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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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후 일본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로 연합국의 점령이 종료되고 주권을 회복했지만, 영토 일부를 상실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당의 장기 집권과 55년 체제가 성립되었고, 미일 안보 조약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었다. 경제는 고도성장을 이루었으나, 석유 파동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문화적으로는 서구화의 영향과 함께 일본 고유의 대중문화가 발전했으며, 국제 사회에서 문화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80년대에는 미일 무역 마찰과 버블 경제가 나타났으며, 사회적으로는 도시화와 여성의 지위 변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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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국호 | 일본국 (にほんこく, にっぽんこく) |
위치 | 동아시아 |
수도 | 도쿄도 |
정치 체제 | 입헌군주제 |
공용어 | 일본어 |
면적 | 377,975km² |
인구 | 1억 2천만 명 (2023년 기준) |
역사 | |
연합군 점령 종료 | 1952년 4월 28일 |
쇼와 시대 후기 시작 | 1952년 4월 29일 |
쇼와 시대 종료 | 1989년 1월 7일 |
정치 | |
정부 형태 | 의원내각제 |
국가 원수 | 천황 |
행정 수반 | 내각총리대신 |
입법부 | 국회 |
경제 | |
통화 | 일본 엔 (JPY) |
명목 GDP | 약 5조 달러 (2021년) |
1인당 명목 GDP | 약 4만 달러 (2021년) |
주요 산업 | 자동차 산업 전자 산업 금융업 제조업 |
사회 | |
교육 | 높은 수준의 교육 시스템 |
복지 | 잘 갖춰진 사회 복지 시스템 |
기타 | |
국가 코드 | JP |
인터넷 최상위 도메인 | .jp |
국제 전화 코드 | +81 |
2. 정치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지만, 대한민국(한국)과 타이완 등 이전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상실했다.[2] 주권 회복 이전에도 전범으로 처벌받았던 8만여 명이 복권되어 정계와 정부로 복귀했다.[2] 군비 제한과 천황의 권한에 대한 논쟁 속에서 1952년 10월 전후 첫 선거가 치러졌고, 자유당의 과반수가 낙선했다.[2] 1954년에는 민간 통제하에 자위대가 설립되었다.[2] 냉전과 한국 전쟁은 일본의 경제 재건, 공산주의 억제, 노조 활동 좌절에 큰 영향을 미쳤다.[2]
정당들의 분열과 소수당 정권이 지속되자, 보수 세력은 1955년 11월 자유민주당(자민당)을 결성하여 1993년까지 집권했다.[2] 자민당은 전직 관료, 지역 정치인, 기업인 등 상류층이 주도했으며, 일본사회당이 제2의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다.[2] 1964년에는 일련정종의 창가학회를 기반으로 공명당이 결성되어 도시 노동자, 여성 등의 지지를 얻었다.[2] 공명당과 일본사회당은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의 개정 및 파기를 지지했다.[2]
1970년대 후반, 공명당과 민주사회당은 미일 상호방위조약을 수용하고, 일본사회당도 반전 입장을 완화했다.[3] 미국은 일본에 국방비 증액을 압박했고, 이는 국회에서 논쟁을 야기했지만, 대장성 관료들이 주로 반발했다.[3]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재무 스캔들로 사임하고, 1976년 록히드 사건으로 구속되었다.[3] 1980년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의 급사로 스즈키 젠코가 새 총리가 되었으나, 교과서 제작 논쟁으로 내각이 붕괴되었다.[4] 1982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리가 되어 1984년 자민당 총재에 재선되었다.[4] 1987년 나카소네 총리의 퇴임은 일본 현대사의 결정적인 시기였다.[4]
2. 1. 55년 체제
연합국의 점령이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의 발효로 종료되면서 일본국은 주권을 회복했지만, 조선, 타이완, 사할린 등의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이 조약은 일본에게 집단적 자위권을 허용했고,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같은 날 구 일미 안보 조약에 서명했다.일본이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기 전부터 공직추방 대상자들의 추방 해제가 진행되었다. 군사비용과 천황의 주권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는 가운데, 1952년 10월 연합국 점령 이후 첫 선거에서 자유당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후 1954년 자위대가 창설되었고, 냉전과 한국 전쟁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경제 발전으로 이어졌다.[2] 또한 미국은 일본을 자유주의 진영에 편입시키기 위해 다양하고 광범위한 대규모 대일 문화 외교를 전개하였다.[13]
