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야마 나리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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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카야마 나리아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66년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재무성에 입성했다. 1986년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으며, 2004년 문부과학대신을 역임했다. 그는 자유민주당, 일어서는 일본, 일본 유신회, 차세대당, 희망의 당 등 여러 정당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2021년 정계 은퇴를 발표했으며,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 그는 역사 수정주의적, 극우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위안부 문제와 난징 대학살을 부정하는 등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나카야마 나리아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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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공식 초상화
이름나카야마 나리아키
원어 이름中山 成彬
로마자 표기Nakayama Nariaki
출생일1943년 6월 7일
출생지미야자키현 고바야시시
배우자나카야마 교코 (이혼)
나카야마 유키 (일반인)
자녀장남: 나카야마 류스케 (재무성 관료)
학력도쿄 대학 법학부
종교알 수 없음
경력
정당기보노토
이전 정당자유민주당
일본유신회
직업정치인
기타 직책기보노토 대표 (2019년 5월 28일 – 2021년 10월 1일)
기보노토 최고 고문 (2018년 5월 7일 – 2019년 5월 28일)
의원중의원 의원 (8선)
의정 활동
선거구(구 미야자키 2구)
(미야자키 1구)
비례 규슈 블록
임기1986년 7월 8일 – 1993년 6월 18일
1996년 10월 20일 – 2009년 7월 21일
2012년 12월 21일 – 2014년 11월 21일
2017년 10월 23일 - 2021년 10월 14일
주요 직책
국토교통대신내각: 아소 내각
임기: 2008년 9월 24일 – 2008년 9월 28일
문부과학대신내각: 제2차 고이즈미 개조 내각, 제3차 고이즈미 내각
임기: 2004년 9월 27일 – 2005년 10월 31일
기타 정보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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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대수장
링크나카야마 나리아키 공식 홈페이지 (2021년 10월 8일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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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나카야마 나리아키는 1943년 6월 7일 미야자키현 고바야시시에서 태어나, 1966년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들어갔다. 1986년 일본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어 정치 경력을 시작했으며, 2004년 9월 문부과학대신에 취임했다. 나카야마 쿄코와 결혼했다.

나카야마의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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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내용
1959년고바야시 시립 고바야시 중학교 졸업
1962년가고시마 라・살 고등학교 졸업
1966년도쿄 대학 법학부 졸업, 대장성 입성
1970년대장성 은행국 총무과 기획계장
1971년도쿄도 에바라 세무서장
1975년세계 은행 (워싱턴 D.C.) 출장
1978년대장성 주계국 주사 (방위 담당)
1980년대장성 도카이 재무국 이재부장 (나고야시)
1982년대장성 대신관방 기획관, 이후 대장성 퇴관 및 정치 활동 시작
1983년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낙선 (551표 차)
1986년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첫 당선
1990년문부 정무차관 취임 (~ 1991년11월 5일)
1993년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낙선
1996년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선
2000년통상산업총괄 정무차관 취임 (~ 2001년1월 5일)
2001년경제산업 부대신 취임 (~ 2001년4월 26일)
2003년자민당 부간사장 취임
2004년문부과학대신 취임 (제2차 고이즈미 개조 내각)
2006년자민당 정무조사회 부회장 취임
2008년국토교통대신 취임 (아소 내각), 28일 만에 사임
2009년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낙선
2010년일어서는 일본 입당, 자민당에서 제명 처분
2012년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선 (비례 부활)
2014년제4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낙선
2016년제24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 낙선
2017년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선
2021년정계 은퇴,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고문 취임

2.1. 초기 생애 및 관료 경력

나카야마 나리아키는 1943년 6월 7일 미야자키현 고바야시시에서 태어났다. 고바야시 시립 고바야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 가고시마 라・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6년에는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현재의 일본 재무성)에 들어갔다. 동기로는 부인 나카야마 쿄코, 무토 도시로, 나카지마 요시오 등이 있다.

1970년 대장성 은행국 총무과 기획계장을 거쳐 1971년 도쿄도 에바라 세무서장을 역임했다. 1975년에는 세계 은행 (워싱턴 D.C.)으로 파견 근무를 했다. 1978년 대장성 주계국 주사 (방위 담당), 1980년 대장성 도카이 재무국 이재부장 (나고야시)을 거쳐 1982년 대장성 대신관방 기획관을 끝으로 대장성을 퇴직하고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83년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구 미야자키 2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551표 차이로 낙선했다. 1986년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첫 당선되었다.

