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르 빌럼 보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피터르 빌럼 보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제2차 보어 전쟁 참전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국민당 청년부 대표를 거쳐 국방부 장관, 총리를 역임했으며, 1984년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삼원제 의회를 도입하고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일부 완화했지만, 흑인 인구의 권리 확대 요구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1980년대 앙골라 내전에 개입하고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는 등 강경한 정책을 펼쳤으며, 국제 사회의 비판과 경제 제재를 받았다. 198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입장을 고수했으며, 2006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룸)
국민당 청년 조직 대표를 거쳐 1948년 의회에 처음 진출한 이래, 보타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치의 중심 인물로 성장했다. 1958년 내각에 입성한 후, 특히 1966년부터 14년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며 남아프리카 국방군(SADF)의 군사력 강화와 남아프리카 국경전쟁 수행, 비밀 핵무기 개발 등을 주도하며 강경 노선을 구축했다.[16][17][48][49][51]
2. 초기 생애 및 교육
2. 1. 초기 생애
피터르 빌럼 보타는 오렌지 자유주(현재의 프리주) 폴 루 지역의 한 농장에서 아프리카너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피터르 빌럼 보타(Pieter Willem Botha Sr.)는 제2차 보어 전쟁 당시 영국군에 맞서 싸운 보어 코만도 출신이었고, 어머니 헨드리나 크리스티나 보타(Hendrina Christina Botha, née de Wet)는 전쟁 중 영국의 제2차 보어 전쟁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경험이 있다.[4]
보타는 폴 루에 있는 학교를 다녔고, 이후 베들레헴 포르트레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5] 1934년에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블룸폰테인에 위치한 그레이 대학교(현재의 프리주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정치에 뜻을 두고 20세의 나이에 학업을 중단했다.[5] 대학을 그만둔 후, 그는 이웃한 케이프 주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당의 정치 조직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1946년에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기초를 마련한 사우어 위원회(Sauer Commission)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을 전후하여 보타는 독일 나치당에 우호적인 성향을 보였던 아프리카너 민족주의 단체 오세와브란드바흐에 가입했다. 그러나 바르바로사 작전, 즉 독일의 소련 침공 이후 전세가 독일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보타는 오세와브란드바흐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탈퇴했고[46][47], 자신의 이념적 기반을 기독교 민족주의로 옮겼다.[6][7]
2. 2. 교육
보타는 처음에 폴 루 학교에 다녔고 베들레헴 포르트레커 고등학교에서 졸업했다.[5] 1934년, 그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블룸폰테인의 그레이 대학교(현재의 프리주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20세의 나이에 중퇴했다.[5]
3. 정치 경력
1978년 존 포스터(John Vorster)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고, 1984년에는 새로운 헌법을 통해 신설된 국가원수직에 올라 행정 권력을 강화했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기본 골격은 유지하면서도 유색인종과 인도계에게 제한적인 정치 참여를 허용하는 삼원제 의회 도입 등 일부 개혁을 시도했으나, 흑인 다수를 철저히 배제하고 반투스탄(Bantustan) 정책을 고수했다. 그의 통치 기간은 군사력 증강, 앙골라 내전(Angolan Civil War) 등 주변국 분쟁 개입, 국내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에 대한 강경 진압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정책은 국제 사회의 비난과 경제 제재를 심화시켰으며, 국내적으로도 저항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말년에는 투옥 중이던 넬슨 만델라와의 접촉을 시작하기도 했으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 변화 없이 1989년 당내 압력으로 사임했다. 그의 정치 경력은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강경 통치와 군사주의를 상징하는 동시에, 체제 유지를 위한 제한적 개혁 시도라는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3. 1. 초기 정치 활동
1946년, 30세의 나이로 국민당 청년부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2년 후인 1948년에는 남부 케이프주 조지 지역 대표로 의회에 당선되었다. 이 선거는 국민당이 46년간 집권하는 시대의 시작을 알렸으며, 당시 그의 상대는 연합당의 JP 마라리스였다. 1958년 보타는 헨드릭 페르부르트 총리에 의해 내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었고, 1961년에는 새로 설립된 유색인종 담당부 장관 겸 지역개발 장관이 되었다.[14][15]
3. 2. 내각 경력
1958년 헨드릭 페르보에르트 총리에 의해 내무부 차관으로 임명되면서 내각에 처음 입성했다. 1961년에는 신설된 유색인종 담당부 장관 및 지역개발 장관을 맡았다.[14][15]