일본 국내에서는 정당 해산과 창당이 계속되었고, 1955년 11월 보수 세력인 자유당과 일본 민주당이 합병하여 자유민주당(자민당)을 결성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사회당이 재통합되었다. 이로써 55년 체제가 성립되었다.[14] 1964년에는 창가학회를 지지 기반으로 하는 공명당이 창당되어, 제3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1967년)에서 사회당과 민사당에 이어 제3당이 되었다.[15] 1975년까지 공명당은 사회당과 마찬가지로 일미 안보 조약 파기를 주장했다.[16]

1970년대 후반, 공명당과 민사당은 미일 안보 조약 파기 주장을 완화하기 시작했다. 미일 안보 조약에 강하게 반대했던 사회당도 반군사적 입장을 일부 수정해야 했다. 이러한 가운데 1976년 11월, 미키 개조 내각은 방위비 1% 틀을 각의 결정했다.[19]
같은 해 12월, 미키 다케오 수상의 임기 만료로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자민당은 처음으로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20] 한편,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는 금맥 문제로 사임하고, 록히드 사건으로 체포 및 기소되었으나,[3][17] 다나카파를 이끌며 막후 영향력을 유지했다.[18]
2. 2. 미일 안보 조약
1960년 미일 안보 조약 개정은 안보 투쟁이라 불리는 대규모 시위와 정치적 격변을 야기했다.[2] 1970년대 후반, 공명당, 민주사회당 등 야당은 미일 상호방위조약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으며, 일본 사회당 또한 한때의 강력한 반군사적 입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3]2. 3. 정치적 사건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는 금맥 문제[3]로 사임했고, 1976년에는 록히드 사건으로 구속되었다.[3]1980년 6월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스즈키 젠코가 새 총리로 당선되었다. 스즈키 총리는 교과서 제작 논쟁에 휘말렸다.[4]
방위청 장관을 지낸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82년 11월 총리가 되었고, 1984년 11월 자민당 총재에 재선되었다.[4] 나카소네는 일본의 방위력 강화를 주장하며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했으나, 국내외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3. 경제
전후 일본 경제는 미국의 지원과 한국 전쟁 특수, 그리고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 육성 정책에 힘입어 고도경제성장기에 진입했다.
자민당 정부는 통상산업성(통산성) 등의 기관을 통해 해외에서 일본 기업의 발전을 지원하고 해외 기업의 국내 진출을 제한했다. 이러한 정책은 국방을 미국에 의존하면서 가능했고, 냉전 시기 일본 경제가 급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1980년까지 많은 일본 제품, 특히 자동차와 전자제품이 전 세계에 수출되었고, 일본 제조업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규모로 성장했다. 이러한 성장은 1990년대 불황에도 꺾이지 않았고, 2000년대 중반에 다시 회복되었다.
도쿄 올림픽은 국제 무대에서 일본의 부활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신칸센 고속 철도망 등 혁신적인 기술 발전이 이루어졌다.
전후 초기 몇 년 동안 일본은 전쟁으로 파괴된 산업 시설 재건에 힘썼다. 전력, 석탄, 철강, 화학 분야에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졌다. 한국 전쟁 특수 덕분에 1950년대 중반까지 생산량은 전쟁 전 수준을 회복했다. 경제는 전쟁 이전의 성장률을 뛰어넘는 성장을 보였다. 1956년에 발표된 경제백서에는 전후 일본의 복구가 끝났음을 지칭하여 ‘이제는 “전후”가 아니다’라고 기록되어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27]
1960년, 이케다 내각은 10년 동안 국민총생산(GNP)을 2배 이상으로 늘리고 서구 수준의 생활 수준과 완전 고용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소득 배증 계획」을 발표하여 일본 경제를 고도성장 궤도에 올려놓았다.[28][29]
1971년에는 닉슨 쇼크로 인해 일본 경제가 혼란을 겪고, 환율 시장이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35]
고도경제성장이 진행되면서 에너지 혁명으로 연료가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되었다. 그동안 주요 산업 중 하나였던 탄광 업계의 합리화가 요구되어 1959년~1960년에 미쓰이 미이케 노동쟁의가 있었다.
패전 직후에는 인플레이션(전후 인플레)에 시달렸다. 경사생산체제를 채택하여, 도지 라인(안정 공황)이 발생했다. 한국 전쟁 발발로 한국 특수(특수 경기)가 발생했다.
도시에는 고층 빌딩이 늘어서고, 철근콘크리트 아파트나 교외의 분양 주택에 사는 사람이 급증했다. 일본 전역에서 증기기관차가 사라지고, 전차와 디젤 기관차가 달리게 되었다. 주요 도로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다. 신칸센(동해도 신칸센)과 고속도로(동명 고속도로·명신 고속도로)가 완성되었다. 거의 모든 가정에 텔레비전·세탁기·냉장고·전화가 보급되어, 자동차도 드물지 않게 되었다. 백화점이나 호텔에 가거나, 특급열차를 타면 냉방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빵이나 육류·케이크와 같은 양식이나 양과자도 평소에 먹게 되었다. 평균수명은 세계 유수가 되었고, 대학 진학률도 급증했다. 그 대신 대도시부에서는 인구 과밀, 농촌부에서는 과소라는 현상이 생겨, 공해와 교통사고가 사회문제가 되었다.
