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사키번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히로사키번은 1590년부터 1871년까지 존재했던 일본 에도 시대의 번으로, 현재의 아오모리현 서부 지역을 다스렸다. 쓰가루 다메노부가 난부 씨 가신에서 독립하여 세운 번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영지를 인정받아 시작되었다. 1808년에는 에조치(홋카이도) 경비를 담당하면서 10만 석으로 고쿠다카가 증가했다. 히로사키번은 에도 시대 동안 쓰가루 씨가 통치했으며, 1871년 폐번치현으로 히로사키현이 되었다가 아오모리현에 편입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리쿠오국의 번 - 구로이시번
구로이시번은 1656년 구로이시 쓰가루 가문에서 시작하여 1809년 히로사키번에서 분리되어 성립된 도자마 다이묘 번으로, 보신 전쟁 이후 1871년 폐번치현으로 아오모리현에 편입되었다. - 구로이시시의 역사 - 구로이시 진야
구로이시 진야는 1656년 하타모토 쓰가루 노부히데가 축조한 후 1809년 구로이시 번 성립과 함께 다이묘의 진야가 되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치현으로 폐성되어 현재는 초등학교 등으로 활용되고 아세이 강과 제방을 이용한 자연 요새 형태를 갖췄다. - 구로이시시의 역사 - 구로이시정
구로이시정은 1889년 미나미쓰가루군에서 정촌제 시행으로 성립된 정으로, 1949년 나카고촌 일부를 편입했으나 1954년 여러 촌과 합병하여 구로이시시로 승격되며 소멸한 지역이다. - 무쓰국의 번 - 아이즈번
아이즈번은 센고쿠 시대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아이즈 지방을 다스린 번으로, 여러 가문을 거쳐 도쿠가와 씨 혈족인 호시나 마쓰다이라 씨가 다스렸으며,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교토슈고쇼쿠를 맡아 막부 말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보신 전쟁에서 패배하여 해체되고 도나미번으로 재편되었다. - 무쓰국의 번 - 모리오카번
모리오카번은 난부씨가 700년 가까이 통치한 번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인정받아 조카마치를 건설했으나, 보신 전쟁 패배 후 영지 몰수와 재정난을 겪다 폐번되었다.
히로사키번 | |
---|---|
개요 | |
이름 | 히로사키 번 (弘前藩) 쓰가루 번 (津軽藩) |
로마자 표기 | Hirosaki-han Tsugaru-han |
기본 정보 | |
국가 | 일본 |
시대 | 에도 시대 |
종류 | 도자마 다이묘 |
위치 | 무쓰 국 |
현재 | 아오모리 현 |
중심 | 히로사키 성 |
역사 | |
시작 | 난부 씨 소유지에서 분할 (1590년) |
종료 | 폐번치현 (1871년) |
통치 | |
정치 체제 | 다이묘 |
지리 | |
![]() |
2. 번의 역사
쓰가루 다메노부는 1571년 난부 씨의 지방 행정관 이시카와 타카노부를 공격하여 살해하고 쓰가루 지역에서 난부 씨의 성을 하나씩 점령하기 시작했다.[3] 이시카와, 다이코지, 아부라카와 성을 점령하고 이 지역의 많은 전 난부 가신들의 지지를 얻었다.[3] 1590년 쓰가루 다메노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여하면서, 히데요시로부터 영지를 안도(安堵)받았다.[4] 이는 당시 난부 가문의 내부 혼란을 틈타 모리오카번으로부터 독립한 것이었다.[21]
초대 번주가 되는 쓰가루 다메노부는 원래 난부 씨의 가신이었으나, 전국 시대 말기에 독립을 추진하여 1590년 3월, 나미오카성을 포위하여 성대 나라야마 다이토를 산노헤로 패주하게 했다.[21] 이 때 난부 노부나오는 다메노부 토벌을 구노헤 마사자네에게 명했지만 병을 칭하며 출마하지 않았고, 다른 가신들도 소극적이어서 쓰가루에 출병하지 못했다. 결국 다메노부는 쓰가루·소토하마의 통일을 달성하고, 같은 해 7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여 다이묘의 지위를 공인받았다.[21]
1594년 (분로쿠 3년) 오우라성에서 호리코시성으로 옮겨, 성하 마을을 형성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 타메노부 출진. 부재 중, 이타가키, 오자키, 타다의 삼 장이 모반하여 호리코시성을 점거. 전후, 4만 5000석 안도, 2000석이 더해졌다.[4]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옹호하여 번의 기초를 닦았고, 쓰가루 씨가 에도 시대를 통해 쓰가루와 소토하마를 다스렸다.
히로사키번의 영지와 고쿠다카는, 당초 무쓰국 쓰가루령 4만 5,000석과 세키가하라 참진의 공로로 가증된 고즈케국 닛타군 오다테령 (현재의 군마현 오타시 오지마 지구 등) 2,000석을 합쳐 총 4만 7,000석이었다. 1689년에 구로이시 쓰가루 가문의 분가가 끊어져 분지했던 1,000석을 몰수당하여 4만 6,000석이 되었다.
1590년 쓰가루 다메노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여하여 히데요시로부터 영지를 안도(安堵)받았다.[5] 이는 당시 난부 가문의 내부 혼란을 틈타 모리오카번으로부터 독립한 것으로, 이로 인해 두 번은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5] 처음에는 4만 7천 석을 공인받았으나, 막부가 에조치를 직할함에 따라 에조치의 경비를 담당하면서 1808년에는 10만 석으로 고쿠다카가 증가하였다. 도쿠가와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쓰가루 씨족은 히로사키(가문의 성읍을 위해 명명됨)의 기존 영지를 유지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영토 확장을 허가받았다.[5] 그러나 다메노부는 도요토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장남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시동으로 섬겼고 오사카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차남과 후계자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딸과 결혼시켰다. 그는 또한 이시다 미쓰나리의 아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여 쓰가루 가신으로 만들었다.[6]
다메노부의 뒤를 이은 이는 아들 쓰가루 노부히라 (1607~1631년 재위)였는데, 그는 ''기리시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상속은 처음에 1607년의 에서 그의 조카를 지지하는 파벌에 의해 도전받았다. 그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딸과 결혼했지만 나중에 그녀를 내쫓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카와 결혼하여 도쿠가와 쇼군 정권에 대한 씨족의 입지를 굳혔다. 노부히라는 처음에 1614년에 박해받는 많은 ''기리시탄''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지만 나중에 자신의 신앙을 철회했다. 그는 히로사키성을 완공하고 무쓰 만의 아오모리 항구를 개발했다.