2.2. 정치 경력

나카야마는 1966년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재무성에 들어갔다. 1986년 일본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고, 2004년 9월 문부과학대신이 되었다.

2.2.1. 자유민주당

1986년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자민당) 공천으로 입후보하여 처음 당선되었다. 1993년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낙선했다. 1996년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부터 선거구가 미야자키 1구가 되었고, 이 선거에서 신진당 요네자와 타카시 (전 민사당 위원장) 등을 꺾고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중의원 상공, 후생노동 각 위원장, 경제산업 부대신 등을 역임했다.

2004년 제2차 고이즈미 개조 내각에서 문부과학대신으로 처음 입각하여, 일본원자력연구소와 몬주를 운영했던 핵연료 사이클 개발 기구를 통합하여 독립 행정법인 일본원자력연구개발기구로 하는 법안을 성립시켰다. 또한, 과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조사를 실시하여, 난징 대학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2008년 10월 4일, 다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은퇴하겠다고 표명했지만, 10월 16일, "역시 출마할 의사를 굳혔다"며 은퇴 표명을 철회했다. 자민당 본부는 이미지 하락을 우려하여 이 출마 표명을 거부했다. 자민당 내에서는 "일교조 비판 등을 반복하고, 국토교통상 책임을 지고 사임한 나카야마 나리아키의 재출마를 인정한다면, 국민으로부터 신경을 의심받을 것이다"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당 선대위원장인 고가 마코토와 전화 통화를 했지만, 출마를 거부당해 재출마를 단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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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당 미야자키현 연합은 나카야마 나리아키의 후임으로 전 참의원 의원 우에스기 미쓰히로의 출마를 내정했다. 그러나 나카야마는 지부장을 우에스기에게 양보하는 것을 거부하여, 미야자키 1구 지부장직 교체는 진전되지 않았다.

미야자키 1구에 자민당의 공인 후보가 없는 선거가 치러지면서 자민당 지지층은 분열되었다. 그 결과, 민주당 등의 추천을 받은 가와무라 슈조로가 어부지리를 얻어 당선되었다. 낙선 후, 나카야마는 "너무나 허무한 낙선. 죄송합니다. 전국적인 민주당 붐 속에서, 현민의 냉정한 판단을 구했지만. 일교조 교육이 침투하면 이 나라는 안 된다. 정치인으로서 이 나라의 미래를 지켜보겠다."라며, 앞으로도 정치 활동을 계속할 의향을 밝혔다.

2009년 7월 18일, 자민당 미야자키현 연 당기위원회는 이미 현 연합으로서 우에스기 미쓰히로를 공천 신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론에 어긋나 나카야마 나리아키를 공천 후보로 할 것을 당 본부에 요청했다는 이유로, 당 현 제1선거구 지부의 구시마 도키오 간사장과 오무라 가이치로 부지부장을 제명 처분했다.

2009년 9월 12일, 현 연 당기위는 국토교통상 취임 당시의 발언과 그 후의 중의원 선거 불출마 철회 등 일련의 나카야마 나리아키의 언동을 "당의 기율을 문란하게 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당 본부에 나카야마 나리아키를 제명 처분할 것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2.2.2. 자민당 탈당 이후

2009년 총선에서 자유민주당(자민당)은 나카야마를 후보로 내는 것을 꺼렸다. 그는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의석을 잃었다. 2010년 6월 21일, 나카야마와 그의 아내 교코는 자유민주당을 탈당하고 새벽당으로 옮긴다고 발표했다. 그는 2010년 7월 11일에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당선되지 못했다. 새벽당은 일본 유신회의 일부가 되었고, 나카야마는 2012년 총선에서 국회에 복귀했다. 이시하라 신타로의 그룹이 당을 떠나 다음 세대당을 창당했을 때, 그와 그의 아내도 함께했다. 그는 2014년 총선에서 다시 의석을 잃었다.

2010년 8월 4일, 자민당 본부는 나카야마가 지방 조직을 혼란시키고 "자민당의 선거 대책에 악영향을 미쳤다"며 그를 제명했다. 이로써 나카야마 부부는 모두 자민당에서 제명되는 결과가 되었다.

2012년 12월 16일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나카야마는 일본유신회 소속으로 미야자키 1구에 출마, 선거구에서는 3위였지만 비례 큐슈 블록에서 부활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했다.