1966년, 보타는 페르보에르트에 의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페르보에르트가 암살된 후 들어선 존 포스터 정부에서도 국방장관직을 계속 수행했다. 그는 14년 동안 국방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남아프리카 국방군(SADF)의 군사력 강화에 집중했다. 한때 국가 예산의 20%가 국방비로 지출될 정도로 군비 증강에 힘썼으며(1968년 1.3%에서 크게 증가), 이는 남아프리카 국경전쟁 수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16] 보타는 국제 연합의 무기 금수 조치 하에서도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암스코어(Armscor), 아틀라스 항공(Atlas Aircraft Corporation) 등 강력한 자국 군수 산업을 육성했다.[48][49] 또한, 그는 주치의였던 워터 바손(Wouter Basson)에게 생물 무기 및 화학 무기 개발을 지시하기도 했다.[50] 1977년에는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6개의 핵폭탄을 제조했으나, 이 핵무기들은 1990년대 초에 폐기되었다.[17][51]
대외적으로 보타는 주변국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당시 백인 정권이었던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및 로디지아와 '알코라 훈련(Alcora Exercise)'이라는 비공식 군사 동맹을 발족시켜(1970년) 앙골라 독립 전쟁과 모잠비크 독립 전쟁에 공동 대응하려 했으나, 1974년 포르투갈에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 동맹은 붕괴되었다.[52][53] 1975년에는 이스라엘과 비밀 군사 협력 협정(이스라엘-남아프리카 협정)을 체결하고 핵탄두 기술 협력 및 이스라엘제 예리코 미사일 기반의 RSA 시리즈 탄도 미사일 개발을 추진했다.[54][55]
같은 해(1975년), 보타는 앙골라 내전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하고,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는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에 맞서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UNITA)과 앙골라 민족해방전선(FNLA)을 지원하며 사바나 작전(Operation Savannah) 등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56][57] 이 과정에서 앙골라 흑인 병력을 포함시킨 32 대대[58]와 나미비아(당시 남서아프리카)에서 활동한 악명 높은 경찰 대반란 부대 코에보엣(Koevoet)의 창설을 주도했다. 특히 UNITA 지도자 조나스 사빔비와는 코끼리 상아로 만든 AK-47 소총을 선물받을 정도로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지원했다.[59] 남아프리카 군대의 UNITA 지원은 쿠이토 쿠아나발레 전투와 같은 대규모 교전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프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60] 이러한 군사력 유지를 위해 백인 남아프리카인 남성에 대한 의무 군 복무를 강제하는 엄격한 징병 제도가 시행되었다.
1978년 9월, 존 포스터 총리가 멀더게이트 사건 연루 의혹으로 사임하자, 보타는 국민당 의원총회에서 당시 유력한 경쟁자였던 외무장관 픽 보타와 사건의 당사자인 정보부 장관 코니 멀더를 누르고 후임 총리로 선출되었다. 최종 투표에서 그는 코니 멀더를 78표 대 72표로 이겼다. 총리가 된 후에도 보타는 1980년 10월까지 국방장관직을 겸임하다가, SADF 사령관이었던 마그누스 말란을 후임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다.
3. 3. 총리 시절 (1978년 ~ 1984년)
1978년 존 포스터(John Vorster)가 멀더게이트 사건(Muldergate Scandal) 연루 의혹으로 사임하자, 보타는 국민당 의원총회에서 그의 후계자로 선출되어 총리가 되었다. 그는 당시 유력 후보였던 외무장관 픽 보타(Pik Botha)와 정보부 장관 코니 멀더(Connie Mulder)를 제치고 당선되었는데, 최종 투표에서는 멀더를 78대 72로 누르고 승리했다. 총리가 된 후에도 1980년 10월까지 국방장관직을 유지하다가, 남아프리카 국방군(SADF) 사령관이었던 마그누스 말란(Magnus Malan)에게 국방장관직을 넘겨주었다.
보타는 총리로서 헌법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는 백인 중앙 정부의 우월성을 유지하면서도, 흑인 자치구인 반투스탄(Bantustan)에 더 큰 자치(self-rule) 권한을 부여하는 일종의 연방(Federation) 시스템 도입을 구상했다. 또한 정부 지지 기반 확대를 위해 유색인종(혼혈 남아프리카인)과 아시아계 주민들의 권리를 확대하고자 했다. 그는 의회 연설에서 이러한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우리는 적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군사 및 외교 정책 측면에서 보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군사력 증강을 위한 야심찬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유지가 이웃 앙골라(Angola)와 모잠비크(Mozambique)로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 데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두 나라는 과거 포르투갈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상태였다. 또한 국방장관 시절인 1977년에 시작한 비밀 핵무기 프로그램을 지속하여, 6개의 핵폭탄(nuclear bomb) 제조로 이어졌다.[17]
보타는 남서아프리카(현재의 나미비아)에 대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통치를 강하게 유지하려 했으며, 특히 북쪽 앙골라에 쿠바군이 주둔하는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악명 높은 경찰 대반란 부대인 코에보엣(Koevoet) 창설을 주도했으며, SADF의 전력 강화에도 힘써 32 대대와 같은 특수 부대 창설을 지원했다. 앙골라 내전(Angolan Civil War)에서는 반군 단체인 우니타(UNITA)와 그 지도자 조나스 사빔비(Jonas Savimbi)를 적극 지원하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군사적 개입을 지속했다. 국가의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백인 남성을 대상으로 한 엄격한 징병 제도가 시행되었다.
