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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낭 멘드스 핀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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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낭 멘드스 핀투는 16세기 포르투갈의 탐험가이자 작가로, 그의 회고록인 《순례기》는 동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겪은 모험을 담고 있다. 그는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 등을 여행하며 다양한 경험을 했으나, 그의 기록은 과장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순례기》는 사후인 1614년에 출판되었으며, 동시대의 포르투갈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핀투는 일본에 조총을 처음으로 도입했다는 주장을 제기했으나, 역사적 사실 여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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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낭 멘드스 핀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페르낭 멘데스 핀투
원어 이름Fernão Mendes Pinto
로마자 표기Peureunang Mendeu Seu Pintu
직업탐험가 및 작가
국적포르투갈
출생1509년
출생지포르투갈 왕국 몬테모르-오-벨류
사망1583년 7월 8일
사망지포르투갈 왕국 알마다 프라갈
업적
알려진 작품순례

2. 생애

페르낭 멘드스 핀투는 1509년경(1510년 설도 있음) 포르투갈 몬테모르-오-벨루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으며, 최소 두 명의 형제와 두 명의 자매가 있었다. 핀투는 유대인이며, 마라노(새 기독교도)라는 설도 있다.[13] 핀투 가문은 원래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의 핀투 마을 출신으로, 후에 박해를 피해 포르투갈, 모로코, 카나리아 제도 등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1551년에 그의 남동생 알베로가 말라카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다른 서신에서는 핀투의 형제 중 한 명이 말라카에서 순교했다는 내용이 있다. 1557년에는 코친에 부유한 사촌 프란시스쿠 가르시아 데 발가스가 있었다.

1521년, 핀투는 리스본에서 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의 아들이자 몬테모르오벨류의 영주였던 조르지 공의 밑에서 일했다. 2년 후, 프란시스쿠 드 파리아를 섬기기 위해 세투발로 출항했지만, 프랑스 해적에게 습격당해 알렌테주 해안에 버려졌다. 이후 산티아고 기사단 기사인 프란시스쿠 드 파리아의 종으로 4년간 있었고, 성 야고보 기사단 단장이자 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의 서자였던 조르제 드 렌카스트르의 종이 되었다. 28세에 포르투갈령 인도 함대에 합류하기 위해 떠났다.

2. 1. 초기 생애

핀투는 1509년경 포르투갈 몬테모르-오-벨루에서 가난한 농가 출신이거나 몰락한 소귀족 가문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핀투는 최소 두 명의 형제와 두 명의 자매를 두었다. 1551년, 형제인 알바로가 포르투갈령 말라카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편지에는 또 다른 형제가 말라카에서 순교했다는 기록도 있다. 1557년, 핀투의 부유한 사촌인 프란시스쿠 가르시아 드 바르가스가 코친에 있었다.[13]

그는 유대인 마라노의 후손인 부유한 멘데스 가문과 친척 관계였다. 그들은 포르투갈에서 흑후추 무역을 독점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나중에 벨기에 앤트워프로 이주했다.

핀투는 어린 시절을 검소했다고 묘사했다. 1521년, 삼촌은 소년의 앞날을 위해 그를 리스본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핀투는 귀부인의 집에서 하인으로 일했다. 18개월 정도 지난 후 핀투는 도망쳤다. 부두에서 그는 세투발로 가는 화물선의 선원으로 고용되었다. 가는 길에 프랑스 해적이 배를 나포했고, 승객들은 알렌테주 해안에 버려졌다.

핀투는 결국 세투발로 가서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인 프란시스쿠 드 파리아의 종이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4년 동안 머물렀고, 그 후 성 야고보 기사단의 단장이자 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의 서자였던 조르제 드 렌카스트르의 종이 되었다. 핀투는 수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2. 2. 항해와 탐험

핀투의 여행은 크게 세 가지 여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포르투갈에서 인도까지, 두 번째는 홍해페르시아만을 거쳐 동인도, 수마트라, , 중국, 일본까지, 마지막은 유럽으로의 귀환이다.[1]

핀투는 인도, 말라카, 동아시아, 마르타반, 자바, 시암 등지를 탐험했다. 말레이 반도 파타니에서 으로 상품을 운반하려다 해적에게 약탈당하는 등 남중국해통킹만에서 험난한 무역 활동을 했다. 황해를 통해 중국에 들어가 중국 황제의 무덤을 약탈하다 체포되어 만리장성에서 강제 노역을 하기도 했다. 타타르인의 포로가 되었다가 코친차이나를 여행하고, 달라이 라마로 추정되는 인물을 만나기도 했다.