2014년 6월, 이시하라 신타로 공동 대표가 유신회를 분당하고 신당을 창당할 것을 표명하자, 나카야마는 아내 쿄코와 함께 신당에 참여할 것을 표명했다. 8월 1일 차세대 당 정식 설립에 참여하여, 결당 대회에서는 최고 고문에 취임한 이시하라, 당수로 선출된 히라누마 타케오와 함께 인사를 했다. 같은 날 차세대 당 양원 의원 총회장, 대의사 회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12월 14일 제4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비례 큐슈 블록 비례 단독 1위로 입후보했지만 낙선했다.

2016년 6월, 제24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비례구에서 출마했지만, 7월 10일 투표 결과 낙선했다.

2017년 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아내 쿄코와 함께 구 희망의 당에 참가했다. 비례 큐슈 블록에서 같은 당 비례 단독 1위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18년 5월, 희망의 당 분당에 따라 새롭게 발족한 희망의 당 최고 고문에 취임했다. 2019년 5월 28일, 사임한 마츠자와 시게후미의 후임으로 당 대표에 취임했다.

2021년 10월 6일, 제4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는 입후보하지 않고 정계를 은퇴할 의향이라고 보도되었다. 같은 달 18일, 나카야마는 기자 회견에서 은퇴를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대표를 맡고 있는 희망의 당은 같은 달 1일에 이미 해산했다고 밝혔다.

3. 정책 및 주장

나카야마는 극우 민족주의 단체인 일본회의와 관련이 있다. 자유민주당 소속이었을 때, 위안부에 대한 언급이 있는 일본 중학교 교과서 부분을 검열하려는 노력에 앞장섰다. 그는 전쟁 중에 여성들이 매춘에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것을 계속해서 부인했다. 그는 난징 대학살이 완전히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대학살이 일어난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 우익 영화 제작자 미즈시마 사토루의 2007년 영화 난징의 진실을 지지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첫 번째 내각에서 나카야마는 1993년 고노 담화를 수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역사에 대한 우익 보수적 시각을 지속적으로 표명해 왔다.

2004년 제2차 고이즈미 개조 내각에서 문부과학대신으로 처음 입각하여, 일본원자력연구소와 몬주를 운영했던 핵연료 사이클 개발 기구를 통합하여 독립 행정법인 일본원자력연구개발기구로 하는 법안을 성립시켰다. 또한, 과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조사를 실시하여, 난징 대학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나카야마의 주요 정책 및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여성 궁가 창설 반대
* 아베노믹스소비세율 10% 인상 1년 반 유예 긍정적 평가, 경감세율 도입 반대
* 원전 필요
*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 도입 반대, 노다 세이코의 예외적으로 부부의 별성을 실현하는 모임에는 찬동
* 동성혼 제도 도입 반대
* 헌법 9조 개정 찬성
* 집단적 자위권 행사 찬성
* 특정 비밀 보호법 필요
* 일본의 핵무장 검토 필요
* 후텐마 비행장 이전지오키나와현 이외의 일본 국내가 바람직
* 난징 대학살 부정
* 위안부 문제에서 '종군 위안부' 존재 부정
* 일본교직원조합의 존재와 활동에 부정적, 성교육과 젠더 프리 교육에 부정적, "도덕" 교육 찬성
* 공공 사업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 시사
* 혐오 발언 법률 규제 반대
* 간접 흡연 방지를 위한 건강 증진법 개정 찬성

2013년 3월 8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나카야마는 위안부가 일본 정부에 의한 강제가 아니라, 오히려 악의적인 집단을 경찰이 단속하고 있었다는 것을 당시 아사히 신문의 기사를 바탕으로 주장했다. 또한 "일본 유학생은 (같은 나라에 유학하고 있는) 중국과 한국 유학생으로부터 '조상은 심한 일을 당했다'고 비난받아 떳떳하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하며, 상황 개선을 정부에 요구했다.

