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와라노 다다미치는 1103년에 태어나 1164년에 사망한 일본의 귀족으로, 후지와라노 타다자네의 아들이다. 그는 1121년 후지와라 씨 장자가 되어 25세에 관백으로 취임했으며, 스토쿠, 고노에, 고시라카와 천황 3대에 걸쳐 섭정·관백을 역임했다. 37년간 섭관으로 재임하며, 호겐의 난, 헤이지의 난 등 격동의 시기를 거쳤다. 그는 시와 서예에도 능했고, 고쿠라 백인일수에 그의 작품이 실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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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다다미치는 헤이안 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귀족 가문인 후지와라씨 북가의 섭관가(摂関家) 출신이다. 아버지는 후지와라노 타다자네이며, 어머니는 미나모토노 아키후사의 딸인 미나모토노 시시(源師子)이다. 가쇼 2년(1107년) 원복(元服)을 치르고 시라카와 법황의 유자(猶子, 양자와 비슷한 관계)가 되었다.
다다미치는 여러 부인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특히 아들 고노에 모토자네(고노에 가 시조), 마쓰도노 모토후사(마쓰도노 가 시조), 구조 가네자네(구조 가 시조) 등은 후일 고셋케(五摂家)로 불리는 주요 섭관 가문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의 후손들은 이후 일본 조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가문의 영향력을 이어갔다. (상세한 가족 관계는 아래 가족 관계 문단 참조)
호안 2년(1121년), 아버지 후지와라노 타다자네가 관백직에서 물러나자, 타다미치는 그 뒤를 이어 후지와라 씨 장자가 되었고, 25세의 나이로 도바 천황의 관백에 취임했다(호안 원년의 정변). 이후 스토쿠, 고노에, 고시라카와 3대에 걸쳐 섭정·관백을 역임했으며, 섭관 재임 기간은 총 37년에 달한다. 이는 증조부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의 50년에 이어 두 번째로 긴 기록이다.
타다미치는 아버지 타다자네 및 동생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와의 정치적 대립과 권력 투쟁을 겪었다. 이러한 갈등은 호겐의 난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난 이후 씨장자의 지위를 회복했으나, 호겐 3년(1158년)에는 고시라카와 상황과의 대립으로 폐문(閉門) 처분을 받고 실각하기도 했다. 이후 헤이지의 난을 거치며 일시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기도 했다.
오호 2년(1162년) 호쇼지 별업에서 출가하여 법명을 엔칸(円観)이라 했고, 쵸칸 2년(1164년) 2월 19일,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타다미치는 섭관 정치가 약화되고 부친 및 동생과의 대립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도바 법황이나 헤이 씨 등 원정 세력과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적 생존을 도모했다. 그의 직계 자손은 이후 오섭가로서 메이지 유신까지 원칙적으로 섭정·관백 직을 독점하게 되었다.
또한 시와 서예에도 능하여, 서예에서는 호쇼지류(法性寺流)라는 유파를 열었다. 그의 글씨는 살집이 있고 둥글면서도 힘이 넘치는 생생한 서풍으로 평가받는다. 한시집 『호쇼지 관백집』, 가집 『타다미치집』, 일기 『호쇼지 관백기』 등이 전해진다.
호안 2년(1121년), 아버지 후지와라노 타다자네가 시라카와 법황의 칙간으로 관백직을 사임하자, 타다미치는 그 뒤를 이어 씨장자가 되었고, 25세의 나이로 도바 천황의 관백으로 취임했다(호안 원년의 정변). 이후 스토쿠 천황, 고노에 천황, 고시라카와 천황 등 3대에 걸쳐 섭정·관백을 역임하며 총 37년간 섭관의 자리를 지켰는데, 이는 증조부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의 50년에 이어 두 번째로 긴 기록이다. 다이지 4년(1129년)에는 정실 부인에게서 얻은 딸 후지와라노 세이시를 스토쿠 천황의 후궁에 뇨고로 입궁시켰고 다음 해(1130년) 세이시는 중궁으로 책립되었다. 스토쿠 천황과 세이시의 관계는 원만했으나 자녀를 얻지 못했고, 호엔 6년(1140년) 9월 2일, 천황의 첫째 황자인 시게히토 친왕이 여방(女房)인 효에노사노 츠보네에게서 태어나자 세이시와 타다미치는 불쾌감을 느낀 것으로 전해진다[3]. 이는 훗날 호겐의 난에서 타다미치가 스토쿠 상황과 시게히토 친왕을 적대시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타다미치는 아버지 타다자네가 동생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를 총애하여 섭관직을 요리나가에게 넘기라는 압력을 받는 상황에 놓였다. 타다미치는 오랫동안 섭관가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해 텐지 2년(1125년)에 23세 연하인 요리나가를 양자로 맞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40세가 넘어 고노에 모토미치 등 아들들을 연이어 얻게 되자, 타다미치는 친아들에게 섭관가를 물려주기 위해 요리나가와의 양자 관계를 파기했다.
