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령 앙골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포르투갈령 앙골라는 1484년 포르투갈 탐험가 디오구 캉의 도착 이후 1975년 앙골라가 독립할 때까지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받던 시기를 일컫는다. 이 기간은 식민지 이전, 식민지 시대, 독립 이후로 구분되며, 1950년대 후반부터 앙골라 해방 민족 전선(FNLA)과 앙골라 인민 해방 운동(MPLA)의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1961년 식민 전쟁이 발발했고,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포르투갈의 에스타두 노부 정권이 붕괴되면서 1975년 앙골라는 독립하여 앙골라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UNITA, FNLA, MPLA 간의 내전이 발생했고, 2002년 UNITA 지도자 조나스 사빔비의 사망으로 종식되었다. 포르투갈령 앙골라는 정치, 경제, 사회, 지리, 문화, 스포츠 등 다양한 측면에서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았으며, 노예 무역에서 다이아몬드, 석유 채굴로 경제 구조가 변화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포르투갈령 앙골라 - 앙골라 독립 전쟁
앙골라 독립 전쟁은 1950년대 포르투갈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앙골라 내 독립 운동 단체의 활동으로 시작되어, 1974년 포르투갈 혁명 이후 독립했으나, 각 세력 간의 권력 다툼과 국제 세력의 개입으로 내전이 발생하여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화 -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포르투갈령 모잠비크는 1505년부터 1975년까지 현재의 모잠비크에 존재했던 포르투갈 식민지로,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동아프리카에 도착한 후 인도양 무역을 장악하며 건설되었고, 독립 전쟁을 거쳐 1975년 독립을 쟁취하였다. -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화 - 포르투갈령 카보베르데
포르투갈령 카보베르데는 15세기 포르투갈에 발견되어 아프리카 노예 무역의 중심지로 기능하다가 1975년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카보베르데의 식민 통치 시기이다. - 중앙아프리카의 역사 - 프랑스령 카메룬
프랑스령 카메룬은 독일의 보호령에서 시작하여 프랑스와 영국에 위임 통치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하여 카메룬 공화국이 되었으며, 영국령 카메룬과의 통합을 거쳐 카메룬 연방 공화국으로 발전했다. - 중앙아프리카의 역사 - 프랑스령 콩고
프랑스령 콩고는 1882년 프랑스에 의해 설립되어 현재의 콩고 공화국, 가봉,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피에르 사보르냥 드 브라자에 의해 기틀이 마련되고 유럽 열강의 승인을 받았으나 식민 통치 기간 동안 자원 수탈과 잔혹 행위가 있었으며 여러 행정 구역 변화를 거쳐 1960년 콩고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포르투갈령 앙골라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지도 | |
기본 정보 | |
![]() | |
일반 명칭 | 앙골라 |
다른 명칭 | (포르투갈령 서아프리카) |
지위 | 포르투갈 제국의 식민지 (1575–1951) 포르투갈 신국의 해외 영토 (1951–1972) 포르투갈 제국의 자치령 (1972–1975) |
존속 기간 | 1575년 - 1975년 |
수도 | 루안다 |
공용어 | 포르투갈어 |
기타 사용 언어 | 움분두어, 킴분두어, 키콩고어, 초크웨어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개신교 전통 종교 |
통화 | 포르투갈 레알 (1575–1911) 포르투갈 에스쿠도 (1911–1914) 앙골라 에스쿠도 (1914–1928; 1958–1977) 앙골라 앙골라르 (1926–1958) |
국가 | "Hymno Patriótico" (1808–34) (애국가) [[File:Hymno Patriotico.ogg]] "Hino da Carta" (1834–1910) (헌장 찬가) [[File:Hino da Carta.ogg]] "A Portuguesa" (1910–75) (포르투갈의 노래) [[File:Hino Nacional da Republica Portuguesa.ogg]] |
정치 | |
정치 체제 | 식민지 |
역사 | |
주요 사건 시작 | 루안다 설립 (1575년) |
주요 사건 종료 | 앙골라 독립 (1975년 11월 11일) |
이전 국가 | 콩고 왕국 음동고 왕국 음분다 왕국 룬다 제국 |
이후 국가 | 앙골라 인민 공화국 앙골라 민주 인민 공화국 카빈다 공화국 |
역대 통치자 | |
국가 원수 | 국왕 세바스티앙 1세 (1575–1578) 대통령 프란시스코 다 코스타 고메스 (1974–1975) |
총독 | 파울루 디아스 드 노바이스 (1575–1589) (총독) 레오넬 알렉상드르 고메스 카르도주 (1975) |
현재 국가 |
2. 역사
포르투갈인들은 1484년 탐험가 디오구 캉이 도착한 이후[64] 1975년 11월에 앙골라가 독립할 때까지 앙골라 영토에 존재했다. 이 5세기 동안, 여러 상황들이 있었다.
