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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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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사는 군인들의 생활 공간을 의미하며, 역사적으로 고대 로마 시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왔다. 군사 작전 중 임시 대피소에서 시작하여, 상비군 규모가 커지면서 대규모 영구 막사로 발전했다. 막사는 계급에 따라 차등적인 시설을 제공하며, 주둔지라는 용어와도 관련된다.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형태와 역사를 가지며, 특히 일본에서는 재해와 전쟁 이후 임시 주거 시설로 널리 사용되었다.

2. 역사

막사의 역사는 고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라에토리아 근위대와 같은 정예 부대를 위한 시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베르코비시움, 빈돌란다와 같은 변경 요새에는 로마 군대 막사의 유적이 남아있으며, 이를 통해 수천 년 동안 군사 캠프 생활의 기본은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근대 초기에는 군사 혁명의 일환으로 상비군 유지를 위한 대규모 막사가 등장했다. 18세기 프랑스스페인에서 발전된 형태의 막사가 나타났는데, 프랑스에서는 "카세른", 스페인에서는 "쿠아르텔"이라고 불렸다. 영어 단어 'barrack'은 스페인어 ''barraca''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병사들이 군사 작전 중에 세운 임시 대피소를 의미한다. 영국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직전인 1790년까지 막사 건설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이는 상비군이 헌법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폴란드 그단스크의 막사


1812년 전쟁 당시 미국 군인에 의해 파괴된 1793년 요새 이후 1815년에 지어진 토론토 요크 요새의 장교 막사와 식당


프랑스 르망의 제117 보병 연대 막사


퀸스턴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뉴 요크 요새의 장교 막사(1840년), 이 부지의 유일한 현존 구조물


러시아 제국 시대의 바사, 포흐얀마 , 핀란드의 막사


이탈리아 코모의 카를로 데 크리스토포리스 막사


스웨덴 보덴의 노르보텐 연대 징병병 막사


브제시니아의 오래된 막사 건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독일 연방 경찰의 군대 막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프레오브라젠스키 근위 연대 막사


그레이터 런던 햄프턴 코트 궁전의 막사(1689년),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막사


노보시비르스크의 군사 도시에 있는 기관총 부대 막사(1913년 건축)


기병 막사, 도싯, 크라이스트처치, 1795년: 끝 블록의 장교 숙소, 1층 마구간과 그 위에 남성 숙소


요새 조지 막사, 1753


1875년 카르드웰 개혁 이후 설립된 여러 유사한 막사 중 하나인 캠프스턴 막사, 베드퍼드셔 연대의 주둔지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됨


포츠머스의 캠브리지 보병 막사의 장교 숙소(1820년대)


많은 막사는 최소한의 공용 공간과 함께 다수의 침대 또는 이층 침대를 포함한다


1960년대에 재건된 첼시 막사


19세기와 20세기 초,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보병, 포병, 기병 연대는 별도의 막사를 사용했고, 초기 해군 막사는 헐크라 불리는 오래된 범선이었다. 이후 비위생적인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대규모 해군 막사가 건설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급증하는 병력을 수용하기 위해 니슨 오두막과 같은 임시 막사가 건설되었다.

일본에서 일반적인 건축물은 구조적으로 수십 년 이상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설계되지만, 판자집은 임시 방편이며, 간이한 구조로 만들어진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예에서는 불에 타 남은 목재나 고목재, 함석 등이 건재로 사용되었다.[15]

2. 1. 고대 및 중세

초기 막사는 로마 프라에토리아 근위대의 막사와 같이 정예 부대를 유지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베르코비시움, 빈돌란다 같은 변경 요새에는 로마 군대 막사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유적과 당시 로마 자료를 통해 군사 캠프에서의 생활 기본 요소는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1]

