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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세이도니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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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세이도니오스는 기원전 135년경 시리아의 아파메이아에서 태어난 그리스계 철학자, 정치가, 과학자이다. 그는 아테네에서 파나이티오스에게 철학을 배우고 로도스에서 학원을 운영하며 명성을 얻었다. 스토아 철학을 따랐으며, 윤리학, 물리학, 천문학,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 활동을 했다. 특히 지구 둘레를 계산하고, 태양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이론을 전개하는 등 과학적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술은 당시 많은 작가들에게 인용되었으며, 로마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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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세이도니오스

2. 생애

포세이도니오스는 "운동가"(Ἀθλητής)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8][9] 기원전 135년경 시리아 북부에 위치한 로마의 도시 아파메이아에서 그리스계 가문에서 태어났다.[10][11][12][13] 오론테스 강에 위치해 있었다.[14] 역사가 필립 프리먼은 "포세이도니오스는 본질적으로 그리스인이었다"라고 말한다.[12] 포세이도니오스는 그의 저술에서 고향인 아파메이아에 대한 애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곳 주민들을 조롱했다.[12]

젊은 시절 그는 아테네로 이주하여 당시 최고의 스토아 철학자이자 아테네 스토아 학파의 마지막 논쟁의 여지 없는 수장(교주)인 파나이티오스 밑에서 공부했다.[10] 파나이티오스가 기원전 110년에 사망했을 때, 포세이도니오스는 25세 정도였을 것이다.[10] 그는 아테네에 머무는 대신 로도스에 정착하여 시민권을 얻었다.[14] 로도스에서 포세이도니오스는 자신의 학원을 운영했는데, 이 학원은 당시 최고의 교육 기관이 되었다.[15][16]

기원전 95년에 로도스섬으로 이주, 과학 연구를 했다. 로도스섬에서 정치인이 되어 기원전 87년부터 86년 동안 가이우스 마리우스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시대의 로마에서 대사를 맡았다. 많은 그리스 지식인과 함께 혼란 한 세계를 안정시키는 세력으로 로마에 기대하였다. 로마 지배층과의 연결은 포세이도니오스의 정치적 입장뿐만 아니라 과학의 연구에도 중요한 것이었다. 로마의 지원을 받고, 로마 지배 지역에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로도스에서 여러 번 과학 연구를 위한 여행을 하고 여행한 장소에는 그리스, 에스파니아, 이탈리아, 시실리, 달마티아, 갈리아, 리구리아, 북아프리카, 아라비아의 동해안이 포함된다. 에스파니아는 현재 카디스이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포세이도니오스는 "운동가"(Ἀθλητής)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8][9] 기원전 135년경 시리아 북부에 위치한 로마의 도시 아파메이아에서 그리스계 가문에서 태어났다.[10][11][12][13] 오론테스 강에 위치해 있었다.[14] 역사가 필립 프리먼은 "포세이도니오스는 본질적으로 그리스인이었다"라고 말한다.[12] 포세이도니오스는 그의 저술에서 고향인 아파메이아에 대한 애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곳 주민들을 조롱했다.[12]

젊은 시절 그는 아테네로 이주하여 당시 최고의 스토아 철학자이자 아테네 스토아 학파의 마지막 논쟁의 여지 없는 수장(교주)인 파나이티오스 밑에서 공부했다.[10] 파나이티오스가 기원전 110년에 사망했을 때, 포세이도니오스는 25세 정도였을 것이다.[10] 그는 아테네에 머무는 대신 로도스에 정착하여 시민권을 얻었다.[14] 로도스에서 포세이도니오스는 자신의 학원을 운영했는데, 이 학원은 당시 최고의 교육 기관이 되었다.[15][16]

기원전 95년에 로도스섬으로 이주, 과학 연구를 했다. 로도스섬에서 정치인이 되어 기원전 87년부터 86년 동안 가이우스 마리우스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시대의 로마에서 대사를 맡았다. 많은 그리스 지식인과 함께 혼란 한 세계를 안정시키는 세력으로 로마에 기대하였다. 로마 지배층과의 연결은 포세이도니오스의 정치적 입장뿐만 아니라 과학의 연구에도 중요한 것이었다. 로마의 지원을 받고, 로마 지배 지역에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로도스에서 여러 번 과학 연구를 위한 여행을 하고 여행한 장소에는 그리스, 에스파니아, 이탈리아, 시실리, 달마티아, 갈리아, 리구리아, 북아프리카, 아라비아의 동해안이 포함된다. 에스파니아는 현재 카디스이다.