규슈 남쪽 다네가시마 섬에서 난파된 핀투는 조총을 일본에 소개했다고 주장했지만, 안토니우 모타와 프란시스쿠 제이모투를 포함한 다른 포르투갈 상인들이 이미 1년 전에 일본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2] 핀투가 소개했다고 알려진 총기는 센고쿠 시대 일본 내전에서 사용된 다네가시마로 복제되었다.

이후 핀투는 마르타반에서 포위 공격을 경험하고, 반탐에서 후추를 사오라는 임무를 수행하다 난파되는 등 여러 차례 위험을 겪었다. 인육 섭취를 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술라웨시 상인에게 팔렸다가 순다 왕국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핀투는 에서 샴 국왕과 전쟁을 겪었고, 이후 샴의 왕위 계승 분쟁에도 휘말렸다.

2. 2. 1. 인도 항해

1537년 3월 11일, 핀투는 포르투갈령 모잠비크를 거쳐 리스본에서 인도로 출발했다. 그해 9월 5일, 봄베이 북서쪽의 요새화된 섬이자 도시인 디우에 도착했다.[1] 1535년부터 포르투갈령이었으나, 술레이만 대제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다.[1]

핀투는 에티오피아를 경유하여 홍해로 가는 포르투갈 정찰 임무에 합류했다.[1] 이 임무는 산악 요새에서 프레스터 존(다윗 2세)의 어머니를 경비하는 포르투갈 군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었다.[1] 마사와를 떠난 후, 세 척의 터키 갤리선과 전투를 벌였고,[1] 포르투갈 함선은 패배하여 선원들은 노예로 팔리기 위해 모카로 끌려갔다.[1]

핀투는 잔혹한 주인이었던 그리스 출신 무슬림에게 팔렸다.[1] 핀투는 자살하겠다고 위협했고, 약 30두카트 상당의 대추야자유대인 상인에게 팔렸다.[1] 유대인 상인과 함께 핀투는 카라반 길을 따라 페르시아만의 주요 시장 도시인 호르무즈로 여행했다.[1] 그곳에서 핀투는 포르투갈 왕실로부터 300두카트를 지불받아 풀려났다.[1] 그는 호르무즈 요새의 사령관이 되었고, 포르투갈 국왕의 인도 문제 특별 판사가 되었다.[1]

석방된 직후 핀투는 포르투갈 화물선을 타고 고아로 항해했다.[1] 핀투는 본인의 의지와는 달리, 무굴 제국의 항구 도시인 데발(현재의 카라치) 근처 타타로 향하는 해군 함대로 이송되었다.[1] 오스만 제국 함대와의 전투를 겪은 후 핀투는 고아에 도착했다.[1]

2. 2. 2. 말라카와 동아시아 탐험

1539년부터 핀투는 말라카에서 페드루 드 파리아 사령관 휘하에 있었다. 핀투는 북수마트라의 무슬림에 대항하여 포르투갈과 동맹을 맺은 작은 왕국들과 외교 관계를 맺는 임무를 맡았다. 1569년에는 아체에서 쿠르토글루 흐즈르 레이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 함대를 발견했다.[2]

핀투는 수마트라 임무를 마친 후 말레이 반도 동쪽에 위치한 파타니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시암으로 상품을 운반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상품은 해적에게 약탈당했다. 핀투와 안토니우 드 파리아는 해적을 추격하며 남중국해, 특히 통킹만에서 무역 활동을 계속했다.[11]