총리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문제 삼지 않으며, 무라야마 담화 및 고노 담화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유신회의 '역사 문제 검증 프로젝트 팀 (PT)' 좌장을 맡아 고노 담화 재검토를 요구하는 서명을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고이즈미 내각의 문부과학대신 당시, "여유 교육" 학습지도요령에 의한 학력 저하를 인정하면서도 "살아가는 힘"의 이념에는 이해를 보였다. "일본교직원조합 문제 규명 의원 연맹"의 고문을 맡아, 자학 교육, 과격한 성교육, 지나친 젠더 프리 교육 등 일본교직원조합의 교육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4. 논란

아소 다로 내각에서 2008년 9월 24일 건설·운수 대신으로 임명된 나카야마는 취임 직후 "일본 교육의 암과 같은 일본교직원조합(닛쿄소)을 파괴하는 데 앞장서겠다"라는 발언을 했다. 또한 관광 담당 대신으로서의 기자 회견에서 일본이 기본적으로 "민족적으로 단일하다"라고 발언하여 일본 북부에 거주하는 아이누족 원주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나카야마는 "일본인이 외국인을 좋아하지도 바라지도 않는다"고도 말했으며, 이러한 발언들로 인해 2008년 9월 27일 사임했다.

나카야마는 2008년 9월 28일 국토교통대신에서 물러났는데, 재임 기간은 5일로 전후 각료 중 두 번째로 짧았다. 사임 이유는 나리타 반대 떼쓰기, 일본 단일 민족, 전교조 해체 발언 등에 대한 항의 때문이었다.

나카야마는 사임 후 9월 29일 TBS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발언을 옹호하고 민주당을 비판했다. 2008년 10월 8일에는 자신의 사임이 자민당의 중의원 선거 승리를 위한 자작극이었다고 주장했다.

4.1. 역사 인식 관련

나카야마 나리아키는 극우 민족주의 단체인 일본회의와 관련되어 있으며, 수정주의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자유민주당 소속이었을 때, 위안부에 대한 언급이 있는 일본 중학교 교과서를 검열하려는 노력에 앞장섰으며, 전쟁 중 여성이 매춘에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것을 계속해서 부인했다. 난징 대학살이 완전히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학살이 일어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우익 영화 제작자 미즈시마 사토루의 2007년 영화 난징의 진실을 지지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첫 번째 내각에서 1993년 고노 담화 수정을 시도했다. 그는 역사에 대한 우익 보수적 시각을 지속적으로 표명해 왔다. 2004년 제2차 고이즈미 개조 내각에서 문부과학대신으로 처음 입각하여, 과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조사를 실시하여 난징 대학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나카야마의 주요 역사 인식 관련 주장은 다음과 같다.

* 난징 대학살에서의 대량 학살 발생을 부정한다.
* 2013년 3월 8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위안부는 일본 정부에 의한 강제가 아니라, 오히려 악의적인 집단을 경찰이 단속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 총리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문제 삼지 않으며, 무라야마 담화 및 고노 담화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종군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 2014년 4월 18일 일본유신회의 '역사 문제 검증 프로젝트 팀 (PT)' 좌장으로서 총리 관저를 방문하여 고노 담화 재검토를 요구하는 서명 약 16만 건을 관방장관 스가 요시히데에게 제출했다.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했지만 팔굉일우를 내걸었고, 그 결과 아시아아프리카식민지가 독립했으며, 종군 위안부나 난징 대학살 등은 없었고, 중국과 한국의 날조라고 주장한다.
* 2013년 6월 일본에 의한 위안부 모집에 강제성이 있었다는 대한민국의 주장에 대해 "자기 자식이나 이웃집 딸이 연행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는가. 그렇게 조선인은 약골이었는가"라고 발언했다.
* 2013년 11월, 아사히 신문이 "위안부였다고 증언하는 인도네시아 여성"을 기사화 했으나, "기사화하기 부끄러운 증언이다. 어떻게든 일본을 악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의견을 말했다.

4.2. 기타 발언

나카야마 나리아키는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에 대해 매우 강하게 비판했다. 2008년 9월, 국토교통대신 임명 직후 "일본 교육의 암과 같은 일교조를 파괴하는 데 앞장서겠다"라고 발언해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일교조가 자학 교육, 과격한 성교육, 지나친 젠더 프리 교육 등을 주도하며, 오이타현의 학력이 낮은 것도 일교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사히 신문은 일교조 조직률과 학력 테스트 점수 사이에 상관관계가 없다고 지적했지만, 산케이 신문은 "닛쿄소가 강하다는 것은 질의 문제"라며 나카야마를 옹호했다. 나카야마는 "일교조는 일본 교육의 암"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하시모토 도루 당시 오사카부 지사도 그의 발언을 지지했다.

나리타 국제공항 확장 공사와 관련, 반대파의 산리즈카 투쟁을 언급하며 "을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데, 자기만 좋으면 된다는 풍조"라고 비판하며 중국이 부럽다고 말했다.

