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무르시
1. 개요
무함마드 무르시는 1951년 이집트에서 태어나 카이로 대학교와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서 조교수로 재직했으며, 이집트로 돌아와 자가지그 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며 무슬림 형제단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200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무소속으로 활동했으며, 2012년 이집트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이집트 최초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재임 중 군부와의 갈등, 헌법 선언 발표 등으로 반정부 시위에 직면했고, 2013년 군부에 의해 축출된 후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2019년 재판 도중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 이름 | 무함마드 무르시 |
|---|---|
| 원어 이름 | محمد محمد مرسي عيسى العياط |
| 로마자 표기 | Mohammed Mohammed Mursi Essa el Ayyat |
| 출생 이름 | 무함마드 무함마드 무르시 이사 알-아야트 |
| 출생일 | 1951년 8월 8일 |
| 출생지 | 엘 아드와, 이집트 왕국 |
| 사망일 | 2019년 6월 17일 |
| 사망지 | 카이로, 이집트, 토라 교도소 |
| 사망 원인 | 심장마비 |
| 안장 장소 | 나스르 시티 |
| 국적 | 이집트 |
| 배우자 | 나글라 마흐무드 (1979년 결혼) |
|---|---|
| 자녀 | 5명 (아들 압둘라 무르시 포함) |
| 모교 | 카이로 대학교 |
|---|---|
| 모교2 |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
| 소속 정당 | 자유정의당 (이집트) |
|---|---|
| 기타 소속 |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 |
| 역대 직책 | 이집트 대통령 비동맹 운동 사무총장 자유정의당 의장 이집트 인민 의회 의원 |
| 대통령 순서 | 제5대 |
|---|---|
| 재임 시작 | 2012년 6월 30일 |
| 재임 종료 | 2013년 7월 3일 |
| 부통령 | 마흐무드 메키 |
| 총리 | 카말 간주리 헤샴 칸딜 |
| 이전 대통령 | 호스니 무바라크 무함마드 후세인 탄타위 (과도 정부) |
| 다음 대통령 | 아들리 만수르 (과도 정부) 압델 파타 엘-시시 |
| 재임 시작 | 2012년 6월 30일 |
|---|---|
| 재임 종료 | 2012년 8월 30일 |
| 이전 총장 | 무함마드 후세인 탄타위 |
| 다음 총장 |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
| 재임 시작 | 2011년 4월 30일 |
|---|---|
| 재임 종료 | 2012년 6월 24일 |
| 이전 의장 | 신설 |
| 다음 의장 | 사드 엘-카타트니 |
| 재임 시작 | 2000년 12월 1일 |
|---|---|
| 재임 종료 | 2005년 12월 12일 |
| 이전 의원 | 누만 구마 |
| 다음 의원 | 마무드 아바자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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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공학자 -
샤리프 이스마일
샤리프 이스마일은 이집트의 정치인이자 기계공학자로,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이집트 총리를 역임하며 경제 개혁을 단행했고, 국영 석유 회사에서 경력을 쌓은 후 대통령 보좌관으로 활동했다. -
이집트의 범죄인 -
호스니 무바라크
호스니 무바라크는 이집트 군사 경력과 부통령을 거쳐 1981년 대통령에 취임하여 30년간 집권하며 친미 노선을 유지했고, 2011년 이집트 혁명으로 사임 후 재판을 받았으며 2020년 사망했다. -
이집트의 범죄인 -
아이만 알자와히리
아이만 알자와히리는 이집트 출신의 의사이자 이슬람 극단주의자로, 알카에다 지도자로서 서방 국가들에 대한 테러를 선동하고 알카에다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다가 미국의 드론 공격으로 사망했다. -
샤르키야주 출신 -
유수프 이드리스
유수프 이드리스는 이집트의 소설가, 단편 작가, 극작가, 언론인이며, 현대 이집트 연극 발전에 기여했고, 소설 《사랑과 재의 도시》로 나기브 마흐푸즈 문학상을 수상했다. -
샤르키야주 출신 -
샤디아
이집트의 배우이자 가수인 샤디아(본명: 파트마 아흐마드 카말 샤커)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이집트 영화계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이집트의 목소리"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국민적 영웅이다.
