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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이'는 '동이', '서융', '남만', '북적' 등 중국 주변 민족을 통칭하는 용어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인 중화사상의 핵심 개념이다. 어원은 활을 잘 쏘는 동방 민족을 지칭하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역사적으로 중화와 이적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사용되었다. 중국 고전에서 주변 민족을 경멸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불교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사이'는 중국의 대외 관계와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에는 중화주의의 잔재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중국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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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 |
---|---|
개요 | |
명칭 | 사방의 오랑캐 |
설명 | 고대 중국의 국경 밖에 거주하는 다양한 이민족을 지칭하는 용어 |
구성 | |
동쪽 | 동이 |
남쪽 | 남만 |
서쪽 | 서융 |
북쪽 | 북적 |
역사적 맥락 | |
주나라 | 화하족 중심의 천하관에서 주변 민족을 야만족으로 간주 |
춘추전국시대 | 중화사상 강화, 사이에 대한 차별 심화 |
이후 | 중화 왕조는 주변 국가를 조공 관계로 편입, 사이라는 개념은 약화 |
문화적 의미 | |
중화주의 | 중국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주변 민족을 미개하다고 폄하하는 사상 |
자기 중심적 세계관 |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하고 주변 국가를 주변부로 인식 |
문화 상대주의적 비판 | 현대에는 중화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시각 존재 |
2. 어원 및 용례
고대 중국에서, '이(夷)'는 '크다(大)'와 '활(弓)'이 합쳐진 글자로, 활을 잘 쏘는 동방 민족을 지칭하던 말에서 유래했다.[2] 갑골문에서는 '시(尸)'와 함께 쓰여 시체나 포로를 의미하기도 했다.[1]
'사이' 개념은 시대에 따라 그 의미와 용법이 변화했다.
'사이지(四夷)'는 '사방의 오랑캐'를 뜻하며, 중국 고전에서 주변 민족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2] 중국 불교에서 '사이지(四夷)'는 승려를 승가에서 추방하는 심각한 위반을 뜻하기도 한다.
'화이 구분(華夷之辨)'은 중화와 이적을 구별하는 개념으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나타낸다. 역사학자 리펑은 주나라 시대에 '중국'과 '비중국' 사이의 대조는 "문화적 또는 민족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었다고 말한다.[1]
'이(夷)'는 현대 중국어 발음이며, 상고 중국어 발음은 여러 가지로 재구성되었다. 夷중국어에 대한 현대 문자는 진나라 전서와 마찬가지로 大중국어 "크다"와 弓중국어 "활"로 구성되지만, 가장 초기의 상나라 갑골문은 ''이''와 ''시'' 尸중국어 "시체"를 번갈아 사용했으며, 허리를 구부리고 다리를 늘어뜨린 사람을 묘사했다.
3. 역사적 변천
중국의 중국학자 천즈는 청동 비문과 서주 시대(기원전 1046–771년경)의 문서에서 '이(夷)'라는 단어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첫째, '이' 또는 '이방(夷方)'은 주 무왕 시대부터 상(商)과 싸웠던 특정 민족 집단을 지칭했다. 둘째, '이'는 중국 동쪽과 남쪽의 먼 땅에 사는 민족을 의미했는데, 동이(東夷), 남이(南夷), 회이(淮夷) 등이 대표적이다. 서주 시대 청동기에는 기이(杞夷), 주이(舟夷)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집단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
청동 ''귀(鬹)'' 비문에는 '이'가 중국 외부의 민족뿐 아니라, "주(周)의 통치 지역 내 특정 집단"을 지칭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리링의 연구를 확장한 천즈는 서주 시대 청동기 기록이 주나라 사람('왕인(王人)'), 상나라 사람, '이' 사람(주나라와 상나라 모두 아님)의 세 범주를 구분한다고 밝혔다. 상나라 사람들은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직책에 채용되었지만, '이' 사람들은 낮은 지위의 직책에서 통치자들을 섬겼다.
천즈는 '하(夏)'와 '이' 개념의 의미 변화를 분석했다. 서주 시대에는 주나라 엘리트와 비주나라 사람을, 동주 시대에는 중심 국가와 주변 이민족, 주나라 신민과 비주나라 신민을 구분하는 데 사용되었다. 동주 시대 정경(典經)은 '하(夏)'(또는 '중국(中國)')와 '이(夷)', '적(狄)', '융(戎)', '만(蠻)' 사이의 구분을 주장한다. 이 중 '이'는 "야만" 씨족, 부족, 민족 집단을 지칭하는 데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중국 고전은 방위 복합어('동이', '서이(西夷)', '남이', '북이'), 수치 일반화('삼이(三夷)', '사(四夷)', '구이(九夷)'), 특정 지역 및 국가 집단('회이(淮夷)', '초이(楚夷)', '진이(秦夷)', '오이(吳夷)')에 사용했다.