2. 2. 근대 초기

근대 초기에는 학자들이 국가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믿는 군사 혁명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상비군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증가했다. 18세기에 이 시기의 두 지배적인 국가였던 프랑스는 "카세른"을, 스페인은 "쿠아르텔"이라는 대규모의 영구적인 막사를 개발했다. 영어 단어 'barrack'은 군사 작전 중에 병사들이 세운 임시 대피소인 스페인어 ''barraca''에서 유래되었다. 영국에서는 막사에 주둔하는 상비군이 헌법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나폴레옹 전쟁 직전인 1790년까지 막사가 일반적으로 건설되지 않았다.[1]

초기 막사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종종 안뜰 또는 사열대를 중심으로 사각형으로 묶여 있었다. 1717년에 시작된 버릭 막사는 영국 최초의 목적 건축물 중 하나였으며 저명한 건축가 니콜라스 호크스무어의 디자인이었다. 18세기 동안 군사 생활이 점점 더 정교해지면서 계급별 별도 숙소, 기혼자 숙소, 식당, 요리실, 목욕탕, 식당, 학교, 병원, 무기고, 체육관, 승마 학교, 마구간과 같은 전문 건물이 제공되었다. 크림 전쟁 이후 막사 계획에는 병원 설계의 파빌리온 계획 개념이 영향을 미쳤다.[1]

2. 3. 19세기 ~ 20세기 초

19세기에는 군 생활이 정교해지면서 계급별 숙소, 기혼자 숙소, 식당, 병원 등 다양한 기능을 갖춘 전문화된 막사가 등장했다. 크림 전쟁 이후에는 병원 설계에 사용되던 파빌리온 계획 개념이 막사 계획에도 영향을 미쳤다.[1]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보병, 포병, 기병 연대는 각각 별도의 막사를 사용했다. 초기 해군 막사는 주로 오래된 목조 범선인 헐크를 활용했으나, 비위생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럽과 미국의 주요 조선소 마을에 대규모 해군 막사가 건설되었고, 이곳에서는 침대 대신 해먹이 주로 사용되었다.[1]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니슨 오두막과 같이 나무나 골판지 철을 이용한 간이 막사가 대량으로 건설되어 늘어나는 군대의 숙소 수요를 충족시켰다.[1]

3. 군사 막사

많은 군대에서 부사관과 선임 부사관은 복무 또는 훈련을 위해 막사에서 자주 생활한다. 장교는 종종 막사와 병력을 질서 있게 유지하도록 책임진다. 하사관 및 때로는 하급 부사관은 더 적은 공간을 할당받아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으며, 선임 부사관과 장교는 함께 생활하거나 개별 객실을 가질 수 있다. 하급 사는 일반적으로 막사의 청결을 담당한다.

"주둔지"라는 용어는 군 막사, 즉 인근에 영구적인 군대가 있는 도시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4. 세계 각국의 막사



초기 막사는 정예 부대를 위해 건설되었는데, 로마 프라에토리아 근위대의 막사가 그 예이다. 베르코비시움과 빈돌란다 같은 변방 요새에는 로마 군대 막사의 유적이 남아있어, 수천 년 동안 군사 캠프 생활의 기본은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근대 초기에는 군사 혁명의 일환으로 상비군 유지를 위한 비용이 증가하면서 국가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8세기에는 프랑스의 "카세른"과 스페인의 "쿠아르텔"과 같은 대규모 영구 막사가 개발되었다. 영어 단어 'barrack'은 병사들이 군사 작전 중 세운 임시 대피소인 스페인어 ''barraca''에서 유래되었는데, 영국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직전인 1790년까지 막사가 일반적으로 건설되지 않았다. 이는 상비군이 헌법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초기 막사는 여러 층 건물로, 안뜰이나 사열대를 중심으로 사각형으로 묶여 있었다. 버릭 막사는 영국 최초의 목적 건축물 중 하나로, 1717년에 니콜라스 호크스무어의 디자인으로 시작되었다. 18세기 동안 군사 생활이 정교해지면서 계급별 숙소, 기혼자 숙소, 식당, 목욕탕, 학교, 병원, 무기고, 체육관 등 전문 건물이 제공되었다. 크림 전쟁 이후에는 병원 설계의 파빌리온 계획 개념이 막사 계획에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초 프랑스 왕국신성 로마 제국 (독일)에서 최초의 대규모 훈련 캠프가 건설되었고, 영국군은 1854년부터 알더숏 캠프를 건설했다.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보병, 포병, 기병 연대는 별도의 막사를 사용했고, 최초의 해군 막사는 헐크였으나, 이후 유럽과 미국의 주요 조선소 마을에 대규모 해군 막사로 대체되었다. 1914년 이후 동원된 군대에 적합하지 않아 니슨 오두막을 사용한 오두막 캠프가 만들어졌다.