1575년 콩고 왕국 남쪽 해안에 루안다라는 정착지가 세워졌고, 17세기에는 더 남쪽에 벵겔라라는 정착지가 세워졌다. 1580년대부터 1820년대까지, 현재의 앙골라에서 100만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노예로 신대륙 (주로 브라질, 북아메리카)으로 수출되었다.[64] 17세기 상충되는 경제적 이해관계는 콩고 왕국과의 군사적 대립으로 이어졌다. 포르투갈은 1665년 10월 29일 음빌라 전투에서 콩고 왕국을 물리쳤지만, 1670년 콩고를 침공하려다 키톰보 전투에서 참패했다.
1884년 영국은 하류 콩고 양안에 대한 포르투갈 주권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했으나, 현지와 독일에서 반대에 부딪혀 비준되지 않았다. 1885년~1886년에 콩고 자유국, 독일 제국, 프랑스와 체결된 협정으로 이 지방의 경계가 확정되었다.
1951년, 포르투갈령 앙골라는 포르투갈의 해외주가 되었다. 1961년 앙골라 해방 민족 전선(FNLA)과 앙골라 인민 해방 운동(MPLA)은 포르투갈의 지배에 맞서 싸우기 위한 전략과 행동 계획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조직적인 게릴라전이 시작되었고, 식민 전쟁은 UPA 반군이 앙골라 북부에서 민간인을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카네이션 혁명이라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이끄는 에스타두 노부 정권이 무너졌다. 1975년 11월 11일, 앙골라는 알보르 협정에 따라 주권 국가가 되었고, 새롭게 독립한 국가는 앙골라 인민 공화국으로 선포되었다.
2. 1. 식민지 이전
15세기 말 디오구 캉 등 탐험가들이 콩고 왕국에 도착했을 때, 현재의 앙골라 지역은 여러 독립적인 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다양한 크기의 왕국이나 부족 연합 형태로 존재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주로 노예 무역에 관심을 가졌으며, 콩고 왕국의 통치자들과 평화롭고 상호 이익이 되는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콩고 왕국 사람들을 기독교화하고 포르투갈어를 가르쳤으며, 노예 무역의 이익 일부를 콩고 왕국에 제공했다.2. 2.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 (1484년 ~ 1975년)
1484년, 포르투갈 탐험가 디오구 캉이 앙골라에 도착하면서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었다.[64] 디오구 캉을 비롯한 탐험가들이 콩고 왕국에 도착했을 당시, 현재의 앙골라 영토는 여러 개의 분리된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일부는 다양한 크기의 왕국 또는 부족 연합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무역, 주로 노예 무역에 관심이 있었다.포르투갈인들은 기독교를 전파하고 포르투갈어를 가르친 콩고 왕국의 통치자들과 평화적이고 상호 이익이 되는 관계를 유지했고, 노예 무역의 이익 일부를 그들에게 허용했다. 그들은 현재의 콩고 민주 공화국 지역에 작은 교역소를 세웠다. 대서양 연안의 더 중요한 무역 정착지는 콩고 왕국의 영토인 소요에 세워졌다. 소요는 현재 앙골라의 최북단 마을이며, 카빈다주를 제외한 지역이다.
1575년에 콩고 왕국의 남쪽 해안에 루안다라는 정착지가 세워졌고, 17세기에는 벵겔라라는 더 남쪽에 정착했다. 1580년대부터 1820년대까지, 현재의 앙골라에서 100만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노예로 소위 신대륙으로, 주로 브라질로, 그리고 북아메리카로 수출되었다.[64] 올리버와 앳모어에 따르면, "200년 동안 앙골라의 식민지는 본질적으로 거대한 노예 무역 기업으로 발전했다."[65]
17세기, 상충되는 경제적 이해관계는 콩고 왕국과의 군사적 대립으로 이어졌다. 포르투갈은 1665년 10월 29일 음빌라 전투에서 콩고 왕국을 물리쳤지만, 1670년 콩고를 침공하려다 키톰보 전투에서 참패했다. 대부분의 중앙 고지 통제는 18세기에 이루어졌다. 19세기에 내부를 정복하려는 시도가 더 이어졌다.[66] 그러나 포르투갈인들이 전체 영토에 대한 완전한 행정적 통제는 20세기 초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84년, 그때까지 포르투갈이 암브리스 북쪽에 영토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영국은 하류 콩고 양안에 대한 포르투갈 주권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현지와 독일에서 반대에 부딪혀 비준되지 않았다. 1885년~1886년에 콩고 자유국, 독일 제국 및 프랑스와 체결된 협정은 남동부를 제외한 이 지방의 경계를 확정했다. 남동부의 바로체랜드(북서 로디지아)와 앙골라 사이의 국경은 1891년 영국-포르투갈 협정과 1905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중재 판정에 의해 결정되었다.
포르투갈의 앙골라 식민 통치 기간 동안 도시, 마을, 무역 기지가 설립되었고,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항구가 건설되었고, 소수의 유럽 통치자들이 없애려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던 앙골라의 깊은 전통적인 부족 유산에도 불구하고 점진적으로 서구화된 사회가 발전하고 있었다. 1920년대부터 포르투갈 정부는 앙골라의 경제와 사회 기반 시설 개발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46]
1951년, 포르투갈령 앙골라는 포르투갈의 해외주가 되었다.
