.[47]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터키는 1919년 열강에 의해 분할 통치되고, 킬리키아는 프랑스령이 된다. 1921년 킬리키아는 터키에 반환된다.[58]

가파른 언덕길의 협로로서 오랫동안 방어의 요충지였던 킬리키아의 문은 현재 공사로 도로 폭이 넓어지고 고속도로가 건설되어 더 이상 방어 거점이 아니다.

4. 문화

킬리키아는 터키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된 지역 중 하나로, 농업이 발전하면서 농업 기반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오늘날 제조업은 타르수스, 아다나, 체이한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으며, 섬유, 가죽, 식품 가공 공장이 많다. 이스켄데룬에는 대규모 제철소인 이스데미르가 있다.

체이한 석유 터미널 주변 투자와 함께 석유화학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정유소가 건설되고 있다. 체이한은 조선 산업도 유치할 것으로 예상된다.[67]

4. 1. 고대 문화

루위족은 기원전 2천년기에 킬리키아 지역에 정착했으며, 후기 청동기 시대 붕괴 이후 킬리키아는 아나톨리아에서 중요한 루위족 정착 중심지가 되었다.[1] 기원전 1천년기부터 후기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까지 킬리키아에는 루위족 인구가 거주했으며, 특히 서부(험준한 킬리키아) 지역의 인명은 루위어적 특징을 보였다.[1] 이는 기원후 1세기 초까지 많은 수의 루위어 사용자가 거주했음을 시사한다.[1]

고대 킬리키아 동부 지역의 주민들은 도시화되어 상업 및 산업 활동에 참여했던 반면, 서부 지역 주민들은 부족 사회를 이루고 더 단순한 삶을 영위했다.[2] 킬리키아 왕국의 통치자들은 스스로를 Συέννεσις|수에네시스grc라고 칭했는데, 이는 창업주인 시에네시스 1세(Syennesis I)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2] 이는 루위아어에서 유래했으며, 다시 ‘개’를 의미하는 단어의 소유격 형용사였다.[3][4]

아케메네스 제국 이전 시대부터 킬리키아에는 사원 영지가 존재했지만, 이에 대한 가장 좋은 기록은 헬레니즘 시대의 것이다. 알려진 사원 영지로는 올베의 제우스 신전과 카스타발라의 아르테미스 페라시아 신전이 있다.[5]

고대 킬리키아에서는 다양한 기원의 여러 신들이 숭배되었다.[5]

  • 타르수스 북동쪽 케세젱 쾨위(Kesecek Köyü)의 아람어식 묘지 비문에는 셈족 신들의 묘사가 있었다.
  • 킬리키아의 한 동전에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날개 달린 원반과 함께 타르수스의 바알이 묘사되어 있다.
  • 또 다른 킬리키아 동전에는 페르시아 의복을 입은 셈족 신 네르갈(Nergal)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그를 미트라(Mithra)와 동일시한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의 200년간의 지배의 영향으로, 3세기 후반(260년대)에도 타르수스와 킬리키아 전역에 화덕 제단과 마구스(magi)가 존재했다.[5]

기원 전후에는 주도 타르수스에서 기독교 전도사인 사도 바울(성 바울로)이 태어났다. 그 후 안티오키아(현 터키 안타키아)가 기독교 전파의 거점이 되면서, 이웃한 킬리키아도 기독교의 강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4. 2. 현대 문화

킬리키아는 터키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된 지역 중 하나이다. 농업이 발전하고 농산물 수확량이 늘어남에 따라 농업 기반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오늘날 제조업은 타르수스, 아다나, 체이한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다. 섬유, 가죽, 식품 가공 공장이 많으며, 이스켄데룬에는 대규모 제철소인 이스데미르가 있다.

체이한 석유 터미널 주변 투자와 함께 석유화학 산업이 이 지역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 지역에 정유소가 건설되고 있으며, 체이한은 조선 산업도 유치할 것으로 예상된다.[67]

5. 경제

킬리키아는 비옥한 토양과 높은 생산성의 농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킬리키아 평야는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토양을 가지고 있어 1년에 3번 수확이 가능하다. 이 지역은 헤이즐넛과 담배를 제외한 터키의 모든 농산물을 생산하며, 특히 대두, 땅콩, 옥수수 수확량이 가장 많다. 과일과 채소의 주요 생산지이며, 터키 감귤류 수출의 절반을 차지한다. 아나무르는 바나나, 망고, 키위 등 아열대 농산물을 수확할 수 있는 터키 유일의 아열대 지역이다.

킬리키아는 무을라–아이든 지역 다음으로 터키에서 두 번째로 큰 꿀 생산지이다.[70] 사만다, 유무르탈크, 카라타쉬, 보자이즈는 어업이 주요 수입원이며, 숭어, 홍어, 바다농어, 라고스, 오징어, 도다리가 많이 잡힌다. 아키아탄, 아키아안, 유무르탈크 호수와 세이한 저수지에는 양식 농장이 있다. 유제품과 축산업도 이루어진다.

