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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야 (도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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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야는 일본 도쿄도에 위치한 지역으로, 원래 닛코 가도의 숙소였으며, 메이지 시대부터 빈곤층과 노동자들이 거주하며 간이 숙박 시설이 발달했다. 1960년대 이후 산야 지구 파출소와의 갈등으로 여러 차례 폭동이 발생했고, 오카바야시 노부야스의 "산야 블루스"가 발표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노숙자에게 생활 보호를 제공하는 정책이 시행되었고, 최근에는 외국인 관광객과 젊은 층의 이용이 증가하며, 간이 숙박 시설이 저렴한 호텔로 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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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야 (도쿄도) - [지명]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개요
이름산야 (山谷)
위치도쿄도
설명산야는 도쿄도에 위치한 지역이다.

2. 역사

에도 시대부터 오슈 가이도와 닛코 가이도 주변에는 숙박만 제공하는 저렴한 숙소인 키친야도(木賃宿|키친야도일본어)가 모여 있었다. 이러한 간이 숙소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이는 지역의 특징으로, 일본 전역에서는 이런 숙소가 밀집한 거리를 '도야가이'(ドヤ街|도야가이일본어)라고 부른다. 메이지 시대 이후 정부 정책에 따라 요시와라 유곽의 인력거꾼 등을 위한 저렴한 주택 지구가 형성되면서 빈곤층과 노동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태평양 전쟁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지역이 파괴되었으나[3], 전후 복구와 고도 경제 성장기를 거치며 건설 노동자들이 도쿄로 몰려들면서 간이 숙박소가 급증했다[3]. 1961년에는 약 300개의 간이 숙소에 약 2만 명의 노동자가 거주할 정도로 일본의 대표적인 일용직 노동자 거주지(요세바)로 자리 잡았다.

1966년 주거 표시 제도가 시행되면서 행정구역명으로서 '아사쿠사 산야'는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다이토구 기요카와, 닛폰쓰쓰미, 아라카와구 미나미센주 등 일대의 간이 숙소 밀집 지역을 통칭하는 '산야' 또는 '산야 지역'이라는 이름은 계속 사용되고 있다[5][6][7]. 이 지역은 눈물 다리를 경계로 과거 에도의 외곽이었으며, 근처에는 고즈카하라 형장과 유녀들의 시신이 버려지던 조칸지 등이 위치했던 역사적 배경도 가지고 있다[8].

1960년대에는 열악한 노동 환경과 야쿠자의 착취 등에 대한 불만으로 노동자들의 폭동(산야 소동)이 여러 차례 발생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산야 지구 파출소(통칭 '맘모스 파출소')가 설치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산야의 노동 문제와 야쿠자의 개입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진이 야쿠자 조직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1996년에는 도쿄도23구 간의 합의(소위 '산야 룰')에 따라 각 구의 노숙자들이 임시로 산야 지역에 보내졌으나, 이후 이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면서 노숙자 문제가 심화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인해 '노동자의 거리'에서 '복지의 거리'로 성격이 변화하고 있으며, 동시에 기존의 간이 숙소들이 배낭여행객 등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저렴한 숙소로 활용되는 등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15].

2. 1.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에도 시대에 오슈 가이도와 닛코 가이도를 따라 에도로 향하는 첫 번째 숙소 마을이었던 센주쿠 남쪽에 위치했으며, 당시부터 숙박만 제공하는 저렴한 숙소인 키친야도(木賃宿)가 모여 있던 곳이었다. 현재 다이토구아라카와구의 경계인 눈물 다리는 과거 에도의 경계였으며, 근처에는 고즈카하라 형장과 유녀의 시신을 매장하던 사찰인 조칸지가 있었다[8].

메이지 시대 초부터 정부는 요시와라 유곽에서 손님을 실어 나르는 인력거꾼들이 거주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가도 근처 도시 외곽에 저렴한 주택 지구를 형성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 이전에는 이미 일용직 노동자를 비롯한 상당수의 빈곤층이 이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다.