총리로서 보타의 주요 의회 내 반대 세력은 진보 연방당(Progressive Federal Party)의 해리 슈바르츠(Harry Schwarz)와 헬렌 수즈먼(Helen Suzman) 등이었다.
1983년, 보타는 새로운 헌법을 제안하여 백인 유권자들의 국민투표에 부쳤다. 이 헌법은 완전한 연방제는 아니었지만, 명목상으로는 컬러드와 인도인에게 제한적인 정치 참여를 허용하는 권력 분점 형태를 취했다. 기존의 백인 전용 하원 외에, 컬러드를 위한 대표원과 인도인을 위한 대의원을 신설하여 삼원제 의회를 구성했다. 각 의회는 해당 인종 집단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배타적 관할권을 가졌고, 외교 정책이나 인종 관계 등 '일반적 사항'은 공동 상임위원회의 심의 후 세 의회 모두의 승인을 거치도록 했다. 그러나 백인 인구가 컬러드와 인도인을 합친 수보다 많았기 때문에, 이 구조는 여전히 백인의 지배력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헌법 개정안에는 흑인 다수를 위한 정치 참여 방안이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흑인들은 법적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시민이 아닌 각자의 반투스탄 시민으로 간주되었으며, 그곳에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해야 했다. 반투스탄은 점진적으로 독립 국가 지위를 획득할 것으로 계획되었고, 보타 재임 기간 동안 시스케이, 보푸타츠와나, 벤다가 명목상 독립했지만, 국제 사회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크게 의존했다. 만고수투 부텔레지가 이끄는 콰줄루를 포함한 다수의 반투스탄 지도자들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며 독립을 거부했다.
새로운 헌법은 또한 기존의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변경했다. 총리직을 폐지하고 그 권한을 국가원수에게 통합하여 강력한 행정 권한을 부여했다. 대통령은 국민 직접 선거가 아닌, 세 의회 의원들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었다. '일반적 사항'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사실상 대통령과 백인 의회, 그리고 여당인 국민당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 개혁은 흑인 배제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일부 서구 언론에서는 점진적 개혁의 첫걸음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1984년 9월 14일, 보타는 이 새로운 헌법에 따라 초대 국가원수로 선출되면서 총리 임기를 마쳤다.
3. 4. 대통령 시절 (1984년 ~ 1989년)
1983년, 보타는 새로운 헌법을 제안하여 백인 유권자 투표에 부쳤다. 이 헌법은 명목상 컬러드와 인도인에게 권력을 분점하는 형태였으나, 연방제를 도입하지는 않았다. 기존의 백인 전용 하원 외에 컬러드를 위한 대표원과 인도인을 위한 대의원을 신설하여 삼원제 의회를 구성했다. 각 원은 해당 인종 집단 관련 문제에 대한 배타적 관할권을 가졌고, 외교 정책이나 인종 관계 등 "일반적 사항"은 공동 상임위원회 심의 후 세 개 원 모두의 동의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백인 인구가 컬러드와 인도인을 합친 수보다 많았기에, 이러한 구조는 실질적으로 백인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헌법 개정안에는 흑인 다수를 위한 정치 참여 방안이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흑인들은 법적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시민이 아닌, 각 민족 언어 집단별로 할당된 반투스탄의 시민으로 간주되었으며, 그곳에서만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도록 규정되었다. 보타 정권 하에서 시스케이, 보푸타츠와나, 벤다 등 일부 반투스탄이 명목상 독립했지만, 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외에는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크게 의존했다. 만고수투 부텔레지가 이끄는 콰줄루를 포함한 다수의 반투스탄 지도자들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며 독립을 거부했다.
새 헌법은 또한 기존의 의원내각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했다. 총리직을 없애고 그 기능을 국가원수에게 통합하여 강력한 행정 권한을 부여했다. 대통령은 국민 직접 선거나 백인 선거가 아닌, 의회 세 개 원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었다. "일반적 사항"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국가원수와 내각에 있었으며, 세 의회 간 분쟁은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들로 구성된 대통령 평의회에서 해결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사실상 백인, 구체적으로는 국민당이 권력을 유지하도록 설계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해체에 대한 우려로 개혁에 반대했던 보수당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보타는 이 개헌을 추진했다.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84년 선거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 | 6대 | 국민당 | 100.00% | 88표 | 1위 |
1984년 9월 14일, 보타는 새로운 헌법에 따라 초대 국가원수(State President)로 선출되었다. 대통령제 도입은 보타 개인의 권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미 이전부터 의회를 통해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여러 법안을 통과시켜 정부 비판을 억압해왔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이러한 억압적인 통치는 더욱 강화되었고, 코에보엣(Koevoet)과 같은 특수 부대를 동원한 사법 절차 없는 살해나 폭동 진압을 명분으로 한 비상사태 선포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보타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핵심인 원주민 토지법이나 집단 지역법 등의 폐지를 단호히 거부했지만, 1985년에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일부였던 혼인 금지법과 타락 방지법(Immorality Act)을 폐지하는 등 일부 완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적인 개혁은 국제 사회의 비판을 잠재우지 못했다.