2. 2. 로도스에서의 활동

포세이도니오스는 기원전 95년에 로도스섬으로 이주하여 과학 연구를 시작했다.[15] 로도스에서 정치인이 되어 기원전 87년부터 86년 동안 가이우스 마리우스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시대의 로마에서 대사를 맡았다.[15] 당시 로마는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가 그리스 도시들에 대한 로마의 지배에 도전하고, 정치 상황이 민감했던 미트리다테스 1차 전쟁 시기였다.[22] 많은 그리스 지식인과 함께 혼란 한 세계를 안정시키는 세력으로 로마에 기대하였으며, 로마 지배층과의 연결은 포세이도니오스의 정치적 입장뿐만 아니라 과학의 연구에도 중요한 것이었다.[15] 로마의 지원을 받고, 로마 지배 지역에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로도스에서 포세이도니오스는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프뤼타네스 중 한 명으로 임명되면서 고위직에 올랐다.[15] 이는 로도스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직위로, 대통령 및 행정 기능을 결합한 자리였으며, 5명(또는 6명)의 사람이 6개월 동안 이 직위를 맡았다.[21]

포세이도니우스 시대에 로도스는 기원전 1세기에 아테네를 능가하며 스토아 철학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23] 히파르코스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과학 연구에 대한 강력한 명성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이었다.[15] 그의 학파의 조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포세이도니우스가 그리스 및 로마 학생들을 꾸준히 배출했다는 것은 그를 방문한 저명한 로마인들을 통해 알 수 있다.[15]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6년에 강의를 들었고, 동방 원정에서 돌아온 기원전 62년에도 다시 강의를 들었다.[15] 키케로가 20대 후반이었을 때 포세이도니우스의 강의를 수강했고, 나중에 포세이도니우스에게 키케로 자신의 집정관직에 대한 모노그래프를 써달라고 요청했지만, 포세이도니우스는 정중하게 거절했다.[25] 포세이도니우스는 기원전 51년 80대에 사망했고, 그의 손자 니사의 제이슨이 로도스에서 그의 뒤를 이어 학파의 수장이 되었다.[23]

로도스에서 여러 번 과학 연구를 위한 여행을 하고 여행한 장소에는 그리스, 에스파니아, 이탈리아, 시실리, 달마티아, 갈리아, 리구리아, 북아프리카, 아라비아의 동해안이 포함된다. 에스파니아는 현재 카디스이다. Gades에서 파도를 연구하고 그 원인이 달의 운동에 있다고 생각했다.

천문학 분야에서는 쿠레오메데스의 저서에 포세이도니오스의 저작이 인용되어 전해지고 있다. 포세이도니오스는 태양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이론을 전개했다. 태양의 거리와 크기를 정하고 태양까지의 거리는 지구 반경의 9893 배로 추정했다. 실제 거리의 절반 이하였지만 아리스타루코스들이 내세운 거리보다 크게 더 가까운 것이었다. 또한 달까지의 거리의 측정도 실시했다.

지리학 분야에서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지구 크기의 견적에서 약 100년 후, 같은 방법을 이용하여 알렉산드리아 - 로도스섬 사이 위도 차이를 측정하고 7.5 도 라는 결과를 얻었다 (실제로는 5도 14 분 정도). 로도스섬은 알렉산드리아보다 약간 서쪽에 있는데, 같은 자오선 상에 있다고 간주하여, 배의 속도로 항해 기간에서 가상 자오선 호의 길이를 5,000 스타디아로 가정하여 지구 전체 둘레로 240,000 스타디아를 얻었다.