노부히라의 뒤를 이은 이는 아들 쓰가루 노부요시 (1631~1655년 재위)였는데, 그의 시대는 쓰가루 가문을 뒤흔든 일련의 주요 ''오이에 소동'' 소동, 즉 1612년의 , 1634년의 , 그리고 1647년의 으로 특징지어졌다.
쓰가루 노부마사 (1656~1710년 재위)는 학자였으며, 영지의 수입을 늘리기 위한 야심찬 공공 사업을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1700년경까지 영지의 실제 ''고쿠다카''는 약 300,000 ''곡''으로 증가했지만, 공식 등급은 변경되지 않았다.[1] 그러나 1695년에는 흉작으로 인해 이 지역에 광범위한 기근과 기아가 발생했다. 쓰나미가 반대편 해안을 강타하여 구마이시에서 마쓰마에까지 1,467명이 사망했다.[7] 1741년 8월 27일, 영지 북서쪽의 오시마의 화산이 붕괴되면서 30명 이상이 쓰나미로 사망했다.[7]
그의 아들 쓰가루 노부히사 (1710~1731년 재위) 또한 저명한 학자였으며, 아버지의 공공 사업을 계속하려 했지만 이와키 산의 반복적인 분화로 어려움을 겪었다. 쇼군 정권이 부과한 사치 금지법을 무시하고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반면, 그의 신하와 가신들은 점점 더 가난해졌다. 그는 아들 노부아키 (1731~1744년 재위) 시대에도 뒤에서 계속 통치했는데, 그동안 히로사키 성읍이 불탔다. 그의 손자 노부야스 (1744~1784년 재위)와 증손자 노부아키라 (1784~1791년 재위)는 부채가 심각한 영지를 물려받았다.
7대 번주 쓰가루 노부야스 시대에 간조 봉행을 맡았던 치노이 미츠구는 번사로부터의 쌀 대여 일부를 탕감하는 동시에, 호상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등 번 재정을 재건했다. 이 일이 공을 세워 호레키 5년(1755년)에 발생한 호레키 기근 당시에는 아사자 발생을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노부야스로부터 "미츠구"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또한, 같은 해 6년(1756년)에는 소토가하마 순시를 계기로 쓰가루 반도의 해안선에 거주하는 아이누 민족(혼슈 아이누)을 평민으로 취급하는 동화 정책을 실시하여, 그들의 생활과 지위를 향상시켰다. 한편, 아이누 민족 고유의 문화와 생활 양식은 급속히 쇠퇴했고, 저항한 주민 일부는 도망쳤으며, 최종적으로는 히로사키 번에 굴복했다. 그러나 번사 및 상인의 저항으로 치노이는 실각했고, 번정 개혁은 좌절되었다. 텐메이 원년(1781년)부터 일어난 텐메이 대기근은 번에 큰 타격을 주었다. 치노이는 유폐된 곳에서 논을 개척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수학(주판)과 일본 문자의 읽고 쓰기, 실학 등을 가르쳐 존경받았다.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으며, 아코 낭사를 격렬하게 비판한 점,[33] 중화 사상과 주자학, 조선 반도와의 관련성에 반대 의견을 표명한 논문 등이 알려져 있다.
신녕의 뒤를 이은 8대 번주 쓰가루 노부아키는 다시 번의 재정 개혁에 나섰다. 덴메이 4년(1784년), 재등용한 유이 미츠기(乳井貢)를 시작으로, 케나이 우에몬(毛内有右衛門) 등 유능한 무사를 등용했다. 부정행위를 하는 가신과 상인에 대해서는 엄격한 처벌로 대응했다. 노부아키는 더욱 검약령과 지출의 대폭 삭감, 의창 설치에 따른 식량 비축, 번교의 개설과 교육의 보급, 번법의 제정, 연공 징수 방법을 정면법에서 검미법으로 고치는 등 착실한 개혁을 통해 재정을 재건했다. 그러나 노부아키는 30세에 급사했으며, 이에 독살설도 있다.
노부아키라가 후계자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영지는 구로이시에 거주하는 1656년에 설립된 쓰가루 씨족의 ''하타모토'' 분가에서 온 쓰가루 야스치카가 상속받았다. 그는 1809년에 분가를 ''다이묘'' 지위로 승격시켰다.[8] 그는 영지에 어느 정도 안정을 회복하는 많은 개혁을 시행했지만, 에도 (현재 홋카이도)의 변경 지역을 감시하는 데 도움을 주라는 도쿠가와 쇼군 정권의 명령과 그의 아들을 위한 정치적으로 유리한 결혼을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인해 영지에 심각한 부담이 가해졌고, 광범위한 농민 반란으로 이어졌다.[9] 1821년, 그는 두 씨족 간의 오래된 적대감에서 비롯된 난부 씨족의 전 사무라이인 소마 다이사쿠의 암살 시도를 살아남았다. 야스치카는 그의 아들 노부유키 (1825~1839년 재위) 시대에도 뒤에서 계속 통치했는데, 노부유키는 부실한 관리로 유명했다.
그 후, 9대 야스치카 시대의 분카 연간에 가격 인상이 있었고 분카 5년(1808년)에 10만 석이 되었다. 이에 따라 종4위하 승진과 다이히로마 근무가 인정되어 준 국주(국지나미) 다이묘에 열하게 되었다. 이 가문의 지위 향상은 에조치 (현재의 홋카이도) 경호를 맡게 된 것에 대한 것으로, 실제 가증을 동반하지 않아 번의 부담 증가만을 초래했다.
