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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카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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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블로 카잘스는 스페인 출신의 첼리스트, 지휘자, 작곡가로, 현대 첼로 연주법을 확립하고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널리 알린 인물이다. 1876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4세에 피아노, 11세에 첼로를 시작했으며, 1899년 파리에서 데뷔했다. 1939년 스페인 내전으로 프랑스로 망명하여 프랑코 정권에 저항하며, 푸에르토리코에서 카잘스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1971년 유엔 본부에서 '새의 노래'를 연주하며 평화를 기원했다. 그는 1973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연주와 음악적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존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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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카살스
기본 정보
1917년 카네기 홀의 카잘스
1917년 카네기 홀의 카잘스
본명빠우 카잘스 이 데필료
로마자 표기Pau Casals i Defilló
출생일1876년 12월 29일
출생지스페인 타라고나 주 엘 벤드렐
사망일1973년 10월 22일
사망지푸에르토리코 하토 레이
직업첼로 연주자
작곡가
지휘자
소속 단체오케스트라 파우 카잘스
카잘스 페스티벌
수상대통령 자유 훈장
활동
악기첼로
분야클래식 음악
관련 인물데필료
기타 정보
웹사이트Fundació Pau Casals
음반사Deutsche Grammophon
참고 자료Classical Notes - Pablo Casals - the Musician and the Man, By Peter Gutmann
UN 연설1971년 10월 25일 UN 연설

2. 생애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출신의 세계적인 첼리스트이자 지휘자, 작곡가이다. 현대 첼로 연주법의 기초를 다졌으며, 특히 바흐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발굴하여 그 음악적 가치를 세상에 알렸다.[51] '첼로의 신'으로 불릴 만큼 후대 첼리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바르셀로나마드리드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다. 1899년 파리에서 데뷔한 이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와 함께 결성한 카살스 삼중주단은 실내악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1919년에는 고향에 바르셀로나 관현악단을 창립하여 지휘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51]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과 프랑코 정권 수립 이후, 공화정 지지자였던 카살스는 독재에 항거하여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프랑스 남부 프라드에 정착하여 프랑코 정권을 인정하는 국가에서의 연주를 거부하는 등 음악을 통한 저항을 이어갔다. 1950년부터는 프라드에서 매년 카살스 음악제를 열었으며, 이는 많은 음악가들이 모이는 중요한 행사가 되었다.[51]

말년에는 어머니와 아내의 고향인 푸에르토리코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푸에르토리코에서도 카살스 음악제와 카살스 첼로 콩쿠르를 열고 푸에르토리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푸에르토리코 음악원을 설립하는 등 음악 발전에 기여했다.[51] 또한 평화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71년에는 유엔 본부에서 연주하고 유엔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51] 작곡가로서 만년에는 오라토리오 El Pessebre|엘 페세브레ca(구유)를 남겼다.[51] 1973년 푸에르토리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고향 엘 벤드렐에 안장되었다.[51]

2. 1. 유년기와 초기 활동

파블로 카살스는 1876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타라고나 주의 엘 벤드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카를레스 카살스 이 리베스는 교구 오르가니스트이자 지휘자였으며, 아들에게 피아노, 작곡, 바이올린, 오르간 등 초기 음악 교육을 시켰다. 카살스는 매우 어린 나이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는데, 네 살 때 이미 바이올린, 피아노, 플루트를 연주할 수 있었고, 여섯 살에는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으며 '마주르카'를 작곡하기도 했다. 아홉 살에는 오르간을 시작했다.