키케로에 따르면 포세이도니오스는 태양과 달과 행성의 위치를 나타내는 기구(안티키티라 메커니즘의 원형으로 여겨진다)를 조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2. 3. 과학 연구 및 여행

포세이도니오스는 로마의 도시 아파메아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파나이티오스에게 배웠다.[10] 기원전 95년에 로도스섬으로 이주하여 과학 연구를 하였고, 로도스섬에서 정치인이 되어 기원전 87년부터 86년 동안 가이우스 마리우스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시대의 로마에서 대사를 맡았다.[10] 로마 지배층과의 연결은 포세이도니오스의 정치적 입장뿐만 아니라 과학 연구에도 중요했으며, 로마의 지원을 받아 로마 지배 지역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10]

포세이도니오스는 그리스, 히스파니아, 이탈리아, 시칠리아, 달마티아, 갈리아, 리구리아, 북아프리카, 아라비아의 동해안 등지를 여행하며 과학 연구를 했다.[2] 특히 히스파니아의 가데스(오늘날의 카디스)에서 달의 운동과 조수의 관계를 연구했다.[17] 그는 일일 조수가 달의 궤도와 관련이 있으며, 조수 높이는 달의 주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기록했고, 춘분과 하지에 맞춰 연간 조수 주기가 동기화된다는 가설을 세웠다.[18]

갈리아에서 켈트족을 연구하면서, 전리품으로 문에 해골을 못 박는 관습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했다.[19][20] 드루이드를 철학자로 존경하며 "자부심과 열정은 지혜에 굴복하고, 아레스는 뮤즈를 경외한다"고 결론 내렸다.[20] 켈트족의 땅에 대한 지리적 논문은 유실되었지만, 시켈리아의 디오도로스, 스트라보, 카이사르,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언급되었다.

천문학 분야에서 포세이도니오스는 태양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이론을 전개하고, 태양과 달까지의 거리를 측정했다. 쿠레오메데스의 저서에 따르면, 태양까지의 거리는 지구 반경의 9893배로 추정했는데, 이는 아리스타루코스의 측정값보다 더 정확했지만 실제 거리의 절반 이하였다. 지리학 분야에서는 에라토스테네스의 방법을 이용하여 지구 둘레를 240,000 스타디아로 계산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포세이도니오스는 안티키티라 메커니즘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태양, 달, 행성의 위치를 나타내는 기구를 조립했다고 알려져 있다.

3. 철학

포세이도니오스는 다방면가로서 그리스-로마 세계 전역에서 명성을 떨쳤는데, 이는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에라토스테네스와 유사하게 당대 모든 지식을 거의 완벽하게 습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지성과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통일된 시스템을 구축하려 했으며, 이는 인간 행동에 대한 설명과 지침을 제공하고자 함이었다.

포세이도니오스는 기상학지리학을 포함한 물리학, 천문학, 점성술과 점술, 지진학, 지질학 및 광물학, 수문학, 식물학, 윤리학, 논리학, 수학, 역사, 박물학, 인류학, 그리고 전술에 관해 저술했다. 그의 연구는 각 분야에 대한 주요 조사였지만, 오류도 존재했다.

그의 작품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단편들뿐이지만, 그의 저서 제목과 주제는 많이 알려져 있다.[27] 스트라보와 세네카와 같은 작가들이 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를 제공한다.

포세이도니오스에게 철학은 지배적인 예술이었으며 모든 개별 과학은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철학에 종속되었다. 그의 모든 저작은 과학에서 역사에 이르기까지 불가분하게 철학적이었다.

그는 스토아 학파의 철학 분류를 수용했는데, 이는 형이상학과 신학을 포함하는 자연 철학인 물리학, 변증법을 포함하는 논리학, 그리고 윤리학으로 나뉜다.[28] 그에게 이 세 가지 범주는 스토아 학파의 방식대로 유기적이고 자연적인 전체의 불가분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부분이었다. 그는 이것들을 살아있는 존재에 비유했는데, 물리학은 살과 피, 논리학은 유기체를 함께 묶는 뼈와 힘줄에 해당하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윤리학은 영혼에 해당한다.[28][29]

확고한 스토아 학파였지만, 포세이도니오스는 파나이티오스와 중기 스토아 학파처럼 혼합주의적이었다.[30] 그는 초기 스토아 학파뿐만 아니라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도 활용했다.[30] 포세이도니오스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연구했으며, 그 작품의 피타고라스적 특징을 강조하는 해설서를 쓴 것으로 보인다.[31] 창의적인 철학자로서 포세이도니오스는 그가 속한 철학 학파의 전통 내에서 혁신을 창조할 것으로 기대되었다.[32] 데이비드 설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36]

3. 1. 윤리학

포세이도니오스는 윤리학은 이론뿐만 아니라 실천에 관한 것이라고 가르쳤다.[33] 윤리학은 인간과 신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 관계하는 우주에 대한 지식을 포함한다.[33]