미국, 영국, 영연방 등 서방 국가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강화했다. 1980년대 후반, 외국인 투자 감소와 투자 철회 운동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198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전역으로 흑인들의 저항 운동이 확산되자 보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강경 진압을 명령했다.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는 이에 맞서 저항을 이어갔다. 이 시기, 투옥 중이던 ANC 지도자 넬슨 만델라는 보타와의 대화를 요구했고, 보타는 코비 쿠체 법무장관을 대리인으로 보내 3년간 협상을 진행하게 했다. 이로써 보타는 만델라와의 접촉을 처음으로 허용한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도자가 되었다. 1988년 5월, 쿠체 장관은 만델라와의 회담에서 정치범 석방과 ANC 합법화에 동의했으나, 무장 투쟁 포기와 남아프리카 공산당과의 관계 단절을 조건으로 내걸어 만델라가 이를 거부했다.[62][63][64]
1988년, 보타 정부는 앙골라 주둔 쿠바군의 철수와 나미비아 독립 승인을 맞바꾸는 조건으로 휴전 협정에 합의하고, 앙골라 내전에 개입했던 남아프리카 군대를 철수시켰다.[65]
1989년 7월, 보타는 케이프타운에서 만델라와 직접 만나 협상을 시작했다.[66] 그러나 같은 해 8월, 당내 압력 등으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사임했고, 후임으로는 F. W. 데 클레르크가 선출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후 출범한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의 증언 요구를 보타는 끝까지 거부했으며,[67][68] 자신의 인종 차별적 신념을 바꾸지 않았다.[69] 보타의 대통령 재임기는 역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중 가장 잔혹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마그누스 말란 국방장관이 설립한 시민 협력국이나 유진 데콕 경찰 대령이 지휘한 블라크플라스와 같은 죽음의 부대가 암약하며 수천 명을 재판 없이 구금하고 고문, 살해했으며,[70] TRC는 보타에게 이러한 중대한 인권 침해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71]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델라는 정치적 입장을 넘어 보타와 개인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알려져 있다.[72]
4. 아파르트헤이트와 보타
보타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일부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백인 중심의 통치를 유지하는 가운데 흑인 자치구(반투스탄)에 더 큰 자치권을 부여하는 연방제 도입을 구상했으며, 유색인종과 아시아계의 권리를 일부 확대하여 정부 지지 기반을 넓히려 했다. 그는 의회 연설에서 "우리는 적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변화의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구체적인 개혁 조치로, 1940년대 후반부터 금지되었던 인종 간 결혼과 혼혈을 합법화하고, 다인종 정당 설립 금지 조항을 폐지했다. 또한 유색인종의 특정 지역 거주를 제한했던 집단 지역법을 완화했다. 1988년에는 정부 허가와 해당 지역 백인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등 여러 제한 조건 하에 인종 혼합 거주가 가능한 "개방 집단 지역"을 일부 허용했다. 1983년에는 헌법 개정을 통해 유색인종과 인도인에게 제한적인 정치 참여 권리를 부여했다. 보타는 투옥 중이던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지도자 넬슨 만델라와의 접촉을 허가한 최초의 남아공 정부 수반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들은 아파르트헤이트의 근간을 흔들지 못하는 피상적인 조치라는 비판을 받았다. 심지어 이러한 미미한 변화조차 국민당 내 강경파에게는 지나친 것으로 여겨졌다. 전 교육부 장관 안드리스 트레우르니히트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1982년 당을 탈퇴하여 보수당을 창당했다. 반면,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세력과 국제 사회의 요구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국내외의 압력이 거세지자 보타는 오히려 강경 노선으로 회귀했다. 그는 흑인에게 실질적인 정치 권력을 이양하는 것을 거부하고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ANC와의 협상 역시 거부했다. 1985년, 보타는 유명한 루비콘 연설을 통해 만델라 석방을 포함한 흑인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18] 국제 여론을 무시한 그의 태도는 남아공의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켰고, 경제 제재 강화와 랜드화 가치 폭락을 초래했다. 이듬해 미국이 포괄적 아파르트헤이트 반대법을 통과시키자, 보타는 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이 봉기는 우리 안의 야수를 드러낼 것"이라고 위협했다.[19] 또한 1986년 5월, 보타는 잠비아의 루사카, 짐바브웨의 하라레, 보츠와나의 가보로네에 있는 ANC 관련 시설들에 대한 공습을 명령하며 이웃 국가들에 대한 군사적 압박도 서슴지 않았다.[20][21]