2. 어린 시절과 학력
1951년 8월 8일 이집트 샤르키야 주 엘아드와에서 아버지 농부와 어머니 주부 사이에서 다섯 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카이로 대학교에서 공학을 전공하여 1975년 학사 학위를 따고, 1978년 야금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82년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공학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3. 학술 및 엔지니어링 경력
무르시는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공학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노스리지에서 조교수로 재직했으며, 이 기간 동안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며 우주왕복선 개발 업무에 참여했다.
1985년 무르시는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노스리지에서 교수직을 그만두고 이집트로 돌아와 자가지그 대학교 공과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학과장으로 임명되었다. 2010년까지 자가지그 대학교 공과대학에서 강사로 재직했다.
4. 정치 경력
무함마드 무르시는 자가지그 대학교에서 공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무슬림 형제단의 일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2000년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2005년 선거에서는 호스니 무바라크 행정부의 부정 선거로 인해 낙선했다.
2006년에는 사법부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7개월간 투옥되기도 했으며, 2011년 이집트 혁명 중에도 구속되었다가 탈옥했다. 혁명 이후 무슬림 형제단은 자유정의당을 창당했고, 무르시는 당의 초대 대표로 선출되었다.
2012년 이집트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정의당 후보로 출마한 무르시는 1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고, 결선 투표에서 아흐메드 샤피크 전 총리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무르시는 9·11 테러를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끔찍한 범죄"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의 구실로 9·11 테러를 이용했으며, 미국이 공격자들이 무슬림이라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4.1. 초기 정치 활동
무슬림 형제단 소속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2000년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2005년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당시 무슬림 형제단은 공식적으로 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무소속으로 출마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무르시는 정치 개혁을 요구하며, 경찰의 무제한적인 구속 및 구금 권한을 승인한 긴급 법과 정당 설립을 제한하는 법률 등 억압적인 조치를 개선할 것을 요구했다. 2005년 선거에서는 호스니 무바라크 행정부의 부정 선거로 인해 낙선했다.
2006년에는 사법부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7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2011년 이집트 혁명 당시 1월 28일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 24명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이틀 후 카이로 교도소에서 탈옥했다.
혁명 이후 무슬림 형제단을 기반으로 자유정의당이 창당되자 초대 당수로 선출되었다.
4.2. 2012년 이집트 대통령 선거
민주화 혁명 이후 치러진 2012년 이집트 대통령 선거에서 무르시는 무슬림 형제단이 창당한 자유정의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초기에는 무슬림 형제단의 부단장이었던 하이라트 샤티르가 후보로 지지되었으나, 형기 만료 후 6년이 지나야 출마 가능하다는 이유로 샤티르의 후보 자격이 박탈되면서 무르시가 대신 후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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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에 실시된 1차 투표에서 무르시는 24.78%의 득표율(5,764,952표)로 1위를 차지하며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 6월 16일과 17일에 실시된 결선 투표에서는 아흐메드 샤피크 전 총리를 꺾고 51.73%의 득표율(13,230,131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결선 투표에서는 샤피크의 당선을 막기 위해 세속, 자유주의, 좌익 세력들이 무르시에게 결집하는 현상을 보였다. 무르시는 당선 직후 무슬림 형제단과 자유정의당에서 탈퇴했다.
5. 대통령 재임
무르시는 군사 정권에 종속적인 정부에서 대통령직을 시작했지만, 2012년 8월 중순 군부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몇몇 연상 의원들의 퇴직을 공고하고 2012년 6월 17일 헌법을 폐지하였다.