한때 포세이도니오스가 초기 스토아 학파의 일원론적 심리학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10] 크리시포스는 『정념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통해 이성과 감정이 별개의 독립된 능력이 아니며, 파괴적인 정념은 통제 불가능한 합리적 충동이라고 주장했다. 갈레노스(플라톤 추종자)의 증언에 따르면, 포세이도니오스는 자신의 『정념에 관하여』에서 플라톤의 영혼 삼분법을 채택하여 이성적 능력 외에도 인간의 영혼에는 기개적(분노, 권력, 소유에 대한 욕구 등)이고 욕망적(성욕, 식욕 등)인 능력이 있다고 가르쳤다.[10]

갈레노스의 증언은 아직도 일부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최근의 연구에서는 갈레노스가 논쟁적 효과를 위해 포세이도니오스의 견해를 과장했을 수 있으며, 포세이도니오스는 크리시포스를 반대하기보다는 그의 견해를 명확히 하고 확장하려 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10][34] 키케로, 세네카를 포함하여 포세이도니오스의 윤리적 저술을 알고 있던 다른 작가들은 크리시포스와 포세이도니오스를 함께 묶어 그들 사이에 반대되는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33][34]

3. 2. 물리학

포세이도니오스의 철학적 관점은 우주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물리적 세계의 발전에서 생물의 행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섭리적이고 조직화되어 있다는 것이었다.[35] 파나이티우스는 점술의 현실성과 미래의 대화재 (ekpyrosis)에 대한 스토아 학파의 교리를 의심했지만, 포세이도니오스는 이러한 사상을 옹호했다.[36]

스토아 학파인 포세이도니오스는 우주적 "공감"(συμπάθεια, ''sympatheia'')—인류와 우주의 모든 것을 결합하는 합리적인 설계의 일부로서, 하늘에서 지구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현상들의 유기적인 상호 관계—를 옹호했다. 그는 천문학이나 예언적인 꿈을 통해 자연의 징후로부터 유효한 예측을 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는 일종의 과학적 예측이었다.[37]

4. 과학적 업적

포세이도니오스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다섯 번째 공준을 증명하려는 최초의 시도 중 하나였다.[38] 그는 다섯 번째 공준을 증명할 수 있도록 평행선에 대한 정의를 동등한 명제로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그로부터 유클리드 기하학을 재구성하여 다섯 번째 공준을 정리 안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38] 기하학 저술 외에도 포세이도니오스는 '정리'와 '문제'와 같은 기술 용어에 대한 몇 가지 수학적 정의를 만들거나 견해를 명확히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포세이도니오스는 태양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이론을 전개했다.[39] 태양의 거리와 크기를 정하고 태양까지의 거리는 지구 반경의 9893 배로 추정했다. 실제 거리의 절반 이하였지만 아리스타루코스들이 내세운 거리보다 크게 더 가까운 것이었다.[39] 또한 달까지의 거리의 측정도 실시했다. 그의 천문학 저술의 일부는 클레오메데스의 논문인 『천체의 원운동에 관하여』를 통해 전해지는데, 제2권의 첫 번째 장은 대부분 포세이도니오스의 내용을 복사한 것으로 보인다.

키케로에 따르면 포세이도니오스는 태양과 달과 행성의 위치를 나타내는 기구(안티키티라 메커니즘의 원형으로 여겨진다)를 조립한 것으로 알려졌다.[40]

포세이도니오스는 기상학 저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랐다. 그는 구름, 안개, 바람, 비, 그리고 서리, 우박, 번개, 무지개의 원인에 대해 이론을 세웠다. 그는 또한 구름과 하늘 사이의 경계가 지구 위 40 스타디아에 있다고 추정했다.

포세이도니오스는 별 카노푸스의 위치를 참고하여 호 측정 방식으로 지구 둘레를 계산했다.[44] 클레오메데스의 설명에 따르면, 포세이도니오스는 로도스에서는 카노푸스를 수평선 위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수평선 위로 7.5도까지 상승하는 것을 보았다(두 지역의 위도 사이의 자오선 호는 실제 5도 14분이다). 그는 로도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북쪽으로 5,000 스타디온 떨어진 곳이라고 생각했고, 별의 고도 차이가 두 지역 간의 거리가 원의 1/48임을 나타내므로, 5,000 스타디온에 48을 곱하여 지구 둘레를 240,000 스타디온으로 계산했다.[45]

지구 둘레를 계산하기 위한 포세이도니오스의 방법은 별 카노푸스의 고도에 의존했다.