4. 1. 캐나다

1812년 전쟁을 앞두고, 존 그레이브스 심코 부총독과 아이작 브록 소장은 현재의 토론토에 있는 온타리오호 기슭에 요크 요새 건설을 감독했다.[5] 오늘날 그 부지에는 1814년과 1815년 사이에 지어진 여러 개의 영국 육군 막사가 남아 있다. 1840년에는 요크 요새에서 서쪽으로 800m 떨어진 곳에 여러 개의 석회암 막사가 건설되었으며, 그 중 하나만 남아 있다. 영국군은 캐나다 연방 이후 1870년 두 번째 요새인 "뉴 요크 요새"를 캐나다 민병대에 넘겨주었다.[6]

스톤 프리깃은 1820년에 완공되었으며, 1837-38년에 잠시 막사로 사용되었고, 1876년까지 기숙사와 강의실로 개조되어 캐나다 왕립 군사 학교를 수용했다.

4. 2. 폴란드

폴란드에서 막사는 일반적으로 여러 건물로 구성된 복합 시설로 나타나며, 각 건물은 별도의 개체이거나 행정 또는 사업장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브제시니아 병영 단지가 있다.

4. 3. 포르투갈

포르투갈 육군 기지는 ''quartel'' (막사)라고 불리며, 막사 내 각 침실 건물은 ''caserna'' (병영)라고 불린다. 대부분 연대 막사이며, 육군 병력 시스템의 고정적인 구성 요소가 되어 육군의 훈련, 유지 및 일반적인 지원을 담당한다. 연대 행정, 물류 및 훈련 부대 외에도 각 막사는 하나 이상의 작전 부대 (작전 대대, 독립 중대 또는 이와 동등한 부대)를 수용할 수 있다. 일부 연대 막사 부지 내에 주거 블록이 있지만, 포르투갈에서는 군인들이 가족과 함께 지역 민간 공동체에 포함되어 군 기지 밖에서 거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다.

포르투갈의 많은 연대 막사는 구 포르투갈 군대 신규 인프라 행정 위원회(CANIFA)가 개발한 모델을 따르며, "CANIFA형 막사"라고 불린다. 이러한 유형의 막사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표준화된 건축 모델에 따라 건설되었으며, 일반적으로 100000m2~200000m2의 면적을 차지한다. CANIFA형 막사의 시설은 다음과 같다.

시설 종류
본부 건물
경비실
일반 식당 건물
의무실 건물
작업장 및 차고 건물
장교 주택 건물
부사관 주택 건물
3~10개의 사병 병영
사격장
스포츠 시설



평균적으로 각 CANIFA형 막사는 약 1000명의 병사와 그들의 무기, 차량 및 기타 장비를 수용하도록 설계되었다.