또한 이 가문의 지위 향상으로 인해 대립 관계에 있던 모리오카번 주 난부 리요보다 야스치카가 상석이 되었고, 이에 대한 굴욕감에서 모리오카번사 시모토메 히데노신이 야스치카 암살을 계획한 소마 다이사쿠 사건이 일어났다.
노부유키의 뒤를 이은 이는 쓰가루 유키쓰구 (1839~1859년 재위)였으며, 그는 미카와국의 요시다 번의 다이묘였던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의 5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821년에 구로이시의 8대 영주이자 구로이시 번의 초대 ''다이묘''인 쓰가루 지카타리의 후계자로 입양되었다. 양아버지의 은퇴 후, '''쓰가루 유키노리'''로서, 그는 1825년부터 1839년까지 구로이시 번의 2대 ''다이묘''가 되었다. 쇼군 바쿠후가 심각한 부정 통치로 인해 노부유키를 은퇴하도록 강요한 후, 유키노리는 이름을 쓰가루 유키스구로 바꾸고 히로사키의 11대 ''다이묘''로 그의 자리를 이어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노부아키라가 시작한 많은 개혁을 계속 시행하여 재난에 취약한 영지에 번영을 회복하려 했으며, 5개 조항에서 30개 조항으로 확대된 노부아키라의 윤리 강령을 통해 그의 다루기 힘든 가신들을 통제하려 했다. 쓰구야스는 새로운 논 개간 외에도 대포 주조를 위한 주조소를 설립하고 ''랑가쿠'' 연구를 도입하여 영지의 군사 및 의료 수준을 현대화하려 했다.
유키쓰구의 아들 쓰구아키라는 격동의 바쿠마쓰 시대에 쓰가루 번의 마지막 ''다이묘''가 되었으며, 그 시대에 쓰가루 씨족은 [10] 처음에는 삿초 동맹의 친황제 세력과 손을 잡고 인근의 쇼나이 번을 공격했다.[11][12] 그러나 쓰가루는 곧 노선을 변경하여 잠시 오우에쓰 열반 동맹에 가담했다.[13] 그러나 아직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쓰가루는 몇 달 후에 동맹에서 탈퇴하고 보신 전쟁 동안 제국 측의 여러 전투, 특히 노헤지 전투와 하코다테 전투에 참여하면서 제국 대의에 다시 합류했다.[11]
히로사키번은 난부번과 전국 말기 이래의 유감, 분쟁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쓰가루 해협을 사이에 둔 에조치 (현재의 홋카이도) 경비의 중책을 맡았다. 아오모리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히로사키번은 "하야미치노모노(早道之者)"라는 닌자를 고용하여, 난부 국경 및 북방 등의 정보 수집 및 경비, 영내의 치안 유지, 약초 수집 등에 종사하게 했다. 우구이스바리의 마루와 은밀한 방 등을 갖춘 저택이 히로사키에 현존하고 있다.[31]
메이지 원년(1868년)의 보신 전쟁에서는, 당초 신정부 측이었지만 고립될 것을 두려워하여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속했고, 후에 탈퇴했다. 난부번과는 노헤지 전쟁에서 교전했다. 구 막부 탈주군에 패배하여, 에조치의 마쓰마에에서 도망쳐 온 마쓰마에번 일행을 영내에 보호하고 있다("하코다테 전쟁" 참조). 전쟁 후에 신정부로부터 1만 석을 가증받았다.
메이지 4년(1871년) 7월, 폐번치현에 의해 히로사키현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구로이시현, 시치노헤현, 타테현(홋카이도 남서부), 토나미현, 하치노헤현을 합병했다. 훗날, 현청의 아오모리 이전에 따라 아오모리현으로 개칭되었다.
히로사키번은 야마가 소코의 자손을 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야마가류를 사사한[22] 역대 번주, 분가, 중신들은 대체로 아코 낭사에 호의적이지 않았다[23].
정쿄 검지(貞享検地)는 정쿄 연간에 히로사키번 전역에서 실시된 검지이다.[42] 이를 기록한 검지장 "무츠노쿠니 쓰가루군 어검지 수장(陸奥国津軽郡御検地水帳)" 917책이 현존하고 있다.[43] 그 이전의 검지와 비교하여 매우 정확한 검지가 이루어졌다.[44]
1871년 폐번치현으로 히로사키번은 히로사키현이 되었고, 이후 아오모리현에 편입되었다. 1868년 (메이지 원년) 노헤지 전쟁이 발발하였다.[36]
2. 1. 전사(前史)
1590년 쓰가루 다메노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여하면서 영지를 안도(安堵)받았다.[4] 이는 당시 난부 가문의 내부 혼란을 틈타 모리오카번으로부터 독립한 것으로, 이로 인해 두 번의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2] 처음에는 4만 7천 석을 공인받았으나, 막부가 에조치를 직할함에 따라 에조치의 경비를 담당하면서 1808년에는 10만 석으로 고쿠다카가 증가하였다. 1871년 히로사키 현이 되었고, 이후 아오모리현에 편입되었다.쓰가루 씨는 원래 오우라 씨/大浦氏일본어로, 그 기원은 불분명하다. 훗날 쓰가루 씨 기록에 따르면, 씨족은 귀족 후지와라 씨의 후손이며 혼슈 북부의 쓰가루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경쟁 가문인 난부 씨의 기록에 따르면, 씨족의 시조 오우라 타메노부는 난부 타메노부 또는 쿠지 타메노부로 태어났으며, 난부 씨의 작은 분가 출신으로 형과의 불화로 씨족에서 쫓겨났다.[2] 어쨌든 오우라 씨는 난부 씨의 지방 행정관 이시카와 타카노부 아래에서 세습적인 군다이 호사/郡代補佐일본어였다. 그러나 1571년 타메노부는 이시카와를 공격하여 살해하고 쓰가루 지역에서 난부 씨의 성을 하나씩 점령하기 시작했다.[3] 그는 이시카와, 다이코지, 아부라카와 성을 점령했으며, 곧 이 지역의 많은 전 난부 가신들의 지지를 얻었다.