고도경제성장으로 일본은 인구과잉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의 삶은 유례없이 풍요로워졌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 이후 급격한 인플레이션(狂乱物価)과 불황은 단기간에 끝났고, 소재 산업 등 일부 중후장대 산업은 몰락했지만, 에너지 절약을 추진하여 하이테크 산업·서비스업이 성장하여 안정 성장으로 순조롭게 이행할 수 있었다. 유럽과 미국이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가운데, 자동차와 전자제품 생산을 급증시켜 집중 호우와 같은 해외 수출 확대로 무역 흑자는 증대 일로를 걸었고, 일본 경제는 1960년대 후반 소련·서독을 제치고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1980년에는 전후 불과 30여 년 만에 GNP 수준에서 미국 경제에 이어 두 번째 규모를 갖게 되었고, 국민 생활 수준은 일억 총 중류라고 불렸다. 이 기간 동안 편의점·워크맨·카라오케가 보급되고, 미일 무역 마찰이 문제가 되었다.
1940년까지 노동 조합은 정부에 의해 파괴되었다. 미국의 점령군은 뉴딜 정신을 반영하여 노동조합 부흥을 지원했다. 1947년 전국적인 총파업 제안은 금지되었지만 공산주의 노조도 포함되었다.[8] 1970년 이후 일본과 미국 모두에서 노조 가입률이 감소했다. 와이즈 홀트에 따르면, 두 국가 모두에서 노동자들은 소비자 생활 방식을 채택했고 블루칼라 직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교육을 받았다. 또한, 노동자들의 열망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노조 지도부의 상향식 관료적 관리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9]
3. 1. 고도경제성장
1953년부터 1965년까지 일본의 GDP는 연평균 9% 이상 성장했으며, 제조업과 광업은 13%, 건설업은 11%, 인프라는 12% 성장했다. 1965년에는 제조업, 광업, 건설업 부문이 전체 노동력의 41% 이상을 고용했고, 농업 부문에는 26%만이 남아 있었다.[5]일본의 높은 교육열과 세계 최고 수준의 문해율은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학교 교육은 훈련을 장려하여 효율적인 노동력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60년대 중반, 일본 경제는 국제 경쟁에 개방되고 중화학 공업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섬유 및 경공업 외에도 자동차, 전자 제품, 선박, 기계류와 같은 제품들이 중요해졌다. 1965년부터 1970년 사이에 제조업과 광업의 부가가치는 연평균 17%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1964년 하계 올림픽은 일본의 국제적 위상 회복을 상징하는 행사였다. 신칸센 고속철도망과 같은 혁신적인 기술 발전이 이루어졌다.[7] 1968년에는 일본 최초의 현대식 마천루인 가스미가세키 빌딩이 건설되었다.[7]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소득배증계획을 추진하여 경제 성장을 가속화했다.
1954년부터 고도경제성장이 시작되어, 가차만 경기에 의한 섬유 산업 호황과 이후 여러 차례의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면서 일본 경제는 순조롭게 성장했다. 주요 경제 நிகழ்வுகள்(게이키)는 다음과 같다.
기간 | 명칭 | 내용 |
---|---|---|
1954년 12월 ~ 1957년 6월 | 신무 경기 | 호황 |
1957년 7월 ~ 1958년 6월 | 냄비 바닥 불황 | 불황 |
1958년 7월 ~ 1961년 12월 | 이와토 경기 | 호황 |
1962년 11월 ~ 1964년 10월 | 올림픽 경기 | 호황 |
1964년 11월 ~ 1965년 10월 | 증권 불황(구조 불황) | 불황 |
1965년 11월 ~ 1970년 7월 | 이자나기 경기 | 호황 |
3. 2. 석유 파동과 안정 성장
1960년대 중후반의 높은 경제 성장과 정치적 안정은 1973년 석유 수출국 기구(OPEC)의 유가 4배 인상으로 제동이 걸렸다. 석유 수입에 거의 의존하던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경기 침체를 경험했다.[6]1973년 제1차 석유 파동으로 급격한 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한 총수요 억제책이 시행되면서 고도경제성장은 막을 내렸다.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은 해외 자원에 의존하는 화력발전(석유, 천연가스 등)에서 벗어나 원자력 발전을 추진하기 위해 발전개발촉진세법, 특별회계에 관한 법률, 발전용 시설 주변 지역 정비법의 전원삼법(電源三法)을 제정했다.[55]
3. 3. 무역 마찰과 버블 경제
1980년대 일본 상품의 수출 급증은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중심으로 무역 흑자를 크게 늘렸고, 이는 미일 무역 마찰을 심화시켰다.[6] 미국과의 무역에서 일본의 흑자가 커지면서 양국 간 경제적 긴장이 고조되었다.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가치가 상승하는 엔고 현상이 나타났다. 일본은행의 저금리 정책은 시중에 돈이 많이 풀리게 하였고, 이는 부동산과 주식 등에 대한 과도한 투자를 유발하여 버블 경제를 초래했다.