2. 2. 1. 앙골라 독립 전쟁 (1961년 ~ 1974년)
1950년대 후반, 앙골라 해방 민족 전선(FNLA)과 앙골라 인민 해방 운동(MPLA)은 포르투갈의 지배와, 경제 호황기에 많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고향에서 강제로 이주시켜 주로 비숙련 중노동을 하게 만드는 보상 제도에 맞서 싸우기 위한 전략과 행동 계획을 조직하기 시작했다.[47]1961년은 조직적인 게릴라전이 시작된 해이자, 비숙련 원주민 노동자들의 근무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이 통과되어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게 된 해이다. 1961년 포르투갈 정부는 흑인을 차별하는 여러 기본 법 조항을 폐지했지만, 식민 전쟁은 콩고 민주 공화국(구 콩고 레오폴드빌)에 기반을 둔 UPA 반군이 앙골라 북부에서 백인과 흑인 민간인을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국제 연합을 방문한 반군 지도자 홀든 로베르토는 킨샤사로 돌아와 바콩고 민병대를 조직했다.[47]
thumb
1961년 3월 15일, 홀든 로베르토는 4,000~5,000명의 민병대를 이끌고 앙골라를 침공했다. 그의 부대는 농장, 정부 초소, 무역 센터를 점령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을 죽였다. 최소 1,000명의 백인과 알 수 없는 수의 흑인이 사망했다.[48] 이 침입에 대해 로베르토는 "이번에는 노예들이 겁먹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학살했다.[49] 앙골라의 효과적인 군대는 약 6,500명으로, 5,000명의 흑인 아프리카인과 포르투갈에서 파견된 1,500명의 백인 유럽인이었다. 이러한 사건 이후 포르투갈 정부는 독재적인 에스타두 노부 정권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와 후임인 마르셀루 카에타누 하에 유럽에서 수천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테러와 반란 진압 작전을 수행했다.
1963년 홀든 로베르토는 킨샤사에 망명 앙골라 혁명 정부(GRAE)를 수립하여 국제 무대에서 앙골라의 포르투갈 지배에 맞서 싸우는 세력의 유일한 대표임을 주장하려 했다. 1966년, 앙골라 완전 독립을 위한 국민 연합(UNITA)도 독립을 위한 게릴라 작전을 시작했다. 앙골라 전선에서 포르투갈 육군의 전반적인 군사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독립 게릴라 운동은 완전히 패배하지 않았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독립을 지지하는 게릴라 운동인 MPLA는 이전에 제한적이었던 반란 작전을 앙골라 동부로 확장했다. 이 광대한 시골 지역은 주요 도시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게릴라가 피신할 수 있는 외국과 가까웠다. 동부에 설립된 규모가 더 작은 독립 지지 게릴라 조직인 UNITA는 MPLA를 지원했다. 1970년까지 동부 전선의 MPLA와 UNITA 연합 게릴라 부대는 해당 지역의 포르투갈군(FAP)에 압력을 가하여 게릴라가 쿠안자 강을 건너 비에 영토를 위협할 수 있게 되었다. 비에에는 농업, 상업 및 산업 도시인 실바 포르토의 중요한 도시 중심지가 있었다. 1970년, 게릴라 운동은 북부에서 동부로 병력과 무기를 재배치하여 동부 전선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1971년, 포르투갈군은 앙골라 동부에서 활동하는 3개의 게릴라 조직을 앙골라 국경 너머로 축출하는 성공적인 반란 진압 군사 작전인 "동부전선"을 개시했다. 마지막 게릴라들은 수백 명의 병력을 잃고 많은 장비를 남긴 채 혼란스럽게 인접국으로 해산하거나, 일부는 포르투갈군에 합류하거나 항복했다. 포르투갈 당국은 지역 농촌 주민들의 신뢰를 얻고 이 지역에 주민들이 영구적이고 생산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대규모 예방 접종 캠페인, 건강 검진, 상하수도 및 식량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주민들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 기여하고 게릴라 및 그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주민들을 분리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1972년 12월 31일, 동부 개발 계획 1단계에는 466개의 개발 사업이 포함되었으며 (150개가 완료되고 316개가 건설 중이었다). 19개의 보건소가 건설되었고 26개가 건설 중이었다. 51개의 새로운 학교가 운영되고 있었고 82개가 건설 중이었다.[50][51]
그러나 포르투갈 당국은 특히 포르투갈령 기니에서 게릴라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13년간의 분쟁에서 큰 희생을 치렀다. 식민지 전쟁 전반에 걸쳐 포르투갈은 국제 사회 대부분으로부터 점점 더 심해지는 반대, 무기 금수 조치 및 기타 처벌적 제재에 직면했다. 이 전쟁은 그 기간과 비용, 다른 유엔 회원국과의 외교 관계 악화, 그리고 ''에스타두 노부'' 정권의 지속에 기여한 역할 때문에 포르투갈 사회에서 더욱 인기가 없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악화가 1974년 4월 카네이션 혁명에서 포르투갈 군대 구성원들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이는 모든 전 포르투갈 식민지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사건이었다.