킬리키아에는 아연, , 크롬, 중정석, , 석면, 석회암, 부석 등 광물 자원도 풍부하다. 특히 석회암 매장량이 매우 풍부하여 석회 제조 공장이 4곳 있다.

아다나는 이 지역의 상업 중심지이며, 메르신안타키아에도 공공 기관의 지역 사무소가 있다. 아다나의 TÜYAP 컨벤션 및 전시 센터와 메르신 컨벤션 센터 등에서 산업 박람회와 학회가 열린다.

'''주요 항구'''

항구 이름설명
메르신 항구이스탄불, 이즈미르에 이어 터키에서 세 번째로 큰 항구이다. 45개의 부두가 있으며, 총 면적은 785km2이고 연간 6,000척의 선박을 수용할 수 있다.
이스켄데룬 항구주로 중동과 터키 남동부로의 환적에 사용된다.[71]
체이한 석유 터미널바쿠-트빌리시-체이한 송유관("BTC"), 키르쿠크-체이한 송유관, 계획 중인 삼순-체이한 송유관 및 체이한-홍해 송유관의 해상 운송 터미널이다. 블루스트림 가스 파이프라인의 연장 계획을 위한 천연가스 터미널이 될 것이다.
도르튀욜 석유 터미널1967년에 바트만 석유를 시장에 내놓기 위해 운영을 시작한 바트만-도르튀욜 송유관의 해상 운송 터미널이다. 이 송유관은 길이가 511km이며 연간 350만 톤의 처리량을 갖고 있다.[72]


6. 행정 구역

현대 킬리키아는 메르신, 아다나, 오스마니예, 하타이의 네 개 주로 나뉜다. 각 주는 앙카라에 있는 중앙 정부가 임명한 주지사가 통치하며, 주는 다시 군(郡)으로 나뉘고 군은 주지사의 지휘를 받는 군수가 다스린다.

킬리키아의 행정 구역
주도면적 (km2)군 (서쪽에서 동쪽으로)인구지도
메르신메르신15853km2아나무르, 보자이으, 아이딘츠크 (켈렌데리스), 귀르나르, 무트, 실리프케, 에르데믈리, 메짓리, 예니셰히르, 토로슬라르, 아크데니즈, 참르야이라 (남룬), 타르수스1,891,145
아다나아다나14030km2세이한, 추쿠로바, 위레지르, 사르이참, 포잔티, 카라이살르, 카라타슈, 유무르탈르크 (아야스), 제이한, 이마모울루, 알라다으 (카르산티), 코잔(시스), 페케 (바흐카), 사임베이리 (하진), 투판베이리2,263,373
오스마니예오스마니예3767km2숨바스, 카디를리 (카르스바자르), 토프라칼레 (탈 함둔), 뒤지치, 오스마니예, 하산베이리, 바흐체553,012
하타이안타키야5524km2에르진, 도르트욜 (초르크 마르즈반), 하사, 이스켄데룬, 아르수즈, 벨렌, 크르크한, 사만다으(수베이디예), 안타키야, 데프네, 레이한르, 쿰루, 야이라다으, 알트뇌쥐1,670,712


7. 교통

킬리키아는 유럽과 중동을 잇는 역사적 경로에 위치하여 두 개의 공항, 두 개의 주요 항구, 고속도로 및 철도망을 갖춘 잘 발달된 교통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아다나 샤키르파샤 공항 (Adana Şakirpaşa Airport)은 국제공항으로 유럽행 항공편을 운항하며,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 안탈리아, 트라브존 등 터키 주요 도시로 가는 국내선 항공편도 매일 운항한다. 이 공항은 메르신 주, 아다나 주, 오스마니예 주를 관할한다.

킬리키아의 철도 연결


2007년에 개장한 하타이 공항 (Hatay Airport)은 국내선 공항으로, 이스탄불, 앙카라, 니코시아, 북키프로스로 가는 항공편을 운항하며 주로 하타이 주를 관할한다.

건설 중인 추쿠로바 지역 공항 (Çukurova Regional Airport)은 완공 시 15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향후 수용 능력이 두 배로 늘어날 예정이다. 후리예트 (Hürriyet) 신문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의 비용은 3.57억유로가 될 것이라고 한다.

터키 타슈주(Taşucu)에서 키프로스 북부 키레니아(Kyrenia)까지 매일 해상 버스와 차량·승객 수송 페리가 운항된다. 메르신(Mersin) 항구에서는 파마구스타(Famagusta)까지 페리 서비스가 있다.

터키의 고속도로 목록#고속도로|O50–O59번 고속도로가 킬리키아를 가로지르며, 북쪽의 니그데(Niğde), 서쪽의 에르데믈리(Erdemli), 동쪽의 샨르우르파(Şanlıurfa), 남쪽의 이스켄데룬(İskenderun)까지 이어진다. 국도 D-400(State road D400 (Turkey))은 킬리키아를 서쪽의 안탈리아와 연결한다. 아다나(Adana)–코잔(Kozan, Adana), 아다나(Adana)–카라타슈(Karataş), 이스켄데룬(İskenderun)–안타키아(Antakya)–알레포(Aleppo)를 잇는 왕복 2차선 도로도 있다.