그가 첼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열한 살 때, 카탈루냐 음악을 연주하는 한 거리 음악가가 첼로 현을 매단 빗자루 자루를 연주하는 것을 본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첼로를 만들어 달라고 졸랐고, 아버지는 표주박을 이용해 손수 첼로를 만들어 주었다. 이후 진짜 첼로 연주를 듣고 첼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1888년, 그의 어머니 필라르 데필료 아미구엣[6][7]은 아들의 교육을 위해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여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 입학시켰다.[6] 카살스는 그곳에서 첼로(호세 가르시아 사사), 음악 이론, 피아노, 작곡(호세 로드레다 사사)을 공부했다. 입학 후 반년 만에 카페에서 첼로를 연주하며 어린 나이에도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890년, 열세 살의 카살스는 바르셀로나의 한 헌책방에서 바흐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는 이 곡에 매료되어 이후 13년 동안 매일 연습했으며, 이는 훗날 그의 중요한 업적 중 하나가 된다.[8] 그는 1891년 2월 23일, 열네 살의 나이로 바르셀로나에서 첫 독주회를 열었고, 5년 후인 1896년에는 음악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라몬 카사스(Ramon Casas)가 그린 젊은 파우 카잘스


1893년, 스페인 작곡가 이사크 알베니스는 카페에서 카살스의 트리오 연주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아, 스페인 여왕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비서관인 기예르모 모피 백작에게 추천서를 써주었다. 이를 계기로 카살스는 궁정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었고, 마드리드 왕립 음악원에서 빅토르 미레키 라라마트에게 작곡을 배울 수 있는 왕실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마드리드에서 그는 새로 조직된 현악사중주 협회에서도 활동했다.

1895년, 카살스는 파리로 갔으나, 장학금을 잃은 후 폴리 마르니 극장 오케스트라에서 제2 첼로 주자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896년 스페인으로 돌아온 그는 스무 살의 나이에 모교인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의 교수직과 리세우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리스트로 임명되었다. 1897년에는 마드리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솔리스트로서의 입지를 다졌고, 스페인 여왕으로부터 카를로스 3세 훈장을 수여받았다.

카살스의 국제적인 활동은 1899년 파리 데뷔를 시작으로 본격화되었다. 1904년에는 13년간 홀로 연습해 온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처음으로 공개 연주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05년에는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와 함께 유명한 '카살스 삼중주단'을 결성하여 실내악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08년에는 파리의 콘세르 라무르 관현악단 연주회에서 지휘자 겸 독주자로 나서며 지휘자로서의 경력도 시작했다.

2. 2. 국제적인 경력



1893년, 스페인 작곡가 이사크 알베니스는 한 카페에서 카살스의 트리오 연주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아, 당시 스페인 여왕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비서관인 기예르모 모피 백작에게 그를 소개하는 편지를 써주었다. 이를 계기로 카살스는 궁정에서 비공식 연주회를 열 기회를 얻었고, 마드리드 왕립 음악원에서 빅토르 미레키에게 작곡을 배울 수 있도록 왕실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그는 새로 조직된 현악사중주 협회에서도 연주 활동을 했다.

1895년 파리로 건너갔으나 장학금이 끊기면서 생계를 위해 폴리 마르니 극장 오케스트라의 제2 첼로 주자로 일하기도 했다. 1896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Escola Municipal de Música)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바르셀로나 오페라 극장인 리세우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리스트가 되었다. 1897년에는 마드리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솔리스트로서의 입지를 다졌고, 여왕으로부터 카를로스 3세 훈장을 수여받았다.

1899년은 카살스의 국제적인 경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였다. 그는 런던의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연주했고, 이후 빅토리아 여왕의 여름 별장인 오스본 하우스에서 어니스트 워커의 반주로 여왕 앞에서 연주하는 영광을 누렸다. 같은 해 11월과 12월에는 파리의 유명한 라무뢰 콘서트(Lamoureux Concerts)에서 솔리스트로 무대에 올라 대중과 비평가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으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카살스는 활발한 순회 공연을 통해 세계적인 연주자로 발돋움했다. 1900년부터 1901년까지 피아니스트 해럴드 바우어와 함께 스페인과 네덜란드를 순회했으며, 1901-1902년에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순회 공연을 가졌다. 1903년에는 남아메리카를 순회하며 그의 음악 세계를 넓혔다.