2012년 11월, 무르시는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1주일에 걸친 전투에서 휴전을 중재하여 국제적인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11월 22일 휴전 하루 뒤, 무르시는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고 사법부의 감시를 받지 않도록 하는 칙령을 발표하여 이집트 사법부와의 갈등을 야기했다. 이 칙령은 새 헌법 제정을 위한 제헌 국회를 해산시키는 법원의 권한을 삭제하고, 무바라크 반란 당시 항의자들에게 폭력을 쓴 공무원들의 재심 길을 열었다. 무르시는 이집트의 민주적 이행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했지만, 많은 이들은 이를 독재적 권력 장악으로 보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2012년 11월 30일, 제헌 국회는 기독교와 세속주의자들의 불참 속에 이슬람주의자들이 작성한 헌법 초안을 승인했다. 무르시는 12월 15일 국민투표를 요구했고, 무르시 지지자와 반대자들은 전국적인 시위를 벌여 2011년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발생했다. 2012년 12월 초 시위가 계속되자 무르시는 헌법적 법령 일부를 폐지했지만, 제헌 국회 해산으로부터 법원을 보호하는 규약은 유지했다. 2012년 12월 9일, 무르시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헌법 국민투표가 열릴 때까지 군에 체포 명령을 내릴 권한을 부여했다. 새 헌법은 12월 하순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었다.
악화되는 경제 상황, 부패한 공직자들, 종파 간 갈등 사건은 정치적 대립을 격화시키고 무르시의 통치에 대한 반대를 강화시켰다. 2013년 6월 30일, 무르시 취임 1주년을 맞아 이집트 전역에서 무르시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 간의 대규모 충돌이 발생했다.
5.1. 국내 정책
무함마드 무르시는 2012년 6월 30일 이집트 최초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2012년 7월, 군부에 의해 해산되었던 의회를 복원하려 시도했으나, 군부와의 갈등을 야기했다. 무르시는 시민권 보호와 이슬람법 제정을 지지하는 내용의 새로운 이집트 헌법 제정을 추진했다.
2012년 8월 12일, 무르시는 군부의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 모하메드 후세인 탄타위 국가군 총사령관과 사미 하페즈 아난 육군 참모총장에게 사퇴를 요청하고, 대통령 권한을 제한하는 무장군 최고평의회(SCAF)의 헌법 개정안을 무효화했다. 후임 국방장관으로는 압델 파타 알시시를 임명했다.
2012년 11월 22일, 무르시는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대통령의 행동에 대한 사법적 심사를 금지하고, 무바라크 시대 시위대 살해 혐의자들의 재판을 요구했으며, 헌법기구의 임기를 연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조치는 이집트 전역에서 대규모 시위와 폭력 사태를 초래했고, 국제앰네스티, 휴먼라이츠 워치 등 국제 인권단체들도 이 선언을 비판했다.
2012년 12월 1일, 헌법기구는 무르시에게 헌법 초안을 전달했고, 12월 15일에 헌법 국민투표가 실시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12월 8일, 무르시는 대통령 권한을 확장한 포고령을 무효화했지만, 그 효과는 유지될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새 헌법은 국민 투표를 거쳐 12월 하순에 실시되었다.
무르시는 콥트 기독교인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분명히 이집트인이며, 나처럼 이 조국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말하며 종교의 자유는 알라가 부여한 권리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무르시 정부 하에서 이집트의 종교적 소수자들의 상황은 악화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5.2. 외교 정책
무함마드 무르시는 외교 정책에서 이집트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중동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데 힘썼다.
한국과의 관계:
무르시는 대통령 취임 후 첫 해외 순방지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여 압둘라 국왕과 회담하고 자금 지원을 이끌어냈다.
2012년 8월 28일, 이슬람권 이외 지역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후진타오 주석과 회담하였고, 이듬날인 2012년 8월 29일에는 시진핑 부주석과 원자바오 총리와 회담하였다.
2012년 9월 유엔 총회 참석을 위해 취임 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9월 26일 일본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와 처음으로 회담했다.
2012년 9월 30일,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터키를 방문하여 같은 이슬람주의 성향의 여당인 정의개발당의 연례 대회에 참석했다.
2013년 3월, 이집트 대통령으로서 50년 만에 처음으로 파키스탄을 방문했다.