킬리키아에는 고속도로망과 병행하여 광범위한 철도망이 존재한다. 아다나-메르신 열차는 메르신, 타르수스, 아다나를 잇는 통근열차로 운행되며, 아다나에서 체이한, 오스마니예, 이스켄데룬으로 가는 지역 열차도 있다.

8. 교육

킬리키아 지역에는 여러 대학교가 있다.

대학교명설립 연도구분주 캠퍼스 위치기타 캠퍼스 및 학과
추쿠로바 대학교(Çukurova University)1973년국립아다나(Adana)카라타시(Karataş)(관광 행정학과), 제이한(Ceyhan)(공과대학), 코잔, 카라이살리(Karaisalı), 포잔티(Pozantı), 유무르탈릭(Yumurtalık)(전문학교)
메르신 대학교(Mersin University)1992년국립메르신(Mersin)타르수스(기술 교육 학부, 응용 기술 및 경영 대학), 실리프케(Silifke), 에르데믈리(Erdemli)(대학, 전문학교), 아나무르(Anamur), 아이딘칙, 굴나르(Gülnar), 무트(Mut)(전문학교)
무스타파 케말 대학교(Mustafa Kemal University)1992년국립안타키아(Antakya)이스켄데룬(İskenderun)(공과대학)
코르쿠트 아타 대학교2007년국립오스마니예(Osmaniye)카디를리(Kadirli), 바흐체, 뒤지치(Düziçi), 에르진(전문학교)
아다나 과학기술대학교(Adana Science and Technology University)(최근 설립)국립(정보 없음)(정보 없음)
차그 대학교(Çağ University)1997년사립아다나(Adana)와 타르수스 중간 지점(정보 없음)
토로스 대학교(Toros University)2010년사립메르신(Mersin)(정보 없음)



각 대학교별 학생 수 및 교수진 수는 다음과 같다.


  • 추쿠로바 대학교: 4만 명의 학생[87]
  • 메르신 대학교: 2100명 이상의 교수진, 26,980명의 학생[88]
  • 무스타파 케말 대학교: 708명의 교수진, 14,439명의 학생 (2007년 기준)[89]
  • 코르쿠트 아타 대학교: 107명의 교수진, 4000명의 학생 (2009년 기준)[90]
  • 아다나 과학기술대학교: 1,700명의 교수진과 470명의 행정직원 수용 예정[91]
  • 차그 대학교: 약 2500명의 학생[92]
  • 토로스 대학교: (정보 없음)[93]

9. 주요 도시

킬리키아는 풍부한 자원, 기후, 평야 지형 덕분에 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2022년 12월 31일 기준으로 킬리키아의 인구는 6,435,986명이다.[68]

하타이주는 킬리키아에서 가장 농촌 지역이 많은 주이며, 농촌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 인구는 감소하는 유일한 주이다. 그 주된 이유는 하타이 주의 산악 지형 때문이다.

아다나 주는 가장 도시화된 주이며, 인구 대부분이 아다나 시에 집중되어 있다. 메르신 주는 토러스 산맥과 지중해 사이에 펼쳐진 길고 좁은 평야 지대 때문에 아다나 주보다 농촌 인구가 더 많다.

순위도시인구 (2021년)이미지
1아다나아다나1,797,136--
2메르신메르신1,064,750--
3안타키아하타이555,833
안타키아
4타르수스메르신347,314--
5오스마니예오스마니예279,992
6이스켄데룬하타이250,976
7제이한아다나159,955
8에르데믈리메르신147,512
9코잔아다나132,320
10됴르트욜하타이127,989
11실리프케메르신127,849
12카디를리오스마니예126,941
13사만다으하타이123,999
14크르크한하타이119,854
15레이한르하타이105,309
16아르수즈하타이99,480
17듀지치오스마니예85,118
18아나무르메르신66,828
19무트메르신62,803
20알트느외쥐하타이60,861



위 표의 인구 통계는 터키 통계청의 2021년 자료를 참고했다.[69]

10. 명칭

킬리키아(Κιλικίαgrc)라는 이름은 신아시리아 제국이 훗날 킬리키아가 될 지역의 서쪽을 지칭할 때 사용한 이름인 [3]에서 유래되었다.

영어 표기 'Cilicia'는 그리스어 형태 'Κιλικία'를 직접 음역한 라틴어와 같다. 후기 속라틴어(500년~700년경)에서 서유럽에서 일어난 c의 구개음화는 영어에서의 현대 발음을 설명한다. 그리스 신화의 인물 킬릭스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페니키아 또는 아시리아의 왕자 킬릭(키락)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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