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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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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하는 중국에서 '크게 서쪽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로 사용된 명칭으로, 현재의 중앙아시아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기원전 6세기부터 다양한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박트리아, 대월지, 쿠샨 왕조 시대를 거쳤다. 4세기 이후에는 토하라 시대로 불리며, 토하라족의 영향 아래 여러 국가로 분열되었다. 7세기에는 당나라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하면서 토하리스탄이라는 명칭은 사라졌다. 대하 사람들은 정주 민족으로 상업에 종사했으며, 조로아스터교와 불교를 믿었다. 언어는 박트리아어와 그리스 문자를 사용했으며, 일부다처제의 혼인 풍습을 가졌다.

2. 명칭

대하(大夏)라는 명칭은 중국에서 사용한 것으로, '크게 서쪽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이는 선진 시대에 서쪽을 의미하는 "하(夏)"에 형용사 "대(大)"를 붙인 것이다.[4] 서양에서는 박트리아(Bactria)라고 불렸으며, 이는 이란계 토착민인 박트리아]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3. 역사

기원전 2세기 말, 중국 전한은 북쪽의 유목 기마 민족인 흉노의 침입에 시달리고 있었다. 무제는 월지와 협력하여 흉노를 협공하고자 장건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장건은 서역대완·강거를 거쳐 대월지국에 도착했으나, 대월지는 협력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 장건이 들른 곳이 아무다리야강 남쪽에 위치한 대하국으로, 대월지의 속국이었다. 장건은 귀국 후 대하국을 포함한 서역의 정보를 한나라에 가져갔고, 이는 『사기』 대원열전에 수록되었다.[3]

대하국은 대월지의 점령 하에 계속 존재했으며, 1세기 이후 쿠샨 제국·에프탈·돌궐·사산 제국으로 지배자가 교체되었지만, 7세기 이슬람 제국에 정복될 때까지 '''토하리스탄'''(

고대 일본에는 토화라와 사위 등의 외래인이 방문했으며, 이토 요시노리는 내조 페르시아인의 비정 연구 등을 바탕으로 '''토화라'''(토카라)를 페르시아인으로 비정하고 있다.

위서』와 『수서』에는 토호라국과 토화라국이 각각 등장한다. 『북사』에는 두 나라가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신당서』에서는 "토화라, 혹은 토활라, 도화라라고도 하며, 원위 (북위)가 말하기를 토호라"라고 기록되어 있어, 토호라국과 토화라국이 같은 나라 (토하리스탄)를 나타냄을 알 수 있다. 또한 "옛 대하의 땅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대하와 토화라가 같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5세기~6세기의 토화라국은 에프탈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에프탈 멸망 후에도 에프탈인과 토화라인이 섞여 살았다. 대하 시대에는 전쟁을 두려워했던 반면, 토화라 시대에는 전쟁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전투 훈련에 힘썼으며, 병사의 수는 1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11]

7세기 현장의 『대당서역기』 권1에는 도화라국에 관한 기록이 있다.

『대당서역기』 권12에는 여행의 귀로에 서역 남도를 통과했을 때, "도화라의 옛 땅"이라는 장소를 통과한 기록이 있다. "대류사를 가는 것이 4백여 리, 도화라의 옛 땅에 이르렀다. 이 나라는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성은 완전히 황폐해져 있다"라는 기록 속 폐허는 니양(니야)성과 절마타나(차르찬)와의 방위, 거리에서 볼 때, 현재의 엔데레 고성에 비정되고 있다. 이 장소는 타림 분지 남쪽에 위치해 토하리스탄과는 떨어져 있지만, 현장은 "도화라의 옛 땅"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이 토하라 인이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에 침입하기 이전의 일인지, 그 후의 토하라 인(쿠샨 왕조 시대)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토하라 인의 일이 아닌지는 불명확하다.[13]

3. 1. 박트리아 시대 (기원전 6세기 ~ 기원전 2세기)

박트리아의 범위


이 지역은 과거 '''박트리아'''라고 불렸으며, 기원전 6세기 이후 아케메네스 제국, 알렉산드로스 제국, 셀레우코스 제국 등 여러 왕조가 번갈아 지배했다.[5][6] 그러나 지배자가 바뀌는 와중에도 박트리아에 계속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박트리아인이라고 불리는 이란계 토착민이었다. 기원전 255년경부터 기원전 139년경까지 박트리아를 지배했던 그리스계 국가인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은 기원전 140년~기원전 130년 사이에 북쪽의 유목 기마 민족인 아시오이, 파시아노이, 토카로이, 사카라울로이의 4부족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3. 2. 대월지 시대 (기원전 2세기 ~ 기원전 1세기)