1974년 4월 25일,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이끄는 ''에스타두 노부'' 정권 아래의 포르투갈 정부는 리스본에서 일어난 군사 반란인 카네이션 혁명에서 전복되었다. 그 해 5월, ''준타 드 살바상 나시오날''(포르투갈의 새로운 혁명 정부)은 평화 회담과 독립을 증진하기 위해 독립 지지 아프리카 게릴라들과 휴전을 선포했다.[54] 군부 주도 쿠데타는 포르투갈에 민주주의를 회복시켜 수십만 명의 포르투갈 군인이 징집되었던 인기 없는 식민지 전쟁을 종식시켰고, 기본적인 시민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억압했던 권위주의적인 ''에스타두 노부''(신국가) 정권과 그 비밀 경찰을 대체했다. 그것은 포르투갈군 소좌들의 1973년 법령에 대한 직업 계급 항의로 시작되었다.[55][56][57]
이러한 사건들은 대부분 백인이지만 일부 메스티소(혼혈) 또는 흑인인 포르투갈 시민들의 포르투갈 아프리카 영토에서의 대량 탈출을 초래하여 수십만 명의 빈곤한 난민—''레토르나두스''를 만들었다.[58] 1975년 11월 11일, 앙골라는 알보르 협정에 따라 주권 국가가 되었고, 새롭게 독립한 국가는 앙골라 인민 공화국으로 선포되었다.
2. 3. 독립과 내전 (1975년 ~ 2002년)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카네이션 혁명이라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이끄는 에스타두 노부 정권이 무너졌다. 이 정권은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수립한 권위주의적인 정권이었다. 1974년 5월, 국가구원헌장 (포르투갈의 새로운 혁명 정부)은 평화 회담과 독립을 위해 독립 지지 아프리카 게릴라들과 휴전을 선포했다.[15]이러한 사건들은 대부분 백인이지만 일부 메스티소(혼혈) 또는 흑인인 포르투갈 시민들이 포르투갈 아프리카 영토에서 대량으로 탈출하는 결과를 낳았고, 수십만 명의 빈곤한 난민—''레토르나두스''를 만들었다.[19] 1975년 11월 11일, 앙골라는 알보르 협정에 따라 주권 국가가 되었고, 새롭게 독립한 국가는 앙골라 인민 공화국으로 선포되었다.
3. 정치
20세기, 포르투갈령 앙골라는 이스다두 노부 정권의 지배를 받았다. 1951년 앙골라는 포르투갈의 해외주로 법적 지위가 변경되었다. 법적으로는 리스본과 마찬가지로 포르투갈의 일부였지만, 유럽과의 거리를 고려하여 특별한 예외 조항을 적용받았다. 앙골라 정부 구성원 대부분은 포르투갈 출신이었지만, 일부는 앙골라 출신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앙골라인들이 공직을 얻기 위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관료 조직의 거의 모든 구성원들은 포르투갈 출신이었다.
앙골라 정부는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고도로 중앙집권화되어 있었다. 권력은 행정부에 집중되었고, 모든 선거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리스본의 총리실에서부터 엄격한 지휘 체계를 통해 앙골라의 가장 외진 곳까지 권한이 미쳤다. 앙골라 정부의 권한은 유럽에서 이미 결정된 정책을 시행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1967년, 앙골라는 리스본의 국회에 다수의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 지방에서 가장 높은 관리는 포르투갈 내각이 해외 장관의 추천으로 임명한 총독이었다. 총독은 행정권과 입법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정부 의회는 그 지방의 운영에 있어 총독에게 조언을 했다. 기능 내각은 총독의 자문을 받아 해외 장관이 임명한 5명의 비서관으로 구성되었다. 입법회는 제한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 주요 활동은 지방 예산을 승인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경제 사회 위원회는 모든 법안 초안에 대해 자문을 받아야 했고, 총독은 리스본의 조언을 무시할 경우 리스본에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해야 했다.
1972년 포르투갈 의회는 앙골라의 지위를 해외 지방에서 일부 내정에 대한 권한을 가진 "자치 국가"로 변경했다. 포르투갈은 국방과 외교 관계에 대한 책임을 유지해야 했다. 1973년 앙골라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67]
4. 지리
포르투갈령 앙골라는 1,246,700 km²의 영토로, 프랑스와 스페인을 합친 것보다 더 큰 면적이었다.[20] 5,198 km의 육지 경계와 1,600 km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었다. 지형은 다양했는데, 남쪽으로 25km에서 북쪽으로 100~200km에 이르는 해안 평야에서 시작하여, 국토의 거의 3분의 2를 덮고 있는 내륙 고원으로 점차 높아졌으며, 평균 고도는 1,200~1,600m였다. 앙골라에서 가장 높은 두 봉우리인 모코산(2,620m)과 메코산(2,538m)이 이 중앙 고원에 위치해 있었다.