핀투는 황해를 통해 중국에 들어가 중국 황제의 무덤을 약탈했다. 이후 난파되어 중국인들에게 체포되었고, 만리장성에서 1년간 강제 노역형을 선고받았다. 형기를 마치기 전, 침략한 타타르인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는 타타르인의 첩자가 되어 그들과 함께 오늘날 캄보디아베트남의 최남단 지역인 코친차이나로 여행했다. 핀투는 유럽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교황과 같은" 인물, 아마도 달라이 라마일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과의 만남을 묘사하고 있다. 핀투와 두 명의 동료는 중국 해적 정크로 배를 갈아탔으나, 규슈 남쪽 다네가시마 섬에서 난파되었다.[14]

핀투는 1543년에 자신이 일본에 상륙한 것이 유럽인 최초라고 주장하며, 조총을 일본에 소개했다고 주장했다.[8][15] 그러나 현재는 안토니우 모타와 프란시스쿠 제이모투를 포함한 여러 포르투갈 상인들이 1년 전에 일본을 방문했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진다.[2] 이 총기는 복제되어 센고쿠 시대 일본 내전에서 사용되었으며, 다네가시마로 알려졌다.

핀투는 포르투갈과 일본 간의 무역을 촉진했다. 그는 류큐 열도에서 난파되기도 했다. 1549년 핀투는 일본인 도망자 안지로와 함께 가고시마를 떠났다. 그는 가톨릭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다. 1554년 핀투는 예수회에 입회하여 자신의 무역 재산 중 상당액을 선교부에 기부했다. 분고의 ''다이묘'' 오토모 요시시게는 편지에서 개종 의사를 밝히고 핀투의 귀환을 요청했다. 이 편지는 하비에르의 시신이 고아에서 전시될 때 도착했다. 오토모는 당시 내부적인 어려움으로 개종하지 않았지만, 핀투가 자서전을 완성할 즈음에 개종했다. 1554년부터 1556년 사이에 핀투는 하비에르의 후임자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는 규슈 섬 분고 다이묘에게 포르투갈령 인도 부왕의 대사가 되었다. 일본에서 교회를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핀투는 1557년 예수회를 떠났다.[16][17]

2. 2. 3. 마르타반과 자바에서의 모험

핀투는 말라카로 돌아와 마르타반으로 보내졌다. 그는 포위 공격이 한창일 때 도착하여 총독을 배신한 포르투갈 용병 캠프에 피신했다. 핀투 역시 용병에게 배신당해 버마인에게 붙잡혀 왕의 재무관에게 넘겨졌고, 재무관은 그를 칼라민함 왕국으로 데려갔다. 핀투는 고아로 도망쳤다.[4]

고아로 돌아온 후, 파리아는 핀투를 반탐, 자바에 보내 중국에 판매할 후추를 사오게 했다. 핀투는 다시 한번 난파되었다. 그는 자바의 늪지대 해안에서 탈출하기 위해 노예가 되기 전에 인육 섭취를 했을 수도 있다. 핀투는 술라웨시 상인에게 팔려 칼라파 왕에게 다시 팔렸고, 그는 그를 순다 왕국으로 돌려보냈다.[5]

2. 2. 4. 시암에서의 용병 활동과 왕위 계승 분쟁

핀투는 돈을 빌려 으로 가는 배를 탔으며, 그곳에서 샴 국왕과 전쟁을 만났다. 이후 핀투는 다시 자바를 떠나 파타네와 시암행 배에 아는 사람에게 운임을 지불받고 탔다. 시암의 오디아 (현·태국, 아유타야)의 왕 (차이 라차 티랏)은 시아마이 (현·태국, 치앙마이)를 공격하기 위해 포르투갈인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핀투도 시아마이로 원정을 가서 이기고 돌아왔지만, 오디아 국왕의 왕비 (시 스리다 찬)이 간통 사실이 발각될 것을 두려워해 국왕을 독살했다. 그 후 이 왕비는 자신의 아들마저 죽이고, 애인 (워라웡사)을 왕위에 올렸지만, 이 왕도 살해당했다. 이 정세 불안을 틈타 브라마 왕 (타빈 슈웨티)은 아유타야를 공격했다.