1904년 1월 15일, 카살스는 백악관에 초청받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앞에서 연주했다. 같은 해 3월 9일에는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지휘 아래 그의 작품 ''돈 키호테''를 연주하며 미국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또한 이 해에 그는 오랫동안 악보로만 접했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을 처음으로 공개 연주하여, 이 작품의 가치를 세상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1905년에는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와 함께 역사적인 '카살스 삼중주단'을 결성하여 1937년까지 함께 연주하며 실내악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06년에는 재능 있는 포르투갈 출신의 젊은 첼리스트 길헤르미나 수지아와 인연을 맺고 그녀를 가르쳤으며, 한동안 '마담 P. 카잘스-수지아'라는 이름으로 함께 연주 활동을 했으나 1912년 관계를 정리했다.[10]

1908년 파리의 콘세르 라무뢰 관현악단 연주회에 지휘자 겸 독주자로 출연하면서 지휘자로서의 경력도 시작했다. 1911년 뉴욕 타임스는 카살스가 런던 음악 축제에서 요제프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D장조를 연주하고, 프리츠 크라이슬러와 함께 요하네스 브람스이중 협주곡을 협연할 것이라고 보도했다.[4]

1914년, 카살스는 미국의 사교계 명사이자 가수인 수잔 메트칼프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928년에 별거에 들어갔으나, 법적인 이혼은 1957년에 이루어졌다.

카살스는 1915년 컬럼비아 레코드를 통해 처음 음반 녹음을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녹음 활동은 1926년 빅터 레이블과 계약하면서부터였다.[5]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1919년 고향 카탈루냐로 돌아온 카살스는 바르셀로나에 파우 카잘스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고 지휘 활동에 더욱 힘썼다. 오케스트라는 1920년 10월 13일 첫 연주회를 가졌으며, 카살스는 이를 통해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1931년에는 카탈루냐 자치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자신이 창단한 오케스트라와 지역 합창단을 이끌고 베토벤교향곡 9번 '합창'을 지휘하며 카탈루냐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했다.

1963년 수여받은 미국의 자유의 대통령 메달


그러나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고 프랑코 정권이 들어서자, 스페인 공화정부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카살스는 큰 시련을 맞게 된다. 파우 카잘스 오케스트라는 활동을 중단해야 했고, 카살스는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조국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38년 10월 19일 바르셀로나 리세우에서의 공연은 그의 망명 전 마지막 스페인 연주가 되었다.[11]

1939년, 그는 스페인 국경과 가까운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프라드[12]에 정착했다.[13]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프랑스 남부 비점령 지역과 스위스 등지에서 간헐적으로 연주 활동을 했으나, 프랑코 정권에 대한 확고한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프랑코 정권 언론은 그를 조롱했으며, 정치적 신념 때문에 백만 페세타의 벌금을 부과받기도 했다.[14] 그는 프랑코 독재 정권을 인정하는 국가에서는 연주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전후 1945년 6월 연주 활동을 재개했지만, 각국 정부가 프랑코 정권을 용인하는 것에 항의하며 그해 11월 다시 연주 활동을 중단했다. 이러한 침묵은 1950년,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산더 슈나이더의 설득으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는 프라드 음악제가 열리면서 깨지게 된다. 카살스는 음악제의 음악 감독을 맡았고, 수익금 전액을 인근 페르피냥의 스페인 난민 병원에 기부하는 조건으로 참여했다.[5] 이 음악제는 이후 매년 열리며 세계적인 음악 축제로 자리 잡았다.