앙골라의 강 대부분은 중앙 산맥에서 발원했다.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많은 강 중에서 쿠안자 강(Cuanza River)]과
5. 경제
15세기부터 포르투갈 탐험가와 정착민들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무역 기지와 요새를 건설했고, 16세기에 앙골라 해안에 도착했다. 포르투갈 탐험가 파울루 디아스 드 노바이스는 1575년 루안다를 "상 파울루 드 루안다"로 건설했고, 이 지역은 현지 임방갈라족과 엠부두족의 도움을 받아 노예 무역을 바탕으로 한 노예 무역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주목할 만한 노예 사냥꾼들이었다. 무역은 주로 신대륙의 포르투갈 브라질 식민지와 이루어졌으며, 루안다와 벵겔라 항구에서 브라질 선박이 가장 많았다. 이 당시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앙골라는 사실상 또 다른 포르투갈 식민지인 브라질의 식민지와 같은 형태였다. 예수회는 종교와 교육에 강한 브라질의 영향력을 행사했다.[31]
점차 전쟁 철학은 무역 철학으로 대체되었다. 주요 무역로와 이를 가능하게 한 협정은 서로 다른 지역 간의 활동을 주도하는 힘이었고, 전쟁을 일삼던 국가들은 생산하고 판매할 준비가 된 국가가 되었다.[31] 플라날투 고원 지대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는 비에와 바이룬두였으며, 후자는 식량과 고무 생산으로 유명했다. 점점 더 부유하고 강력해진 식민 지배국 포르투갈은 이웃 국가들의 성장을 용인하지 않고 하나씩 정복하여 이 지역 대부분에 대한 포르투갈의 패권을 확립했다. 이베리아 연합(1580년~1640년) 기간 동안 포르투갈은 영향력과 권력을 상실하고 새로운 적을 만들었다. 카스티야 왕국의 주요 적이었던 네덜란드는 루안다를 포함한 많은 포르투갈 해외 영토를 침략했다. 네덜란드는 1640년부터 1648년까지 아르덴부르크 요새로 루안다를 지배했다. 그들은 브라질 북동부(페르남부쿠, 올린다, 헤시피)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사용할 흑인 노예를 찾고 있었는데, 이곳 또한 포르투갈로부터 점령한 곳이었다. 나사우-지겐의 모리스 공은 아프리카 서해안에 있는 엘미나, 상투메, 루안다 등의 포르투갈 영토를 정복했다. 1640년 이베리아 연합이 해체된 후 포르투갈은 상실된 포르투갈 제국의 영토에 대한 권위를 재확립했다.[31]
포르투갈은 도시, 무역 기지, 벌목장과 소규모 가공 공장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764년부터 노예 기반 사회에서 국내 소비 및 수출을 위한 생산 기반 사회로 점진적인 변화가 있었다. 포르투갈 브라질은 1822년 독립을 했고, 1836년 노예 무역이 폐지되었다.
1844년 앙골라 항구는 합법적인 외국 선박에 개방되었다. 1850년까지 루안다는 포르투갈 제국에서 포르투갈 본토를 제외하고 가장 발전된 도시 중 하나였다. 무역 회사들이 많았고, 벵겔라와 함께 야자유, 땅콩 기름, 밀랍, 코팔, 목재, 상아, 면화, 커피, 코코아 등 많은 제품을 수출했다. 옥수수, 담배, 건조 고기, 카사바 가루도 현지에서 생산되기 시작했다. 앙골라 부르주아지가 탄생했다.[31]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강력한 경제 성장, 풍부한 천연 자원, 인프라 개발로 더 많은 포르투갈 정착민들이 본국에서 왔다.[31]
1912년, 포르투갈 광산 탐사자들이 북동부 룬다 지역의 하천에서 최초의 보석을 발견하면서 다이아몬드 채굴이 시작되었다. 1917년, 앙골라 다이아몬드 회사(Diamang)는 포르투갈령 앙골라에서 다이아몬드 채굴 및 탐사에 대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Diamang은 앙골라의 광대한 지역에서 독점적인 채굴 및 노동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이 독점을 이용하여 식민지에서 가장 큰 상업 운영자이자 주요 수익 창출 기업이 되었다. 그들의 부는 아프리카 노동자들에 의해 창출되었으며, 그중 많은 수가 룬다의 공격적인 국영 기업 채용 방식(시발로 참조)을 통해 강제로 광산에서 일하도록 모집되었다.[32] 1947년 후반까지도 회사는 현지 노동력이 매우 저렴했기 때문에 운영을 기계화하는 데 이점이 없다고 생각했다.[32] 1970년대까지 삽으로 작업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자발적인 계약 노동자(contratados)조차도 착취당했고 자신의 주택을 건설해야 했으며 종종 임금을 속임을 당했다. 전반적으로 아프리카 노동자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잔혹한 노동을 매우 적은 임금으로 수행했으며, 종종 임금을 속임을 당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74년까지 말란제, 비에, 우암보, 우일라 지방에서 철광석이 채굴되었고, 1970년부터 1974년까지 연평균 570만 톤의 생산량에 달했다. 철광석의 대부분은 일본, 서독, 영국으로 수출되었으며, 연간 약 5,000만 달러의 수출 수익을 올렸다. 1966년~1967년에 포르투갈인들은 모사메데스(나미베) 북쪽 12km 지점에 있는 사코 만에 대형 철광석 터미널을 건설했다. 고객은 로비토 광산 회사였으며, 카싱가 내륙에 철광석 광산을 개발했다. 광산 시설과 300km 철도 건설은 독일 크루프에 의뢰되었고, 현대식 항구 터미널은 덴마크의 회가르드 앤 슐츠가 소유한 포르투갈 회사인 SETH에 의뢰되었다. 작은 어촌 마을인 모사메데스는 2년 동안 건설 노동자, 외국 엔지니어 및 그들의 가족을 수용했다. 철광석 터미널은 1년 안에 제시간에 완공되었고, 1967년 최초의 25만 톤급 광석 운반선이 정박하여 광석을 선적했다.[28][34] 포르투갈은 1955년 앙골라에서 석유를 발견했다. 1950년대 쿠안자 분지, 1960년대 콩고 분지, 1968년 카빈다 지역에서 생산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 정부는 1955년 카빈다 걸프 오일 컴퍼니(셰브론텍사코 자회사)에 제로 블록의 운영권을 부여했다. 1973년 석유 생산은 앙골라의 최대 수출품이었던 커피 수출을 넘어섰다.