아유타야 유적

2. 3. 포르투갈 귀환과 《순례기》 집필

1558년 9월 22일, 핀투는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1555년 예수회에서 그의 편지 중 하나를 출판하면서 서유럽에서 그의 명성이 높아졌다.[1] 핀투는 1562년부터 1566년까지 궁정에 머물면서 국왕에게 봉사한 대가로 보상이나 배상을 받으려 했다.[1] 그는 마리아 코레이아 바레토와 결혼하여 적어도 두 딸을 두었다.[1] 1562년, 그는 프라갈에 농장을 구입했다.[1] 핀투는 1583년 7월 8일 자신의 농장에서 사망했다.[1]

3. 《순례기》

핀투의 『순례기』(''Peregrinação''pt)는 1614년 그의 사후에 출판된 회고록이다. 이 책은 핀투가 리스본을 출발하여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를 거쳐 동남아시아를 여행하고, 중국일본까지 방문하며 겪은 모험을 담고 있지만, 그 내용의 진위 여부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3] 그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일본 선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예수회에 입회했다가 탈퇴한 이력도 있다.

『순례기』에는 핀투가 일본에 조총을 처음 전래했다는 주장이 담겨 있지만, 이는 확실하지 않다.[10][8] 또한, "13번 생포되고, 17번 팔려갔다"는 등 과장된 묘사도 있어, 핀투는 거짓말쟁이로 불리기도 했다. 실제로 포르투갈어에는 핀투의 이름을 이용한 "Fernão, Mentes? Minto!" (페르낭, 거짓말했나? 거짓말했어!)라는 말장난이 있을 정도이다.[12]

핀투는 『순례기』에서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식민주의기독교 포교로 위장한 것이라고 비판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참신한 견해였다.[11] 그러나 출판된 『순례기』는 원고와 비교했을 때 예수회 관련 내용이 삭제되는 등 수정된 부분이 있어,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남아있다.

3. 1. 내용과 구성

핀투는 1569년에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1614년 프라이 벨키오르 파리아에 의해 사후 출판되었다. 핀투는 동시대 작가들과 같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고대나 르네상스의 미학에 대한 지식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의 경험적 지식과 지성은 그가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게 했다. 핀투는 극동의 포르투갈 식민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3]

그의 방랑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는 너무 믿기 어렵고 허황되어 신뢰를 얻기 힘들었다.[4] 이로 인해 "페르낭, 거짓말해? 나는 거짓말해!"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이는 포르투갈어 말장난으로 그의 이름과 "페르낭, 거짓말하니? 내가 거짓말한다!"라는 뜻을 이용한 것이다.[5]

출판물은 핀투의 원고와 다를 수 있다(몇몇 문장은 삭제되고 다른 문장은 편집되었다). 동양에서 가장 활동적인 수도회 중 하나인 예수회의 언급이 사라진 것은 주목할 만한데, 이는 핀투가 이 단체와 관계가 있었음을 분명히 나타내는 징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핀투의 회고록은 말 그대로 사건에 대한 그의 기억이며,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은 아시아 문명이 유럽인들에게 미친 영향을 기록하고 있으며, 포르투갈의 동양에서의 행위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이다(루이스 드 카몽이스의 ''우스 루시아다스''와 비교하여).

핀투의 가장 논란이 되는 주장은 그가 일본을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이었고, 일본에 조총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논란이 되는 주장으로는 자바에서 무슬림과 싸웠다는 것인데, 역사가들이 분석했다. 1880년에 저술한 네덜란드 역사가 P. A. 틸레는 핀투가 그 캠페인에 참석했다고 믿지 않았고, 오히려 이차 자료를 바탕으로 정보를 기록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틸레는 당시 자바 역사에 대한 다른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핀투의 설명을 무시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모리스 콜리스는 핀투의 기록이 완전히 사실은 아니지만 역사적 사건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콜리스는 핀투의 작품을 16세기 아시아 역사에 대한 가장 완벽한 유럽 기록으로 여긴다.