1955년, 카살스는 어머니의 고향이자 훗날 아내가 된 마르타 마르토렐(Marta Montañez y Martinez)의 고향인 푸에르토리코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이곳에서도 카살스 음악제와 카살스 첼로 콩쿠르를 창설하며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정치적 신념에 따른 연주 거부 원칙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다. 1961년 11월 13일, 그는 평소 존경했던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들여 백악관에서 실내악 연주회를 가졌다. 이는 그의 신념과 예술가로서의 교류 사이의 중요한 순간으로 기록된다. 1963년 12월 6일, 카살스는 미국 정부로부터 자유의 대통령 메달을 수여받으며 그의 인도주의적 활동과 예술적 공헌을 인정받았다.

1971년 10월 24일 유엔의 날에는 뉴욕 유엔 본부에서 특별 연주회를 열고 유엔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카탈루냐 민요 '새의 노래'(El Cant dels Ocellsca)를 연주하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카살스는 그의 긴 연주 경력 대부분 동안 1733년산 카를로 토노니 제작으로 알려진 첼로를 사용했다. 그러나 50년 가까이 사용한 후, 이 악기는 실제로는 1700년경 베네치아의 루티에 마테오 고프릴러가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카살스는 이 악기를 1913년에 구입했다.[15] 그는 또한 1710년산 고프릴러 첼로와 1730년산 토노니 첼로도 소유하고 연주했다.

1973년, 카살스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고향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알 벤드레이 묘지에 안장되었다.

2. 3. 망명과 저항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카살스1939년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이후 생애 동안 프랑코 독재 정권에 대한 항의와 반파시즘 입장을 확고히 지켰다. 이러한 신념은 나치 독일에 협력적인 태도를 보인 코르토와의 결별[46]과 카살스 삼중주단의 해산으로 이어졌다.

스페인 내전을 피해 1939년 스페인 국경 근처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프라드에 정착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45년 6월부터 연주 활동을 잠시 재개했으나, 여러 나라 정부들이 프랑코 정권을 사실상 인정하는 것에 실망하여 같은 해 11월부터 공개적인 연주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첼리스트들이 카살스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프라드를 찾았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모리스 장드롱, 앙드레 나바라 등이 있으며, 일본 출신으로는 사토 요시오, 히라이 조이치로, 이와사키 코, 우에다 신지 등이 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함께 핵실험 금지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47년,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산더 슈나이더[47]가 카살스를 찾아와 미국 공연을 제안했지만, 카살스는 프랑코 정권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이를 거절했다. 슈나이더는 포기하지 않고 카살스와 친분이 있던 피아니스트 미에치스와프 호르쇼프스키와 상의했다. 카살스를 직접 무대에 세우기는 어렵지만, 다른 음악가들이 프라드로 모여 함께 연주하는 방식이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50년, 슈나이더는 미국 컬럼비아 레코드사의 자금 지원을 받아 프라드에서 바흐 서거 200주년 기념 음악제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고, 카살스를 음악 감독으로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프라도 음악제의 시작이며, 이 음악제 실황은 컬럼비아 레코드에 의해 LP로 녹음되었다. 프라도 음악제는 매년 개최되었으나, 컬럼비아사의 자금 문제와 운영 방침, 그리고 카살스를 포함한 연주자들 간의 의견 차이 등으로 점차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48]

1955년 카살스는 어머니와 아내 마르타의 고향인 푸에르토리코로 거처를 옮겼고, 1957년부터는 그곳에서 직접 카살스 음악제를 개최했다. 1960년부터는 루돌프 젤킨이 주최하는 미국 마블러 음악제에 참여하여 연주자이자 지휘자로서 활동하며 녹음도 남겼다.

1971년 10월 24일, 유엔의 날을 맞아 뉴욕 유엔 본부에서 특별 연주회를 열었으며, 이 자리에서 유엔 평화상을 수상했다.