역사학자 류준핑과 황더위안은 초기 중국 군주들이 사방(四方) 개념을 사용하여 통치를 정당화했으며, "'천하(天,下)'... 및 '사방(四方)'과 같은 개념을 우연히 사용하면서" "중국"의 "국가" 개념이 진화했다고 제안한다.
중국 고전에는 '사(四)' "사방(四方)"에 대한 언급이 많다. 춘추 시대 말기(기원전 771–476년) 또는 전국 시대 초(기원전 475–221년) 무렵, '만(蠻)', '이(夷)', '융(戎)', '적(狄)'이 사방과 연관되었다. '이(夷)'는 "동쪽의 야만족"에서 "야만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사방(四夷)'과 '만-이-융-적(蠻夷戎狄)'은 "사방의 모든 비주(非周) 야만족"을 가리켰다.
'좌전'의 '춘추' 주석은 '사방(四夷)'을 네 번 사용한다.[3][4][5][6] 또한 "모든 종류의 야만족"을 의미하는 '만-이-융-적(蠻夷戎狄)'에 대한 초기 사용례도 있다.[7]
'묵자'는 주나라 무왕에 대해 '사방(四夷)'을 한 번 언급한다. '관자'는 제 환공 (기원전 643년 사망)이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을 포함한 모든 적들을 정복한 과정을 설명한다.[8] 유교의 '논어'는 '사방(四夷)'을 사용하지 않지만 '구이(九夷)' "아홉 야만족"(9/19)을 사용한다.[10] '이적(夷狄)' "동이와 북방 야만족"은 두 번 나타난다.[11] 유교 학자 '맹자' (1A/7)[13]는 제 선왕 (기원전 319–301년 재위)에게 영토 확장을 반대할 때 '사방(四夷)'을 한 번 사용한다. '맹자'는 서쪽 '서이(西夷)'를 네 번, 동쪽 '동이'를 한 번, '이적(夷狄)'을 한 번 사용한다.
'순자'는 한 장에서 '사방(四夷)'을 두 번 사용한다.[18] '순자'는 '만-이-융-적(蠻夷戎狄)'을 한 번 사용한다.[19] '예기'는 '사방(四夷)'을 한 번 사용한다.[20] '예기'는 또한 동이, 남만, 서융, 북적의 특성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한다.[21] '서경' 역사는 두 개의 위조된 "고문(古文)" 장에서 '사방(四夷)'을 사용한다.[22][23] '여씨춘추'에는 '사방(四夷)'이 두 번 나온다. 도교의 '장자'는 "잡편(雜篇)"에서 '사방(四夷)'을 두 번 사용한다.
한나라 (기원전 206년-서기 220년) 시대의 많은 문헌에서 이(夷)와 사(四夷)라는 민족 명칭을 사용했다. 유안이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회남자는 세 개의 장에서 사(四夷) "사방 오랑캐"를 사용하고, 두 개의 장에서 구(九夷) "아홉 오랑캐"를 사용한다.[24][25][26][27] "사방 오랑캐"에 대한 언급은 특히 한 시대의 역사에서 흔하며; 사(四夷)는 사기에서 18번, 한서에서 62번, 후한서에서 30번 나타난다.
많은 학자들은 "문명 대 야만" 이분법을 평가하기 위해 중국 고전이 남쪽의 월(越)족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조사했다. 사마천의 사기는 구천 왕의 중국 혈통을 우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28] 한편, 이질적인 습관과 관습을 통해 월(越)족을 개념화하지만, 친족 기반의 민족성을 통해 개념화하기도 한다.[29]
결국, 중국 역사에서 자아와 타자 간의 관계를 다루는 많은 연구는 문명화된 중국인 또는 한족과 야만인 타자 사이에 단순한 분기를 가정하지만, 일부 초기 저자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훨씬 더 복잡하고 때로는 상반된 방식으로 구별했다.[31]
이(夷)의 의미와 용법의 복잡성은 후한서에서도 나타나는데, 동이에 대한 장에서 이 책은 동이(東夷) 국가들을 인자함이 지배하고 군자가 죽지 않는 곳으로 묘사한다. 설문해자 (121 CE) 자전은 이(yi)를 "동쪽의 사람들"(東方之人也)로 정의한다.