3. 2. 역사적 가치와 논란

핀투는 1569년에 회고록 집필을 시작했고, 이 책은 1614년 프라이 벨키오르 파리아에 의해 사후 출판되었다.[3] 핀투는 동시대 작가들과 같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고대나 르네상스의 미학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경험적 지식과 지성을 통해 의미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핀투는 극동의 포르투갈 식민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3]

그의 방랑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는 너무 믿기 어렵고 허황되어, "페르낭, 거짓말해? 나는 거짓말해!"라는 말장난이 생겨날 정도였다.[4][5] 이는 핀투의 이름과 "페르낭, 거짓말하니? 내가 거짓말한다!"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표현을 이용한 것이다.[5]

출판된 책은 핀투의 원고와 다를 수 있는데, 몇몇 문장은 삭제되고 다른 문장은 편집되었다. 특히, 동양에서 가장 활동적인 수도회 중 하나인 예수회에 대한 언급이 사라진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핀투가 이 단체와 관계가 있었음을 분명히 나타내는 징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핀투의 회고록은 사건에 대한 그의 기억을 바탕으로 하므로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그러나 아시아 문명이 유럽인들에게 미친 영향을 기록하고 있으며, 포르투갈의 동양에서의 행위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루이스 드 카몽이스의 ''우스 루시아다스''와 비교하여) 가치가 있다.

핀투의 가장 논란이 되는 주장은 그가 일본을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이었고, 일본에 조총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주앙 로드리게스는 그의 저서 『일본 교회사』에서 핀투가 다네가시마 표류자 3명 중 한 명이라는 주장을 부정하고 있다.[19] 많은 검증 결과, 핀투는 철포 전래 다음 해인 1544년(덴분 13년)에 처음으로 사쓰마반도의 야마가와에 도래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8] 한편, 유럽인의 첫 내항에 대해서는, 철포 전래 2년 전인 1541년(덴분 10년)에 포르투갈 배가 분고에 표류하였고, 현재 포르투갈에서는 이 해를 "일본 발견의 해"로 삼고 있다.[8] (발견 기념비)

또 다른 논란이 되는 주장으로는 자바에서 무슬림과 싸웠다는 것이 있는데, 역사가들이 분석했다. 네덜란드 역사가 P. A. 틸레는 1880년에 핀투가 그 캠페인에 참석했다고 믿지 않았고, 오히려 이차 자료를 바탕으로 정보를 기록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틸레는 당시 자바 역사에 대한 다른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핀투의 설명을 무시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모리스 콜리스는 핀투의 기록이 완전히 사실은 아니지만 역사적 사건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콜리스는 핀투의 작품을 16세기 아시아 역사에 대한 가장 완벽한 유럽 기록으로 여긴다.

3. 3. 문학적 가치

핀투는 1569년에 회고록 집필을 시작하여 1578년경에 완성했지만, 생전에 출판되지는 못했다. 그의 사후 31년이 지난 1614년에 프라이 벨키오르 파리아에 의해 출판되었다.[3] 핀투는 동시대 작가들처럼 고대나 르네상스의 미학에 대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경험적 지식과 지성을 바탕으로 의미 있는 작품을 남겼다. 그의 회고록 『순례기』(Peregrinaçãopt)는 사후 출판되었지만, 그 내용의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핀투의 방랑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너무 믿기 어려워 "페르낭, 거짓말해? 나는 거짓말해!"라는 말장난이 생겨날 정도였다.[4][5] 이는 핀투의 이름과 "거짓말하니? 내가 거짓말한다!"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표현을 이용한 것이다.[5]

출판된 책은 핀투의 원고와 다를 수 있는데, 일부 문장이 삭제되거나 편집되었다. 특히, 동양에서 가장 활동적인 수도회 중 하나인 예수회에 대한 언급이 사라진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핀투가 예수회와 관계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의문스러운 부분이다.

핀투의 회고록은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아시아 문명이 유럽인들에게 미친 영향을 기록하고 있으며, 포르투갈의 동양에서의 행위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루이스 드 카몽이스의 ''우스 루시아다스''와 비교되기도 한다.

핀투의 가장 논란이 되는 주장은 그가 일본을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이었고, 일본에 조총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또한 자바에서 무슬림과 싸웠다는 주장도 논란이 되었는데, 역사가 P. A. 틸레는 핀투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이차 자료를 바탕으로 기록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틸레는 당시 자바 역사에 대한 다른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핀투의 설명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고 인정했다.