보타의 통치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재판 없이 구금되거나 고문, 살해당했다. 훗날 설립된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는 보타가 이러한 중대한 인권 침해에 책임이 있으며, "살인을 포함한 불법 행위"를 직접 승인했다고 결론 내렸다.[22][23] 보타는 끝까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대해 사과하기를 거부했으며, 2006년 90세 생일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통치 방식에 후회가 없다고 밝혔다.[24] 그는 흑인을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일부 백인들이 그러한 생각을 가졌으며 아프리카너들이 "아파르트헤이트를 영속시키는 것을 기꺼이 했고", 그들 중 다수가 "마음속으로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점은 인정했다.[25] 그는 인종 차별 법률이 밀너 경 시대에 시작되어 국민당은 단지 이를 계승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25]
4. 1. 국제 관계
보타는 총리가 된 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한 야심찬 군사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특히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했지만, 그 결과는 엇갈렸다. 그는 국제적인 비판 속에서도 아파르트헤이트 정부 유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웃 앙골라와 모잠비크로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두 나라는 과거 포르투갈 제국이었다가 독립한 상태였다.국방장관 시절부터 보타는 남아프리카 국경 전쟁을 이끌며 국제 연합(UN)의 무기 금수 조치에도 불구하고 남아프리카 방위군(SADF)의 전력을 키웠다. 이를 위해 암스코어(Armscor)나 아틀라스 항공(Atlas Aircraft Corporation)과 같은 강력한 자국 군수 산업을 육성하여 당시 SADF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우수한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48][49]
1977년 국방장관 재직 중, 보타는 비밀 핵무기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6개의 핵폭탄을 제조했으며, 이는 1990년대 초에 폐기되었다.[17][51] 또한 주치의인 부테르 바손에게 생화학 무기 개발을 지시하기도 했다.[50]
보타는 이스라엘과 비밀 군사 협력 관계를 맺었다. 1975년 이스라엘-남아프리카 협정Israel–South Africa Agreement영어을 체결하고,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 시몬 페레스에게 핵탄두 제공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54] 이스라엘의 에리코 미사일יְרִיחוֹ|예리코he 기술을 도입하여 RSA 시리즈 탄도 미사일 개발도 추진했다.[55]
1970년대 초반에는 포르투갈의 이스타두 노부 정권 및 로디지아 백인 정권과 비공식 군사 동맹인 알코라 훈련Alcora Exercise영어을 맺고 앙골라 독립 전쟁과 모잠비크 독립 전쟁에서 협력했으나, 1974년 포르투갈에서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나면서 이 동맹은 해체되었다.[52][53]
보타는 남서아프리카 (현 나미비아)에 대한 남아공의 통치를 강하게 유지하려 했으며, 특히 앙골라에 쿠바군이 주둔하는 상황에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는 쿠푸트(Koevoet)이라는 경찰 대반란 부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1975년부터 보타는 앙골라 내전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소련과 쿠바가 지원하는 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에 맞서, 사바나 작전Operation Savannah영어을 통해 앙골라를 침공하고, 반군 세력인 앙골라 민족해방전선(FNLA)[56]과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UNITA)[57]을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흑인 병사들을 포함한 32 대대와 남서아프리카 경찰 비정규전 부대 등을 조직했다.[58] 특히 UNITA의 지도자 조나스 사빔비와는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며 적극적으로 지원했고,[59] 남아공 군대가 UNITA를 지원한 쿠이토 쿠아나발레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프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가장 큰 규모의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60] 이러한 군사 개입은 1980년대 후반 삼자 협정Tripartite Accord영어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집권 말기인 1988년, 보타는 쿠바군의 앙골라 철수와 나미비아의 독립 승인을 교환하는 조건으로 휴전에 합의하고 앙골라에서 남아공 군대를 철수시켰다.[65]
5. 권력 상실과 퇴진