가마쿠라 시대의 쓰가루는 호조 씨의 도쿠소 영지였으며, 도쿠소 히칸으로서 파견된 쓰가루 소가 씨나 쓰가루 출신의 영주에서 지토 대관으로 발탁된 쓰가루 안도 씨(안도 씨)가 지배했다. 소가 씨는 남북조 시대의 겐추 연간(1380~92년)에 네죠 난부 씨에 의해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안도 씨는 남북조 시대에는 남북 양조 사이를 능숙하게 오가며 본령 유지를 위해 노력했지만, 15세기 중반 무렵 누카베 군에서 세력을 뻗쳐 온 난부 씨에게 쫓겨났다.
전국 시대 초기, 산노헤 난부 씨의 당주 '''난부 노부토키'''는 쓰가루의 영토화를 노리고 진출하여, 엔토쿠 3년(1491년)에 일족의 '''난부(오우라) 미쓰노부'''를 쓰가루 니시하마타네사토 성에 배치하여 안도 씨를 견제했다. 메이오 7년(1498년)[19]에는 넷째 아들 난부(타츠코) 미쓰야스를 소토하마쓰쓰미가우라에 배치하여 "쓰가루 군다이"로 삼았다.
분키 2년(1502년), 타네사토 성주 난부 미쓰노부는 새로 축조한 오우라 성에 모리노부를 두고, 오우라 모리노부는 "오우라 야카타"로 칭해졌으며, 키타, 오우라를 포함한 비와 군은 세력 기반이 되어 갔다. 덴분 15년(1548년) 이후, 산노헤 난부 씨는 당주 난부 야스노부의 동생 '''난부(이시카와) 타카노부'''를 이시카와 성에, 난부 마사유키를 다이코지 성에 배치하여 강력한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쓰가루 씨는 원래 '''오우라 씨'''를 칭했으며, 다이에이 6년(1526년), 초대 '''미쓰노부'''가 사망하고 적자 '''모리노부'''가 뒤를 이었다. 이후, 3대는 모리노부의 사위 '''마사노부''', 4대는 마사노부의 아들 '''타메노리''', 에이로쿠 10년(1567년) 사위 양자로 들어온 '''타메노부'''가 5대째로 계승했다[20]。
2. 2. 쓰가루 다메노부의 독립과 입번
쓰가루 다메노부는 1571년 난부 씨의 지방 행정관 이시카와 타카노부를 공격하여 살해하고 쓰가루 지역에서 난부 씨의 성을 하나씩 점령하기 시작했다.[3] 이시카와, 다이코지, 아부라카와 성을 점령하고 이 지역의 많은 전 난부 가신들의 지지를 얻었다.[3] 1590년 쓰가루 다메노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여하면서, 히데요시로부터 영지를 안도(安堵)받았다.[4] 이는 당시 난부 가문의 내부 혼란을 틈타 모리오카번으로부터 독립한 것이었다.[21]초대 번주가 되는 쓰가루 다메노부는 원래 난부 씨의 가신이었으나, 전국 시대 말기에 독립을 추진하여 1590년 3월, 나미오카성을 포위하여 성대 나라야마 다이토를 산노헤로 패주하게 했다.[21] 이 때 난부 노부나오는 다메노부 토벌을 구노헤 마사자네에게 명했지만 병을 칭하며 출마하지 않았고, 다른 가신들도 소극적이어서 쓰가루에 출병하지 못했다. 결국 다메노부는 쓰가루·소토하마의 통일을 달성하고, 같은 해 7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여 다이묘의 지위를 공인받았다.[21]
1594년 (분로쿠 3년) 오우라성에서 호리코시성으로 옮겨, 성하 마을을 형성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 타메노부 출진. 부재 중, 이타가키, 오자키, 타다의 삼 장이 모반하여 호리코시성을 점거. 전후, 4만 5000석 안도, 2000석이 더해졌다.[4]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옹호하여 번의 기초를 닦았고, 쓰가루 씨가 에도 시대를 통해 쓰가루와 소토하마를 다스렸다.
히로사키번의 영지와 고쿠다카는, 당초 무쓰국 쓰가루령 4만 5,000석과 세키가하라 참진의 공로로 가증된 고즈케국 닛타군 오다테령 (현재의 군마현 오타시 오지마 지구 등) 2,000석을 합쳐 총 4만 7,000석이었다. 1689년에 구로이시 쓰가루 가문의 분가가 끊어져 분지했던 1,000석을 몰수당하여 4만 6,000석이 되었다.
2. 3. 에도 시대
1590년 쓰가루 다메노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참여하여 히데요시로부터 영지를 안도(安堵)받았다.[5] 이는 당시 난부 가문의 내부 혼란을 틈타 모리오카번으로부터 독립한 것으로, 이로 인해 두 번은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5] 처음에는 4만 7천 석을 공인받았으나, 막부가 에조치를 직할함에 따라 에조치의 경비를 담당하면서 1808년에는 10만 석으로 고쿠다카가 증가하였다. 도쿠가와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후, 쓰가루 씨족은 히로사키(가문의 성읍을 위해 명명됨)의 기존 영지를 유지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영토 확장을 허가받았다.[5] 그러나 다메노부는 도요토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장남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시동으로 섬겼고 오사카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차남과 후계자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딸과 결혼시켰다. 그는 또한 이시다 미쓰나리의 아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여 쓰가루 가신으로 만들었다.[6]다메노부의 뒤를 이은 이는 아들 쓰가루 노부히라 (1607~1631년 재위)였는데, 그는 ''기리시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상속은 처음에 1607년의 에서 그의 조카를 지지하는 파벌에 의해 도전받았다. 그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딸과 결혼했지만 나중에 그녀를 내쫓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카와 결혼하여 도쿠가와 쇼군 정권에 대한 씨족의 입지를 굳혔다. 노부히라는 처음에 1614년에 박해받는 많은 ''기리시탄''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지만 나중에 자신의 신앙을 철회했다. 그는 히로사키성을 완공하고 무쓰 만의 아오모리 항구를 개발했다.
노부히라의 뒤를 이은 이는 아들 쓰가루 노부요시 (1631~1655년 재위)였는데, 그의 시대는 쓰가루 가문을 뒤흔든 일련의 주요 ''오이에 소동'' 소동, 즉 1612년의 , 1634년의 , 그리고 1647년의 으로 특징지어졌다.