2. 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태평양 전쟁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으로 산야를 포함한 시타마치 일대는 큰 피해를 입고 잿더미가 되었다[3]. 전쟁 이후, 피해자들을 위한 임시 숙소로 텐트 마을이 세워졌으나, 이는 점차 오늘날 볼 수 있는 영구적인 간이 숙소 형태로 바뀌었다. 전후 복구와 고도 경제 성장기를 거치면서 건설 현장 등에서 일할 노동자들이 도쿄로 대거 유입되었고, 이에 따라 산야 지역에는 저렴한 간이 숙박소들이 급격히 늘어났다[3]. 늘어나는 노동자 수요에 맞춰 산야는 일본의 주요 일용직 노동자 거주지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61년경에는 산야에 약 300개의 간이 숙소가 있었고, 이곳에서 약 2만 명의 노동자들이 생활했다.

눈물 다리(나미다바시) 교차로. 다이토구와 아라카와구의 경계에 위치한다.


1966년에는 일본 정부의 주거 표시 제도 실시에 따라 기존의 다이토구 아사쿠사 산야 1~4초메라는 행정구역명은 공식적으로 사라지고, 현재의 기요카와, 닛폰쓰쓰미 일부, 히가시아사쿠사 2초메 등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일용직 노동자들의 거주지나 값싼 숙소가 밀집한 지역을 가리키는 통칭으로서 '산야' 또는 '산야 지역'이라는 이름은 계속 사용되고 있다. 도쿄 도청 등에서는 이 지역을 기요카와, 닛폰쓰쓰미, 히가시아사쿠사 2초메 외에도 하시바 2초메, 아라카와구 미나미센주 1~3, 5, 7초메까지 포함하여 '산야 지역'으로 부르기도 한다[5][6][7].

신주쿠에서 열린 오키나와 관련 시위에 등장한 산야 일용직 노동자 단체의 깃발. 노동자들의 저항을 상징한다.


산야 일용 노동조합의 간판.


1960년대 산야 지역에서는 열악한 노동 환경과 야쿠자의 착취 등에 대한 불만으로 수천 명 규모의 노동자 폭동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이러한 소요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당시 '맘모스 경찰서'라고 불리던 산야 지구 경찰서(현재의 니혼쓰쓰미 경찰서)가 설치되기도 했다. 폭동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지적되지만, 일각에서는 범죄 조직이나 과격 정치 세력의 선동이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산야의 일용직 노동자들은 불안정한 고용과 저임금뿐만 아니라, 야쿠자 조직의 폭력과 갈취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지역 내에서는 반전이나 반천황제를 주장하는 표지판이나 현수막이 보이기도 했다. 가톨릭 및 개신교 교회, 시민 단체 등이 산야 지역에 자리 잡고 노동자들을 위한 긴급 식량 배급이나 인도주의적 지원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1969년에는 포크 가수 오카바야시 노부야스가 산야 일용직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과 애환을 노래한 '산야 블루스'라는 곡으로 데뷔했다. 다만 오카바야시 본인은 실제로 산야에 머문 기간이 일주일 정도에 불과했으며, 오랜 기간 체류한 것처럼 연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산야 지역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도 발생했다. 1984년과 1988년에는 산야의 일용직 노동자 문제와 야쿠자의 개입 실태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산야 - 공격에서 공격으로》(山谷─やられたらやりかえせ일본어)를 제작했던 감독과 스태프가 연이어 야쿠자 조직원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살인 용의자로는 야쿠자 조직 '코쿠스이카이'(国粋会일본어) 소속 조직원이 지목되었다.

산야 지역 공원(타마히메 공원)의 노숙자들. 1996년 이후 노숙자 문제가 심화되었다.


타마히메 공원의 공중 화장실.


1996년, 도쿄도와 23개 특별구는 노숙자 보호 대책에 합의하면서, 각 구에서 자체적인 수용 시설을 마련할 때까지 노숙자들을 임시로 산야 지역에 위탁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에 그쳤고, 신원 보증 문제 등으로 인해 노숙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어려워지면서 많은 노숙자들이 산야에 그대로 방치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때문에 산야는 "버려진 사람들의 지역"이라는 비판적인 시선을 받기도 했다.