大月氏중국어 시대는 기원전 2세기흉노에 밀려 서쪽으로 이동한 유목 민족 월지(月氏)대하를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월지는 대하를 다섯 개의 읍후(翕侯)로 분할하여 통치했는데, 각각 휴밀습후(休密翕侯), 쌍미습후(雙靡翕侯), 귀상습후(貴霜翕侯), 힐돈습후(肸頓翕侯), 고부습후(高附翕侯)였다.[7]

쿠샨 왕조의 영역


원래 대하국에는 통일된 군주가 없었고, 각 성읍에 소영주가 있었을 뿐이었다. 병력이 약하고 전쟁을 두려워했기 때문에[8] 대월지의 침공에 저항하지 못하고 패배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이때 대하국에 배치된 오습후가 월지인이었는지, 대하인이었는지, 아니면 토착민이었는지는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한편, 전한의 무제는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 월지와 협력하고자 장건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장건은 대완, 강거를 거쳐 대월지에 도착했으나, 대월지는 협력에 응하지 않았다. 장건은 귀국 후 대하국을 포함한 서역의 정보를 한나라에 전했고, 이는 『사기』 대원열전에 수록되었다.

3. 3. 쿠샨 왕조 시대 (기원전 1세기 ~ 3세기)

기원전 2세기 말, 중국전한은 북쪽의 유목 기마 민족인 흉노의 침입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나라의 무제는 월지와 협력하여 흉노를 협공하려 했고, 그 사신으로 장건을 파견했다. 장건은 서역대완, 강거를 거쳐 대월지국에 도착했으나, 대월지는 협력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 장건이 들른 곳이 아무다리야강 남쪽에 위치한 대하국으로, 대월지의 속국이었다. 장건은 대하국을 포함한 서역의 정보를 한나라에 가져갔고, 이는 『사기』 대원열전에 수록되었다.

대하국은 대월지에 점령된 후에도 계속 존재했으며, 1세기 이후 쿠샨 제국, 에프탈, 돌궐, 사산 제국으로 지배자가 바뀌었지만, 7세기 이슬람 제국에 정복될 때까지 '''토하리스탄'''(

대월지에 점령된 지 100여 년 후, 호조성(護澡城)의 귀상 읍후(貴霜翕侯, 쿠샨)인 쿠줄라 카드피세스(구취각)가 다른 4 읍후를 멸하고 자립하여 왕이 되어 귀상왕(貴霜王)이라 칭했다. 구취각은 파르티아(안식)에 침입하여 카불(고부)의 땅을 차지했다. 구취각이 80여 세로 죽자 그의 아들 비마 탁토(염고진)이 왕위를 이었다. 염고진은 천축(인도)을 멸하고 장수 한 명을 두어 이를 다스렸다고 한다.[9]

이 정권은 쿠샨 왕조를 가리키며, 중국에서는 그대로 대월지라고 계속 불렀다. 호조성의 귀상 읍후가 원래 토착민인지 대하인인지 외래의 월지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쿠샨 왕조가 이란 계통박트리아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명백하다.[10]

3. 4. 토하라 시대 (4세기 ~ 7세기)

쿠샨 왕조가 쇠퇴한 4세기 이후, 대하 지역은 에프탈, 돌궐, 사산 제국 등 여러 세력의 지배를 받았다. 중국 사서에는 이 지역이 토호라국, 토화라국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토하라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3]

7세기 당나라 승려 현장은 저서 《대당서역기》에서 토하리스탄에 27개국이 있다고 기록했다. 이들 국가는 강과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나누어져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서돌궐에 종속되어 있었다.[12]

6세기 중엽, 돌궐 목한가한은 사산 왕조와 함께 에프탈을 멸망시켰다. 이후 돌궐 지배가 시작되었고, 각국 왕은 돌궐의 책봉을 받았다. 서돌궐이 쇠퇴했다가 사궤가한과 통엽호가한 시대에 다시 부활하면서 토화라국도 서돌궐에 종속되었다. 토화라국 왕은 엽호(야부그) 칭호를 받아 토화라엽호국이 되었다.[14] 628년 통엽호가한 사망 후, 서돌궐은 내란에 빠졌고 토화라국은 을비사발라엽호가한에 속했다.

당나라에도 조공을 시작하여, 무덕 연간(618년~626년)부터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다. 영휘 원년(650년)에는 타조를 헌상했다.

정관 15년(641년), 을비돌륙가한이 토화라국을 공격하여 종속시켰다. 이후 을비사궤가한이 당나라 도움으로 즉위하면서, 을비돌륙가한은 토화라국으로 망명했다.

정관 21년(647년), 사산 왕조 야즈데게르드 3세가 토화라국으로 도망쳐 왔으나, 이슬람 제국 군사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아들 페로즈 2세는 토화라엽호로 망명했다.