4. 대외 관계
1952년 주권 회복 이후, 일본은 국제 사회에 복귀하여 국제연합(UN)에 가입하고 여러 국가와 국교를 재개했다.[61]
1955년에는 전쟁 당시 동맹국이었던 독일과의 관계를 무역 중심으로 재편했다.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1972–1974) 재임 기간, 일본은 국방비를 점진적으로 늘리고 무역 마찰을 줄이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저자세를 유지했다. 다나카 내각은 미국, 소련, 중국과의 정상 회담을 가졌으나, 인도네시아와 타이 방문 당시에는 반일 감정으로 인해 소요가 일어나기도 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상호 방문은 양국 관계 개선에 목적을 두었다. 나카소네 총리의 일본 국방 문제에 대한 강경한 자세는 미국 관료들 사이에서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지만, 일본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일본을 "불침항모(不沈空母)"로 정의하거나, 일본과 미국이 "운명 공동체(運命共同体)"임을 강조하고, 일본국 헌법 제9조 개정을 요구한 것은 국내외에서 부정적 반응을 일으켰으나, 1980년대 중반에는 일본 자위대와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에 대한 수용이 이루어졌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또 다른 문제는 일본의 무역 흑자였다. 미국은 일본에 엔화 가치를 절상하고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을 활성화하기 위해 시장 개방을 요구하며 불균형을 해결하라고 압박했다. 일본 정부가 핵심 산업을 지원하고 보호했기에 불공정하게 이득을 본다는 비난이 일었다. 일본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으나 산업 정책을 보호하고 무역 제한에 있어서 양보를 꺼렸다.
4. 1. 미국과의 관계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로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지만, 한국 전쟁과 냉전은 일본 경제 재건과 공산주의 억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2]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와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미군의 일본 내 기지 사용을 지속하는 문서에 서명했다.미일 안보 조약은 일본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는 구조를 만들었으며, 이는 냉전 시기 일본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미일 안보 조약 개정 반대 운동(안보 투쟁), 핵무장 반대 시위 등이 일어났다.[3] 일본국 헌법 제9조 개정을 둘러싼 논란도 있었다.
1971년에는 닉슨 쇼크(엔 절상)가 발생하여 경제에 충격을 주었다.
1980년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일본의 방위력 증강을 추진했다. 그는 일본을 "불침항모(不沈空母)"로 정의하고, 일본과 미국이 "운명 공동체(運命共同体)"임을 강조했다.[4] 그러나 일본의 무역 흑자 문제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갈등 요인으로 작용했다.
4. 2. 중국과의 관계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중화민국과 국교를 유지하며 타이완으로 피신한 국민당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1949년에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의 반발을 샀다. 1971년 핑퐁 외교를 계기로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개선되자, 일본은 1972년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중화민국과 단교했다. 중일 국교 정상화 이후 양국 간 경제 협력은 긴밀하게 이어졌다.[61]4. 3. 소련과의 관계
일본과 소련은 1956년 10월 19일 공동 성명을 통해 전쟁 상태를 종식하고 국교를 회복했다.[61] 그러나 쿠릴 열도 남단의 이투루프, 쿠나시르 섬과 시코탄 섬, 하보마이 군도를 포함하는 북방 영토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이 지역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소련이 점령했고, 일본은 이 지역을 자국 영토로 주장하고 있다.4. 4. 한일 관계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국교가 정상화되었으나, 역사 문제, 독도 문제 등 갈등 요인이 지속되고 있다.5. 사회
전후 일본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나면서 농업 인구가 감소하고,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농업'(三ちゃん農業)이 증가했다.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전업농가보다 겸업농가가 많아졌다. 학교 급식의 영향으로 쌀 소비가 줄고 빵 소비가 늘면서 쌀 과잉 생산 문제가 발생했고, 일본 정부는 감반(減反) 정책을 실시했다. 그 결과 밀 수입이 증가하여 일본의 식량 자급률이 낮아졌다.[51] 전후에는 포경이 성행하여 고래고기가 주류 육류였으나, 1970년대 이후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상업 포경을 금지하면서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가 주류가 되었다.
고도경제성장기에 조리 열원은 땔나무와 숯에서 전기와 가스로 바뀌었다. 1955년 도시바(東京芝浦電気)가 전기 밥솥을 출시하면서[49][50] 밥 짓는 방식이 변화했고, 주부들의 일은 밥 짓기에서 부식 중심으로 변화했다. 가스레인지 보급으로 양식과 중화요리 조리가 쉬워졌다. 1960년대 냉장고 보급으로 신선 식품이 등장했다. 1960년경부터 쌀 소비량이 감소하고 빵, 면류, 고기, 유제품, 수산물, 채소 소비량이 증가했다.[51] 1967년부터 쌀 과잉 생산이 나타났고 1970년부터 쌀 생산 조정이 실시되었다.