최근 산야 지역은 일용직 노동자들의 고령화와 인구 감소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해 있다. 과거 '일용직 노동자의 마을'이었던 산야는 점차 사회 복지 서비스에 의존하는 노인 인구가 많은 '복지의 마을'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전통적으로 일용직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했던 간이 숙소들은 배낭여행객 등 일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저렴한 숙소로 점차 변모하고 있다. 숙소 내부에는 영어 안내문이 붙고, 외국인 고객 유치를 위한 홍보 활동도 활발해지고 있으며, 새로운 형태의 간이 숙소들도 들어서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휴가철이나 행사 기간에 도쿄를 방문하는 국내외 젊은이들이 저렴한 숙박 시설로 산야의 간이 숙소를 이용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2. 3. 1960년대 이후의 변화와 갈등

태평양 전쟁 후 고도 경제 성장기에 노동 수요가 증가하면서 산야는 일본의 주요 일용직 노동자 거주지로 발전했다[3]. 1961년에는 약 300개의 간이 숙소에 2만 명 가량의 노동자가 거주했으며, 1964년 도쿄 올림픽 전 해인 1963년에는 222개의 간이 숙박 시설에 약 1만 5천 명이 머물렀다.

1960년대에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 조건과 야쿠자의 착취 등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면서, 수천 명 규모의 폭동 (산야 소동)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이에 대응하여 지역에 산야 지구 파출소 (통칭 "맘모스 파출소", 이후 이전하여 현재는 "니혼즈츠 파출소"로 개명)가 신설되었다. 폭동의 원인으로는 열악한 대우 외에도 범죄 조직이나 과격파의 선동이 있었다는 설도 제기된다. 예를 들어 1962년11월 24일의 폭동은 식당의 불친절한 응대가 발단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10]. 한편, 1966년 주거 표시 제도가 시행되면서 공식 행정 지명으로서 '산야'는 사라지게 되었다.

1969년에는 포크 가수 오카바야시 노부야스가 일용직 노동자의 고된 삶과 비애를 노래한 '산야 블루스'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1970년12월 15일에는 전국항만노동조합 산야 분회 조합원들이 연말 주거 대책을 요구하며 도쿄 도청에서 농성을 벌이다 체포되었고[11], 1974년1월 5일에는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 136명이 다이토구청에서 생활 보호비 지급을 요구하여 즉시 지급받는 일도 있었다[12]. 이후 며칠간 생활 보호비를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몰려드는 소동이 있었으나, 곧 통상적인 자격 심사 체제로 돌아갔다[13]. 1979년6월 9일에는 산야 지구 파출소에서 경찰관이 취객을 상대하던 중 다른 남성에게 칼에 찔려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14].

1984년1986년에는 산야 지역에서 암약하는 야쿠자 (가네마치 일가)와 노동자 간의 투쟁 및 유착 관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산야 - 당하면 되갚아준다》를 제작하던 영화 감독 2명이 일본 국수회 조직원에게 연이어 암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996년, 도쿄도도쿄 23구는 노숙자 보호를 명목으로, 각 구가 거주지를 마련할 때까지 노숙자를 산야 지역에 임시 위탁하는 소위 '산야 룰'을 만들었다. 그러나 보증인 등의 문제로 인해 노숙자들이 원래 구로 돌아가지 못하고 산야에 그대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로 인해 산야는 '버려진 사람들의 거리'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최근 산야는 거주하던 일용직 노동자들의 고령화와 인구 감소 문제를 겪고 있다. 2018년 기준으로 약 4,200명의 전직 노동자가 거주하며, 이들 중 90%가 생활 보호 대상자이다. 이로 인해 '일용직 노동자의 거리'에서 '복지의 거리'로 변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기존의 간이 숙박 시설들은 배낭여행객 등 외국인 여행객들을 위한 저렴한 숙소로 점차 활용되고 있다. 연간 외국인 숙박객은 10만 명으로 추산되며[15], 숙소 내부에는 영어 안내문을 충실히 갖추고 외국인 이용객 유치를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는 한편, 새롭게 신축된 간이 숙박 시설도 등장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도쿄 시내 여행이나 행사에 참여하는 일본 국내 젊은이들이나 오래된 건물을 촬영하려는 아마추어 사진가들도 산야의 간이 숙박 시설을 이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한편, 만화 《내일의 죠》의 무대 중 하나이기도 한 점을 활용하여, 지역의 이로하 상점가에서는 마을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성지 순례객 유치에 나서기도 했다[16]. 둑길에는 주인공 야부키 조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3].