모리스 콜리스는 핀투의 기록이 완전히 사실은 아니지만 역사적 사건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콜리스는 핀투의 작품을 16세기 아시아 역사에 대한 가장 완벽한 유럽 기록으로 평가했다.

핀투는 『순례기』에서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식민주의기독교 포교로 위장한 것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는 당시에는 참신한 견해였으며, 후대에 와서 일반적인 견해가 되었다.[11]

『순례기』는 "13번 생포되고, 17번 팔려갔다"는 등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묘사도 있어, 핀투는 예로부터 거짓말쟁이로 불리기도 했다.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콩그리브의 희극 Love for Love영어에는 "Ferdinand Mendez Pinto was but a type of thee, thou liar of the first magnitude." (페르디난드 멘데즈 핀투는 너와 같은 종류의 인간일 뿐이고, 너는 최상급의 거짓말쟁이다)라는 대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페르낭 멘드스 핀투의 편력기』는 현실과 허구가 뒤섞인 작품으로, 현대의 모험 소설 범주에 속한다.[8] 포르투갈 문화사학자 안토니우 살라이바라는 이 작품을 문학 작품으로서 높이 평가했으며, 사료적 가치에 대한 논란과는 별개로 문학 작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편력기』에 기록된 현지 아시아인들의 발언은 포르투갈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어 일종의 풍자 소설로 볼 수도 있다.

4. 유산

1978년 수성의 분화구가 핀투를 기려 멘데스 핀투로 명명되었다.[6]

1965년 포르투갈 알마다에 그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가 세워졌으며, 2011년에는 핀투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2유로 동전이 발행되었다.

참조

[1] 문서 Rebecca D. Catz page xxxvii
[2] 서적 The Southern barbarians: the first Europeans in Japan https://books.google[...] Michael Cooper 2018-04-08
[3] 웹사이트 "Fernão Mendes Pinto and His Peregrinação." http://www.cervantes[...]
[4] 서적 "Tanegashima: the arrival of Europe in Japan." https://books.google[...] Routledge
[5] 웹사이트 "The Travels of Mendes Pinto: Team Game." http://www.rpg.net/n[...]
[6] 웹사이트 "Craters: Mendes Pinto on Mercury" http://planetaryname[...]
[7] 서적 大航海時代 旅と発見の2世紀
[8] 간행물 「ほら吹きピント」の本当の話 メンデス・ピントがザビエルを支援する 2-1 https://www.kufs.ac.[...] 京都外国語大学図書館
[9] 서적 大航海時代 旅と発見の2世紀
[10] 서적 Interracial Intimacy in Japan: Western Men and Japanese Women, 1543-1900 https://books.google[...] A&C Black
[11] 간행물 Fernão Mendes Pinto and His Peregrinação https://web.archive.[...] University of California 1991-09
[12] 웹사이트 De 18 a 20 de Maio, às 22 horas MOSTRA DE TEATRO AMADOR NO CENTRO CULTURAL VILA FLOR http://www.cm-guimar[...] 2006-05-16
[13] 문서 日本語訳者の岡村多希子はピントはユダヤ人ではなかったとしているが(訳者後書き)、カリフォルニア大学ポルトガル学部はピントがマラーノであったことが通説であるとラビ・M・トケイヤーは伝えている。『ユダヤ製国家 日本』徳間書店2006
[14] 웹사이트 Fernao Mendes Pinto 6: Grave Robbery and Leeches https://humancircusp[...] 2024-01-17
[15] 서적 日本銃砲の歴史と技術 雄山閣 2013-09-05
[16] 웹사이트 発見のモニュメントに潜む謎 https://researchmap.[...] 2018-12-07
[17] 웹사이트 16世紀の日本と環シナ海域 ~海禁と拡張のはざまで~ https://web.archive.[...] 2018-12-07
[18] 간행물 「ほら吹きピント」の本当の話 メンデス・ピントがザビエルを支援する 2-2 https://www.kufs.ac.[...] 京都外国語大学図書館
[19] 웹사이트 モタ https://kotobank.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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