2013년 5월, 이집트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브라질을 방문하여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과 회담했다.
중동 지역:
무르시는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조약을 존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방패의 기둥 작전을 규탄하고 휴전을 촉구했으며, 2012년 11월 14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하마스의 군사 부문 간부 아흐마드 자아바리가 이스라엘군에 의해 살해된 것에 대해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주이스라엘 대사를 소환했다. 또한 히샴 칸딜 총리를 가자에 파견하여 하마스와의 연대를 보여주었다. 미국과 함께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휴전을 중재하여 11월 21일 휴전 협정을 성사시켰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11월 21일 발표한 보도 자료에서 휴전 중재를 한 무르시를 "강력히 칭찬"하였고,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같은 날 무르시에게 전화를 걸어 무르시의 "휴전 성립에 대한 노력과 협상에서의 개인적인 리더십"에 감사를 표하는 등 무르시의 외교적 수완은 높이 평가되었다.
2012년 10월, 무르시는 이스라엘 시몬 페레스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편지를 썼다.
무르시는 카이로에서 이슬람 국가 57개국 정상이 참석한 이슬람 정상회의를 주최했다. 이 회의 성명서는 시리아 내전을 종식시키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시리아 내전에서 시리아 반군 세력을 강력히 지지했던 무르시는 2013년 6월 15일 이슬람 집회에 참석하여 시리아 대사의 추방과 카이로 시리아 대사관 폐쇄를 발표하고,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통한 반군 세력 지원을 위한 국제 개입을 촉구했다. 무르시는 시리아 문제에 대해 이란을 포함한 이집트,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주요 관련 4개국 회담을 제안했고, "시리아의 친구들"에 참여하여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한편, 외국의 군사 개입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무르시는 2012년 8월 말 테헤란에서 열린 제16차 비동맹 운동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기타 국가:
2012년 7월 15일부터 7월 16일까지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아프리카 연합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2013년 6월 말기에는 내정 혼란으로부터 국민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에티오피아로부터 전쟁 가능성을 시사하며 댐 건설 저지를 시도했다.
6. 축출과 이후
2013년 6월 18일 무르시 퇴진 운동 시위자들
7월 1일 이집트군의 압둘팟타흐 시시 장군은 무르시가 항의자들을 진정시키지 못하면 국가에서 무질서를 막는 데 군사가 중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경고했다. 무르시는 반대자들과 협상하겠다고 항의자들에게 응답했으나 물러나기를 거부하였다. 7월 3일 군부는 헌법을 일시 중지하고 무르시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는 다른 무슬림 형제단 지도자들 몇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몇 달 동안 무르시와 무슬림 형제단 지지자들은 이집트에서 격렬하게 진압당했으며, 7월 중순과 8월 비밀 경찰들은 무르시의 해임에 항의한 자들을 격렬하게 진압하여 1000명 이상의 항의자들이 사망하였다. 9월 무슬림 형제단은 전면 금지되었다. 무르시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지지한 시시는 대통령 선거에 나가려고 군대를 떠나 2014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아랍의 봄의 민주화 이후 첫 번째 이집트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정교분리 등 세속적인 가치관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주의에 기반한 통치를 한 결과, 모하메드 엘바라다이 등 국내 세속주의자들의 강한 반발을 받았다. 집권 후반에는 이슬람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헌법 제정을 추진하여 대규모 반정부 운동이 발생했고, 결국 쿠데타로 축출되어 체포되었다. 이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2016년 11월 대법원 판결에서 사형 선고가 사실상 뒤집히고, 2017년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징역 20년형이 선고되었다. 2019년 6월 17일 법정 심문 후 쓰러져 사망했다.
6.1. 2013년 이집트 쿠데타
2013년 6월 18일 무르시 퇴진 운동 시위자들의 모습.
2013년 6월 30일, 이집트 전역에서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가 대규모로 발생했다. 무르시 반대 시위와 동시에 그의 지지자들은 라바아 알아다위야 광장에서 농성을 벌였다.