4. 4. 러시아

18세기 말까지 러시아 제국군은 민간인 가정이나 슬로보다에 징발되어 수용되었다. 파벨 1세 황제 통치 기간에 최초의 막사가 건설되었다.[7] 파벨 1세는 시민 소유 토지 면적에 따라 일회성 토지세를 부과했는데, 이 세금을 납부하면 징발에서 영구히 면제되었다.[8] 파벨 1세는 막사 생활이 군인 정신과 훈련을 발전시키고 유지하며, 병사의 개성과 자질을 연구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했다.[9]

1882년 이후 징발 면제를 위해 징수된 자금이 군사부로 이전되면서 막사 건설이 가속화되었다. 1900년 1월 1일까지 19,015개의 막사가 건설되어 군대의 94%를 수용했다.[10]

4. 5. 영국

17세기와 18세기 영국에서는 막사에 주둔하는 상비군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11] 이러한 우려는 정치적, 이념적, 헌법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었는데, 크롬웰의 신 모범군과 제임스 2세 통치 기간 동안 군대가 시민 사회를 위협하는 데 사용되었던 기억 때문이었다.[12] 이 때문에 군대는 여관이나 다른 장소에 소규모로 주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1] 또한, 대규모 도시 막사는 절대 왕정과 연관되어 군사력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상징으로 여겨질 수 있었으며, 군인들을 막사에 모으는 것이 반란을 조장할 수 있다는 의심도 있었다.[12]

이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영국에는 해안 요새나 왕궁에 부속된 일부 "군인 숙소"가 건설되었다. '막사'라는 단어의 최초 기록은 1669년 런던 타워 구내에 건설된 아일랜드 막사였다. 병기청의 버나드 드 고메는 17세기 후반 플리머스 시타델 및 틸버리 요새와 같은 장소에 막사 블록을 제공하면서 '국내' 스타일의 막사 설계를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각 막사 블록은 2층 건물로, 약 60명의 병사를 수용할 수 있는 일련의 사각형 방으로 구성되었으며, 방 하나에 4명, 침대 하나에 2명이 사용했다. 각 방에는 난방과 취사에 사용되는 화격자가 있었다.[12]

18세기 전반에 걸쳐 영국에서는 이러한 국내 스타일이 계속 사용되었다.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새로운 막사는 중세 성 및 헨리 시대 요새 구내에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에서는 1715년 자코바이트 반란 (루스벤 막사)과 1745년 자코바이트 반란 (포트 조지) 이후 더 과시적인 스타일이 사용되었다. 18세기 동안 왕립 해군 조선소 주변에서 많은 건설이 이루어졌고, 7년 전쟁 동안 육상 공격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조선소 마을 주변에 방어 선이 건설되었고, 그 안에 보병 막사가 설립되었다. 새로 구성된 영국 해병대에도 조선소 인근에 숙소가 제공되었는데, 스톤하우스 막사(1779년)는 영국에서 자체 숙소를 완전히 갖춘 최초의 부대가 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도시 막사는 여전히 드물었다. 런던에는 상당한 양의 막사 숙소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왕궁 구내에 있었다. 왕립 포병 막사(1776년)는 예외였지만, 포병은 육군이 아닌 병기국의 지휘를 받았다.[12]

프랑스 혁명 이후 상황이 바뀌면서 군대 규모가 크게 증가했다. 1790년에서 1814년 사이에 군대 규모는 40,000명에서 225,000명으로 증가했으며, 민병대가 100,000명을 더 추가했다.[11] 당시 막사 숙소는 겨우 20,000명에게만 제공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1792년 막사 건설 책임이 병기국에서 전쟁성이 감독하는 전문 막사 부서로 이전되었다. 1790년대에는 반란을 처리하고 혁명의 생각을 진압하기 위해 나이츠브리지 막사를 시작으로 버밍엄, 코번트리, 맨체스터, 노리치, 노팅엄, 셰필드 등 여러 지방 도시에 대규모 기병 막사가 건설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몇 년 동안 막사 건설이 다시 시작되었다. 존 내시는 런던 개선의 일환으로 리젠트 공원과 세인트 존스 우드(기병), 웰링턴 막사(근위대), 세인트 조지 막사 등 네 곳을 지었다. 차티스트 폭동에 대응하여 1840년대에 애슈턴-언더-라인의 레이디스미스 막사, 버리의 웰링턴 막사, 프레스턴의 풀우드 막사 등 3개의 막사가 북서 잉글랜드에 설립되었다.