3. 1. 각 시대별 주요 민족
동이는 황허, 회허, 창장 유역에 거주하며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던 민족이었다. 이들은 저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낮다'는 의미의 '이(夷)'라고 불렸고, 동쪽에 거주했기 때문에 '동이(東夷)'라고 불렸다.[31]
북적은 산서 고원과 몽골 고원 남부의 산림 지대에서 수렵 생활을 하던 민족이었다. 이들은 모피나 고려 인삼을 평원의 농경민에게 가져다주고 농산물을 얻는 교역을 했다. '적(狄)'은 교역을 의미하는 '역'과 같은 뜻으로, 북쪽에 거주했기 때문에 '북적(北狄)'이라고 불렸다.[31]
서융은 간쑤성 남부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민족이었다. 이들은 평원의 농경민에게 울을 가져다 주었다. '융(戎)'은 양모를 뜻하는 '융'과 같은 의미로, 서쪽에 거주했기 때문에 '서융(西戎)'이라고 불렸다.[31]
남만은 화전 농업을 하던 남쪽 산악 지대의 민족이었다. '만(蠻)'은 그들의 언어로 인간을 뜻하며, 남쪽에 거주했기 때문에 '남만(南蠻)'이라고 불렸다.[31]
이들 동이, 북적, 서융, 남만은 생활 양식은 달랐지만, 정기적으로 교역을 위해 뤄양 분지나 그 주변에서 서로 접촉했다. 이들이 교역하던 장소에 도시가 발생했고, 이들이 섞이면서 고대 중국인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31]
4. 중화사상과의 관계
사이 개념은 중화사상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이다. 중화사상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주변 민족을 문화적으로 미개한 존재로 여기는 사상이다.[2] 중화와 이적 사이에는 대등한 외교나 무역은 존재하지 않았고, 조공이라고 불리는 종속 관계만 맺어졌다.
고대 중국에서는 문명의 발달 정도 차이와, 조정에 복속하지 않는 주변 민족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과 약탈을 받은 것에서 비롯하여 이러한 호칭에 멸시하는 의미를 담았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는 학술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이러한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 주변 민족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과 약탈을 받았다는 해석이 항상 적절한 것은 아니며, 중화를 자칭하는 측(반드시 한족은 아님)도 영토 확대를 목적으로 주변 지역에 대한 침략 행위를 반복해 온 사실이 있다.
- 이적으로 멸시받았던 비중화 국가나 민족도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반드시 중화 문명과 우열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중화 측의 가치관으로 본 구별 또는 차별이다.
- 역사적으로도 많은 다른 민족(이적)이 진출하여 왕조를 세웠기 때문에, 실제로는 중화 문명 자체가 비중화(이적)의 영향을 받고 있다.
청나라의 제5대 황제인 옹정제는 만주족 출신이었지만, 중화사상을 수용하여 만주족의 통치를 정당화했다. 옹정제는 만주족을 이적으로 간주하고 명나라 부활을 주장하는 사상가를 스스로 논파하고, 토론 경위를 『대의각미록』이라는 책으로 묶었다. 옹정제는 『맹자』의 "순은 동이 사람이었고, 주 문왕은 서이 사람이었지만, 그 성덕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본조(청나라)가 만주 출신인 것은 중국인에게 원적이 있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다.[34]
5. 현대적 의의
사이 개념은 현대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중국의 대외 관계와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30] 사이 개념은 중화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한족을 포함한 지배 민족이 이민족을 멸시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적, 융적, 만이 등으로도 불렸으며, '미개'와 '야만'을 의미하는 외부 세계를 지칭했다.
19세기 이전까지 중화와 사이에는 대등한 외교나 무역 관계가 없었고, 조공이라 불리는 종속 관계만 존재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고대 문명의 발전 차이와 주변 민족의 잦은 공격과 약탈이 있었지만, 중화를 자칭하는 측도 영토 확장을 위해 주변 지역을 침략해 온 역사가 있다.
사이로 멸시받던 국가나 민족도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중화 문명과의 우열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는 중화 측의 가치관에 따른 구별 또는 차별이었다. 역사적으로 벼농사, 불교, 철기, 복장 등 사이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대에는 사이 개념이 중화주의의 잔재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중국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도 한다.
6. 한국과의 관계
고대 한국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사이(四夷) 개념의 영향을 받았다. 한나라 시대의 문헌인 회남자에서는 "사(四) 이(夷) 부족이 조공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으며,[24] 사기와 한서에도 사이(四夷)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이 중국 왕조와 조공 관계를 맺었던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이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일부 수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현대 한국에서는 사이 개념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은 전통적으로 중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중시하며, 한중 관계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사이 개념은 여전히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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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Assuming harvnb refers to academic papers/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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誰も知らなかった皇帝たちの中国
ワック (メディア企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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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8回 「中華」の世界観と「正統」の歴史
https://ocw.u-tokyo.[...]
東京大学大学院総合文化研究科・教養学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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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調講演記録 華夷の変 ―華語語系研究の新しいビジョン―
http://id.nii.ac.jp/[...]
愛知大学国際問題研究所
202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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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清朝の「非漢民族世界」における「大中華」の表現 : 『大義覚迷録』から『清帝遜位詔書』まで
http://id.nii.ac.jp/[...]
島根県立大学北東アジア地域研究センター
20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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