1960년대에 닛신식품(日清食品)의 인스턴트 라면 등 인스턴트 식품이 많이 개발되었다. 1968년에는 최초의 레토르트 식품, 1971년에는 컵라면이 개발되었다. 1970년 이후 패스트푸드점, 패밀리 레스토랑, 편의점이 보급되었다.[52] 라면, 커피, 크로켓, 함박스테이크가 국민 음식이 되었다.
5. 1. 도시화와 인구 문제
고도경제성장과 함께 도시로의 인구 집중이 심화되면서 대도시에서는 인구 과밀 문제가, 농촌에서는 인구 과소 문제가 발생하였다.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라 유아사망률이 감소하고 병사가 줄어들면서 도시 인구가 급증하여, 1960년대에는 일본 총인구가 1억 명을 돌파했다.전후 베이비붐 세대는 단카이 세대라고 불리며,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로서 그 수가 매우 많았다. 이들은 생존 경쟁 속에서 강한 자기 주장을 가지게 되었다. 지방 출신자들은 생계를 위해 도시로 집단 이주(집단취업)하였고, 「금의 알(노동자)」이라 불리며 일본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노동력이 되었다. 이들을 위한 집단 취업 열차도 운행되었다.
5. 2. 사회 문제
고도경제성장의 부작용으로 공해 문제가 심각해졌다. 미에현 요카이치시의 요카이치 천식,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의 가와사키 천식 등 공업지대와 도시 지역의 대기오염이 심각해졌다.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의 미나마타병(구마모토 미나마타병), 니가타현 아가노가와 유역의 니가타 미나마타병(제2 미나마타병, 아가노가와 수은 중독) 등 수은 중독이 발생했고, 도야마현 진쓰가와 유역의 이타이이타이병도 문제가 되었다.[49][50][51] 이러한 공해병을 가리키는 '4대 공해병'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심각한 공해에 대응하기 위해 공해대책기본법이 제정되었다.[52]자동차 보급이 확대되면서 교통사고 사망자가 급증하여 '교통 전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49][51]
5. 3. 여성의 지위 변화
1948년에 우생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인공임신중절이 합법화되었다. 민법이 개정되어 상속이 남녀평등으로 바뀌었다. 여성 참정권을 획득한 여성들은 더 나은 지위 향상을 위해 여성해방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70년에 우먼리브 운동이 시작된 데 이어 1975년이 국제부녀년으로 지정되면서 여성의 지위 향상이 인류적 과제로 떠올랐다.[53] 1956년에 매춘방지법이 제정되었고, 1958년 4월 1일에 시행되어 공창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고 사창가가 사라졌다. 1947년 10월 26일의 형법 개정으로 간통죄가 폐지되었다. 1947년에는 민법의 대대적인 개정으로 가족제도가 폐지되었다. 쇼와 20년대에는 주로 조산사의 보조를 받아 출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쇼와 30년대에는 산부인과에서 출산하는 경우가 증가했다.패션 면에서는 팬티와 브래지어와 같은 서구식 속옷류와 생리대 및 탐폰과 같은 생리용품이 보급되었다. 쇼와 30년대에는 통 모양의 원피스인 아파파가 유행했다. 쇼와 40년대에는 단카이 세대 여성을 중심으로 미니스커트 붐이 일었고, 여성이 스커트나 기모노 외에 바지를 착용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54] 여성이 피부를 드러내는 수영복 착용이 인정되면서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수영복이 보급되었다. 헤어스타일에서는 쇼트컷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고, 화장품과 미용실, 성형수술 등의 여성 관련 사업이 번창했다.
생활 면에서는 쇼와 30년대에 재봉틀이 보급되었고, 경제 면에서는 개인 상점이나 백화점 중심의 쇼핑에서 주부들이 쇼핑하기 편리한 슈퍼마켓이 확산되었다. 남녀평등이나 고학력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전후 세대의 쇼와 10년대 이전 세대부터 실망 세대 여성까지, 남편은 샐러리맨이고 자녀는 평균 2명인 가족이 평균적인 모범 가정으로 여겨졌다. 전후 세대 여성의 경우 전업주부가 주류였다. 고등교육을 받는 여성이 급증한 신인류 세대 이후 20대 고학력 여성 사이에서는 OL이 증가하는 등 변화가 있었다.