피터르 빌럼 보타의 권력 상실은 1988년 5월 말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소련 정상회담에서 로널드 레이건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내린 결정과 간접적으로 연관된다. 이 회담에서 나미비아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마련되었는데, 당시 외무장관 피크 보타는 이 문제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직면할 주요 문제를 "심각하게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고 보았다.[26]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435호를 준수하여 나미비아 통제권을 포기하고 유엔 감독하 선거를 허용하면, 소련의 군사 원조가 중단되고 쿠바군은 앙골라에서 철수하기로 합의되었다. 이 결정에 따른 삼자 협정은 1988년 12월 22일 뉴욕 유엔 본부에서 앙골라, 쿠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표들이 서명했다.[27]
1989년 1월 18일, 당시 73세였던 보타는 경미한 뇌졸중을 겪어 업무를 수행하기 어려워졌다. 이로 인해 1월 20일 예정되었던 나미비아 정치 지도자들과의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했고, J. 크리스티안 헤이니스(Chris Heunis)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28] 1989년 2월 2일, 보타는 자신이 지지하던 재무장관 바렌드 뒤 플레시스(Barend du Plessis)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으로 예상하며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당(NP) 대표직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국민당 간부회의에서는 교육장관 F. W. 데 클레르크를 신임 대표로 선출했다. 데 클레르크는 개혁가로서 당내 입지를 빠르게 굳혔고, 강경파들은 보타를 지지했다. 1989년 3월, 국민당은 데 클레르크를 차기 국가 대통령으로 지명했지만, 보타는 1990년 3월까지 임기를 채울 권리가 있다며 사임을 거부했고, TV 연설을 통해 5년 임기를 더 연임하는 방안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케이프타운에서 여러 차례 격렬한 회의가 열렸고, 나미비아에서 유엔 안보리 결의 435호가 시행된 지 5일 후인 1989년 4월 초, 보타와 데 클레르크는 타협에 이르렀다. 보타는 9월 의회 선거 후 은퇴하고 데 클레르크가 국가 대통령직을 승계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보타는 1989년 8월 14일 갑자기 국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그는 잠비아의 케네스 카운다 대통령 방문 계획을 데 클레르크가 자신과 상의하지 않았다는 점을 사임 이유로 들었다. 보타는 전국 텔레비전 방송 연설에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는 카운다 대통령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루사카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반란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내각에 갑작스러운 사임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지 물었을 때 "그들은 내가 건강을 이유로 삼을 수 있다고 답했다. 나는 거짓말로 사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답했다"고 밝히며, "국민당과 이 나라 정부를 위해, 그리고 우리나라의 안보를 위해 수년간 최선을 다한 후에도 내각에서 일하는 장관들에게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불만을 표출했다.[29]
F. W. 데 클레르크는 1989년 8월 14일 권한대행 국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다음 달 선거인단에 의해 보타의 후임으로 5년 임기의 국가 대통령으로 지명되었다.[30] 데 클레르크는 곧 아프리카 민족회의를 포함한 반아파르트헤이트 단체들에 대한 법적 제재를 폐지하고 넬슨 만델라를 석방한다고 발표했다. 데 클레르크의 임기 동안 아파르트헤이트 제도는 해체되었고, 이는 1994년 4월 2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인종 통합 민주 선거로 이어지는 협상의 길을 열었다.
2006년 보타 사망 당시 데 클레르크는 성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개인적으로, P. W. 보타와의 관계는 종종 긴장되었다. 나는 그의 오만한 지도력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고, 국가 안보 위원회 체제가 정부의 거의 모든 측면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했다. 1989년 2월 국민당 대표가 된 후, 나는 P. W. 보타가 대통령직을 완전한 존엄과 예의를 갖추고 끝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불행히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31]
6. 퇴임 이후
보타와 그의 아내 엘리제는 서케이프주 인도양 연안, 조지 시에서 약 16km 떨어진 윌더니스 마을의 집 Die Anker|디 안커af에서 은퇴 생활을 시작했다.[32][33] 1997년 엘리제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후,[34] 그는 잠시 자신보다 31살 어린 독립적인 부유한 여성 Reinette Water Naude|레이네트 워터 나우데af와 약혼했으나,[35][36] 1998년 6월 22일, 25살 연하의 법률 비서 Barbara Robertson|바바라 로버트슨영어과 재혼했다.[36]
보타는 언론 노출을 피하며 지냈고, F. W. 데 클레르크의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으며, 아프리카너 브로에더본드에서도 사임했다.