현경 연간(656년~661년), 당나라는 토화라국 아완성을 '''월지 도독부'''로 삼고 24개 주로 나누어 왕에게 도독을 수여했다.

의봉 3년(678년), 당나라는 배행검을 파견하여 망명 중인 페로즈 2세를 페르시아 왕으로 책봉했다. 페로즈 2세는 귀국하지 못하고 토화라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개요 원년(681년), 토화라국은 당나라에 금의를 헌상했으나 고종은 받지 않았다. 신룡 원년(705년), 토화라왕 '''나도니리'''는 동생을 당나라에 보냈다. 개원(713년~741년), 천보(742년~756년) 연간에도 조공이 이어졌고, 당나라는 '''골돌록돈달도'''를 토화라엽호, 읍달 왕으로 책봉했다. 이후 토화라국이 공격받자 엽호 '''실리망갈라'''는 당나라에 원조를 요청하여 격파했다.

지덕 3재(758년), 토화라국과 사마르칸트 사신이 당나라에 조공했고, 토화라엽호 '''오리다''' 등 9개국 수령이 안사의 난 진압에 협력할 것을 요청하여 숙종이 지원했다.[15]

3. 5. 이슬람 왕조 시대 (7세기 이후)

654년바스라 총독 압둘라 이븐 아미르 휘하의 아흐나프 이븐 카이스가 이끄는 아랍 군대가 호라산 정복을 위해 토하리스탄 주변으로 침공했다. 이때 발흐는 아흐나프와 강화 조약을 맺고 이슬람 측에 귀순했다. 무아위야가 우마이야 왕조의 초대 칼리파로 즉위하자 카이스 이븐 알 하이탐 아스라미가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바드기스, 헤라트, 발흐 등 호라산 동부의 주요 도시들이 이슬람 정권 측에서 이탈했고, 카이스는 진압을 위해 발흐를 먼저 공략하여 나우바하르 사원을 파괴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발흐 주민들이 카이스와 다시 강화 조약을 맺고 싶다고 요청했기 때문에, 이에 응하여 화약과 안전 보장 협정이 체결되었다. 바스라 총독 이븐 아미르는 카이스의 방침을 유약하다고 질책했지만, 헤라트, 바드기스 등도 발흐에 이어 강화 조약과 안전 보장을 재차 체결했다. 이처럼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정복되어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사파르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토하리스탄이라는 명칭은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3]

4. 문화

대하 사람들은 성곽 도시에 거주하며 정착 생활을 했고, 바자르를 열어 각 지역의 특산품을 매매하는 등 상업을 중시했다. 시장에는 중국 익주의 물품도 유통되었으며, 장건의 보고로 무제가 그 출처와 유통 경로를 조사하기도 했다.[16] 장건은 대하가 전쟁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초기에는 조로아스터교 등 이란계 종교가 유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쿠샨 왕조 시대부터 불교가 널리 퍼졌으며, 7세기 당나라 승려 현장이 방문했을 당시에도 불교가 번성했다.[13]

초기에는 토하라어 또는 동이란어군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쿠샨 왕조는 박트리아어를 사용했다.[10] 투호라국 시대(7세기)의 언어도 이란 계통이었다.[17]

그레코-박트리아 왕국 시대부터 에프탈 시대까지 그리스 문자가 사용되었으며, 7세기까지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13]

토하라국 시대에는 일부다처제 혼인 풍습이 있었으며, 형제들이 한 명의 아내를 공유하는 형태였다.[18] 이는 에프탈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나타난 풍습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18] 당시 남녀 성비는 여자가 적고 남자가 많았다.[18]

4. 1. 생활

대하 사람들은 성곽 도시에 거주하며 정착 생활을 했다. 사기 대완열전에는 "대하는 토착하여 성옥이 있고, 대완과 풍속이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서 서역전에는 "성읍에 왕왕 소장을 둔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대하가 유목민이 아닌 정주 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16]

대하는 상업을 중시했으며, 바자르를 열어 각 지역의 특산품을 매매했다. 사기한서에는 "상업을 잘한다(善賈市)", "시장에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있다(有市販賈諸物)"라고 기록되어 있다. 시장에는 중국 익주의 물품도 유통되었으며, 장건의 보고로 무제가 그 출처와 유통 경로를 조사하기도 했다.[16] 장건의 기록에 따르면 대하는 전쟁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4. 2. 종교

초기에는 조로아스터교 등 이란계 종교가 유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쿠샨 왕조 시대부터 불교가 널리 퍼졌으며, 7세기 당나라의 승려 현장이 이 지역을 방문했을 당시에도 불교가 번성했다.[13]