타다미치와 타다자네·요리나가 부자 간의 갈등은 고노에 천황의 후궁 정책에서도 드러났다. 큐안 6년(1150년) 정월, 요리나가가 자신의 양녀 후지와라노 타시를 입궁시켜 황후로 삼자, 타다미치 역시 3개월 뒤 양녀 후지와라노 테이시를 입궁시켜 중궁으로 책립했다. 이에 격분한 타다자네와 요리나가는 타다미치를 아버지로부터 의절하고 씨장자 직위를 요리나가에게 넘기도록 했으나, 타다미치는 타시와 천황의 만남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저항했다.
닌페이 3년(1153년) 9월, 고노에 천황이 중병으로 위독해지자 타다미치는 천황으로부터 양위 의사를 전달받았다(『다이기』 닌페이 3년 9월 23일 조). 타다미치는 도바 법황에게 마사히토 친왕(후의 고시라카와 천황)의 아들인 손왕(후의 니조 천황)에게 양위할 것을 건의했으나, 법황은 이를 어린 군주를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려는 술책으로 의심했다. 아버지 타다자네 역시 "관백이 미쳤는가. 아버지인 마사히토 친왕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며 비난했다.
큐주 2년(1155년), 고시라카와 천황이 즉위한 후 타다자네와 요리나가가 고노에 천황 저주 혐의로 실각하면서 타다미치는 복권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대립은 호겐의 난 발발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난 이후 타다미치는 씨장자 지위를 회복했지만, 이전 씨장자인 요리나가가 죄인으로 사망했다는 이유로 선지에 의해 임명되는 형식을 취하게 되어 후지와라 씨의 자율성은 제한되었다. 또한 타다자네와 요리나가가 소유했던 섭관가 전래 장원 및 개인 장원이 몰관령으로 몰수될 위기에 처했으나, 타다미치가 타다자네에게 이들 장원을 자신에게 양도하도록 설득하여 간신히 몰수를 피하고 자신의 소유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요리나가의 영지는 몰수를 피하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시라카와 원정 이후 강력한 상황이 부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섭관 정치의 완전한 부활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정치는 신제이 등 고시라카와 천황의 측근 세력이 주도하게 되었다. 고시라카와 천황에서 니조 천황으로의 양위 과정에서도 관백인 타다미치는 배제된 채, 출가한 신제이와 비후쿠몬인에 의해 결정되었다.
호겐 3년(1158년) 가모 축제에서 고시라카와 천황의 총신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충돌하여 폐문 처분을 받고 사실상 실각했으며, 같은 해 관백직을 아들 고노에 모토미치에게 물려주었다. 타다미치는 노부요리를 포섭하기 위해 그의 여동생을 모토미치의 부인으로 맞이하기도 했으나, 헤이지의 난이 발발하자 노부요리를 버리고 반대 진영에 가담했다. 난 이후 신제이와 노부요리가 제거되고, 후지와라노 츠네무네, 후지와라노 코레카타 등도 유배되면서 조정은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천황의 대립 심화 및 정무 공백 상태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전(大殿)"으로 불리던 타다미치가 일시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여[6] 상황, 천황, 대전, 관백 등이 참여하는 협의 체제가 운영되었다. 1161년 니조 천황이 자신의 인근신 6명을 해임한 후에는 천황과 대전(타다미치)의 합의 하에 정치가 결정되기도 했다. 오호 2년(1162년) 호쇼지 별업에서 출가하여 엔칸(円観)이라 칭했다. 말년에 타다미치는 곁에서 시중들던 여방 고조(家司 미나모토노 모리츠네의 딸)를 총애했으나, 쵸칸 원년(1163년) 말 또는 다음 해 초, 고조가 그녀의 오빠 미나모토노 츠네미츠와 밀통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츠네미츠를 즉시 내쫓았으나(『묘게츠키』), 이 사건의 여파로 얼마 지나지 않아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7].