그가 추정한 이 두 지점의 위도 차이인 360도/48=7.5도는 다소 오류가 있다. (현대 값은 약 5도이다.) 또한, 두 지점은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정확히 같은 자오선상에 있지 않다. 두 지점의 경도 차이는 2도 미만으로, 위도 차이에 비해 무시할 수 없다.

스타디온을 현대의 거리 단위로 변환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포세이도니오스가 사용한 스타디온은 현대의 법정 마일의 정확히 1/10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포세이도니오스의 240,000 스타디온 측정은 38,624km에 해당하며, 실제 지구 둘레인 40,075km와 비교된다.[45]

포세이도니오스는 한 세기 전에 252,000 스타디온의 값을 얻은 에라토스테네스의 방법에 따라 지구 둘레를 구하는 접근 방식을 따랐다. 두 사람 모두 지구 둘레에 대한 값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스트라보는 로도스와 알렉산드리아 사이의 거리가 3,750 스타디온이라고 언급했으며, 포세이도니오스의 지구 둘레 추정치를 180,000 스타디온 또는 28,968km로 보고했다.[46] 대 플리니우스는 그의 출처 중 하나로 포세이도니오스를 언급하면서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지구 둘레를 추정하는 그의 방법을 보고했다. 그러나 그는 히파르코스가 에라토스테네스의 추정치에 약 26,000 스타디온을 더했다고 언급했다. 스트라보가 제시한 더 작은 값과 그리스와 로마 스타디온의 서로 다른 길이는 포세이도니오스의 결과에 대한 지속적인 혼란을 야기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그의 '지리학'에서 지구 둘레에 대해 포세이도니오스의 더 낮은 값인 180,000 스타디온(약 33% 낮음)을 사용했다. 이 숫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까지의 거리를 70,000 스타디온으로 과소평가하는 데 사용되었다.[47]

4. 1. 수학

포세이도니오스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다섯 번째 공준을 증명하려는 최초의 시도 중 하나였다.[38] 그는 다섯 번째 공준을 증명할 수 있도록 평행선에 대한 정의를 동등한 명제로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그로부터 유클리드 기하학을 재구성하여 다섯 번째 공준을 정리 안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38]

기하학 저술 외에도 포세이도니오스는 '정리'와 '문제'와 같은 기술 용어에 대한 몇 가지 수학적 정의를 만들거나 견해를 명확히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4. 2. 천문학 및 기상학

포세이도니오스는 태양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이론을 전개했다.[39] 태양의 거리와 크기를 정하고 태양까지의 거리는 지구 반경의 9893 배로 추정했다. 실제 거리의 절반 이하였지만 아리스타루코스들이 내세운 거리보다 크게 더 가까운 것이었다.[39] 또한 달까지의 거리의 측정도 실시했다. 그의 천문학 저술의 일부는 클레오메데스의 논문인 『천체의 원운동에 관하여』를 통해 전해지는데, 제2권의 첫 번째 장은 대부분 포세이도니오스의 내용을 복사한 것으로 보인다.

키케로에 따르면 포세이도니오스는 태양과 달과 행성의 위치를 나타내는 기구(안티키티라 메커니즘의 원형으로 여겨진다)를 조립한 것으로 알려졌다.[40]

포세이도니오스는 기상학 저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랐다. 그는 구름, 안개, 바람, 비, 그리고 서리, 우박, 번개, 무지개의 원인에 대해 이론을 세웠다. 그는 또한 구름과 하늘 사이의 경계가 지구 위 40 스타디아에 있다고 추정했다.

4. 3. 지리학, 민족학 및 지질학

포세이도니오스는 별 카노푸스의 위치를 참고하여 호 측정 방식으로 지구 둘레를 계산했다.[44] 클레오메데스의 설명에 따르면, 포세이도니오스는 로도스에서는 카노푸스를 수평선 위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수평선 위로 7.5도까지 상승하는 것을 보았다(두 지역의 위도 사이의 자오선 호는 실제 5도 14분이다). 그는 로도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북쪽으로 5,000 스타디온 떨어진 곳이라고 생각했고, 별의 고도 차이가 두 지역 간의 거리가 원의 1/48임을 나타내므로, 5,000 스타디온에 48을 곱하여 지구 둘레를 240,000 스타디온으로 계산했다.[45]

그가 추정한 이 두 지점의 위도 차이인 360도/48=7.5도는 다소 오류가 있다. (현대 값은 약 5도이다.) 또한, 두 지점은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정확히 같은 자오선상에 있지 않다. 두 지점의 경도 차이는 2도 미만으로, 위도 차이에 비해 무시할 수 없다.