2. 4. 1990년대 이후의 변화

1996년, 도쿄도와 도쿄 23구는 노숙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에 상호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각 구는 노숙자를 위한 거주지를 결정할 때까지 이들을 산야 지역에 임시로 위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 구에서 노숙자를 수용할 아파트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고, 결국 더 많은 노숙자가 산야로 보내져 그대로 남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산야는 "버려진 사람들의 지역"이라는 부정적인 별칭을 얻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산야 지역의 주요 주민이었던 일용직 노동자의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두드러지는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산야는 점차 '일용직 노동자의 마을'에서 '복지의 마을'로 변화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주민 구성의 변화와 함께, 전통적으로 일용직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던 간이 숙박소( ドヤ|도야일본어 )들도 변화를 겪고 있다. 일본을 방문하는 외국인 배낭여행객들이 저렴한 숙소를 찾으면서, 이들 간이 숙소가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저가 호텔로 점점 더 많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숙소 내부에 영어 안내문을 게시하고 외국인 고객 유치를 위한 홍보 활동을 벌이는 업주들이 늘어났으며, 새로운 간이 숙소 건설도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휴가나 행사 참여를 위해 도시를 방문하는 국내외 젊은이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산야의 간이 숙소를 이용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3. 간이 숙박 시설 (도야)

에도 시대부터 오슈 가이도와 닛코 가이도 주변에는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 저렴한 숙소인 키치냐도(木賃宿)가 있었다. 오늘날에도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이는 지역에는 이러한 간이 숙소가 많이 남아 있으며, 일본 전역에서 이를 "도야"(ドヤ)라고 부른다.[3] 태평양 전쟁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으로 산야를 포함한 시타마치 일대가 파괴되었으나[3], 전후 복구와 고도 경제 성장기를 거치며 건설 노동자들이 도쿄로 몰려들면서 산야에는 간이 숙박소가 급증했다.[3] 1961년까지 산야에는 약 300개의 간이 숙소가 건설되어 약 2만 명의 노동자를 수용했다.

원래 이 지역은 닛코 가이도를 따라 에도로 향하는 첫 번째 슈쿠바(숙소 마을)였다.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정부 주도로 요시와라 유곽에서 손님을 나르던 인력거꾼들을 위한 저렴한 주택 지구가 고속도로 인근 도시 외곽에 형성되었다. 전쟁 전부터 이미 일용직 노동자를 포함한 많은 빈곤층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1966년 주거 표시 제도가 시행되면서 '아사쿠사 산야 1~4초메'라는 행정 구역명은 공식적으로 사라지고, 현재의 다이토구 기요카와, 닛폰쓰쓰미 일부, 히가시아사쿠사 2초메 등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산야'라는 이름은 여전히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통칭으로 사용된다. 도쿄 도청과 공익 재단법인 조호쿠 노동·복지 센터[5]는 기요카와, 닛폰쓰쓰미, 히가시아사쿠사 2초메 외에도 하시바 2초메, 아라카와구 미나미센주 1~3, 5, 7초메까지를 "산야 지역"으로 정의하고 있다.[6][7] 이 지역의 중심에는 나미다바시(눈물의 다리) 교차로가 있다. 과거 에도의 경계였던 나미다바시 근처에는 고즈카하라 형장과 유녀들의 시신을 매장하던 조칸지(浄閑寺)가 있었다.[8] 산야 남서쪽 인근에는 과거 요시와라로 불렸던 소프랜드 구역이 있다(현재 다이토구 센조쿠 1초메).[8]

산야 지구의 저렴한 호텔


산야의 간이 숙소는 대부분 잠잘 공간만 제공하는 숙박 전문 형태이다. 8인실과 같은 다인용 도미토리를 제공하는 곳도 있다. 많은 숙소 입구 등에는 "컬러 텔레비전 완비", "냉난방 완비"라는 문구가 적힌 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오래된 간이 숙소의 특징 중 하나이다.