쓰가루 노부마사 (1656~1710년 재위)는 학자였으며, 영지의 수입을 늘리기 위한 야심찬 공공 사업을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1700년경까지 영지의 실제 ''고쿠다카''는 약 300,000 ''곡''으로 증가했지만, 공식 등급은 변경되지 않았다.[1] 그러나 1695년에는 흉작으로 인해 이 지역에 광범위한 기근과 기아가 발생했다. 쓰나미가 반대편 해안을 강타하여 구마이시에서 마쓰마에까지 1,467명이 사망했다.[7] 1741년 8월 27일, 영지 북서쪽의 오시마의 화산이 붕괴되면서 30명 이상이 쓰나미로 사망했다.[7]
그의 아들 쓰가루 노부히사 (1710~1731년 재위) 또한 저명한 학자였으며, 아버지의 공공 사업을 계속하려 했지만 이와키 산의 반복적인 분화로 어려움을 겪었다. 쇼군 정권이 부과한 사치 금지법을 무시하고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반면, 그의 신하와 가신들은 점점 더 가난해졌다. 그는 아들 노부아키 (1731~1744년 재위) 시대에도 뒤에서 계속 통치했는데, 그동안 히로사키 성읍이 불탔다. 그의 손자 노부야스 (1744~1784년 재위)와 증손자 노부아키라 (1784~1791년 재위)는 부채가 심각한 영지를 물려받았다.
7대 번주 쓰가루 노부야스 시대에 간조 봉행을 맡았던 치노이 미츠구는 번사로부터의 쌀 대여 일부를 탕감하는 동시에, 호상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등 번 재정을 재건했다. 이 일이 공을 세워 호레키 5년(1755년)에 발생한 호레키 기근 당시에는 아사자 발생을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노부야스로부터 "미츠구"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또한, 같은 해 6년(1756년)에는 소토가하마 순시를 계기로 쓰가루 반도의 해안선에 거주하는 아이누 민족(혼슈 아이누)을 평민으로 취급하는 동화 정책을 실시하여, 그들의 생활과 지위를 향상시켰다. 한편, 아이누 민족 고유의 문화와 생활 양식은 급속히 쇠퇴했고, 저항한 주민 일부는 도망쳤으며, 최종적으로는 히로사키 번에 굴복했다. 그러나 번사 및 상인의 저항으로 치노이는 실각했고, 번정 개혁은 좌절되었다. 텐메이 원년(1781년)부터 일어난 텐메이 대기근은 번에 큰 타격을 주었다. 치노이는 유폐된 곳에서 논을 개척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수학(주판)과 일본 문자의 읽고 쓰기, 실학 등을 가르쳐 존경받았다.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으며, 아코 낭사를 격렬하게 비판한 점,[33] 중화 사상과 주자학, 조선 반도와의 관련성에 반대 의견을 표명한 논문 등이 알려져 있다.
신녕의 뒤를 이은 8대 번주 쓰가루 노부아키는 다시 번의 재정 개혁에 나섰다. 덴메이 4년(1784년), 재등용한 유이 미츠기(乳井貢)를 시작으로, 케나이 우에몬(毛内有右衛門) 등 유능한 무사를 등용했다. 부정행위를 하는 가신과 상인에 대해서는 엄격한 처벌로 대응했다. 노부아키는 더욱 검약령과 지출의 대폭 삭감, 의창 설치에 따른 식량 비축, 번교의 개설과 교육의 보급, 번법의 제정, 연공 징수 방법을 정면법에서 검미법으로 고치는 등 착실한 개혁을 통해 재정을 재건했다. 그러나 노부아키는 30세에 급사했으며, 이에 독살설도 있다.
노부아키라가 후계자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영지는 구로이시에 거주하는 1656년에 설립된 쓰가루 씨족의 ''하타모토'' 분가에서 온 쓰가루 야스치카가 상속받았다. 그는 1809년에 분가를 ''다이묘'' 지위로 승격시켰다.[8] 그는 영지에 어느 정도 안정을 회복하는 많은 개혁을 시행했지만, 에도 (현재 홋카이도)의 변경 지역을 감시하는 데 도움을 주라는 도쿠가와 쇼군 정권의 명령과 그의 아들을 위한 정치적으로 유리한 결혼을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인해 영지에 심각한 부담이 가해졌고, 광범위한 농민 반란으로 이어졌다.[9] 1821년, 그는 두 씨족 간의 오래된 적대감에서 비롯된 난부 씨족의 전 사무라이인 소마 다이사쿠의 암살 시도를 살아남았다. 야스치카는 그의 아들 노부유키 (1825~1839년 재위) 시대에도 뒤에서 계속 통치했는데, 노부유키는 부실한 관리로 유명했다.
그 후, 9대 야스치카 시대의 분카 연간에 가격 인상이 있었고 분카 5년(1808년)에 10만 석이 되었다. 이에 따라 종4위하 승진과 다이히로마 근무가 인정되어 준 국주(국지나미) 다이묘에 열하게 되었다. 이 가문의 지위 향상은 에조치 (현재의 홋카이도) 경호를 맡게 된 것에 대한 것으로, 실제 가증을 동반하지 않아 번의 부담 증가만을 초래했다.
또한 이 가문의 지위 향상으로 인해 대립 관계에 있던 모리오카번 주 난부 리요보다 야스치카가 상석이 되었고, 이에 대한 굴욕감에서 모리오카번사 시모토메 히데노신이 야스치카 암살을 계획한 소마 다이사쿠 사건이 일어났다.