1970년대 초 앙골라에서는 다양한 작물과 가축이 생산되었다. 북부에서는 카사바, 커피, 면화가 재배되었고, 중앙 고원 지대에서는 옥수수가 재배되었으며, 강우량이 가장 적은 남부에서는 소 사육이 성행했다. 또한 포르투갈인이 운영하는 대규모 농장에서는 야자유, 사탕수수, 바나나, 시살을 생산했다. 이러한 작물은 주로 포르투갈인인 상업 농민과 농민들이 재배했으며, 잉여 작물을 현지 포르투갈 상인에게 판매하여 물품을 교환했다. 그러나 상업 농민들이 이러한 작물의 마케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해외 지방 정부인 포르투갈 정부로부터 기술 지원, 관개 시설, 금융 신용 등의 상당한 지원을 받았다. 그들은 앙골라 도시 지역에서 판매되거나 여러 국가로 수출된 작물의 대부분을 생산했다.[35]
포르투갈 앙골라의 어업은 중요하고 성장하는 산업이었다. 1970년대 초에는 약 700척의 어선이 있었고, 연간 어획량은 30만 톤이 넘었다. 앙골라 해역에서 외국 어선의 어획량을 포함하면 연간 총 어획량은 100만 톤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포르투갈 영토인 앙골라는 수산물 순수출국이었으며, 모사메데스(나미베), 루안다, 벵겔라 항구는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어항 중 하나였다.
6. 사회
식민지 시대 대부분 흑인 아프리카인들은 교육 기회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대부분 포르투갈어를 구사할 수 없었고, 포르투갈 문화와 역사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다.[36] 1950년대까지 포르투갈 식민 정부가 운영하는 교육 시설은 주로 도시 지역에 한정되었다.[36] 농촌 아프리카인들의 교육은 광대한 시골 지역에 기반을 둔 여러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선교 단체에 위임되었으며, 이들은 흑인 아프리카인들에게 포르투갈어와 문화를 가르쳤다.[36] 각 선교 단체는 자체적인 학교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모두 포르투갈의 통제와 지원을 받았다.[36]
1950년대 초부터 기초, 중등, 기술 교육에 대한 접근이 확대되어 아프리카 원주민과 포르투갈계 주민 모두에게 제공되었다. 1950년대 이후 초등 교육 이상의 교육이 흑인 아프리카인들에게 더 많이 제공되었고, 1970년대 초 중등학교에 진학한 연령대의 비율은 최고치를 기록했다.[36] 초등학교 취학률도 크게 증가했다.[36] 초등 교육 수준의 교육 질은 양호했으며, 때로는 자격이 부족한 흑인 아프리카인들이 교육을 담당했음에도 그러했다.[36] 대부분의 중등학교 교사는 특히 도시 지역에서 포르투갈계였다.[36]
1962년 아드리아누 모레이라가 이끄는 포르투갈 해외주무성에 의해 포르투갈 아프리카에 두 개의 국립 대학 기관이 설립되었다. 포르투갈 앙골라의 ''앙골라 일반대학''과 포르투갈 모잠비크의 ''모잠비크 일반대학''은 공학에서 의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학위를 수여했다.[37] 1960년대 포르투갈 본토에는 4개의 국립 대학교가 있었고, 그중 2개는 리스본에 있었다(현재 포르투갈의 국립 대학교 14개). 1968년 ''앙골라 일반대학''은 ''루안다 대학교''로 개명되었다.
7. 문화
디오구 캉을 비롯한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콩고 왕국에 도착했을 당시, 현재의 앙골라는 여러 독립적인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주로 노예 무역에 관심을 가졌으며, 콩고 왕국 통치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기독교 전파와 포르투갈어 교육을 통해 노예 무역의 이익을 공유했다.