산야의 일용직 노동자들은 열악한 근로 조건에 놓여 있으며, 야쿠자 범죄 조직의 착취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 반전이나 반천황제를 주장하는 표지판과 현수막이 지역 내에 걸리기도 했다. 가톨릭 및 개신교 교회와 여러 시민 단체들은 산야에 기반을 두고 협력하며 긴급 식량 배급 등 인도주의적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60년대에는 수천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폭동이 여러 차례 발생하여, 이 지역을 관할하는 산야 지구 경찰서(현재 니혼쓰쓰미 경찰서)가 설립되기도 했다. 폭동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있지만, 범죄 조직이나 과격 정치 세력의 개입이 있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1969년 포크 가수 오카바야시 노부야스는 일용직 노동자의 애환을 그린 노래 "산야 블루스"로 데뷔했다. 1984년과 1988년에는 일용직 노동자와 야쿠자 간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산야 - 공격에서 공격으로"를 제작하던 감독과 스태프가 야쿠자 조직원에게 잇따라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96년, 도쿄도와 23개 특별구는 노숙자 보호 대책에 합의하고, 각 구에서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 노숙자들을 임시로 산야 지역에 위탁했다. 그러나 구청들이 노숙자를 수용할 아파트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서 많은 노숙자가 산야에 그대로 남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산야는 "버려진 사람들의 지역"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8년 10월, 오사카에서 발생한 비디오 가게 방화 사건과 관련하여 당시 도쿄도지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는 산야의 숙박 시설을 언급하며 "산야에 가면 200JPY~300JPY에 머물 수 있는 곳이 많다"는 발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다이토구 구청장의 항의를 받은 이시하라는 이후 "숫자가 약간 틀렸다"고 해명했지만, 당시에도 200JPY~300JPY 수준의 숙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2002년 FIFA 월드컵을 기점으로 외국인 배낭 여행객들이 산야의 저렴한 숙박 시설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저렴한 요금, 다른 나라의 저렴한 숙소 밀집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호한 치안, 그리고 미나미센주역에서 도쿄 메트로 히비야선을 통해 우에노, 아키하바라, 긴자, 롯폰기 등 주요 관광지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외국인 이용객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숙박 시설들도 외국인 응대에 나서면서, 산야는 점차 "외국인을 위한 저렴한 호텔 타운"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최근에는 신축 간이 숙소도 생겨나고 있으며, 저렴한 비용으로 도쿄 여행을 즐기려는 국내외 젊은이들의 이용도 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도야 거리 특유의 모습에 당황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적지 않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고 산야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2018년에는 커피 판매 수익금 일부를 생활이 어려운 전직 일용직 노동자에게 기부하는 카페가 문을 열기도 했다.[9]

한편, 산야의 주요 거주민이었던 일용직 노동자들의 고령화와 인구 감소는 심화되고 있다. 이로 인해 과거 "일용직 노동자의 마을"이었던 산야는 점차 "복지의 마을"로 변화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4. 지역 단체 및 시설

산야 지역에는 일용직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지역 사회 문제를 다루는 다양한 단체와 시설이 활동하고 있다. 주요 기관으로는 행정 연계 단체, 종교 단체, NPO 및 시민 단체, 그리고 노동 운동 단체 등이 있다.

'''주요 단체 및 시설'''


  • '''행정 및 공공기관'''
  • '''공익 재단법인 도쿄도 복지 보건 재단 조호쿠 노동·복지 센터''': 도쿄도의 정책 연계 단체로, 행정이 운영하는 요세바(일자리 중개소) 역할을 하며 직업 소개, 진료소 운영, 오락실 제공 등 다양한 지원 활동을 한다.[5]
  • '''니혼쓰쓰미 파출소''': 경시청 아사쿠사 경찰서 관할의 대규모 파출소로 지역 치안을 담당한다.

  • '''종교 기반 단체 및 관련 시설'''
  • '''일본 기독교단 니혼쓰쓰미 전도소 센터·산야 노동자 복지 회관''': 일본 기독교단이 설치한 시설로, 후술할 산야 쟁의단의 주요 거점으로 사용된다. 집회소, 취사 시설, 창고 등으로 활용되며 악천후 시 노숙자들의 임시 피난소 역할도 한다.
  • '''일본 기독교단 산야 형제의 집 전도소''': 저렴한 가격에 도시락을 판매하는 "마리야 식당"을 운영한다.
  • '''신의 사랑의 선교자회 산야의 집 (산야 수도원)''': 수도원을 중심으로 봉사 활동을 전개한다.
  • '''산야 밤 순찰의 모임''':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는 봉사 단체이다.