6. 문화
전후 일본 문화는 서구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연합군 점령하에 미국의 음악과 영화가 인기를 얻었고, 일본과 서양 양쪽의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가 늘어났다.[47] 일본 점령 후 귀국한 미군 병사들은 격투기 등 일본 문화를 미국에 전파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은 문화 수출이 활발해졌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미시마 유키오 등의 저서가 미국과 유럽에서 유명해졌다. 괴수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 등 일본의 서브컬처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주목받으며 현대적인 일본 문화가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6. 1. 대중문화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미국 음악, 영화 등이 인기를 얻었다. 이와 함께, 괴수 영화, 아니메, 만화 등 일본 고유의 대중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했다.[12]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와 같은 일본 작가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유명해졌다.[48] 주일 미군은 일본의 무술과 같은 문화를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쇼와 겐로쿠」(昭和元禄) 시대에는 주간지와 월간지가 창간되었다. 데즈카 오사무, 이시노모리 쇼타로, 후지코 후지오, 하세가와 마치코, 미즈키 시게루, 아카츠카 후지오 등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과 구로사와 아키라, 에누야 에이지 감독의 일본 영화 등이 쇼와 문화와 대중문화를 대표했다. 유행가가 보급되어 미소라 히바리, 후지야마 이치로 등의 가수와 이시하라 유지로, 아츠미 키요시 등의 배우가 연예계에서 스타로 활약했다. 만화, 영화와 함께 텔레비전 방송도 보급되었다.
쇼와 40년대는 프로 야구 V9 시대였고, 스모는 쇼와 30년대부터 50년대에 걸쳐 리키도잔이 프로레슬링에서 활약하는 등 격투기 인기가 있었다. 「거인·대붕·달걀말이」 등의 유행어가 탄생했다. 도카이도 신칸센 개업(1964년), 메이신 고속도로 개통(1963년), 도쿄 올림픽 개최(1964년), 일본 만국 박람회(19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의 성공으로 대중문화는 최고조에 달했지만, 중동 전쟁으로 인한 석유 파동으로 성장이 끝났다.
6. 2. 식문화
쌀 중심의 식생활에서 빵, 육류, 유제품 등의 소비가 증가하면서 식생활이 서구화되었다. 인스턴트 식품, 패스트푸드, 패밀리 레스토랑 등이 등장하며 외식 산업이 발전했다.6. 3. 주거 문화
일본은 전후 전쟁으로 인한 주택 소실과 복원 및 귀환으로 인구가 증가하면서 심각한 주택난을 겪었다. 1950년에는 주택금융공사(住宅金融公庫)가 설립되어 자가 건설을 지원했다.[54] 1951년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주택을 건설하는 공영주택법(公営住宅法)이 제정되었다. 1955년에는 일본주택공단(日本住宅公団)이 설립되었다. 다이닝 키친(ダイニングキッチン)과 화실(和室) 2개, 수세식 화장실(水洗トイレ)을 갖춘 단지에서 서구식 생활을 하는 단지 주민(団地族)이 등장했다.[54]6. 4. 교육
전후 일본은 미군 점령기에 서구화의 영향을 받았다. 미국 음악과 영화가 인기를 얻으면서, 서양과 일본 양쪽의 영향을 받은 일본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이 시기 일본은 문화 수출국으로 성장했다.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괴수 영화, 아니메, 일본 만화 등 일본 문화를 접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와 같은 일본 작가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유명해졌다. 주일 미군에서 복무하고 돌아온 병사들은 일본에서의 경험담과 기념품을 가져갔고, 다음 세대 주일 미군들은 일본의 무술 등 문화 확산에 기여했다.
7. 연표
연도 | 사건 |
---|---|
1952년 | 4월 28일에 연합군의 점령 종식. |
1954년 | 자위대 창설. |
1955년 | 자유민주당 설립. |
1956년 | 일본이 유엔에 가입. |
1960년 |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파업과 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발생. |
1964년 | 도쿄 올림픽 개최. 신칸센 운행 시작. |
1965년 | 한일기본조약 조인.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노벨 물리학상 수상. |
1968년 | 핵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가 논란 속에 사세보에 입항. 이타이이타이 병의 위험성이 규명. 남방 제도가 일본에 반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 문학상 수상. 경찰관으로 위장한 한 남성이 3억엔(2011년 가치) 상당을 절도. |
1969년 | 일본 대학가에서 대학 정책과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 발생. 도쿄 대학 점거 사태로 인해 대입 시험이 취소.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회동. 류큐 제도의 일본 반환이 1972년으로 예정. |