당시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보타가 새로운 정부의 진실화해위원회(TRC)에 증언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그의 딸들 및 사위들과 만찬 자리를 마련했다. TRC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범죄를 규명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보타의 정치적 라이벌이기도 한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가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보타의 딸 로잔은 아버지가 기소되거나 법정 모욕을 당할 것을 우려하여 TRC 증언에 강력히 반대하는 등 가족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37]
TRC는 조사 과정에서 보타가 1988년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남아프리카 교회협의회 본부 폭파를 지시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998년 8월, 보타는 인권 침해 사실과 자신이 1989년까지 대통령으로서 지휘했던 국가안보위원회(SSC)가 승인한 폭력 행위에 대한 TRC의 증언 요구를 거부하여 벌금형과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38]
그러나 1999년 6월, 보타는 고등법원에 항소하여 승소했다. 재판부(셀와인 셀리코위츠 판사, 폭스크로프트 판사 동의)는 TRC가 보타에게 보낸 출석 요구 통지가 절차상 하자가 있어 기술적으로 무효라고 판결했다.[39]
7. 사망
보타는 2006년 10월 31일, 90세의 나이로 웨스턴케이프 주 윌더니스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40] 그의 사망 소식에 대해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타 씨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상징으로 남을 것이지만, 우리는 그가 우리나라의 평화적인 협상 타결을 위한 길을 열기 위해 취한 조치들도 기억해야 한다"고 언급했다.[41]
당시 대통령이었던 타보 음베키는 전직 국가 원수의 죽음을 애도하며 조기 게양을 지시했다. 보타의 유족은 국장 제안을 거절했으며, 2006년 11월 8일 웨스턴케이프 주 조지에서 가족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이 장례식에는 음베키 대통령도 참석했다.[42]
8. 가족
1943년, 보타는 안나 엘리자베스 로수와 결혼했다.[8] 부부는 두 아들(피에트(Piet)와 로수(Rossouw))과 세 딸(엘사(Elsa), 아멜리아(Amelia), 로잔느(Rozanne)) 등 다섯 자녀를 두었다.[9][10] 1980년대에는 딸 로잔느 보타가 아프리카너스 팝송을 발표하고 ''사리''와 ''스타일''과 같은 잡지 표지에 등장하며 국내에서 소규모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녀는 "대지의 첫 딸(First Daughter of the Land)"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1][13]
1998년, 그는 전처 엘리제가 전년도에 사망한 후 25세 연하의 법률 비서 바바라 로버트슨과 결혼했다.[36]
2022년에는 두 딸이 사망했다. 아멜리아 파슈케는 베티스 베이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12] 같은 해에 로잔느도 암으로 사망했다.[13]
9.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84년 선거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 | 6대 | 국민당 | 100.00% | 88표 | 1위 |
참조
[1]
비디오
This Day In History {{!}} PW Botha succeeds Vorster to become SA's Prime Minister - YouTube
https://www.youtube.[...]
2023-09-28
[2]
뉴스
Afrikaners champion Botha's cause of silence
https://www.independ[...]
1998-01-08
[3]
웹사이트
Botha's Conviction Overturned
https://www.theguard[...]
1999-06-02
[4]
뉴스
PW Botha
https://www.theguard[...]
2006-11-02
[5]
뉴스
PW Botha was ‘kragdadige’ autocrat
https://mg.co.za/art[...]
2006-11-01
[6]
뉴스
P. W. Botha, Defender of Apartheid, Is Dead at 90
https://www.nytimes.[...]
2006-11-01
[7]
웹사이트
Pieter Willem Botha
http://www.sahistory[...]
2011-02-17
[8]
뉴스
P.W. Botha; President of Apartheid-Era South Africa
https://www.washingt[...]
2006-10-31
[9]
뉴스
P. W. Botha
https://www.independ[...]
2006-11-02
[10]
뉴스
PW's sons might quit SA
https://www.news24.c[...]
2005-01-23
[11]
웹사이트
Rozanne Visagie has Finished her Race
https://www.frontlin[...]
2022-10-03
[12]
뉴스
PW Botha’s daughter Amelia dies in car accident
https://www.timesliv[...]
2022-01-21
[13]
뉴스
Rozanne Visagie obituary: Faith helped daughter of South African national leader P.W. Botha through obstacles
https://thewest.com.[...]
2022-10-07
[14]
웹사이트
Pieter Willem Botha
http://www.sahistory[...]
2019-09-03
[15]
뉴스
P. W. Botha, Defender of Apartheid, Is Dead at 90
https://www.nytimes.[...]
2006-11-01
[16]
뉴스
P. W. Botha, Defender of Apartheid, Is Dead at 90
https://www.nytimes.[...]
2006-11-01
[17]
웹사이트
South Africa's Nuclear Weapons Program – Building Bombs
http://nuclearweapon[...]
[18]
뉴스
BOTHA SPEECH: 2 SIGNALS
https://www.nytimes.[...]
1985-08-17
[19]
뉴스
Margaret Thatcher: no fond farewells from Africa
https://www.theguard[...]
2013-04-09
[20]
뉴스
Moves by Botha Telegraph Pullback From Compromise
https://www.washingt[...]
1986-08-17
[21]
뉴스
South African President Warns of Further Raids
https://www.nytimes.[...]
1986-05-22
[22]
뉴스
Dan van der Vat
https://www.theguard[...]
2006-11-02
[23]
간행물
Archived copy
http://www.info.gov.[...]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of South Africa
[24]
뉴스
The Groot Krokodil speaks
https://web.archive.[...]
2006-11-02
[25]
뉴스
PW Botha on the 'so-called apartheid policy'
http://mg.co.za/arti[...]
2006-03-19
[26]
웹사이트
130-1988
http://www.klausdier[...]
[27]
웹사이트
New York Accords signed by Angola, Cuba and South Africa
https://web.archive.[...]
[28]
뉴스
Botha Is Expected to Be Discharged Soon
https://www.nytimes.[...]