1575년 루안다 정착촌이 세워졌고, 17세기에는 벵겔라가 건설되었다. 1580년대부터 1820년대까지 100만 명이 넘는 앙골라인들이 브라질 등 신대륙으로 노예로 팔려갔다.[64] 17세기에는 경제적 이해관계 충돌로 포르투갈과 콩고 왕국 사이에 군사적 대립이 발생하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 대부분 동안 흑인 아프리카인들은 도시 외 지역에서 교육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다. 포르투갈 식민 시대에 대부분은 포르투갈어를 구사하지 못했고 포르투갈 문화와 역사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다.[36] 1950년대까지 포르투갈 식민 정부의 교육 시설은 주로 도시 지역에 한정되었다.[36] 농촌 지역에서는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선교 단체가 교육을 담당하며 포르투갈어와 문화를 가르쳤다.[36]
1950년대 이후 초등, 중등, 기술 교육 접근성이 확대되면서 흑인 아프리카인들의 교육 기회가 늘어났다. 1970년대 초에는 중등학교 진학 연령대 비율이 최고치를 기록했다.[36] 1962년 포르투갈 아프리카에 두 개의 국립 대학이 설립되었고, 1968년 ''앙골라 일반대학''은 ''루안다 대학교''로 개명되었다.
8. 스포츠
1920년대부터 도시와 마을이 확장되고 현대화되면서 축구, 롤러하키, 농구, 배구, 핸드볼, 육상, 체조, 수영 등을 위한 여러 스포츠 시설이 건설되었다. 앙골라 전역에 걸쳐 여러 스포츠 클럽이 설립되었는데, 그중에는 1920년 스포르팅 CP의 지부로 설립된 스포르팅 클럽 드 루안다와 같이 앙골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스포츠 단체도 있었다.[38]
조제 아구아스, 루이 조르당, Jacinto João|자신투 조앙영어 등 앙골라 출신의 여러 스포츠 선수, 특히 축구 선수들이 포르투갈 스포츠에서 널리 알려졌으며,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1960년대부터 상업 항공이 발전하면서 앙골라와 포르투갈의 다른 아프리카 해외 주의 최고 순위 축구팀들이 포르투갈 컵에 참가하기 시작했다.[39]
수영, 요트, 테니스, 사냥을 위한 시설과 조직도 널리 보급되었다. 1950년대부터는 모터스포츠가 앙골라에 도입되었다. 노바 리스보아, 벵겔라, 루방고, 나미베와 같은 도시에서 스포츠 경주가 조직되었다. 특히 국제 노바 리스보아 6시간 스포츠카 경주는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39]
20세기 동안 축구는 앙골라에서 매우 인기 있는 스포츠가 되었다. 축구는 주로 식민지에 정착한 포르투갈 사람들에 의해 앙골라에 퍼졌다. 앙골라와 모잠비크에는 포르투갈 이민자들이 많이 유입되었다. 사람들은 포르투갈 본토 팀을 따라 응원하기 시작했다. 20세기 후반, 포르투갈은 앙골라 출신의 많은 선수들을 영입했다. 미구엘 아르칸주는 포르투갈에서 활동했던 앙골라 출신 선수 중 한 명이다. 식민지 선수들은 포르투갈 팀이 많은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40][62]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Angola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2]
문서
as Captain-Governor
[3]
서적
Way of Death: Merchant Capitalism and the Angolan Slave Trade, 1730–1830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4]
서적
Medieval Africa, 1250–1800
[5]
서적
Les guerres grises. Résistance et revoltes en Angola (1845–1941)
self-published
[6]
문서
More Power to the People
[7]
학술지
Kakombola: O genocídio dos Mucubais na Angola Colonial, 1930 – 1943
2022
[8]
서적
Angola: Struggle for Peace and Reconstruction
https://archive.org/[...]
[9]
서적
Africa's Armies: From Honor to Infamy
https://archive.org/[...]
Westview Press
[10]
서적
A Certain Curve of Horn: The Hundred-Year Quest for the Giant Sable Antelope of Angola
https://archive.org/[...]
[11]
웹사이트
Angola Vitória Militar no Leste
https://web.archive.[...]
[12]
서적
Angola, 1966–74: vitória militar no leste
Prefácio
[13]
웹사이트
The Constitutionalism of Angola and its 2010 Constitution
http://revistas.unis[...]
2017-09-00
[14]
서적
The Angolan Revolution, vol. II, Exile Politics and Guerrilla Warfare (1962–1976)
MIT Press
[15]
웹사이트
Angola, History
http://www.factmonst[...]
The Columbia Electronic Encyclopedia, 6th ed. Copyright © 2007, Columbia University Press
[16]
웹사이트
Cronologia: Movimento dos capitães
http://www1.ci.uc.pt[...]
Centro de Documentação 25 de Abril, University of Coimbra
[17]
웹사이트
Arquivo Electrónico: Otelo Saraiva de Carvalho
http://www1.ci.uc.pt[...]
Centro de Documentação 25 de Abril, University of Coimbra
[18]
Youtube
A Guerra Colonial na Guine/Bissau (07 de 07)
https://www.youtube.[...]