  • '''NPO 및 시민 단체'''
  • '''인정 NPO 법인 키보의 이에''': 기독교불교 신자들이 참여하여 재택 호스피스 케어 지원형 집합 주택 "키보의 이에" 등을 운영한다.
  • '''NPO 법인 방문 간호 스테이션 코스모스''': 산야와 고토부키초 지역에서 방문 간호, 건강 상담, 재택 간호 지원 사업을 하며, 쉼터 "이코이노마"와 일상생활 지원 주거 시설 "코스모스 하우스 오하나"를 운영한다.
  • '''호시노이에''': 취사 지원 및 생활 상담 등을 제공하는 시민 단체로, 기독교인 참여자가 많다.
  • '''인정 NPO 법인 산유회''': 행정과 협력하여 노숙인 및 생활 곤궁자를 대상으로 무료 진료, 생활 상담 및 지원, 취사 지원, 아웃리치(현장 활동) 등을 제공한다.
  • '''NPO 법인 자립 지원 센터 후루사토의 회''': 행정과 협력하여 산야 지역을 중심으로 도쿄도 내 여러 곳에서 사회 복지 사업 숙박소 및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며 취사 지원도 한다. 이 단체는 과거 산야 통일 노동 조합의 흐름을 잇는 자원봉사 단체에서 NPO 법인으로 발전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산야 쟁의단'''

산야 쟁의단(山谷争議団|산야 소기단일본어)은 1981년에 결성된 산야 지역의 대표적인 일용직 노동자 조직이다. "악질 업자 추방 현장 투쟁 위원회"(현투위)를 전신으로 하며, "당하면 갚아줘라"라는 표어를 내걸고 활동한다. 본부는 다이토구 니혼즈쓰미의 산야 노동자 복지 회관에 있다.

설립 이후, 일용직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악덕 인력 중개업자, 폭력단(야쿠자), 그리고 우익 단체 등에 맞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해왔다. 특히 일본 국수회(과거 명칭, 현재는 야마구치구미 산하 국수회) 계열의 가나마치 일가(현 오치아이 가나마치 연합 산하)와 같은 폭력단 세력과의 격렬한 충돌을 여러 차례 겪었다. 주요 관련 인물로는 초대 회장 사에구사 아키오, 야마오카 쿄이치, 후나모토 슈지, 난조 나오코, 이소에 요이치 등이 있다.

1995년 10월, 혁노협 계열 활동가인 스즈키 갸가 갑자기 "신생 산야 쟁의단"을 자칭하며 기존 쟁의단 멤버들의 제명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다른 혁노협계 활동가들과 함께 산야 노동자 복지 회관을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해 말 월동 투쟁 기간 중, 기존 산야 쟁의단 멤버들이 회관 탈환을 위해 돌입하였고, 이후 현재까지 산야 쟁의단 측이 회관을 확보하고 있다. 한편, 스즈키 측은 '도쿄·산야 일용 노동 조합'(산니치로)이라는 별도의 조직을 결성하여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현재에도 산야 쟁의단은 조호쿠 복지 센터 앞에서, 산니치로는 타마히메 공원에서 각각 월동 투쟁 시 밥차를 운영하는 등 두 단체 간의 대립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 산야 쟁의단은 전국 일용 노동 조합 협의회(일용 전협), 산야 노동자 복지 회관 활동 위원회, 산야 월동 투쟁을 지원하는 유지의 회 등과 연대하여 활동하고 있다.

'''기타 시설'''

  • '''타마히메 공원''': 지역 주민들과 노숙인들이 이용하는 휴식 공간으로, 공중 화장실 등의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산니치로(도쿄·산야 일용 노동 조합)가 월동 투쟁 시 밥차를 운영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 '''눈물 다리 교차로''': 다이토구아라카와구의 경계에 위치하며 산야 지역의 중심부 역할을 한다. 과거 에도 시대 경계 지역이었던 역사를 간직한 상징적인 장소이다.

5. 교통

산야 지역으로 접근할 수 있는 주요 교통수단은 다음과 같다.

'''철도'''



'''버스'''

  • 도영 버스
  • * 상46, 동42을: '기요카와 2초메' 정류장
  • * 쿠사64: '니혼즈츠미' 정류장
  • * 사토22: '나미다바시' 정류장
  • 타이토구 순환 버스 메구린
  • * 키타 메구린: (7)하시바 노인 복지관 서(산업 연수 센터), (8)하시바 1초메, (9)기요카와 1초메 정류장
  • * 구루리 메구린: (9)기요카와 1초메, (10)기요카와 청소차고, (11)하시바 2초메, (12)하시바 2초메 아파트 앞, (13)하시바 1초메 정류장