스타디온을 현대의 거리 단위로 변환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포세이도니오스가 사용한 스타디온은 현대의 법정 마일의 정확히 1/10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포세이도니오스의 240,000 스타디온 측정은 38,624km에 해당하며, 실제 지구 둘레인 40,075km와 비교된다.[45]

포세이도니오스는 한 세기 전에 252,000 스타디온의 값을 얻은 에라토스테네스의 방법에 따라 지구 둘레를 구하는 접근 방식을 따랐다. 두 사람 모두 지구 둘레에 대한 값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스트라본는 로도스와 알렉산드리아 사이의 거리가 3,750 스타디온이라고 언급했으며, 포세이도니오스의 지구 둘레 추정치를 180,000 스타디온 또는 28,968km로 보고했다.[46] 대 플리니우스는 그의 출처 중 하나로 포세이도니오스를 언급하면서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지구 둘레를 추정하는 그의 방법을 보고했다. 그러나 그는 히파르코스가 에라토스테네스의 추정치에 약 26,000 스타디온을 더했다고 언급했다. 스트라보가 제시한 더 작은 값과 그리스와 로마 스타디온의 서로 다른 길이는 포세이도니오스의 결과에 대한 지속적인 혼란을 야기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그의 '지리학'에서 지구 둘레에 대해 포세이도니오스의 더 낮은 값인 180,000 스타디온(약 33% 낮음)을 사용했다. 이 숫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까지의 거리를 70,000 스타디온으로 과소평가하는 데 사용되었다.[47]

4. 3. 1. 지구 둘레 계산

포세이도니오스는 별 카노푸스의 위치를 참고하여 호 측정 방식으로 지구 둘레를 계산했다.[44] 클레오메데스의 설명에 따르면, 포세이도니오스는 로도스에서는 카노푸스를 수평선 위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수평선 위로 7.5도까지 상승하는 것을 보았다(두 지역의 위도 사이의 자오선 호는 실제 5도 14분이다). 그는 로도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북쪽으로 5,000 스타디온 떨어진 곳이라고 생각했고, 별의 고도 차이가 두 지역 간의 거리가 원의 1/48임을 나타내므로, 5,000 스타디온에 48을 곱하여 지구 둘레를 240,000 스타디온으로 계산했다.[45]

그가 추정한 이 두 지점의 위도 차이인 360도/48=7.5도는 다소 오류가 있다. (현대 값은 약 5도이다.) 또한, 두 지점은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정확히 같은 자오선상에 있지 않다. 두 지점의 경도 차이는 2도 미만으로, 위도 차이에 비해 무시할 수 없다.

스타디온을 현대의 거리 단위로 변환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포세이도니오스가 사용한 스타디온은 현대의 법정 마일의 정확히 1/10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포세이도니오스의 240,000 스타디온 측정은 38,624km에 해당하며, 실제 지구 둘레인 40,075km와 비교된다.[45]

포세이도니오스는 한 세기 전에 252,000 스타디온의 값을 얻은 에라토스테네스의 방법에 따라 지구 둘레를 구하는 접근 방식을 따랐다. 두 사람 모두 지구 둘레에 대한 값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스트라보는 로도스와 알렉산드리아 사이의 거리가 3,750 스타디온이라고 언급했으며, 포세이도니오스의 지구 둘레 추정치를 180,000 스타디온 또는 28,968km로 보고했다.[46] 대 플리니우스는 그의 출처 중 하나로 포세이도니오스를 언급하면서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지구 둘레를 추정하는 그의 방법을 보고했다. 그러나 그는 히파르코스가 에라토스테네스의 추정치에 약 26,000 스타디온을 더했다고 언급했다. 스트라보가 제시한 더 작은 값과 그리스와 로마 스타디온의 서로 다른 길이는 포세이도니오스의 결과에 대한 지속적인 혼란을 야기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그의 '지리학'에서 지구 둘레에 대해 포세이도니오스의 더 낮은 값인 180,000 스타디온(약 33% 낮음)을 사용했다. 이 숫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까지의 거리를 70,000 스타디온으로 과소평가하는 데 사용되었다.[47]