2. 4. 푸에르토리코 시대

1955년, 카살스는 어머니의 고향이자 훗날 아내가 되는 마르타의 고향이기도 한 푸에르토리코를 여러 차례 방문했으며[51], 이곳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기로 결정했다.[5] 같은 해,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프란체스카 비달 이 푸히(Francesca Vidal i Puigca)와 재혼했으나 그녀는 같은 해에 사망했다.[16] 이듬해인 1956년부터 푸에르토리코에서 매년 카살스 페스티벌을 개최하기 시작했다.[16]

1957년, 80세의 카살스는 20세의 마르타 몬타네스 이 마르티네스(Marta Montañez y Martinez)와 결혼했다.[16] 그는 자신보다 60세나 어린 여성과의 결혼에 대한 우려를 "제 생각에는 이렇습니다. 그녀가 죽으면 죽는 거죠."라고 일축했다고 전해진다.[17][18] 부부는 세이바 마을에 "엘 페세브레"(El Pessebre||구유ca)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정착했다.[19] 카살스는 푸에르토리코 음악계 발전에 크게 기여했는데, 1958년 푸에르토리코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설하고[19] 1959년에는 푸에르토리코 음악원을 설립했다.[19] 또한 1958년 다큐멘터리 영화 《윈드재머》(Windjammer)에 출연하기도 했다.[51]

1960년대에는 스위스 그슈타트, 체르마트, 이탈리아 토스카나, 미국 버클리, 말버러 등 세계 각지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열었으며, 이 중 일부는 텔레비전으로 방송되었다.[51] 1961년 11월 13일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 동관에서 푸에르토리코 주지사 루이스 무뇨스 마린을 위한 만찬에서 연주했다. 이 연주는 녹음되어 앨범으로 발매되었다.[51]

작곡가로서 카살스는 만년에 오라토리오 《엘 페세브레》(El Pessebre||구유ca)를 작곡하여 1960년 12월 17일 멕시코 아카풀코에서 초연했다.[51] 그는 1963년 유엔 창립 기념일에 이 작품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51] 1963년에는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의 파이 뮤 알파 신포니아 음악 친목회 엡실론 아이오타 지부 명예 회원으로 추대되었고[20], 1973년에는 이 단체의 찰스 E. 루턴 음악인상을 수상했다.[20]

그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는 "유엔 찬가"(Hymn of the United Nations영어)였다.[21] 1971년 10월 24일, 95세 생일을 두 달 앞두고 유엔 본부에서 열린 특별 콘서트에서 이 곡을 지휘했다.[51] 같은 날, 우 탄 유엔 사무총장은 평화, 정의, 자유를 위한 그의 노력을 기리며 카살스에게 유엔 평화 메달을 수여했다.[22] 카살스는 메달을 받은 후 유명한 "나는 카탈루냐인이다" 연설[23]을 통해 카탈루냐영국보다 훨씬 이전에 최초의 민주적인 의회를 가졌다고 말했다.[23]

1970년에는 앨버트 E. 카한이 기록한 그의 회고록 《기쁨과 슬픔: 파블로 카살스, 그의 이야기》(Joys and Sorrows: Pablo Casals, His Own Story영어)가 출판되었다.[51]

1973년, 친구인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의 초청으로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예루살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51] 미쉬케노트 샤아나님의 예루살렘 음악 센터는 그의 사망 직전에 개관되었다.[24] 예루살렘 칸 극장에서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콘서트가 그의 생애 마지막 콘서트였다.[25]

카살스는 1973년 푸에르토리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51]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고향인 스페인 알벤드레이의 묘지에 안장되었다.[51]

2. 5. 사망

카살스는 1973년 푸에르토리코 하토 레이의 옥실리오 무투오 병원에서 3주 전에 겪었던 심장마비 합병증으로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6][27] 그의 유해는 처음에 푸에르토리코 카롤리나의 푸에르토리코 기념묘지에 안장되었다.[26][27]

그는 자신이 평생 반대했던 프랑코 독재 정권이 2년 뒤에야 종식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프랑코 사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1976년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 치하의 스페인 정부는 카살스의 명예를 회복시켰고,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28] 1979년에는 그의 유해가 고향인 스페인 카탈루냐 타라고나주 엘 벤드렐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1989년 카살스는 사후에 그래미 평생업적상을 수상했다.[29]