3. 2. 말년
호겐 3년(1158년) 가모 축제 때 고시라카와 상황의 총신인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대립하여 상황으로부터 폐문 처분을 받고 사실상 실각했다. 같은 해 8월, 관백 직을 적자 모토미치에게 양보했다. 타다미치는 노부요리를 끌어들이려 그의 여동생을 모토미치의 부인으로 맞이하기도 했으나, 헤이지의 난에서는 노부요리를 버리고 아들과 함께 반 노부요리 진영에 가담했다.
난 이후 신제이와 노부요리가 제거되고, 뒤이어 실권을 잡은 후지와라노 츠네무네와 후지와라노 코레카타마저 유배되면서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퇴위한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천황이 대립하는 가운데 마땅한 정무 담당자가 없는 상황에서, '대전(大殿)'이라 불리던 타다미치가 일시적으로 복권되었다.[6] 이로써 상황, 천황, 대전(타다미치), 관백(모토미치) 등이 협의하는 체제가 마련되었고, 1161년 천황이 자신의 측근 6명을 해임한 후에는 천황과 대전(타다미치)의 합의로 정치가 결정되기도 했다.
오호 2년(1162년) 6월, 타다미치는 호쇼지 별업에서 출가하여 법명을 엔칸(円観)이라 했다. 말년에는 곁에서 모시던 여방(女房) 고조(미나모토노 모리츠네의 딸)를 총애했다. 그러나 쵸칸 원년(1163년) 말이나 다음 해 초 무렵, 고조가 자신의 형제인 미나모토노 츠네미츠와 밀통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타다미치는 즉시 츠네미츠를 내쫓았으나(『묘게츠키』 기록), 이 사건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컸던 것으로 보이며, 얼마 지나지 않아 쵸칸 2년(1164년) 2월 19일에 훙거했다.[7] 향년 68세였다.
타다미치는 당대의 뛰어난 서예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호쇼지류(法性寺流)라는 서풍을 열었다. 그의 글씨는 살집이 있고 둥글면서도 힘이 넘치는 생생한 특징을 지닌다. 오슈 후지와라씨의 후지와라노 모토히라가 히라이즈미에 모츠지를 건립할 때 금당 엔류지(훗날 소실)의 현판 글씨를 타다미치에게 의뢰한 일화가 있다. 당시 오슈 후지와라씨는 교토 중앙 귀족 사회에서 변방 세력으로 여겨졌기에, 신분을 밝히고 직접 의뢰하기 어려워 닌나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의뢰했다. 나중에 진정한 의뢰자를 알게 된 타다미치가 현판을 회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아즈마카가미』에 전해진다.
4. 평가
섭관 정치가 실질적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지와라노 다다미치는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가문의 명맥을 이어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버지 후지와라노 타다자네나 동생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와의 심각한 대립, 그리고 늦게 얻은 아들 등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도바 법황이나 헤이 씨와 같은 원정 세력과 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특히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과 같은 큰 혼란 속에서도 살아남아 권력을 유지했는데, 이는 당시 실권자였던 신제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6]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다미치의 직계 자손들은 오섭가(五摂家)로서 메이지 유신 때까지 섭정·관백 직을 사실상 독점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행보가 항상 긍정적으로만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적자였던 고노에 모토자네 사후, 그의 후계자 문제 처리 과정[8]이나 동생 요리나가와의 극심한 대립 등은 결과적으로 섭관가의 분열을 초래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그를 '악랄한 음모가'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정치적인 면모 외에도, 다다미치는 문화적인 업적도 남겼다. (상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 참고)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양성애자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며[9],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동생 요리나가와는 달리 이복형 가쿠호 법친왕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10]
4. 1. 문화적 업적
후지와라노 다다미치는 시가와 서예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한시집 『호쇼지 관백집』(法性寺関白集일본어)과 가집 『타다미치집』(忠通集일본어)을 남겼으며, 서예에서는 호쇼지류라는 독자적인 유파를 창시했다. 그의 시와 서예는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4. 1. 1. 시인으로서
『금엽집』(金葉集)을 비롯한 칙찬집(勅撰集)에 총 58수의 와카(和歌)가 수록되어 있다. 그의 와카 중 한 수는 오구라 백인일수에도 선정되었다.
4. 1. 2. 서예가로서의 평가
후지와라노 다다미치는 서예가로서 호쇼지류라는 유파를 열었다. 그의 서풍은 살집이 있고 둥글면서도 힘이 넘치는 생생함이 특징이다.