노부유키의 뒤를 이은 이는 쓰가루 유키쓰구 (1839~1859년 재위)였으며, 그는 미카와국의 요시다 번의 다이묘였던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의 5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821년에 구로이시의 8대 영주이자 구로이시 번의 초대 ''다이묘''인 쓰가루 지카타리의 후계자로 입양되었다. 양아버지의 은퇴 후, '''쓰가루 유키노리'''로서, 그는 1825년부터 1839년까지 구로이시 번의 2대 ''다이묘''가 되었다. 쇼군 바쿠후가 심각한 부정 통치로 인해 노부유키를 은퇴하도록 강요한 후, 유키노리는 이름을 쓰가루 유키스구로 바꾸고 히로사키의 11대 ''다이묘''로 그의 자리를 이어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노부아키라가 시작한 많은 개혁을 계속 시행하여 재난에 취약한 영지에 번영을 회복하려 했으며, 5개 조항에서 30개 조항으로 확대된 노부아키라의 윤리 강령을 통해 그의 다루기 힘든 가신들을 통제하려 했다. 쓰구야스는 새로운 논 개간 외에도 대포 주조를 위한 주조소를 설립하고 ''랑가쿠'' 연구를 도입하여 영지의 군사 및 의료 수준을 현대화하려 했다.
유키쓰구의 아들 쓰구아키라는 격동의 바쿠마쓰 시대에 쓰가루 번의 마지막 ''다이묘''가 되었으며, 그 시대에 쓰가루 씨족은 [10] 처음에는 삿초 동맹의 친황제 세력과 손을 잡고 인근의 쇼나이 번을 공격했다.[11][12] 그러나 쓰가루는 곧 노선을 변경하여 잠시 오우에쓰 열반 동맹에 가담했다.[13] 그러나 아직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쓰가루는 몇 달 후에 동맹에서 탈퇴하고 보신 전쟁 동안 제국 측의 여러 전투, 특히 노헤지 전투와 하코다테 전투에 참여하면서 제국 대의에 다시 합류했다.[11]
히로사키번은 난부번과 전국 말기 이래의 유감, 분쟁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쓰가루 해협을 사이에 둔 에조치 (현재의 홋카이도) 경비의 중책을 맡았다. 아오모리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히로사키번은 "하야미치노모노(早道之者)"라는 닌자를 고용하여, 난부 국경 및 북방 등의 정보 수집 및 경비, 영내의 치안 유지, 약초 수집 등에 종사하게 했다. 우구이스바리의 마루와 은밀한 방 등을 갖춘 저택이 히로사키에 현존하고 있다.[31]
메이지 원년(1868년)의 보신 전쟁에서는, 당초 신정부 측이었지만 고립될 것을 두려워하여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속했고, 후에 탈퇴했다. 난부번과는 노헤지 전쟁에서 교전했다. 구 막부 탈주군에 패배하여, 에조치의 마쓰마에에서 도망쳐 온 마쓰마에번 일행을 영내에 보호하고 있다("하코다테 전쟁" 참조). 전쟁 후에 신정부로부터 1만 석을 가증받았다.
메이지 4년(1871년) 7월, 폐번치현에 의해 히로사키현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구로이시현, 시치노헤현, 타테현(홋카이도 남서부), 토나미현, 하치노헤현을 합병했다. 훗날, 현청의 아오모리 이전에 따라 아오모리현으로 개칭되었다.
히로사키번은 야마가 소코의 자손을 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야마가류를 사사한[22] 역대 번주, 분가, 중신들은 대체로 아코 낭사에 호의적이지 않았다[23].
정쿄 검지(貞享検地)는 정쿄 연간에 히로사키번 전역에서 실시된 검지이다.[42] 이를 기록한 검지장 "무츠노쿠니 쓰가루군 어검지 수장(陸奥国津軽郡御検地水帳)" 917책이 현존하고 있다.[43] 그 이전의 검지와 비교하여 매우 정확한 검지가 이루어졌다.[44]
2. 4. 메이지 시대
1871년 폐번치현으로 히로사키번은 히로사키현이 되었고, 이후 아오모리현에 편입되었다. 1868년 (메이지 원년) 노헤지 전쟁이 발발하였다.[36]3. 역대 번주
쓰가루 씨족(Tsugaru clan)은 1590년부터 1871년까지 히로사키번을 통치한 도자마 다이묘 가문이다. 번주들의 재임 기간과 관위, 고쿠다카는 다음과 같다.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서열 | 고쿠다카 | |
---|---|---|---|---|---|
1 | 쓰가루 다메노부쓰가루 다메노부/津軽為信일본어 | 1590년 ~ 1607년 | 우쿄노다이후 | 종4위하(従四位下) | 45,000 곡 |
2 | 쓰가루 노부히라쓰가루 노부히라/津軽信枚일본어 | 1607년 ~ 1631년 | 엣추노카미 | 종5위하(従五位下) | 45,000 -> 47,000 곡 |
3 | 쓰가루 노부요시쓰가루 노부요시/津軽信義일본어 | 1631년 ~ 1655년 | 도사노카미 | 종5위하(従五位下) | 47,000 곡 |
4 | 쓰가루 노부마사쓰가루 노부마사/津軽信政일본어 | 1656년 ~ 1710년 | 엣추노카미 | 종5위하(従五位下) | 47,000 곡 |
5 | 쓰가루 노부히사쓰가루 노부히사/津軽信寿일본어 | 1710년 ~ 1731년 | 도사노카미 | 종5위하(従五位下) | 47,000 -> 46,000 곡 |
6 | 쓰가루 노부아키쓰가루 노부아키/津軽信著일본어 | 1731년 ~ 1744년 | 데와노카미 | 종5위하(従五位下) | 46,000 곡 |
7 | 쓰가루 노부야스쓰가루 노부야스/津軽信寧일본어 | 1744년 ~ 1784년 | 엣추노카미 | 종5위하(従五位下) | 46,000 곡 |
8 | 쓰가루 노부아키라쓰가루 노부아키라/津軽信明일본어 | 1784년 ~ 1791년 | 도사노카미 | 종5위하(従五位下) | 46,000 곡 |
9 | 쓰가루 야스치카쓰가루 야스치카/津軽寧親일본어 | 1791년 ~ 1825년 | 사이쿄노다이후, 지주 | 종4위하(従四位下) | 46,000 -> 70,000 -> 100,000 곡 |
10 | 쓰가루 노부유키쓰가루 노부유키/津軽信順일본어 | 1825년 ~ 1839년 | 데와노마미, 지주 | 종4위하(従四位下) | 100,000 곡 |
11 | 쓰가루 유키쓰구쓰가루 유키쓰구/津軽順承일본어 | 1839년 ~ 1859년 | 사콘노쇼겐 | 종4위하(従四位下) | 100,000 곡 |
12 | 쓰가루 쓰구아키라쓰가루 쓰구아키라/津軽承昭일본어 | 1859년 ~ 1871년 | 도사노카미, 지주 | 종4위하(従四位下) | 100,000 곡 |
초대 번주 쓰가루 다메노부는 1600년부터 1607년까지 재임했으며, 종5위하 우쿄노다이부 관위를 받았다. 2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라는 1607년부터 1631년까지 재임했으며, 종5위하 엣추노카미 관위를 받았다. 3대 번주 쓰가루 노부요시는 1631년부터 1655년까지, 4대 번주 쓰가루 노부마사는 1656년부터 1710년까지 재임했으며, 각각 종5위하 도사노카미, 엣추노카미 관위를 받았다.