1989-01-22
[29]
웹사이트
Washingtonpost.com: South Africa Report
https://www.washingt[...]
[30]
웹사이트
South Africa Limited Reforms
http://www.country-s[...]
[31]
문서
Statement by F W de Klerk on the death of former president P W Botha (Issued by the F W de Klerk Foundation, Cape Town, 1 November 2006)
[32]
뉴스
Through a Lens Darkly: David Goldblatt (1930-2018)
https://www.dailymav[...]
2018-06-27
[33]
뉴스
Former president PW Botha turns 90
https://mg.co.za/art[...]
2006-01-11
[34]
뉴스
Deaths
https://www.washingt[...]
1997-06-07
[35]
뉴스
PW Botha’s bawdy new bride
https://mg.co.za/art[...]
1997-08-08
[36]
뉴스
Botha makes mind up over wife
https://www.independ[...]
The Independent
1998-06-22
[37]
서적
Good Morning, Mr Mandela
Penguin Books
2014
[38]
뉴스
TRC findings: P W Botha
http://news.bbc.co.u[...]
BBC News
1998-10-29
[39]
뉴스
The Citizen
1999-06-02
[40]
뉴스
Former South Africa leader dies
http://news.bbc.co.u[...]
BBC News
2006-11-01
[41]
뉴스
PW Botha: Reaction in quotes
http://news.bbc.co.u[...]
BBC News
2006-11-01
[42]
뉴스
PW laid to rest
http://www.iol.co.za[...]
Independent Online (IOL)
2006-11-08
[43]
서적
Who's Who In South African Politics
https://archive.org/[...]
Ravan Press
1986
[44]
뉴스
PW 'was a brutal dictator'
https://www.news24.c[...]
NEWS24
2006-11-02
[45]
뉴스
FACTBOX-Five facts about S Africa's P.W. Botha
https://www.reuters.[...]
로이터
2007-01-19
[46]
뉴스
P. W. Botha, Defender of Apartheid, Is Dead at 90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2006-11-01
[47]
웹사이트
Pieter Willem Botha
http://www.sahistory[...]
South African History Online
2011-02-17
[48]
뉴스
P. W. Botha, Defender of Apartheid, Is Dead at 90
The New York Times
2006-11-01
[49]
서적
Politics and Government in African States 1960–1985
[50]
논문
South Africa's Chemical and Biological Warfare programme 1981–1995
Rhodes University
2006
[51]
웹사이트
South Africa's Nuclear Weapons Program - Building Bombs
http://nuclearweapon[...]
2018-01-09
[52]
서적
Alcora. Divina Comédia
2013
[53]
뉴스
A military alliance between Portugal and African states that few knew about
Irish Times
2014-04-25
[54]
뉴스
The memos and minutes that confirm Israel's nuclear stockpile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10-05-23
[55]
웹사이트
Book Review: How SA built six atom bombs
https://www.defencew[...]
2010-01-04
[56]
문서
…meanwhile, in South Africa, the bloody capitalist-apartheid regime remains…
Syracuse University
1992-11
[57]
서적
The Devils Are Among Us:The War for Namibia
Zed Books Ltd
1989
[58]
서적
A Military History of Africa
ABC-CLIO
2013
[59]
뉴스
Apartheid Leader's Museum Exhibit Fails to Exert Its Old Draw
http://articles.lati[...]
로산젤스・타임즈
1998-01-23
[60]
서적
Seven Battles that Shaped South Africa
Tafelberg
2006
[61]
서적
The Graves are Not Yet Full
2001
[62]
서적
Mandela: A Critical Life
Oxford University Press
2006
[63]
서적
Mandela: A Biography
PublicAffairs
2010
[64]
서적
Mandela: The Authorised Biography
HarperCollins
2011
[65]
서적
Brothers at War:Dissidence and Rebellion in Southern Africa, 1994
[66]
서적
新書アフリカ史
講談社
2003-02-20
[67]
뉴스
Afrikaners champion Botha's cause of silence
https://www.independ[...]
The Independent
1998-01-08
[68]
웹사이트
Botha's Conviction Overturned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19-02-16
[69]
인터뷰
https://vimeo.com/18[...]
2006
[70]
뉴스
The Guardian Obituary
The Guardian
2006-11-02
[71]
서적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of South Africa Report, Vol. 6, Section 3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of South Africa
2003
[72]
뉴스
Mandela and Botha:The crocodile & the saint
https://www.independ[...]
인데펜데트
2006-11-02
[73]
뉴스
Apartheid-era SA president dies
http://news.bbc.co.u[...]
BBC News
[74]
뉴스
PW Botha:Reaction in quotes
BBC News
2006-11-01
[75]
뉴스
PW laid to rest
Independent Online (IOL)
2006-11-08
[76]
뉴스
만델라 “숙적에 용서와 애도”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2006-11-0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