1970년 | 일본 만국 박람회가 오사카에서 개최. |
1971년 | 엔화에 변동 환율제가 적용되면서 일본의 경제 호황이 잠시 정체. |
1972년 | 류큐 제도가 일본에 반환되면서 공식적으로 점령(1945-1972) 종식. |
1980년 | 연간 자동차 생산이 1,000만 대를 돌파하며 일본이 미국 다음으로 많은 자동차를 생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오 사다하루 은퇴. |
1981년 | 후쿠이 겐이치가 노벨 화학상 수상. |
1982년 | 도호쿠 신칸센이 오미야에서 모리오카까지 연결. |
1983년 | 이즈 제도의 미야케섬에서 오야마(雄山) 화산 분화. 아스카촌의 기토라 고분(キトラ古墳)에서 현무 벽화 출토.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징역 4년 선고. |
1984년 | 글리코·모리나가 사건: 제과 회사 에자키 글리코 사장이 납치되었다가 탈출. 범인은 검거되지 않음. 1만 엔 지폐에는 후쿠자와 유키치, 5천 엔 지폐에는 니토베 이나조, 천 엔 지폐에는 나쓰메 소세키의 초상이 그려진 신권 인쇄. |
1985년 | 일본 첫 AIDS 발병 보고. 일본항공 123편이 다카마가하라 산(高天原山)에 충돌, 520명 사망 및 4명 생존으로 최악의 항공 사고로 기록. |
1986년 | 이즈오섬에서 미하라산 분화, 섬 주민 전원 대피. |
1987년 | 일본국유철도가 7개 JR로 분할 민영화. 배우 이시하라 유지로 사망. |
1988년 | 홋카이도와 혼슈를 연결하는 세이칸 터널이 완공. 해상자위대 잠수함 나다시오(なだしお)가 어선 다이이치후지마루(第一富士丸)와 충돌. |
1989년 | 1월 7일에 쇼와 천황 붕어. 아키히토가 다음 날 황위를 계승, 새 연호 헤이세이 발표. |
쇼와 40년대(1965년~1974년)에는 대도시부를 중심으로 사회당과 공산당의 혁신 통일 협정으로 혁신 자치체가 등장했다. 도쿄도의 미노베 료키치를 시작으로 교토부, 오사카부, 가나가와현 등 주요 지방 자치 단체에서 혁신 자치제가 등장했으며, 특히 교토부에서는 니나가와 코조가 7기 28년에 걸쳐 지사를 역임했다.
한편, 자유민주당은 3대 도시권과 태평양 벨트의 공업 지역의 과밀과 농촌부의 과소 문제 해결을 위해 도시부 인프라 정비와 농촌부 공공 사업 투자를 늘려 농촌부 보수층의 지지를 확보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1961년 국민 건강 보험 실현, 1973년 노인 의료 본인 부담 무료화 등 사회 보장 정책도 추진되었다.
7. 1. 1950년대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발효와 함께 연합군의 일본 점령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2]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지만,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된 한국을 포함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영토를 상당 부분 상실했다.[2]일본이 완전한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도, 정부는 숙청되었던 약 8만 명을 복권시켰고, 이들 중 다수는 이전의 정치 및 정부 직책으로 복귀했다.[2] 여러 차례의 군대 재편을 거쳐, 1954년 민간 통제하에 자위대가 창설되었다.[2] 냉전과 가까운 한국에서의 한국 전쟁은 미국의 경제 재건, 소련과 중국 공산당 봉쇄, 일본의 조직 노동 지원에 크게 기여했다.[2]
끊임없는 당내 분열과 잇따른 소수 정부는 보수 세력을 통합하여 1955년 자유민주당을 결성하게 했다.[2] 이 당은 1955년부터 1993년까지 장기간 집권했다.[2] 1955년에는 사회주의 단체들이 일본 사회당으로 재결합하여 두 번째로 강력한 정치 세력이 되었다.[2]
1956년 일본은 유엔에 가입했다.
1960년,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파업과 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다음은 1950년대 일본의 주요 사건들을 정리한 표이다.
7. 2. 1960년대
- 1960년: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파업과 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발생.[1]
- 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1] 신칸센 운행 시작.[1]
- 1965년: 한일기본조약 조인.[1] 도모나가 신이치로가 노벨 물리학상 수상.[1]
- 1968년: 핵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가 논란 속에 사세보에 입항.[1] 이타이이타이 병의 위험성이 규명.[1] 남방 제도가 일본에 반환.[1]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 문학상 수상.[1] 경찰관으로 위장한 한 남성이 3억엔(2011년 가치) 상당을 절도.[1]
- 1969년: 일본 대학가에서 대학 정책과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 발생.[1] 도쿄 대학 점거 사태로 인해 대입 시험이 취소.[1]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회동.[1] 류큐 제도의 일본 반환이 1972년으로 예정.[1]
7. 3. 1970년대
- 1970년: 오사카에서 일본 만국 박람회가 개최되었다.[58]
- 1971년: 엔화에 변동 환율제가 적용되면서 일본의 경제 호황이 잠시 정체되었다.
- 1972년: 류큐 제도가 일본에 반환되면서 공식적으로 점령(1945-1972)이 종식되었다.
- 1973년: 일본이 G5(현재의 G7)의 일부가 되었다.