RTP 2
[19]
웹사이트
Dismantling the Portuguese Empire
https://web.archive.[...]
Time Magazine
1975-07-07
[20]
Youtube
Angola antes da Guerra
https://www.youtube.[...]
youtube.com
[21]
Youtube
LuandaAnosOuro.wmv
https://www.youtube.[...]
youtube.com
[22]
Youtube
Angola no outro lado do tempo
https://www.youtube.[...]
[23]
Youtube
BenguelaAnosOuro.wmv
https://www.youtube.[...]
youtube.com
[24]
Youtube
NovaLisboaAnosOuro.wmv
https://www.youtube.[...]
youtube.com
[25]
Youtube
LobitoAnosOuro.wmv
https://www.youtube.[...]
youtube.com
[26]
Youtube
SáDaBandeiraAnosOuro.wmv
https://www.youtube.[...]
youtube.com
[27]
Youtube
MalanjeAnosOuro.wmv
https://www.youtube.[...]
youtube.com
[28]
Youtube
Angola de outros tempos Moçamedes
https://www.youtube.[...]
youtube.com
[29]
Youtube
Angola-Carmona (Viagem ao Passado)-Kandando Angola
https://www.youtube.[...]
youtube.com
[30]
Youtube
CabindaAnosOuro.wmv
https://www.youtube.[...]
youtube.com
[31]
웹사이트
History of Angola
http://www.angola.or[...]
Republic of Angola Embassy in the United Kingdom
[32]
서적
Diamonds in the Rough: Corporate Paternalism and African Professionalism on the Mines of Colonial Angola, 1917–1975
Ohio University Press
2015
[33]
학술지
"I escaped in a coffin": Remembering Angolan Forced Labor from the 1940s
https://revistas.rca[...]
2006
[34]
웹사이트
Angola – Moçâmedes, minha terra, eu te vi crescer... (Raul Ferreira Trindade)
http://mocamedesregi[...]
[35]
웹사이트
POVERTY-ANGOLA: NGOs Sceptical of Govt’s Rural Development Plans
http://ipsnews.net/a[...]
Inter Press Service News Agency
2009-06-06
[36]
간행물
Conditions before Independence
http://lcweb2.loc.go[...]
Library of Congress Federal Research Division
1989-02
[37]
웹사이트
52. UNIVERSIDADE DE LUANDA
https://web.archive.[...]
[38]
웹사이트
Filiais do Sporting
https://www.dn.pt/do[...]
2024-02-20
[39]
Youtube
6h Huambo 1973
https://www.youtube.[...]
[40]
서적
Following the Ball : The Migration of African Soccer Players Across the Portuguese Colonial Empire, 1949–1975
Ohio University Press
[4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Angola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42]
문서
as Captain-Governor
[43]
서적
Way of Death: Merchant Capitalism and the Angolan Slave Trade, 1730–1830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44]
서적
Medieval Africa, 1250–1800
[45]
서적
Les guerres grises. Résistance et revoltes en Angola (1845–1941)
self-published
[46]
문서
More Power to the People
[47]
서적
Angola: Struggle for Peace and Reconstruction
https://archive.org/[...]
[48]
서적
Africa's Armies: From Honor to Infamy
https://archive.org/[...]
Westview Press
[49]
서적
A Certain Curve of Horn: The Hundred-Year Quest for the Giant Sable Antelope of Angola
https://archive.org/[...]
[50]
웹사이트
Angola Vitória Militar no Leste
https://web.archive.[...]
[51]
서적
Angola, 1966–74: vitória militar no leste
Prefácio
[52]
간행물
The Constitutionalism of Angola and its 2010 Constitution
http://revistas.unis[...]
2017-09-12
[53]
서적
The Angolan Revolution, vol. II, Exile Politics and Guerrilla Warfare (1962–1976)
MIT Press
[54]
웹사이트
Angola, History
http://www.factmonst[...]
[55]
웹사이트
Cronologia: Movimento dos capitães
http://www1.ci.uc.pt[...]
[56]
웹사이트
Arquivo Electrónico: Otelo Saraiva de Carvalho
http://www1.ci.uc.pt[...]
[57]
Youtube
A Guerra Colonial na Guine/Bissau (07 de 07)
https://www.youtube.[...]
[58]
뉴스
Dismantling the Portuguese Empire
https://web.archive.[...]
1975-07-07
[59]
Youtube
CabindaAnosOuro.wmv
https://www.youtube.[...]
[60]
웹사이트
History of Angola
http://www.angola.or[...]
[61]
간행물
Conditions before Independence
http://lcweb2.loc.go[...]
Library of Congress Federal Research Division
1989-02
[62]
서적
Following the Ball : The Migration of African Soccer Players Across the Portuguese Colonial Empire, 1949–1975
Ohio University Press
[63]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Angola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64]
서적
Way of Death: Merchant Capitalism and the Angolan Slave Trade, 1730–1830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65]
서적
Medieval Africa, 1250–1800
[66]
서적
Les guerres grises. Résistance et revoltes en Angola (1845–1941)
self-published
[67]
웹사이트
Angola, History
http://www.factmonst[...]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