그의 서예 실력을 보여주는 일화로 후지와라노 모토히라와의 이야기가 있다. 모토히라가 모츠지에 사찰을 세울 때, 금당 엔류지(나중에 화재로 소실됨)에 걸 현판 글씨를 다다미치에게 의뢰했다. 하지만 당시 오슈 후지와라씨는 교토 중앙 귀족 사회에서 보면 격이 낮은 가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신분을 밝히고 직접 의뢰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실제 의뢰는 닌나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졌다. 나중에 실제 의뢰자가 오슈 후지와라 씨임을 알게 된 다다미치는 현판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아즈마카가미』에는 "엔류지 현판은 간파쿠 다다미치의 글씨이고, 시키시형은 후지와라노 노리나가의 글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5. 영지
호겐의 난 이후, 아버지 후지와라노 타다자네와 동생 후지와라노 요리나가가 실각하면서 그들이 소유했던 섭관가 전래의 장원 및 개인 장원이 모두 몰수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타다미치는 타다자네에게 섭관가 전래 장원과 타다자네 개인의 장원인 "우지노덴령(宇治殿領)"을 자신에게 양도하도록 설득하여, 자신의 소유 영지로 인정받아 몰수를 피했다. 이 과정에서 타다미치는 섭관가의 주요 경제 기반인 장원을 지켜낼 수 있었다.
특히 우지노덴령 중, 타다미치의 누나인 고요인(高陽院)의 소유였던 고요인령(高陽院領) 50여 곳은 타다미치의 넷째 아들이자 고요인의 양자였던 고노에 모토미치에게 상속되어, 훗날 고노에가 영지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동생 요리나가의 영지는 몰수를 피하지 못했다. 요리나가의 영지는 아버지 토바 법황의 영지를 거의 상속받지 못했던 고시라카와 천황의 후원령(後院領)으로 편입되었고, 이는 훗날 죠코도령(長講堂領)의 기반이 되었다.
6. 관력
고안 5년(1103년) 오에노 마사후사에 의해 "타다미치(忠通)"라는 이름을 받았다. 가쇼 2년(1107년), 원복을 치르고 시라카와 법황의 유자(猶子, 양자와 유사한 관계)가 되었다. 에이큐 2년(1114년), 시라카와 법황의 뜻에 따라 법황의 양녀인 후지와라 쇼시(간인류·후지와라노 키미자네의 딸)와의 혼담이 있었으나, 아버지 후지와라노 타다자네가 쇼시의 평판을 이유로 강하게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호안 2년(1121년), 시라카와 법황의 칙간(勅勘, 천황의 꾸지람)을 받아 관백에서 물러난 아버지 타다자네를 대신하여 후지와라 씨 장자(藤氏長者)가 되었고, 25세의 나이로 토바 천황의 관백으로 취임했다(호안 원년의 정변). 이후 스토쿠, 고노에, 고시라카와 3대에 걸쳐 37년간 섭정·관백을 역임했는데, 이는 증조부 요리미치의 50년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재임 기간이다. 다이지 4년(1129년), 정실 부인에게서 얻은 딸 세이시를 스토쿠 천황의 후궁에 뇨고(女御)로 입궁시켰고, 다음 해(1130년) 세이시는 중궁으로 책립되었다. 스토쿠 천황과 세이시의 관계는 좋았으나 자녀를 얻지 못했다. 호엔 6년(1140년) 9월 2일, 천황의 다른 여방(女房)인 효에노사노 츠보네가 첫 황자인 시게히토 친왕을 낳자, 세이시와 타다미치는 불쾌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3]. 이는 훗날 호겐의 난에서 타다미치가 스토쿠 상황과 시게히토 친왕을 적대시하는 한 원인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타다미치는 오랫동안 후계자가 될 아들을 얻지 못하여, 텐지 2년(1125년)에는 23세 연하인 동생 요리나가를 양자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40세가 넘어 모토미치를 비롯한 아들들을 얻게 되자, 친아들에게 섭관가를 물려주기 위해 요리나가와의 양자 관계를 파기했다. 이는 아버지 타다자네가 요리나가를 총애하며 타다미치에게 섭관 자리를 동생에게 넘기라고 압박했던 상황과 맞물려 부자 및 형제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타다미치와 타다자네·요리나가 부자는 고노에 천황의 후궁 정책을 두고도 대립했다. 큐안 6년(1150년) 정월, 요리나가가 자신의 양녀 타시를 입궁시켜 황후로 삼자, 타다미치도 3개월 뒤 자신의 양녀 테이시를 입궁시켜 중궁으로 삼았다. 이에 격분한 타다자네는 타다미치와 의절하고 요리나가에게 씨장자 직위를 넘겨주었으나, 타다미치는 타시와 천황의 만남을 방해하는 등의 방법으로 맞섰다.