3. 첼로 연주법 개혁

파블로 카살스는 현대 첼로 연주법의 기초를 다진 역사적인 명연주가로 평가받는다.[51] 그는 '첼로의 신'으로 불리며 후대의 모든 첼리스트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카살스는 12세에 첼로를 배우기 시작하며 당시의 전통적인 연주법에 의문을 갖고, 보다 자연스럽고 표현력이 풍부한 연주 방식을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첼로 연주 기법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20세기 첼로 음악 레퍼토리 확장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44]

3. 1. 기존 연주법의 문제점

카살스는 12세에 바르셀로나 시립음악원에서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으나, 스승인 호세 가르시아(Jose Garcia)에게 배운 당시의 일반적인 첼로 연주법에 처음부터 의문을 가졌다. 그는 곧 독자적인 연주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첼로 연주자들은 양 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이는 매우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자세로 연주해야 했다. 이 자세 때문에 오른손은 손목을 약간 들어 올린 채 팔뚝(전완)만으로 활을 움직여야 했고, 왼손은 손가락 사이를 충분히 벌리지 못하고 미끄러뜨리듯이 음정을 이동시키는 제한적인 방식으로 연주했다. 이러한 경직된 연주법은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Josef Joachim) 문하생들의 바이올린 연주법을 기계적으로 모방한 결과로 여겨진다.

3. 2. 카살스의 개혁

카살스는 12세에 바르셀로나 시립음악원에서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스승 호세 가르시아(Jose Garcia)에게 배운 기존 연주법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첼로 연주자들은 양팔꿈치를 옆구리에 붙인 불편한 자세로 연주했다. 이 자세에서는 오른손은 손목을 살짝 들고 팔뚝(전완)만을 이용해 활을 움직였고, 왼손은 손가락 사이를 넓히지 않고 미끄러지듯 이동하며 음정을 잡았다. 이는 요제프 요아힘(Josef Joachim) 문하의 바이올린 연주법을 기계적으로 따라 한 것으로 보인다.

카살스는 이러한 방식에 변화를 주었다. 오른손을 옆구리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여 활을 사용한 표현의 폭을 넓혔다. 또한 왼손도 옆구리에서 떼어내 손가락 간격을 넓힘으로써, 같은 포지션에서도 반음 더 넓은 음역을 연주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새로운 주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카살스는 앙리 뷔탕(Henri Vieuxtemps)이나 외젠 이자이(Eugène Ysaÿe) 같은 프랑코-벨기에 악파 바이올린 연주자들의 방식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새로운 연주법을 완전히 정립하기까지는 약 11년에서 12년이 걸렸다. 카살스 자신은 이를 '연주법 혁명'이나 '개혁'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는 기교 자체보다는 음악적인 완전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필요했던 변화라고 설명했다.

카살스의 이러한 연주법 개선은 첼로 연주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만약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20세기에 작곡된 많은 첼로 독주곡들이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카살스가 제시한 새로운 연주법을 초기에 받아들여 실천한 연주자로는 길레르미나 수지아(Guillermina Suggia)가 있다.[44]

4. '표현하는 음정'

카살스의 연주는 기호(반음 높게)가 붙은 음이 반음보다 더 높고, 플랫 기호(반음 낮게)가 붙은 음이 더 낮은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또한, 음정이 부정확하고 현대와 비교하면 기교적으로는 구시대적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하지만 카살스 본인은 음정도 표현의 수단이며, 같은 음계라도 상승할 때와 하강할 때는 다른 음정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카살스는 이러한 음정의 차이를 충분히 인지하고 표현을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이다.[45]

5. 정치적 입장과 사회 활동

카살스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이후 생애 동안 프랑코 독재 정권에 대한 항의와 반파시즘 입장을 확고히 지켰다. 이러한 신념은 나치 독일에 협력적인 태도를 보였던 알프레드 코르토와의 결별[46] 및 카살스 삼중주단의 해산으로 이어졌다.