5. 역사 및 전술

그의 저서 《역사》에서 포세이도니우스는 폴리비오스의 《세계사》를 계승했다. 기원전 146년에서 기원전 88년까지의 기간에 대한 그의 역사는 52권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48] 그의 《역사》는 로마의 지배력의 부상과 확장에 대한 기록을 이어가며, 그는 이를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포세이도니우스는 폴리비오스의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스타일을 따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포세이도니우스는 사건이 인간의 심리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열정과 어리석음을 이해했지만, 자신의 역사 저술에서 이를 용서하거나 변명하지 않았으며, 사실 자신의 서술 기술을 사용하여 독자들의 지지나 비난을 얻으려 했다.

포세이도니우스에게 "역사"는 지구를 넘어 하늘까지 확장되었다. 인류는 각자의 정치적 역사에 고립된 것이 아니라, 우주의 일부였다. 따라서 그의 《역사》는 민족과 개인의 고립된 정치사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인간이 환경의 일부로서 행동하고 존재하게 하는 모든 힘과 요인(지리적 요인, 광물 자원, 기후, 영양)에 대한 논의를 포함했다. 예를 들어, 포세이도니우스는 아라비아의 기후와 태양의 생명력, 조수(그의 해양에 관한 책에서 가져온 내용), 기후 이론을 고려하여 사람들의 민족적 또는 국가적 특성을 설명했다.

그리스 역사가 아리아노스는 포세이도니우스의 전술에 관한 저서인 《전쟁의 기술》에 대해 '전문가들을 위해' 쓰여졌다고 불평했는데, 이는 포세이도니우스가 군사 지도력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있었거나, 아마도 폼페이우스와의 친분에서 얻은 지식을 사용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6. 평판과 영향

포세이도니오스는 당대 그리스-로마 세계 전역에서 철학의 거의 모든 주요 분야에 대한 저술로 명성을 얻은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키케로, 리비우스, 플루타르코스, 스트라보, 클레오메데스, 세네카,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등 많은 작가들이 그의 저술을 인용했다.[49] 특히 스트라보는 포세이도니오스를 "우리 시대의 모든 철학자 중 가장 박식한 자"라고 칭송했다. 그의 화려하고 수사적인 문체는 사후 곧 유행에서 벗어났지만, 생전에는 문학적 능력과 스타일로 칭송받았다.

포세이도니오스는 갈리아켈트족에 대한 주요 자료였으며, 티마게네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스트라보에 의해 인용되었다.[49]

그는 로도스 섬의 대사로서 로마 사회 상류층과 교류했다. 키케로는 그의 강의를 들었고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윤리학에 관하여''에서 포세이도니오스가 제시한 파나이티우스의 윤리적 가르침을 따랐다. 폼페이우스는 포세이도니오스에게 자신의 전기를 써달라고 요청했고, 존경의 표시로 그의 문 앞에서 ''파스케스''를 낮추었다. 벨레이우스, 코타, 루킬리우스도 로도스 섬에서 그를 방문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포세이도니오스의 빛의 굴절 보정 방법에 감명을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에라토스테네스의 더 정확한 수치 대신 포세이도니오스의 결과를 승인하면서, 이 결과는 1,500년 동안 지구 둘레의 일반적인 값으로 받아들여졌다.

포세이도니오스는 스승 파나이티우스에 이어 저술과 개인적 접촉을 통해 로마 세계에 스토아 철학을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세네카는 그를 철학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언급했다.

그의 그리스 철학적 사고에 대한 영향은 중세 시대까지 지속되었으며, ''수다''에 그가 자료로 많이 인용된 것에서 알 수 있다.

빌헬름 카펠레는 ''세계에 관하여(De Mundo)''의 교리 대부분이 포세이도니오스에게서 유래했다고 추적했다.[50] 오늘날 포세이도니오스는 폭넓은 시각을 가진 탐구적이고 광범위한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인식된다.

의 포세이도니우스 분화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포세이도니오스, ''뉘른베르크 연대기''에 묘사된 중세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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