5대 번주 쓰가루 노부히사는 1710년부터 1731년까지 재임 중 1,000석을 몰수당해 4만 6,000석이 되었다. 6대 쓰가루 노부아키는 1731년부터 1744년까지, 7대 쓰가루 노부야스는 1744년부터 1784년까지, 8대 쓰가루 노부아키라는 1784년부터 1791년까지 재임했다.
9대 쓰가루 야스치카는 1791년부터 1820년까지 재임 중 에조치 경호 공로로 7만 석으로 증가했다가 다시 10만 석으로 고오시(高直し)되었다. 10대 쓰가루 노부유키는 1820년부터 1839년까지, 11대 쓰가루 유키쓰구는 1839년부터 1859년까지 재임했다. 12대 쓰가루 쓰구아키라는 1859년부터 1869년까지 번지사를 역임하고, 종1위까지 승진했다.
4. 지번 (구로이시번)
메이레키 2년(1656년), 노부마사가 히로사키번을 계승할 당시 어렸기 때문에, 막부의 지시에 따라 숙부 노부히데를 후견인으로 삼기 위해 히로사키번에서 5000석을 분할받아 구로이시번이 시작되었다. 노부히데는 히로사키번으로부터 5000석을 분할받을 당시, 가타·사루가·아오모리를 희망했지만, 다메노부 시대의 거점 중 하나인 아오모리현구로이시시에 배치되었다. 5000석의 내역은 구로이시 주변 2000석, 히가시쓰가루군히라나이정 주변 1000석, 히로사키번의 비영지 고즈케국 오타테 (현재의 군마현오타시 오지마 지구 등) 일대 2000석이었다.
분카 6년(1809년) 히로사키 본번으로부터 6000석을 추가로 분여받아, 1만 석의 외양 대명으로서 야나기노마에 자리잡았다. 거성은 구로이시 진야(구로이시성)이다.
역대 당주(마사무 이후)는 본가인 히로사키 번주로부터 편휘를 받았다.
막말의 보신 전쟁에서는 본가인 히로사키번과 행동을 함께 했다. 메이지 4년(1871년) 7월, 폐번치현에 의해 구로이시현이 되었다가, 같은 해 9월 다른 현과 함께 히로사키현에 병합되어, 현재의 아오모리현의 일부가 되었다.
구로이시 쓰가루 가문은 교대 요리아이 5,000석으로 시작하여, 2대 노부토시 때 동생 노부즈미에게 1,000석을 분여하여 4,000석이 되었다. 3대 마사타케 시대에는 교대 요리아이에서 제외되었다고 전해진다. 8대 치카타리 시대인 분카 6년(1809년)에 1만 석의 외양(토자마) 다이묘가 되었다.
5. 막말의 영지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히로사키 번은 다음과 같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다.[15][16]
- 무쓰국
- * 쓰가루군 828개 촌
- 무쓰국 (이와시로국)
- * 다테군 1개 촌 (구로이시 번)
- 와진치
- * 스츠 장소 (스츠군) - 히로사키번 스츠 진야
- * 시마코마키 장소 (시마마키군) - 히로사키번
히로사키번은 메이지 유신 이후 한때 개척사 직할령이 된 시리베시국 시마마키군의 일부가 다시 소령에 더해졌다. 한 체제의 대부분의 영지와는 달리, 히로사키 번은 주기적인 토지 대장 조사와 예상되는 농업 수확량을 기반으로 할당된 ''고쿠다카''를 제공하도록 계산된 연속적인 영토로 구성되었다.[15][16]
6. 주요 시설 및 문화
6. 1. 번저 (에도)
히로사키번의 번저(상저택)는 혼조 후타츠메(현재의 스미다구 카메자와 2초메 키타사이 거리)에 있었다. 지하철 도에이 료고쿠역에서 하차하여 '스미다 호쿠사이 미술관'이 있는 부근이다. 중저택은 무카이야나기하라(현재의 타이토구 토리고에 1초메)에 있었으나, 분세이 10년(1827년) 윤 6월에 토고시 (현재의 시나가와구 토고시 1초메)로 옮겨졌다.[37] 부지는 약 6천 평이었다. 하저택은 니혼바시(현재의 주오구 니혼바시하마초 2초메)에 있었다. 지금은 하마초 공원이 되었으며, 공원 부지 내에는 이 밖에 히토츠바시 도쿠가와 가문, 마키노 가문 등의 저택이 있었다.6. 2. 보제사 (묘소)
역대 히로사키번주의 보제사는 조쇼지 및 고쇼 신사이다. 에도 묘소는 간에이지 산내의 신량원이다. 번사의 묘는 혼교지 등이다.[38]6. 3. 기타
쓰가루 지방의 이와키 산은 산악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산쇼 다유(안쥬와 주시왕마루)에 등장하는 안쥬가 모셔져 있다.[39] 세쓰쿄쿠에서 안쥬는 고문으로 비참하게 죽었는데, 그녀를 살해한 산쇼 다유 등이 단고 국 출신이었기 때문에 히로사키 번 영내에 단고 사람이 들어오면 안쥬의 원령으로 인해 재해가 일어난다고 여겨졌다.[39] 에도 시대 말기에도 히로사키 번에서는 단고 출신을 기피하는 "단고 비요리" 풍습이 있었다.[39]텐메이 8년(1788년) 7월, 에도 막부 준견사의 일원으로서 히로사키 번 내에 들어온 후루카와 고쇼켄은 7월 15일 일기에 "단고 비요리"에 대해 기록했다.[39] 단고 사람이 히로사키 번 내에 들어오면 날씨가 나빠지고 재앙이 발생하여 단고 출신은 영내에 한 명도 없다고 한다.[39][40] 막부 준견사가 에도로 출발하기 전, 쓰가루 번은 막부에 단고 출신이 있는지 조회하고, 있다면 제외해 달라고 요청하여 해당 인물은 제외되었다.[40] 후루카와 고쇼켄은 단고 비요리를 망설이라고 언급했지만, 막부는 쓰가루 번의 요청을 거부했고, 이는 번의 공식 기록에도 남아 있다.[40] 일설에는 히로사키 번이 가혹한 정치를 은폐하고 영민들의 불만을 단고 사람들에게 돌리려는 책략이었다고도 한다.[41]
쓰가루 번의 특징적인 정책 중 하나는 수해 대책이었다. 사냥에 능숙한 마타기와 혼슈 아이누를 무사 신분으로 등용하여 반달가슴곰, 일본늑대, 멧돼지 등을 사냥하여 영민을 수해로부터 보호했다. 이 정책으로 에도 시대에는 쓰가루 반도에서 짐승이 멸종에 가깝게 감소했고, 수해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고 한다.