1855년 병기국 폐지 후 실시된 검토에서는 런던 외곽의 7개 막사만이 1,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11] 이는 올더숏(1854년)과 같은 대규모 군사 캠프가 설립되고 콜체스터와 같은 주둔 도시가 확장되면서 바뀌었다. 1870년대 카드웰 개혁의 지역화 의제에 따라 새로운 막사와 오래된 막사가 지역 또는 카운티 여단 및 연대의 기지로 설립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여러 해군 막사가 설립되었는데, 그 중 첫 번째인 데본포트의 키햄 막사(HMS 드레이크)는 1879년에 시작되어 1907년에 완공되었다.

20세기 동안 제1차 세계 대전 중 신속한 확장의 필요성으로 캐터릭과 같은 대규모 캠프가 설립되었고, 전간기에는 많은 막사가 폐쇄되었다. 남아 있던 많은 막사가 1960년대에 재건되었으며, 1970년대부터는 여러 구 RAF 기지가 육군 막사로 전환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영국 군사 막사는 전투, 군사 인물 또는 지역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4. 6. 미국

미국에서는 기초 군사 훈련 및 이후 훈련에서 군인들이 막사에서 생활한다. 미 공군은 막사를 "기숙사"라고 부른다.[1] 과거에는 미국 해병대가 성별이 분리된 기초 훈련 부대를 운영했지만, 현재는 모든 군에서 남성과 여성 신병이 막사를 함께 사용한다. 단, 개인적인 시간과 소등 시간에는 분리된다.[1] 모든 군은 신병 훈련과 첫 번째 보직 배치 이후 남성과 여성 구성원을 통합한다.[1]

훈련 후, 미혼의 하사관 이하 계급의 군인들은 일반적으로 막사에 거주하며, 동반 가족이 없거나 가족 동반이 제한된 보직 배치 동안에는 부사관 및 장교 계급도 막사에서 생활해야 할 수 있다.[1]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많은 미국 막사는 킨셋 오두막과 유사한 저렴하고 튼튼하며 조립이 용이한 구조로 만들어졌다.[1]

5. 일본의 막사(バラック)

일본에서는 간토 대지진(1923년)이나 도쿄 대공습 등의 융단 폭격 이후, 주석이나 임시 목재, 파괴되지 않은 건축물을 조합하여 비바람을 막는 정도의 막사가 대량으로 건설되었다. 이러한 막사들은 지진이나 전쟁 후의 비상사태에 대응하여 응급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다.[15]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외지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많아 건물 철거 흔적의 빈터 등에 불법으로 세워진 막사가 많았다. 여러 거리에서 열린 암시장의 상점도 그중 하나였으며, 아메요코, 아키하바라 전기 상가, 신주쿠 골든 가이 등의 점포 중에는 당시의 막사를 연상시키는 좁은 입구에 깊이가 없는 가게들이 남아있다.

5. 1. 개요

일반적인 건축물은 구조적으로 수십 년 이상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설계되지만, 막사는 당장의 임시 방편으로 만들어지는 간이 건축물이다. 막사는 재료도 좋은 것을 사용하지 않고, 간이한 구조로 만들어진다.[1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불에 타 남은 목재나 고목재, 함석 등이 막사의 건재로 사용되었다.[15]

5. 2. 빈곤층의 주거

일본에서는 곤궁한 사람들이 빈터 등에 지은 오두막 정도의 주거를 막사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하천 부지 등에 노숙자 등이 짓는 텐트 오두막이나 판지로 만든 집도 마찬가지로 막사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5. 3. 재해 및 전쟁 이후의 막사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주택 공급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특별 입법(막사령)을 통해 기준 미달 건축물 건설이 허가되었다. 이마 와지로 등은 "막사 장식사"를 설립하여 막사 건축 디자인에 참여했다.[1]

막사령은 기간 한정 법규였기 때문에, 기한 만료 후에는 보강을 통해 건축 기준을 충족하거나 철거 후 다시 건설해야 했다.[1]

5. 4. 전후 암시장과 막사

일본에서는 간토 대지진(1923년) 등의 천재지변이나 도쿄 대공습 등의 융단 폭격을 겪은 후, 주석이나 임시 목재, 파괴되지 않은 건축물을 조합하여 비바람을 막는 정도의 막사가 대량으로 건설되었다. 이들은 지진·전재 후라는 비상사태에 대응하여 응급적으로 발생한 막사였다.