닌페이 3년(1153년) 9월, 고노에 천황이 중병에 걸리자 타다미치는 천황으로부터 양위 의사를 전달받고(『다이기』 닌페이 3년 9월 23일 조), 토바 법황에게 마사히토 친왕(훗날의 고시라카와 천황)의 아들인 손왕(훗날의 모리히토 친왕, 니조 천황)에게 양위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는 어린 군주를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려는 음모로 의심받아 법황과 타다자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큐주 2년(1155년) 고시라카와 천황이 즉위한 후, 타다자네와 요리나가가 고노에 천황 저주 혐의로 실각하면서 타다미치는 복권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대립은 호겐의 난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난 이후 타다미치는 씨장자의 지위를 회복했으나, 이전 씨장자인 요리나가가 죄인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선지(宣旨, 천황의 명령)에 의해 임명되어 후지와라 씨 내부의 자율성은 약화되었다. 또한 타다자네와 요리나가가 소유했던 섭관가 전래의 장원 및 개인 장원이 몰관령(沒官領, 몰수된 영지)으로 지정될 위기에 처했으나, 타다미치가 타다자네에게 압력을 가해 자신에게 양도하게 함으로써 몰수를 면했다. 그러나 요리나가의 영지는 몰수되어 고시라카와 천황의 후원령(後院領)으로 편입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시라카와 인세이 이후 상황(上皇)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섭관 정치의 완전한 부활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정치는 신제이(信西) 등 고시라카와 천황의 측근들이 주도하게 되었다. 고시라카와 천황에서 니조 천황으로의 양위 결정 과정에서도 관백인 타다미치는 배제되었다.
호겐 3년(1158년) 가모 축제에서 고시라카와 천황의 총신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충돌하여 폐문 처분을 받고 사실상 실각했으며, 같은 해 관백 직위를 아들 모토미치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타다미치는 노부요리를 회유하기 위해 그의 여동생을 모토미치의 부인으로 맞이하기도 했으나, 헤이지의 난이 발발하자 노부요리를 버리고 반대 진영에 가담했다. 난 이후 신제이와 노부요리가 제거되고 후지와라노 츠네무네, 후지와라노 코레카타 등도 실각하면서 조정에는 권력 공백 상태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전"(大殿)으로 불리던 타다미치가 일시적으로 정치에 복귀하여[6] 원(院, 고시라카와 상황)·천황(니조 천황)·대전(타다미치)·관백(모토미치)의 협의 체제가 형성되었다. 1161년 니조 천황이 자신의 측근들을 해임한 후에는 천황과 대전의 합의 하에 정치가 운영되었다.
오호 2년(1162년) 호쇼지(法性寺) 별업에서 출가하여 엔칸(円観)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말년에는 곁을 모시던 여방 고조(家司 미나모토노 모리츠네의 딸)를 총애했으나, 쵸칸 원년(1163년) 말 또는 다음 해 초, 고조가 그녀의 오빠인 미나모토노 츠네미츠와 밀통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얼마 지나지 않아 훙거했다고 전해진다(『묘게츠키』)[7]. 향년 68세였다.
타다미치는 서예에도 능하여 호쇼지류(法性寺流)라는 서풍을 열었다. 그의 글씨는 살집이 있고 둥글면서도 힘이 넘치는 생생함이 특징이다. 오슈 후지와라씨의 후지와라노 모토히라가 모츠지(毛越寺)에 가람을 건립할 때 금당 엔류지(円隆寺, 후에 화재로 소실)의 현판 글씨를 타다미치에게 의뢰했는데, 신분 차이 때문에 닌나지(仁和寺)를 통해 간접적으로 의뢰했다고 한다. 나중에 진정한 의뢰자를 알게 된 타다미치가 현판을 회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일화가 있다(『아즈마카가미』).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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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obank
藤原忠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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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今鏡』第八、腹々の御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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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保元・平治の乱と平氏の栄華
清文堂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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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保元・平治の乱を読み直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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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二条親政の成立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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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の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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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中世前期女性院宮の研究
思文閣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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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世の家と性
山川出版社
[10]
서적
今鏡全釈
福武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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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大治2年4月9日生、同年11月13日卒。『中右記』
[12]
문서
『尊卑分脈』『系図纂要』による。『今鏡』では源国子と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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