또한, "일본은 꽤나 내향적인, 단일 민족"이라고 발언하여 아이누 민족 단체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이는 중의원참의원에서 만장일치로 결의한 "아이누 민족을 선주 민족으로 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를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해서는 "종군 위안부나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 중한(中韓)의 날조"라고 주장하며, 아베 신조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를 촉구했다.

4.3. 정치 자금 문제

* 2003년 8월, 나카야마의 사설 비서 급여(1996년 12월부터 1998년 2월까지 총 3)가 대형 상사 니치멘(Nichimen)의 사기 사건 피고인이 회장을 맡고 있던 전기기기 제조 회사 "테이료 산교"에 의해 대납된 사실이 밝혀졌다.
* 자민당 미야자키 1구 지부는 2003년 11월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관련 단체인 세계평화연합으로부터 1의 정치헌금을 받았다. 동 지부는 "통일교와의 관계는 몰랐다. 문제라면 반환하는 것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나카야마는 2004년 9월, 종교법인을 소관하는 문부과학상에 취임했다. 지역 사무소는 지역 모임에 세계평화연합의 멤버도 참석한 적이 있었으며, 헌금에 대해서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 무라카미 펀드 전 대표 무라카미 요시아키로부터 1.5의 헌금을 받았다. 나카야마 사무소는 "무라카미 씨가 피고가 되었다고 해서 반환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 자민당 미야자키현 제1선거구 지부는 국토교통성과 구 일본도로공단이 발주한 강철제 교량 공사에서 담합한 혐의로 2005년에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배제 권고를 받은 2개 회사(사노야스·히시노 메이쇼(현: 사노야스홀딩스), 일본차량제조)로부터, 적발 후에도 총 720의 헌금을 받았다.

5.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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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야마 나리아키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선거구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제38회 총선거 (1986년)미야자키현 제2구자민당64,866표24.5%2위당선중선거구제
제39회 총선거 (1990년)미야자키현 제2구자민당64,921표24.7%2위당선중선거구제
제40회 총선거 (1993년)미야자키현 제2구자민당65,310표25.7%3위낙선중선거구제
제41회 총선거 (1996년)미야자키현 제1구자민당78,145표41.14%1위당선
제42회 총선거 (2000년)미야자키현 제1구자민당91,472표42.92%1위당선
제43회 총선거 (2003년)미야자키현 제1구자민당99,969표52.71%1위당선
제44회 총선거 (2005년)미야자키현 제1구자민당121,355표56.90%1위당선
제45회 총선거 (2009년)미야자키현 제1구무소속55,114표24.33%2위낙선
제46회 총선거 (2012년)미야자키현 제1구일본유신회37,198표19.63%3위당선
제47회 총선거 (2014년)비례대표(규슈)차세대당1,414,919표2.65%1위낙선
제48회 총선거 (2017년)비례대표(규슈)희망의당9,677,524표17.36%1위당선

2008년 10월, 나카야마는 차기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를 철회하고 출마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자민당은 그의 이미지 하락을 우려하여 공천을 거부했다. 자민당 내에서는 일교조 비판 등으로 국토교통상에서 물러난 나카야마의 재출마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있었다. 결국, 나카야마는 당 선대위원장과의 전화 통화 후 출마를 포기했다. 2009년 총선에서 자민당은 나카야마를 공천하지 않았고, 그는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6. 소속 정당 및 의원 연맹

*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
* 세이와 정책 연구회
* 일본교직원조합 문제 규명 의원 연맹 (고문)
* 교육 재생·지방 의원 100인과 시민의 회 (특별 고문)
* 공공 방송의 바람직한 방안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
* 일본의 전도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 (회장)
* 국가를 생각하는 재야 의원 모임 (회장)
* 일본 유신의 회 '역사 문제 검증 프로젝트 팀'(좌장)
* 예외적으로 부부의 별성을 실현하는 회
* 아사히 신문을 바로잡는 국회의원 모임 (대표)

2010년 6월 21일 나카야마와 그의 아내 교코는 자유민주당에서 일본 새벽당으로 옮긴다고 발표했다. 이후 새벽당은 일본 유신회에 합류했고, 나카야마는 2012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직에 복귀했다. 이시하라 신타로가 이끌던 다음 세대당 창당에도 참여했다.

자민당 의원 연맹에서는 2010년 8월 제명되어 탈퇴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