7월 1일, 이집트군은 무르시에게 48시간의 최후통첩을 제시하며, 정치적 위기 해결을 요구했다. 이집트 군부는 분쟁이 해결되지 않으면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같은 날, 히샴 자주 관광부 장관, 아테프 헬미 통신정보기술부 장관, 하템 바가토 법률·의회 담당 국무장관, 칼레드 압델 아알 환경 담당 국무장관 등 4명의 장관이 사임했다.
7월 2일, 무르시는 군부의 최후통첩을 거부하고, 국가 화합과 정치 위기 해결을 위한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7월 3일,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헌법을 일시 중지시키고 무르시를 대통령직에서 해임했다. 무르시는 가택 연금되었으며, 공화국 경비대 막사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압델 파타 알시시는 미래를 위한 로드맵을 발표하고 아들리 만수르 헌법재판소장을 이집트의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7월 8일, 칸딜 총리는 새 정부 구성 전까지 자신의 직책을 유지하기로 결정했지만, 최근 쿠데타로 인한 유혈 사태, 특히 시위대 51명이 사망한 공화국 경비대 본부 사건에 항의하며 즉시 사임했다.
11월 중순, 무르시는 7월 2일 공화국 경비대 주택에서 납치되어 감금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7월 5일까지 그곳에 있었고, 그 후 해군 기지로 강제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4개월을 보냈다고 말했다. 이집트군 대변인 아메드 알리 대령은 무르시가 학대당했다는 소문을 부인하며 숨길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후 이집트군은 업홀랜드 여남작 캐서린 애쉬턴 유럽 집행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대외관계 및 안보정책 고등대표에게 무르시와 면담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애쉬턴은 무르시가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무르시는 나중에 아프리카 연합 대표단과 만났다.
내정과 외정에서 여러 가지 실정으로 인해 정권 비판과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이집트 정부는 활동가와 언론인들을 선동 혐의로 체포했고, 2013년 5월에는 국경없는기자회로부터 언론 자유 파괴자로 지정되었다. 6월에는 대통령 지지율이 25%까지 떨어졌다.
국방부 장관 압델 파타 알시시가 "이제 당신은 대통령이 아닙니다" 라고 경고했지만, 무르시는 "네놈을 해임해주겠다"고 반발하는 등 군부와도 대립하며 정국 불안이 심화되었다.
미국은 정변의 진행 상황에 따라 군사 지원을 중단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현재로서는 쿠데타라고 부르는 것을 피하고 있다. 미국은 국내법으로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정권에는 군사 원조를 하지 않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국왕은 군사 개입을 높이 평가하며 압델 파타 알시시 국방부 장관을 "어두운 터널에서 이집트를 구출했다"고 칭찬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는 이집트 군에 연간 12의 지원을 했고, 미국도 1300에 달하는 군사 지원을 했다.
6.2. 구속 및 재판
무함마드 무르시는 2012년 대통령궁 앞 시위대에 대한 폭력 선동, 2011년 탈옥, 스파이 혐의 등 여러 혐의로 기소되었다. 법정에서 그는 자신에 대한 재판 절차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여전히 이집트의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
2013년 9월 1일, 검찰은 무르시를 폭력 선동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검찰 수사 결과, 무르시는 공화당 경비대와 내무부 장관에게 시위대 해산을 요청했지만, 유혈 사태를 우려하여 거부당했고, 이후 무르시의 측근들이 지지자들에게 강제 해산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13년 12월 18일, 검찰총장 히샴 바라카트는 "이집트 역사상 최대의 스파이 사건" 보고서에서 무르시를 스파이 혐의로 형사 법정에 넘길 것을 명령했다. 검찰총장 수사에 따르면, 헤즈볼라와 하마스의 지원을 받은 무슬림형제단의 국제 조직이 이집트 내 폭력의 원인이었다.
2015년 4월, 법원은 시위대 체포 및 고문, 폭력 선동 혐의로 무르시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징역 20년 형을 선고했다. 무르시는 여전히 스파이, 테러, 탈옥 혐의에 대한 별도의 재판을 받아야 했다.