스페인 내전을 피해 1939년에는 프랑스 남부의 프라드로 거처를 옮겼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45년에 잠시 연주 활동을 재개했으나, 여러 나라 정부들이 프랑코 정권을 용인하는 모습에 실망하여 공개 연주 활동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이 시기 동안 많은 첼리스트들이 카살스에게 직접 배우기 위해 프라드를 찾았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모리스 장드롱, 앙드레 나바라 등이 있으며, 일본인 제자들도 있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와 함께 핵실험 금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사회 활동에도 힘썼다.

6. 카탈루냐와 '새의 노래'

카살스가 카탈루냐 민요인 『새의 노래』(El Cant dels Ocellsca)를 연주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곡에는 그의 고향 카탈루냐에 대한 그리움과 평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으며, 이후 카살스가 즐겨 연주하는 대표적인 곡이 되었다.

특히 1971년 10월 24일, 94세의 카살스가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연주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그는 연주에 앞서 "제 고향 카탈루냐의 새들은 '피스, 피스'(Peace, Peace), 즉 평화라고 노래합니다."라고 말한 뒤 『새의 노래』를 첼로로 연주했다. 이 감동적인 연주는 녹음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진다.[49]

한편, 일본의 첼리스트 덕영겸일랑(徳永兼一郎)은 1996년 55세의 나이로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호스피스에서 열린 작은 연주회에서 이 곡을 연주하며 자신의 마지막 연주로 삼기도 했다.[50]

7. 사용 악기

현악기 명기로 꼽히는 스트라디바리우스( Stradivarius|스트라디바리우스영어 )이지만, 카살스는 "내게는 너무 과분하다", "(음색이) 내게 맞지 않는다"라며 사용하지 않았고, 마테오 고프릴러가 1733년에 제작한 첼로를 애용했다.

카살스 사후, 그가 사용했던 고프릴러 첼로는 안토니오 메네세스, 안느 가스티넬, 아미트 펠레드 등이 사용했다. 그 외에도 카살스 콩쿠르 우승자인 첼리스트 온차이 차바도 고프릴러 첼로를 애용하고 있으며, '현대의 카살스'라고 평가받고 있다.

8. 유산

파블로 카살스는 현대 첼로 연주법을 확립한 역사적인 명연주가로 평가받는다.[51] 특히 바흐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진가를 세상에 처음 알린 공적이 매우 크다.[51] 이러한 업적으로 '첼로의 신'이라 불리기도 하며, 현대의 거의 모든 첼리스트는 직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51]

그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 출신으로, 호세 가르시아에게 사사했다.[51] 연주 활동 외에도 1919년 바르셀로나 관현악단을 창립하여 지휘자로도 활약했으며,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와 함께 결성한 카살스 삼중주단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실내악단 중 하나로 꼽힌다.[51]

1936년 스페인 내전 이후 들어선 프랑코의 독재 정권에 반대하여 스페인을 떠나 망명 생활을 했다.[51] 1950년부터는 프랑스 남부의 프라드에 정착하여 매년 카살스 음악제를 열었다.[51] 말년에는 미국 자치령인 푸에르토리코로 이주하여 그곳에서도 카살스 음악제와 파블로 카살스 국제 첼로 콩쿠르를 개최했다.[51] 이 시기에는 독일 의 베토벤의 집이나 UN 본부에서의 특별 연주회, 말보로 음악제 등 극히 제한적인 무대에만 올랐다.[51]

또한 작곡가로서도 활동하여 만년에는 오라토리오 《El Pessebre》( El Pessebre|엘 페세브레cat, '구유')를 작곡하기도 했다.[51]

9. 참고: 주요 음반


파우 카잘스 흉상, 볼펜뷔텔, 독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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