참조
[1]
서적
Land and Lordship in Early Modern Japan
https://books.google[...]
[2]
서적
Land and Lordship in Early Modern Japan
Stanford University Press
[3]
간행물
Tokugawa Bakufu to Tozama 117 han
1976-04
[4]
서적
Woman in the Crested Kimono
Yale University Press
[5]
웹사이트
Tsugaru-han on Edo 300 HTML
http://www.asahi-net[...]
[6]
웹사이트
Tsugaru-shi on Harimaya.com
http://www2.harimaya[...]
[7]
뉴스
Volcanic and tsunami activity in Aomori Prefecture's past
https://www3.nhk.or.[...]
2018-12-26
[8]
서적
Boshin nanboku sensō to Tōhoku seiken
Kita no mori
[9]
서적
Aizu-han
Gendai shokan
[10]
서적
Buke kazoku meiyoden
http://kindai.ndl.go[...]
Koyasu Nobushige
[11]
서적
[12]
서적
https://books.google[...]
[13]
서적
[14]
서적
The rough guide to Japan
Rough Guides
[15]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16]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17]
문서
관광시설「津軽藩ねぷた村」등。
[18]
문서
津軽家文書『御日記方編』
弘前図書館
[19]
문서
『前代暦譜』
[20]
문서
『弘前市史』
[21]
문서
『南部根元記』
[22]
문서
赤穂藩의 종가인 히로시마번 아사노가는 산카 소코가 비판한 주자학을 번학으로 했다.
[23]
문서
쓰가루번의 지번(분가)인 쿠로이시번(당시는 다이묘가 아니라 하타모토)의 당주·쓰가루 마사지로는, 사건 직후에 맨 먼저 가신들과 함께 기라 저택에 달려가, 기오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24]
문서
津軽家文書『弘前藩庁日記』
국문학연구자료관 등
[25]
문서
『산카고류』에는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다""간해도 고치지 않는 주군이라면 신하로부터 떠나야 한다"고 "사는 두 주군을 섬긴다"를 긍정하는 부분이 있으며, 소코 자신도 실천하고 있다.
[26]
문서
쓰가루 노부타테는 세키가하라에서 미쓰나리의 유자녀 이시다 시게나리와 쇼겐인을 구출, 히로사키 번주에게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피를 잇는 자가 있다(쓰가루 노부요시·쓰가루 노부마사 등), 아사노씨는 그 미쓰나리를 습격한 칠장의 하나이기도 하다.
[27]
문서
오이시 무네노스의 차남인 요시코쿠도 쓰가루가에 시중드는 것을 좋다고 여기지 않고 도주, 사누키국 다카마쓰번 마쓰다이라가에 시관하고 있다.
[28]
문서
메이지 정부『구고구령취조장』
[29]
문서
동『각번고병조세조장』및『번제일람』메이지 2년 구력 6월 12일(1869년 7월 20일)
[30]
문서
"히로사키 공의 액, 들어도 걱정스러울 뿐이다"라고 수 페이지에 걸쳐 동정이 보내지고, 쓰가루씨는 존칭이지만, 남부씨는 부름이 되어 있다(마쓰우라 시즈야마「갑자야화속편」권 96, 이삼화「히로사키 공 핍색의 일 남부의 이야기」)
[31]
뉴스
【おもてなし魅せどころ】弘前忍者屋敷
日経MJ
2021-03-22
[32]
웹사이트
吉田松陰 관계 자료 > 산카 소스이 시문
https://adeac.jp/yam[...]
山口県立山口図書館・山口県文書館
[33]
문서
『유이 곤 전집』
[34]
문서
「당주 신이상이 고묘소 참배」
홍보 아지가사와
2013-03
[35]
문서
『산카류 병법』뿐만 아니라 쓰가루번에 일도류의 기반을 굳히고 있다.
[36]
웹사이트
国道101号 大間越
http://www.koutsu-ao[...]
2021-05-03
[37]
서적
文政戸越村絵図
品川区史
[38]
서적
青森県の歴史散歩
山川出版社
2007-05
[39]
서적
東遊雑記
三一書房
1969-01
[40]
논문
近世津軽領の「天気不正」風説に関する試論
弘前大学大学院地域社会研究科
2008
[41]
간행물
特集 怪奇日本77不思議
[42]
웹사이트
貞享検地
https://adeac.jp/hir[...]
2022-12-04
[43]
서적
津軽家文書総目録
https://iss.ndl.go.j[...]
弘前市立弘前図書館
1984
[44]
논문
貞享元年の津軽藩の検地について
法政大学史学会
196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