6. 산야를 배경으로 한 작품

1969년, 포크 가수 오카바야시 노부야스는 일용 노동자의 고된 삶과 슬픔을 담은 노래 『'''산야 블루스'''』를 발표하여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다카모리 아사오(카지와라 잇키)가 글을 쓰고 치바 테츠야가 그린 유명 만화 『내일의 죠』(1968~1973, 고단샤) 역시 산야 지역의 눈물 다리를 주요 무대 중 하나로 삼았다. 2011년 실사 영화 개봉을 계기로 지역의 이로하 상점가는 이를 활용한 마을 만들기 사업과 팬들을 위한 성지 순례 코스를 개발했으며[16], 둑길에는 주인공 야부키 죠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3].

1984년1986년에는 산야 지역에서 암약하는 폭력 조직(가네마치 일가, 긴류구미라고도 함)과 이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산야(야마) - 당하면 되갚아준다』를 제작하던 영화 감독 두 명이 해당 폭력 조직(일본 국수회)의 조직원들에 의해 연이어 암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산야 지역 노동 운동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외에도 산야를 배경으로 하거나 언급하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니시무라 쿄타로, 『일그러진 아침』 (1963년)
  • 미시마 유키오, 『음악』 (1965년)
  • 카자마 잇키, 『지도 없는 거리』 (하야카와 미스터리 월드, 1992년)
  • 쿠스미 마사유키 원작, 타니구치 지로 그림, 『고독한 미식가』 제1화 (후소샤, 1994년)
  • 오다 시노부, 『산야로의 회랑 사진가·난조 나오코의 기억 1979-1988』 (아나키즘지 편집위원회, 2012년)
  • 1980년대 산야의 일용직 노동자, 노동 운동, 축제, 경찰과의 충돌 등 생생한 현장을 기록한 사진가 난조 나오코의 삶과 작업을 다룬다.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노동자와 활동가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으나, 1988년 아프가니스탄 취재 중 지뢰 사고로 향년 33세에 사망했다.
  • 아리마 카오루
  • 『꿈꾸는 레시피 게스트하우스 잊지 않소』 (카도카와 하루키 사무소, 2014년)
  • 『수프의 속삭임 게스트하우스 잊지 않소』 (카도카와 하루키 사무소, 2015년)

참조

[1] 서적 pg. 96 1991
[2] 웹사이트 山谷 http://dictionary.go[...] 2024-05-01
[3] 뉴스 [ぶらりぶらり]山谷:マンション林立 「ドヤ街」今は昔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24-04-23
[4] 웹사이트 "「ドヤ街」でカナダ人が考える、「社会の隅っこ」にいる人々への支援 - 衆議院議員総選挙(衆院選):朝日新聞デジタル" https://digital.asah[...] 朝日新聞 2024-10-26
[5] 문서 日雇労働者の生活相談、生活援護、職業紹介を行う東京都の[[外郭団体]]([[東京都監理団体]])。
[6] 웹사이트 東京都山谷対策総合事業計画(令和2年度〜令和4年度) https://www.fukushih[...] 東京都 2020-07-16
[7] 웹사이트 3 山谷地域の状況 http://homepage33.la[...] 城北労働・福祉センター 2020-07-16
[8] 문서 1966年の住居表示の実施により、正式地名としての吉原は消滅。現在は台東区[[千束]]の一部である。
[9] 뉴스 外国人旅行者⇔元日雇い労働者/山谷が分かる交流カフェ/偏見・誤解防ぎ街の魅力発信 http://www.tokyo-np.[...] 東京新聞 2018-05-19
[10] 서적 現代世相風俗史年表:1945-2008 河出書房新社 2009-03
[11] 뉴스 都庁の玄関のガラス割り逮捕 山谷地区の労務者3人 朝日新聞 1970-12-16
[12] 뉴스 団交で労働者に生活保護 136人スピード支給 朝日新聞 1974-01-06
[13] 뉴스 区が強行態度獲る 朝日新聞 1974-01-10
[14] 뉴스 立版の警官殺される 夜の山谷 いきなり包丁で 朝日新聞 1979-06-10
[15] 뉴스 「山谷地区」解説 http://www.tokyo-np.[...] 東京新聞 2018-05-19
[16] 뉴스 あしたのジョーで街おこし 立つんだ!台東・山谷の商店街 http://www.47news.jp[...] 東京新聞 201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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