4. 3. 언어와 문자

초기에는 토하라어 또는 동이란어군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세기부터 3세기에 이 지역을 지배한 쿠샨 왕조는 술흐코탈 비문과 라바타크 비문 등의 비문을 통해 동이란어군에 속하는 박트리아어를 사용했음이 밝혀졌다.[17] 쿠샨 왕조는 이란 계통박트리아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명백하다.[10] 투호라국 시대(7세기)의 언어도 이란 계통이었다고 한다.[17] 현장의 기록에는 "언어의 진퇴는 다소 여러 나라(타림 분지에서 사용된 것은 주로 토하라어)와 다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자는 그레코-박트리아 왕국 시대부터 에프탈 시대까지 그리스 문자가 사용되었으며, "문자의 성립은 25개 글자가 있으며, 그것이 조합되어 차례로 어휘·문장이 만들어지고, 이것을 사용하여 필요에 대비하고 있다. 글은 가로쓰기를 하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한다"라는 현장의 기록이 맞다면 7세기까지도 그리스 문자를 사용했을 것이다.[13]

4. 4. 혼인 풍습

토하라국 시대의 혼인은 일부다처제였으며, 형제들이 한 명의 아내를 공유하는 형태였다.[18] 이는 이 지역이 에프탈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나타난 에프탈의 풍습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18] 당시 남녀 성비는 여자가 적고 남자가 많았다.[18]

5. 구성국

7세기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토하리스탄의 27개국과 그 옛 땅의 13개국이 기록되어 있다. 주요 구성국으로는 담밀국(테르메즈), 박가랑국(바글란), 박갈국(발흐) 등이 있다.[12]

《대당서역기》 권1에서 覩貨邏國(토하라국)의 구성국은 "27개국"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 16개국은 다음과 같다.

이름비고
呾蜜國(담밀국)테르메즈
赤鄂衍那國(적악연나국)차가야나
忽露摩國(홀로마국)칼룬, 아칼룬
愉漫國(유만국)슈만, 현재의 두샨베
鞠和衍那國(국화연나국)쿠와야나, 현재의 카바디얀
鑊沙國(확사국)와크슈, 현재의 헤라트
珂咄羅國(가돌라국)쿠딸
拘謎陁國(구매타국)쿠마드, 현재의 다르와즈
縛伽浪國(박가랑국)바글란
紇露悉泯健國(흘로실민건국)루시밍간, 현재의 아이바크
忽懍國(홀름국)쿨룸, 현재의 홀름
縛喝國(박갈국)발크, 발테연, 박테연, 박태야, 박제, 박타, 현재의 발흐
鋭秣陁國(예말타국)암바르, 앰베르, 앰빌, 현재의 사리풀
胡寔健國(호식건국)구즈간
呾剌健國(달랄건국)탈칸
掲職國(게직국)가치, 현재의 타마리스 계곡



《대당서역기》에는 覩貨邏故地라는 지역도 기록되어 있다. 覩貨邏故地라고 기록된 것처럼 覩貨邏국의 옛 영토이지만, 자세한 내용은 불명확하다. 그 13개 국가는 다음과 같다.

이름비고
안다라바국(安呾羅縛國)현재의 안다라브
괄실다국(闊悉多國)카스타
활국(活國)구와르, 현재의 쿤두즈
맹건국(瞢揵國)뭉간
아리니국(阿利尼國)아리니
갈라호국(曷邏胡國)라그
흘율슬마국(訖栗瑟摩國)크르스마, 현재의 게슈
발리갈국(鉢利曷國)파리갈
희마달라국(呬摩呾羅國)히마타라
발탁창나국(鉢鐸創那國)바다크샨, 파타샤나, 현재의 바다흐샨
음박건국(淫薄健國)얀바간
굴랑나국(屈浪拏國)쿠란, 클란나
달마실철제국(達摩悉鉄帝國)호밀, 다르마스티티


참조

[1] 논문 A History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Western & Eastern Han, Wei, Jin, Northern & Southern Dynasties and the Western Regions Sino-Platonic Papers 2004-03
[2] 서적 The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Han Dynasty II (Revised Edition) Columbia University Book 1993
[3] 서적 ペルシア文化渡来考 岩波書店 1980
[4] 서적 白鳥庫吉全集 第六巻
[5] 문서 サラウカェ族とアシアニ族がバクトリアとソグディアナを占領した
[6] 서적 ギリシア・ローマ世界地誌
[7] 문서 翕侯
[8] 서적 史記 大宛列伝, 漢書 西域伝
[9] 서적 後漢書 西域伝
[10] 문서 岩村 2007
[11] 서적 隋書 西域伝, 北史 西域伝, 新唐書 西域伝
[12] 문서 鉄門
[13] 문서 水谷 2000
[14] 문서 ヤブグ
[15] 서적 旧唐書, 新唐書
[16] 문서 小川 1998
[17] 서적 大唐西域記1
[18] 서적 新唐書 列伝第一百四十六下 西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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