연도 | 사건 |
---|---|
1971년 | 환경청 설치. 닉슨 쇼크. 컵누들 발매. 엔 변동환율제 적용으로 인한 일시적 불황. |
1972년 | 삿포로 올림픽 개최. 아사마 산장 사건. 산요 신칸센 신오사카 역-오카야마 역 구간 개통. 텔아비브 공항 총격 사건. 센다이 백화점 화재. 오키나와 반환 협정에 따른 오키나와(류큐 제도 및 다이토 제도) 반환. 나라현 아스카무라 다카마쓰즈카 고분 극채색 벽화 발견. |
1973년 | 중동 전쟁으로 인한 제1차 석유 파동. 김대중 납치 사건. 다이요 백화점 화재. 일본의 G5(현재의 G7) 합류. 일본 열도 개조론. 일본국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공동 성명(일중 공동 성명, 타이완 단교). 안토니오 이노키의 신일본 프로레슬링, 자이언트 바바의 전일본 프로레슬링 설립. |
1974년 | 연속 기업 폭파 사건. 다나카 금맥 문제. 세븐일레븐 일본 제1호점 개점. |
1975년 | 산요 신칸센 오카야마 역-하카타 역 구간 개통. 오키나와 국제 해양 박람회 개최. |
1976년 | 록히드 사건. 왕정치의 베이브 루스 홈런 기록 경신. |
1977년 |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 활발. 왕정치#홈런의 행크 아론 홈런 기록 경신. 다카 항공기 납치 사건. |
1978년 | 일중 평화 우호 조약 조인. 신 도쿄 국제공항(현 나리타 국제공항) 개항. 제1회 스미다가와 불꽃놀이 대회. |
1979년 |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인한 제2차 석유 파동. TV 애니메이션 『도라에몽』(제2기) 방송 시작. 도쿄 서밋. 스페이스 인베이더 유행.[58] 일본자카 터널 화재 사고. 원호법 성립. |
7. 4. 1980년대
1980年代일본어에는 일본 경제가 호황을 누렸고, 여러 분야에서 발전이 있었다.- 1980년: 연간 자동차 생산량이 1,000만 대를 돌파하여 일본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자동차를 생산하게 되었다.[58]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오 사다하루가 은퇴하였다.[58]
- 1981년: 후쿠이 겐이치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58]
- 1982년: 도호쿠 신칸센이 오미야에서 모리오카까지 연결되었다.[58]
- 1983년: 이즈 제도의 미야케섬에서 오야마(雄山) 화산이 분화하였다.[58] 아스카촌의 기토라 고분(キトラ古墳)에서 현무 벽화가 발견되었다.[58]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징역 4년이 선고되었다.[58]
- 1984년: 제과 회사 에자키 글리코 사장이 납치되었다가 탈출하는 사건(글리코·모리나가 사건)이 발생하였고, 범인은 검거되지 않았다.[58] 1만 엔 지폐에는 후쿠자와 유키치, 5천 엔 지폐에는 니토베 이나조, 천 엔 지폐에는 나쓰메 소세키의 초상이 그려진 신권이 인쇄되었다.[58]
- 1985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AIDS 발병이 보고되었다.[58]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가 발생하여 520명이 사망하고 4명이 생존하여 최악의 항공 사고로 기록되었다.[58]
- 1986년: 이즈오섬에서 미하라산이 분화하여 섬 주민 전원이 대피하였다.[58]
- 1987년: 일본국유철도가 7개 JR로 분할 민영화되었다.[58] 배우 이시하라 유지로가 사망하였다.[58]
- 1988년: 홋카이도와 혼슈를 연결하는 세이칸 터널이 완공되었다.[58] 해상자위대 잠수함 '나다시오'(''なだしお'')가 어선 '다이이치후지마루'(''第一富士丸'')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58]
- 1989년: 1월 7일에 쇼와 천황이 사망하고, 아키히토가 다음 날 황위를 계승하면서 새 연호 '헤이세이'가 발표되었다.[58]
스즈키 내각부터 나카소네 내각 시대에 걸쳐 행정개혁이 요구되면서 임시조사회가 설치되었다.[56] 나카소네 내각의 행정개혁 노선을 시작으로 노인 의료 무료화 제도 폐지 등 복지 축소가 이루어졌다.[56] 삼공사의 민영화(일본전매공사 → 일본타바코산업, 일본국유철도 → 일본국유철도청산사업단과 JR그룹, 일본전신전화공사 → NTT그룹)와 소비세 도입 계획이 구상되었고[56], 야당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지만, 1988년에 소비세법안이 가결되었다.[56] 복지국가 노선은 재검토되어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방향이 전환되었다.[56] 영국의 대처리즘, 미국의 레이거노믹스, 동구권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개혁개방 정책, 그리고 아시아 NIEs 국가들의 약진 등 세계 경제의 대전환기에 일본 경제는 플라자 합의를 발단으로 하는 엔고 진행으로 일본은행에 의한 엔고 불황 대책이 시행되고 내수 확대가 계속되는 버블 경기에 돌입했다.[56] 1986년에 남녀고용기회균등법이 시행되면서 쇼와 60년대에 여성의 사회 진출이 진전되었다.[56] 학생들은 취업 시장에서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고, 버블 세대라고 불렸다.[56] 호경기 속에서 쇼와 시대는 헤이세이로 넘어가고 냉전의 종식을 맞이한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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