2015년 5월 16일, 무르시는 2011년 탈옥 사건과 관련하여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집트 형법에 따라, 이 판결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대무프티에게 회부되었다. 국제앰네스티는 이 재판을 "무효 절차에 기반한 쇼"라고 비난했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이집트를 비판하고 서구 국가들의 위선을 비난했다.
2016년 6월, 무르시는 카타르에 국가 기밀을 넘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16년 11월, 상고법원은 무르시의 스파이 혐의에 대한 사형 선고를 파기했다.
6.3. 사망
2019년 6월 17일, 무르시는 카이로 토라 교도소에서 스파이 혐의 재판 도중 쓰러져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집트 국영 방송은 그의 사망 원인이 심장마비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그의 변호사에 따르면, 무르시는 유리 감방 안에서 7분간 발언한 후 재판이 종료되었으며, 마지막 말은 "비록 나를 억압했을지라도 나의 조국은 소중하며, 비록 나에게 불의를 저질렀을지라도 나의 국민은 존경받을 만하다"는 시구였다고 한다. 그는 재판 종료 1분 후 쓰러졌다. 그는 카이로에 있는 다른 무슬림 형제단 고위 인사들 옆에 묻혔다.
무르시의 사망 원인에 대해 이집트 정부 비판론자들은 재판 과정의 열악한 환경 때문이라고 비난하며, 그가 수감된 환경이 사망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런던에 거주하는 저명한 무슬림 형제단 회원인 모하메드 수단(Mohamed Sudan)은 그의 죽음을 "의도적인 살인"이라고 규정했다. 2018년 3월 무르시의 수감 환경을 검토했던 영국 의원 패널을 이끌었던 크리스핀 블런트(Crispin Blunt)는 "무르시 박사에게 긴급한 의료 지원이 제공되지 않으면 그의 건강에 돌이킬 수 없는, 그리고 치명적인 손상이 초래될 수 있다고 우려했고, 슬프게도 우리의 우려가 사실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무르시의 죽음에 대해 이집트 지도부를 비난하며 그를 순교자라고 묘사했다. 이스탄불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다.
마다 마스르(Mada Masr)는 이집트 정부가 무르시 사망 보도에 대한 검열을 실시했으며, 신문들이 그의 대통령직이나 사망 책임에 대한 주장 없이 동일하게 작성된 짧은 기사를 사용하도록 요구했고, 1면에 기사를 게재하지 않도록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거의 모든 이집트 신문이 이 명령에 따랐지만, 알 마스리 알 유움(Al-Masry Al-Youm)은 1면에 기사를 게재하고 그의 대통령직을 언급했다.
7. 유산
민주화 이후 이집트의 첫 번째 이집트 대통령으로 선출된 무함마드 무르시는 정교분리 등 세속적인 가치관이 널리 퍼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주의에 기반한 통치를 하였다. 그 결과, 모하메드 엘바라다이 등 국내 세속주의자들의 강한 반발을 받았다. 집권 후반에는 이슬람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헌법 제정을 추진하여 대규모 반정부 운동이 발생했고, 결국 압델 파타흐 시시 국방장관 등이 그의 정권 운영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며 쿠데타를 일으켜 축출되고 체포되었다(2013년 이집트 쿠데타). 이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2016년 11월 대법원 판결에서 사형 선고가 사실상 뒤집히고, 2017년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징역 20년형이 선고되었다. 2019년 6월 17일 법정 심문 후 쓰러져 사망했다.
2020년 10월, 무함마드 무르시 사망 1년 이상 후, 터키 구호 단체들은 시리아 이들리브에 "모하메드 무르시 고아원"을 설립했다. 터키 정부의 재난 및 비상 관리청(AFAD)은 오즈구르-데이르 및 페티흐데르 협회와 함께 이들리브의 마슈하드 루힌 지역에 고아원을 열었다. 이곳은 도시의 고아 및 그 가족들을 수용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