간토 대지진 후에는, 시가지 건축물법(현재의 건축기준법)의 규정에 따른 건축을 해서는 주택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특별 입법(소위 막사령)에 의해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 건축물이라도 건설이 허가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소규모 주택·상점이었지만, 그중에는 쓰키지 소극장과 같이 비교적 큰 것도 건설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이마 와지로 등이 "막사 장식사"를 설립하여, 상점 등의 막사 건축을 활기차게 디자인하여 거리를 장식했다. 막사령은 기간 한정의 법규였기 때문에, 기한 만료 후에는 보강을 하여 본 건축과 같은 기준을 충족시키거나, 또는 철거하고 다시 지을 필요가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외지에서 귀환한 사람들도 많아 건물 철거 흔적의 빈터 등의 토지에 불법으로 세워진 막사가 다수에 달했다. 여러 거리에서 열린 암시장의 상점도 그중 하나이다. 암시장에서 발전한 아메요코, 아키하바라 전기 상가, 신주쿠 골든 가이 등의 점포 중에는, 당시의 막사를 연상시키는 좁은 입구에 깊이가 없는 가게가 보인다.

5. 5. 막사 관련 사건

6. 한국의 막사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과 도시 빈민들은 판잣집이나 무허가 건물 등 임시 거주지에서 생활해야 했다. 이러한 주거 형태는 한국 사회의 빈곤과 열악한 주거 환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60~70년대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도시로 이주한 노동자들은 공장 주변이나 도시 외곽에 판자촌을 형성하여 생활했다. 이들의 삶은 고단하고 열악했지만, 한국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재개발 사업으로 판자촌이 철거되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도시 빈민들의 삶의 터전이 사라지는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현재에도 쪽방촌, 비닐하우스촌 등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참조

[1] 서적 Oxford English Dictionary
[2] 서적 A Military Revolution?: Military Change and European Society, 1550–1800 London 1991
[3] 서적 British Barracks, their social and architectural importance, 1660–1914 London 1997
[4] 서적 The Military Revolution, 1660–1760 Belfast 1856
[5] 웹사이트 A Brief History of Fort York https://www.fortyork[...] The Friends of Fort York and Garrison Common 2021-04-13
[6] 서적 Stanley Barracks: Toronto's Military Legacy. Natural Heritage Books 2011
[7] 서적 Военный Петербург эпохи Павла I Tsentrpoligraph 2007
[8] 서적 Военный Петербург эпохи Павла I Tsentrpoligraph 2007
[9] 간행물 История казарменного помещения войск в России 1882
[10] 간행물 "Постойная повинность есть, конечно, одна из самых тягостных для граждан". Постойная повинность и строительство казарм в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 второй половины XIX века 2020
[11] 서적 Military Barracks Shire Books 2002
[12] 서적 British Barracks, 1660–1914 English Heritage 1997
[13] 뉴스 Deaths 1774-11-14
[14] 웹사이트 バラック 2023-05-17
[15] 서적 増補新版 現代世相風俗史年表 昭和20年(1945)-平成20年(2008) 河出書房新社
[16] 서적 日本災害史事典 1868-2009 日外アソシエーツ
[17] 뉴스 鹿児島市で大火 三百余戸焼く 1951-12-04
[18] 뉴스 大垣市で百五戸焼く 1951-01-11
[19] 뉴스 高まった付近の苦情 納税も拒否される 1969-10-11
[20] 뉴스 無住宅密集地で大火 百世帯ひとなめ 1976-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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